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통전적인 죽음 헬라 철학의 영향을 받은 일부 학자들과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죽음 후에 인간의 육체는 썩어 흙으로 돌아가고 인간의 영혼은 영원히 죽지 않고 하나님의 나라에 간다고 이야기한다. 다시 말해서 죽음을 영혼과 육체의 분리 현상이라고 주장하며, 육의 것은 아주 천한 것으로 여기며, 영의 것은 아주 고귀하고, 영원히 멸하지 않는 것으로 간주한다. 그러나 이것은 잘못된 이원론적인 사고라고 우리는 단정을 지으며, 죽음은 영혼과 육체의 분리가 아닌, 즉 영혼불멸이 아닌, 영혼과 육체를 모두 합친 통전적인 인간의 죽음이라 하겠다. 인간은 영혼이며 또한 육체이다. 그러나 그 영혼과 육신은 분리될 수 없는 또 하나의 통일체로서 간주한다. 그러므로 죽음 역시 전 인간(全人間)을 겨냥한다. 죽음이 다만 육체만을 엄습한다고 한다면 마치 감옥에서 석방되듯이 죽음을 통하여 영혼은 육체로부터 빠져 나와 하나님께로 달려가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것은 그렇지 않다. 죽음은 인간 전체, 전인간의 실존을 좌우한다. 죽음은 우리의 모든 것이 죽어야 하는 통전적인 인간의 죽음인 것이다. 2. O. 쿨만의 죽은 자의 부활 기독교적 부활 신앙은 구원을 내포한 거룩한 섭리와 연결되어 있는 것이다. 죄와 사망은 극복되어져야만 한다. 우리는 이것을 할 수 없으나 타자(他者 곧 하나님)은 우리를 위하여 이것을 이루어 주셨다. 하나님께서는 그가 자신을 죽음의 영토 속에 던지시므로―곧 하나님 자신이 죽으시고 죄를 속량하시므로 만이 이 일을 하실 수 있었으며 그리고 죄의 값으로서의 사망은 극복되어지는 것이다. 예수께서 이를 행하셨다 함과 그리고 그는 진실로 온전히 죽으신 후 몸과 영이 다 함께 살으셨다 함을 기독교 신앙은 선포한다. 여기에서 끝날(End-time)에 기대되었던 새로운 창조의 기적을 하나님께서는 완성 하셨던 것이다. 다시 한번 하나님께서는 태초와 똑같은 생명을 창조하셨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바로 여기에서 만이 이 사건은 일어나게 되었다. 성령이 속사람을 사로잡고 있다는 의미에서 만이 아니라 몸의 부활까지도 포함하는 부활(이 일어났다). 이것은 물질의 새 창조, 썩지 않을 물질에의 새로운 창조인 것이다. 이 세상 그 어느 곳에서도 이러한 새로운 영적 물질은 존재하지 않는다. 이 세상 그 어느 곳에서도 영적인 몸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은 다만 그리스도 안에서만 존재할 따름이다. 3. K. 바르트의 죽은 자의 부활 그리스도는 두 번째 아담으로서의 죽은 자의 부활의 시작이다. 그 일의 완성은 그를 믿는 자들도 부활하는 것이고, 이것이 고린도인들이 부인하는 가장 근본적인 사실이다. 이 완성, 모든 죽음의 소멸은 그리스도교의 최고, 최후의 주권 행위이다. 아직은 그 일은 완수되지 않았다. 그때 세력은 다른 궁극 이전의 세력과 싸우고 있으며, 그런 한에 있어서 우리는 저 궁극적인 것을 기다리며 그의 나라에 지금 처하여 있다. 그 일이 완숙될 땐, 하나님의 나라 옆에 있는 그의 특별한 나라는 끝나게 될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이 만물의 주가 되시기 위하여, 하나님께 사실 나라는 받쳐졌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만물의 주가 되심"과 그러므로 모든 죽은 자의 復活이야 말로 고린도인들이 알지 못한 그리스도의 부활의 참 의미요, 기독교 신앙의 의미이다. 4. 한국 교회에 대한 제언 "만약 인간이 완전히 죽음을 맞이한다면 저 천국의 소망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라는 질문을 던지게 된다. 그것은 쉽게 생각할 수 있는 의문이라고 생각한다. 인간이 죽음 이후에 예수 그리스도가 부활한 것처럼 우리 인간도 부활을 맞이할 것이다. 바로 죽은 자의 부활이며, 육체의 부활이다.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이 우리를 위한 죽음과 부활이며, 그의 죽음이 죽음 자체의 죽음이며, 흑암의 권세를 잡은 자 마귀의 정복이며,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다 통일하는 것이며, 만물의 으뜸이 되는 것이라는 점에서 우리는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이 종말론적인 사건이라 규정할 수 있겠다.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은 그리스도 자신의 개인을 위한 죽음과 부활의 역사가 아니라 역사의 마지막에 모든 사람이 당하게 될 그 죽음과 부활의 날을 앞당겨 당하신 것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서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죽음 이후의 부활의 소망을 주신 것이다. 만약 죽은 자가 부활을 한다면 언제 하게 될까? 주님이 재림하실 때에 동시에 죽은 모든 사람이 부활하게 된다는 것이다. 하지만 과연 이것이 가능한 일인가? 이 모두가 터무니없는 생각이 아닐까? 우리는 아직 살아 있지만 우리의 많은 친구들은 이미 죽었다. 어떻게 그들이 나와함께 동시에 하나님 앞으로 나간단 말인가? 우리가 죽어도 다른 사람은 계속 살아남아 있는데 어떻게 그들이 우리와 함께 하나님 앞으로 간단 말인가? 또 우리와 우리 주변 사람들이 죽는다 ...
1. 통전적인 죽음 헬라 철학의 영향을 받은 일부 학자들과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죽음 후에 인간의 육체는 썩어 흙으로 돌아가고 인간의 영혼은 영원히 죽지 않고 하나님의 나라에 간다고 이야기한다. 다시 말해서 죽음을 영혼과 육체의 분리 현상이라고 주장하며, 육의 것은 아주 천한 것으로 여기며, 영의 것은 아주 고귀하고, 영원히 멸하지 않는 것으로 간주한다. 그러나 이것은 잘못된 이원론적인 사고라고 우리는 단정을 지으며, 죽음은 영혼과 육체의 분리가 아닌, 즉 영혼불멸이 아닌, 영혼과 육체를 모두 합친 통전적인 인간의 죽음이라 하겠다. 인간은 영혼이며 또한 육체이다. 그러나 그 영혼과 육신은 분리될 수 없는 또 하나의 통일체로서 간주한다. 그러므로 죽음 역시 전 인간(全人間)을 겨냥한다. 죽음이 다만 육체만을 엄습한다고 한다면 마치 감옥에서 석방되듯이 죽음을 통하여 영혼은 육체로부터 빠져 나와 하나님께로 달려가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것은 그렇지 않다. 죽음은 인간 전체, 전인간의 실존을 좌우한다. 죽음은 우리의 모든 것이 죽어야 하는 통전적인 인간의 죽음인 것이다. 2. O. 쿨만의 죽은 자의 부활 기독교적 부활 신앙은 구원을 내포한 거룩한 섭리와 연결되어 있는 것이다. 죄와 사망은 극복되어져야만 한다. 우리는 이것을 할 수 없으나 타자(他者 곧 하나님)은 우리를 위하여 이것을 이루어 주셨다. 하나님께서는 그가 자신을 죽음의 영토 속에 던지시므로―곧 하나님 자신이 죽으시고 죄를 속량하시므로 만이 이 일을 하실 수 있었으며 그리고 죄의 값으로서의 사망은 극복되어지는 것이다. 예수께서 이를 행하셨다 함과 그리고 그는 진실로 온전히 죽으신 후 몸과 영이 다 함께 살으셨다 함을 기독교 신앙은 선포한다. 여기에서 끝날(End-time)에 기대되었던 새로운 창조의 기적을 하나님께서는 완성 하셨던 것이다. 다시 한번 하나님께서는 태초와 똑같은 생명을 창조하셨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바로 여기에서 만이 이 사건은 일어나게 되었다. 성령이 속사람을 사로잡고 있다는 의미에서 만이 아니라 몸의 부활까지도 포함하는 부활(이 일어났다). 이것은 물질의 새 창조, 썩지 않을 물질에의 새로운 창조인 것이다. 이 세상 그 어느 곳에서도 이러한 새로운 영적 물질은 존재하지 않는다. 이 세상 그 어느 곳에서도 영적인 몸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은 다만 그리스도 안에서만 존재할 따름이다. 3. K. 바르트의 죽은 자의 부활 그리스도는 두 번째 아담으로서의 죽은 자의 부활의 시작이다. 그 일의 완성은 그를 믿는 자들도 부활하는 것이고, 이것이 고린도인들이 부인하는 가장 근본적인 사실이다. 이 완성, 모든 죽음의 소멸은 그리스도교의 최고, 최후의 주권 행위이다. 아직은 그 일은 완수되지 않았다. 그때 세력은 다른 궁극 이전의 세력과 싸우고 있으며, 그런 한에 있어서 우리는 저 궁극적인 것을 기다리며 그의 나라에 지금 처하여 있다. 그 일이 완숙될 땐, 하나님의 나라 옆에 있는 그의 특별한 나라는 끝나게 될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이 만물의 주가 되시기 위하여, 하나님께 사실 나라는 받쳐졌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만물의 주가 되심"과 그러므로 모든 죽은 자의 復活이야 말로 고린도인들이 알지 못한 그리스도의 부활의 참 의미요, 기독교 신앙의 의미이다. 4. 한국 교회에 대한 제언 "만약 인간이 완전히 죽음을 맞이한다면 저 천국의 소망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라는 질문을 던지게 된다. 그것은 쉽게 생각할 수 있는 의문이라고 생각한다. 인간이 죽음 이후에 예수 그리스도가 부활한 것처럼 우리 인간도 부활을 맞이할 것이다. 바로 죽은 자의 부활이며, 육체의 부활이다.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이 우리를 위한 죽음과 부활이며, 그의 죽음이 죽음 자체의 죽음이며, 흑암의 권세를 잡은 자 마귀의 정복이며,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다 통일하는 것이며, 만물의 으뜸이 되는 것이라는 점에서 우리는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이 종말론적인 사건이라 규정할 수 있겠다.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은 그리스도 자신의 개인을 위한 죽음과 부활의 역사가 아니라 역사의 마지막에 모든 사람이 당하게 될 그 죽음과 부활의 날을 앞당겨 당하신 것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서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죽음 이후의 부활의 소망을 주신 것이다. 만약 죽은 자가 부활을 한다면 언제 하게 될까? 주님이 재림하실 때에 동시에 죽은 모든 사람이 부활하게 된다는 것이다. 하지만 과연 이것이 가능한 일인가? 이 모두가 터무니없는 생각이 아닐까? 우리는 아직 살아 있지만 우리의 많은 친구들은 이미 죽었다. 어떻게 그들이 나와함께 동시에 하나님 앞으로 나간단 말인가? 우리가 죽어도 다른 사람은 계속 살아남아 있는데 어떻게 그들이 우리와 함께 하나님 앞으로 간단 말인가? 또 우리와 우리 주변 사람들이 죽는다 해도 세계 역사는 지속된다. 수 천만 년 계속될 것이다. 어떻게 이 모든 역사가, 이 모든 사람이 죽음을 통하여 나와 함께 동시에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단 말인가? 하나님께 현세적 시간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면 모든 사람이 비록 전혀 다른 시간에 죽었다 하더라도 '같은 시간', 즉 영겁의 유일하고도 영원한 '순간'에 하나님을 만나게 될 것이다. 하나님께 더 이상 현세적 시간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우리가 숨을 거두는 순간에 이미 역사는 끝나 버리며, 우리와 하나님의 상봉은 온 인류와 하나님과의 만남의 하나가 될 것이다. 하나님께 현세적 시간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면 우리 죽음은 이미 최후의 심판이 될 것이며, 우리 죽음을 통하여 육신의 부활이 이미 도래할 것이다. 세상의 종말은 이미 우리의 문턱에 다가와 있다. 심판의 시간은 더 이상 멀리 있지 않다. 우리 모두는 마지막 시기에, 종말을 눈앞에 보면서 살고 있다. 우리가 죽는 그 순간이 바로 주님이 재림하는 순간이며, 죽는 그 순간이 재림하기까지 그 시간은 지금 우리가 사고하는 시간의 개념과는 달리 생각해야 한다. 인간이 죽음 그 이후로 인간은 주님을 만날 때까지 우리가 사고하는 시간을 느끼지 못한다. 죽음을 맞이하는 바로 그 순간이 주님이 재림하는 순간이요, 그리스도와의 엄숙하고도 궁극적인 만남이요, 그 분은 우리 앞에 나타나실 것이며, 우리의 가련한 몸을 찬란한 모습으로 변화시켜 주실 것이며, 세상을 심판하시고 또한 영원한 생명을 주실 것이다. 지금 한국 교회 속에는 죽음에 대한 올바른 인식이 되어 있지 않고 있다. 아직도 많은 교회 속에는 죽음을 영혼과 육체의 분리로서 알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사람이 죽으면, 죽는 그 순간에 육체는 흙으로 돌아가고 영혼이 천국에 갔다라고 이야기하고 있다. 영혼불멸의 사고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젠 교회에서 죽음에 대한 잘못된 사고를 벗어 던지고 통전적인 죽음에 대해서 교육이 필요하고 죽은 자의 부활에 관한 교육도 있어야 할 것이다. 그래서 죽음에 대한 올바른 시각을 가지고 종말론적인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인도해야 할 것이다.
1. 통전적인 죽음 헬라 철학의 영향을 받은 일부 학자들과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죽음 후에 인간의 육체는 썩어 흙으로 돌아가고 인간의 영혼은 영원히 죽지 않고 하나님의 나라에 간다고 이야기한다. 다시 말해서 죽음을 영혼과 육체의 분리 현상이라고 주장하며, 육의 것은 아주 천한 것으로 여기며, 영의 것은 아주 고귀하고, 영원히 멸하지 않는 것으로 간주한다. 그러나 이것은 잘못된 이원론적인 사고라고 우리는 단정을 지으며, 죽음은 영혼과 육체의 분리가 아닌, 즉 영혼불멸이 아닌, 영혼과 육체를 모두 합친 통전적인 인간의 죽음이라 하겠다. 인간은 영혼이며 또한 육체이다. 그러나 그 영혼과 육신은 분리될 수 없는 또 하나의 통일체로서 간주한다. 그러므로 죽음 역시 전 인간(全人間)을 겨냥한다. 죽음이 다만 육체만을 엄습한다고 한다면 마치 감옥에서 석방되듯이 죽음을 통하여 영혼은 육체로부터 빠져 나와 하나님께로 달려가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것은 그렇지 않다. 죽음은 인간 전체, 전인간의 실존을 좌우한다. 죽음은 우리의 모든 것이 죽어야 하는 통전적인 인간의 죽음인 것이다. 2. O. 쿨만의 죽은 자의 부활 기독교적 부활 신앙은 구원을 내포한 거룩한 섭리와 연결되어 있는 것이다. 죄와 사망은 극복되어져야만 한다. 우리는 이것을 할 수 없으나 타자(他者 곧 하나님)은 우리를 위하여 이것을 이루어 주셨다. 하나님께서는 그가 자신을 죽음의 영토 속에 던지시므로―곧 하나님 자신이 죽으시고 죄를 속량하시므로 만이 이 일을 하실 수 있었으며 그리고 죄의 값으로서의 사망은 극복되어지는 것이다. 예수께서 이를 행하셨다 함과 그리고 그는 진실로 온전히 죽으신 후 몸과 영이 다 함께 살으셨다 함을 기독교 신앙은 선포한다. 여기에서 끝날(End-time)에 기대되었던 새로운 창조의 기적을 하나님께서는 완성 하셨던 것이다. 다시 한번 하나님께서는 태초와 똑같은 생명을 창조하셨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바로 여기에서 만이 이 사건은 일어나게 되었다. 성령이 속사람을 사로잡고 있다는 의미에서 만이 아니라 몸의 부활까지도 포함하는 부활(이 일어났다). 이것은 물질의 새 창조, 썩지 않을 물질에의 새로운 창조인 것이다. 이 세상 그 어느 곳에서도 이러한 새로운 영적 물질은 존재하지 않는다. 이 세상 그 어느 곳에서도 영적인 몸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은 다만 그리스도 안에서만 존재할 따름이다. 3. K. 바르트의 죽은 자의 부활 그리스도는 두 번째 아담으로서의 죽은 자의 부활의 시작이다. 그 일의 완성은 그를 믿는 자들도 부활하는 것이고, 이것이 고린도인들이 부인하는 가장 근본적인 사실이다. 이 완성, 모든 죽음의 소멸은 그리스도교의 최고, 최후의 주권 행위이다. 아직은 그 일은 완수되지 않았다. 그때 세력은 다른 궁극 이전의 세력과 싸우고 있으며, 그런 한에 있어서 우리는 저 궁극적인 것을 기다리며 그의 나라에 지금 처하여 있다. 그 일이 완숙될 땐, 하나님의 나라 옆에 있는 그의 특별한 나라는 끝나게 될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이 만물의 주가 되시기 위하여, 하나님께 사실 나라는 받쳐졌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만물의 주가 되심"과 그러므로 모든 죽은 자의 復活이야 말로 고린도인들이 알지 못한 그리스도의 부활의 참 의미요, 기독교 신앙의 의미이다. 4. 한국 교회에 대한 제언 "만약 인간이 완전히 죽음을 맞이한다면 저 천국의 소망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라는 질문을 던지게 된다. 그것은 쉽게 생각할 수 있는 의문이라고 생각한다. 인간이 죽음 이후에 예수 그리스도가 부활한 것처럼 우리 인간도 부활을 맞이할 것이다. 바로 죽은 자의 부활이며, 육체의 부활이다.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이 우리를 위한 죽음과 부활이며, 그의 죽음이 죽음 자체의 죽음이며, 흑암의 권세를 잡은 자 마귀의 정복이며,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다 통일하는 것이며, 만물의 으뜸이 되는 것이라는 점에서 우리는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이 종말론적인 사건이라 규정할 수 있겠다.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은 그리스도 자신의 개인을 위한 죽음과 부활의 역사가 아니라 역사의 마지막에 모든 사람이 당하게 될 그 죽음과 부활의 날을 앞당겨 당하신 것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서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죽음 이후의 부활의 소망을 주신 것이다. 만약 죽은 자가 부활을 한다면 언제 하게 될까? 주님이 재림하실 때에 동시에 죽은 모든 사람이 부활하게 된다는 것이다. 하지만 과연 이것이 가능한 일인가? 이 모두가 터무니없는 생각이 아닐까? 우리는 아직 살아 있지만 우리의 많은 친구들은 이미 죽었다. 어떻게 그들이 나와함께 동시에 하나님 앞으로 나간단 말인가? 우리가 죽어도 다른 사람은 계속 살아남아 있는데 어떻게 그들이 우리와 함께 하나님 앞으로 간단 말인가? 또 우리와 우리 주변 사람들이 죽는다 해도 세계 역사는 지속된다. 수 천만 년 계속될 것이다. 어떻게 이 모든 역사가, 이 모든 사람이 죽음을 통하여 나와 함께 동시에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단 말인가? 하나님께 현세적 시간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면 모든 사람이 비록 전혀 다른 시간에 죽었다 하더라도 '같은 시간', 즉 영겁의 유일하고도 영원한 '순간'에 하나님을 만나게 될 것이다. 하나님께 더 이상 현세적 시간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우리가 숨을 거두는 순간에 이미 역사는 끝나 버리며, 우리와 하나님의 상봉은 온 인류와 하나님과의 만남의 하나가 될 것이다. 하나님께 현세적 시간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면 우리 죽음은 이미 최후의 심판이 될 것이며, 우리 죽음을 통하여 육신의 부활이 이미 도래할 것이다. 세상의 종말은 이미 우리의 문턱에 다가와 있다. 심판의 시간은 더 이상 멀리 있지 않다. 우리 모두는 마지막 시기에, 종말을 눈앞에 보면서 살고 있다. 우리가 죽는 그 순간이 바로 주님이 재림하는 순간이며, 죽는 그 순간이 재림하기까지 그 시간은 지금 우리가 사고하는 시간의 개념과는 달리 생각해야 한다. 인간이 죽음 그 이후로 인간은 주님을 만날 때까지 우리가 사고하는 시간을 느끼지 못한다. 죽음을 맞이하는 바로 그 순간이 주님이 재림하는 순간이요, 그리스도와의 엄숙하고도 궁극적인 만남이요, 그 분은 우리 앞에 나타나실 것이며, 우리의 가련한 몸을 찬란한 모습으로 변화시켜 주실 것이며, 세상을 심판하시고 또한 영원한 생명을 주실 것이다. 지금 한국 교회 속에는 죽음에 대한 올바른 인식이 되어 있지 않고 있다. 아직도 많은 교회 속에는 죽음을 영혼과 육체의 분리로서 알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사람이 죽으면, 죽는 그 순간에 육체는 흙으로 돌아가고 영혼이 천국에 갔다라고 이야기하고 있다. 영혼불멸의 사고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젠 교회에서 죽음에 대한 잘못된 사고를 벗어 던지고 통전적인 죽음에 대해서 교육이 필요하고 죽은 자의 부활에 관한 교육도 있어야 할 것이다. 그래서 죽음에 대한 올바른 시각을 가지고 종말론적인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인도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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