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위논문]조선시대 당악정재와 향악정재에 관한 연구 : 17·18세기 궁중 정재를 중심으로 (A) Study on Dangak and Hyangak court dance of Chosun dynasty : centered on the royal court dance of the 17th and 18th centuries원문보기
17세기의 시작은 16세기 후반 선조 25년(1592)에 시작된 임진왜란과 선조 30년(1597) 정유재란 등 전후 7년 동안의 대전란과 인조 5년(1627)에 정묘호란이, 인조 14년(1636)에는 엄청난 병자호란이 일어나 치욕의 역사를 기록하면서 조선의 국토는 황폐화되었고, 많은 전적(典籍)이 소멸되었다. 사실상 임진왜란에서부터 병자호란에 이르기까지 약 반세기 동안 역사적으로 가장 어려운 상황 속에서 국난의 상처를 치유해야만 했다. 이러한 ...
17세기의 시작은 16세기 후반 선조 25년(1592)에 시작된 임진왜란과 선조 30년(1597) 정유재란 등 전후 7년 동안의 대전란과 인조 5년(1627)에 정묘호란이, 인조 14년(1636)에는 엄청난 병자호란이 일어나 치욕의 역사를 기록하면서 조선의 국토는 황폐화되었고, 많은 전적(典籍)이 소멸되었다. 사실상 임진왜란에서부터 병자호란에 이르기까지 약 반세기 동안 역사적으로 가장 어려운 상황 속에서 국난의 상처를 치유해야만 했다. 이러한 사회적 배경 속에서 조선의 악정과 악무의 재정립 과정에 있어서 정조 때의 다산 정약용의 악론(樂論)을 바탕으로 조선의 악무 정책이 당시의 철학적 지배 구조였던 유교의 예악 사상에 의해 이루어졌음을 실증적으로 접근하였다. 또한 숙종 8년(1682)에 악기조성청을 설치하여 영녕전과 종묘의 제향에 쓸 방향(方響)을 만들고, 숙종 36년(1710)에는 편종 등을 제조하고, 무동을 새로 선발하거나 관현맹인의 부활 등을 통해 하나씩 자리를 잡아가고 영조 때에는 전란으로 인해 사라져 가던 전통 무악의 부활에 온 힘을 기울였으며, 영조의 뒤를 이은 정조도 악정(樂政)에 힘을 기울이는 등의 악정의 실질적 정립 과정을 문헌을 통해 구체적으로 언급하였다. 그리고 보다 심층적 접근 방법으로는 조선 초와 17-18세기에 연행된 궁중정재의 절차를 비교해 어떠한 변화의 양태를 보이는가를 비교하고, 17-18세기에 조선을 다스린 왕들이 궁중에서 행했던 각종 연향의 종류와 그 목적, 연행 빈도수를 통해 악정의 발전과 정체의 실체를 살펴보았다. 이에 얻은 결론으로는 세조 10년 이후 종묘제향악으로 채택된 정대업, 보태평이 연향과 제례에 같이 쓰이다가 선조대 이후인 17세기 초부터는 제향악으로 굳어져 연향에는 쓰이지 않게 되었고, 세종 조에 창제된 여민락이 선조대 이후에 즐겨 연주되었음을 엿볼 수 있었고, 조선 전기의 연향에는 주로 당악정재가 많이 쓰였으나, 숙종 때에 이르면 향악정재의 비중이 좀더 많아지는 양상을 띤다. 그리고, 연향의 연행에 있어서도 조선 초에는 예악(禮樂)에 따라 아주 특별한 사정이 아니면 중지하지 않았으나, 16세기말에 접어들면서부터 성리학적 재이관(災異觀)에 따라 천재지변이 있을 때는 임금의 부덕이라 하여 중지하는 경우가 상당수 보인다. 또한, 연향의 용어에 있어서도 초기에 진풍정이란 용어의 사용에서 중기 후기로 넘어오면서 진연, 진찬, 진작 등으로 변천되는 것을 볼 수 있다. 이것이 효종 조에 이르면 진연이 진풍정보다는 작은 규모의 연향으로 다시 진찬과 진작이 진연보다 좀더 작은 규모의 연향을 뜻하면서 연향의 규모 순으로 진풍정·진연·진찬·진작으로 자리를 잡게 되었다. 더불어, 이 때부터 매년 1월 초에 행했던 회례연은 명종 14년 1월 1일을 끝으로 조선왕조실록에는 찾아 볼 수가 없다. 물론 인조 4년에 2번의 회례연이 있기는 했으나 년초에 행한 회례연이 아닌 중국 사신을 위한 연중에 행한 회례연이었고, 또 한가지는 반세기에 걸친 변란 이후에 양로연과 사신연이 거의 자취를 감추었다는 것이다. 이렇게 17-18세기의 궁중무용의 특징을 몇 가지로 요약해 살펴본 바로 이 시기가 궁중무용의 시련기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17세기의 시작은 16세기 후반 선조 25년(1592)에 시작된 임진왜란과 선조 30년(1597) 정유재란 등 전후 7년 동안의 대전란과 인조 5년(1627)에 정묘호란이, 인조 14년(1636)에는 엄청난 병자호란이 일어나 치욕의 역사를 기록하면서 조선의 국토는 황폐화되었고, 많은 전적(典籍)이 소멸되었다. 사실상 임진왜란에서부터 병자호란에 이르기까지 약 반세기 동안 역사적으로 가장 어려운 상황 속에서 국난의 상처를 치유해야만 했다. 이러한 사회적 배경 속에서 조선의 악정과 악무의 재정립 과정에 있어서 정조 때의 다산 정약용의 악론(樂論)을 바탕으로 조선의 악무 정책이 당시의 철학적 지배 구조였던 유교의 예악 사상에 의해 이루어졌음을 실증적으로 접근하였다. 또한 숙종 8년(1682)에 악기조성청을 설치하여 영녕전과 종묘의 제향에 쓸 방향(方響)을 만들고, 숙종 36년(1710)에는 편종 등을 제조하고, 무동을 새로 선발하거나 관현맹인의 부활 등을 통해 하나씩 자리를 잡아가고 영조 때에는 전란으로 인해 사라져 가던 전통 무악의 부활에 온 힘을 기울였으며, 영조의 뒤를 이은 정조도 악정(樂政)에 힘을 기울이는 등의 악정의 실질적 정립 과정을 문헌을 통해 구체적으로 언급하였다. 그리고 보다 심층적 접근 방법으로는 조선 초와 17-18세기에 연행된 궁중정재의 절차를 비교해 어떠한 변화의 양태를 보이는가를 비교하고, 17-18세기에 조선을 다스린 왕들이 궁중에서 행했던 각종 연향의 종류와 그 목적, 연행 빈도수를 통해 악정의 발전과 정체의 실체를 살펴보았다. 이에 얻은 결론으로는 세조 10년 이후 종묘제향악으로 채택된 정대업, 보태평이 연향과 제례에 같이 쓰이다가 선조대 이후인 17세기 초부터는 제향악으로 굳어져 연향에는 쓰이지 않게 되었고, 세종 조에 창제된 여민락이 선조대 이후에 즐겨 연주되었음을 엿볼 수 있었고, 조선 전기의 연향에는 주로 당악정재가 많이 쓰였으나, 숙종 때에 이르면 향악정재의 비중이 좀더 많아지는 양상을 띤다. 그리고, 연향의 연행에 있어서도 조선 초에는 예악(禮樂)에 따라 아주 특별한 사정이 아니면 중지하지 않았으나, 16세기말에 접어들면서부터 성리학적 재이관(災異觀)에 따라 천재지변이 있을 때는 임금의 부덕이라 하여 중지하는 경우가 상당수 보인다. 또한, 연향의 용어에 있어서도 초기에 진풍정이란 용어의 사용에서 중기 후기로 넘어오면서 진연, 진찬, 진작 등으로 변천되는 것을 볼 수 있다. 이것이 효종 조에 이르면 진연이 진풍정보다는 작은 규모의 연향으로 다시 진찬과 진작이 진연보다 좀더 작은 규모의 연향을 뜻하면서 연향의 규모 순으로 진풍정·진연·진찬·진작으로 자리를 잡게 되었다. 더불어, 이 때부터 매년 1월 초에 행했던 회례연은 명종 14년 1월 1일을 끝으로 조선왕조실록에는 찾아 볼 수가 없다. 물론 인조 4년에 2번의 회례연이 있기는 했으나 년초에 행한 회례연이 아닌 중국 사신을 위한 연중에 행한 회례연이었고, 또 한가지는 반세기에 걸친 변란 이후에 양로연과 사신연이 거의 자취를 감추었다는 것이다. 이렇게 17-18세기의 궁중무용의 특징을 몇 가지로 요약해 살펴본 바로 이 시기가 궁중무용의 시련기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In its early age of the 17th century, Koreas territory was devastated and scores of classical books were lost by such a fierce disturbances of war for seven years before and after the war, as the Japanese Invasion of Korea in 1592 occurred in the year of King Sunjos 25 years rein, the late 16th cent...
In its early age of the 17th century, Koreas territory was devastated and scores of classical books were lost by such a fierce disturbances of war for seven years before and after the war, as the Japanese Invasion of Korea in 1592 occurred in the year of King Sunjos 25 years rein, the late 16th century, the Hideyoshis Reinvasion of Korea in 1597, the year of King Sunjos 30 years rein and the cutthroat Chinese Invasion of Korea in the 14th year of King Injos rein, 1636. Actually, from the Japanese Invasion of Korea in 1592 through the Chinese Invasion of Korea in 1636, Koreans had to recover from the national tragedies under the most troubled conditions in Koreas history for nearly half century. Under such a social background, this study made a practical approach to the fact that in its process of rebuilding up the policy on music and dance in the Chosun dynasty, it was carried out under the Confucian philosophy on manners and music, the leading philosophy of that time, based on the musical theory of Dasan Jeong Yak-Yong in the age of King Jeong-Jo. Apart from it, in eight year of King Sukjong, 1682, an institute to administer the traditional Korean instruments was constructed and there, Banghang was produced to be used for the ritual ceremonies of Yongnyung-jeon and Chongmyo and in the Sukjongs 36th rein, 1710, Pyunjong was manufactured and a dancing child was newly selected and the blind playing the musical instruments started to play again. In the King Yongjo period, they were fully dedicated to recover the traditional Korean music and dance, disappearing due to the wars. King Jeongjo, following the King Yongjo, stressed the musical policy and cited particularly its real arrangement process in the documents. As a more in-depth approach, this study will analyze in what way the change was made between the early period of Chosun dynasty and the process of royal court dance taken in the 17th and 18th century. Furthermore, this study demonstrated development of the musical policy and its real pattern of the court dance through various kinds of Yeonhang, its aims and its practice frequencies in the palace conducted by the Kings of Chosun dynasty in 17th and 18th century Its result is that both of Jeongdaeup and Botaepyung, adopted as the ritual music of Chongmyo after ten years of King Sejos ruling, was used for Yeonhang and the ritual ceremony and after King Sunjos rein, the 17th century, it was consolidated as a ritual music and it was not used for Yeonhang any more. Yeominrak, created in King Sejong and Sejos periods, was popularly played after King Sunjos period and as for Yeonhang in the early Chosun dynasty, Dangak court dance was mostly played and in King Sukjongs period, Hangak court dance increased to be played. In addition to it, playing of Yeonhang was not stopped under the music and dance policy in the early period of Chosun dynasty, except only for abnormal situations. However, starting from the late 16th century, there were quite many times for Yeonhang to be stopped to be played in the case of a natural disaster on the grounds that it was resulted from the Kings lack of virtue and it was based on the natural calamity theory of metaphysics. In terms of Yeonhangs terminology, from its early age through the middle and late period, the term of Jinpungjeong changed to Jinyeon, Jinchan and Jinjak. In the period of King Hyojong, Jinyeon meant a smaller size of Yeonhang than Jinpungjeong and Jinchan and Jinjak meant a smaller size of Jinyeon. And Yeonhangs scale has become in the order of Jinpungjeong, Jinyeon, Jinchan and Jinjak. Along with it, from this time, Hoiryeyeon, conducted every early January, ended in Jan. 1 of King Myeongjongs period and it could not be find any more in The True Record of the Chosun Dynasty. There were twice practices of Hoiryeyeon in the 4th year of King Injos period yet, it was an event for the Chinese envoys, not for an event conducted in the early of the year and Yangroyeon and Sashinyeon nearly disappeared after a half-century long war disturbances. In this regard, this study took a look at the features of royal dances in the 17th and 18th century in summary and the period can be seen as a difficult age of the royal dances.
In its early age of the 17th century, Koreas territory was devastated and scores of classical books were lost by such a fierce disturbances of war for seven years before and after the war, as the Japanese Invasion of Korea in 1592 occurred in the year of King Sunjos 25 years rein, the late 16th century, the Hideyoshis Reinvasion of Korea in 1597, the year of King Sunjos 30 years rein and the cutthroat Chinese Invasion of Korea in the 14th year of King Injos rein, 1636. Actually, from the Japanese Invasion of Korea in 1592 through the Chinese Invasion of Korea in 1636, Koreans had to recover from the national tragedies under the most troubled conditions in Koreas history for nearly half century. Under such a social background, this study made a practical approach to the fact that in its process of rebuilding up the policy on music and dance in the Chosun dynasty, it was carried out under the Confucian philosophy on manners and music, the leading philosophy of that time, based on the musical theory of Dasan Jeong Yak-Yong in the age of King Jeong-Jo. Apart from it, in eight year of King Sukjong, 1682, an institute to administer the traditional Korean instruments was constructed and there, Banghang was produced to be used for the ritual ceremonies of Yongnyung-jeon and Chongmyo and in the Sukjongs 36th rein, 1710, Pyunjong was manufactured and a dancing child was newly selected and the blind playing the musical instruments started to play again. In the King Yongjo period, they were fully dedicated to recover the traditional Korean music and dance, disappearing due to the wars. King Jeongjo, following the King Yongjo, stressed the musical policy and cited particularly its real arrangement process in the documents. As a more in-depth approach, this study will analyze in what way the change was made between the early period of Chosun dynasty and the process of royal court dance taken in the 17th and 18th century. Furthermore, this study demonstrated development of the musical policy and its real pattern of the court dance through various kinds of Yeonhang, its aims and its practice frequencies in the palace conducted by the Kings of Chosun dynasty in 17th and 18th century Its result is that both of Jeongdaeup and Botaepyung, adopted as the ritual music of Chongmyo after ten years of King Sejos ruling, was used for Yeonhang and the ritual ceremony and after King Sunjos rein, the 17th century, it was consolidated as a ritual music and it was not used for Yeonhang any more. Yeominrak, created in King Sejong and Sejos periods, was popularly played after King Sunjos period and as for Yeonhang in the early Chosun dynasty, Dangak court dance was mostly played and in King Sukjongs period, Hangak court dance increased to be played. In addition to it, playing of Yeonhang was not stopped under the music and dance policy in the early period of Chosun dynasty, except only for abnormal situations. However, starting from the late 16th century, there were quite many times for Yeonhang to be stopped to be played in the case of a natural disaster on the grounds that it was resulted from the Kings lack of virtue and it was based on the natural calamity theory of metaphysics. In terms of Yeonhangs terminology, from its early age through the middle and late period, the term of Jinpungjeong changed to Jinyeon, Jinchan and Jinjak. In the period of King Hyojong, Jinyeon meant a smaller size of Yeonhang than Jinpungjeong and Jinchan and Jinjak meant a smaller size of Jinyeon. And Yeonhangs scale has become in the order of Jinpungjeong, Jinyeon, Jinchan and Jinjak. Along with it, from this time, Hoiryeyeon, conducted every early January, ended in Jan. 1 of King Myeongjongs period and it could not be find any more in The True Record of the Chosun Dynasty. There were twice practices of Hoiryeyeon in the 4th year of King Injos period yet, it was an event for the Chinese envoys, not for an event conducted in the early of the year and Yangroyeon and Sashinyeon nearly disappeared after a half-century long war disturbances. In this regard, this study took a look at the features of royal dances in the 17th and 18th century in summary and the period can be seen as a difficult age of the royal danc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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