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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은사지 삼층석탑 창건 과정과 意匠計劃에 대한 연구
The Plan of Gameunsa and the Design of the Three-story Stone Pagodas

美術史學硏究 = Korean journal of art history, no.253, 2007년, pp.5 - 30  

한정호

초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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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은사가 창건되던 시기는 삼국통일을 통해 한반도를 장악한 신라가 고구려와 백제의 遺民들을 흡수ㆍ통합하며 專制王權을 강화해 나가던 시기로, 새로운 국가체제를 정비하고 통일국가의 위상을 표방하기 위한 신라 王室主導의 조영활동이 활발하게 전개되던 때이다. 당시에 펼쳐졌던 조영활동의 특징으로는 服屬地域에서 유입된 遺民들의 참여로 인해 이전 시대에 보이지 않던 새로운 양식과 기술의 출현을 지목할 수 있다.

당시 신라에 새롭게 등장하는 석조기술 가운데 문무왕 3년(663)에 건립된 長倉址에서 처음으로 출현하는 嵌石은 이미 백제 미륵사지 석탑에서 선례를 보이고 있어 당시 신라의 조영활동에 百濟遺民들이 깊이 관여했음을 보여주고 있다. 따라서 百濟의 건축에서 유래된 嵌石이 신라에 유입되는 과정과 비교해 볼 때 신라 典型石塔의 始原이자 완성을 구현한 감은사지 삼층석탑은 신라의 삼국통일을 계기로 진행된 백제 건축과 신라 건축 요소의 결합을 통해 완성되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그리고 새로운 양식의 석탑이 백제 멸망 후 20여 년이 경과한 후에 비로소 감은사에 건립되는 배경은 海風이 심한 海邊이라는 감은사의 氣象學的 立地條件으로 인해 木塔보다 내구성이 강한 석탑이 적합했기 때문인 것으로 추정된다.

신라 사찰조영에서 堂塔건립의 선후관계는 문헌자료를 검토한 결과 탑보다 금당이 먼저 건립되는 것으로 확인된다. 감은사 역시 석탑 내에서 발견된 건축부재와 문헌자료에 비추어 볼 때 탑에 앞서 금당이 먼저 건립된 것으로 볼 수 있다.

감은사지의 조사와 관련된 여러 보고서에 수록된 각종 측정치와 실측도면을 통해 감은사지 석탑의 의장계획을 분석한 결과 감은사지 석탑 지대석의 폭(650㎝)은 감은사 前庭 동서 길이 (6,500㎝)의 10분의 1의 규모로 설정되었음이 복원되었다. 또한 복원된 석탑의 전체 높이 (1.300㎝)는 바로 지대석의 두 배와 일치하며, 상륜부는 석탑 전체 높이의 4분의 1의 높이로 계획되었음이 밝혀졌다.

이러한 비례는 이후에 건립되는 8세기 신라 전형양식의 삼층석탑에서도 대부분 적용되는 것으로 추정된다. 그리고 감은사지 석탑의 수평체감은 석탑 지대석의 폭650㎝를 약 31㎝씩 21등분으로 수직 분할한 선에 의해 각 部材의 폭이 결정되는 것으로 복원되었으며, 이러한 規則은 석탑의 外部로 드러나 있는 部材뿐만 아니라 석탑의 핵심공간이라 할 수 있는 內部의 刹柱孔과 舍利孔의 空間규모에 이르기까지 치밀하게 계획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끝으로 사찰 전체평면과 감은사지 석탑의 규모를 비교한 결과 감은사지 석탑은 주변을 두르고 있는 각 회랑 基壇의 內側 지대석 끝에서 각각 석탑 전체의 높이만큼 떨어진 지점에 석탑의 중심을 배치하고 있다. 따라서 익랑이나 회랑으로 석탑을 직각으로 눕힐 경우 刹柱의 끝은 각 회랑의 內側 基壇 지대석의 끝선과 정확하게 일치하게 된다. 이러한 의장은 황룡사 구층탑에서도 확인된 바 있어 삼국시대 단탑식 가람의 조영원리가 통일신라시대 쌍탑식 가람에 어떻게 변용되었는가를 보여주고 있을 뿐만 아니라 현재 발굴조사가 진행중인 四天王寺址 목탑의 복원에도 중요한 단서를 제공할 것으로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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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ameunsa was founded at the time when Silla, having achieved the unification of the three kingdoms, made vigorous efforts to establish the absolute royalty by winning the mind of the former Goguryeo and Baekje peoples and thus actively engaged in the construction work to demonstrate the prestige of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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