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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주시대를 연 최초의 인공위성, 스푸트니크 호

2004-02-20

1957년 10월 4일, 농구공만한 크기의 인공위성이 소련에서 발사되었다. 이 위성은 900km 상공에서 1 시간 36분마다 지구를 한 바퀴씩 돌면서 계속해서 ‘삑~삑~삑’하는 전파음을 지구로 송신했다. 스푸트니크는 러시아어로 단순히 ‘위성’ 혹은 동반자라는 뜻이다. 그러나 인간이 만든 물체가 최초로 지구 주위의 궤도를 돌게 된 이 날 이후로 세계는 예전과 같을 수 없게 되었다. 바야흐로 인류가 ‘우주시대’로 진입했던 것이다.




우주를 향한 경쟁



이 사건에 전세계가 놀랐지만 미국은 특히 더했다. 2차 대전 중에 독일이나 일본도 감히 뚫지 못했던 미국의 하늘을 이제 스푸트니크가 하루에 열다섯번씩 통과하고 있었다. 미국의 대통령 아이젠하워는 “그저 작은 공 하나가 공중에 띄워졌을 뿐”이라며 애써 무시하려고 했다. 그러나 소련의 수상 후르시초프는 자본주의에 대한 공산주의의 우월성을 증명했다고 큰소리쳤다. 가전제품조차 제대로 못 만들던 소련이 우주개발의 선두에 올라서는 동안 과학기술의 최첨단국가임을 자부하던 미국은 대체 무얼 하고 있었던 것일까.
1945년, 2차 대전이 끝나자마자 미국은 V-2 로켓의 개발자인 베르너 폰 브라운을 포함한 118명의 독일 로켓 전문가들을 소련보다 한 발 앞서 미국으로 빼돌리는데 성공했다. 그러나 탄도 미사일 프로그램 개발에 흥미가 없어진 미국정부는 가장 값진 전리품으로 간주되었던 이들을 그냥 방치하게 된다. 그러다가 1950년에 이르러 소련의 로켓 개발에 대한 첩보를 입수한 미국은 부랴부랴 앨라배마 주 헌츠빌로 이들 독일 기술자들을 집결시켜 로켓연구에 들어갔다. 그로부터 불과 몇 주 후 터진 한국전은 미국 최초의 탄도 미사일인 레드스톤의 개발을 촉진하는 계기가 되었고 폰 브라운이 그 책임을 맡게 되었다.
폰 브라운이 미국에 있었다면 소련에는 세르게이 코롤레프가 있었다. 그는 스탈린이 장거리 미사일 개발 목적으로 1946년에 설립한 88번 과학연구소(NII-88)에 소속되어 있었는데 그의 담당 부서는 나중에 OKB-1이라는 이름으로 독립되어 소련군의 탄도미사일 개발에 주력하게 된다. 그는 1940년대부터 우주탐사용 인공위성 개발의 꿈을 꾸었지만, 1954년 소련 최초의 대륙간 탄도 미사일(ICBM)인 R-7을 개발하는 임무를 맡게 될 때까지는 소련지도부를 설득시키지 못했다. 인공위성 개발연구의 허락을 받은 후에도 소련정부의 지원은 미적지근했다. 그러나 세계 과학계에서 1957년 7월에서 1958년 12월에 걸친 태양활동 증가예상 기간을 고층대기와 외계우주 연구를 위한 국제 지구물리학 연도(IGY, International Geophysical Year)로 지정하면서 상황이 급변하기 시작했다. 1955년 7월에 미국정부가 IGY 참여의 한 방안으로서 IGY 기간 중에 과학연구용 소형 인공위성을 발사하겠다고 발표했던 것이다. 미국에 선수를 빼앗길 수 없다고 생각한 코롤레프는 R-7을 위성발사에 사용할 수 있게 해달라고 관계자들을 설득했다. 마침내 다음 달인 8월에 소련도 IGY에 참여하는 위성발사계획을 발표하게 되지만 소련의 기술수준을 얕잡아본 미국은 이를 귓전으로 흘려버렸다.
그 이전인 1954년에 미국에서는 폰 브라운이 IGY 참여를 위해 레드스톤 로켓을 사용하는 육해공군 합작의 소형위성 발사 계획안을 내놓았었다. 그러나 아이젠하워는 소련 상공을 통과해야할 위성이 군사적 냄새를 풍기게 되면 후르시초프를 자극하게 되지 않을까 염려했다. 그런데다 세계 최초의 인공위성 발사의 영광이 독일출신인 폰 브라운에게 돌아가는 것을 아이젠하워가 원치 않는다는 소문도 떠돌았다. 결국 1955년 7월에 미국정부는 IGY 과학위성 발사를 위해 ‘뱅가드’라는 새로운 프로젝트를 시작한다고 발표했던 것이다.
코롤레프의 위성은 원래 이온층, 지구자기장, 태양의 영향 등을 연구하는 1.5톤급 과학실험실을 목표로 하는 야심 찬 계획이었다. 그러나 하청업체들의 비협조로 1956년 중반부터 일정에 차질이 빚어지자 코롤레프는 가볍고 단순한 소형위성 개발로 방향을 급선회한다. 그러나 1957년에 들어와 세 번의 R-7 발사가 모두 실패하다가 8월에 행한 4번째 발사가 6500km 떨어진 캄차카 반도에 있는 목표물을 명중시키는데 성공했다. 그리고 마침내 레드스톤보다 4배나 강력한 추진력을 가진 R-7은 10월 4일에 스푸트니크 1호를 지구 주위를 도는 궤도에 진입시켰던 것이다.
스푸트니크 1호 발사 한 달 만에 소련은 다시 1호보다 6배나 무거운 2호의 발사에 성공한다. 이번에는 ‘라이카’라는 이름의 살아있는 개가 탑승해서 자신의 심장박동 소리를 지구로 전송했다. 더욱 궁지에 몰린 미국은 다음 달인 12월에 전세계가 지켜보는 가운데 예정보다 몇 달을 앞당겨 첫 뱅가드를 발사를 시도했지만 ‘선구자’라는 이름이 아쉽게도 발사대에서 폭발하고 말았다. 결국 아이젠하워는 폰 브라운의 주노 1호에 익스플로러 1호를 탑재시켜 발사하도록 했다. 1958년 1월 31일 성공적으로 발사된 이 위성은 미국이 그토록 고대하던 우주시대의 진입을 성취시켰을 뿐 아니라 지구 자기장에 붙잡힌 고에너지 입자의 띠인 반알렌대를 발견하는 우주시대 최초의 과학적 성과를 올리기도 했다.




야누스의 두 얼굴, 우주개발


우주를 향하는 인간의 열정은 본능일 것이다. 폰 브라운은 우주정복을 인간의 가장 위대한 모험이라고 불렀다. 그러나 우주개발이 항상 긍정적인 반응을 얻는 것만은 아니다. 스푸트니크의 발사와 그 이후의 우주개발 역사는 하이테크 무기의 발전과 핵무장 옹호세력의 입지 강화로 이어지기도 했다. 최초의 위성발사를 둘러싼 경쟁에서도 미국과 소련 양쪽 다 표면적으로는 과학연구의 기치를 내걸었다. 그러나 그 이면에는 냉전시대의 두 슈퍼파워 간의 치열한 라이벌 의식 뿐 아니라 인공위성의 군사적 이용에 대한 지대한 관심이 깔려있었다. 미국의 익스플로러 1호를 실었던 레드스톤 로켓 뿐 아니라, 스푸트니크를 궤도에 올려놓은 R-7 로켓도 소련 수소폭탄의 아버지로 불리는 안드레이 사하로프가 개발하고 있던 수소폭탄 탄두를 실을 수 있는 대륙간 탄도 미사일로 개발되었던 것이다.
스푸트니크의 성공은 강력한 추진력의 로켓엔진, 경량의 미사일 구조, 정밀 유도시스템, 안정적인 자동항법, 대규모 발사방법 등의 기술적 문제들을 소련이 해결했음을 시사했다. 이는 인류의 우주탐사 가능성에 한 걸음 다가서게 하는 성취일 수도 있었지만, 세계 어느 곳이든 ‘선택된 목표물을 명중’시킬 수 있는 대륙간 탄도 미사일의 실용화가 눈앞에 닥쳤다는 경고일 수도 있었다. 소련과 미국에 뒤이어 1970년에는 일본과 중국이 위성발사에 성공했고 1998년에는 북한이 시도하다가 실패했다. 2005년에는 우리나라도 위성발사의 대열에 뛰어들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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