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논의의 출발점은 "구원이 단순하게 성취되었다"하는 점을 넘어서, 직접적으로 구원의 서정이라는 것은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아가는 차원으로 그 점에 초점을 맞추고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일들이 그대로 모든 신자들에게 어떻게 이뤄지는가 하는 점에 있었다. 그런데 다양한 인본주의적 구원론의 도전 가운데서도 성경적인 구원론은,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이해와 신구약의 통일성 그리고 예정론 가운데서 어느 정도 개혁신학의 중요한 틀로서 정착되어 왔지만, 그간 개혁주의 신학연구에서도 그리스도의 천상사역의 계속적 사역내용은 상실된 주제로서 논의가 부족한 상태에 있다. 그런데 칼빈은 기독교강요 1536년 초판에서 천상사역으로서 "그리스도의 계속적 사역"을 "그리스도께서 비록 하늘에 오르심으로써 우리의 시야로부터 그의 몸을 감추셨지만 그러나 여전히 그는 신자와 함께 있어 도움과 힘이 되시고 또 그의 현존의 분명한 능력을 보여 주시는 것이다.”라고 정의하면서, 그리스도의 계속적 사역을 ① 첫째로 우리로 하여금 성부께서 접근케 하고, ② 둘째로 길을 닦으며, ③ 셋째로 우리를 성부에게 드리고, ④넷째로 우리를 위해서 그로부터 은혜를 구하며, ⑤ 다섯째로 우리를 위한 영원한 대변자와 중보자(perpetuus pro nostris advocatus ac mediator)로서 그에게 간구하고, ⑥여섯째로 우리의 범죄를 위해서 중보기도를 드리시며(intercedat), ⑦ 일곱째로 끊임없이 성부와 화해시키는 것으로 요약하고 있다.(히7:24이하, 9:11이하, 롬8:26-27, 요일2:1) 그리고 칼빈은 더 나아가서 1559년 최종판에서도 그리스도의 계속적 사역을 "그리스도께서 영원 불변한 중보자로서 이 세상의 종말까지 수행하신다"라는 말로 발전적으로 설명함으로써 그리스도의 계속적 사역의 종말론적 의미를 더해서 그리스도의 계속적 사역에 대한 이해를 발전적으로 전개해 나가고 있다. 칼빈은 기독교강요 1559년 최종판에서도 이와 같은 그리스도의 계속적 사역을 천상에 오르셔서 아버지 우편에 앉아계신 예언자와 왕과 제사장으로서의 직책을 수행하신다라는 말로 설명한다. 이렇게 칼빈이 기독교강요 초판에서 시작하고 1559년 최종판에서 계속적이며 발전적으로 적용하고 있는 "그리스도의 계속적 사역"은 구원의 서정 전의 가까운 원인을 확보하는 것으로 확실하게 자리 잡고 있으며, 그것은(천상사역으로서의 그리스도의 계속적 사역) 어거스틴이 논증하고 있고 성경에 뿌리를 두고 있기 때문에 칼빈의 구조아래 객관적으로 분석되고 보증될 수 있는 내용으로서 자리매김하고 있으며, 개혁신학자인 칼빈에게서 새롭게 얻어진 신학적인 뜻으로서 믿음에 대한 부분에서 그리스께서 하시는 역할이 잘 설명되면서 칼빈만의 독특한 신학적 내용으로 그리스도께서 승천 후에 어떤 역사를 하시는가가 잘 드러나고 있다. 이와 같은 그리스도의 계속적 사역이 우리에게 주는 혜택은 ① 첫째 주께서 승천하심으로써 아담 때문에 닫혔던 천국 길을 여셨다.(요14:3) 이로 인해 우리는 어떤 의미에서 이미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과 함께 하늘에 앉아 있다는 결론이 된다(엡2:6). 그래서 우리는 소망만으로 하늘을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머리이신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하늘을 차지하고 있는 것이다.② 둘째 그리스도께서 항상 우리의 예언자와 중보자로서 아버지 앞에 나타나시기 때문에(히7:25, 9:11,12, 롬8:34) 아버지께서 우리의 죄를 보시지 않고 그리스도의 의를 보시게 하심으로써 아버지의 마음을 우리와 화해하게 하신다.③셋째 그리스도의 중재로 우리가 아버지의 보좌에 가까이 가는 길을 준비하신다. ④ 넷째 그리스도는 하늘에 앉으시사, 우리에게 자기의 권능을 주입하셔서 매일 영적보화를 아낌없이 부어주심으로써 우리를 영적생명으로 살리신다. ⑤ 다섯째 그리스도는 성령으로 우리를 성결하게 하신다. ⑥ 여섯째 각종 은사로 교회를 장식하시며 교회가 해를 받지 않고 안전하도록 보호하신다. ⑦ 일곱째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우리의 구원에 반대하여 날뛰는 원수들을 그의 강한 손으로 억제하신다. ⑧ 여덟째 천지의 모든 권한을 잡고 계시면서 이 모든 일을 계속하시다가 드디어는 그의 원수이자 우리의 원수인 자들을 모두 굴복시키고(고전15:25,참조시110:1) 교회건설을 완성하실 것이다.⑨아홉 번째 드디어 그는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셔서 최후의 처리를 완수하실 것인데, 오시면 양과 염소, 선택된 자와 버림받은 자를 분리하실 것이다.(마25:31-33), 생사간에 아무도 그의 심판을 면하지 못할 것이다. 나팔 소리가 땅 끝까지 울려 모든 사람을 심판대 앞에 부를 것이니, 그 날에 살아 있는 사람들과 이미 산 자들 사이에서 죽어간 사람들이 모두 소집될 것이다.(살전4:16-17) 여기서 우리가 기대해야 하는 것은, 바로 우리의 구속주가 우리를 심판하는 심판대에 계시리라는 것으로 그것은 평범한 보장이 아니다. 그뿐 아니라, 지금 복음을 통해서 영원한 축복을 약속하시는 이가 그때에는 심판정에서 그 약속을 실행하실 것이다. 결론적으로 칼빈은 "중보이신 그리스도 안에 각종 선한 것이 풍성하게 장만되어 있다. 우리는 다른 데로 갈것이 아니라, 이 원천에서 마음껏 마셔야 한다. 그리스도만으로 만족해야 한다. 그리스도의 풍부한 축복을 한번 참으로 안다면 그리스도에게서 다른 쪽으로 돌리지 못할 것이다”라고 단언한다. 이렇게 칼빈은 “그리스도의 계속적 사역은 이렇게 중보로서 택자들을 통해서 이 세상의 종말까지 수행하신다.”는 점을 가르치고 강조한다. 이와 같은 칼빈신학의 기초이자 기둥은 하나님의 영광과 성경에 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피조물인 인간이 자기의 자랑과 교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창조의 권리에 따라 하나님의 명령을 복종해야 하며, 또한 하나님을 경외하며 하나님 안에서 모든 선한 것을 찾고 하나님께 모든 선한 것을 돌려 드리는 것이라고 정의한 것처럼, 칼빈은 철저한 신본주의 신학자이다. 칼빈의 독특성은 아무리 인간이 신앙을 통해서 선택을 의식한다 ...
우리 논의의 출발점은 "구원이 단순하게 성취되었다"하는 점을 넘어서, 직접적으로 구원의 서정이라는 것은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아가는 차원으로 그 점에 초점을 맞추고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일들이 그대로 모든 신자들에게 어떻게 이뤄지는가 하는 점에 있었다. 그런데 다양한 인본주의적 구원론의 도전 가운데서도 성경적인 구원론은,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이해와 신구약의 통일성 그리고 예정론 가운데서 어느 정도 개혁신학의 중요한 틀로서 정착되어 왔지만, 그간 개혁주의 신학연구에서도 그리스도의 천상사역의 계속적 사역내용은 상실된 주제로서 논의가 부족한 상태에 있다. 그런데 칼빈은 기독교강요 1536년 초판에서 천상사역으로서 "그리스도의 계속적 사역"을 "그리스도께서 비록 하늘에 오르심으로써 우리의 시야로부터 그의 몸을 감추셨지만 그러나 여전히 그는 신자와 함께 있어 도움과 힘이 되시고 또 그의 현존의 분명한 능력을 보여 주시는 것이다.”라고 정의하면서, 그리스도의 계속적 사역을 ① 첫째로 우리로 하여금 성부께서 접근케 하고, ② 둘째로 길을 닦으며, ③ 셋째로 우리를 성부에게 드리고, ④넷째로 우리를 위해서 그로부터 은혜를 구하며, ⑤ 다섯째로 우리를 위한 영원한 대변자와 중보자(perpetuus pro nostris advocatus ac mediator)로서 그에게 간구하고, ⑥여섯째로 우리의 범죄를 위해서 중보기도를 드리시며(intercedat), ⑦ 일곱째로 끊임없이 성부와 화해시키는 것으로 요약하고 있다.(히7:24이하, 9:11이하, 롬8:26-27, 요일2:1) 그리고 칼빈은 더 나아가서 1559년 최종판에서도 그리스도의 계속적 사역을 "그리스도께서 영원 불변한 중보자로서 이 세상의 종말까지 수행하신다"라는 말로 발전적으로 설명함으로써 그리스도의 계속적 사역의 종말론적 의미를 더해서 그리스도의 계속적 사역에 대한 이해를 발전적으로 전개해 나가고 있다. 칼빈은 기독교강요 1559년 최종판에서도 이와 같은 그리스도의 계속적 사역을 천상에 오르셔서 아버지 우편에 앉아계신 예언자와 왕과 제사장으로서의 직책을 수행하신다라는 말로 설명한다. 이렇게 칼빈이 기독교강요 초판에서 시작하고 1559년 최종판에서 계속적이며 발전적으로 적용하고 있는 "그리스도의 계속적 사역"은 구원의 서정 전의 가까운 원인을 확보하는 것으로 확실하게 자리 잡고 있으며, 그것은(천상사역으로서의 그리스도의 계속적 사역) 어거스틴이 논증하고 있고 성경에 뿌리를 두고 있기 때문에 칼빈의 구조아래 객관적으로 분석되고 보증될 수 있는 내용으로서 자리매김하고 있으며, 개혁신학자인 칼빈에게서 새롭게 얻어진 신학적인 뜻으로서 믿음에 대한 부분에서 그리스께서 하시는 역할이 잘 설명되면서 칼빈만의 독특한 신학적 내용으로 그리스도께서 승천 후에 어떤 역사를 하시는가가 잘 드러나고 있다. 이와 같은 그리스도의 계속적 사역이 우리에게 주는 혜택은 ① 첫째 주께서 승천하심으로써 아담 때문에 닫혔던 천국 길을 여셨다.(요14:3) 이로 인해 우리는 어떤 의미에서 이미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과 함께 하늘에 앉아 있다는 결론이 된다(엡2:6). 그래서 우리는 소망만으로 하늘을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머리이신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하늘을 차지하고 있는 것이다.② 둘째 그리스도께서 항상 우리의 예언자와 중보자로서 아버지 앞에 나타나시기 때문에(히7:25, 9:11,12, 롬8:34) 아버지께서 우리의 죄를 보시지 않고 그리스도의 의를 보시게 하심으로써 아버지의 마음을 우리와 화해하게 하신다.③셋째 그리스도의 중재로 우리가 아버지의 보좌에 가까이 가는 길을 준비하신다. ④ 넷째 그리스도는 하늘에 앉으시사, 우리에게 자기의 권능을 주입하셔서 매일 영적보화를 아낌없이 부어주심으로써 우리를 영적생명으로 살리신다. ⑤ 다섯째 그리스도는 성령으로 우리를 성결하게 하신다. ⑥ 여섯째 각종 은사로 교회를 장식하시며 교회가 해를 받지 않고 안전하도록 보호하신다. ⑦ 일곱째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우리의 구원에 반대하여 날뛰는 원수들을 그의 강한 손으로 억제하신다. ⑧ 여덟째 천지의 모든 권한을 잡고 계시면서 이 모든 일을 계속하시다가 드디어는 그의 원수이자 우리의 원수인 자들을 모두 굴복시키고(고전15:25,참조시110:1) 교회건설을 완성하실 것이다.⑨아홉 번째 드디어 그는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셔서 최후의 처리를 완수하실 것인데, 오시면 양과 염소, 선택된 자와 버림받은 자를 분리하실 것이다.(마25:31-33), 생사간에 아무도 그의 심판을 면하지 못할 것이다. 나팔 소리가 땅 끝까지 울려 모든 사람을 심판대 앞에 부를 것이니, 그 날에 살아 있는 사람들과 이미 산 자들 사이에서 죽어간 사람들이 모두 소집될 것이다.(살전4:16-17) 여기서 우리가 기대해야 하는 것은, 바로 우리의 구속주가 우리를 심판하는 심판대에 계시리라는 것으로 그것은 평범한 보장이 아니다. 그뿐 아니라, 지금 복음을 통해서 영원한 축복을 약속하시는 이가 그때에는 심판정에서 그 약속을 실행하실 것이다. 결론적으로 칼빈은 "중보이신 그리스도 안에 각종 선한 것이 풍성하게 장만되어 있다. 우리는 다른 데로 갈것이 아니라, 이 원천에서 마음껏 마셔야 한다. 그리스도만으로 만족해야 한다. 그리스도의 풍부한 축복을 한번 참으로 안다면 그리스도에게서 다른 쪽으로 돌리지 못할 것이다”라고 단언한다. 이렇게 칼빈은 “그리스도의 계속적 사역은 이렇게 중보로서 택자들을 통해서 이 세상의 종말까지 수행하신다.”는 점을 가르치고 강조한다. 이와 같은 칼빈신학의 기초이자 기둥은 하나님의 영광과 성경에 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피조물인 인간이 자기의 자랑과 교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창조의 권리에 따라 하나님의 명령을 복종해야 하며, 또한 하나님을 경외하며 하나님 안에서 모든 선한 것을 찾고 하나님께 모든 선한 것을 돌려 드리는 것이라고 정의한 것처럼, 칼빈은 철저한 신본주의 신학자이다. 칼빈의 독특성은 아무리 인간이 신앙을 통해서 선택을 의식한다 해도, 그 선택은 영원한 삼위일체 하나님의 예정 안에 있다는 것이다. 즉 무오한 하나님의 말씀 곧 성경뿐만 아니라 창조와 섭리, 구원의 모든 역사의 유일한 주체는 분리할 수 없이 유일한 하나님이신 삼위일체 하나님의 역사라는 것이다. 칼빈에게 있어 그리스도의 은택에로의 참여는 이미 그리스도의 인격과의 교제를 가정하는 것이 진실인 한, 그리스도로부터 교회에게 주신 전가와 선물하심이 모든 것에 앞서간다. 이미 영원 전에, 선택과 더 자세히 구원의 언약 안에 중보자와 성부로부터 그에게 주어진 자들 사이에 어떤 띠가 있는데, 그때 이미 즉 하나님의 결정 안에 둘 사이에 신비한 연합이 결성되었다. 그러므로 은혜의 모든 은택들은 그리스도의 인격 안에 교회를 위해 준비되어 있는 것이다. 인간은 아무 것도 덧붙일 것이 없다. 구원의 성취는 구원의 서정에 있다. 종교개혁 당시 하나님의 구원사역에 인간이 저항할 수도 있고 동의할 수도 있다는 로마 카톨릭의 사상은 후대에 알미니우스에게서 더욱 분명해진다. 알미니우스주의자들에 의하면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의지가 신앙과 회심쪽으로 향하도록 그를 중생하게 하는 데 있어서 그의 무한한 능력을 사용하시지 않는다. 하나님께서는 이 모든 은혜의 사역을 다 이루신 후에라도 인간은 하나님과 성령에 저항할 수 있는데, 이 때에도 하나님은 인간이 중생하기를 바라며 그를 중생시키고자 하신다. 따라서 인간이 강하게 저항함으로써 완전히 중생치 않게 될 수도 있는데, 인간의 중생되는 것과 안되는 것은 인간의 의지에 달려있다. 반면 칼빈의 입장을 고수했던 도르트 성직자들은 다음과 같이 가르쳤다. 하나님께서 우리 속에서 역사하사 새로운 모습으로 만드시되 죽음에서 부활의 새생명을 얻도록 하신 것은, 결코 복음을 외칭으로나 도덕적 권면으로 ,또는 -물론 하나님께서 일을 하신 후에 인간편에서는 계속적으로 변화되는 일이 된다 하더라도- 인간적인 수단으로 되는 것이 아니다라고 했다. 변화된 마음은 하나님에 의해서 이뤄지고 효력을 낼 뿐이며, 인간은 이 받은 은혜로 인하여 믿고 회개함에 이른다고 말해야 옳다고 가르쳤다. 이러한 도르트 성직자들의 입장이란 결국 칼빈의 견해인 것이다. 이렇게 우리는 구원이 단순하게 성취되었다 하는 점보다는, 직접적으로 구원의 서정이라는 것이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아 간다는 점을 감안하여,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일들이 어떻게 계속적으로 이뤄지는지와 함께 그 주체와 관련한 칼빈의 이해와 신학적 발전에 대해서 살펴보았다. 그 결과 구원의 서정이 곧 그리스도와의 신비적 연합을 설명하려는 논리적인 시도임을 감안할 때, 구원의 서정이 가지는 궁극적인 관심, 곧 신자들이 교회 속에서 현실적으로 그리스도와의 신비적 연합이라는 중심 주제를 어떻게 적용해나가는가를 살펴볼 수 있었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계속적 사역"이라는 개념은 칼빈이라는 개혁자로부터 새롭게 얻어진 신학적 발전이라는 것도 발견했다. 칼빈에 의해서 기독교강요 초판에서 지적되고 1559년 최종판에서 발전적으로 설명되고 있으며 그것은 어거스틴은 물론이고 성경에 기반을 두고 보증되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계속적 사역"이라는 개념이 개혁자에 의해서 신학적으로 새롭게 얻어진 개혁자의 뜻으로부터 벗어나, 칼빈과 다른 것으로 벗어나고 본래의 역사적 내용에서 멀어져 가면서 다양하게 변화되어 가는 것을 보는 것은 안타까움을 더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와 같은 변화의 원인을 찾아본다면, 종교개혁자들을 통해서 이루어진 개혁내용이 사실 구원론과 교회론 중심으로 이루어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기 때문에 개혁신학자들의 경우 어느 정도 개혁신학의 중요한 틀이 그들에 의해서 잘 유지되어 왔다고 볼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장로교 신학이 그 전반에 있어서 직접적으로 계승하고 있는 칼빈의 신학적 강조들이 역사의 과정을 통해서 알미니우스주의나 아미롤드주의 등에 의해서 흐려지고 곡해된 부분들이 많이 있어 왔기 때문이라고 본다면, 그런 부분들은 새롭게 조명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특별히 구원의 서정(성화)에 관한 부분이 그렇다. 그리고 그동안 무시되었던 삼위일체 하나님과 그 구조 및 개혁신학의 독특한 기독론이 신구약의 실체의 통일성과 긴밀한 관계에 있음을 알아야 한다. 예정론과 구원의 성취, 구원의 서정이 하나님의 속성과 하나님의 나라의 열매들과 깊은 관계가 있음을 알아야 한다. 특별히 도르트회의에서 전체적으로 결정된 내용과 신학적 입장들에 대한 객관적인 자료들에 대한 정확한 이해나 지식이 부족하여 생긴 구원론에 대한 문제들도 해결되어야 한다 구원의 서정은 성도의 삶에 너무나 밀접한 부분이기 때문에 "그리스도를 믿는다" 고백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많은 관심을 기우릴 것이다. 하지만 많은 관심이 있다고 바른 가르침 가운데 있는 것은 아니다. 우리가 신론이나 인간론 기독론을 다루면서 살폈던 핵심 내용이 총체적으로 녹아져 있지 않다면, 구원론에서의 구원의 서정은 그야말로 인간적인 방식으로 접근하게 될 것이다. 자신의 힘으로 믿고, 거룩하게 되고, 자신의 공로로 구원받을 것이라는 사고는 우리를 지배할 것이다. 하지만 결코 칼빈은 이 문제를 그렇게 풀고 있지 않았다. 그는 성경의 어느 구절을 제시하더라도 결코 인간의 구원의 문제를 자신의 공로로 풀지 않았다. 오직 하나님의 은혜의 풍성함이 거기에 있을 뿐이다. 본고에서 칼빈에게 있어서 그리스도의 계속적 사역과 구원의 서정에 관해서 탐구한 결과, 칼빈은 분명하게 루터나 로마 카톨릭의 견해와 다른 입장에 있다는 것을 알았고, 다음으로 개혁주의에서도 구원의 순서에 차이가 있음을 알게 되었다. 학자마다 그리고 시대에 따라서 차이가 있을 수 있다. 따라서 종교개혁시대에 살았던 칼빈의 구원론과 관련된 여러 개념과 오늘날 우리들이 이해하는 개념과 다소 차이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칼빈의 입장을 고수해야 한다는 것이 연구자의 입장이다. 칼빈의 구원론을 통해서 본 “그리스도의 계속적 사역과 구원의 서정”은, “하나님의 구원사역은 인간의 공로를 필요로 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인간의 그 어떠한 협력을 요하지 않는다는 것과, 그 분의 은혜를 거절할 수 있는 성격이 아니며, 의롭다 칭하여 주신 은혜는 상실되는 성격이 아니기 때문에 고해성사나 면죄부와 같이 인간의 고안된 방식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계속적 사역을 가까운 원인으로 둔 구원의 서정”은 회개, 신앙, 성화와 같은 과정도 소명, 중생, 칭의와 마찬가지로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을 뿐이지 인간의 의지의 결단에서 출발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 분명해진다. 칼빈의 논증은 그 누구의 가르침보다도 독특하고 이 부분에 있어서 명쾌하다고 할 수 있다. 이번 과정을 거쳐서 지득한 “그리스도의 천상에서의 사역으로서 계속사역과 구원의 서정에 대한 이해”를 통해 오늘날 잘못된 행태의 신앙생활을 바로잡고, 성경의 참된 가르침으로 접근해 나가야 한다. 확실한 것은 우리는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통해서만 우리 자신에 대한 확실한 지식에 도달할 수 있다는 사실이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우리 모두의 조상 아담이 실족해서 죄를 범했을 때, 지혜와 의와 거룩함과 그분의 생명을 상실하고 이러한 하나님의 형상이 취소되고 지워졌다는 엄청난 사실 앞에서 우리는 두려워 떨어야 할 것이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통해-우리가 이 죽을 몸을 입고 있는 동안-우리 안에서 부패한 욕망들, 육신의 정욕들, 그리고 왜곡되고 부패한 우리 본성이 일으키는 모든 것이 죽어 가는 것이다.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는 날마다 새로워져서(고후4:16) 새로운 생명 가운데 걷게 되며(롬6:4) 의를 위해 살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아버지께서 독생자에게 주신 유익을 어떻게 받는가 하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우리 밖에 계시고 우리가 그와 떨어져 있는 한,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고난당하시며 행하신 일이 무용, 무가치한 것임을 알아야 한다. 그러므로 아버지에게서 받으신 것을 우리에게 나눠주시기 위해서는, 그가 우리의 것이 되며 우리 안에 계셔야 한다. 우리는 포도나무의 가지로서 오직 그에게 붙어 있어야만 한다. 그때 그리스도의 모든 은택이 우리에게 거져 주어지는 것이다. 우리가 할 일은 없는 것이다. 이와 같은 구원의 적용으로서 그리스도의 계속적인 사역은 아버지 하나님 우편에 계신 그리스도께서 그의 지상사역 기간에 행하셨던 중보의 삼직, 즉 선지자와 제사장과 왕으로서의 직책을 영원히 수행하고 계신 것으로 설명된다. 이때 우편의 개념이 공간적이나 장소적 개념 만으로서의 우편이 아님을 알 아야 한다. 성례에 관계하여서도 그리스도의 영적임재가 나타난 것이지 육체적(Christus totum)으로 임하는 것이 아닌 것이다. 칼빈이 어거스틴의 말을 인용해서 말한 것처럼, 부활 승천하신 현재의 그리스도의 육체(Christus totum)는 하늘에 있지만, 그리스도의 몸이 하늘에 계시다는 사실을 넘어서서 어디에 있는가를 묻는다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성경은 교회를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하였다. 또 그는 친히 교회의 머리가 되신다고 하였다. 교회가 그의 몸과 연합된 가시적 형태라면 교회는 그리스도의 권위를 가지고 존재하며 통치권을 행사하게 될 뿐만 아니라 말씀과 성례와 기도와 권징의 실시로 섬김과 수종하는 권세를 누리게 된다. 그리스도의 몸은 현재 하늘에 있다. 그의 신성은 편만히 온 우주에 충만하신다. 또한 그리스도는 교회 안에 존재하신다. 그의 하늘에서의 중보의 직책은 지금도 수행되고 있으며 지상적으로는 그리스도의 대사인 교회를 통하여 계속되고 있다. 이렇게 그리스도와의 신비적 연합을 이룬 그리스도인을 통해서 그리스도께서는 그의 천상사역인 “계속적인 사역”을 지속하시고 계신다는, 정통개혁신학에서의 구원론이 칼빈에게서 발전적으로 잘 드러나고 있는데, 이렇게 개혁자의 새롭게 발전시킨 신학적인 깨달음이 교회 속에서 유지되고 다듬어 져서 교회가 견고해지기를 바라면서 연구를 마친다.
우리 논의의 출발점은 "구원이 단순하게 성취되었다"하는 점을 넘어서, 직접적으로 구원의 서정이라는 것은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아가는 차원으로 그 점에 초점을 맞추고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일들이 그대로 모든 신자들에게 어떻게 이뤄지는가 하는 점에 있었다. 그런데 다양한 인본주의적 구원론의 도전 가운데서도 성경적인 구원론은,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이해와 신구약의 통일성 그리고 예정론 가운데서 어느 정도 개혁신학의 중요한 틀로서 정착되어 왔지만, 그간 개혁주의 신학연구에서도 그리스도의 천상사역의 계속적 사역내용은 상실된 주제로서 논의가 부족한 상태에 있다. 그런데 칼빈은 기독교강요 1536년 초판에서 천상사역으로서 "그리스도의 계속적 사역"을 "그리스도께서 비록 하늘에 오르심으로써 우리의 시야로부터 그의 몸을 감추셨지만 그러나 여전히 그는 신자와 함께 있어 도움과 힘이 되시고 또 그의 현존의 분명한 능력을 보여 주시는 것이다.”라고 정의하면서, 그리스도의 계속적 사역을 ① 첫째로 우리로 하여금 성부께서 접근케 하고, ② 둘째로 길을 닦으며, ③ 셋째로 우리를 성부에게 드리고, ④넷째로 우리를 위해서 그로부터 은혜를 구하며, ⑤ 다섯째로 우리를 위한 영원한 대변자와 중보자(perpetuus pro nostris advocatus ac mediator)로서 그에게 간구하고, ⑥여섯째로 우리의 범죄를 위해서 중보기도를 드리시며(intercedat), ⑦ 일곱째로 끊임없이 성부와 화해시키는 것으로 요약하고 있다.(히7:24이하, 9:11이하, 롬8:26-27, 요일2:1) 그리고 칼빈은 더 나아가서 1559년 최종판에서도 그리스도의 계속적 사역을 "그리스도께서 영원 불변한 중보자로서 이 세상의 종말까지 수행하신다"라는 말로 발전적으로 설명함으로써 그리스도의 계속적 사역의 종말론적 의미를 더해서 그리스도의 계속적 사역에 대한 이해를 발전적으로 전개해 나가고 있다. 칼빈은 기독교강요 1559년 최종판에서도 이와 같은 그리스도의 계속적 사역을 천상에 오르셔서 아버지 우편에 앉아계신 예언자와 왕과 제사장으로서의 직책을 수행하신다라는 말로 설명한다. 이렇게 칼빈이 기독교강요 초판에서 시작하고 1559년 최종판에서 계속적이며 발전적으로 적용하고 있는 "그리스도의 계속적 사역"은 구원의 서정 전의 가까운 원인을 확보하는 것으로 확실하게 자리 잡고 있으며, 그것은(천상사역으로서의 그리스도의 계속적 사역) 어거스틴이 논증하고 있고 성경에 뿌리를 두고 있기 때문에 칼빈의 구조아래 객관적으로 분석되고 보증될 수 있는 내용으로서 자리매김하고 있으며, 개혁신학자인 칼빈에게서 새롭게 얻어진 신학적인 뜻으로서 믿음에 대한 부분에서 그리스께서 하시는 역할이 잘 설명되면서 칼빈만의 독특한 신학적 내용으로 그리스도께서 승천 후에 어떤 역사를 하시는가가 잘 드러나고 있다. 이와 같은 그리스도의 계속적 사역이 우리에게 주는 혜택은 ① 첫째 주께서 승천하심으로써 아담 때문에 닫혔던 천국 길을 여셨다.(요14:3) 이로 인해 우리는 어떤 의미에서 이미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과 함께 하늘에 앉아 있다는 결론이 된다(엡2:6). 그래서 우리는 소망만으로 하늘을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머리이신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하늘을 차지하고 있는 것이다.② 둘째 그리스도께서 항상 우리의 예언자와 중보자로서 아버지 앞에 나타나시기 때문에(히7:25, 9:11,12, 롬8:34) 아버지께서 우리의 죄를 보시지 않고 그리스도의 의를 보시게 하심으로써 아버지의 마음을 우리와 화해하게 하신다.③셋째 그리스도의 중재로 우리가 아버지의 보좌에 가까이 가는 길을 준비하신다. ④ 넷째 그리스도는 하늘에 앉으시사, 우리에게 자기의 권능을 주입하셔서 매일 영적보화를 아낌없이 부어주심으로써 우리를 영적생명으로 살리신다. ⑤ 다섯째 그리스도는 성령으로 우리를 성결하게 하신다. ⑥ 여섯째 각종 은사로 교회를 장식하시며 교회가 해를 받지 않고 안전하도록 보호하신다. ⑦ 일곱째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우리의 구원에 반대하여 날뛰는 원수들을 그의 강한 손으로 억제하신다. ⑧ 여덟째 천지의 모든 권한을 잡고 계시면서 이 모든 일을 계속하시다가 드디어는 그의 원수이자 우리의 원수인 자들을 모두 굴복시키고(고전15:25,참조시110:1) 교회건설을 완성하실 것이다.⑨아홉 번째 드디어 그는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셔서 최후의 처리를 완수하실 것인데, 오시면 양과 염소, 선택된 자와 버림받은 자를 분리하실 것이다.(마25:31-33), 생사간에 아무도 그의 심판을 면하지 못할 것이다. 나팔 소리가 땅 끝까지 울려 모든 사람을 심판대 앞에 부를 것이니, 그 날에 살아 있는 사람들과 이미 산 자들 사이에서 죽어간 사람들이 모두 소집될 것이다.(살전4:16-17) 여기서 우리가 기대해야 하는 것은, 바로 우리의 구속주가 우리를 심판하는 심판대에 계시리라는 것으로 그것은 평범한 보장이 아니다. 그뿐 아니라, 지금 복음을 통해서 영원한 축복을 약속하시는 이가 그때에는 심판정에서 그 약속을 실행하실 것이다. 결론적으로 칼빈은 "중보이신 그리스도 안에 각종 선한 것이 풍성하게 장만되어 있다. 우리는 다른 데로 갈것이 아니라, 이 원천에서 마음껏 마셔야 한다. 그리스도만으로 만족해야 한다. 그리스도의 풍부한 축복을 한번 참으로 안다면 그리스도에게서 다른 쪽으로 돌리지 못할 것이다”라고 단언한다. 이렇게 칼빈은 “그리스도의 계속적 사역은 이렇게 중보로서 택자들을 통해서 이 세상의 종말까지 수행하신다.”는 점을 가르치고 강조한다. 이와 같은 칼빈신학의 기초이자 기둥은 하나님의 영광과 성경에 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피조물인 인간이 자기의 자랑과 교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창조의 권리에 따라 하나님의 명령을 복종해야 하며, 또한 하나님을 경외하며 하나님 안에서 모든 선한 것을 찾고 하나님께 모든 선한 것을 돌려 드리는 것이라고 정의한 것처럼, 칼빈은 철저한 신본주의 신학자이다. 칼빈의 독특성은 아무리 인간이 신앙을 통해서 선택을 의식한다 해도, 그 선택은 영원한 삼위일체 하나님의 예정 안에 있다는 것이다. 즉 무오한 하나님의 말씀 곧 성경뿐만 아니라 창조와 섭리, 구원의 모든 역사의 유일한 주체는 분리할 수 없이 유일한 하나님이신 삼위일체 하나님의 역사라는 것이다. 칼빈에게 있어 그리스도의 은택에로의 참여는 이미 그리스도의 인격과의 교제를 가정하는 것이 진실인 한, 그리스도로부터 교회에게 주신 전가와 선물하심이 모든 것에 앞서간다. 이미 영원 전에, 선택과 더 자세히 구원의 언약 안에 중보자와 성부로부터 그에게 주어진 자들 사이에 어떤 띠가 있는데, 그때 이미 즉 하나님의 결정 안에 둘 사이에 신비한 연합이 결성되었다. 그러므로 은혜의 모든 은택들은 그리스도의 인격 안에 교회를 위해 준비되어 있는 것이다. 인간은 아무 것도 덧붙일 것이 없다. 구원의 성취는 구원의 서정에 있다. 종교개혁 당시 하나님의 구원사역에 인간이 저항할 수도 있고 동의할 수도 있다는 로마 카톨릭의 사상은 후대에 알미니우스에게서 더욱 분명해진다. 알미니우스주의자들에 의하면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의지가 신앙과 회심쪽으로 향하도록 그를 중생하게 하는 데 있어서 그의 무한한 능력을 사용하시지 않는다. 하나님께서는 이 모든 은혜의 사역을 다 이루신 후에라도 인간은 하나님과 성령에 저항할 수 있는데, 이 때에도 하나님은 인간이 중생하기를 바라며 그를 중생시키고자 하신다. 따라서 인간이 강하게 저항함으로써 완전히 중생치 않게 될 수도 있는데, 인간의 중생되는 것과 안되는 것은 인간의 의지에 달려있다. 반면 칼빈의 입장을 고수했던 도르트 성직자들은 다음과 같이 가르쳤다. 하나님께서 우리 속에서 역사하사 새로운 모습으로 만드시되 죽음에서 부활의 새생명을 얻도록 하신 것은, 결코 복음을 외칭으로나 도덕적 권면으로 ,또는 -물론 하나님께서 일을 하신 후에 인간편에서는 계속적으로 변화되는 일이 된다 하더라도- 인간적인 수단으로 되는 것이 아니다라고 했다. 변화된 마음은 하나님에 의해서 이뤄지고 효력을 낼 뿐이며, 인간은 이 받은 은혜로 인하여 믿고 회개함에 이른다고 말해야 옳다고 가르쳤다. 이러한 도르트 성직자들의 입장이란 결국 칼빈의 견해인 것이다. 이렇게 우리는 구원이 단순하게 성취되었다 하는 점보다는, 직접적으로 구원의 서정이라는 것이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아 간다는 점을 감안하여,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일들이 어떻게 계속적으로 이뤄지는지와 함께 그 주체와 관련한 칼빈의 이해와 신학적 발전에 대해서 살펴보았다. 그 결과 구원의 서정이 곧 그리스도와의 신비적 연합을 설명하려는 논리적인 시도임을 감안할 때, 구원의 서정이 가지는 궁극적인 관심, 곧 신자들이 교회 속에서 현실적으로 그리스도와의 신비적 연합이라는 중심 주제를 어떻게 적용해나가는가를 살펴볼 수 있었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계속적 사역"이라는 개념은 칼빈이라는 개혁자로부터 새롭게 얻어진 신학적 발전이라는 것도 발견했다. 칼빈에 의해서 기독교강요 초판에서 지적되고 1559년 최종판에서 발전적으로 설명되고 있으며 그것은 어거스틴은 물론이고 성경에 기반을 두고 보증되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계속적 사역"이라는 개념이 개혁자에 의해서 신학적으로 새롭게 얻어진 개혁자의 뜻으로부터 벗어나, 칼빈과 다른 것으로 벗어나고 본래의 역사적 내용에서 멀어져 가면서 다양하게 변화되어 가는 것을 보는 것은 안타까움을 더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와 같은 변화의 원인을 찾아본다면, 종교개혁자들을 통해서 이루어진 개혁내용이 사실 구원론과 교회론 중심으로 이루어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기 때문에 개혁신학자들의 경우 어느 정도 개혁신학의 중요한 틀이 그들에 의해서 잘 유지되어 왔다고 볼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장로교 신학이 그 전반에 있어서 직접적으로 계승하고 있는 칼빈의 신학적 강조들이 역사의 과정을 통해서 알미니우스주의나 아미롤드주의 등에 의해서 흐려지고 곡해된 부분들이 많이 있어 왔기 때문이라고 본다면, 그런 부분들은 새롭게 조명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특별히 구원의 서정(성화)에 관한 부분이 그렇다. 그리고 그동안 무시되었던 삼위일체 하나님과 그 구조 및 개혁신학의 독특한 기독론이 신구약의 실체의 통일성과 긴밀한 관계에 있음을 알아야 한다. 예정론과 구원의 성취, 구원의 서정이 하나님의 속성과 하나님의 나라의 열매들과 깊은 관계가 있음을 알아야 한다. 특별히 도르트회의에서 전체적으로 결정된 내용과 신학적 입장들에 대한 객관적인 자료들에 대한 정확한 이해나 지식이 부족하여 생긴 구원론에 대한 문제들도 해결되어야 한다 구원의 서정은 성도의 삶에 너무나 밀접한 부분이기 때문에 "그리스도를 믿는다" 고백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많은 관심을 기우릴 것이다. 하지만 많은 관심이 있다고 바른 가르침 가운데 있는 것은 아니다. 우리가 신론이나 인간론 기독론을 다루면서 살폈던 핵심 내용이 총체적으로 녹아져 있지 않다면, 구원론에서의 구원의 서정은 그야말로 인간적인 방식으로 접근하게 될 것이다. 자신의 힘으로 믿고, 거룩하게 되고, 자신의 공로로 구원받을 것이라는 사고는 우리를 지배할 것이다. 하지만 결코 칼빈은 이 문제를 그렇게 풀고 있지 않았다. 그는 성경의 어느 구절을 제시하더라도 결코 인간의 구원의 문제를 자신의 공로로 풀지 않았다. 오직 하나님의 은혜의 풍성함이 거기에 있을 뿐이다. 본고에서 칼빈에게 있어서 그리스도의 계속적 사역과 구원의 서정에 관해서 탐구한 결과, 칼빈은 분명하게 루터나 로마 카톨릭의 견해와 다른 입장에 있다는 것을 알았고, 다음으로 개혁주의에서도 구원의 순서에 차이가 있음을 알게 되었다. 학자마다 그리고 시대에 따라서 차이가 있을 수 있다. 따라서 종교개혁시대에 살았던 칼빈의 구원론과 관련된 여러 개념과 오늘날 우리들이 이해하는 개념과 다소 차이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칼빈의 입장을 고수해야 한다는 것이 연구자의 입장이다. 칼빈의 구원론을 통해서 본 “그리스도의 계속적 사역과 구원의 서정”은, “하나님의 구원사역은 인간의 공로를 필요로 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인간의 그 어떠한 협력을 요하지 않는다는 것과, 그 분의 은혜를 거절할 수 있는 성격이 아니며, 의롭다 칭하여 주신 은혜는 상실되는 성격이 아니기 때문에 고해성사나 면죄부와 같이 인간의 고안된 방식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계속적 사역을 가까운 원인으로 둔 구원의 서정”은 회개, 신앙, 성화와 같은 과정도 소명, 중생, 칭의와 마찬가지로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을 뿐이지 인간의 의지의 결단에서 출발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 분명해진다. 칼빈의 논증은 그 누구의 가르침보다도 독특하고 이 부분에 있어서 명쾌하다고 할 수 있다. 이번 과정을 거쳐서 지득한 “그리스도의 천상에서의 사역으로서 계속사역과 구원의 서정에 대한 이해”를 통해 오늘날 잘못된 행태의 신앙생활을 바로잡고, 성경의 참된 가르침으로 접근해 나가야 한다. 확실한 것은 우리는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통해서만 우리 자신에 대한 확실한 지식에 도달할 수 있다는 사실이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우리 모두의 조상 아담이 실족해서 죄를 범했을 때, 지혜와 의와 거룩함과 그분의 생명을 상실하고 이러한 하나님의 형상이 취소되고 지워졌다는 엄청난 사실 앞에서 우리는 두려워 떨어야 할 것이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통해-우리가 이 죽을 몸을 입고 있는 동안-우리 안에서 부패한 욕망들, 육신의 정욕들, 그리고 왜곡되고 부패한 우리 본성이 일으키는 모든 것이 죽어 가는 것이다.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는 날마다 새로워져서(고후4:16) 새로운 생명 가운데 걷게 되며(롬6:4) 의를 위해 살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아버지께서 독생자에게 주신 유익을 어떻게 받는가 하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우리 밖에 계시고 우리가 그와 떨어져 있는 한,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고난당하시며 행하신 일이 무용, 무가치한 것임을 알아야 한다. 그러므로 아버지에게서 받으신 것을 우리에게 나눠주시기 위해서는, 그가 우리의 것이 되며 우리 안에 계셔야 한다. 우리는 포도나무의 가지로서 오직 그에게 붙어 있어야만 한다. 그때 그리스도의 모든 은택이 우리에게 거져 주어지는 것이다. 우리가 할 일은 없는 것이다. 이와 같은 구원의 적용으로서 그리스도의 계속적인 사역은 아버지 하나님 우편에 계신 그리스도께서 그의 지상사역 기간에 행하셨던 중보의 삼직, 즉 선지자와 제사장과 왕으로서의 직책을 영원히 수행하고 계신 것으로 설명된다. 이때 우편의 개념이 공간적이나 장소적 개념 만으로서의 우편이 아님을 알 아야 한다. 성례에 관계하여서도 그리스도의 영적임재가 나타난 것이지 육체적(Christus totum)으로 임하는 것이 아닌 것이다. 칼빈이 어거스틴의 말을 인용해서 말한 것처럼, 부활 승천하신 현재의 그리스도의 육체(Christus totum)는 하늘에 있지만, 그리스도의 몸이 하늘에 계시다는 사실을 넘어서서 어디에 있는가를 묻는다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성경은 교회를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하였다. 또 그는 친히 교회의 머리가 되신다고 하였다. 교회가 그의 몸과 연합된 가시적 형태라면 교회는 그리스도의 권위를 가지고 존재하며 통치권을 행사하게 될 뿐만 아니라 말씀과 성례와 기도와 권징의 실시로 섬김과 수종하는 권세를 누리게 된다. 그리스도의 몸은 현재 하늘에 있다. 그의 신성은 편만히 온 우주에 충만하신다. 또한 그리스도는 교회 안에 존재하신다. 그의 하늘에서의 중보의 직책은 지금도 수행되고 있으며 지상적으로는 그리스도의 대사인 교회를 통하여 계속되고 있다. 이렇게 그리스도와의 신비적 연합을 이룬 그리스도인을 통해서 그리스도께서는 그의 천상사역인 “계속적인 사역”을 지속하시고 계신다는, 정통개혁신학에서의 구원론이 칼빈에게서 발전적으로 잘 드러나고 있는데, 이렇게 개혁자의 새롭게 발전시킨 신학적인 깨달음이 교회 속에서 유지되고 다듬어 져서 교회가 견고해지기를 바라면서 연구를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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