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 연구는 죤 오웬의 성화론의 핵심인 ‘죄 죽임론’을 연구한 것이다. 오웬의 성화론의 기초는 ‘그리스도와의 연합’이라는 신학적 구도를 가지고 있다. 신자는 은혜로 그리스도와 연합되었고, 중생을 체험하게 된다. 그리고 성화사역은 중생을 완성으로 이끌어 간다. 이 성화의 과정에서 오웬은 ‘죄 죽임론’을 다루었다. 비록 신자는 예수 그리스도의 피 공로에 입각하여 하나님의 은혜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신자의 인격 속에는 내주하는 죄( Indwelling Sin)가 잔존하고 있다. 그러므로 신자는 새로운 본질과 내주하는 죄 사이에 존재하는 죄와 끊임없는 투쟁의 성화과정이 놓여있게 된 것이다. 죄가 인간의 마음 가운데 존재한다는 것은 기독교 교리의 가장 기초가 된다. 죄에 대한 연구는 은혜의 생활을 방해하는 마음에 있는 죄의 모습을 드러내는 것이다. 오웬은 이러한 죄의 본질을 롬 7:21-23에서 찾아 죄를 하나의 ‘법’이라고 말하였다. ‘법’이란 직접 다스리거나 혹은 그 영향력을 갖고 있는 것이다. 오웬은 내주하는 죄가 성화를 향하여 전진하는 신자들 속에 잔존하여 ‘하나의 법’으로 신자의 삶 속에서 항상 현존한다는 점을 지적한다. 이 ‘한 법’은 두 가지 의미를 지니고 있는데, 그 중 하나는 ‘죄의 실체와 본질’을 나타내고, 또 하나는 ‘죄의 세력과 효과’이다. 그러므로 내재하는 죄는 신자들의 내면에 있는 놀랍도록 효과적인 세력이며, 항상 악을 이루기 위해 역사한다. 비록 죄의 힘과 위력은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을 통하여 이미 손상되어 죄의 뿌리는 억제되고 있지만, 하나의 법으로서 신자 마음속에 아직 잔존하는 죄의 세력은 끊임없이 도전해 오고 있는 실정이다. 그리고 인간의 마음(heart)은 죄가 거하는 처소이며, 이 요새 안에서 폭군인 죄가 평생 하나님께 대한 반역을 꾀하고 있음을 오웬은 지적한다. 오웬은 신자들 속에 있는 죄를 죽이는 일을 수행함에 로마서 8장 13절에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되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라는 말씀으로 죄를 죽이는 기초를 삼았다. 먼저 그는 ‘만일’(If)로 시작되는 조건절은 죄 죽임과 생명의 원인과 결과 차원이 아닌 방법과 목적을 보여주고 있음을 밝히고 있다. 만일 너희가 이 방편을 사용하면 바로 그 목적에 도달하게 된다는 것이다. 둘째, 오웬은 ‘너희’(Ye)라는 단어를 통하여 죄 죽임을 이행할 대상은 오직 신자들에게 국한됨을 입증하고 있다. 죄 죽이기의 의무가 부과된 사람들은 너희 바로 신자들이라고 한다. 셋째, 오웬은 ‘너희가 성령에 의해’(If by the ...
본 연구는 죤 오웬의 성화론의 핵심인 ‘죄 죽임론’을 연구한 것이다. 오웬의 성화론의 기초는 ‘그리스도와의 연합’이라는 신학적 구도를 가지고 있다. 신자는 은혜로 그리스도와 연합되었고, 중생을 체험하게 된다. 그리고 성화사역은 중생을 완성으로 이끌어 간다. 이 성화의 과정에서 오웬은 ‘죄 죽임론’을 다루었다. 비록 신자는 예수 그리스도의 피 공로에 입각하여 하나님의 은혜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신자의 인격 속에는 내주하는 죄( Indwelling Sin)가 잔존하고 있다. 그러므로 신자는 새로운 본질과 내주하는 죄 사이에 존재하는 죄와 끊임없는 투쟁의 성화과정이 놓여있게 된 것이다. 죄가 인간의 마음 가운데 존재한다는 것은 기독교 교리의 가장 기초가 된다. 죄에 대한 연구는 은혜의 생활을 방해하는 마음에 있는 죄의 모습을 드러내는 것이다. 오웬은 이러한 죄의 본질을 롬 7:21-23에서 찾아 죄를 하나의 ‘법’이라고 말하였다. ‘법’이란 직접 다스리거나 혹은 그 영향력을 갖고 있는 것이다. 오웬은 내주하는 죄가 성화를 향하여 전진하는 신자들 속에 잔존하여 ‘하나의 법’으로 신자의 삶 속에서 항상 현존한다는 점을 지적한다. 이 ‘한 법’은 두 가지 의미를 지니고 있는데, 그 중 하나는 ‘죄의 실체와 본질’을 나타내고, 또 하나는 ‘죄의 세력과 효과’이다. 그러므로 내재하는 죄는 신자들의 내면에 있는 놀랍도록 효과적인 세력이며, 항상 악을 이루기 위해 역사한다. 비록 죄의 힘과 위력은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을 통하여 이미 손상되어 죄의 뿌리는 억제되고 있지만, 하나의 법으로서 신자 마음속에 아직 잔존하는 죄의 세력은 끊임없이 도전해 오고 있는 실정이다. 그리고 인간의 마음(heart)은 죄가 거하는 처소이며, 이 요새 안에서 폭군인 죄가 평생 하나님께 대한 반역을 꾀하고 있음을 오웬은 지적한다. 오웬은 신자들 속에 있는 죄를 죽이는 일을 수행함에 로마서 8장 13절에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되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라는 말씀으로 죄를 죽이는 기초를 삼았다. 먼저 그는 ‘만일’(If)로 시작되는 조건절은 죄 죽임과 생명의 원인과 결과 차원이 아닌 방법과 목적을 보여주고 있음을 밝히고 있다. 만일 너희가 이 방편을 사용하면 바로 그 목적에 도달하게 된다는 것이다. 둘째, 오웬은 ‘너희’(Ye)라는 단어를 통하여 죄 죽임을 이행할 대상은 오직 신자들에게 국한됨을 입증하고 있다. 죄 죽이기의 의무가 부과된 사람들은 너희 바로 신자들이라고 한다. 셋째, 오웬은 ‘너희가 성령에 의해’(If by the Spirit)라는 문구를 통해 신자의 죄 죽임의 의무의 수행함에 있어서 주도권을 가지고 효력을 내는 ‘동인’은 ‘성령’임을 논증하고 있다. 죄를 죽이는 다른 모든 방식들은 다 허사이다. 다른 모든 도움은 다 무용지물이다. 죄 죽임의 조성자(author)는 오직 성령이며, 신자의 마음속에서 격동하고 있는 이 죄의 세력의 지배가 오직 성령의 사역으로 파괴될 수 있다는 것이다. 넷째, 오웬은 ‘몸의 행실을 죽이면’(mortify the deeds of body)이라는 부분을 통하여 죄 죽임은 신자의 의무조항임을 분명히 한다. 그는 죄 죽임이 성령의 사역임을 논증함과 동시에 신자에게는 자신의 몸의 행실을 죽일 의무가 있음을 강조한다. 여기서 가리키는 ‘몸’은 우리의 본성의 부패와 타락성을 표현하는 말로 보아야 한다. 죄는 대부분 몸을 거하는 장소와 도구로 삼고 있기 때문이다. 또 ‘몸의 행실’에서 ‘행실’은 주로 외양적 행동들을 지시하고, ‘육체의 일들’로 칭해지는 것들을 가리킨다고 오웬은 주장한다. 육체의 행실들은 그 행실이 나오는 원인부터 죽여야 한다는 것이다. 내주하는 죄가 육체의 행실과 일을 낼 생기와 능력을 갖지 못하게 죽이는 일은 신자들의 부단한 의무라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오웬은 ‘살리니’(Ye shall live)를 통하여 죄 죽임의 의무를 수행하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으로부터 확실한 약속이 주어졌음을 주장하고 있다. ‘너희가 살리라’는 “너희가 지상에 있을 동안 활력 있고 위안 있는 영적인 삶을 영위하게 될 것이고, 내세에는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될 것이라”고 오웬은 주장한다. 그러기에 우리의 영적인 삶의 생기와 힘과 위안은 육체의 행실을 죽이는 여부에 달려 있다는 것이다. 오웬의 성화론의 기초는 죄의 지배의 종말에 근거를 두고 있다. 어떤 사람이 그리스도인이 될 때에 죄의 지배는 끝난다. 그래서 오웬은 이 기초에 그의 성화의 교리를 세운다. 만약 어떤 사람이 그리스도인이 된다면, 죄의 지배는 멸해질 것이 틀림없다. 죄의 본성은 중생이나 성화에서 변화하지 않으나, 우리 안에서 죄의 상태는 철저히 변한다. 이러한 구별은 그리스도인의 삶의 특성에 자주 결정적이다. 어떻게 죄의 지배에서 벗어날 수 있는가? 에 대한 오웬의 입장은 그리스도께서 죄와 사망의 권세를 감당하시기 위해 십자가에 달려 자신의 몸으로 저주를 다 받으셨음으로, 우리는 율법의 저주에서 해방되었으며, 그분이 그의 완전한 생명을 통하여 신자들을 위하여 거룩을 요구하는 율법의 요구를 다 성취하셨기에 가능하며, 자기를 믿는 모든 사람들의 의를 이루기 위하여 율법의 완성이 되셨기에 우리는 죄와 율법의 지배에서 자유하게 되었다고 분명하게 주장하고 있다. 신자가 더 이상 죄의 지배를 받지 않는 것은 율법아래 있지 않고 오직 은혜아래 있기 때문이다. 또한 죄의 지배의 종말은 죄 세력의 약화에 기인하며, 이로 인하여 신자들에게 죄 죽이기가 가능케 되었다. 오웬은 비록 신자 중 최상의 신자라 할지라도, 죄 죽이기를 감당해야 할 필요성에 대하여 매우 강조하고 있다. 이는 우리의 영적 생활의 생명과 활력에 대한 약속이 죄를 죽이는 데 달려있기 때문이다. 오웬은 신자라 할지라도 육체를 입고 있는 동안 죄 죽이기를 해야 할 필요성에 대해 6가지를 말한다. 첫째는 신자 안에 현재 내주하는 죄의 실존 때문이다. 내주하는 죄는 이 세상에 있는 동안에 항상 존재한다. 그러니 내주하는 죄를 항상 죽여야 하는 것이다. 신자는 육체를 입고 있기 때문에 항상 육체의 소욕과 내주하는 죄악을 접촉하면서 살아갈 수밖에 없는 존재이다. 그래서 신자는 ‘사망의 몸’(롬7:24)은 가지고 있기에 이 사망의 몸에서 벗어나는 것은 ‘우리 몸의 죽음’을 통해서 뿐이라고 오웬은 말한다. 둘째로 죄는 거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여전히 활동하고 있으며, 육신의 행실을 맺도록 애를 쓰고 있기 때문이다. 셋째, 만일 신자가 죄를 계속 죽이지 못하고 허용한다면 영혼을 파괴하는 무기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넷째, 하나님께서 신자에게는 성령을 허락하시고 새로운 성품을 주신 주요한 이유가 죄를 죽이는 것이기 때문이다. 죄를 죽이는 일을 매일 하지 않는 것은 하나님의 선하심과 자비하심과 하나님의 지혜와 은혜와 사랑을 대적하는 것이므로 거룩함을 온전히 이루어 가는 것이 신자의 의무이기 때문이다(고후7:1). 만일 신자가 죄를 죽이는 일을 하지 않는다면 죄가 우리의 마음을 어둡게 하며, 육신의 정욕이 잡초처럼 자라게 된다. 오직 죄를 죽이는 일은 영혼의 토지를 비옥하게 하는 일이 되는데, 그 이유는 하나님의 은혜가 충분하게 뿌리를 내리고 잘 자라게 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오웬은 죄 죽이기를 모든 신자가 감당해야 하는 진정한 의무라고 결론을 짓고 있다. 오웬은 롬8:13의 “너는 ...살리라”는 구절을 인용하면서 죄 죽임의 유용성을 피력한다. 신자의 삶의 활력과 평화 그리도 새로운 능력은 오직 끊임없는 죄 죽임의 과정 속에서 공급된다. 죽이지 못한 죄는 어느 것이든지 반드시 두 가지 현상을 일으키는데, 그 중 하나는 영혼을 약하게 하고 그 활력을 빼앗아 가는 것이고, 또 다른 하나는 영혼을 어둡게 하여 그 속에서 내재하고 있던 위로와 평강을 앗아가 버리는 것이다. 오웬은 당시의 로마 카톨릭이 주장하는 죄 죽이기의 수단이 모두 잘못된 것들로 구성되었다고 비판한다. 그들의 죄 죽이기를 위해 사용하는 수단은 하나님의 약속에 근거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의 거친 의복, 맹세, 고행, 수련, 수도생활 등에 대하여 ‘잡다한 자기 고행’에 불과한 것이라고 힘주어 강조하고 있다. 오웬이 말하는 어떤 죄를 죽인다는 것은 그 죄를 철저하게 죽이거나 뿌리까지 뽑아 완전하게 멸하여 더 이상은 그 죄가 우리 마음에서 발붙이거나 거처를 갖지 못하게 함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물론 그러한 것을 목표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이 세상에서 살 동안에 그러한 일을 완성해 내지는 못하는 것이다. 물론 성령과 그리스도의 은혜로 말미암아 어떤 죄를 이기는 놀라운 성공이나 탁월한 승리를 이룩하여 사람이 그 죄를 거의 부단하게 이길 상태에 이르기를 목표하는 일은 있어야 하지만, 그 죄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을 정도로 완전하게 죽이고 멸하는 일은 이생에서는 기대하지 말아야 한다. 그렇지만 바울이 빌3:12에서 고백했듯이 최선을 다하여야 한다. 죄를 죽인다는 것은 어떤 죄를 위장하는 것이 아니며, 조용하고 차분한 성품을 개량시키는 것도 아니다. 오웬은 죄 죽이기를 위한 원리로 진지함과 근면함을 두고 있다. 진지함은 그 인격에 관한 것이고, 근면함은 그 죄 죽이는 일 자체에 관한 것이다. 오웬은 죄를 죽이는 구체적인 방안들 중 제일 되는 일은 죄나 정욕의 습관을 약화시키는 것을 들고 있다. 그 습관이 이전과 같이 강압적으로 마음을 산만케 하지 못하게 하고, 유혹하여 마음을 빗나가게 하지 못하게 하고, 마음의 고요를 깨뜨리고 복잡하게 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그것을 가리켜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다”(갈5:24)고 바울은 표현하였다. 두 번째, 죄를 대항하여 계속적인 싸움과 투쟁을 해야한다. 신자는 자기가 다루어야 할 원수가 있음을 알고, 그 원수를 주목하고, 그 원수를 멸해야 한다는 의식이 요청된다는 것이다. 원수들의 도모와 의도를 알아내고 그들의 목적을 간파해 내고, 이전에 어떤 방식과 무슨 방도를 통해서 그 원수들이 이겼는지 생각하는 것이다. 오웬은 매일 정욕을 짓누르는 일이야말로 그 싸움의 극치라고 한다. 정욕이 잠잠한 채 있다고 해서 그것이 죽은 것이 아니라 잠시 물러갈 뿐이라는 것이다. 그러기에 그 정욕에 새로운 상처를 주고 매일 더 가격하는 일을 지속해야 한다는 것이다. 세 번째는 죄를 제어하는데 성공해야 한다는 것이다. 어떤 때에든지 죄가 작용하고 있고 유혹하고 있고, 육체의 생각을 부추기어 정욕을 이루도록 상상력을 자극하는 것을 알게 될 때, 마음이 즉시로 죄를 알아차리고 그것을 하나님의 율법과 그리스도의 사랑 앞으로 가져가고 그것을 정죄하고, 죄를 추적하여 최대한으로 타도하는 것을 의미한다. 오웬은 칼빈의 전통을 가장 잘 이어받은 신학자중 한 사람이다. 오웬은 칼빈의 성화론에 있어서 은혜사상, 지속적 성화사상, 삶의 신학을 이어갔다. 이 두 사람은 그 시대 속에서 이해해야 한다. 칼빈의 신학은 16C 로마 카톨릭의 공로사상과 재세례파의 완전주의의 잘못된 신학적 내용과 싸우는 배경 하에서 형성된 신학이다. 그러기에 종교개혁의 열기가 그 속에 담겨 있다. 반면에 오웬은 종교개혁 후 100여년이 지난 17C에 있었기에 그는 삶을 강조하였다. 그러므로 이 두 사람을 단순히 상대적으로 비교할 수는 없는 것이다. 칼빈은 자기 시대에 중요한 신학을 정립하였고, 오웬도 칼빈을 이어받아 자기 시대 속에서 삶에 필요한 신학을 세웠다고 볼 수 있다. 오웬은 칼빈으로부터 이어받은 성화신학을 삶 속에 체계적이고 깊이 있게 정립하여 후손에게 전해 주었다고 하겠다. 칼빈과 오웬의 성화론을 비교 고찰하면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일치점을 찾을 수 있다. 첫째, 은혜 중심의 성화론을 전개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오웬도 그의 신학의 기초인 그리스도와 연합된 은혜에 기초한 신학임을 볼 때 칼빈과 오웬의 일치점을 찾을 수 있다. 둘째, 실천적 삶의 성화신학이다. 칼빈의 성화론이 실천적이고 전투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었던 것처럼, 오웬의 성화론, 특히 죄 죽임의 교리에 나타난 것 또한 삶의 실천적 신학이다. 셋째, 지속적 성화신학이다. 칼빈의 성화론은 일평생 육의 몸을 벗는 날까지 지속적으로 육과 싸우는 전투적인 성화론으로 회개의 과정을 중요시하고 있다. 칼빈도 오웬도 탁상공론이 아니라 생활 속에서 실천적이고 지속적인 성화론을 가지고 있다. 칼빈은 죄 죽임론을 그의 ‘기독교 강요’에서 전반적인 사상을 가지고서, 지엽적이고 부분적으로 이 주제를 다루었다. 그런데 오웬은 칼빈의 이 주제를 이어 받아 하나의 책으로 다루었다. 오웬의 죄 죽임론은 엄청난 작업의 결과였음을 지적할 수 있는 것이다. 게다가 칼빈의 ‘죄 죽임론’을 개혁주의 신학에서 오웬은 방대한 신학의 한 분야로 다루었음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오웬의 성화론은 단순히 성경적 도그마를 체계적으로 논증하는데 그치기보다 자신의 풍부한 체험적 목회를 통한 목회론적 차원에서 접근하고 있으며, 그의 신학적 큰 틀인 은혜 신학관점에서의 성화론을 비롯한 모든 신학 작업을 수행하고자 노력하고 있음을 관찰할 수 있다. 오웬은 단순히 철학적인 사색과 추상적인 이념에 머무른 것이 아니었다. 그는 신학적 학문을 체계적으로 수립하고 단순히 사변적이고도 형이상학적인 신학을 위한 신학을 전개하기보다 삶의 신학(Living Theology)을 주장하고, 진정 “살아 꿈틀거리며 역동적으로 사역하는 그리스도인”으로서 한 평생을 보내었다. 그는 ‘죄 죽임’없는 신학의 정립은 무의미하고, 무가치한 과정임을 말하고 있다. 그는 그리스도인의 삶을 강조하였다. 오웬은 그리스도인이 이 땅에 살 동안 그를 위한 하나님의 목적은 성화로 보았다. 우리의 죄 사함을 위하여 얼마나 큰 희생이 예수 그리스도안에서 치루어 졌는가를 깨닫게 하고 그 용서와 은혜가 큰 만큼 더 죄짓기를 두려워하게 하고 더 깨어서 죄와 싸우는 삶을 살게 한다. 우리가 이 땅위에서 구원받고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인생의 나머지 길을 걷는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문제는 “어떻게 해야 내가 자신과의 영적인 싸움에서 승리할 수 있는가?”라는 문제이다. 오웬은 이러한 기본적인 인생의 물음 앞에 서서 성경전체를 일목요연하게 신학 작업을 통하여 체계적으로 정립하고, 신자의 인생관과 세계관을 분명하게 세워가도록 하기 위해 신학을 신앙에 도입하고 있다. 그러므로 그의 신학은 삶의 신학이자 살아있는 신학 그 자체라고 말할 수 있다. 오웬은 신자의 성화 과정 속에서 죄 죽임을 가능케 하는 가장 근본적인 원리를 하나님의 은혜에서 찾았다. 그러면서 신자는 죄 죽임을 위해서 구체적인 수단들을 대한 적극적으로 활용할 것을 강조한다. 신자의 죄 죽임은 성령의 사역이며, 이 사역은 예수 그리스도의 피 공로에 근거하여 성령께서 ‘은혜의 수단들’이라는 통로를 신자들에게 수여하심으로 가능케 되었다. 오웬은 이 수단들을 ‘성령에 의해 창조된 습관들’이라고 한다. 오웬은 성화에 있어서 두 개의 패러다임 즉, 성화는 신자의 의무이지만 죄 죽임의 궁극적인 조성자이신 성령의 사역의 결과에 기인한다는 점에 초점을 맞추었다. 왜냐하면 성령의 은혜의 수단이 신자들에게 수여되지 않는다면 신자로서는 아무것도 수행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오웬의 신학의 큰 틀은 은혜신학이라고 할 수 있다. 은혜의 신학관점에서의 성화론을 비롯한 모든 신학 작업을 수행하고자 노력하고 있음을 관찰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성화를 이루어 가는 과정에서 신자가 철저하게 노력해야 할 방식에 대하여 매우 구체적이고 세밀하게 제시함으로써 인간의 의무를 결코 소홀히 하지 않음을 볼 수 있다. 은혜와 의무와의 양자간 조화는 오웬 신학의 특징이다.
본 연구는 죤 오웬의 성화론의 핵심인 ‘죄 죽임론’을 연구한 것이다. 오웬의 성화론의 기초는 ‘그리스도와의 연합’이라는 신학적 구도를 가지고 있다. 신자는 은혜로 그리스도와 연합되었고, 중생을 체험하게 된다. 그리고 성화사역은 중생을 완성으로 이끌어 간다. 이 성화의 과정에서 오웬은 ‘죄 죽임론’을 다루었다. 비록 신자는 예수 그리스도의 피 공로에 입각하여 하나님의 은혜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신자의 인격 속에는 내주하는 죄( Indwelling Sin)가 잔존하고 있다. 그러므로 신자는 새로운 본질과 내주하는 죄 사이에 존재하는 죄와 끊임없는 투쟁의 성화과정이 놓여있게 된 것이다. 죄가 인간의 마음 가운데 존재한다는 것은 기독교 교리의 가장 기초가 된다. 죄에 대한 연구는 은혜의 생활을 방해하는 마음에 있는 죄의 모습을 드러내는 것이다. 오웬은 이러한 죄의 본질을 롬 7:21-23에서 찾아 죄를 하나의 ‘법’이라고 말하였다. ‘법’이란 직접 다스리거나 혹은 그 영향력을 갖고 있는 것이다. 오웬은 내주하는 죄가 성화를 향하여 전진하는 신자들 속에 잔존하여 ‘하나의 법’으로 신자의 삶 속에서 항상 현존한다는 점을 지적한다. 이 ‘한 법’은 두 가지 의미를 지니고 있는데, 그 중 하나는 ‘죄의 실체와 본질’을 나타내고, 또 하나는 ‘죄의 세력과 효과’이다. 그러므로 내재하는 죄는 신자들의 내면에 있는 놀랍도록 효과적인 세력이며, 항상 악을 이루기 위해 역사한다. 비록 죄의 힘과 위력은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을 통하여 이미 손상되어 죄의 뿌리는 억제되고 있지만, 하나의 법으로서 신자 마음속에 아직 잔존하는 죄의 세력은 끊임없이 도전해 오고 있는 실정이다. 그리고 인간의 마음(heart)은 죄가 거하는 처소이며, 이 요새 안에서 폭군인 죄가 평생 하나님께 대한 반역을 꾀하고 있음을 오웬은 지적한다. 오웬은 신자들 속에 있는 죄를 죽이는 일을 수행함에 로마서 8장 13절에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되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라는 말씀으로 죄를 죽이는 기초를 삼았다. 먼저 그는 ‘만일’(If)로 시작되는 조건절은 죄 죽임과 생명의 원인과 결과 차원이 아닌 방법과 목적을 보여주고 있음을 밝히고 있다. 만일 너희가 이 방편을 사용하면 바로 그 목적에 도달하게 된다는 것이다. 둘째, 오웬은 ‘너희’(Ye)라는 단어를 통하여 죄 죽임을 이행할 대상은 오직 신자들에게 국한됨을 입증하고 있다. 죄 죽이기의 의무가 부과된 사람들은 너희 바로 신자들이라고 한다. 셋째, 오웬은 ‘너희가 성령에 의해’(If by the Spirit)라는 문구를 통해 신자의 죄 죽임의 의무의 수행함에 있어서 주도권을 가지고 효력을 내는 ‘동인’은 ‘성령’임을 논증하고 있다. 죄를 죽이는 다른 모든 방식들은 다 허사이다. 다른 모든 도움은 다 무용지물이다. 죄 죽임의 조성자(author)는 오직 성령이며, 신자의 마음속에서 격동하고 있는 이 죄의 세력의 지배가 오직 성령의 사역으로 파괴될 수 있다는 것이다. 넷째, 오웬은 ‘몸의 행실을 죽이면’(mortify the deeds of body)이라는 부분을 통하여 죄 죽임은 신자의 의무조항임을 분명히 한다. 그는 죄 죽임이 성령의 사역임을 논증함과 동시에 신자에게는 자신의 몸의 행실을 죽일 의무가 있음을 강조한다. 여기서 가리키는 ‘몸’은 우리의 본성의 부패와 타락성을 표현하는 말로 보아야 한다. 죄는 대부분 몸을 거하는 장소와 도구로 삼고 있기 때문이다. 또 ‘몸의 행실’에서 ‘행실’은 주로 외양적 행동들을 지시하고, ‘육체의 일들’로 칭해지는 것들을 가리킨다고 오웬은 주장한다. 육체의 행실들은 그 행실이 나오는 원인부터 죽여야 한다는 것이다. 내주하는 죄가 육체의 행실과 일을 낼 생기와 능력을 갖지 못하게 죽이는 일은 신자들의 부단한 의무라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오웬은 ‘살리니’(Ye shall live)를 통하여 죄 죽임의 의무를 수행하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으로부터 확실한 약속이 주어졌음을 주장하고 있다. ‘너희가 살리라’는 “너희가 지상에 있을 동안 활력 있고 위안 있는 영적인 삶을 영위하게 될 것이고, 내세에는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될 것이라”고 오웬은 주장한다. 그러기에 우리의 영적인 삶의 생기와 힘과 위안은 육체의 행실을 죽이는 여부에 달려 있다는 것이다. 오웬의 성화론의 기초는 죄의 지배의 종말에 근거를 두고 있다. 어떤 사람이 그리스도인이 될 때에 죄의 지배는 끝난다. 그래서 오웬은 이 기초에 그의 성화의 교리를 세운다. 만약 어떤 사람이 그리스도인이 된다면, 죄의 지배는 멸해질 것이 틀림없다. 죄의 본성은 중생이나 성화에서 변화하지 않으나, 우리 안에서 죄의 상태는 철저히 변한다. 이러한 구별은 그리스도인의 삶의 특성에 자주 결정적이다. 어떻게 죄의 지배에서 벗어날 수 있는가? 에 대한 오웬의 입장은 그리스도께서 죄와 사망의 권세를 감당하시기 위해 십자가에 달려 자신의 몸으로 저주를 다 받으셨음으로, 우리는 율법의 저주에서 해방되었으며, 그분이 그의 완전한 생명을 통하여 신자들을 위하여 거룩을 요구하는 율법의 요구를 다 성취하셨기에 가능하며, 자기를 믿는 모든 사람들의 의를 이루기 위하여 율법의 완성이 되셨기에 우리는 죄와 율법의 지배에서 자유하게 되었다고 분명하게 주장하고 있다. 신자가 더 이상 죄의 지배를 받지 않는 것은 율법아래 있지 않고 오직 은혜아래 있기 때문이다. 또한 죄의 지배의 종말은 죄 세력의 약화에 기인하며, 이로 인하여 신자들에게 죄 죽이기가 가능케 되었다. 오웬은 비록 신자 중 최상의 신자라 할지라도, 죄 죽이기를 감당해야 할 필요성에 대하여 매우 강조하고 있다. 이는 우리의 영적 생활의 생명과 활력에 대한 약속이 죄를 죽이는 데 달려있기 때문이다. 오웬은 신자라 할지라도 육체를 입고 있는 동안 죄 죽이기를 해야 할 필요성에 대해 6가지를 말한다. 첫째는 신자 안에 현재 내주하는 죄의 실존 때문이다. 내주하는 죄는 이 세상에 있는 동안에 항상 존재한다. 그러니 내주하는 죄를 항상 죽여야 하는 것이다. 신자는 육체를 입고 있기 때문에 항상 육체의 소욕과 내주하는 죄악을 접촉하면서 살아갈 수밖에 없는 존재이다. 그래서 신자는 ‘사망의 몸’(롬7:24)은 가지고 있기에 이 사망의 몸에서 벗어나는 것은 ‘우리 몸의 죽음’을 통해서 뿐이라고 오웬은 말한다. 둘째로 죄는 거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여전히 활동하고 있으며, 육신의 행실을 맺도록 애를 쓰고 있기 때문이다. 셋째, 만일 신자가 죄를 계속 죽이지 못하고 허용한다면 영혼을 파괴하는 무기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넷째, 하나님께서 신자에게는 성령을 허락하시고 새로운 성품을 주신 주요한 이유가 죄를 죽이는 것이기 때문이다. 죄를 죽이는 일을 매일 하지 않는 것은 하나님의 선하심과 자비하심과 하나님의 지혜와 은혜와 사랑을 대적하는 것이므로 거룩함을 온전히 이루어 가는 것이 신자의 의무이기 때문이다(고후7:1). 만일 신자가 죄를 죽이는 일을 하지 않는다면 죄가 우리의 마음을 어둡게 하며, 육신의 정욕이 잡초처럼 자라게 된다. 오직 죄를 죽이는 일은 영혼의 토지를 비옥하게 하는 일이 되는데, 그 이유는 하나님의 은혜가 충분하게 뿌리를 내리고 잘 자라게 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오웬은 죄 죽이기를 모든 신자가 감당해야 하는 진정한 의무라고 결론을 짓고 있다. 오웬은 롬8:13의 “너는 ...살리라”는 구절을 인용하면서 죄 죽임의 유용성을 피력한다. 신자의 삶의 활력과 평화 그리도 새로운 능력은 오직 끊임없는 죄 죽임의 과정 속에서 공급된다. 죽이지 못한 죄는 어느 것이든지 반드시 두 가지 현상을 일으키는데, 그 중 하나는 영혼을 약하게 하고 그 활력을 빼앗아 가는 것이고, 또 다른 하나는 영혼을 어둡게 하여 그 속에서 내재하고 있던 위로와 평강을 앗아가 버리는 것이다. 오웬은 당시의 로마 카톨릭이 주장하는 죄 죽이기의 수단이 모두 잘못된 것들로 구성되었다고 비판한다. 그들의 죄 죽이기를 위해 사용하는 수단은 하나님의 약속에 근거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의 거친 의복, 맹세, 고행, 수련, 수도생활 등에 대하여 ‘잡다한 자기 고행’에 불과한 것이라고 힘주어 강조하고 있다. 오웬이 말하는 어떤 죄를 죽인다는 것은 그 죄를 철저하게 죽이거나 뿌리까지 뽑아 완전하게 멸하여 더 이상은 그 죄가 우리 마음에서 발붙이거나 거처를 갖지 못하게 함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물론 그러한 것을 목표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이 세상에서 살 동안에 그러한 일을 완성해 내지는 못하는 것이다. 물론 성령과 그리스도의 은혜로 말미암아 어떤 죄를 이기는 놀라운 성공이나 탁월한 승리를 이룩하여 사람이 그 죄를 거의 부단하게 이길 상태에 이르기를 목표하는 일은 있어야 하지만, 그 죄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을 정도로 완전하게 죽이고 멸하는 일은 이생에서는 기대하지 말아야 한다. 그렇지만 바울이 빌3:12에서 고백했듯이 최선을 다하여야 한다. 죄를 죽인다는 것은 어떤 죄를 위장하는 것이 아니며, 조용하고 차분한 성품을 개량시키는 것도 아니다. 오웬은 죄 죽이기를 위한 원리로 진지함과 근면함을 두고 있다. 진지함은 그 인격에 관한 것이고, 근면함은 그 죄 죽이는 일 자체에 관한 것이다. 오웬은 죄를 죽이는 구체적인 방안들 중 제일 되는 일은 죄나 정욕의 습관을 약화시키는 것을 들고 있다. 그 습관이 이전과 같이 강압적으로 마음을 산만케 하지 못하게 하고, 유혹하여 마음을 빗나가게 하지 못하게 하고, 마음의 고요를 깨뜨리고 복잡하게 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그것을 가리켜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다”(갈5:24)고 바울은 표현하였다. 두 번째, 죄를 대항하여 계속적인 싸움과 투쟁을 해야한다. 신자는 자기가 다루어야 할 원수가 있음을 알고, 그 원수를 주목하고, 그 원수를 멸해야 한다는 의식이 요청된다는 것이다. 원수들의 도모와 의도를 알아내고 그들의 목적을 간파해 내고, 이전에 어떤 방식과 무슨 방도를 통해서 그 원수들이 이겼는지 생각하는 것이다. 오웬은 매일 정욕을 짓누르는 일이야말로 그 싸움의 극치라고 한다. 정욕이 잠잠한 채 있다고 해서 그것이 죽은 것이 아니라 잠시 물러갈 뿐이라는 것이다. 그러기에 그 정욕에 새로운 상처를 주고 매일 더 가격하는 일을 지속해야 한다는 것이다. 세 번째는 죄를 제어하는데 성공해야 한다는 것이다. 어떤 때에든지 죄가 작용하고 있고 유혹하고 있고, 육체의 생각을 부추기어 정욕을 이루도록 상상력을 자극하는 것을 알게 될 때, 마음이 즉시로 죄를 알아차리고 그것을 하나님의 율법과 그리스도의 사랑 앞으로 가져가고 그것을 정죄하고, 죄를 추적하여 최대한으로 타도하는 것을 의미한다. 오웬은 칼빈의 전통을 가장 잘 이어받은 신학자중 한 사람이다. 오웬은 칼빈의 성화론에 있어서 은혜사상, 지속적 성화사상, 삶의 신학을 이어갔다. 이 두 사람은 그 시대 속에서 이해해야 한다. 칼빈의 신학은 16C 로마 카톨릭의 공로사상과 재세례파의 완전주의의 잘못된 신학적 내용과 싸우는 배경 하에서 형성된 신학이다. 그러기에 종교개혁의 열기가 그 속에 담겨 있다. 반면에 오웬은 종교개혁 후 100여년이 지난 17C에 있었기에 그는 삶을 강조하였다. 그러므로 이 두 사람을 단순히 상대적으로 비교할 수는 없는 것이다. 칼빈은 자기 시대에 중요한 신학을 정립하였고, 오웬도 칼빈을 이어받아 자기 시대 속에서 삶에 필요한 신학을 세웠다고 볼 수 있다. 오웬은 칼빈으로부터 이어받은 성화신학을 삶 속에 체계적이고 깊이 있게 정립하여 후손에게 전해 주었다고 하겠다. 칼빈과 오웬의 성화론을 비교 고찰하면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일치점을 찾을 수 있다. 첫째, 은혜 중심의 성화론을 전개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오웬도 그의 신학의 기초인 그리스도와 연합된 은혜에 기초한 신학임을 볼 때 칼빈과 오웬의 일치점을 찾을 수 있다. 둘째, 실천적 삶의 성화신학이다. 칼빈의 성화론이 실천적이고 전투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었던 것처럼, 오웬의 성화론, 특히 죄 죽임의 교리에 나타난 것 또한 삶의 실천적 신학이다. 셋째, 지속적 성화신학이다. 칼빈의 성화론은 일평생 육의 몸을 벗는 날까지 지속적으로 육과 싸우는 전투적인 성화론으로 회개의 과정을 중요시하고 있다. 칼빈도 오웬도 탁상공론이 아니라 생활 속에서 실천적이고 지속적인 성화론을 가지고 있다. 칼빈은 죄 죽임론을 그의 ‘기독교 강요’에서 전반적인 사상을 가지고서, 지엽적이고 부분적으로 이 주제를 다루었다. 그런데 오웬은 칼빈의 이 주제를 이어 받아 하나의 책으로 다루었다. 오웬의 죄 죽임론은 엄청난 작업의 결과였음을 지적할 수 있는 것이다. 게다가 칼빈의 ‘죄 죽임론’을 개혁주의 신학에서 오웬은 방대한 신학의 한 분야로 다루었음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오웬의 성화론은 단순히 성경적 도그마를 체계적으로 논증하는데 그치기보다 자신의 풍부한 체험적 목회를 통한 목회론적 차원에서 접근하고 있으며, 그의 신학적 큰 틀인 은혜 신학관점에서의 성화론을 비롯한 모든 신학 작업을 수행하고자 노력하고 있음을 관찰할 수 있다. 오웬은 단순히 철학적인 사색과 추상적인 이념에 머무른 것이 아니었다. 그는 신학적 학문을 체계적으로 수립하고 단순히 사변적이고도 형이상학적인 신학을 위한 신학을 전개하기보다 삶의 신학(Living Theology)을 주장하고, 진정 “살아 꿈틀거리며 역동적으로 사역하는 그리스도인”으로서 한 평생을 보내었다. 그는 ‘죄 죽임’없는 신학의 정립은 무의미하고, 무가치한 과정임을 말하고 있다. 그는 그리스도인의 삶을 강조하였다. 오웬은 그리스도인이 이 땅에 살 동안 그를 위한 하나님의 목적은 성화로 보았다. 우리의 죄 사함을 위하여 얼마나 큰 희생이 예수 그리스도안에서 치루어 졌는가를 깨닫게 하고 그 용서와 은혜가 큰 만큼 더 죄짓기를 두려워하게 하고 더 깨어서 죄와 싸우는 삶을 살게 한다. 우리가 이 땅위에서 구원받고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인생의 나머지 길을 걷는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문제는 “어떻게 해야 내가 자신과의 영적인 싸움에서 승리할 수 있는가?”라는 문제이다. 오웬은 이러한 기본적인 인생의 물음 앞에 서서 성경전체를 일목요연하게 신학 작업을 통하여 체계적으로 정립하고, 신자의 인생관과 세계관을 분명하게 세워가도록 하기 위해 신학을 신앙에 도입하고 있다. 그러므로 그의 신학은 삶의 신학이자 살아있는 신학 그 자체라고 말할 수 있다. 오웬은 신자의 성화 과정 속에서 죄 죽임을 가능케 하는 가장 근본적인 원리를 하나님의 은혜에서 찾았다. 그러면서 신자는 죄 죽임을 위해서 구체적인 수단들을 대한 적극적으로 활용할 것을 강조한다. 신자의 죄 죽임은 성령의 사역이며, 이 사역은 예수 그리스도의 피 공로에 근거하여 성령께서 ‘은혜의 수단들’이라는 통로를 신자들에게 수여하심으로 가능케 되었다. 오웬은 이 수단들을 ‘성령에 의해 창조된 습관들’이라고 한다. 오웬은 성화에 있어서 두 개의 패러다임 즉, 성화는 신자의 의무이지만 죄 죽임의 궁극적인 조성자이신 성령의 사역의 결과에 기인한다는 점에 초점을 맞추었다. 왜냐하면 성령의 은혜의 수단이 신자들에게 수여되지 않는다면 신자로서는 아무것도 수행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오웬의 신학의 큰 틀은 은혜신학이라고 할 수 있다. 은혜의 신학관점에서의 성화론을 비롯한 모든 신학 작업을 수행하고자 노력하고 있음을 관찰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성화를 이루어 가는 과정에서 신자가 철저하게 노력해야 할 방식에 대하여 매우 구체적이고 세밀하게 제시함으로써 인간의 의무를 결코 소홀히 하지 않음을 볼 수 있다. 은혜와 의무와의 양자간 조화는 오웬 신학의 특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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