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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TIS 바로가기韓國古代史硏究 = The Journal of Korean Ancient History, v.54, 2009년, pp.261 - 299
정동준
이 글에서는 佐平制의 발전과 官司의 증설, 檐魯制의 실시와 將軍 중심의 군제 개편에 대하여 검토하여 22부사체제의 성립과정과 그 기반을 파악해 보았다. 정리하면 아래와 같다.
武寧王代(501~523)부터 7세기 초반까지 존재한 5명의 좌평은 특정한 직무없이 국가대사를 결정하는 會議體의 構成員이었다. 이러한 좌평들의 회의체는 상좌평의 등장 이후에 정원이 3인이었다가 5인으로 늘어난 것이었다. 그것은 泗沘時代의 政事巖會議에서 구체적인 모습을 잘 볼 수 있다. 22部司의 성립과정은 단계적으로 몇 개씩 설치된 것으로 파악되었다. 그 중 外官 10部는 대체로 阿莘王~蓋鹵王代(455~475)에 설치되었다. 內官 12部는 東城王代에 등장하는 내두에서 점차 분화된 5부와 武寧王代 이후 새로 설치된 7부로 구분할 수 있었다. 이러한 관사의 신설과 분화는 정사암회의가 장악하고 있었던 外官 중심의 행정권을 왕권에 귀속시키려는 시도였다. 한편, 武寧王代부터 博士制가 확대되어, 관등제 ․ 관사제의 정비에 맞추어 왕권에 협조적인 관인들을 양성하는 시스템으로서 기능하였다.
武寧王代에는 전지역적인 戶口 把握이 시도된 것으로 판단되었다. 武寧王代의 지방통치체제는 檐魯制였다고 상정되는데, 이 시기에 처음 행해졌다고 파악되었다. 檐魯制는 聖王代(523~554)의 方-郡-城制가 시행되는 기반을 마련해준 제도라는 데에 그 의미가 있었다. 武寧王代 이후의 將軍은 평상시에도 존재하는 것은 물론, 複數여서 출정시에 1인을 중심으로 指揮體系가 확립되었다. 장군의 상설화는 징병제로 충원되는 중앙군의 특정 부대에 배속되어 그것을 지휘하면서 예하에 軍官 組織을 갖추었다는 의미였다. 중국왕조의 사례를 참고하면, 領軍이 나타난 이후 백제의 병사 충원방식은 중앙군은 초기적인 형태의 징병제, 시위군은 모병제였다고 파악되었다.
백제의 정치제도 발전과정을 시기 구분해 보면, 溫祚王(B.C.18~A.D.28)~契王代(344~346)의 成立期(1~4세기), 近肖古王(346~375)~東城王代(479~501)의 發展期(4~5세기), 武寧王~法王代(599~600)의 完成期(6세기), 武王(600~641)~義慈王代(641~660)의 再編期(7세기)로 정리할 수 있다. 이 중 完成期는 관직ㆍ관사제로서의 22部司, 16官等制, 將軍 중심의 중앙군과 方領 중심의 지방군, 지방통치제도로서의 5方制 등과 內官 중심의 정치운영이라는 백제의 정치제도적 특징이 완비되는 시기로서 주목된다.
武寧王代는 이러한 완성기의 시작으로서, 제도적 완성을 보여주는 여러 현상들이 불완전하게나마 나타나고 있다는 점에서 의미가 큰 시기이다. 국내체제상 백제의 최전성기로 알려진 聖王代의 번영은 武寧王代 여러 개혁의 기반 위에서 가능하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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