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산은 역리4법易理四法과 「설괘說卦」의 물상을 적용하여 역易을 품명稟命의 현실적 필요에서 창작된 실용서로 파악한다. 그가 역 해석과 관련하여 종래의 난독성을 스스로 벗어났다고 판단하는 핵심에는 추이推移, 효변爻變, 호체互體라는 역리와 「설괘」의 물상이 자리하고 있다. 「설괘」는 역 창작자가 해설을 위해 지은 물상의 목록이기 때문에 「설괘」를 이용하지 않고는 역에 접근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다산에 따르면, 우주분화과정에서 상象을 추출해낸 일이나 그것을 이용하여 하늘의 명령을 요청하는 방법을 고안한 것은 복희라는 인물이다. 주역이라는 텍스트는 단지 주나라 때 저술된 문왕과 ...
다산은 역리4법易理四法과 「설괘說卦」의 물상을 적용하여 역易을 품명稟命의 현실적 필요에서 창작된 실용서로 파악한다. 그가 역 해석과 관련하여 종래의 난독성을 스스로 벗어났다고 판단하는 핵심에는 추이推移, 효변爻變, 호체互體라는 역리와 「설괘」의 물상이 자리하고 있다. 「설괘」는 역 창작자가 해설을 위해 지은 물상의 목록이기 때문에 「설괘」를 이용하지 않고는 역에 접근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다산에 따르면, 우주분화과정에서 상象을 추출해낸 일이나 그것을 이용하여 하늘의 명령을 요청하는 방법을 고안한 것은 복희라는 인물이다. 주역이라는 텍스트는 단지 주나라 때 저술된 문왕과 주공의 괘효사를 지칭하는 것이지, 역 자체의 상과 역리가 이때에 발견된 것이 아니다. 따라서 주역은 주나라라는 한정된 공간과 시간에서 의미를 지니게 된다. 그가 말한 “괘효사를 버리고 상을 완미한다.(舍詞玩象)”는 설법은 위와 같은 이유에서 타당한 주장이 된다. 다산은 주역 해석의 목적을 주역 저작당시의 인문세계를 복원하는 데 두었다. 다산은 주례周禮, 의례儀禮, 예기禮記, 시경詩經, 춘추春秋, 국어國語 등의 고대전적이 당시의 문화상을 보여주는 것들로써, 주역의 상징세계에서 그것을 확인할 수 있다고 여겼다. 그러나 다산이 주역의 상징체계 안에서 문왕과 주공 당대의 인문세계를 확인하는 작업이 당대 문화의 복권을 목적으로 하는 것은 아니다. 다산은 자신이 주나라 사람들과는 다른 시대에 살고 있고, 그 시대로 되돌아갈 수 없음을 명확하게 깨닫고 있었다. 다산은 은말주초의 봉건제, 정전법, 형벌제도 등을 오늘날 다시 시행할 수 없듯이 당시의 관습인 복서卜筮도 이미 의미 없는 것이 되었다고 본다. 역의 해석방법에는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으나 다산은 이전 학설들의 모순을 지양하고 종합한 역사적 역할을 담당했다. 그가 「설괘전」의 주석에서 강조하는 것은 물상物象이지만, 그가 말하는 물상의 범주 안에는 이른바 괘덕卦德, 곧 의리역학가들이 말하는 의리義理가 포함되어 있다. 정통역학에서는 우주와 인간이 도道나 리理라는 거대하고 원만한 통일성 안에서 융해되어 논의되었다. 왕필역학에서 무無라는 통일적 실체에로 우주와 인간이 회귀할 수 있었다면, 주자역학에서는 리理라는 보편적 원리에로 포괄될 수 있었다. 그러나 다산역학에서는 원시유학의 상제가 복권되면서 그 최고존재 아래 우주와 인간이 구분되는 천인분리天人分離의 구도가 형성되었다. 따라서 자연학과 인문학의 총체적 진리가 담겨있다고 여겨졌던 역의 면모가 축소될 수밖에 없다. 다산의 구도 속에서 인문학의 모든 기호와 상징은 인간의 영역에 속하는 것이지 자연의 영역이 아니다. 인간의 발명품은 인간의 소유물이듯이 주역도 인류가 발견한 인간만의 기호와 상징의 체계로 이해된다. 따라서 주역은 다분히 불완전하며 한정성을 가질 수밖에 없다. 다산이 주역을 은말주초殷末周初의 한정적 시공간 속 문화 텍스트로 읽으려고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존재한다. 그러나 이것이 주역의 폄하를 목적으로 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주례周禮가 다산의 이상이었던 것과 같이 주역의 상징세계는 그가 그토록 이상시했던 성스런 시대를 적나라하게 반영하고 있기 때문이다. 다산은 주역을 주례가 담겨있는 책이라고 평하였고, 주역의 탐구는 예禮 관련서적들을 읽으면서 진행되었다. 따라서 주역사전은 아마도 태생적으로 예禮와 밀접하게 관련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기타의 예 관련 저술들이 예송禮訟의 문제를 다루거나 예론禮論에 대한 고증이나 변론을 위주로 하는 것과는 달리, 주역사전에 인용되는 예禮는 괘효사의 물상―괘덕과 괘상을 포함하는 포괄적 의미―과 고사故事에 대한 증빙 또는 반증 자료로 제시된다는 점에서 그 성격이 다르다. 따라서 논리적이기보다는 열거적이며, 백과전서적이다. 주역사전에 등장하는 예 관련 내용들은 모두 괘효사의 물상에 대한 사전적 역할을 하며, 괘효사의 배경 설명을 하는 데 필요한 고사故事들이다. 따라서 주역의 괘사와 효사는 통시대성을 지닌 영원불변의 진리로 간주되거나, 우주적 원리를 체體로 삼고 그것의 용用으로서의 인문질서가 통합적으로 일관되어 있는 형이상학적 진리로 간주되지 않는다. 다산이 학문 대부분을 경학經學 탐구에 쏟은 것은 경학이 지닌 인간학을 회복하는 일이었으며, 이른바 원시유학의 도덕정신을 되살리려는 노력이었다. 다산이 주역에서 읽어낸 사실은 역사易詞가 문왕과 주공 당대의 문화 텍스트라는 것이다. 그가 천인성명天人性命의 형이상학적 결합을 부정하고 역사易詞를 텍스트로 읽는 것은 자연학과 인문학의 체용일원體用一元적 결합의 방식으로 주역을 독해하지 않아도 주역에서 구체적이며 실존적인 인문 가치를 읽어낼 수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텍스트로서의 역사易詞에는 그가 지향했던 진정한 유가儒家의 가치, 고대 성인들이 추구했던 인문정신이 고스란히 담겨있다. 일반적 문화현상뿐 아니라 종교적 경건성, 예禮, 인의仁義, 신信, 신독愼獨, 화和, 순천명順天命, 정명正名 등의 인문 가치 및 당대의 자연과학 지식까지도 담겨있다. 역사易詞에 등장하는 일식日蝕이나 월식月蝕, 역법曆法, 본물本物, 동식물動植物 등 자연물과 자연현상에 관련된 텍스트도 인문학 범주에서 파악되는 인문학 지식이지, 형이상학으로서의 자연학 지식이 아니다. 다산은 역에서 인문학으로 덧칠해진 유사 자연학적 색채를 배제하였다. 필자가 사용하는 자연학이라는 개념은 자연과학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인문학의 원칙들이 자연의 원리에 연원한다고 보는 형이상학 관점을 지칭하는 것이다. 이른바 역리4법易理四法은 역의 운용원리이지 역에 내재되어 있는 자연원리가 아니다. 서구과학의 전래 이후 조선의 역학가들 사이에선 서구과학과 주역을 접목하려는 많은 시도들이 있었다. 김석문金錫文, 황윤석黃胤錫, 서명응徐命膺 등이 그 대표주자인 셈인데, 이들의 역학은 서구과학의 주역적 재해석이었다. 그들 모두 성리학적 상수역象數易에 기반하고 있었기 때문에, 선진 자연과학 지식은 성리학적 상수역의 정당성을 반증하는 부수적 역할에 그칠 뿐, 순수 자연과학으로 수용되지 못했다. 그들의 상수역은 소강절과 주희의 선천후천설先天後天說과 하도낙서설河圖洛書說에 기초한다. 이들과 같은 자연학과 인문학의 결합 시도를 반박하면서 다산은 여러 곳에서 양자의 연결고리를 끊었다. 천인성명의 이치를 배제한 것 외에 수학과 역법曆法을 역에서 배제한 것도 그 하나이다. 다산은 역리가 상징철학으로써 기능할 수는 있지만, 과학적 계산의 용도로는 결코 쓰일 수 없다고 보는 것이다. 이처럼 수학이나 역법, 천문학 등의 자연학을 역에서 분리해내면 괘효사가 인문학적 성격을 띤 사례모음이라는 다산의 주장을 이해할 수 있게 된다. 다산이 역 경문의 주석에 앞서 실행한 ‘괄례括例’는 역리에 대한 계열화작업이었으며, ‘역례비석易例比釋’은 괘덕과 괘상을 계열화하는 작업이었다. 이는 괘효사를 하나의 원리적 체계로 읽는 것이 아니라 일종의 용례집, 사례집으로 파악하려는 의도에서 진행된 것이다. 주역에 주례周禮가 담겨있다고 판단하는 다산에게 있어 괘효사 하나하나는 주례가 기술되어 있는 하나의 사건이며 고사故事이다. 이 용례분류에서 주목해야 할 점은 용례의 계열화 내용이 각각의 사詞 중에서 점사占辭에 해당한다는 것이다. 점사는 곧 길흉을 판단하는 내용인데, 길흉이 바로 인사人事의 영역이므로, 결국 인사의 내용을 분류한 것이 된다. 곧 다산은 인문학의 관점에서 역사易詞를 분류하고 있는 것이다. 다산 역상학은 그가 다른 경전 해석에서 그러했듯이 주자적 세계관에 대한 비판이다. 소강절의 수리역을 비판하는 것도 실제적으로는 주자를 과녁으로 삼고 있다. 그것은 인간 도덕문화의 원칙들이 자연의 원리, 우주적 원리에 연원한다는 형이상학적 본체론을 비판하는 작업이기도 하다. 다산이 주역을 상학象學으로 일관되게 해석하는 것이 단순히 고대의 상징체계를 보여주기 위한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오해이다. 고대 원시 역상의 체계를 통해서 전통 성리학적 세계관이 아닌 전혀 다른 세계관으로, 아니 다르다고 하기보다는 유가儒家 본원의 세계관으로, 역학을 재정립하려 한 것이 다산역의 핵심이라 할 수 있다. 주역이 당대 문화의 텍스트라고 할 때, 다산이 주역사전에서 보여준 텍스트 분석의 내용은 바로 당대 문화가 보여주는 인문학, 인문정신인 것이다.
다산은 역리4법易理四法과 「설괘說卦」의 물상을 적용하여 역易을 품명稟命의 현실적 필요에서 창작된 실용서로 파악한다. 그가 역 해석과 관련하여 종래의 난독성을 스스로 벗어났다고 판단하는 핵심에는 추이推移, 효변爻變, 호체互體라는 역리와 「설괘」의 물상이 자리하고 있다. 「설괘」는 역 창작자가 해설을 위해 지은 물상의 목록이기 때문에 「설괘」를 이용하지 않고는 역에 접근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다산에 따르면, 우주분화과정에서 상象을 추출해낸 일이나 그것을 이용하여 하늘의 명령을 요청하는 방법을 고안한 것은 복희라는 인물이다. 주역이라는 텍스트는 단지 주나라 때 저술된 문왕과 주공의 괘효사를 지칭하는 것이지, 역 자체의 상과 역리가 이때에 발견된 것이 아니다. 따라서 주역은 주나라라는 한정된 공간과 시간에서 의미를 지니게 된다. 그가 말한 “괘효사를 버리고 상을 완미한다.(舍詞玩象)”는 설법은 위와 같은 이유에서 타당한 주장이 된다. 다산은 주역 해석의 목적을 주역 저작당시의 인문세계를 복원하는 데 두었다. 다산은 주례周禮, 의례儀禮, 예기禮記, 시경詩經, 춘추春秋, 국어國語 등의 고대전적이 당시의 문화상을 보여주는 것들로써, 주역의 상징세계에서 그것을 확인할 수 있다고 여겼다. 그러나 다산이 주역의 상징체계 안에서 문왕과 주공 당대의 인문세계를 확인하는 작업이 당대 문화의 복권을 목적으로 하는 것은 아니다. 다산은 자신이 주나라 사람들과는 다른 시대에 살고 있고, 그 시대로 되돌아갈 수 없음을 명확하게 깨닫고 있었다. 다산은 은말주초의 봉건제, 정전법, 형벌제도 등을 오늘날 다시 시행할 수 없듯이 당시의 관습인 복서卜筮도 이미 의미 없는 것이 되었다고 본다. 역의 해석방법에는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으나 다산은 이전 학설들의 모순을 지양하고 종합한 역사적 역할을 담당했다. 그가 「설괘전」의 주석에서 강조하는 것은 물상物象이지만, 그가 말하는 물상의 범주 안에는 이른바 괘덕卦德, 곧 의리역학가들이 말하는 의리義理가 포함되어 있다. 정통역학에서는 우주와 인간이 도道나 리理라는 거대하고 원만한 통일성 안에서 융해되어 논의되었다. 왕필역학에서 무無라는 통일적 실체에로 우주와 인간이 회귀할 수 있었다면, 주자역학에서는 리理라는 보편적 원리에로 포괄될 수 있었다. 그러나 다산역학에서는 원시유학의 상제가 복권되면서 그 최고존재 아래 우주와 인간이 구분되는 천인분리天人分離의 구도가 형성되었다. 따라서 자연학과 인문학의 총체적 진리가 담겨있다고 여겨졌던 역의 면모가 축소될 수밖에 없다. 다산의 구도 속에서 인문학의 모든 기호와 상징은 인간의 영역에 속하는 것이지 자연의 영역이 아니다. 인간의 발명품은 인간의 소유물이듯이 주역도 인류가 발견한 인간만의 기호와 상징의 체계로 이해된다. 따라서 주역은 다분히 불완전하며 한정성을 가질 수밖에 없다. 다산이 주역을 은말주초殷末周初의 한정적 시공간 속 문화 텍스트로 읽으려고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존재한다. 그러나 이것이 주역의 폄하를 목적으로 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주례周禮가 다산의 이상이었던 것과 같이 주역의 상징세계는 그가 그토록 이상시했던 성스런 시대를 적나라하게 반영하고 있기 때문이다. 다산은 주역을 주례가 담겨있는 책이라고 평하였고, 주역의 탐구는 예禮 관련서적들을 읽으면서 진행되었다. 따라서 주역사전은 아마도 태생적으로 예禮와 밀접하게 관련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기타의 예 관련 저술들이 예송禮訟의 문제를 다루거나 예론禮論에 대한 고증이나 변론을 위주로 하는 것과는 달리, 주역사전에 인용되는 예禮는 괘효사의 물상―괘덕과 괘상을 포함하는 포괄적 의미―과 고사故事에 대한 증빙 또는 반증 자료로 제시된다는 점에서 그 성격이 다르다. 따라서 논리적이기보다는 열거적이며, 백과전서적이다. 주역사전에 등장하는 예 관련 내용들은 모두 괘효사의 물상에 대한 사전적 역할을 하며, 괘효사의 배경 설명을 하는 데 필요한 고사故事들이다. 따라서 주역의 괘사와 효사는 통시대성을 지닌 영원불변의 진리로 간주되거나, 우주적 원리를 체體로 삼고 그것의 용用으로서의 인문질서가 통합적으로 일관되어 있는 형이상학적 진리로 간주되지 않는다. 다산이 학문 대부분을 경학經學 탐구에 쏟은 것은 경학이 지닌 인간학을 회복하는 일이었으며, 이른바 원시유학의 도덕정신을 되살리려는 노력이었다. 다산이 주역에서 읽어낸 사실은 역사易詞가 문왕과 주공 당대의 문화 텍스트라는 것이다. 그가 천인성명天人性命의 형이상학적 결합을 부정하고 역사易詞를 텍스트로 읽는 것은 자연학과 인문학의 체용일원體用一元적 결합의 방식으로 주역을 독해하지 않아도 주역에서 구체적이며 실존적인 인문 가치를 읽어낼 수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텍스트로서의 역사易詞에는 그가 지향했던 진정한 유가儒家의 가치, 고대 성인들이 추구했던 인문정신이 고스란히 담겨있다. 일반적 문화현상뿐 아니라 종교적 경건성, 예禮, 인의仁義, 신信, 신독愼獨, 화和, 순천명順天命, 정명正名 등의 인문 가치 및 당대의 자연과학 지식까지도 담겨있다. 역사易詞에 등장하는 일식日蝕이나 월식月蝕, 역법曆法, 본물本物, 동식물動植物 등 자연물과 자연현상에 관련된 텍스트도 인문학 범주에서 파악되는 인문학 지식이지, 형이상학으로서의 자연학 지식이 아니다. 다산은 역에서 인문학으로 덧칠해진 유사 자연학적 색채를 배제하였다. 필자가 사용하는 자연학이라는 개념은 자연과학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인문학의 원칙들이 자연의 원리에 연원한다고 보는 형이상학 관점을 지칭하는 것이다. 이른바 역리4법易理四法은 역의 운용원리이지 역에 내재되어 있는 자연원리가 아니다. 서구과학의 전래 이후 조선의 역학가들 사이에선 서구과학과 주역을 접목하려는 많은 시도들이 있었다. 김석문金錫文, 황윤석黃胤錫, 서명응徐命膺 등이 그 대표주자인 셈인데, 이들의 역학은 서구과학의 주역적 재해석이었다. 그들 모두 성리학적 상수역象數易에 기반하고 있었기 때문에, 선진 자연과학 지식은 성리학적 상수역의 정당성을 반증하는 부수적 역할에 그칠 뿐, 순수 자연과학으로 수용되지 못했다. 그들의 상수역은 소강절과 주희의 선천후천설先天後天說과 하도낙서설河圖洛書說에 기초한다. 이들과 같은 자연학과 인문학의 결합 시도를 반박하면서 다산은 여러 곳에서 양자의 연결고리를 끊었다. 천인성명의 이치를 배제한 것 외에 수학과 역법曆法을 역에서 배제한 것도 그 하나이다. 다산은 역리가 상징철학으로써 기능할 수는 있지만, 과학적 계산의 용도로는 결코 쓰일 수 없다고 보는 것이다. 이처럼 수학이나 역법, 천문학 등의 자연학을 역에서 분리해내면 괘효사가 인문학적 성격을 띤 사례모음이라는 다산의 주장을 이해할 수 있게 된다. 다산이 역 경문의 주석에 앞서 실행한 ‘괄례括例’는 역리에 대한 계열화작업이었으며, ‘역례비석易例比釋’은 괘덕과 괘상을 계열화하는 작업이었다. 이는 괘효사를 하나의 원리적 체계로 읽는 것이 아니라 일종의 용례집, 사례집으로 파악하려는 의도에서 진행된 것이다. 주역에 주례周禮가 담겨있다고 판단하는 다산에게 있어 괘효사 하나하나는 주례가 기술되어 있는 하나의 사건이며 고사故事이다. 이 용례분류에서 주목해야 할 점은 용례의 계열화 내용이 각각의 사詞 중에서 점사占辭에 해당한다는 것이다. 점사는 곧 길흉을 판단하는 내용인데, 길흉이 바로 인사人事의 영역이므로, 결국 인사의 내용을 분류한 것이 된다. 곧 다산은 인문학의 관점에서 역사易詞를 분류하고 있는 것이다. 다산 역상학은 그가 다른 경전 해석에서 그러했듯이 주자적 세계관에 대한 비판이다. 소강절의 수리역을 비판하는 것도 실제적으로는 주자를 과녁으로 삼고 있다. 그것은 인간 도덕문화의 원칙들이 자연의 원리, 우주적 원리에 연원한다는 형이상학적 본체론을 비판하는 작업이기도 하다. 다산이 주역을 상학象學으로 일관되게 해석하는 것이 단순히 고대의 상징체계를 보여주기 위한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오해이다. 고대 원시 역상의 체계를 통해서 전통 성리학적 세계관이 아닌 전혀 다른 세계관으로, 아니 다르다고 하기보다는 유가儒家 본원의 세계관으로, 역학을 재정립하려 한 것이 다산역의 핵심이라 할 수 있다. 주역이 당대 문화의 텍스트라고 할 때, 다산이 주역사전에서 보여준 텍스트 분석의 내용은 바로 당대 문화가 보여주는 인문학, 인문정신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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