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이 창조하신 이 우주는 질서와 조화의 세계이다. 그러나 그 질서는 인간이 생각하는 조화로 이루어 진 것이 아니다. 그 질서는 자유하시는 하나님의 자유로운 질서였으며 하나님의 선한 계획의 질서인 것이다. 본 논문에서 욥기의 하나님의 대답 부분에 나타난 욥이 하나님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가를 고찰해보았다. 이를 위해서 먼저 지혜문학이 창조질서에 대해서 어떻게 말하는가를 보았다. 그래서 지혜문학이 이 세상의 질서를 유지하는 것을 제일 과제로 삼았고, 인간 세상의 질서가 창조 질서 안에 이미 나타난 있는 것으로 본다는 사실을 말하였다. 또한 이 세계의 질서는 혼돈이 추방된 상태로 고정되어 있는 것으로 본다는 사실을 말하였다. 또한 이 세계의 질서는 혼돈이 추방된 상태로 고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혼돈의 위협을 계속 받고 있는 사실도 말하였다. 다음으로 본 논문의 본문인 38장-42장:6절에 대한 주석 작업을 하였다. 그 주석 작업을 통해서 하나님의 욥의 항변에 대한 대답에 나타나는 중요한 두 가지 사실을 알려준다는 것을 말하였다. 그것은 첫째로 하나님의 창조 안에는 혼돈이 그대로 남아 있다는 사실이다 혼돈의 세력은 이 우주가 창조 될 때에 소멸 된 것이 아니라, 현재에도 역시 존재하면서 자연과 인간의 삶을 위협하고 있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창조에 대한 두 번째 인식은 질서 속에 여전히 남아있는 혼돈의 위협을 감소시켜준다. 혼돈은 하나님의 지배와 완전하신 주권 아래에 있다. 혼돈은 하나님의 경계 아래에 놓여 있으며, 인간 사회를 향하여 그 교만한 물결을 마음대로 뻗을 수 없게 되었다. 창조질서 안에는 따라서 인간 삶과 사회의 구조 안에는 혼돈이 존재하고 있다. 욥에게 닫친 고통은 삶 속의 혼돈의 경험이다. 더구나 의인인 그에게 닫친 고통은 악인들조차도 쉽게 당하게 되는 그런 고통은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욥은 인간의 삶 안에 있는 혼돈을 발견하고, "하나님, 하나님의 세상에는 혼돈이 있습니다."라고 외친다. 그리고 그 외침에 대답하여 하나님은 "역시 그렇다 이 세상에는 여전히 혼돈이 있다. "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이런 혼돈의 요소들이 절대로 부조화나 제멋대로의 광폭함 속에 내버려둬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혼돈은 하나님의 지배 아래에 있다. 하나님 창조 질서 속에는 혼돈과 질서가 조화를 이루고 있는 것이다. 때문에 창조 질서속의 혼돈은 능히 극복될 수 있는 것이다. 그 혼돈은 하나님의 계획안에서, 창조 때에 그러했듯이 경계 지어지고 나뉘어 질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창조질서는 거대한 시작으로 볼 때에만, 즉 우주를 지으신 이의 안목에서 볼 때에만 비로소 이해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 시각은 인간에는 결코 열려 있지 않다. 욥의 순응은 이것을 보여준다. 하나님이 직접 대답하셨음에도 불구하고 욥은 하나님에 대해서, 또는 그의 창조활동에 대해서 아직도 이해하게 되지 않는다. 또한 그는 이해하기를 원하지 않았다. 사실상 창조에 그가 이해할 수 있거나 이해해야 하는 것은 없다. 욥은 다만 겸손하게 창조 질서 속에서 부여된 자신의 위치로 돌아가, 그 속에 자신의 고통에 대해 네라고 말할 수 있을 뿐이다. 인간 세계에는 멸망하는 의인과 흥하는 악인의 문제와 같은 부조리와 혼돈의 요소들이 여전히 남아있다. 욥기는 하나님의 창조질서를 이해할 때에 그 혼돈을 견딜 수 있게 되리라고 말하고 있지 않다. 욥기는 욥의 입을 빌어서 하나님의 창조질서, 하나님의 □□□는 인간이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그리고 창조 질서 속의 혼돈에 직면한 인간들을 향해서 네가 어떻게 행동할 것이냐? 즉 순종이냐 저항이냐를 끈질기게 묻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창조 질서는 욥의 문제에, 그리고 고통 가운데 있는 인간의 삶에 희망을 줄 수 있는가? 인간이 혼돈 속에 있는 존재라면, 그가 혼돈을 이길 수 있는 힘은 어디서 오는가? 이 문제는 창조 질서 안에 곧 삶 속에 하나님께서 존재하고 계신다는 사실로서 대답할 수 있을 것이다. 하나님이 이세상을 창조하셨다. 뿐만 아니라 그 개개의 창조된 피조물들의 삶에 창조주로서 적극적으로 개입하고 계신다. 하나님께서 독수리의 새끼에게 관심을 가지고 계신다면, 그 하나님이 당신의 일을 맡기신 인간에게는 또한 얼마나 지대한 관심을 쏟고 계실 것인가? 그러므로 하나님은 인간을 고통 중에 내버려 ...
하나님이 창조하신 이 우주는 질서와 조화의 세계이다. 그러나 그 질서는 인간이 생각하는 조화로 이루어 진 것이 아니다. 그 질서는 자유하시는 하나님의 자유로운 질서였으며 하나님의 선한 계획의 질서인 것이다. 본 논문에서 욥기의 하나님의 대답 부분에 나타난 욥이 하나님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가를 고찰해보았다. 이를 위해서 먼저 지혜문학이 창조질서에 대해서 어떻게 말하는가를 보았다. 그래서 지혜문학이 이 세상의 질서를 유지하는 것을 제일 과제로 삼았고, 인간 세상의 질서가 창조 질서 안에 이미 나타난 있는 것으로 본다는 사실을 말하였다. 또한 이 세계의 질서는 혼돈이 추방된 상태로 고정되어 있는 것으로 본다는 사실을 말하였다. 또한 이 세계의 질서는 혼돈이 추방된 상태로 고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혼돈의 위협을 계속 받고 있는 사실도 말하였다. 다음으로 본 논문의 본문인 38장-42장:6절에 대한 주석 작업을 하였다. 그 주석 작업을 통해서 하나님의 욥의 항변에 대한 대답에 나타나는 중요한 두 가지 사실을 알려준다는 것을 말하였다. 그것은 첫째로 하나님의 창조 안에는 혼돈이 그대로 남아 있다는 사실이다 혼돈의 세력은 이 우주가 창조 될 때에 소멸 된 것이 아니라, 현재에도 역시 존재하면서 자연과 인간의 삶을 위협하고 있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창조에 대한 두 번째 인식은 질서 속에 여전히 남아있는 혼돈의 위협을 감소시켜준다. 혼돈은 하나님의 지배와 완전하신 주권 아래에 있다. 혼돈은 하나님의 경계 아래에 놓여 있으며, 인간 사회를 향하여 그 교만한 물결을 마음대로 뻗을 수 없게 되었다. 창조질서 안에는 따라서 인간 삶과 사회의 구조 안에는 혼돈이 존재하고 있다. 욥에게 닫친 고통은 삶 속의 혼돈의 경험이다. 더구나 의인인 그에게 닫친 고통은 악인들조차도 쉽게 당하게 되는 그런 고통은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욥은 인간의 삶 안에 있는 혼돈을 발견하고, "하나님, 하나님의 세상에는 혼돈이 있습니다."라고 외친다. 그리고 그 외침에 대답하여 하나님은 "역시 그렇다 이 세상에는 여전히 혼돈이 있다. "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이런 혼돈의 요소들이 절대로 부조화나 제멋대로의 광폭함 속에 내버려둬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혼돈은 하나님의 지배 아래에 있다. 하나님 창조 질서 속에는 혼돈과 질서가 조화를 이루고 있는 것이다. 때문에 창조 질서속의 혼돈은 능히 극복될 수 있는 것이다. 그 혼돈은 하나님의 계획안에서, 창조 때에 그러했듯이 경계 지어지고 나뉘어 질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창조질서는 거대한 시작으로 볼 때에만, 즉 우주를 지으신 이의 안목에서 볼 때에만 비로소 이해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 시각은 인간에는 결코 열려 있지 않다. 욥의 순응은 이것을 보여준다. 하나님이 직접 대답하셨음에도 불구하고 욥은 하나님에 대해서, 또는 그의 창조활동에 대해서 아직도 이해하게 되지 않는다. 또한 그는 이해하기를 원하지 않았다. 사실상 창조에 그가 이해할 수 있거나 이해해야 하는 것은 없다. 욥은 다만 겸손하게 창조 질서 속에서 부여된 자신의 위치로 돌아가, 그 속에 자신의 고통에 대해 네라고 말할 수 있을 뿐이다. 인간 세계에는 멸망하는 의인과 흥하는 악인의 문제와 같은 부조리와 혼돈의 요소들이 여전히 남아있다. 욥기는 하나님의 창조질서를 이해할 때에 그 혼돈을 견딜 수 있게 되리라고 말하고 있지 않다. 욥기는 욥의 입을 빌어서 하나님의 창조질서, 하나님의 □□□는 인간이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그리고 창조 질서 속의 혼돈에 직면한 인간들을 향해서 네가 어떻게 행동할 것이냐? 즉 순종이냐 저항이냐를 끈질기게 묻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창조 질서는 욥의 문제에, 그리고 고통 가운데 있는 인간의 삶에 희망을 줄 수 있는가? 인간이 혼돈 속에 있는 존재라면, 그가 혼돈을 이길 수 있는 힘은 어디서 오는가? 이 문제는 창조 질서 안에 곧 삶 속에 하나님께서 존재하고 계신다는 사실로서 대답할 수 있을 것이다. 하나님이 이세상을 창조하셨다. 뿐만 아니라 그 개개의 창조된 피조물들의 삶에 창조주로서 적극적으로 개입하고 계신다. 하나님께서 독수리의 새끼에게 관심을 가지고 계신다면, 그 하나님이 당신의 일을 맡기신 인간에게는 또한 얼마나 지대한 관심을 쏟고 계실 것인가? 그러므로 하나님은 인간을 고통 중에 내버려 두시는 것이 아니라 욥에게 나타나셔서 들려주신 것처럼 그를 바라는 모든 인간에게 당신의 대답을 들려주시는 것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인간은 하나님을 올바로 이해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삶은 혼돈만의 자리가 아니며, 인간만의 자리도 아니다"라는 것을, 또한 삶은 하나님과 그의 창조 질서가 지배하는 곳이며, 그렇기 때문에 인간의 신실함은 희망 속에 있으며, 하나님을 향한 인간의 질문은 응답받을 수 있는 것이다. 욥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모든 것의 위대함, 아름다움, 그리고 지혜를 볼 수 있는 관조의 눔이 열리고 자기가 한 말들이 헛된 것임을 인식하는 과정을 살펴보았다. 욥의 마지막 고백에서 중요한 점은 그가 하나님의 창조 질서를 완전히 이해했다고 말하거나, 혹은 왜 그가 고통을 받아야 했었는가를 깨달았다고 말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하나님의 창조질서와 구원의 역사는 사실상 인간으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신비의 영역인 것이다. 저자는 욥기의 핵심이 하나님과 만남을 통한 욥의 회개에 있음을 분명히 한다. 이를 통해 저자는 자신의 무죄함을 인정받기 위하여 하나님을 단죄할 생각을 가졌던 욥이 알 수 없는 하나님의 계획안에서 자신이 할 수 있는 길이란 오직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 이외에 다른 것이 없음을 보여준다. 바로 이것이 욥을 통해 우리에게 제시되는 지혜의 길인 것이다. 이제 욥을 통해 보여진 이스라엘 고통의 역사는 우리 삶 안에 현재화되어 새롭게 체험되어야 한다. 욥이 하나님과의 만남을 통해 도달한 결론인 인간 존재의 의미, 곧 하나님을 경외해야 함의 의미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분명하게 볼 수 있어야 한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이 우주는 질서와 조화의 세계이다. 그러나 그 질서는 인간이 생각하는 조화로 이루어 진 것이 아니다. 그 질서는 자유하시는 하나님의 자유로운 질서였으며 하나님의 선한 계획의 질서인 것이다. 본 논문에서 욥기의 하나님의 대답 부분에 나타난 욥이 하나님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가를 고찰해보았다. 이를 위해서 먼저 지혜문학이 창조질서에 대해서 어떻게 말하는가를 보았다. 그래서 지혜문학이 이 세상의 질서를 유지하는 것을 제일 과제로 삼았고, 인간 세상의 질서가 창조 질서 안에 이미 나타난 있는 것으로 본다는 사실을 말하였다. 또한 이 세계의 질서는 혼돈이 추방된 상태로 고정되어 있는 것으로 본다는 사실을 말하였다. 또한 이 세계의 질서는 혼돈이 추방된 상태로 고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혼돈의 위협을 계속 받고 있는 사실도 말하였다. 다음으로 본 논문의 본문인 38장-42장:6절에 대한 주석 작업을 하였다. 그 주석 작업을 통해서 하나님의 욥의 항변에 대한 대답에 나타나는 중요한 두 가지 사실을 알려준다는 것을 말하였다. 그것은 첫째로 하나님의 창조 안에는 혼돈이 그대로 남아 있다는 사실이다 혼돈의 세력은 이 우주가 창조 될 때에 소멸 된 것이 아니라, 현재에도 역시 존재하면서 자연과 인간의 삶을 위협하고 있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창조에 대한 두 번째 인식은 질서 속에 여전히 남아있는 혼돈의 위협을 감소시켜준다. 혼돈은 하나님의 지배와 완전하신 주권 아래에 있다. 혼돈은 하나님의 경계 아래에 놓여 있으며, 인간 사회를 향하여 그 교만한 물결을 마음대로 뻗을 수 없게 되었다. 창조질서 안에는 따라서 인간 삶과 사회의 구조 안에는 혼돈이 존재하고 있다. 욥에게 닫친 고통은 삶 속의 혼돈의 경험이다. 더구나 의인인 그에게 닫친 고통은 악인들조차도 쉽게 당하게 되는 그런 고통은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욥은 인간의 삶 안에 있는 혼돈을 발견하고, "하나님, 하나님의 세상에는 혼돈이 있습니다."라고 외친다. 그리고 그 외침에 대답하여 하나님은 "역시 그렇다 이 세상에는 여전히 혼돈이 있다. "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이런 혼돈의 요소들이 절대로 부조화나 제멋대로의 광폭함 속에 내버려둬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혼돈은 하나님의 지배 아래에 있다. 하나님 창조 질서 속에는 혼돈과 질서가 조화를 이루고 있는 것이다. 때문에 창조 질서속의 혼돈은 능히 극복될 수 있는 것이다. 그 혼돈은 하나님의 계획안에서, 창조 때에 그러했듯이 경계 지어지고 나뉘어 질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창조질서는 거대한 시작으로 볼 때에만, 즉 우주를 지으신 이의 안목에서 볼 때에만 비로소 이해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 시각은 인간에는 결코 열려 있지 않다. 욥의 순응은 이것을 보여준다. 하나님이 직접 대답하셨음에도 불구하고 욥은 하나님에 대해서, 또는 그의 창조활동에 대해서 아직도 이해하게 되지 않는다. 또한 그는 이해하기를 원하지 않았다. 사실상 창조에 그가 이해할 수 있거나 이해해야 하는 것은 없다. 욥은 다만 겸손하게 창조 질서 속에서 부여된 자신의 위치로 돌아가, 그 속에 자신의 고통에 대해 네라고 말할 수 있을 뿐이다. 인간 세계에는 멸망하는 의인과 흥하는 악인의 문제와 같은 부조리와 혼돈의 요소들이 여전히 남아있다. 욥기는 하나님의 창조질서를 이해할 때에 그 혼돈을 견딜 수 있게 되리라고 말하고 있지 않다. 욥기는 욥의 입을 빌어서 하나님의 창조질서, 하나님의 □□□는 인간이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그리고 창조 질서 속의 혼돈에 직면한 인간들을 향해서 네가 어떻게 행동할 것이냐? 즉 순종이냐 저항이냐를 끈질기게 묻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창조 질서는 욥의 문제에, 그리고 고통 가운데 있는 인간의 삶에 희망을 줄 수 있는가? 인간이 혼돈 속에 있는 존재라면, 그가 혼돈을 이길 수 있는 힘은 어디서 오는가? 이 문제는 창조 질서 안에 곧 삶 속에 하나님께서 존재하고 계신다는 사실로서 대답할 수 있을 것이다. 하나님이 이세상을 창조하셨다. 뿐만 아니라 그 개개의 창조된 피조물들의 삶에 창조주로서 적극적으로 개입하고 계신다. 하나님께서 독수리의 새끼에게 관심을 가지고 계신다면, 그 하나님이 당신의 일을 맡기신 인간에게는 또한 얼마나 지대한 관심을 쏟고 계실 것인가? 그러므로 하나님은 인간을 고통 중에 내버려 두시는 것이 아니라 욥에게 나타나셔서 들려주신 것처럼 그를 바라는 모든 인간에게 당신의 대답을 들려주시는 것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인간은 하나님을 올바로 이해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삶은 혼돈만의 자리가 아니며, 인간만의 자리도 아니다"라는 것을, 또한 삶은 하나님과 그의 창조 질서가 지배하는 곳이며, 그렇기 때문에 인간의 신실함은 희망 속에 있으며, 하나님을 향한 인간의 질문은 응답받을 수 있는 것이다. 욥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모든 것의 위대함, 아름다움, 그리고 지혜를 볼 수 있는 관조의 눔이 열리고 자기가 한 말들이 헛된 것임을 인식하는 과정을 살펴보았다. 욥의 마지막 고백에서 중요한 점은 그가 하나님의 창조 질서를 완전히 이해했다고 말하거나, 혹은 왜 그가 고통을 받아야 했었는가를 깨달았다고 말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하나님의 창조질서와 구원의 역사는 사실상 인간으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신비의 영역인 것이다. 저자는 욥기의 핵심이 하나님과 만남을 통한 욥의 회개에 있음을 분명히 한다. 이를 통해 저자는 자신의 무죄함을 인정받기 위하여 하나님을 단죄할 생각을 가졌던 욥이 알 수 없는 하나님의 계획안에서 자신이 할 수 있는 길이란 오직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 이외에 다른 것이 없음을 보여준다. 바로 이것이 욥을 통해 우리에게 제시되는 지혜의 길인 것이다. 이제 욥을 통해 보여진 이스라엘 고통의 역사는 우리 삶 안에 현재화되어 새롭게 체험되어야 한다. 욥이 하나님과의 만남을 통해 도달한 결론인 인간 존재의 의미, 곧 하나님을 경외해야 함의 의미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분명하게 볼 수 있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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