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까지 우리는 바울이 율법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지 고찰해 보았다. 바울의 율법관은 서재나 강의실에서 이루어진 교의학적 사색이나 신학적 토론의 산물이 아니고 한때 그토록 철저한 유대교 신자요, 교회의 박해자였던 바울이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한 주님을 통하여 발견한 새로운 구원의 도리, 곧 사람이 의와 구원에 이를 수 있는 길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이 놀라운 믿음의 길, 은혜의 복음을 발견한데서 출발하였고 그리고 이 위대...
지금까지 우리는 바울이 율법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지 고찰해 보았다. 바울의 율법관은 서재나 강의실에서 이루어진 교의학적 사색이나 신학적 토론의 산물이 아니고 한때 그토록 철저한 유대교 신자요, 교회의 박해자였던 바울이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한 주님을 통하여 발견한 새로운 구원의 도리, 곧 사람이 의와 구원에 이를 수 있는 길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이 놀라운 믿음의 길, 은혜의 복음을 발견한데서 출발하였고 그리고 이 위대한 복음을 동족 유대인을 포함하여 전 인류에게 전파하려는 강한 선교적 열심과 그리고 이 복음과 선교에 도전하는 유대율법주의자들과의 대결에서 전개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우리는 본 연구를 통해 얻어진 결론을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다. 첫째, 바울 당대의 유대교는 샌더스가 주장하고 있는 것처럼 구약 종교와 정확히 일치하는 ‘언약적 신율주의’가 아니었다. 아직까지 전통적인 견해를 뒤집을 만한 결정적인 증거들이 제시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샌더스의 유대교 분석에 많은 문제점들이 있는 것으로 판명되었다. 따라서 바울 당대의 유대교는 전통적인 견해대로 구약 종교로부터 상당히 이탈되어 자신의 공로로 의를 획득하여 구원을 확보하려고 했던 ‘율법주의’의 종교였다. 둘째, 레이제넨의 주장처럼 바울의 율법관이 모순된 것도 아니었다. 바울은 율법에 대해 일관된 관점을 가지고 율법을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과 연결시키고 있는 것이다. 율법이 긍정적인 면과 부정적인 면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러나 바울은 다메섹 도상에서의 체험을 통해 오직 믿음으로만 구원받고 율법으로 구원받을 수 없음을 일관성 있게 밝히고 있다. 결론적으로 바울이 이해한 율법은 다음과 같다. 첫째, 율법 자체는 선한 것이다. 바울은 그 어디에서도 율법 자체를 죄악시하거나 나쁘게 평가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그에게 율법은 하나님의 법으로서 거룩하고 의로우며 선한 것이다. 그러나 인간의 타락으로 인해 율법은 죄와 결탁하게 되었고, 그 결과로 율법의 부정적인 기능이 나타나게 된 것이다. 둘째, 율법은 구원(의)의 수단이 될 수 없다. 바울에 의하면 율법은 완전하고도 절대적인 성취를 요구하는데 유대인을 포함한 모든 인간은 하나님 앞에서 율법을 모든 면에서 완벽하게 지킬 수 없는 죄인들이다. 따라서 율법의 행위로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는 아무도 없다. 또한 율법을 지킴으로 의를 회득하려는 인간의 노력 자체가 자기를 자랑하고 자기를 신뢰하는 교만한 행위일 뿐만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께서 마련하신 의를 거부하는 걸림돌이 되기 때문이다. 셋째, 율법은 죄와 악에 대항할 수 있는 효과적인 도구가 될 수 없다. 유대인들은 율법에 대하여 그것이 마치 인간을 도와주는, 즉 죄와 악을 제어시켜 인간으로 하여금 의와 생명에 이르게 하는 공로를 쌓을 수 있다는 긍정적인 평가를 하였다. 그러나 바울에게 있어서 율법은 비록 그 자체로는 하나님의 법으로서 거룩하고 의롭고 선한 것이지만, 그것이 인간에게 나타날 때는 인간을 죄 아래 가두어 정죄를 불러일으켜서 인간을 죄의 노예가 되게 하고 마침내 인간을 사망으로 끌고 갈 뿐이다. 넷째, 율법은 종국적으로 인간을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는 몽학선생이 된다. 바울에 의하면 하나님께서 처음부터 끝까지 마련하신 의의 길, 구원의 길은 율법을 통한 길이 아니라 오히려 약속과 믿음을 통한 길이라는 것이다. 바울이 지적한 대로 율법은 여하히 인간에게 구원을 줄 수 없고, 공로와 의를 증진시켜 줄 수 없고, 율법과 죄의 세력을 억제할 수도 없다면 무엇 때문에, 무슨 목적으로 율법이 인간에게 주어졌는가? 율법은 구원의 길로서 주어진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다른 목적을 위해 주어졌다. 율법은 인간으로 하여금 죄를 알도록 하기 위해 주어졌을 뿐만 아니라 그 보다 더 적극적으로 범법함을 가져오거나 산출하기 위하여 주어졌다. 이와 같은 율법의 부정적인 기능을 통하여 인간은 율법이 아닌 그리스도 안에 나타날 구속, 곧 율법과 죄의 속박으로부터 자유함과 그것의 절대적인 필수성을 절감하게 된다. 이런 의미에서 율법은 종국적으로 우리를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는 구원 역사적 사명을 가지고 있다. 마지막으로 율법은 그리스도와 성령 안에서 크리스챤의 새로운 삶의 윤리가 된다. 그리스도 없는, 그리스도를 통하지 않은 율법은 그리스도 없는 사람들을 계속 정죄와 죽음에로 이끌지만, 그리스도와 성령 안에 있는 자들에게는 율법은 그리스도의 법으로서 새로운 역할을 수행케 된다. 전에는 정죄의 대상이 되었던 율법이 이제는 그리스도 안에서 크리스챤의 새로운 삶의 윤리로서 역할을 맞게 된 것이다.
지금까지 우리는 바울이 율법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지 고찰해 보았다. 바울의 율법관은 서재나 강의실에서 이루어진 교의학적 사색이나 신학적 토론의 산물이 아니고 한때 그토록 철저한 유대교 신자요, 교회의 박해자였던 바울이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한 주님을 통하여 발견한 새로운 구원의 도리, 곧 사람이 의와 구원에 이를 수 있는 길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이 놀라운 믿음의 길, 은혜의 복음을 발견한데서 출발하였고 그리고 이 위대한 복음을 동족 유대인을 포함하여 전 인류에게 전파하려는 강한 선교적 열심과 그리고 이 복음과 선교에 도전하는 유대율법주의자들과의 대결에서 전개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우리는 본 연구를 통해 얻어진 결론을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다. 첫째, 바울 당대의 유대교는 샌더스가 주장하고 있는 것처럼 구약 종교와 정확히 일치하는 ‘언약적 신율주의’가 아니었다. 아직까지 전통적인 견해를 뒤집을 만한 결정적인 증거들이 제시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샌더스의 유대교 분석에 많은 문제점들이 있는 것으로 판명되었다. 따라서 바울 당대의 유대교는 전통적인 견해대로 구약 종교로부터 상당히 이탈되어 자신의 공로로 의를 획득하여 구원을 확보하려고 했던 ‘율법주의’의 종교였다. 둘째, 레이제넨의 주장처럼 바울의 율법관이 모순된 것도 아니었다. 바울은 율법에 대해 일관된 관점을 가지고 율법을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과 연결시키고 있는 것이다. 율법이 긍정적인 면과 부정적인 면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러나 바울은 다메섹 도상에서의 체험을 통해 오직 믿음으로만 구원받고 율법으로 구원받을 수 없음을 일관성 있게 밝히고 있다. 결론적으로 바울이 이해한 율법은 다음과 같다. 첫째, 율법 자체는 선한 것이다. 바울은 그 어디에서도 율법 자체를 죄악시하거나 나쁘게 평가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그에게 율법은 하나님의 법으로서 거룩하고 의로우며 선한 것이다. 그러나 인간의 타락으로 인해 율법은 죄와 결탁하게 되었고, 그 결과로 율법의 부정적인 기능이 나타나게 된 것이다. 둘째, 율법은 구원(의)의 수단이 될 수 없다. 바울에 의하면 율법은 완전하고도 절대적인 성취를 요구하는데 유대인을 포함한 모든 인간은 하나님 앞에서 율법을 모든 면에서 완벽하게 지킬 수 없는 죄인들이다. 따라서 율법의 행위로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는 아무도 없다. 또한 율법을 지킴으로 의를 회득하려는 인간의 노력 자체가 자기를 자랑하고 자기를 신뢰하는 교만한 행위일 뿐만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께서 마련하신 의를 거부하는 걸림돌이 되기 때문이다. 셋째, 율법은 죄와 악에 대항할 수 있는 효과적인 도구가 될 수 없다. 유대인들은 율법에 대하여 그것이 마치 인간을 도와주는, 즉 죄와 악을 제어시켜 인간으로 하여금 의와 생명에 이르게 하는 공로를 쌓을 수 있다는 긍정적인 평가를 하였다. 그러나 바울에게 있어서 율법은 비록 그 자체로는 하나님의 법으로서 거룩하고 의롭고 선한 것이지만, 그것이 인간에게 나타날 때는 인간을 죄 아래 가두어 정죄를 불러일으켜서 인간을 죄의 노예가 되게 하고 마침내 인간을 사망으로 끌고 갈 뿐이다. 넷째, 율법은 종국적으로 인간을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는 몽학선생이 된다. 바울에 의하면 하나님께서 처음부터 끝까지 마련하신 의의 길, 구원의 길은 율법을 통한 길이 아니라 오히려 약속과 믿음을 통한 길이라는 것이다. 바울이 지적한 대로 율법은 여하히 인간에게 구원을 줄 수 없고, 공로와 의를 증진시켜 줄 수 없고, 율법과 죄의 세력을 억제할 수도 없다면 무엇 때문에, 무슨 목적으로 율법이 인간에게 주어졌는가? 율법은 구원의 길로서 주어진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다른 목적을 위해 주어졌다. 율법은 인간으로 하여금 죄를 알도록 하기 위해 주어졌을 뿐만 아니라 그 보다 더 적극적으로 범법함을 가져오거나 산출하기 위하여 주어졌다. 이와 같은 율법의 부정적인 기능을 통하여 인간은 율법이 아닌 그리스도 안에 나타날 구속, 곧 율법과 죄의 속박으로부터 자유함과 그것의 절대적인 필수성을 절감하게 된다. 이런 의미에서 율법은 종국적으로 우리를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는 구원 역사적 사명을 가지고 있다. 마지막으로 율법은 그리스도와 성령 안에서 크리스챤의 새로운 삶의 윤리가 된다. 그리스도 없는, 그리스도를 통하지 않은 율법은 그리스도 없는 사람들을 계속 정죄와 죽음에로 이끌지만, 그리스도와 성령 안에 있는 자들에게는 율법은 그리스도의 법으로서 새로운 역할을 수행케 된다. 전에는 정죄의 대상이 되었던 율법이 이제는 그리스도 안에서 크리스챤의 새로운 삶의 윤리로서 역할을 맞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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