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연구는 조선시대 墓制에 관한 전반적인 분석을 통해 조선시대 묘제에 대해 체계적으로 파악하는 기틀을 마련하고자 하였다. 이 연구에서 다루고자 하는 墓制, 즉 墳墓制度 또는 墓葬制度는 死者의 陰宅으로서의 무덤에 관한 제반 法制的 制度 및 樣式에 대한 문제이다. 즉, 신분에 따른 무덤의 명칭ㆍ규모ㆍ조성방법, 墓域에 조성되는 각종 石物類의 제한규정ㆍ배치방법 및 명칭ㆍ형태ㆍ수량 등 무덤의 외형적 요소뿐만 아니라 喪葬禮의 결과로 나타난 무덤 속의 구조에 대한 制度 및 樣式에 관한 문제이다.
이 연구를 전개함에 있어서 묘역의 대상을 한정시켜 분석할 필요성이 있었다. 이에 묘역의 대상은 士大夫 墓域을 중심으로 분석하였다. 그리고 지역적으로는 서울ㆍ경기지역의 묘역을 중심으로 분석하였다. 다만 시기적으로는 조선시대 전 기간을 대상으로 하여 서울ㆍ경기지역의 사대부 묘역에 대한 총체적인 이해를 도모하고자 하였다.
연구의 방법은 먼저 조선시대 사대부 묘역의 구조를 전반적으로 구성하여 분석하는 것으로 시작하였다. 특히 朝鮮時代 墓制에 나타난 각종 석물 및 구조에 숨어있는 민속학적 象徵體系의 의미를 밝혀내어 조선시대 묘제에 대한 이해를 높이고자 하였다. 이후 조선시대 사대부 묘역에 배치된 각종 석물에 대한 법제적 문제, 제한규정, 배치방법, 명칭 및 묘역에서의 석물이 차지하는 의미 등 개개의 석물에 내재되어 있는 각종 문제점을 분석하였다. 조선시대 묘역에 배치된 석물들은 조선시대 전기부터 후대에 이르기까지 끊임없는 외형적 변화를 거치게 되는데 이에 관한 미술사적 변화과정을 분석하고, 아울러 각종 석물의 양식 및 도상의 변화과정에 담긴 시대적 의미와 사상적 변화를 분석하고자 하였다.
그리고 상장례의 결과로 나타난 무덤속의 구조에 대해 먼저 사료적 검토를 하였다. 조선왕조는 주자가례에 의거하여 灰隔墓를 정착시키기 위한 정책들을 단계적으로 밟아 나가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또한 이 과정에서 나타난 당시의 석실묘와 회격묘의 장ㆍ단점에 관한 논의를 통해 두 묘제에 대한 당시의 인식을 살펴볼 수 있었다. 또한 축조 방법에 따른 石室墓와 石槨墓, 그리고 灰隔墓와 灰槨墓에 관한 차이점을 분석하고, 이에 따른 명칭 문제를 다루었다. 이후 각종 축조 방법이 드러난 여러 고고학적 발굴성과를 정리하고, 당시대에 나타난 실제적 현상들을 검토하였다. 끝으로 조선시대 士大夫家의 미라 및 服飾이 出土되는 분묘 연구를 통해 미라 및 복식이 출토되는 과학적 메커니즘을 정리하였다.
위와 같은 조선시대 묘제 연구에 대한 범위와 방법론을 통해 분석할 수 있었던 다양한 결과물 중 중요한 것을 간추리면 다음과 같다.
조선시대 사대부 묘역은 階砌石을 중심으로 상단의 階節과 하단의 拜階節로 구분된다. 階節은 亡子를 위한 공간으로서 망자에 대한 봉분과 석물이 배치되고, 拜階節에는 生者의 활동 공간으로서 생자에 대한 석물이 배치된다. 또한 방위개념은 陰陽論에 의거하여 망자의 공간인 계절에서는 서쪽과 오른쪽을 중시하여 남편이 오른쪽에 묻히고 부인을 祔左하게 된다. 반면 생자의 공간인 배계절에서는 동쪽과 왼쪽을 陽의 개념으로 해석하여 석물이 배치되고 있다. 이것은 조선시대 묘역을 이해함에 있어 가장 기본이 되는 요소로서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神道碑 및 墓碑의 건립 목적은 후세에 師表가 될 만한 기록을 남겨 조상의 德을 밝히고 顯揚하는 것이며, 동시에 性理學에서 제시한 朱子家禮에 의한 禮의 실행이었다. 특히 神道碑는 現職과 贈職을 포함하여 官職과 品階가 從二品 이상만 세울 수 있도록 法制化 되었던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이것은 조선시대를 통하여 일관되게 유지하였던 것으로 판단된다. 이러한 法制는 또한 品階에 따라 묘역의 규모에 차등을 두고, 庶人의 墓碑 규모를 2尺으로 제한하는 등의 法制와 함께 조선시대의 墓制에 있어서도 사회적ㆍ신분적 질서를 유지하기 위한 法制로 적용되고 있다. 이러한 양상들은 石碑에 한정된 것이 아니라 묘역에 배치된 각종 석물에서 다양하게 나타나고 있다.
朝鮮時代의 墓制에는 性理學, 風水地理說, 佛敎 및 陰陽論 등 다양한 文化要素가 融合되어 墓制에 나타나는 경향을 살펴볼 수 있었다. 특히 조선시대 묘제는 전 시대를 통해 다양한 사상적 요소가 시대의 흐름에 따라 변화ㆍ수용되는 양상을 보여주고 있다. 특히 石碑의 양식 변천 과정 중 가장 주목할 만한 것은 그 이전까지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지 않았던 屋蓋石 형식의 비가 17세기 후반부터 18세기 후반까지 다량 건립되고 있으며, 그 형태에 있어서도 八作屋蓋石을 비롯 사모옥개석ㆍ平屋蓋石ㆍ螭龍屋蓋石 등 다양한 양식으로 건립되고 있다는 것이다. 위 시기부터 옥개석 양식은 조선시대 석비의 전형적인 양식이 되었다. 이러한 옥개석 양식은 비의 개념, 즉 神을 인도하고 신과 인간을 연결하는 매개자로서의 개념에 충분히 어울리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그리고 이 양식은 이전의 비의 형태보다 경제적 측면과 ...
이 연구는 조선시대 墓制에 관한 전반적인 분석을 통해 조선시대 묘제에 대해 체계적으로 파악하는 기틀을 마련하고자 하였다. 이 연구에서 다루고자 하는 墓制, 즉 墳墓制度 또는 墓葬制度는 死者의 陰宅으로서의 무덤에 관한 제반 法制的 制度 및 樣式에 대한 문제이다. 즉, 신분에 따른 무덤의 명칭ㆍ규모ㆍ조성방법, 墓域에 조성되는 각종 石物類의 제한규정ㆍ배치방법 및 명칭ㆍ형태ㆍ수량 등 무덤의 외형적 요소뿐만 아니라 喪葬禮의 결과로 나타난 무덤 속의 구조에 대한 制度 및 樣式에 관한 문제이다.
이 연구를 전개함에 있어서 묘역의 대상을 한정시켜 분석할 필요성이 있었다. 이에 묘역의 대상은 士大夫 墓域을 중심으로 분석하였다. 그리고 지역적으로는 서울ㆍ경기지역의 묘역을 중심으로 분석하였다. 다만 시기적으로는 조선시대 전 기간을 대상으로 하여 서울ㆍ경기지역의 사대부 묘역에 대한 총체적인 이해를 도모하고자 하였다.
연구의 방법은 먼저 조선시대 사대부 묘역의 구조를 전반적으로 구성하여 분석하는 것으로 시작하였다. 특히 朝鮮時代 墓制에 나타난 각종 석물 및 구조에 숨어있는 민속학적 象徵體系의 의미를 밝혀내어 조선시대 묘제에 대한 이해를 높이고자 하였다. 이후 조선시대 사대부 묘역에 배치된 각종 석물에 대한 법제적 문제, 제한규정, 배치방법, 명칭 및 묘역에서의 석물이 차지하는 의미 등 개개의 석물에 내재되어 있는 각종 문제점을 분석하였다. 조선시대 묘역에 배치된 석물들은 조선시대 전기부터 후대에 이르기까지 끊임없는 외형적 변화를 거치게 되는데 이에 관한 미술사적 변화과정을 분석하고, 아울러 각종 석물의 양식 및 도상의 변화과정에 담긴 시대적 의미와 사상적 변화를 분석하고자 하였다.
그리고 상장례의 결과로 나타난 무덤속의 구조에 대해 먼저 사료적 검토를 하였다. 조선왕조는 주자가례에 의거하여 灰隔墓를 정착시키기 위한 정책들을 단계적으로 밟아 나가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또한 이 과정에서 나타난 당시의 석실묘와 회격묘의 장ㆍ단점에 관한 논의를 통해 두 묘제에 대한 당시의 인식을 살펴볼 수 있었다. 또한 축조 방법에 따른 石室墓와 石槨墓, 그리고 灰隔墓와 灰槨墓에 관한 차이점을 분석하고, 이에 따른 명칭 문제를 다루었다. 이후 각종 축조 방법이 드러난 여러 고고학적 발굴성과를 정리하고, 당시대에 나타난 실제적 현상들을 검토하였다. 끝으로 조선시대 士大夫家의 미라 및 服飾이 出土되는 분묘 연구를 통해 미라 및 복식이 출토되는 과학적 메커니즘을 정리하였다.
위와 같은 조선시대 묘제 연구에 대한 범위와 방법론을 통해 분석할 수 있었던 다양한 결과물 중 중요한 것을 간추리면 다음과 같다.
조선시대 사대부 묘역은 階砌石을 중심으로 상단의 階節과 하단의 拜階節로 구분된다. 階節은 亡子를 위한 공간으로서 망자에 대한 봉분과 석물이 배치되고, 拜階節에는 生者의 활동 공간으로서 생자에 대한 석물이 배치된다. 또한 방위개념은 陰陽論에 의거하여 망자의 공간인 계절에서는 서쪽과 오른쪽을 중시하여 남편이 오른쪽에 묻히고 부인을 祔左하게 된다. 반면 생자의 공간인 배계절에서는 동쪽과 왼쪽을 陽의 개념으로 해석하여 석물이 배치되고 있다. 이것은 조선시대 묘역을 이해함에 있어 가장 기본이 되는 요소로서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神道碑 및 墓碑의 건립 목적은 후세에 師表가 될 만한 기록을 남겨 조상의 德을 밝히고 顯揚하는 것이며, 동시에 性理學에서 제시한 朱子家禮에 의한 禮의 실행이었다. 특히 神道碑는 現職과 贈職을 포함하여 官職과 品階가 從二品 이상만 세울 수 있도록 法制化 되었던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이것은 조선시대를 통하여 일관되게 유지하였던 것으로 판단된다. 이러한 法制는 또한 品階에 따라 묘역의 규모에 차등을 두고, 庶人의 墓碑 규모를 2尺으로 제한하는 등의 法制와 함께 조선시대의 墓制에 있어서도 사회적ㆍ신분적 질서를 유지하기 위한 法制로 적용되고 있다. 이러한 양상들은 石碑에 한정된 것이 아니라 묘역에 배치된 각종 석물에서 다양하게 나타나고 있다.
朝鮮時代의 墓制에는 性理學, 風水地理說, 佛敎 및 陰陽論 등 다양한 文化要素가 融合되어 墓制에 나타나는 경향을 살펴볼 수 있었다. 특히 조선시대 묘제는 전 시대를 통해 다양한 사상적 요소가 시대의 흐름에 따라 변화ㆍ수용되는 양상을 보여주고 있다. 특히 石碑의 양식 변천 과정 중 가장 주목할 만한 것은 그 이전까지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지 않았던 屋蓋石 형식의 비가 17세기 후반부터 18세기 후반까지 다량 건립되고 있으며, 그 형태에 있어서도 八作屋蓋石을 비롯 사모옥개석ㆍ平屋蓋石ㆍ螭龍屋蓋石 등 다양한 양식으로 건립되고 있다는 것이다. 위 시기부터 옥개석 양식은 조선시대 석비의 전형적인 양식이 되었다. 이러한 옥개석 양식은 비의 개념, 즉 神을 인도하고 신과 인간을 연결하는 매개자로서의 개념에 충분히 어울리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그리고 이 양식은 이전의 비의 형태보다 경제적 측면과 비신의 碑文을 보호할 수 있는 구조적 역할이 고려된 실용적 사고의 결과라 하겠다. 이것은 조선시대 묘역에서만 나타나는 독창적인 양식으로 발전되어 나갔고, 현재까지 이어지는 전통으로 남게 되었다.
조선시대 사대부 묘역은 처음에 石室墓와 石槨墓를 사용하다가 석실ㆍ석곽묘에 대한 각종 금지 정책과 灰隔墓 사용 권장 정책으로 『國朝五禮儀』가 제시하고 있는 회격묘로 정착되어 간다. 그리고 회격묘는 대체로 임진왜란 이후 17세기부터 주자의 『家禮』가 제시하고 있는 灰槨墓로 전환되기 시작하여, 18세기 이후로는 완벽하게 회곽묘로 대체되어 가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러한 변천과정 속에서도 변하지 않는 개념은 이중관 구조에 대한 개념이다. 조선시대에 있어서 石槨墓는 石槨에 木棺이 안치된 二重棺 구조이고, 灰隔墓에서의 木槨은 木槨에 木棺이 안치된 이중관 구조이다. 그리고 灰槨墓에서는 灰槨에 木棺이 안치된 이중관 구조이다. 이처럼 이중관 구조는 조선시대 전 기간에 걸쳐 石室墓에서는 石槨, 灰隔墓에서는 木槨, 灰槨墓에서는 灰槨으로 변화되어 유지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조선시대 사대부 묘역에서는 다양한 사상적 文化要素가 融合되어 墓制에 반영되었다. 뿐만 아니라 비신을 보호하기 위한 합리적 구조인 옥개석 구조의 개발, 정치적ㆍ경제적ㆍ기술적 관점에서의 석실ㆍ석곽묘에서 회격묘로의 전환, 그리고 다시 회격묘에서 회곽묘로의 변천 과정에 따르는 많은 요소가 내재되어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서울ㆍ경기지역의 朝鮮時代 士大夫 墓制 硏究
提 出 者 : 金 右 臨
指導敎授 : 崔 光 植
이 연구는 조선시대 墓制에 관한 전반적인 분석을 통해 조선시대 묘제에 대해 체계적으로 파악하는 기틀을 마련하고자 하였다. 이 연구에서 다루고자 하는 墓制, 즉 墳墓制度 또는 墓葬制度는 死者의 陰宅으로서의 무덤에 관한 제반 法制的 制度 및 樣式에 대한 문제이다. 즉, 신분에 따른 무덤의 명칭ㆍ규모ㆍ조성방법, 墓域에 조성되는 각종 石物類의 제한규정ㆍ배치방법 및 명칭ㆍ형태ㆍ수량 등 무덤의 외형적 요소뿐만 아니라 喪葬禮의 결과로 나타난 무덤 속의 구조에 대한 制度 및 樣式에 관한 문제이다.
이 연구를 전개함에 있어서 묘역의 대상을 한정시켜 분석할 필요성이 있었다. 이에 묘역의 대상은 士大夫 墓域을 중심으로 분석하였다. 그리고 지역적으로는 서울ㆍ경기지역의 묘역을 중심으로 분석하였다. 다만 시기적으로는 조선시대 전 기간을 대상으로 하여 서울ㆍ경기지역의 사대부 묘역에 대한 총체적인 이해를 도모하고자 하였다.
연구의 방법은 먼저 조선시대 사대부 묘역의 구조를 전반적으로 구성하여 분석하는 것으로 시작하였다. 특히 朝鮮時代 墓制에 나타난 각종 석물 및 구조에 숨어있는 민속학적 象徵體系의 의미를 밝혀내어 조선시대 묘제에 대한 이해를 높이고자 하였다. 이후 조선시대 사대부 묘역에 배치된 각종 석물에 대한 법제적 문제, 제한규정, 배치방법, 명칭 및 묘역에서의 석물이 차지하는 의미 등 개개의 석물에 내재되어 있는 각종 문제점을 분석하였다. 조선시대 묘역에 배치된 석물들은 조선시대 전기부터 후대에 이르기까지 끊임없는 외형적 변화를 거치게 되는데 이에 관한 미술사적 변화과정을 분석하고, 아울러 각종 석물의 양식 및 도상의 변화과정에 담긴 시대적 의미와 사상적 변화를 분석하고자 하였다.
그리고 상장례의 결과로 나타난 무덤속의 구조에 대해 먼저 사료적 검토를 하였다. 조선왕조는 주자가례에 의거하여 灰隔墓를 정착시키기 위한 정책들을 단계적으로 밟아 나가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또한 이 과정에서 나타난 당시의 석실묘와 회격묘의 장ㆍ단점에 관한 논의를 통해 두 묘제에 대한 당시의 인식을 살펴볼 수 있었다. 또한 축조 방법에 따른 石室墓와 石槨墓, 그리고 灰隔墓와 灰槨墓에 관한 차이점을 분석하고, 이에 따른 명칭 문제를 다루었다. 이후 각종 축조 방법이 드러난 여러 고고학적 발굴성과를 정리하고, 당시대에 나타난 실제적 현상들을 검토하였다. 끝으로 조선시대 士大夫家의 미라 및 服飾이 出土되는 분묘 연구를 통해 미라 및 복식이 출토되는 과학적 메커니즘을 정리하였다.
위와 같은 조선시대 묘제 연구에 대한 범위와 방법론을 통해 분석할 수 있었던 다양한 결과물 중 중요한 것을 간추리면 다음과 같다.
조선시대 사대부 묘역은 階砌石을 중심으로 상단의 階節과 하단의 拜階節로 구분된다. 階節은 亡子를 위한 공간으로서 망자에 대한 봉분과 석물이 배치되고, 拜階節에는 生者의 활동 공간으로서 에 대한 석물이 배치된다. 또한 방위개념은 陰陽論에 의거하여 망자의 공간인 계절에서는 서쪽과 오른쪽을 중시하여 남편이 오른쪽에 묻히고 부인을 祔左하게 된다. 반면 생자의 공간인 배계절에서는 동쪽과 왼쪽을 陽의 개념으로 해석하여 석물이 배치되고 있다. 이것은 조선시대 묘역을 이해함에 있어 가장 기본이 되는 요소로서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神道碑 및 墓碑의 건립 목적은 후세에 師表가 될 만한 기록을 남겨 조상의 德을 밝히고 顯揚하는 것이며, 동시에 性理學에서 제시한 朱子家禮에 의한 禮의 실행이었다. 특히 神道碑는 現職과 贈職을 포함하여 官職과 品階가 從二品 이상만 세울 수 있도록 法制化 되었던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이것은 조선시대를 통하여 일관되게 유지하였던 것으로 판단된다. 이러한 法制는 또한 品階에 따라 묘역의 규모에 차등을 두고, 庶人의 墓碑 규모를 2尺으로 제한하는 등의 法制와 함께 조선시대의 墓制에 있어서도 사회적ㆍ신분적 질서를 유지하기 위한 法制로 적용되고 있다. 이러한 양상들은 石碑에 한정된 것이 아니라 묘역에 배치된 각종 석물에서 다양하게 나타나고 있다.
朝鮮時代의 墓制에는 性理學, 風水地理說, 佛敎 및 陰陽論 등 다양한 文化要素가 融合되어 墓制에 나타나는 경향을 살펴볼 수 있었다. 특히 조선시대 묘제는 전 시대를 통해 다양한 사상적 요소가 시대의 흐름에 따라 변화ㆍ수용되는 양상을 보여주고 있다. 특히 石碑의 양식 변천 과정 중 가장 주목할 만한 것은 그 이전까지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지 않았던 屋蓋石 형식의 비가 17세기 후반부터 18세기 후반까지 다량 건립되고 있으며, 그 형태에 있어서도 八作屋蓋石을 비롯 사모옥개석ㆍ平屋蓋石ㆍ螭龍屋蓋石 등 다양한 양식으로 건립되고 있다는 것이다. 위 시기부터 옥개석 양식은 조선시대 석비의 전형적인 양식이 되었다. 이러한 옥개석 양식은 비의 개념, 즉 神을 인도하고 신과 인간을 연결하는 매개자로서의 개념에 충분히 어울리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그리고 이 양식은 이전의 비의 형태보다 경제적 측면과 비신의 碑文을 보호할 수 있는 구조적 역할이 고려된 실용적 사고의 결과라 하겠다. 이것은 조선시대 묘역에서만 나타나는 독창적인 양식으로 발전되어 나갔고, 현재까지 이어지는 전통으로 남게 되었다.
조선시대 사대부 묘역은 처음에 石室墓와 石槨墓를 사용하다가 석실ㆍ석곽묘에 대한 각종 금지 정책과 灰隔墓 사용 권장 정책으로 『國朝五禮儀』가 제시하고 있는 회격묘로 정착되어 간다. 그리고 회격묘는 대체로 임진왜란 이후 17세기부터 주자의 『家禮』가 제시하고 있는 灰槨墓로 전환되기 시작하여, 18세기 이후로는 완벽하게 회곽묘로 대체되어 가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러한 변천과정 속에서도 변하지 않는 개념은 이중관 구조에 대한 개념이다. 조선시대에 있어서 石槨墓는 石槨에 木棺이 안치된 二重棺 구조이고, 灰隔墓에서의 木槨은 木槨에 木棺이 안치된 이중관 구조이다. 그리고 灰槨墓에서는 灰槨에 木棺이 안치된 이중관 구조이다. 이처럼 이중관 구조는 조선시대 전 기간에 걸쳐 石室墓에서는 石槨, 灰隔墓에서는 木槨, 灰槨墓에서는 灰槨으로 변화되어 유지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조선시대 사대부 묘역에서는 다양한 사상적 文化要素가 融合되어 墓制에 반영되었다. 뿐만 아니라 비신을 보호하기 위한 합리적 구조인 옥개석 구조의 개발, 정치적ㆍ경제적ㆍ기술적 관점에서의 석실ㆍ석곽묘에서 회격묘로의 전환, 그리고 다시 회격묘에서 회곽묘로의 변천 과정에 따르는 많은 요소가 내재되어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 연구는 조선시대 墓制에 관한 전반적인 분석을 통해 조선시대 묘제에 대해 체계적으로 파악하는 기틀을 마련하고자 하였다. 이 연구에서 다루고자 하는 墓制, 즉 墳墓制度 또는 墓葬制度는 死者의 陰宅으로서의 무덤에 관한 제반 法制的 制度 및 樣式에 대한 문제이다. 즉, 신분에 따른 무덤의 명칭ㆍ규모ㆍ조성방법, 墓域에 조성되는 각종 石物類의 제한규정ㆍ배치방법 및 명칭ㆍ형태ㆍ수량 등 무덤의 외형적 요소뿐만 아니라 喪葬禮의 결과로 나타난 무덤 속의 구조에 대한 制度 및 樣式에 관한 문제이다.
이 연구를 전개함에 있어서 묘역의 대상을 한정시켜 분석할 필요성이 있었다. 이에 묘역의 대상은 士大夫 墓域을 중심으로 분석하였다. 그리고 지역적으로는 서울ㆍ경기지역의 묘역을 중심으로 분석하였다. 다만 시기적으로는 조선시대 전 기간을 대상으로 하여 서울ㆍ경기지역의 사대부 묘역에 대한 총체적인 이해를 도모하고자 하였다.
연구의 방법은 먼저 조선시대 사대부 묘역의 구조를 전반적으로 구성하여 분석하는 것으로 시작하였다. 특히 朝鮮時代 墓制에 나타난 각종 석물 및 구조에 숨어있는 민속학적 象徵體系의 의미를 밝혀내어 조선시대 묘제에 대한 이해를 높이고자 하였다. 이후 조선시대 사대부 묘역에 배치된 각종 석물에 대한 법제적 문제, 제한규정, 배치방법, 명칭 및 묘역에서의 석물이 차지하는 의미 등 개개의 석물에 내재되어 있는 각종 문제점을 분석하였다. 조선시대 묘역에 배치된 석물들은 조선시대 전기부터 후대에 이르기까지 끊임없는 외형적 변화를 거치게 되는데 이에 관한 미술사적 변화과정을 분석하고, 아울러 각종 석물의 양식 및 도상의 변화과정에 담긴 시대적 의미와 사상적 변화를 분석하고자 하였다.
그리고 상장례의 결과로 나타난 무덤속의 구조에 대해 먼저 사료적 검토를 하였다. 조선왕조는 주자가례에 의거하여 灰隔墓를 정착시키기 위한 정책들을 단계적으로 밟아 나가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또한 이 과정에서 나타난 당시의 석실묘와 회격묘의 장ㆍ단점에 관한 논의를 통해 두 묘제에 대한 당시의 인식을 살펴볼 수 있었다. 또한 축조 방법에 따른 石室墓와 石槨墓, 그리고 灰隔墓와 灰槨墓에 관한 차이점을 분석하고, 이에 따른 명칭 문제를 다루었다. 이후 각종 축조 방법이 드러난 여러 고고학적 발굴성과를 정리하고, 당시대에 나타난 실제적 현상들을 검토하였다. 끝으로 조선시대 士大夫家의 미라 및 服飾이 出土되는 분묘 연구를 통해 미라 및 복식이 출토되는 과학적 메커니즘을 정리하였다.
위와 같은 조선시대 묘제 연구에 대한 범위와 방법론을 통해 분석할 수 있었던 다양한 결과물 중 중요한 것을 간추리면 다음과 같다.
조선시대 사대부 묘역은 階砌石을 중심으로 상단의 階節과 하단의 拜階節로 구분된다. 階節은 亡子를 위한 공간으로서 망자에 대한 봉분과 석물이 배치되고, 拜階節에는 生者의 활동 공간으로서 생자에 대한 석물이 배치된다. 또한 방위개념은 陰陽論에 의거하여 망자의 공간인 계절에서는 서쪽과 오른쪽을 중시하여 남편이 오른쪽에 묻히고 부인을 祔左하게 된다. 반면 생자의 공간인 배계절에서는 동쪽과 왼쪽을 陽의 개념으로 해석하여 석물이 배치되고 있다. 이것은 조선시대 묘역을 이해함에 있어 가장 기본이 되는 요소로서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神道碑 및 墓碑의 건립 목적은 후세에 師表가 될 만한 기록을 남겨 조상의 德을 밝히고 顯揚하는 것이며, 동시에 性理學에서 제시한 朱子家禮에 의한 禮의 실행이었다. 특히 神道碑는 現職과 贈職을 포함하여 官職과 品階가 從二品 이상만 세울 수 있도록 法制化 되었던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이것은 조선시대를 통하여 일관되게 유지하였던 것으로 판단된다. 이러한 法制는 또한 品階에 따라 묘역의 규모에 차등을 두고, 庶人의 墓碑 규모를 2尺으로 제한하는 등의 法制와 함께 조선시대의 墓制에 있어서도 사회적ㆍ신분적 질서를 유지하기 위한 法制로 적용되고 있다. 이러한 양상들은 石碑에 한정된 것이 아니라 묘역에 배치된 각종 석물에서 다양하게 나타나고 있다.
朝鮮時代의 墓制에는 性理學, 風水地理說, 佛敎 및 陰陽論 등 다양한 文化要素가 融合되어 墓制에 나타나는 경향을 살펴볼 수 있었다. 특히 조선시대 묘제는 전 시대를 통해 다양한 사상적 요소가 시대의 흐름에 따라 변화ㆍ수용되는 양상을 보여주고 있다. 특히 石碑의 양식 변천 과정 중 가장 주목할 만한 것은 그 이전까지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지 않았던 屋蓋石 형식의 비가 17세기 후반부터 18세기 후반까지 다량 건립되고 있으며, 그 형태에 있어서도 八作屋蓋石을 비롯 사모옥개석ㆍ平屋蓋石ㆍ螭龍屋蓋石 등 다양한 양식으로 건립되고 있다는 것이다. 위 시기부터 옥개석 양식은 조선시대 석비의 전형적인 양식이 되었다. 이러한 옥개석 양식은 비의 개념, 즉 神을 인도하고 신과 인간을 연결하는 매개자로서의 개념에 충분히 어울리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그리고 이 양식은 이전의 비의 형태보다 경제적 측면과 비신의 碑文을 보호할 수 있는 구조적 역할이 고려된 실용적 사고의 결과라 하겠다. 이것은 조선시대 묘역에서만 나타나는 독창적인 양식으로 발전되어 나갔고, 현재까지 이어지는 전통으로 남게 되었다.
조선시대 사대부 묘역은 처음에 石室墓와 石槨墓를 사용하다가 석실ㆍ석곽묘에 대한 각종 금지 정책과 灰隔墓 사용 권장 정책으로 『國朝五禮儀』가 제시하고 있는 회격묘로 정착되어 간다. 그리고 회격묘는 대체로 임진왜란 이후 17세기부터 주자의 『家禮』가 제시하고 있는 灰槨墓로 전환되기 시작하여, 18세기 이후로는 완벽하게 회곽묘로 대체되어 가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러한 변천과정 속에서도 변하지 않는 개념은 이중관 구조에 대한 개념이다. 조선시대에 있어서 石槨墓는 石槨에 木棺이 안치된 二重棺 구조이고, 灰隔墓에서의 木槨은 木槨에 木棺이 안치된 이중관 구조이다. 그리고 灰槨墓에서는 灰槨에 木棺이 안치된 이중관 구조이다. 이처럼 이중관 구조는 조선시대 전 기간에 걸쳐 石室墓에서는 石槨, 灰隔墓에서는 木槨, 灰槨墓에서는 灰槨으로 변화되어 유지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조선시대 사대부 묘역에서는 다양한 사상적 文化要素가 融合되어 墓制에 반영되었다. 뿐만 아니라 비신을 보호하기 위한 합리적 구조인 옥개석 구조의 개발, 정치적ㆍ경제적ㆍ기술적 관점에서의 석실ㆍ석곽묘에서 회격묘로의 전환, 그리고 다시 회격묘에서 회곽묘로의 변천 과정에 따르는 많은 요소가 내재되어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서울ㆍ경기지역의 朝鮮時代 士大夫 墓制 硏究
提 出 者 : 金 右 臨
指導敎授 : 崔 光 植
이 연구는 조선시대 墓制에 관한 전반적인 분석을 통해 조선시대 묘제에 대해 체계적으로 파악하는 기틀을 마련하고자 하였다. 이 연구에서 다루고자 하는 墓制, 즉 墳墓制度 또는 墓葬制度는 死者의 陰宅으로서의 무덤에 관한 제반 法制的 制度 및 樣式에 대한 문제이다. 즉, 신분에 따른 무덤의 명칭ㆍ규모ㆍ조성방법, 墓域에 조성되는 각종 石物類의 제한규정ㆍ배치방법 및 명칭ㆍ형태ㆍ수량 등 무덤의 외형적 요소뿐만 아니라 喪葬禮의 결과로 나타난 무덤 속의 구조에 대한 制度 및 樣式에 관한 문제이다.
이 연구를 전개함에 있어서 묘역의 대상을 한정시켜 분석할 필요성이 있었다. 이에 묘역의 대상은 士大夫 墓域을 중심으로 분석하였다. 그리고 지역적으로는 서울ㆍ경기지역의 묘역을 중심으로 분석하였다. 다만 시기적으로는 조선시대 전 기간을 대상으로 하여 서울ㆍ경기지역의 사대부 묘역에 대한 총체적인 이해를 도모하고자 하였다.
연구의 방법은 먼저 조선시대 사대부 묘역의 구조를 전반적으로 구성하여 분석하는 것으로 시작하였다. 특히 朝鮮時代 墓制에 나타난 각종 석물 및 구조에 숨어있는 민속학적 象徵體系의 의미를 밝혀내어 조선시대 묘제에 대한 이해를 높이고자 하였다. 이후 조선시대 사대부 묘역에 배치된 각종 석물에 대한 법제적 문제, 제한규정, 배치방법, 명칭 및 묘역에서의 석물이 차지하는 의미 등 개개의 석물에 내재되어 있는 각종 문제점을 분석하였다. 조선시대 묘역에 배치된 석물들은 조선시대 전기부터 후대에 이르기까지 끊임없는 외형적 변화를 거치게 되는데 이에 관한 미술사적 변화과정을 분석하고, 아울러 각종 석물의 양식 및 도상의 변화과정에 담긴 시대적 의미와 사상적 변화를 분석하고자 하였다.
그리고 상장례의 결과로 나타난 무덤속의 구조에 대해 먼저 사료적 검토를 하였다. 조선왕조는 주자가례에 의거하여 灰隔墓를 정착시키기 위한 정책들을 단계적으로 밟아 나가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또한 이 과정에서 나타난 당시의 석실묘와 회격묘의 장ㆍ단점에 관한 논의를 통해 두 묘제에 대한 당시의 인식을 살펴볼 수 있었다. 또한 축조 방법에 따른 石室墓와 石槨墓, 그리고 灰隔墓와 灰槨墓에 관한 차이점을 분석하고, 이에 따른 명칭 문제를 다루었다. 이후 각종 축조 방법이 드러난 여러 고고학적 발굴성과를 정리하고, 당시대에 나타난 실제적 현상들을 검토하였다. 끝으로 조선시대 士大夫家의 미라 및 服飾이 出土되는 분묘 연구를 통해 미라 및 복식이 출토되는 과학적 메커니즘을 정리하였다.
위와 같은 조선시대 묘제 연구에 대한 범위와 방법론을 통해 분석할 수 있었던 다양한 결과물 중 중요한 것을 간추리면 다음과 같다.
조선시대 사대부 묘역은 階砌石을 중심으로 상단의 階節과 하단의 拜階節로 구분된다. 階節은 亡子를 위한 공간으로서 망자에 대한 봉분과 석물이 배치되고, 拜階節에는 生者의 활동 공간으로서 에 대한 석물이 배치된다. 또한 방위개념은 陰陽論에 의거하여 망자의 공간인 계절에서는 서쪽과 오른쪽을 중시하여 남편이 오른쪽에 묻히고 부인을 祔左하게 된다. 반면 생자의 공간인 배계절에서는 동쪽과 왼쪽을 陽의 개념으로 해석하여 석물이 배치되고 있다. 이것은 조선시대 묘역을 이해함에 있어 가장 기본이 되는 요소로서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神道碑 및 墓碑의 건립 목적은 후세에 師表가 될 만한 기록을 남겨 조상의 德을 밝히고 顯揚하는 것이며, 동시에 性理學에서 제시한 朱子家禮에 의한 禮의 실행이었다. 특히 神道碑는 現職과 贈職을 포함하여 官職과 品階가 從二品 이상만 세울 수 있도록 法制化 되었던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이것은 조선시대를 통하여 일관되게 유지하였던 것으로 판단된다. 이러한 法制는 또한 品階에 따라 묘역의 규모에 차등을 두고, 庶人의 墓碑 규모를 2尺으로 제한하는 등의 法制와 함께 조선시대의 墓制에 있어서도 사회적ㆍ신분적 질서를 유지하기 위한 法制로 적용되고 있다. 이러한 양상들은 石碑에 한정된 것이 아니라 묘역에 배치된 각종 석물에서 다양하게 나타나고 있다.
朝鮮時代의 墓制에는 性理學, 風水地理說, 佛敎 및 陰陽論 등 다양한 文化要素가 融合되어 墓制에 나타나는 경향을 살펴볼 수 있었다. 특히 조선시대 묘제는 전 시대를 통해 다양한 사상적 요소가 시대의 흐름에 따라 변화ㆍ수용되는 양상을 보여주고 있다. 특히 石碑의 양식 변천 과정 중 가장 주목할 만한 것은 그 이전까지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지 않았던 屋蓋石 형식의 비가 17세기 후반부터 18세기 후반까지 다량 건립되고 있으며, 그 형태에 있어서도 八作屋蓋石을 비롯 사모옥개석ㆍ平屋蓋石ㆍ螭龍屋蓋石 등 다양한 양식으로 건립되고 있다는 것이다. 위 시기부터 옥개석 양식은 조선시대 석비의 전형적인 양식이 되었다. 이러한 옥개석 양식은 비의 개념, 즉 神을 인도하고 신과 인간을 연결하는 매개자로서의 개념에 충분히 어울리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그리고 이 양식은 이전의 비의 형태보다 경제적 측면과 비신의 碑文을 보호할 수 있는 구조적 역할이 고려된 실용적 사고의 결과라 하겠다. 이것은 조선시대 묘역에서만 나타나는 독창적인 양식으로 발전되어 나갔고, 현재까지 이어지는 전통으로 남게 되었다.
조선시대 사대부 묘역은 처음에 石室墓와 石槨墓를 사용하다가 석실ㆍ석곽묘에 대한 각종 금지 정책과 灰隔墓 사용 권장 정책으로 『國朝五禮儀』가 제시하고 있는 회격묘로 정착되어 간다. 그리고 회격묘는 대체로 임진왜란 이후 17세기부터 주자의 『家禮』가 제시하고 있는 灰槨墓로 전환되기 시작하여, 18세기 이후로는 완벽하게 회곽묘로 대체되어 가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러한 변천과정 속에서도 변하지 않는 개념은 이중관 구조에 대한 개념이다. 조선시대에 있어서 石槨墓는 石槨에 木棺이 안치된 二重棺 구조이고, 灰隔墓에서의 木槨은 木槨에 木棺이 안치된 이중관 구조이다. 그리고 灰槨墓에서는 灰槨에 木棺이 안치된 이중관 구조이다. 이처럼 이중관 구조는 조선시대 전 기간에 걸쳐 石室墓에서는 石槨, 灰隔墓에서는 木槨, 灰槨墓에서는 灰槨으로 변화되어 유지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조선시대 사대부 묘역에서는 다양한 사상적 文化要素가 融合되어 墓制에 반영되었다. 뿐만 아니라 비신을 보호하기 위한 합리적 구조인 옥개석 구조의 개발, 정치적ㆍ경제적ㆍ기술적 관점에서의 석실ㆍ석곽묘에서 회격묘로의 전환, 그리고 다시 회격묘에서 회곽묘로의 변천 과정에 따르는 많은 요소가 내재되어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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