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닐은 인간 영혼의 심리적 탐색을 시도함으로써 진실한 인생을 극작에서 나타내려고 노력한 작가였다. 그는 “인생의 배후에서 강압하는 수수께끼 같은 힘과 인생의 의미를 해결하려는 힘”에 대해 (Clark 53) 자신의 전 작품을 통해 면면히 파헤치려 노력한 작가이다. 즉, 오닐의 작품 세계는 삶에 필연적으로 자리하고 있는 운명적 힘을 외면하거나 또는 거기에 예속되어 버리는 나약한 인간의 모습을 통해 적나라한 삶의 참상만을 보여 주는 것이 아니라 그 힘과의 투쟁으로 변화하는 삶을 통해 새로운 인생의 의미를 담아 놓고 있다. 지금 까지 본 연구는 오닐의 작품 속에서 고립과 소외적 상황을 안겨 주는 운명적 힘을 부성의지와 부정적 모성의지로 분류하고, 두의지가 인물들과 무대 장치에 투영되어 대립-갈등 그리고 해소와 구원을 이루는 과정을 탐색해 왔다. 이러한 탐색으로 본 연구는 항상‘운명적 힘과의 영광스럽고 자멸적인 투쟁 속에서만 영원한 비극을 의식하고 있었으며 오직 그것만이 쓸 만한 가치가 있는 주제’임을 명확히 한 오닐의 극적 의도를 확인 할 수 있었다. 『느릅나무 밑의 욕망』에서 부정적 모성의지로서 에벤과 아비는 느릅나무와 관련 맺고 있다. 오닐은 이 극의 무대를 미국 ...
오닐은 인간 영혼의 심리적 탐색을 시도함으로써 진실한 인생을 극작에서 나타내려고 노력한 작가였다. 그는 “인생의 배후에서 강압하는 수수께끼 같은 힘과 인생의 의미를 해결하려는 힘”에 대해 (Clark 53) 자신의 전 작품을 통해 면면히 파헤치려 노력한 작가이다. 즉, 오닐의 작품 세계는 삶에 필연적으로 자리하고 있는 운명적 힘을 외면하거나 또는 거기에 예속되어 버리는 나약한 인간의 모습을 통해 적나라한 삶의 참상만을 보여 주는 것이 아니라 그 힘과의 투쟁으로 변화하는 삶을 통해 새로운 인생의 의미를 담아 놓고 있다. 지금 까지 본 연구는 오닐의 작품 속에서 고립과 소외적 상황을 안겨 주는 운명적 힘을 부성의지와 부정적 모성의지로 분류하고, 두의지가 인물들과 무대 장치에 투영되어 대립-갈등 그리고 해소와 구원을 이루는 과정을 탐색해 왔다. 이러한 탐색으로 본 연구는 항상‘운명적 힘과의 영광스럽고 자멸적인 투쟁 속에서만 영원한 비극을 의식하고 있었으며 오직 그것만이 쓸 만한 가치가 있는 주제’임을 명확히 한 오닐의 극적 의도를 확인 할 수 있었다. 『느릅나무 밑의 욕망』에서 부정적 모성의지로서 에벤과 아비는 느릅나무와 관련 맺고 있다. 오닐은 이 극의 무대를 미국 청교주의의 본산이라 할 수 있는 뉴잉글랜드를 배경으로 하여 상실된 신의 가치와 물질주의의 황폐성을 일깨워 주고 있다. 이 극에서 우리는 반대되는 두 철학의 충돌을 탐지했다. 즉, 돌로 비유되는 이프레임의 청교주의와, 느릅나무로 비유되는 디오니소스간의 갈등으로써 그것은 오닐이 일생동안 탐색해 왔던 것들이다. 그러나 오닐은 이러한 가치가 침전하거나 고착되는 것을 경계하고 영원한 새로움을 지향할 수 있는 창조적 정신의 소유자였던 것이다. 그러므로 그의 극은 어떤 가치를 위해 쓰여 지는 것이 아니라 그 가치를 넘어서는데 목적이 있는 것이다. 부성의지로서 이프레임은 뉴잉글랜드의 황폐한 농장, 그리고 그곳의 돌과 관련 맺고 있다. 긍정적 모성의지의 세계는 정신적, 물질적 안락과 삶의 풍요를 의미한다. 느릅나무는 불길한 모성애를 지니고 캐봇가 인물들을 지배하는 운명적인 힘으로 작용하고 있다. 이프레임으로 대변되는 청교주의 정신은 고행을 요구하며 본능적 삶을 억압한다. 이프레임을 억압하고 있는 심리적 현실의 배경은 청교주의에서 비롯되며, 그것은 정신적 구속을 의미한다. 따라서 그의 내적 자아를 지배하고 있는 청교주의 의지는 그에게 운명적 현실로서 운명적 힘으로 작용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프레임의 운명 역시 다른 인물들처럼 삶 그 자체에서 필연적으로 기인되는 것이나, 그것의 극복은 에벤이나 아비처럼 육체적 파멸 끝에 오는 새로운 삶의 창조를 통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닌 자신의 내적 자아에 대한 긍정적 수용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즉, 이프레임은 에벤이나 아비와 같이 디오니소스적인 의지 추구로 구원되어 지지 않고, 철저한 자기 인식과 충실한자기 삶의 이행의 결과로서만 구제되어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자신과 신과의 일치를 통해 냉혹한 자기 대면을 하고, 그곳의 황폐한 농장에서 충실한 삶의 의지를 보인 이프레임 또한 에벤이나 애비처럼 정신적 승리라는 구원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 『밤으로의 긴 여로』에서 부성의지는 타이론으로 구현되고 부정적 모성의지는 메리, 제이미, 에드먼드로 구현되어 그들은 서로 대립하고 있다. 그리고 타이론 가족 모두가 희망하고 있는 메리의 마약 극복은 긍정적 모성의지의 세계로 작용하고 있다. 오닐이 이 작품에서 목적하려 했던 것이 그 자신의 가족에 대한 깊은 이해와 화해였을지라도, 궁극적으로는 이 극의 추진력을 특징짓는 것은 상실의 위협, 즉 망각에 순간에 처해진 삶의 확인이다. 타이론 가족의 서로에 대한 비난과 토론은 그들의 사라져 가는 의식과 관련된 서로간의 부정 양상으로 이어져 있으며, 그것들은 그들의 정신적 소망에 대한 손실과 위협으로 반준 된다. 이러한 과정으로서 종종 상당히 길어지기도 하는 대화는 영혼을 강조하는 도구이며 마침내 오닐이 갈구한 영혼의 극으로서 그 성과를 이루어 내고 있는 것이다. 요컨대, 오닐은 이 극을 통해 문명 사회에서 실존적 인간의 곤경에 초점-타이론 가족의 자아와 영혼, 그리고 이들의 상실감과의 간극에서 생겨나는 고뇌-을 두고 있다. 과거는 이 극의 전체적인 운명적 힘이다. 과거로부터 그들은 심리 행동을 발원시키며 확인 시켜 가고 있다. 그리하여 결과적으로 인간에게 있어서 중요한 것은 결코 단념하지 않는 삶의 태도임을 명확히 부여해 주고 있다. 그것은 운명적 힘의 가혹한 횡포에도 불구하고 삶 그대로를 겸허하게 수용하는 위대한 영혼의 승리이며, 궁극적으로는 오닐의 실존적 구원에 대한 완전한 귀결인 것이다. 타이론 가족의 정신적 내용과 영혼의 위상을 조건짓고, 억압적인 고통스런 현실을 이루어 내는 운명적 힘의 기능은 공간적 유추에 의해 더욱 심화되어진다. 즉, 무대 효과로서 안개, 어둠, 술, 마약, 창문, 원탁 테이블, 웨딩 가운 등은 바로 운명적 힘의 의미와 관련을 맺고 있다. 안개 속에서 메리는 과거의 꿈에 대한 앙양감과 고결성을 얻고 싶은 욕구를 느낀다. 안개가 짙어 갈수록 들려오는 안개 고동은 부성 의지로서 메리를 억압한다. 어둠의 형상은 빛과 맞물려 그들의 그늘진 과거사의 심연이며 암담한 현실이다. 상대적으로 확산에서 사라짐으로 이어지는 빛은 창을 통해서 들어오며 갈등의 국면을 필연적으로 현시하는 기능을 지니고 있다. 마치 융(Jung)이 “낮과 빛은 의식과 동일하고, 밤과 어둠은 무의식과 동일하다”고 한 것처럼, 오닐의 빛과 어둠에 대한 상징적 처리는 극의 시간적 경과에 따른 타이론 가족의 정신적 암흑 상태를 의미하고 있는 것이다. 빛의 경도를 통해 그 가치를 지닐 수 있는 창은 현실을 정관하게 하는 관객의 몫으로 타이론 가족이 겪는 정신적 고뇌를 투영해 주고 있다. 오닐의 비극의 본질을 통찰케 하는 육체적 파멸의 길은 운명적 힘과의 투쟁에서 영광스럽고 자멸적인 패배를 통해 죽음을 극복하며 영원히 살아 숨쉬는 초극자의 과정인 것이다. 오닐은 생의 투명성 보다 생의 격동성에서 온갖 좌절과 비애를 극복하고 승리하는 자가 구원의 대상임을 명시하고 있다. 그리고 이프레임, 타이론, 에드먼드가 겪는 정신적 파멸은 인생의 해결책으로 죽음을 택하지 않고 자기반성을 통한 정신적 치유를 의미한다. 비록 구원이 제시되지 못한 상태에서 죽음만을 기다리며 사는 생일지라도 인간은 자신의 자유를 위한 참다운 노력- 존재론적인 투쟁- 을 해야만 한다는 그의 실존주의적 인식은 제시하고 있다. 인간은 운명적 힘의 극복을 통해 암울한 현실의 삶을 되돌아보고 철저한 자아 인식을 하게 되며 마침내 부조리한 인간 조건을 겸허히 받아들이게 되는 것이다. 그는 이러한 미해결의 부조리한 인간 조건을 받아들임으로써 실존적 세계의 비극상을 그려내고 있는 것이다. 비극을 불행한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오직 요즘 사람들의 판단일 뿐이다. 비극은 인생을 보다 깊게 이해하도록 정신적으로 일깨워 주는 요소이다. ....예술 작품은 항상 행복한 것이다. 그 이외의 것은 모두 불행하다....나는 인생이 아름답기 때문에 사랑하는 것이 아니다. 나는 그 보다는 더 진실 되게 인생을 사랑한다. 나는 인생의 적나라한 것을 사랑한다. 나에게는 추악한 인생 속에도 아름다움이 있기 때문이다. 오닐에게 비극은 삶의 의미인 동시에 희망인 것이다. 그리고 절망속에서 희망을 지닐 수 있는 자만이 영적 보상을 받을 수 있는 구원의 대상 (He with the spiritual guerdon of a hope in hopeles-sness, is nearest to the stars and the rainbows foot.)이듯, 오닐은 패배를 직면하면서도 인생을 용기 있게 긍정 할 수 있다는 점에서 분명한 낙관주의자이다. 오닐은 운명적 힘에 대항하여 끊임없이 투쟁으로 극복하는 인간의 모습을 통해 육체적 파멸에 의한 재생의 환희 또는 정신적 파멸에 의한 생의 재인식이라는 구원의 미학적 비젼을 확고히 하고 있다. 그러므로 오닐은 운명적 힘 에 의해 모든 인간의 공통된 제 문제를 발견하여 삶에서 가장 뿌리깊은 고뇌의 근원지를 탐색하고, 운명적 힘에 의한 삶의 복종이 아닌 투쟁에서 그의 예술적 염원을 실현코자 했던 것이다.
오닐은 인간 영혼의 심리적 탐색을 시도함으로써 진실한 인생을 극작에서 나타내려고 노력한 작가였다. 그는 “인생의 배후에서 강압하는 수수께끼 같은 힘과 인생의 의미를 해결하려는 힘”에 대해 (Clark 53) 자신의 전 작품을 통해 면면히 파헤치려 노력한 작가이다. 즉, 오닐의 작품 세계는 삶에 필연적으로 자리하고 있는 운명적 힘을 외면하거나 또는 거기에 예속되어 버리는 나약한 인간의 모습을 통해 적나라한 삶의 참상만을 보여 주는 것이 아니라 그 힘과의 투쟁으로 변화하는 삶을 통해 새로운 인생의 의미를 담아 놓고 있다. 지금 까지 본 연구는 오닐의 작품 속에서 고립과 소외적 상황을 안겨 주는 운명적 힘을 부성의지와 부정적 모성의지로 분류하고, 두의지가 인물들과 무대 장치에 투영되어 대립-갈등 그리고 해소와 구원을 이루는 과정을 탐색해 왔다. 이러한 탐색으로 본 연구는 항상‘운명적 힘과의 영광스럽고 자멸적인 투쟁 속에서만 영원한 비극을 의식하고 있었으며 오직 그것만이 쓸 만한 가치가 있는 주제’임을 명확히 한 오닐의 극적 의도를 확인 할 수 있었다. 『느릅나무 밑의 욕망』에서 부정적 모성의지로서 에벤과 아비는 느릅나무와 관련 맺고 있다. 오닐은 이 극의 무대를 미국 청교주의의 본산이라 할 수 있는 뉴잉글랜드를 배경으로 하여 상실된 신의 가치와 물질주의의 황폐성을 일깨워 주고 있다. 이 극에서 우리는 반대되는 두 철학의 충돌을 탐지했다. 즉, 돌로 비유되는 이프레임의 청교주의와, 느릅나무로 비유되는 디오니소스간의 갈등으로써 그것은 오닐이 일생동안 탐색해 왔던 것들이다. 그러나 오닐은 이러한 가치가 침전하거나 고착되는 것을 경계하고 영원한 새로움을 지향할 수 있는 창조적 정신의 소유자였던 것이다. 그러므로 그의 극은 어떤 가치를 위해 쓰여 지는 것이 아니라 그 가치를 넘어서는데 목적이 있는 것이다. 부성의지로서 이프레임은 뉴잉글랜드의 황폐한 농장, 그리고 그곳의 돌과 관련 맺고 있다. 긍정적 모성의지의 세계는 정신적, 물질적 안락과 삶의 풍요를 의미한다. 느릅나무는 불길한 모성애를 지니고 캐봇가 인물들을 지배하는 운명적인 힘으로 작용하고 있다. 이프레임으로 대변되는 청교주의 정신은 고행을 요구하며 본능적 삶을 억압한다. 이프레임을 억압하고 있는 심리적 현실의 배경은 청교주의에서 비롯되며, 그것은 정신적 구속을 의미한다. 따라서 그의 내적 자아를 지배하고 있는 청교주의 의지는 그에게 운명적 현실로서 운명적 힘으로 작용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프레임의 운명 역시 다른 인물들처럼 삶 그 자체에서 필연적으로 기인되는 것이나, 그것의 극복은 에벤이나 아비처럼 육체적 파멸 끝에 오는 새로운 삶의 창조를 통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닌 자신의 내적 자아에 대한 긍정적 수용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즉, 이프레임은 에벤이나 아비와 같이 디오니소스적인 의지 추구로 구원되어 지지 않고, 철저한 자기 인식과 충실한자기 삶의 이행의 결과로서만 구제되어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자신과 신과의 일치를 통해 냉혹한 자기 대면을 하고, 그곳의 황폐한 농장에서 충실한 삶의 의지를 보인 이프레임 또한 에벤이나 애비처럼 정신적 승리라는 구원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 『밤으로의 긴 여로』에서 부성의지는 타이론으로 구현되고 부정적 모성의지는 메리, 제이미, 에드먼드로 구현되어 그들은 서로 대립하고 있다. 그리고 타이론 가족 모두가 희망하고 있는 메리의 마약 극복은 긍정적 모성의지의 세계로 작용하고 있다. 오닐이 이 작품에서 목적하려 했던 것이 그 자신의 가족에 대한 깊은 이해와 화해였을지라도, 궁극적으로는 이 극의 추진력을 특징짓는 것은 상실의 위협, 즉 망각에 순간에 처해진 삶의 확인이다. 타이론 가족의 서로에 대한 비난과 토론은 그들의 사라져 가는 의식과 관련된 서로간의 부정 양상으로 이어져 있으며, 그것들은 그들의 정신적 소망에 대한 손실과 위협으로 반준 된다. 이러한 과정으로서 종종 상당히 길어지기도 하는 대화는 영혼을 강조하는 도구이며 마침내 오닐이 갈구한 영혼의 극으로서 그 성과를 이루어 내고 있는 것이다. 요컨대, 오닐은 이 극을 통해 문명 사회에서 실존적 인간의 곤경에 초점-타이론 가족의 자아와 영혼, 그리고 이들의 상실감과의 간극에서 생겨나는 고뇌-을 두고 있다. 과거는 이 극의 전체적인 운명적 힘이다. 과거로부터 그들은 심리 행동을 발원시키며 확인 시켜 가고 있다. 그리하여 결과적으로 인간에게 있어서 중요한 것은 결코 단념하지 않는 삶의 태도임을 명확히 부여해 주고 있다. 그것은 운명적 힘의 가혹한 횡포에도 불구하고 삶 그대로를 겸허하게 수용하는 위대한 영혼의 승리이며, 궁극적으로는 오닐의 실존적 구원에 대한 완전한 귀결인 것이다. 타이론 가족의 정신적 내용과 영혼의 위상을 조건짓고, 억압적인 고통스런 현실을 이루어 내는 운명적 힘의 기능은 공간적 유추에 의해 더욱 심화되어진다. 즉, 무대 효과로서 안개, 어둠, 술, 마약, 창문, 원탁 테이블, 웨딩 가운 등은 바로 운명적 힘의 의미와 관련을 맺고 있다. 안개 속에서 메리는 과거의 꿈에 대한 앙양감과 고결성을 얻고 싶은 욕구를 느낀다. 안개가 짙어 갈수록 들려오는 안개 고동은 부성 의지로서 메리를 억압한다. 어둠의 형상은 빛과 맞물려 그들의 그늘진 과거사의 심연이며 암담한 현실이다. 상대적으로 확산에서 사라짐으로 이어지는 빛은 창을 통해서 들어오며 갈등의 국면을 필연적으로 현시하는 기능을 지니고 있다. 마치 융(Jung)이 “낮과 빛은 의식과 동일하고, 밤과 어둠은 무의식과 동일하다”고 한 것처럼, 오닐의 빛과 어둠에 대한 상징적 처리는 극의 시간적 경과에 따른 타이론 가족의 정신적 암흑 상태를 의미하고 있는 것이다. 빛의 경도를 통해 그 가치를 지닐 수 있는 창은 현실을 정관하게 하는 관객의 몫으로 타이론 가족이 겪는 정신적 고뇌를 투영해 주고 있다. 오닐의 비극의 본질을 통찰케 하는 육체적 파멸의 길은 운명적 힘과의 투쟁에서 영광스럽고 자멸적인 패배를 통해 죽음을 극복하며 영원히 살아 숨쉬는 초극자의 과정인 것이다. 오닐은 생의 투명성 보다 생의 격동성에서 온갖 좌절과 비애를 극복하고 승리하는 자가 구원의 대상임을 명시하고 있다. 그리고 이프레임, 타이론, 에드먼드가 겪는 정신적 파멸은 인생의 해결책으로 죽음을 택하지 않고 자기반성을 통한 정신적 치유를 의미한다. 비록 구원이 제시되지 못한 상태에서 죽음만을 기다리며 사는 생일지라도 인간은 자신의 자유를 위한 참다운 노력- 존재론적인 투쟁- 을 해야만 한다는 그의 실존주의적 인식은 제시하고 있다. 인간은 운명적 힘의 극복을 통해 암울한 현실의 삶을 되돌아보고 철저한 자아 인식을 하게 되며 마침내 부조리한 인간 조건을 겸허히 받아들이게 되는 것이다. 그는 이러한 미해결의 부조리한 인간 조건을 받아들임으로써 실존적 세계의 비극상을 그려내고 있는 것이다. 비극을 불행한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오직 요즘 사람들의 판단일 뿐이다. 비극은 인생을 보다 깊게 이해하도록 정신적으로 일깨워 주는 요소이다. ....예술 작품은 항상 행복한 것이다. 그 이외의 것은 모두 불행하다....나는 인생이 아름답기 때문에 사랑하는 것이 아니다. 나는 그 보다는 더 진실 되게 인생을 사랑한다. 나는 인생의 적나라한 것을 사랑한다. 나에게는 추악한 인생 속에도 아름다움이 있기 때문이다. 오닐에게 비극은 삶의 의미인 동시에 희망인 것이다. 그리고 절망속에서 희망을 지닐 수 있는 자만이 영적 보상을 받을 수 있는 구원의 대상 (He with the spiritual guerdon of a hope in hopeles-sness, is nearest to the stars and the rainbows foot.)이듯, 오닐은 패배를 직면하면서도 인생을 용기 있게 긍정 할 수 있다는 점에서 분명한 낙관주의자이다. 오닐은 운명적 힘에 대항하여 끊임없이 투쟁으로 극복하는 인간의 모습을 통해 육체적 파멸에 의한 재생의 환희 또는 정신적 파멸에 의한 생의 재인식이라는 구원의 미학적 비젼을 확고히 하고 있다. 그러므로 오닐은 운명적 힘 에 의해 모든 인간의 공통된 제 문제를 발견하여 삶에서 가장 뿌리깊은 고뇌의 근원지를 탐색하고, 운명적 힘에 의한 삶의 복종이 아닌 투쟁에서 그의 예술적 염원을 실현코자 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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