권근 등이 1402년 작성한 것으로 알려진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가 아프리카 대륙의 온전한 모습을 최초로 표현한 세계지도라고 인정될 정도로 범세계적 안목이 탁월하였던 우리 민족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나라 근해역에 대한 단순 해도작성의 차원을 넘어서는 해양학적 조사를 프랑스 사람이 1787년경에 처음 시작하게 되었으며, 근해역 식물플랑크톤의 수문학적 연구는 1913년 일본인 소유 회사가 "동경-제주근해-상해 정점 조사"를 수행한데서 비롯된 것으로 추정된다. 이는 식물플랑크톤 해양학의 산실인 유럽에서 1889년 최초로 이루어진 대양역 식물플랑크톤의 수문학적 연구에 비해 25년의 후의 일이었다. 1915년 황해 전역 조사를 시작한 이후, 1921년부터 동해 전역을 대상으로 하는 80개 정점의 플랑크톤 시료 채취 등 수문학적 관점의 연구가 본격적으로 시도되었다. 특히, 1932년에는 부산에서 시작하여 사할린섬 남단에 이르는 동해 전체의 78개 정점에 대하여 수층별로 물리, 화학, 생물 해양학적 동시조사를 실시하여, 본격적인 식물플랑크톤 수문학적 연구를 수행하였다. 1932년 5-9월에는 별도의 해양조사를 통해, 한국 남해안과 동해의 서부해역을 망라하는 총 120여개 정점에서 해류조사를 실시하면서 플랑크톤 분포조사를 병행함으로써, 해류와 플랑크톤 분포 간의 상관성을 분석하고 도시하였다. 이런 규모의 조사 연구는 점차 확대 심화되어 1933-1934년에는 동해에서 명태자원 추정을 위한 기초 생태계 조사의 일부분으로 해양플랑크톤의 수문학적 조사를 실시하였다. 이러한 조사 연구의 열기는 1943년까지 조금도 변함이 없었으며, 1945년 조사된 자료를 정리한 보고서를 일본 동경에서 1967년에 발행하기까지 하였다. 1950년 이후 70여년이 지난 지금은 이제까지 축적된 모든 해양관측 및 생물수문학적 정보와 자료를 보다 세심하게 분석하고 종합하여 미래의 새로운 여건에 대비할 필요가 있는 전환기적 시점인 것 같다. 이와 더불어 서지학적 정보의 측면에서는, 전문학회가 중심이 되어 관련 전문분야에 대한 서지 및 서지역사 기록을 체계적으로 정리하고 매 30여년마다 갱신해 나가는 일은 매우 중요하다.
권근 등이 1402년 작성한 것으로 알려진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가 아프리카 대륙의 온전한 모습을 최초로 표현한 세계지도라고 인정될 정도로 범세계적 안목이 탁월하였던 우리 민족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나라 근해역에 대한 단순 해도작성의 차원을 넘어서는 해양학적 조사를 프랑스 사람이 1787년경에 처음 시작하게 되었으며, 근해역 식물플랑크톤의 수문학적 연구는 1913년 일본인 소유 회사가 "동경-제주근해-상해 정점 조사"를 수행한데서 비롯된 것으로 추정된다. 이는 식물플랑크톤 해양학의 산실인 유럽에서 1889년 최초로 이루어진 대양역 식물플랑크톤의 수문학적 연구에 비해 25년의 후의 일이었다. 1915년 황해 전역 조사를 시작한 이후, 1921년부터 동해 전역을 대상으로 하는 80개 정점의 플랑크톤 시료 채취 등 수문학적 관점의 연구가 본격적으로 시도되었다. 특히, 1932년에는 부산에서 시작하여 사할린섬 남단에 이르는 동해 전체의 78개 정점에 대하여 수층별로 물리, 화학, 생물 해양학적 동시조사를 실시하여, 본격적인 식물플랑크톤 수문학적 연구를 수행하였다. 1932년 5-9월에는 별도의 해양조사를 통해, 한국 남해안과 동해의 서부해역을 망라하는 총 120여개 정점에서 해류조사를 실시하면서 플랑크톤 분포조사를 병행함으로써, 해류와 플랑크톤 분포 간의 상관성을 분석하고 도시하였다. 이런 규모의 조사 연구는 점차 확대 심화되어 1933-1934년에는 동해에서 명태자원 추정을 위한 기초 생태계 조사의 일부분으로 해양플랑크톤의 수문학적 조사를 실시하였다. 이러한 조사 연구의 열기는 1943년까지 조금도 변함이 없었으며, 1945년 조사된 자료를 정리한 보고서를 일본 동경에서 1967년에 발행하기까지 하였다. 1950년 이후 70여년이 지난 지금은 이제까지 축적된 모든 해양관측 및 생물수문학적 정보와 자료를 보다 세심하게 분석하고 종합하여 미래의 새로운 여건에 대비할 필요가 있는 전환기적 시점인 것 같다. 이와 더불어 서지학적 정보의 측면에서는, 전문학회가 중심이 되어 관련 전문분야에 대한 서지 및 서지역사 기록을 체계적으로 정리하고 매 30여년마다 갱신해 나가는 일은 매우 중요하다.
From the cosmopolitan superiority of the as the first world map completed in 1402 with surprisingly detailed images and contents on the Africa Continent it is reasonable to think that the Koreans in early fifteen century were already with highly up-to-date perspectives on the universe and world his...
From the cosmopolitan superiority of the as the first world map completed in 1402 with surprisingly detailed images and contents on the Africa Continent it is reasonable to think that the Koreans in early fifteen century were already with highly up-to-date perspectives on the universe and world history and cultures. However, some 490 year later the first phytohydrographic plankton investigation in the neritic seas of Korea was performed by a Japanese company with sampling points covering from Tokyo Bay through Jeju neritic waters to Shanghai estuary, which was in turn preceded by the first oceanographic investigation other than the simple mapping Koreans seas by using two French sailboats. The first phytohydrographic plankton investigation in Korean seas were behind the world first oceanic plankton exploration, the German Plankton Expedition, by 25 years. Starting from the oceanographic investigation including phytohydrographic samplings in the whole Yellow Sea in 1915 the full-scale phytohydrographic plankton studies were tried in Korean seas which is well represented by the 1921 oceanographic investigation on the whole East Sea with 80 sampling stations. In 1932 two separate oceanographic investigations followed, one in the East Sea where 78 stations from Busan to southern Sakhalin Island were simultaneously visited by 50 research vessels for the physical, chemical, and biological oceanographic studies, and the other one in southern coast and western East Sea of Korea where ocean current observation as well as plankton sampling were made in 120 stations to understand the relationship between the ocean current and plankton distribution in the region. In 1933-1934 more intensified investigations on phytohydrography were carried out particularly in the East Sea as an integral part of the basic marine ecosystem studies for the Myeong-Tae (Alaska Pollock) resources estimation. Scientists' attitude for the marine investigation and research activities seemed to be almost unchanging even to the year 1943, which could be reflected by the fact that publication of the results from the investigations performed in 1945 were finally done in 1967 at Tokyo. Some 70 years later from the mid-twenty century we might be standing on the turning-point of "need to be prepared" for the new era of changing paradigm by reviewing, archiving, and analyzing the prior information big data from the previous ocean observation and biohydrographic investigations. At the same time each professional societies for the above mentioned sciences might trigger a continuous project to reorganize and update the records on related bibliography and its history every 30 years.
From the cosmopolitan superiority of the as the first world map completed in 1402 with surprisingly detailed images and contents on the Africa Continent it is reasonable to think that the Koreans in early fifteen century were already with highly up-to-date perspectives on the universe and world history and cultures. However, some 490 year later the first phytohydrographic plankton investigation in the neritic seas of Korea was performed by a Japanese company with sampling points covering from Tokyo Bay through Jeju neritic waters to Shanghai estuary, which was in turn preceded by the first oceanographic investigation other than the simple mapping Koreans seas by using two French sailboats. The first phytohydrographic plankton investigation in Korean seas were behind the world first oceanic plankton exploration, the German Plankton Expedition, by 25 years. Starting from the oceanographic investigation including phytohydrographic samplings in the whole Yellow Sea in 1915 the full-scale phytohydrographic plankton studies were tried in Korean seas which is well represented by the 1921 oceanographic investigation on the whole East Sea with 80 sampling stations. In 1932 two separate oceanographic investigations followed, one in the East Sea where 78 stations from Busan to southern Sakhalin Island were simultaneously visited by 50 research vessels for the physical, chemical, and biological oceanographic studies, and the other one in southern coast and western East Sea of Korea where ocean current observation as well as plankton sampling were made in 120 stations to understand the relationship between the ocean current and plankton distribution in the region. In 1933-1934 more intensified investigations on phytohydrography were carried out particularly in the East Sea as an integral part of the basic marine ecosystem studies for the Myeong-Tae (Alaska Pollock) resources estimation. Scientists' attitude for the marine investigation and research activities seemed to be almost unchanging even to the year 1943, which could be reflected by the fact that publication of the results from the investigations performed in 1945 were finally done in 1967 at Tokyo. Some 70 years later from the mid-twenty century we might be standing on the turning-point of "need to be prepared" for the new era of changing paradigm by reviewing, archiving, and analyzing the prior information big data from the previous ocean observation and biohydrographic investigations. At the same time each professional societies for the above mentioned sciences might trigger a continuous project to reorganize and update the records on related bibliography and its history every 30 yea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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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 정의
본 논문에서는 지난 천여년 규모의 시각에서 볼 때, 비교적 최근에 해당하는 70-120년 전에 우리 해역에서 이루어진 식물수문학적 플랑크톤 연구 역사를 되짚어, 세계 대양을 하나의 지구수권으로 통합하여 탐구하려는 현재와 미래 연구의 세계 정세에서 우리의 나아갈 바를 숙고해 보는 한 방편으로 삼고자 하였다. 이는 과거 100여 년 전후에 이루어진 우리해역에 대한 식물수문학적 플랑크톤 연구가 한반도 주변해역 전체를 대상으로 하였으며, 이때의 해양조사 수준 역시 구미의 세계적 첨단 성을 그 비교대상으로 했다는 점 등에서(김과 이, 2017; 승, 2019), 해양연구 영역에서조차 우리 스스로 남북분단의 비극을 극복하지 못한 지난 70년간의 한계 상황과 크게 비교되기 때문이다.
제안 방법
1933년의 플랑크톤 수문학적 연구에서는 6-7월의 결과 도면(要報, 제8호의 24면 정점도, 31 및 35면의 플랑크톤 수문 학적 구역도 등)과 9-10월의 결과 도면(要報, 제8호, 89면의 플랑크톤 수문학적 구역도 등)에 각각 동해남부 및 서부 해역을 9개로, 동해서부 및 황해동부 해역을 11개로 수문학적 구역으로 세분하여 나타내고 특징종의 구성을 소구역별로 구분하여 설명하였다. 동계인 2-3월 및 11-12월에는(山田, 1938d) 동해 서부해역에서 각각 명태 알-유생(표층-저층)-플랑크톤 광역 분포(要報, 제8호, 13면 다음의 제1도-제8도의 평면분포도) 및 원산만 중심의 명태 산란장 추적을 위한 알 광역 분포(要報, 제8보, 115면의 정점도 및 118면의 명태 알 농도 분포도 등) 등을 수온, 염분 등 환경요인과 함께 조사하였다. 이는 우리나라 동해의 주요 수산자원이었던 명태의 생활사 초기 개체군들의 플랑크톤 수문학적 연구로 실용적 차원에 한층 더 접근하는 단계에 해당한다(Fig.
1932년 7-9월 동해 서부의 플랑크톤 조사에서는 한국 남해 및 동해서부 전역에 설정된 117개의 정점 (海洋調査要報 제7호의 29면; 山田, 1936)에서 플랑크톤 조사에만 근거하여 울릉도와 동해안 수역의 난류와 한류의 방향을 도시하는(7보의 67면) 등 한층 발전된 플랑크톤 수문학적 수준을 나타내었다. 또한 山田은 1933년에도 2-3월(海洋調査 要報 제8호, 11-13면; 山田, 1938a), 6-7월(제8호, 30-37면; 山田, 1938b) 및 9-10월(제8호, 88-90면; 山田, 1938c)에 부유생물 조사․연구를 수행하였다. 이러한 플랑크톤 분포의 수문학적 응용은 일본수산학회지에 보고된 ‘대한해협 해역의 난류성 플랑크톤 분포와 해황’에서도 시도되어, 비교적 좁은 해역인 대한해협 수역을 4 종류의 플랑크톤-특성 소구역으로 구분하고, 각 소구역을 대표하는 우점종을 도표화하기에 이르렀다(山田, 1936).
1934년의 동계인 2-3월(海洋調査要報 9호, 10-34면)과 12월 (要報 9호, 136-159면)에 동해의 원산을 중심으로 하는 Korean Gulf(‘朝鮮海灣’) 인근 해역에서 명태의 산란장 조사를 겸한 해양관측이 실시되었다(朝鮮總督府水産試驗場, 1942a). 전년도 조사와 마찬가지로(Fig. 4) 명태 알 분포도를 2-3월 (要報 제9호의 A제1도 및 A제3도 참조)과 12월(要報 제9호의 G도 참조)에 대하여 작성하여 연속 2년 동안의 명태 산란장의 초기생활사 개체군을 수문학적 관점에서 분석할 수 있게 되었다. 특히, 2월 조사에서는 해수의 수온, 염분, 산소포화도, 무기영양염 농도(인산염, 질산염) 등의 유생생태와 관련된 환경요인을 표층과 100 m 수심에서 측정․분석하여 지도상의 평면도를 작성하였다(要報, 제9호 30면 다음의 A제2도, 참조).
대상 데이터
1915년 3월에는 황해 전역을 대상으로 실시된 해양조사에서(丸川久俊, 1918), 22개 정점(표층-30미터 구간)의 식물플랑크톤 및 동물플랑크톤 시료를 분석하였다((丸川久俊, 1918)의 별첨자료인 식물 및 동물플랑크톤 정량분석 결과표 참조). 또한 연안성 종이 풍부하나 외양성 종도 있었으며, 등염분선 및 등수온선과 부유생물의 고밀도 분포대가 관련이 있다는 식물수문학적 해석을 제시하였다(丸川久俊, 1918; Fig.
근해역을 포함한 우리나라 해역에서 처음으로 수행된 식물플랑크톤의 수문학적 연구는 1913년 11월부터 1914년 3월까지 日本漁業株式会社에서 시작한 “동경-제주근해-상해 정점 조사”(農商務省水産局, 1915)에서 비롯된 것으로 추정된다. 이 회사는 水産講習所 소속의 범선인 北水丸을 이용한 해양조사를 통해 동경만에서 상해의 양자강 하구에 이르는 왕복 항로의 총 106개의 정점에서 플랑크톤 시료채취를 실시하였다. 식물플랑크톤 가운데는 규조류인 Coscinodiscus 5종을 비롯한 총 43종, 와편모류인 Ceratium 6종을 비롯한 총 11종, 남조류 1종 및 규질편모류 1종 등을 정점간의 출현빈도 차이로써 기록하였다(農商務省水産局, 1915).
성능/효과
이러한 플랑크톤 분포의 수문학적 응용은 일본수산학회지에 보고된 ‘대한해협 해역의 난류성 플랑크톤 분포와 해황’에서도 시도되어, 비교적 좁은 해역인 대한해협 수역을 4 종류의 플랑크톤-특성 소구역으로 구분하고, 각 소구역을 대표하는 우점종을 도표화하기에 이르렀다(山田, 1936). 결과가 海洋調査要報 제8호에 실린 1933년의 플랑크톤 조사에서는 플랑크톤 수문학적 연구(6-7월의 동해 서부 및 9-10월의 황해 동부와 동해 서부)와 명태 초기생활사 개체군의 분포 중심의 수문학적 연구(동계에 속하는 2-3월 및 11-12월) 등 한층 더 고도화, 실용화한 단계로 진화한 수준을 나타내었다. 1933년의 플랑크톤 수문학적 연구에서는 6-7월의 결과 도면(要報, 제8호의 24면 정점도, 31 및 35면의 플랑크톤 수문 학적 구역도 등)과 9-10월의 결과 도면(要報, 제8호, 89면의 플랑크톤 수문학적 구역도 등)에 각각 동해남부 및 서부 해역을 9개로, 동해서부 및 황해동부 해역을 11개로 수문학적 구역으로 세분하여 나타내고 특징종의 구성을 소구역별로 구분하여 설명하였다.
첫 번째 예로, 1931년 1월부터 6월까지 조사한 결과를 보고한 海洋調査要報 제 48보(水産試驗場, 1931)의 215-233면에는 대만, 대한민국, 일본의 근해를 포괄하는 해역에 설정된 73개의 정선관측 라인(要報 48보의 ‘도판 1. 해양관측위치 일람도’ 참조; 각 라인 별로 수 개에서 십여 개씩의 관측정점이 포함됨)의 주요 정점별로 5대 식물플랑크톤 분류군 및 15대 동물플랑크톤 분류군 각각의 정량분석 결과가 수록되었는데, 한국 근해정점의 분석결과도 포함되어 있다(要報 48보의 218-219면).
후속연구
이러한 일관된 플랑크톤 조사와 동일한 형식의 결과 발표(海洋調査要報 제 60보, 206-264면 참조)는 1937년까지(海洋 調査要報 제 60보; 水産試驗場, 1937) 거의 매년 지속되었다. 이러한 플랑크톤 정량분석 결과를 함께 수록된 해양물리-화학적 자료 분석 결과와 연계하여 해석할 경우, 플랑크톤 수문학적 분석이 충분히 가능한 수준의 기초 자료가 될 것이다.
질의응답
핵심어
질문
논문에서 추출한 답변
Plankton은 무엇인가?
식물수문학적 조사를 기반으로 한 식물플랑크톤 생태학의 태동은 아마도 독일의 Victor Hensen이 1883-1886년 기간에 독일의 Kiel 연안 조사와 1885년 덴마크의 Romsoe 정점에서 영국의 St Kilda 군도 외해역 정점까지 왕복으로 항해하면서 채집된 플랑크톤 시료를 정량분석법으로 연구한 보고서(Hensen, 1887)에서 그 시초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그는 이 보고서에서 수중에 떠있는 모든 것을 의미하는 “Plankton”이란 용어를 처음 사용하여, Johannes Müller가 그 이전에 쓰던 용어인 “Auftrieb”를 대체하였다(Mills, 1989). 그는 독일의 기선인 National호를 이용하여 1889년 7월 중순부터 11월 초순까지 북대서양 전체를 “X”자로 가로질러 시료채집과 관측을 수행하였던(Hensen, 1892) “Plankton Expedition” 사업을 주도하였고, 나중에는 플랑크톤을 바다의 생생한 피(“dies Blut des Meeres”; Hensen, 1911)라고 부르면서 플랑크톤의 연구와 생태적 중요성 탐구에 매진하였다.
한국의 해역연구에서 1930년대의 특징은 무엇인가?
1930년대는 20세기 전반을 통틀어 우리나라 해역에 대한 해양학적 조사와 관측 활동이 가장 왕성했던 시기에 해당한다. 첫 번째 예로, 1931년 1월부터 6월까지 조사한 결과를 보고한 海洋調査要報 제 48보(水産試驗場, 1931)의 215-233면에는 대만, 대한민국, 일본의 근해를 포괄하는 해역에 설정된 73개의 정선관측 라인(要報 48보의 ‘도판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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