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가 사상은 모든 것을 하나의 가치로 환원시키려는 근현대 사상의 독성을 일깨워 줄 정신적 각성제이자 21세기적 사유의 기본틀을 놓을 수 있게 해 줄 설계도라고 할 수 있다. 20세기는 환원적 인 진리관이 다수를 이루던 세기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즉 사회주의적 환원과 자본주의적 환원이다. 사회주의적 환원은 모든 것을 집단적 공동체 중심의 이념으로 수렴시키려는 발상이다. 극단적으로 개인을 소멸시키고 집체주의적 실체론을 중심으로 여기는 그런 환...
도가 사상은 모든 것을 하나의 가치로 환원시키려는 근현대 사상의 독성을 일깨워 줄 정신적 각성제이자 21세기적 사유의 기본틀을 놓을 수 있게 해 줄 설계도라고 할 수 있다. 20세기는 환원적 인 진리관이 다수를 이루던 세기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즉 사회주의적 환원과 자본주의적 환원이다. 사회주의적 환원은 모든 것을 집단적 공동체 중심의 이념으로 수렴시키려는 발상이다. 극단적으로 개인을 소멸시키고 집체주의적 실체론을 중심으로 여기는 그런 환원이다. 반면에 자본주의는 모든 것을 도구주의적 관념으로 환원시키고, 도구적 가치를 초탈하려는 초월성을 실증주의의 이름 아래 무의미성으로 낙인찍는 이념이다. 이러한 이념 안에서 그것이 집단이든 자본이든, 인간을 포함한 만물은 그 절대성의 폭력과 압제안에 놓이게 된다. 도가 사상은 이런 20세기의 문명의 흐름을 넘어서 새로운 21세기의 문명을 창조하려는 우리의 철학적인 노력에 하나의 획기적인 계기를 마련해 줄 수 있을 것이다. 노자는 이러한 환원주의적 절대성에 맞서는 상대성의 원리에 대한 근거를 마련해 준다. 노자에 의하면 만물은 상대적 측면을 지니고 있다. 여기에는 인간도 예외는 아니다. 하느님과 인간과 자연의 관계 안에서도 절대성은 사라지고 만다. 절대성은 폭력적이고 일방적인 것이다. 현대 21세기 문명권 안에서 현실화 되고 있는 생태계 파괴의 흔적과 조짐들은 모두가 이러한 절대성의 결과물이다. 이 절대성 안에서의 기독교 전통 신학은 하느님과 세계의 관계에 있어서, 하느님을 절대 타자로 상정하는 초월적 유신론을 그 중심에 내세운다. 하느님이 절대 타자로서, 부동의 원동자로서 상정될 때, 하느님과 인간과 자연은 위계적 구도를 가지게 된다. 하느님의 절대성 안에서 만물은 제한적인 존재, 종말에 이르러 파괴되고 소멸되는 존재로 여겨지게 된다. 또한 인간은 태초의 하느님의 명령에 따라 자연을 정복하고 자신의 손아귀에 넣게 된다. 이 같은 신학적 폐단에 맞서서 생태 신학에서는 만유재신론을 전개한다. 만유재신론 안에서 하느님과 세계는 더 이상 타자의 관계가 아니다. 더 이상 위계체계 아래 놓여있지 않다. 하느님은 세계 안에 계시고, 세계는 하느님 안에서 살고 있다. 그러므로 하느님과 세계는 상대적 위치를 점하며, 상호보완적 관계를 보유한다. 그러므로 만유재신론에 대한 신학 방법론으로서 도가 사상의 대입은 자연스러운 것이다. 만유재신론과 도가 사상은 작금의 생태 위기 앞에서 그 접촉점을 가지게 된다. 신학과 철학의 생태 위기에 대한 각성은 이 만남을 자연스럽게 유도한다. 노자의 도덕경 안에서 도는 만물을 이롭게 하는 원리이자 능력이다. 기독교 전통 신학의 절대 타자의 개념이 아니다. 도는 만물에 내재하며 한편으로는 만물을 초월한다. 도는 무명자, 언표불가능자이다. 언표불가능자는 과도한 실재성을 지녀서가 아니라 오히려 과소한 실재성을 지녀서 언표할 수 없다. 무명자라는 것 또한 겨우 존재하는 어떤 것이다. 높고 높은 곳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낮고 낮은 곳에 숨어 있다. 그런 의미에서 하향적 초월론 앞에 서 있다. 그래서 노자는 "유약함이 도가 작용하는 모습이다"라고 말한 것이다. 도는 만물의 위에 있거나 멀리 떨어져 있는 절대 타자가 아니다. 도는 만유재신적 관계를 함유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노자는 도의 내재성과 초월성을 동시에 언급하기 위한 구도로써, 상도와 비상도를 말한다. 상도와 비상도는 위계적 구조 안에 있는 관계가 아니라, 보충대리적 관계 안에 놓여져 있다. 이것은 또한 생태 신학과의 만남 속에서 신성과 삼위일체로 대입된다. 하느님은 상도적 측면인 신성과 비상도적 측면인 삼위일체 안에서 그 존재론적 기반을 획득하게 된다. 본 논문에서는 이 둘의 상생적 관계를 통해 하향적 초월론의 신학 방법론을 차용하게 된다. 삼위일체로 만물에 참여하는 비상도적 하느님은 도덕경 안에서 생태적 상징을 획득한다. 하느님 창조자는 어머니의 이미지를 차용한다. 어머니 이미지는 만물의 생산성과 창조성을 상징하며, 모든 만물을 보듬어 안는 수용성을 가지게 된다. 과거 기독교 전통 신학 속에서 모든 것을 지배하는 아버지 이미지와는 사뭇 다른 것이다. 다음으로, 하느님 구원자는 천지의 이미지를 차용한다. 천지는 동양 문화 속에서 위계 구조로 이해되지 않는다. 천지는 동등한 관계, 평등한 관계로 이해된다. 하늘은 초월성이요, 땅은 내재성이다. 하늘은 높음이고, 땅은 깊음이다. 이러한 관계 안에서 땅에서 살아가는 만물은 모두 평등관계로 회복되고 구원된다. 여기에는 우주 그리스도 가 참여한다. 우주 그리스도는 예수 그리스도의 개념보다 그 외연이 크다. 예수 그리스도는 인간의 죄에만 관심을 두는 매우 지협적인 기독론이다. 그러나 우주 그리스도는 만물의 구원에 관심을 두는 보편적이고 우주적인 기독론이다. 마지막으로, 하느님 영은 물의 이미지를 차용한다. 물은 그 부드러움과 유연한 특성으로 모든 만물에 침투하고 내재하며, 생명의 근원으로 자리한다. 물은 모든 생명을 새롭게 하는 힘이다. 하느님 영은 물과 같이 모든 생명을 새롭게 하고 그 중심이 하느님이 되어 각 개체가 궁극적으로 같은 운명 공동체로 통일 되도록 하는 일치의 능력으로 기능한다. 하느님은 도의 생태적 상징을 차용함으로써 올바른 생태 신학적 이해를 가지며, 생태 신학은 이 상징들로 하여금 신학 방법론에 있어 대안을 마련할 수 있다. 여기서 하느님은 그 생태적 상징과 더불어 생태적 속성을 가지게 된다. 도덕경에 나타난 도의 속성은 생태 신학에서 논의되는 하느님의 속성이 대부분 포함되어 있다. 우선, 도의 부드러움과 약함은 만물 안에 내재하는 도의 속성 중에 대표적인 것이다. 내재는 침투를 필요로 한다. 이것은 오직 부드러움과 약함의 속성만이 이룰 수 있는 것이다. 그런 측면에서 이 속성은 대표적인 만유재신론적 속성이다. 이와 더불어 도는 순환성을 지니고 있다. 노자는 "되돌아 감이 도의 움직임"이라고 말했다. 인류 문명의 근간을 이루고 있는 직선적, 단 방향적 사유는 오직 진보를 향한 허황된 꿈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러한 꿈 안에서 기독교는, 만물은 끝내 파괴되고 없어지게 된다는 종말론을 가지게 된다. 세계는 순환을 거듭하고 있으며, 생명이 있으면 죽음이 있다. 생명이란 분화(分化)의 현장이며, 죽음이란 귀일(歸一)의 현장이다. 그것은 도의 나아감과 되돌아옴에 지나지 않는다. 도는 이러한 순환 속에서 만물을 지속시킨다. 생태신학 안에서 하느님의 창조성과 수용성은 도의 순환성 아래서 타당한 근거를 가진다. 그 순환성 안에서 세계는 종국에 없어질 것이 아니라, 끝없이 지속되는 존재가 된다. 도의 속성에서 빠질 수 없는 것은 바로 양극을 조화시키는 도의 속성이다.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생태 파괴적 가치관의 근저에는 이항대립적 주객도식이 자리 잡고 있다. 모든 것을 선과 악으로 나누고 위계체계를 구성하는 이 도식 앞에서 만물은 악한 존재로 여겨질 수 밖에 없다. 그러나 일찍이 노자는 모든 것이 "둘 다 근원은 같은 것"이라고 말했다. 도는 모든 대립되는 것을 일치시키는 획기적인 통일성으로 작용한다. 하느님 또한 이항대립적 관계 안에서 우위를 점하는 존재가 아니다. 하느님은 스스로 화육하셔서 만물과의 상생의 관계 안에 계신다. 하느님 안에서 우열은 없다. 분화된 모든 것은 다시금 일치를 이루게 된다. 만물은 그 지위를 회복하고, 인간은 하느님과 인간과 자연이 공존의 관계에 놓여져 있음을 자각하게 된다. 마지막으로, 도는 무욕성을 가진다. 도의 자기 비움은 만물을 이롭게 한다. 하느님의 화육과 그 이치가 같다. 이 속성은 뒤에 이어질 무위와 관계된다. 위와 같은 도의 속성은 곧 만물을 생성시키고 양육시키는 우주적 능력으로 작용한다. 그것이 바로 무위다. 무위는 도의 행위의 방식으로서 만물에 참여하여, 모든 만물이 도 안에서 한 가족이 되도록 이끈다. 마찬가지로 하느님께서 만물에 참여하는 방식이 무위기 때문에 만물은 거대한 생명 에너지의 충만함 가운데 살아간다. 그래서 무위의 하느님은 만물에게 편애 없이 참여하며, 더 나아가 하느님 안에서 만물이 조화를 이루며 살아가게 된다 . 무위의 하느님 안에서, 인간은 더 이상 부조화의 주범이 되어서는 안 된다. 그것은 유위고 악이다. 세계의 파괴는 하느님에 대한 인간의 죄에서 기인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부조화를 양산하는 데서 생겨난다. 위의 논의들을 통해 하느님은 새로운 자리를 차지한다. 도의 개념에서 차용한 하느님 모델은 생태 신학적으로 중요한 의의를 가진다. 이 모델은 새로운 생태 신학적 대안이 되어질 것이다. 그것도 서양의 것이 아니라, 우리의 것으로써 말이다.
도가 사상은 모든 것을 하나의 가치로 환원시키려는 근현대 사상의 독성을 일깨워 줄 정신적 각성제이자 21세기적 사유의 기본틀을 놓을 수 있게 해 줄 설계도라고 할 수 있다. 20세기는 환원적 인 진리관이 다수를 이루던 세기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즉 사회주의적 환원과 자본주의적 환원이다. 사회주의적 환원은 모든 것을 집단적 공동체 중심의 이념으로 수렴시키려는 발상이다. 극단적으로 개인을 소멸시키고 집체주의적 실체론을 중심으로 여기는 그런 환원이다. 반면에 자본주의는 모든 것을 도구주의적 관념으로 환원시키고, 도구적 가치를 초탈하려는 초월성을 실증주의의 이름 아래 무의미성으로 낙인찍는 이념이다. 이러한 이념 안에서 그것이 집단이든 자본이든, 인간을 포함한 만물은 그 절대성의 폭력과 압제안에 놓이게 된다. 도가 사상은 이런 20세기의 문명의 흐름을 넘어서 새로운 21세기의 문명을 창조하려는 우리의 철학적인 노력에 하나의 획기적인 계기를 마련해 줄 수 있을 것이다. 노자는 이러한 환원주의적 절대성에 맞서는 상대성의 원리에 대한 근거를 마련해 준다. 노자에 의하면 만물은 상대적 측면을 지니고 있다. 여기에는 인간도 예외는 아니다. 하느님과 인간과 자연의 관계 안에서도 절대성은 사라지고 만다. 절대성은 폭력적이고 일방적인 것이다. 현대 21세기 문명권 안에서 현실화 되고 있는 생태계 파괴의 흔적과 조짐들은 모두가 이러한 절대성의 결과물이다. 이 절대성 안에서의 기독교 전통 신학은 하느님과 세계의 관계에 있어서, 하느님을 절대 타자로 상정하는 초월적 유신론을 그 중심에 내세운다. 하느님이 절대 타자로서, 부동의 원동자로서 상정될 때, 하느님과 인간과 자연은 위계적 구도를 가지게 된다. 하느님의 절대성 안에서 만물은 제한적인 존재, 종말에 이르러 파괴되고 소멸되는 존재로 여겨지게 된다. 또한 인간은 태초의 하느님의 명령에 따라 자연을 정복하고 자신의 손아귀에 넣게 된다. 이 같은 신학적 폐단에 맞서서 생태 신학에서는 만유재신론을 전개한다. 만유재신론 안에서 하느님과 세계는 더 이상 타자의 관계가 아니다. 더 이상 위계체계 아래 놓여있지 않다. 하느님은 세계 안에 계시고, 세계는 하느님 안에서 살고 있다. 그러므로 하느님과 세계는 상대적 위치를 점하며, 상호보완적 관계를 보유한다. 그러므로 만유재신론에 대한 신학 방법론으로서 도가 사상의 대입은 자연스러운 것이다. 만유재신론과 도가 사상은 작금의 생태 위기 앞에서 그 접촉점을 가지게 된다. 신학과 철학의 생태 위기에 대한 각성은 이 만남을 자연스럽게 유도한다. 노자의 도덕경 안에서 도는 만물을 이롭게 하는 원리이자 능력이다. 기독교 전통 신학의 절대 타자의 개념이 아니다. 도는 만물에 내재하며 한편으로는 만물을 초월한다. 도는 무명자, 언표불가능자이다. 언표불가능자는 과도한 실재성을 지녀서가 아니라 오히려 과소한 실재성을 지녀서 언표할 수 없다. 무명자라는 것 또한 겨우 존재하는 어떤 것이다. 높고 높은 곳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낮고 낮은 곳에 숨어 있다. 그런 의미에서 하향적 초월론 앞에 서 있다. 그래서 노자는 "유약함이 도가 작용하는 모습이다"라고 말한 것이다. 도는 만물의 위에 있거나 멀리 떨어져 있는 절대 타자가 아니다. 도는 만유재신적 관계를 함유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노자는 도의 내재성과 초월성을 동시에 언급하기 위한 구도로써, 상도와 비상도를 말한다. 상도와 비상도는 위계적 구조 안에 있는 관계가 아니라, 보충대리적 관계 안에 놓여져 있다. 이것은 또한 생태 신학과의 만남 속에서 신성과 삼위일체로 대입된다. 하느님은 상도적 측면인 신성과 비상도적 측면인 삼위일체 안에서 그 존재론적 기반을 획득하게 된다. 본 논문에서는 이 둘의 상생적 관계를 통해 하향적 초월론의 신학 방법론을 차용하게 된다. 삼위일체로 만물에 참여하는 비상도적 하느님은 도덕경 안에서 생태적 상징을 획득한다. 하느님 창조자는 어머니의 이미지를 차용한다. 어머니 이미지는 만물의 생산성과 창조성을 상징하며, 모든 만물을 보듬어 안는 수용성을 가지게 된다. 과거 기독교 전통 신학 속에서 모든 것을 지배하는 아버지 이미지와는 사뭇 다른 것이다. 다음으로, 하느님 구원자는 천지의 이미지를 차용한다. 천지는 동양 문화 속에서 위계 구조로 이해되지 않는다. 천지는 동등한 관계, 평등한 관계로 이해된다. 하늘은 초월성이요, 땅은 내재성이다. 하늘은 높음이고, 땅은 깊음이다. 이러한 관계 안에서 땅에서 살아가는 만물은 모두 평등관계로 회복되고 구원된다. 여기에는 우주 그리스도 가 참여한다. 우주 그리스도는 예수 그리스도의 개념보다 그 외연이 크다. 예수 그리스도는 인간의 죄에만 관심을 두는 매우 지협적인 기독론이다. 그러나 우주 그리스도는 만물의 구원에 관심을 두는 보편적이고 우주적인 기독론이다. 마지막으로, 하느님 영은 물의 이미지를 차용한다. 물은 그 부드러움과 유연한 특성으로 모든 만물에 침투하고 내재하며, 생명의 근원으로 자리한다. 물은 모든 생명을 새롭게 하는 힘이다. 하느님 영은 물과 같이 모든 생명을 새롭게 하고 그 중심이 하느님이 되어 각 개체가 궁극적으로 같은 운명 공동체로 통일 되도록 하는 일치의 능력으로 기능한다. 하느님은 도의 생태적 상징을 차용함으로써 올바른 생태 신학적 이해를 가지며, 생태 신학은 이 상징들로 하여금 신학 방법론에 있어 대안을 마련할 수 있다. 여기서 하느님은 그 생태적 상징과 더불어 생태적 속성을 가지게 된다. 도덕경에 나타난 도의 속성은 생태 신학에서 논의되는 하느님의 속성이 대부분 포함되어 있다. 우선, 도의 부드러움과 약함은 만물 안에 내재하는 도의 속성 중에 대표적인 것이다. 내재는 침투를 필요로 한다. 이것은 오직 부드러움과 약함의 속성만이 이룰 수 있는 것이다. 그런 측면에서 이 속성은 대표적인 만유재신론적 속성이다. 이와 더불어 도는 순환성을 지니고 있다. 노자는 "되돌아 감이 도의 움직임"이라고 말했다. 인류 문명의 근간을 이루고 있는 직선적, 단 방향적 사유는 오직 진보를 향한 허황된 꿈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러한 꿈 안에서 기독교는, 만물은 끝내 파괴되고 없어지게 된다는 종말론을 가지게 된다. 세계는 순환을 거듭하고 있으며, 생명이 있으면 죽음이 있다. 생명이란 분화(分化)의 현장이며, 죽음이란 귀일(歸一)의 현장이다. 그것은 도의 나아감과 되돌아옴에 지나지 않는다. 도는 이러한 순환 속에서 만물을 지속시킨다. 생태신학 안에서 하느님의 창조성과 수용성은 도의 순환성 아래서 타당한 근거를 가진다. 그 순환성 안에서 세계는 종국에 없어질 것이 아니라, 끝없이 지속되는 존재가 된다. 도의 속성에서 빠질 수 없는 것은 바로 양극을 조화시키는 도의 속성이다.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생태 파괴적 가치관의 근저에는 이항대립적 주객도식이 자리 잡고 있다. 모든 것을 선과 악으로 나누고 위계체계를 구성하는 이 도식 앞에서 만물은 악한 존재로 여겨질 수 밖에 없다. 그러나 일찍이 노자는 모든 것이 "둘 다 근원은 같은 것"이라고 말했다. 도는 모든 대립되는 것을 일치시키는 획기적인 통일성으로 작용한다. 하느님 또한 이항대립적 관계 안에서 우위를 점하는 존재가 아니다. 하느님은 스스로 화육하셔서 만물과의 상생의 관계 안에 계신다. 하느님 안에서 우열은 없다. 분화된 모든 것은 다시금 일치를 이루게 된다. 만물은 그 지위를 회복하고, 인간은 하느님과 인간과 자연이 공존의 관계에 놓여져 있음을 자각하게 된다. 마지막으로, 도는 무욕성을 가진다. 도의 자기 비움은 만물을 이롭게 한다. 하느님의 화육과 그 이치가 같다. 이 속성은 뒤에 이어질 무위와 관계된다. 위와 같은 도의 속성은 곧 만물을 생성시키고 양육시키는 우주적 능력으로 작용한다. 그것이 바로 무위다. 무위는 도의 행위의 방식으로서 만물에 참여하여, 모든 만물이 도 안에서 한 가족이 되도록 이끈다. 마찬가지로 하느님께서 만물에 참여하는 방식이 무위기 때문에 만물은 거대한 생명 에너지의 충만함 가운데 살아간다. 그래서 무위의 하느님은 만물에게 편애 없이 참여하며, 더 나아가 하느님 안에서 만물이 조화를 이루며 살아가게 된다 . 무위의 하느님 안에서, 인간은 더 이상 부조화의 주범이 되어서는 안 된다. 그것은 유위고 악이다. 세계의 파괴는 하느님에 대한 인간의 죄에서 기인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부조화를 양산하는 데서 생겨난다. 위의 논의들을 통해 하느님은 새로운 자리를 차지한다. 도의 개념에서 차용한 하느님 모델은 생태 신학적으로 중요한 의의를 가진다. 이 모델은 새로운 생태 신학적 대안이 되어질 것이다. 그것도 서양의 것이 아니라, 우리의 것으로써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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