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론이 지니는 이 해석학적 기능은 불변성과 적응성의 문제와 관련해서 뿐아니라, 교회의 본질과 교회의 존재 양태와 연관해서도 작용한다.가정교회는 과연 참 교회인가? 본 논문의 결론은 다음과 같다. 먼저,가정교회에는 교회의 본질이 머문다. 교회의 본질 즉 '교회란 무엇인가'를 말하려고 할 때, 그 본질을 바빙크가 지적한 바와 같이 어떤 형이상학적 상태로 파악해서는 안된다. 이원론적인 플라톤적 관점에서가 아니라 통전성 강조를 특징으로 하는 히브리적 관점으로 이해하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교회의 본질(essence)은 단순히 내용으로서만 규정되는 것이 아니다. 그리스 도와의 연합 속에 교회의 통일성이 있고, 교회의 거룩성이 있고, 교회의 보편성이 있고, 교회의 사도성이 지지를 받을 수 있게 된다. 가정교회는 그리스도와 연합한 성도들이 모여 있으므로 보편적인 교회에 속한다. 교회의 구분으로 들어가서 무형교회와 유형교회, 유기적 교회와 제도적 교회의 비교는 같은 맥락에서 이해해 볼 수 있다. 무형은 유형으로 나타나며 유기적 교회는 제도적 교회의 양상으로 나타난다. 가정교회에는 교회의 본질이 머물며 보편교회에 속한다. 그러나 그 나타나는 양상에서 단위 교회인 에클레시아로 인정하는데는 어려움이 있다. 그렇다고 해서 가정교회가 하나님의 백성이 아니라거나 그리스도의 몸이 아니라거나 성령의 전이 아니라는 뜻은 아니다. 교회의 기능적인 면에서는 예배, 선교, 교육, 친교, 봉사, 치유 등 다양한 기능들을 가정교회에서도 감당하고 있다.교회의 정치를 생각한다면 가정교회는 회중정체적인 성격을 띠고 있다. 이 땅에 세우신 주님의 교회 내에 친밀감과 공동체성이 강한 한 지체로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 다음으로, 참된 교회의 표지 및 대한예수교 장로회 합동측 헌법에 기초해 볼 때 가정교회는 교회의 본질은 가지고 있으나 교회의 형태로서는 개별 교회라고 인정할 수 없다. 교회를 개척할 때 장소를 얻기 어려운 재정적인 상황에서는 자연스럽게 자기 집에서 교회를 시작하는 경우가 많다. 개척교회 시절에는 가정에서 예배를 드리며 사도행전적인 친밀함이 있는 교제를 형성하게 되는 것이다. 목사가 개척하며 돌아보는 가정교회는 참된 표지에 의거할 때 교회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예배공동체인 교회 속에 여러 그룹으로 산재해 있는 가정교회, 즉 평신도 지도자가 리더가 되어 성례전을 집례할 수 없는 소그룹인 가정교회를 교회로 인정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평신도 지도자가 교회에서 하는 예배와 교육과 구제와 선교,또한 초신자에 대한 양육과 돌봄의 사역을 행한다고 할지라도 단위 교회로 인정하는 것은 불가하다. 또한 에클레시아의 다양한 면모 속에서 가정교회는 가정적인 면이 강조된 형태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에클레시아에는 지역적 면모가 있다.에클레시아라고 할 때는 반드시 지역교회를 염두에 두어야 한다. 왜냐하면 지상 교회는 지역에 그 연고를 두기 때문이다. 에클레시아는 지역교회이기 때문에 지역교회 내에 있는 소그룹인 가정교회를 또 다른 에클레시아로 인정한다는 것은 교회의 질서 속에 혼돈을 초래한다. 하나님은 질서의 하나님이시다. 가정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이며 하나님의 백성이라는데는 재론의 여지가 없다. 그러나 가정교회중에서 합법적으로 그 직에 부름받은 복음의 교역자, 즉 목사가 성례를 집례하는 외적인 표지를 지니지 않은 지역교회 내의 소그룹을 단위 교회로 인정할 수 없다. 셋째,'가정교회'라는 명칭을 장로교회 내에서 사용하는 것은 신중한 신학적 검토가 필요하다. '가정교회'는 소그룹 형태를 띠고 있지만 그 자체를 하나의 교회로 인정하는 철학적 기초를 가진 용어이다. 장로교회 내에서 조차도 신학적인 검토 없이 그대로 현장에서 사용되고 있는 것이 오늘의 현실이다. 그러므로 '가정교회'라는 명칭을 교단 산하 교회에서 사용함에 있어서 신중한 신학적 검토가 선행되어야 할 것으로 사료된다. 이한수 교수는 가정교회의 방향에 있어서 다음과 같이 우려를 표한다. "소그룹 지도자를 "목자" 심지어 "목사":로 승격시키려고 하기 때문에 평신도 지도자들일 수밖에 없는, 그리고 전문적인 신학교 교육을 받지도 않은 이들 소그룹 지도자들을 독립된 "목자"로, "목양자"로 치켜세울 때 기존 교회 조직체와 갈등을 일으킬 소지가 많다. 한국은 아직까지 여기까지 나아가지는 않았지만 앞으로 그쪽으로 발전해갈소지가 있어 우려가 된다." 그렇다면 현재 구역을 가정교회로 전환하는 목회현장의 시도에 대해서 어떻게 볼 것인가? 먼저 긍정적인 시각으로서, 가정교회는 침체되어가는 교회를 살 릴 수 있는 소그룹 운동의 새로운 대안이 될 수 있다. 소그룹 공동체 운동은 고도로 산업화된 현대 사회에서 더욱 필요로 하게 되었다. 사회가 고도로 분업화, 전문화, 기계화, 정보화되면서 개인들은 더욱더 위축되었고 ...
교회론이 지니는 이 해석학적 기능은 불변성과 적응성의 문제와 관련해서 뿐아니라, 교회의 본질과 교회의 존재 양태와 연관해서도 작용한다.가정교회는 과연 참 교회인가? 본 논문의 결론은 다음과 같다. 먼저,가정교회에는 교회의 본질이 머문다. 교회의 본질 즉 '교회란 무엇인가'를 말하려고 할 때, 그 본질을 바빙크가 지적한 바와 같이 어떤 형이상학적 상태로 파악해서는 안된다. 이원론적인 플라톤적 관점에서가 아니라 통전성 강조를 특징으로 하는 히브리적 관점으로 이해하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교회의 본질(essence)은 단순히 내용으로서만 규정되는 것이 아니다. 그리스 도와의 연합 속에 교회의 통일성이 있고, 교회의 거룩성이 있고, 교회의 보편성이 있고, 교회의 사도성이 지지를 받을 수 있게 된다. 가정교회는 그리스도와 연합한 성도들이 모여 있으므로 보편적인 교회에 속한다. 교회의 구분으로 들어가서 무형교회와 유형교회, 유기적 교회와 제도적 교회의 비교는 같은 맥락에서 이해해 볼 수 있다. 무형은 유형으로 나타나며 유기적 교회는 제도적 교회의 양상으로 나타난다. 가정교회에는 교회의 본질이 머물며 보편교회에 속한다. 그러나 그 나타나는 양상에서 단위 교회인 에클레시아로 인정하는데는 어려움이 있다. 그렇다고 해서 가정교회가 하나님의 백성이 아니라거나 그리스도의 몸이 아니라거나 성령의 전이 아니라는 뜻은 아니다. 교회의 기능적인 면에서는 예배, 선교, 교육, 친교, 봉사, 치유 등 다양한 기능들을 가정교회에서도 감당하고 있다.교회의 정치를 생각한다면 가정교회는 회중정체적인 성격을 띠고 있다. 이 땅에 세우신 주님의 교회 내에 친밀감과 공동체성이 강한 한 지체로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 다음으로, 참된 교회의 표지 및 대한예수교 장로회 합동측 헌법에 기초해 볼 때 가정교회는 교회의 본질은 가지고 있으나 교회의 형태로서는 개별 교회라고 인정할 수 없다. 교회를 개척할 때 장소를 얻기 어려운 재정적인 상황에서는 자연스럽게 자기 집에서 교회를 시작하는 경우가 많다. 개척교회 시절에는 가정에서 예배를 드리며 사도행전적인 친밀함이 있는 교제를 형성하게 되는 것이다. 목사가 개척하며 돌아보는 가정교회는 참된 표지에 의거할 때 교회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예배공동체인 교회 속에 여러 그룹으로 산재해 있는 가정교회, 즉 평신도 지도자가 리더가 되어 성례전을 집례할 수 없는 소그룹인 가정교회를 교회로 인정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평신도 지도자가 교회에서 하는 예배와 교육과 구제와 선교,또한 초신자에 대한 양육과 돌봄의 사역을 행한다고 할지라도 단위 교회로 인정하는 것은 불가하다. 또한 에클레시아의 다양한 면모 속에서 가정교회는 가정적인 면이 강조된 형태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에클레시아에는 지역적 면모가 있다.에클레시아라고 할 때는 반드시 지역교회를 염두에 두어야 한다. 왜냐하면 지상 교회는 지역에 그 연고를 두기 때문이다. 에클레시아는 지역교회이기 때문에 지역교회 내에 있는 소그룹인 가정교회를 또 다른 에클레시아로 인정한다는 것은 교회의 질서 속에 혼돈을 초래한다. 하나님은 질서의 하나님이시다. 가정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이며 하나님의 백성이라는데는 재론의 여지가 없다. 그러나 가정교회중에서 합법적으로 그 직에 부름받은 복음의 교역자, 즉 목사가 성례를 집례하는 외적인 표지를 지니지 않은 지역교회 내의 소그룹을 단위 교회로 인정할 수 없다. 셋째,'가정교회'라는 명칭을 장로교회 내에서 사용하는 것은 신중한 신학적 검토가 필요하다. '가정교회'는 소그룹 형태를 띠고 있지만 그 자체를 하나의 교회로 인정하는 철학적 기초를 가진 용어이다. 장로교회 내에서 조차도 신학적인 검토 없이 그대로 현장에서 사용되고 있는 것이 오늘의 현실이다. 그러므로 '가정교회'라는 명칭을 교단 산하 교회에서 사용함에 있어서 신중한 신학적 검토가 선행되어야 할 것으로 사료된다. 이한수 교수는 가정교회의 방향에 있어서 다음과 같이 우려를 표한다. "소그룹 지도자를 "목자" 심지어 "목사":로 승격시키려고 하기 때문에 평신도 지도자들일 수밖에 없는, 그리고 전문적인 신학교 교육을 받지도 않은 이들 소그룹 지도자들을 독립된 "목자"로, "목양자"로 치켜세울 때 기존 교회 조직체와 갈등을 일으킬 소지가 많다. 한국은 아직까지 여기까지 나아가지는 않았지만 앞으로 그쪽으로 발전해갈소지가 있어 우려가 된다." 그렇다면 현재 구역을 가정교회로 전환하는 목회현장의 시도에 대해서 어떻게 볼 것인가? 먼저 긍정적인 시각으로서, 가정교회는 침체되어가는 교회를 살 릴 수 있는 소그룹 운동의 새로운 대안이 될 수 있다. 소그룹 공동체 운동은 고도로 산업화된 현대 사회에서 더욱 필요로 하게 되었다. 사회가 고도로 분업화, 전문화, 기계화, 정보화되면서 개인들은 더욱더 위축되었고 비인간화를 느끼기 시작하였다. 개안과 개인 간의 고립이 가속화되고, 마지막 남은 공동체인 가족이 해체되는 후기 산업사회의 위기 속에서 사람들은 더욱더 공동체적인 요소를 필요로 하게 되었다. 가족 안에서만 느낄 수 있는 끈과 인간적인 유대관계가 있는 장소, 대화가 있고 삶의 나눔이 있는 그런 인격적인 관계가 보장되는 모임을 갈망하게 되었다.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말은 교회가 조직화된 기계장치가 아니라 유기체임을 아주 생생하게 잘 표현해준다. 한 지역을 놓고 볼 때, 교회는 네트워크처럼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는 다수의 영적인 확대가족으로 이루어진다. 이 공동체들이 기능하는 방식은 본질적이다. 유기적인 면을 최소화하고 조직적인 면을 극대화시킨 현재의 교회구조는 조직적인 면을 극소화하면서 유기적인 면을 극대화하는 구조로 바뀌어야 한다. 교회갱신을 이룰 수 있는 이러한 여러 측면들 가운데 특별히 교회의 제도적 체질의 갱신이 있다. 그것은 제도적이고 형식적인 조직의 길을 가기만 하는 교회에 공동체성을 복원하여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건강한 교회를 회복하는 것을 의미한다.소그룹에서만 사람들은 친밀해져서 서로를 알고, 돌보고, 삶을 공유하며, 도전과 도움을 주며, 비밀을 이야기 하고, 죄를 고백하며, 용서하고 용서받으며, 함께 울고 함께 웃으며, 서로에 대해서 책임을 지게 되고, 서로를 점검해 주며 함께 성장한다. 사람들의 인격적인 성장은 홀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사람들 사이의 상호작용하는 관계로부터 나오는 결과이다. 소그룹은 사람들의 성품의 변화와 영적 성장을 만들어 내기 위한 하나님의 선물이다. 역사적으로 생명을 불어넣는 소그룹 운동이 제도교회를 침체에서 살린 적이 많이 있다. 중세의 수도원운동이 그러했고, 스패너의 '교회속의 작은 교회'라는 경건주의 운동이 그랬고, 한국 교회의 70-80년대 캠퍼스 선교운동이 그러하였다. 이제 현장에 불고 있는 소그룹 운동의 하나인 가정교회에 대해서도 도시화되고 날로 메말라가는 인간관계 속에 사는 현대인들을 공동체 가운데서 초청하여 친밀함을 키우며 성령 안에서 성도간의 코이노니아를 이루어 가는 생명력 있고 역동성 있는 공동체 운동으로 바라볼 수 있을 것이다. 둘째, 가정교회의 용어 사용 및 운영에 있어서 목회자들과 신학자들의 협력 가운데 신학적 검증과 발전적인 연구가 뒤따라야 할 것이다. 분명 가정교회는 공동체적 교회의 성격을 회복할 수 있는 대안으로 각광받고 있다. 그러나 교회성장에 도움이 되기 때문에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로버트 뱅크스는 이렇게 말했다. "20세기에 사는 우리는 아주 중요한 어떤 것을 잃고 있다. 우리가 그 때로 돌아가서 초기 그리스도인들이 했던 것을 단순히 모방할 수는 없을지라도, 그들의 모임의 본질적 성격은 이 20세기에도 적절하게 표현될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하려면 오늘날의 우리 방식들을 많이 바꾸어야 하겠지만 얻게 되는 것도 헤아릴 수 없이 많을 것이다." 또한 로버트 뱅크스는 그의 아내와 함께 쓴 책에서 초대 교회 시대와 오늘날의 상황은 '교회 내의 관계유형이나 권위계통이 다르고 교회 모임의 양상이 다르기 때문에 초대 교회 그리스도인의 공동체를 이상화하거나 그대로 적용하려는 데는 무리가 있고 어려움이 있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하지만 '초대교회의 목회방식을 무시해서는 안된다'는 것을 강조한다. 초대 교회의 원리와 정신, 그리고 골격은 그대로 살려 나가되 모임의 형태나 방법에 있어서는 변화를 주어 오늘의 시대적 상황에 맞는 건강한 교회를 만들어 내야 한다. 목사와 가정교회를 섬기는 평신도 지도자와의 긴밀한 협력관계가 중요하다. 예컨대, 성례식이나 권징이 작은 공동체인 가정교회에서 제대로 시행되지 않더라도 큰 공동체인 교회에서 시행하고 있기에 문제가 되지 않는다. 가정교회와 큰 공동체인 교회는 유기적 관계에 있기 때문이다. 말씀선포와 성례집행은 예배공동체에서 목사가 담당하고, 주중에 성도들을 심방하고 주 안에서 교제하며 돌보는 일은 평신도 지도자들이 담당함으로써 파트너쉽을 세워나갈 수 있을 것이다. 혹자는 전통이 교회의 생명을 죽이는 역할을 해왔다고 비판하면서 가정교회의 생명력이 교회를 살리고 있다는 것을 역설한다. 그러나 제도가 있고 자유와 질서가 있는 상황에서는 그 자체를 교회로 인정할 때는 부작용과 혼란이 훨씬 클 것으로 예상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가정교회가 가지고 있는 교회의 역동성, 침투성을 최대한 수용하면서도 질서를 세우는 쪽으로 받아들여져야 한다. 하나님께서 세우신 질서 속에서 보면 가정교회는 온전한 교회라고 보기에는 제도적으로 부족한 것이 사실이다. 때문에 이제 중요한 것은 몸된 교회를 바르게 세워야 하는 사역자들로서 성경이 뭐라고 말씀하시느냐에 귀를 기울이는 것이다. 교회론이 교회론적 체계 자체의 존립을 위해 존재해서는 안된다. 이론을 위한 이론이어서는 안된다. 삶을 위한 이론이어야 한다. 그럼에도 항상 본문에 우선권이 주어져야한다. 그리할 때 우리의 교회론은 적응성을 지닌 교회론으로 자리매김해 갈 것이다. 여기서 교회의 본질을 실천적으로 추구하는 일들이 가능해 질 것이며, 그리하여 구체적인 역사의 현장에서 교회가 교회되어가는 모습을 경험하게 될 것이다. 장로교회 내에서 가정교회를 안고 갈 때에 신학적으로 문제가 되는 점이 무엇인가를 살피고 그 문제를 풀어야 한다. 마지막으로 '개혁된 교회는 항상 개혁되어야 한다'(Ecclesia reformanda semper reforma) 이 표어를 마음에 새기면서 하나님께서 마음에 두시고 기뻐하셨던 교회, 이 땅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는 하나님의 백성이요, 그리스도의 몸으로서의 교회는 계속적으로 개혁되어 나가야 한다. 가정교회는 성경에서 교회가 태동할 때부터 하나님의 백성이요, 그리스도의 몸을 이룬 지체들의 생활양식이었다. 기독교가 공인되기 전까지 수많은 가정교회는 요원의 불길처럼 퍼져나갔다. 오늘날 중국의 가정교회는 중국 기독교의 근간을 이루고 있으며 핍박과 박해가 있는 곳이면 어디나 하나님께서는 가정에서 예배하고 그들의 신앙을 지켜가도록 도우신다. 본 논문을 통하여 "개혁 신학적으로 가정교회를 단위 교회로 인정하기 어렵다"는 결론을 도출하였다. 그러나 지금도 살아서 역사하시는 하나님께서 가정교회를 통해서 일하신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고 보편교회의 지체로서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고 있는 수많은 가정교회를 존중한다. 종교개혁의 정신 속에서 볼 때 가정교회의 주장은 탄력적으로 수용할 여지가 충분히 있다. 칼빈 조차도 장로교 제도의 가변성을 열어놓지 않았는가? 가정교회의 취지는 너무나 좋다. 목사의 겸손한 섬김과 지도 속에 평신도를 사역자로 세워 몸된 교회를 바르게 세우는 것이 얼마나 소중한 일인가? '본질적인 것에서는 일치를 비 본질적인 것에서는 자유를'이라고 외친 종교개혁자들의 경구를 마음에 새기면서 보편교회의 통일성과 일치를 추구하려 했던 하나됨의 몸부림과 함께 교회를 교회되게 하기를 소원했던 하나님의 일꾼들의 불타는 열정을 가지기를 소망해 본다. 목회현장에 있는 장로교 합동교단 내의 교회 내에서 '가정교회'라는 이름으로 소그룹을 전환하고 있는 현실 속에서 가정교회를 개혁 신학적인 입장에서 고찰하였다. 일선 목회자들과 신학자들은 적어도 그 용어에 대한 성경적, 신학적 입장을 정리하여 바른 신학 위에서 바른 목회를 할 수 있도록 추후에 더 깊은 연구를 진행하여야 할 것이다. 아무쪼록 학문적인 면에서 깊은 연구와 계도가 있어서 교회의 본질과 목회의 실제가 어우러진 건강한 교회를 세우는 일을 통하여 몸된 교회를 건강하게 세울 수 있길 기대한다. 오직 하나님께 영광!(Soli Deo Gloria!)
교회론이 지니는 이 해석학적 기능은 불변성과 적응성의 문제와 관련해서 뿐아니라, 교회의 본질과 교회의 존재 양태와 연관해서도 작용한다.가정교회는 과연 참 교회인가? 본 논문의 결론은 다음과 같다. 먼저,가정교회에는 교회의 본질이 머문다. 교회의 본질 즉 '교회란 무엇인가'를 말하려고 할 때, 그 본질을 바빙크가 지적한 바와 같이 어떤 형이상학적 상태로 파악해서는 안된다. 이원론적인 플라톤적 관점에서가 아니라 통전성 강조를 특징으로 하는 히브리적 관점으로 이해하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교회의 본질(essence)은 단순히 내용으로서만 규정되는 것이 아니다. 그리스 도와의 연합 속에 교회의 통일성이 있고, 교회의 거룩성이 있고, 교회의 보편성이 있고, 교회의 사도성이 지지를 받을 수 있게 된다. 가정교회는 그리스도와 연합한 성도들이 모여 있으므로 보편적인 교회에 속한다. 교회의 구분으로 들어가서 무형교회와 유형교회, 유기적 교회와 제도적 교회의 비교는 같은 맥락에서 이해해 볼 수 있다. 무형은 유형으로 나타나며 유기적 교회는 제도적 교회의 양상으로 나타난다. 가정교회에는 교회의 본질이 머물며 보편교회에 속한다. 그러나 그 나타나는 양상에서 단위 교회인 에클레시아로 인정하는데는 어려움이 있다. 그렇다고 해서 가정교회가 하나님의 백성이 아니라거나 그리스도의 몸이 아니라거나 성령의 전이 아니라는 뜻은 아니다. 교회의 기능적인 면에서는 예배, 선교, 교육, 친교, 봉사, 치유 등 다양한 기능들을 가정교회에서도 감당하고 있다.교회의 정치를 생각한다면 가정교회는 회중정체적인 성격을 띠고 있다. 이 땅에 세우신 주님의 교회 내에 친밀감과 공동체성이 강한 한 지체로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 다음으로, 참된 교회의 표지 및 대한예수교 장로회 합동측 헌법에 기초해 볼 때 가정교회는 교회의 본질은 가지고 있으나 교회의 형태로서는 개별 교회라고 인정할 수 없다. 교회를 개척할 때 장소를 얻기 어려운 재정적인 상황에서는 자연스럽게 자기 집에서 교회를 시작하는 경우가 많다. 개척교회 시절에는 가정에서 예배를 드리며 사도행전적인 친밀함이 있는 교제를 형성하게 되는 것이다. 목사가 개척하며 돌아보는 가정교회는 참된 표지에 의거할 때 교회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예배공동체인 교회 속에 여러 그룹으로 산재해 있는 가정교회, 즉 평신도 지도자가 리더가 되어 성례전을 집례할 수 없는 소그룹인 가정교회를 교회로 인정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평신도 지도자가 교회에서 하는 예배와 교육과 구제와 선교,또한 초신자에 대한 양육과 돌봄의 사역을 행한다고 할지라도 단위 교회로 인정하는 것은 불가하다. 또한 에클레시아의 다양한 면모 속에서 가정교회는 가정적인 면이 강조된 형태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에클레시아에는 지역적 면모가 있다.에클레시아라고 할 때는 반드시 지역교회를 염두에 두어야 한다. 왜냐하면 지상 교회는 지역에 그 연고를 두기 때문이다. 에클레시아는 지역교회이기 때문에 지역교회 내에 있는 소그룹인 가정교회를 또 다른 에클레시아로 인정한다는 것은 교회의 질서 속에 혼돈을 초래한다. 하나님은 질서의 하나님이시다. 가정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이며 하나님의 백성이라는데는 재론의 여지가 없다. 그러나 가정교회중에서 합법적으로 그 직에 부름받은 복음의 교역자, 즉 목사가 성례를 집례하는 외적인 표지를 지니지 않은 지역교회 내의 소그룹을 단위 교회로 인정할 수 없다. 셋째,'가정교회'라는 명칭을 장로교회 내에서 사용하는 것은 신중한 신학적 검토가 필요하다. '가정교회'는 소그룹 형태를 띠고 있지만 그 자체를 하나의 교회로 인정하는 철학적 기초를 가진 용어이다. 장로교회 내에서 조차도 신학적인 검토 없이 그대로 현장에서 사용되고 있는 것이 오늘의 현실이다. 그러므로 '가정교회'라는 명칭을 교단 산하 교회에서 사용함에 있어서 신중한 신학적 검토가 선행되어야 할 것으로 사료된다. 이한수 교수는 가정교회의 방향에 있어서 다음과 같이 우려를 표한다. "소그룹 지도자를 "목자" 심지어 "목사":로 승격시키려고 하기 때문에 평신도 지도자들일 수밖에 없는, 그리고 전문적인 신학교 교육을 받지도 않은 이들 소그룹 지도자들을 독립된 "목자"로, "목양자"로 치켜세울 때 기존 교회 조직체와 갈등을 일으킬 소지가 많다. 한국은 아직까지 여기까지 나아가지는 않았지만 앞으로 그쪽으로 발전해갈소지가 있어 우려가 된다." 그렇다면 현재 구역을 가정교회로 전환하는 목회현장의 시도에 대해서 어떻게 볼 것인가? 먼저 긍정적인 시각으로서, 가정교회는 침체되어가는 교회를 살 릴 수 있는 소그룹 운동의 새로운 대안이 될 수 있다. 소그룹 공동체 운동은 고도로 산업화된 현대 사회에서 더욱 필요로 하게 되었다. 사회가 고도로 분업화, 전문화, 기계화, 정보화되면서 개인들은 더욱더 위축되었고 비인간화를 느끼기 시작하였다. 개안과 개인 간의 고립이 가속화되고, 마지막 남은 공동체인 가족이 해체되는 후기 산업사회의 위기 속에서 사람들은 더욱더 공동체적인 요소를 필요로 하게 되었다. 가족 안에서만 느낄 수 있는 끈과 인간적인 유대관계가 있는 장소, 대화가 있고 삶의 나눔이 있는 그런 인격적인 관계가 보장되는 모임을 갈망하게 되었다.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말은 교회가 조직화된 기계장치가 아니라 유기체임을 아주 생생하게 잘 표현해준다. 한 지역을 놓고 볼 때, 교회는 네트워크처럼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는 다수의 영적인 확대가족으로 이루어진다. 이 공동체들이 기능하는 방식은 본질적이다. 유기적인 면을 최소화하고 조직적인 면을 극대화시킨 현재의 교회구조는 조직적인 면을 극소화하면서 유기적인 면을 극대화하는 구조로 바뀌어야 한다. 교회갱신을 이룰 수 있는 이러한 여러 측면들 가운데 특별히 교회의 제도적 체질의 갱신이 있다. 그것은 제도적이고 형식적인 조직의 길을 가기만 하는 교회에 공동체성을 복원하여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건강한 교회를 회복하는 것을 의미한다.소그룹에서만 사람들은 친밀해져서 서로를 알고, 돌보고, 삶을 공유하며, 도전과 도움을 주며, 비밀을 이야기 하고, 죄를 고백하며, 용서하고 용서받으며, 함께 울고 함께 웃으며, 서로에 대해서 책임을 지게 되고, 서로를 점검해 주며 함께 성장한다. 사람들의 인격적인 성장은 홀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사람들 사이의 상호작용하는 관계로부터 나오는 결과이다. 소그룹은 사람들의 성품의 변화와 영적 성장을 만들어 내기 위한 하나님의 선물이다. 역사적으로 생명을 불어넣는 소그룹 운동이 제도교회를 침체에서 살린 적이 많이 있다. 중세의 수도원운동이 그러했고, 스패너의 '교회속의 작은 교회'라는 경건주의 운동이 그랬고, 한국 교회의 70-80년대 캠퍼스 선교운동이 그러하였다. 이제 현장에 불고 있는 소그룹 운동의 하나인 가정교회에 대해서도 도시화되고 날로 메말라가는 인간관계 속에 사는 현대인들을 공동체 가운데서 초청하여 친밀함을 키우며 성령 안에서 성도간의 코이노니아를 이루어 가는 생명력 있고 역동성 있는 공동체 운동으로 바라볼 수 있을 것이다. 둘째, 가정교회의 용어 사용 및 운영에 있어서 목회자들과 신학자들의 협력 가운데 신학적 검증과 발전적인 연구가 뒤따라야 할 것이다. 분명 가정교회는 공동체적 교회의 성격을 회복할 수 있는 대안으로 각광받고 있다. 그러나 교회성장에 도움이 되기 때문에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로버트 뱅크스는 이렇게 말했다. "20세기에 사는 우리는 아주 중요한 어떤 것을 잃고 있다. 우리가 그 때로 돌아가서 초기 그리스도인들이 했던 것을 단순히 모방할 수는 없을지라도, 그들의 모임의 본질적 성격은 이 20세기에도 적절하게 표현될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하려면 오늘날의 우리 방식들을 많이 바꾸어야 하겠지만 얻게 되는 것도 헤아릴 수 없이 많을 것이다." 또한 로버트 뱅크스는 그의 아내와 함께 쓴 책에서 초대 교회 시대와 오늘날의 상황은 '교회 내의 관계유형이나 권위계통이 다르고 교회 모임의 양상이 다르기 때문에 초대 교회 그리스도인의 공동체를 이상화하거나 그대로 적용하려는 데는 무리가 있고 어려움이 있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하지만 '초대교회의 목회방식을 무시해서는 안된다'는 것을 강조한다. 초대 교회의 원리와 정신, 그리고 골격은 그대로 살려 나가되 모임의 형태나 방법에 있어서는 변화를 주어 오늘의 시대적 상황에 맞는 건강한 교회를 만들어 내야 한다. 목사와 가정교회를 섬기는 평신도 지도자와의 긴밀한 협력관계가 중요하다. 예컨대, 성례식이나 권징이 작은 공동체인 가정교회에서 제대로 시행되지 않더라도 큰 공동체인 교회에서 시행하고 있기에 문제가 되지 않는다. 가정교회와 큰 공동체인 교회는 유기적 관계에 있기 때문이다. 말씀선포와 성례집행은 예배공동체에서 목사가 담당하고, 주중에 성도들을 심방하고 주 안에서 교제하며 돌보는 일은 평신도 지도자들이 담당함으로써 파트너쉽을 세워나갈 수 있을 것이다. 혹자는 전통이 교회의 생명을 죽이는 역할을 해왔다고 비판하면서 가정교회의 생명력이 교회를 살리고 있다는 것을 역설한다. 그러나 제도가 있고 자유와 질서가 있는 상황에서는 그 자체를 교회로 인정할 때는 부작용과 혼란이 훨씬 클 것으로 예상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가정교회가 가지고 있는 교회의 역동성, 침투성을 최대한 수용하면서도 질서를 세우는 쪽으로 받아들여져야 한다. 하나님께서 세우신 질서 속에서 보면 가정교회는 온전한 교회라고 보기에는 제도적으로 부족한 것이 사실이다. 때문에 이제 중요한 것은 몸된 교회를 바르게 세워야 하는 사역자들로서 성경이 뭐라고 말씀하시느냐에 귀를 기울이는 것이다. 교회론이 교회론적 체계 자체의 존립을 위해 존재해서는 안된다. 이론을 위한 이론이어서는 안된다. 삶을 위한 이론이어야 한다. 그럼에도 항상 본문에 우선권이 주어져야한다. 그리할 때 우리의 교회론은 적응성을 지닌 교회론으로 자리매김해 갈 것이다. 여기서 교회의 본질을 실천적으로 추구하는 일들이 가능해 질 것이며, 그리하여 구체적인 역사의 현장에서 교회가 교회되어가는 모습을 경험하게 될 것이다. 장로교회 내에서 가정교회를 안고 갈 때에 신학적으로 문제가 되는 점이 무엇인가를 살피고 그 문제를 풀어야 한다. 마지막으로 '개혁된 교회는 항상 개혁되어야 한다'(Ecclesia reformanda semper reforma) 이 표어를 마음에 새기면서 하나님께서 마음에 두시고 기뻐하셨던 교회, 이 땅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는 하나님의 백성이요, 그리스도의 몸으로서의 교회는 계속적으로 개혁되어 나가야 한다. 가정교회는 성경에서 교회가 태동할 때부터 하나님의 백성이요, 그리스도의 몸을 이룬 지체들의 생활양식이었다. 기독교가 공인되기 전까지 수많은 가정교회는 요원의 불길처럼 퍼져나갔다. 오늘날 중국의 가정교회는 중국 기독교의 근간을 이루고 있으며 핍박과 박해가 있는 곳이면 어디나 하나님께서는 가정에서 예배하고 그들의 신앙을 지켜가도록 도우신다. 본 논문을 통하여 "개혁 신학적으로 가정교회를 단위 교회로 인정하기 어렵다"는 결론을 도출하였다. 그러나 지금도 살아서 역사하시는 하나님께서 가정교회를 통해서 일하신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고 보편교회의 지체로서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고 있는 수많은 가정교회를 존중한다. 종교개혁의 정신 속에서 볼 때 가정교회의 주장은 탄력적으로 수용할 여지가 충분히 있다. 칼빈 조차도 장로교 제도의 가변성을 열어놓지 않았는가? 가정교회의 취지는 너무나 좋다. 목사의 겸손한 섬김과 지도 속에 평신도를 사역자로 세워 몸된 교회를 바르게 세우는 것이 얼마나 소중한 일인가? '본질적인 것에서는 일치를 비 본질적인 것에서는 자유를'이라고 외친 종교개혁자들의 경구를 마음에 새기면서 보편교회의 통일성과 일치를 추구하려 했던 하나됨의 몸부림과 함께 교회를 교회되게 하기를 소원했던 하나님의 일꾼들의 불타는 열정을 가지기를 소망해 본다. 목회현장에 있는 장로교 합동교단 내의 교회 내에서 '가정교회'라는 이름으로 소그룹을 전환하고 있는 현실 속에서 가정교회를 개혁 신학적인 입장에서 고찰하였다. 일선 목회자들과 신학자들은 적어도 그 용어에 대한 성경적, 신학적 입장을 정리하여 바른 신학 위에서 바른 목회를 할 수 있도록 추후에 더 깊은 연구를 진행하여야 할 것이다. 아무쪼록 학문적인 면에서 깊은 연구와 계도가 있어서 교회의 본질과 목회의 실제가 어우러진 건강한 교회를 세우는 일을 통하여 몸된 교회를 건강하게 세울 수 있길 기대한다. 오직 하나님께 영광!(Soli Deo Glor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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