합리적이고 분석적이며 이성 지향적인 현대사회는 점점 더 마음의 기도를 필요로 하고 있다. 많은 신자들은 교회 안에서 이러한 영적 갈망을 채우지 못하고 새로운 체험들, 모든 종류의 동양적 명상등을 통하여 충족시키려 하고 있다. 이러한 시점에서 동방 교회의 영성사조인 해시카즘에서 생겨났으며 사막교부들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가서 그 기원을 찾아야 하는 오래된 영적 전통중의 하나인 예수기도는 큰 도움을 줄 수 있다. 이 기도는 동방교회 안에서 큰 영향력과 인기를 획득했으므로 마음의 기도와 거의 동일시된다. 몇 마디 말로 된 예수기도문을 중심으로 많은 동방교회 신자들은 오랜 세월동안 그들의 영적 생활을 해 왔으며 이 기도를 통해 그리스도교의 가장 심오한 신비 속으로 들어가곤 했다. 동방 교회 안에서 예수기도는 '하나님의 아들, 주 예수 그리스도님, 죄인인 저(희)에게 자비를 베푸소서' 라는 공식으로 구체화 되어왔다. 이 기도의 공식은 완전히 성경에서 (소경의 기도와 세리의 기도) 취한 것이다. 그러나 이 공식이 결코 유일한 것은 아니었으며 지금도 그렇다. 여러 가지로 변형하여 기도 할 수 있다. 예수 기도는 지극히 단순한 기도이다. 특별한 지식이 필요하지 않으며 세심하게 준비할 필요도 없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단지 기도를 시작 하는 것' 이다 : ' 예수의 이름을 부르는 것을 시작하기 전에 너 자신이 평화와 예수님께 대한 기억을 마음 안에 심어두고 성령의 영감과 인도를 청하여라... 그런 다음 단순히 시작하라. 걷기 위해서는 첫발을 내딛어야만 한다. 수영하기 위해서는 자기 자신을 물 속에 던져야만 한다. 예수의 이름을 부르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흠숭과 사랑의 마음을 갖고 예수의 이름을 부르기 시작하라. 그것에 매달려라. 그것을 반복하라. 네가 그 이름을 부르고 있는 중이라는 것을 생각하지 마라. 단지 예수 그 자신에 대해서만 생각하라. 그의 이름을 천천히, 부드럽게, 고요하고 평화롭게 불러라'. 예수 기도는 마음속에 정신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서는 것이며, 삶을 마칠 때까지 밤낮 쉬지 않고 계속 하나님 앞에 서는 것이다. 즉 이 기도의 본질은 '하나님을 기억하며 그 분의 현존 안에서 행하는 것' 이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있는 모든 것을 보시며, 우리가 자신을 아는 것보다 더 우리를 잘 아신다는 확신 안에서 살아가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기도의 능력이 특별한 말을 되풀이하는데 있다고 여겨서는 안 되며 그 말 안에서 정신과 마음을 주님께 향한 데 따른 결과라고 여겨야 한다. 우리가 발언하는 단어들은 보조 도구 일뿐 반드시 필요한 본질적인 것은 아니다. 이처럼 예수님께 대한 특별한 인격적 관계와 믿음을 고백하는 예수기도는 일종의 동양적 만트라가 아니고 정적주의도 아니며 정신집중 자체를 위한 기도도 아니다. ...
합리적이고 분석적이며 이성 지향적인 현대사회는 점점 더 마음의 기도를 필요로 하고 있다. 많은 신자들은 교회 안에서 이러한 영적 갈망을 채우지 못하고 새로운 체험들, 모든 종류의 동양적 명상등을 통하여 충족시키려 하고 있다. 이러한 시점에서 동방 교회의 영성사조인 해시카즘에서 생겨났으며 사막교부들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가서 그 기원을 찾아야 하는 오래된 영적 전통중의 하나인 예수기도는 큰 도움을 줄 수 있다. 이 기도는 동방교회 안에서 큰 영향력과 인기를 획득했으므로 마음의 기도와 거의 동일시된다. 몇 마디 말로 된 예수기도문을 중심으로 많은 동방교회 신자들은 오랜 세월동안 그들의 영적 생활을 해 왔으며 이 기도를 통해 그리스도교의 가장 심오한 신비 속으로 들어가곤 했다. 동방 교회 안에서 예수기도는 '하나님의 아들, 주 예수 그리스도님, 죄인인 저(희)에게 자비를 베푸소서' 라는 공식으로 구체화 되어왔다. 이 기도의 공식은 완전히 성경에서 (소경의 기도와 세리의 기도) 취한 것이다. 그러나 이 공식이 결코 유일한 것은 아니었으며 지금도 그렇다. 여러 가지로 변형하여 기도 할 수 있다. 예수 기도는 지극히 단순한 기도이다. 특별한 지식이 필요하지 않으며 세심하게 준비할 필요도 없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단지 기도를 시작 하는 것' 이다 : ' 예수의 이름을 부르는 것을 시작하기 전에 너 자신이 평화와 예수님께 대한 기억을 마음 안에 심어두고 성령의 영감과 인도를 청하여라... 그런 다음 단순히 시작하라. 걷기 위해서는 첫발을 내딛어야만 한다. 수영하기 위해서는 자기 자신을 물 속에 던져야만 한다. 예수의 이름을 부르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흠숭과 사랑의 마음을 갖고 예수의 이름을 부르기 시작하라. 그것에 매달려라. 그것을 반복하라. 네가 그 이름을 부르고 있는 중이라는 것을 생각하지 마라. 단지 예수 그 자신에 대해서만 생각하라. 그의 이름을 천천히, 부드럽게, 고요하고 평화롭게 불러라'. 예수 기도는 마음속에 정신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서는 것이며, 삶을 마칠 때까지 밤낮 쉬지 않고 계속 하나님 앞에 서는 것이다. 즉 이 기도의 본질은 '하나님을 기억하며 그 분의 현존 안에서 행하는 것' 이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있는 모든 것을 보시며, 우리가 자신을 아는 것보다 더 우리를 잘 아신다는 확신 안에서 살아가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기도의 능력이 특별한 말을 되풀이하는데 있다고 여겨서는 안 되며 그 말 안에서 정신과 마음을 주님께 향한 데 따른 결과라고 여겨야 한다. 우리가 발언하는 단어들은 보조 도구 일뿐 반드시 필요한 본질적인 것은 아니다. 이처럼 예수님께 대한 특별한 인격적 관계와 믿음을 고백하는 예수기도는 일종의 동양적 만트라가 아니고 정적주의도 아니며 정신집중 자체를 위한 기도도 아니다. 바울이 '쉬지 말고 기도하라' (살전 5:17)고 말한 것처럼 항상 기도를 향해야 한다. 예수기도는 표면적인 것에 그쳐서는 안 되며 내면적인 것, 마음 안에서 정신이 행하는 끊임없는 활동이 되어야 한다. 우리 삶 전체에 기도가 스며 있어야 한다. 이처럼 예수 기도는 짧고 간단하기 때문에 언제 어디서나 행할 수 있다. 거리에서 그리고 일터에서 일을 하면서, 각자의 방에서, 교회에서, 버스를 기다리면서, 정원이나 부엌에서 일하면서, 옷을 입을 때나 걸어갈 때, 고민이 있거나 정신적으로 괴로워서 다른 기도를 할 수 없을 때에 예수기도를 할 수 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오늘날처럼 긴장이 고조된 시대에 특히 적합한 기도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은 성직자나 수도자에게 적합한 기도일 뿐 아니라 세상에서 온갖 일에 종사하는 평신도들에게도 적합한 기도이다. 그것은 영성생활의 기초단계에서부터 가장 고등한 단계에 이르기까지 모든 단계에 적합한 기도인 것이다. 열심히 예수 기도에 집중하면, 마치 시냇물이 졸졸 흐르듯이 마음속에서 이 기도가 저절로 흐르기 시작할 것이다. 예수기도는 마음속으로 들어가서 우리의 인격전체를 지배하며 끝없는 기쁨과 평화의 근원이 된다. 결국 예수기도가 마음 전체를 채우며, 그 안에서 쉬지 않고 움직일 것이다.
합리적이고 분석적이며 이성 지향적인 현대사회는 점점 더 마음의 기도를 필요로 하고 있다. 많은 신자들은 교회 안에서 이러한 영적 갈망을 채우지 못하고 새로운 체험들, 모든 종류의 동양적 명상등을 통하여 충족시키려 하고 있다. 이러한 시점에서 동방 교회의 영성사조인 해시카즘에서 생겨났으며 사막교부들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가서 그 기원을 찾아야 하는 오래된 영적 전통중의 하나인 예수기도는 큰 도움을 줄 수 있다. 이 기도는 동방교회 안에서 큰 영향력과 인기를 획득했으므로 마음의 기도와 거의 동일시된다. 몇 마디 말로 된 예수기도문을 중심으로 많은 동방교회 신자들은 오랜 세월동안 그들의 영적 생활을 해 왔으며 이 기도를 통해 그리스도교의 가장 심오한 신비 속으로 들어가곤 했다. 동방 교회 안에서 예수기도는 '하나님의 아들, 주 예수 그리스도님, 죄인인 저(희)에게 자비를 베푸소서' 라는 공식으로 구체화 되어왔다. 이 기도의 공식은 완전히 성경에서 (소경의 기도와 세리의 기도) 취한 것이다. 그러나 이 공식이 결코 유일한 것은 아니었으며 지금도 그렇다. 여러 가지로 변형하여 기도 할 수 있다. 예수 기도는 지극히 단순한 기도이다. 특별한 지식이 필요하지 않으며 세심하게 준비할 필요도 없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단지 기도를 시작 하는 것' 이다 : ' 예수의 이름을 부르는 것을 시작하기 전에 너 자신이 평화와 예수님께 대한 기억을 마음 안에 심어두고 성령의 영감과 인도를 청하여라... 그런 다음 단순히 시작하라. 걷기 위해서는 첫발을 내딛어야만 한다. 수영하기 위해서는 자기 자신을 물 속에 던져야만 한다. 예수의 이름을 부르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흠숭과 사랑의 마음을 갖고 예수의 이름을 부르기 시작하라. 그것에 매달려라. 그것을 반복하라. 네가 그 이름을 부르고 있는 중이라는 것을 생각하지 마라. 단지 예수 그 자신에 대해서만 생각하라. 그의 이름을 천천히, 부드럽게, 고요하고 평화롭게 불러라'. 예수 기도는 마음속에 정신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서는 것이며, 삶을 마칠 때까지 밤낮 쉬지 않고 계속 하나님 앞에 서는 것이다. 즉 이 기도의 본질은 '하나님을 기억하며 그 분의 현존 안에서 행하는 것' 이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있는 모든 것을 보시며, 우리가 자신을 아는 것보다 더 우리를 잘 아신다는 확신 안에서 살아가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기도의 능력이 특별한 말을 되풀이하는데 있다고 여겨서는 안 되며 그 말 안에서 정신과 마음을 주님께 향한 데 따른 결과라고 여겨야 한다. 우리가 발언하는 단어들은 보조 도구 일뿐 반드시 필요한 본질적인 것은 아니다. 이처럼 예수님께 대한 특별한 인격적 관계와 믿음을 고백하는 예수기도는 일종의 동양적 만트라가 아니고 정적주의도 아니며 정신집중 자체를 위한 기도도 아니다. 바울이 '쉬지 말고 기도하라' (살전 5:17)고 말한 것처럼 항상 기도를 향해야 한다. 예수기도는 표면적인 것에 그쳐서는 안 되며 내면적인 것, 마음 안에서 정신이 행하는 끊임없는 활동이 되어야 한다. 우리 삶 전체에 기도가 스며 있어야 한다. 이처럼 예수 기도는 짧고 간단하기 때문에 언제 어디서나 행할 수 있다. 거리에서 그리고 일터에서 일을 하면서, 각자의 방에서, 교회에서, 버스를 기다리면서, 정원이나 부엌에서 일하면서, 옷을 입을 때나 걸어갈 때, 고민이 있거나 정신적으로 괴로워서 다른 기도를 할 수 없을 때에 예수기도를 할 수 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오늘날처럼 긴장이 고조된 시대에 특히 적합한 기도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은 성직자나 수도자에게 적합한 기도일 뿐 아니라 세상에서 온갖 일에 종사하는 평신도들에게도 적합한 기도이다. 그것은 영성생활의 기초단계에서부터 가장 고등한 단계에 이르기까지 모든 단계에 적합한 기도인 것이다. 열심히 예수 기도에 집중하면, 마치 시냇물이 졸졸 흐르듯이 마음속에서 이 기도가 저절로 흐르기 시작할 것이다. 예수기도는 마음속으로 들어가서 우리의 인격전체를 지배하며 끝없는 기쁨과 평화의 근원이 된다. 결국 예수기도가 마음 전체를 채우며, 그 안에서 쉬지 않고 움직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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