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록 ▼

소통(疏通)의 소(疏)는 친소(親疎)나 소원(疏遠) 등에서 그러하듯이 거리를 뜻한다. 이 거리를 초월해 서로 통하는 것이 소통의 문자적 의미인 셈이다. 하이데거에 의하면 인간은 세계내부적으로 만나게 되는 존재자와 배려하며 친숙하게 왕래한다는 의미로 세계 안에 존재한다 . 결국 세계-내-존재로서의 인간은 타자와 소통하는 존재이다. 소통하는 존재자로서의 인간의 존재양식을 하이데거는 거리없앰 (Ent-fernung)이라 부른다. 그런데 그가 말하는 거리없앰이란 물리적 거리의 말소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친근해짐, 친밀함을 의미한다. 전자

소통(疏通)의 소(疏)는 친소(親疎)나 소원(疏遠) 등에서 그러하듯이 거리를 뜻한다. 이 거리를 초월해 서로 통하는 것이 소통의 문자적 의미인 셈이다. 하이데거에 의하면 인간은 세계내부적으로 만나게 되는 존재자와 배려하며 친숙하게 왕래한다는 의미로 세계 안에 존재한다 . 결국 세계-내-존재로서의 인간은 타자와 소통하는 존재이다. 소통하는 존재자로서의 인간의 존재양식을 하이데거는 거리없앰 (Ent-fernung)이라 부른다. 그런데 그가 말하는 거리없앰이란 물리적 거리의 말소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친근해짐, 친밀함을 의미한다. 전자가 아닌 후자로부터 비로소 진정한 소통이 성립된다. 하이데거가 “현존재에 친밀성으로 향한 본성적 경향이 있다”고 말할 때 그는 인간이 소통을 지향하는 존재임을 천명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뉴미디어는 소통에 어떻게 개입하는가? 소통을 방해하는 공간상의 간격과 시간상의 지체는 무선전화, 인터넷, 영상통화, 화상회의 등 신기술의 대두로 말미암아 빠르게 소멸의 길로 치닫고 있는 추세이다. 이미 세계가 미디어와 교통의 비약적 발전에 힘입어 지구촌으로 좁혀졌고, 한 걸음 더 나아가 소통에 개재되는 시공간의 물리적 거리가 완전한 0으로 압축되는 날이 꿈이 아닌 현실로 우리 눈앞에 다가온 것이다.
그러나 이로 말미암아 사람들은 소통이 지향하는 친밀도를 제고했는가? 뉴미디어에 의지해 온갖 타자와 더 많이 소통할수록 현대인의 고립감과 소외감은 역으로 더욱 깊어만 간다. 뉴미디어에 의한 소통이 친밀성의 도모와 큰 상관이 없기 때문이다. 인터넷에 대한 카네기-멜론 대학의 연구에 따르면 “인터넷을 많이 이용하면 할수록 가정에서 가족 구성원과의 소통이 줄어들고 사회와의 만남의 장도 축소되는 반면, 우울증과 고독감은 증대되는 것으로 나타났다”. 세상의 모든 타자가 외형적으로는 서로 가까이에 있으면서도 진정한 의미에서 서로 엮이지 못하는 이 역설적 관계 속에서 친밀함을 지향하는 인간의 본래적 소통에의 욕구는 더 큰 좌절을 경험하게 되는 것이다.
뉴미디어가 지향하는 시공간의 모든 물리적 거리의 제거는 인간으로부터 시공간에 펼쳐지는 이 세계를 제거한다. 세계는 시공간의 거리에 놓여 있기 때문이다. 그로 말미암아 세계-내-존재로서의 인간 자신도 제거된다. 하이데거에 의하면 인간은 터있음, 즉 현존재이기 때문이다. 터있음과 현존재는 하이데거의 용어 다자인의 다 를 각각 인간이 (Dasein) (da) 놓여 있는 공간(터)과 시간(현)으로 해석하고 있다. 하이데거가 인간을 다자인으로 규정했을 때 그는 인간을 구체적인 장소와 시제의 문맥과 떼어서 이해하려 하지 않았다. 하이데거의 언어에서 장소와 시간으로서의 다(da)는 인간(Dasein)의 일부로서 인간에 새겨져 있다. 인간은 자리(터)잡는 존재자이며 현재에 터하여 과거와 미래의 양방향으로 뻗치는 존재자인 것이다. 요컨대 터나 현재는 인간을 매개로 해서만 제 의미를 얻게 된다. 반면 뉴미디어가 지향하는 거리의 제거는 인간에 새겨진 이 다(da)의 말소를 초래한다.
다자인의 다(da)가 함축하는 또 하나의 의미는 인간의 신체성이다. 인간이 구체적 장소와 시간에 놓여 있다 함은 무엇보다 인간의 신체가 그렇다는 말이다. 이를 인간의 신체가 지니는 국소성(局所性; locality)이라 부르기로 하자. 우리의 정신은 전 세계를 무대로 생각할 수 있지만(think globally), 우리의 신체는 각자 주어진 국소적 영역에서 활동할 수밖에 없다(act locally). 사유의 국소화와는 달리 신체의 세계화는 형용모순이다. 우리는 이러한 정신과 신체의 비대칭적 토대 하에 사유하고 행위하는 존재자이다. 다자인의 다(da)를 말소하는 뉴미디어는 인간의 토대인 신체성을 말소한 상태에서 새로운 소통의 장으로 우리를 이끈다. 시공간의 물리적 거리가 제거되는 시대의 인간은 더 이상 세계-내-존재로서의 신체적 인간이 아니라 세계 없는 인간, 혹은 신체 없는 인간으로서 사이버 공간 속의 연장(延長) 없는 점으로 수축된다.
뉴미디어는 사태를 그 사태가 놓여 있는 고유한 장소와 시간으로부터 탈문맥화시켜 뉴미디어가 존재하는 어느 곳, 어느 시간에서나 재현될 수 있는, 무한히 복제 가능한 동영상으로 변모시킨다. 사태가 동영상으로 변모하는 것은 물질이 이미지로 바뀌는 물리적 변화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사태 자체에는 초점이 없다. 사태를 경험하는 인간이 자신의 초점으로 사태를 경험하는 것이다. 반면 사태에 대한 동영상에는 그 자체에 초점이 내재해 있다. 동영상의 시청자는 이 주어진 초점대로 동영상을 보게끔 윤곽 잡혀 있다. 그 초점은 동영상 제작자의 것일 수도 있겠지만 또한 제작에 동원된 기술의 것이기도 하다. 제작자는 동영상 기술의 성격을 숙지하고 그 성격내에서 기술의 코드에 맞게 사태가 동영상으로 탈은폐하도록 조종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사태가 동영상으로 탈은폐할 때 사태는 이미 탈은폐를 이끄는 기술의 개입에 의해 기술의 관점에서 탈은폐하는 것이다. 영상물의 시대에 우리는 더 이상 사태를 사태 자체로서가 아니라 영상물로서, 기술이 윤곽 잡아준 관점에서 경험한다. 사태는, 아니 전 세계는 오로지 영상물의 자료로서 영상의 주문 요청을 기다리며 대기하고 있을 뿐이다. 이것들은 영상화되어 실시간으로 세계의 방방곡곡 가가호호로 송출될 운명인 것이다.
실제 사태를 대체하는 영상물은 이제 사태의 대리를 넘어서 사태의 척도로까지 군림하게 된다. 경기 중에 발생하는 사건은 심판의 판정을 넘어서 영상 판독에 의해서 전모와 진실이 밝혀지곤 한다. 적지 않은 사건이 영상화를 애초부터 염두에 두고 연출되어 일어나며, 영상화되는 사건만이 뉴스와 정보로서의 권위와 가치와 실재성을 인정받고 그렇지 못한 사건은 믿을 수 없는 소문에 불과하거나 아예 없던 것으로 간주된다. 이러한 견해의 옹호자들은 현실이란 어차피 언제나 언어나 여타의 상징과 기호에 의해 매개되므로 코드화 되지 않은 현실 자체란 결코 존재한 적이 없다고 주장한다. 모든 현실은 ‘가상적으로’ 지각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이 간과하는 것은 현실이 과거와는 달리 이제 우리의 관점에서 코드화되는 것이 아니라 개재되는 뉴미디어의 관점에서 코드화된다는 점이다. 뉴미디어의 시대에는 인간이 아닌 뉴미디어가 현실을 구성하고 해석하는 주체인 것이다. 인간은 다만 뉴미디어가 자신의 코드로 구성해낸 영상을 2차적으로 언어나 여타의 상징과 기호를 매개로 시청할 뿐이다. 뉴미디어는 더 이상 매체가 아니라 주체로서 인간을 대신해 자신의 관점에서 의미를 생산하고 유통한다. 인간은 뉴미디어가 생산하고 유통하는 의미의 수신자요 구매자일 뿐이다. 우리 시대에 칸트가 살아 있다면 그는 「순수 이성 비판」이 아니라 「순수 미디어 비판」을 저술할 것이다.

목차 Contents

• 표지...1
• 제출문...3
• 목차...4
• 요약문...6
• 제1장 서론...16
• 제1절 모더니즘...16
• 제2절 포스트모더니즘...18
• 제3절 매체에게 소통을 묻다...21
• 제2장 기술에 대한 성찰...25
• 제1절 기술...25
• 제2절 물음...28
• 제3절 본질...30
• 제4절 도구주의...32
• 제5절 원인...34
• 제6절 포이에시스...37
• 제7절 테크네...39
• 제8절 도발적 요청...41
• 제9절 몰아세움...43
• 제10절 은폐와 탈은폐...44
• 제11절 표상...46
• 제12절 정보...48
• 제13절 오해와 이해...50
• 제3장 뉴미디어의 철학...54
• 제1절 패러다임 전환...55
• 1. 파이드로스...56
• 2. 체험의 현장...57
• 3. 문자의 생애...59
• 4. 빛과 그늘...62
• 제2절 차이의 네 빛깔...64
• 1. 디지털과 아날로그...64
• 2. 당김과 뻗침...69
• 3. 공시성과 통시성...73
• 제3절 소통의 인칭과 매체...74
• 1. 소통과 매체...74
• 2. Ma Solitude...81
• 제4장 허무주의...87
• 참 고 문 헌...9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