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빈의 성화론은 그의 신학사상의 중심적인 위치를 차지하며 그의 사상은 한 시대를 개혁 시키고 타락한 사회를 변화시켰다. 이것은 그리스도인의 신앙생활이 성화에 있어야 함을 웅변적으로 말해 주고 있는 것이다. 성화란 타락한 인간이 예수님을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고, 일생동안 실현되어야할 사명이요 삶의 원리이며 과정인 것이다. 이런 면에서 칼빈은 ‘믿음으로 구원 얻은 자’가 하나님 앞에서 어떻게 ‘거룩하게 살아야’ 하는지를 알게 한다. 또 칼빈은 성화는 구원의 당연한 열매라 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의 생활 전체는 성화와 관계가 있다...
칼빈의 성화론은 그의 신학사상의 중심적인 위치를 차지하며 그의 사상은 한 시대를 개혁 시키고 타락한 사회를 변화시켰다. 이것은 그리스도인의 신앙생활이 성화에 있어야 함을 웅변적으로 말해 주고 있는 것이다. 성화란 타락한 인간이 예수님을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고, 일생동안 실현되어야할 사명이요 삶의 원리이며 과정인 것이다. 이런 면에서 칼빈은 ‘믿음으로 구원 얻은 자’가 하나님 앞에서 어떻게 ‘거룩하게 살아야’ 하는지를 알게 한다. 또 칼빈은 성화는 구원의 당연한 열매라 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의 생활 전체는 성화와 관계가 있다. 성화는 인간 전체에 영향을 미친다. 인간전체에 진행되는 하나님의 윤리적 형상의 회복을 의미한다. 이 성화는 “하나님이 거저 주시는 은혜의 역사인데, 우리는 이 은혜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형상에 따라 인간 전체가 새로워지며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의 삶은 단지 예수님을 믿음으로 구원 받은 것으로 끝난 것이 아니라 이 땅 위에서 예수님의 뜻을 좇아 사는 사람들인 것이다. 그러므로 행위의 변화가 없는 구원은 용어상 모순이며 그것은 구원이 아니다. 즉 성화 없는 구원이란 있을 수 없다. “그러나 이제는 너희가 죄에게서 해방되고 하나님께 종이 되어 거룩함에 이르는 열매를 얻었으니, 이 마지막은 영생이라.”(로마서 6:22). 사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고 구원은 받았지만 자기 뜻대로 살아가며 성화의 삶을 살아가기 위해 분투하며 싸우려 하지 않고 그저 하나님의 은혜로운 성품만을 취사선택해서 믿으려 한다. 이것이 오늘날의 교회에게 성화의 진리를 바로 알게 할 필요성의 이유이다. 칼빈의 성화론의 특징은 하나님의 은혜 중심, 실천적이고 전투적이며, 일평생 지속적인 성화라는데 있다. 칼빈의 성화론은 행동주의적 성화론이다. 그는 하나님의 절대적 주권과 통치를 말하면서도, 자신의 구원을 확신하기 위해, 선행을 실천하여야 한다고 말한다. 또 인간은 죄로 인하여 영원히 저주받고 멸망할 존재이지만,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예수 그리스도를 화목제로 주시고, 십자가의 대속으로 구속하셨다. 이를 믿는 자에게 성령을 부어주심으로 그리스도와 연합하게 하시어 중생케 하시었다. 중생은 죄를 깨닫고 하나님에게로 회심함과 옛것에서 돌아서고 새 것을 향하여 돌아서는, 즉 옛 사람을 죽이고 새 사람으로 사는 것이다. 이는 자신을 부인하는 것과 자기 십자가를 지는 것과 내세를 명상하는 것을 말하는 ‘죽임’과 ‘새로운 생명’을 받아 새로운 삶을 사는 ‘살림’을 말한다. 중생은 지속적으로 진행되고 진보됨을 말한다. 중생한 자에게는 율법이 순종해야할 규범으로 다가온다. 하나님에 대한 사랑과 이웃에 대한 사랑을 성경은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율법은 구원을 얻기 위해 행할 것은 아니지만, 구원 얻은 자가 하나님의 의와 거룩함에 일치하기 위해서 순종해야할 말씀인 것이다. 또 칼빈은 성도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칭의를 받지만, 하나님의 거룩하심에 이르기 위해 성화가 요구된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선택하시고, 부르시고, 의롭다 칭하시고, 성화를 이루어 가시며 영화로운 모습으로 이끄신다. 하나님의 택하심을 입고 부르심을 받은 자는 칭의를 받고 교회를 통하여 성화되어간다. 교회는 세례와 성찬을 통하여 성도를 그리스도와 연합되게 한다. 성도는 믿음을 통하여 칭의를 얻고, 믿음의 행위를 통하여 날마다 성화되어간다. 그러므로 칭의가 없는 성화가 불가능한 것 같이, 성화가 없는 칭의 또한 생각할 수 없는 것이다. 칼빈은 또 그리스도의 사람을 논할 때 “우리는 우리 자신의 주인이 아니고 하나님께 속해있다”는 명제로 시작한다. 하나님의 소유가 된 인간은 하나님의 말씀에 오직 “예!” 하고 순종하며 하나님의 소유된 자가 된 것을 기뻐하는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께 속한다는 것, 또는 하나님의 소유물이 되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요구에 대한 인간의 해답은 순종이다. 그리고 우리의 이성이나 의지로 하여금 우리의 계획과 행동을 지배하지 못하게 하고, 육을 따라 우리의 유익을 구하는 것을 목표로 삼지 말며, 우리 자신과 우리의 전 소유를 잊으라.”는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를 위해 살고 그를 위해 죽자(롬 14:8, 고전 6:19). 사람들이 이처럼 자기를 부정하고 세상과 지상 생활을 경멸함으로써 하나님의 의를 구하기를 약속하며, 하늘나라의 생명을 얻으려고 노력할 때, 거기에 하나님의 통치가 있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을 뿐만 아니라 성도와 세속 사람이 구별되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자신과 함께 할 자로 인정하시고 선택하신 사람은 고난과 노고와 불안이 많은 생애, 즉 각양각색의 재앙이 가득한 생애를 보낼 각오를 해야 한다. 이런 방법으로 자기 자녀들을 훈련시키시며 일정한 시련을 받게 하는 것이 아버지의 뜻이다. 하나님께서는 이 계획을 맏아들이신 그리스도로부터 모든 자녀에게 이르기 까지 적용하신다. 역경의 고통이 많을수록 그리스도와의 사귐이 더욱 확실하게 보장된다는 것은 십자가의 가혹한 성격을 완화하는데 얼마나 큰 도움이 될 것인가! 주와 사귐을 가짐으로써 고난 자체가 우리에게 큰 복이 될 뿐 아니라, 우리의 구원을 촉진하는 데 큰 도움이 될 것이다.
칼빈의 성화론은 그의 신학사상의 중심적인 위치를 차지하며 그의 사상은 한 시대를 개혁 시키고 타락한 사회를 변화시켰다. 이것은 그리스도인의 신앙생활이 성화에 있어야 함을 웅변적으로 말해 주고 있는 것이다. 성화란 타락한 인간이 예수님을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고, 일생동안 실현되어야할 사명이요 삶의 원리이며 과정인 것이다. 이런 면에서 칼빈은 ‘믿음으로 구원 얻은 자’가 하나님 앞에서 어떻게 ‘거룩하게 살아야’ 하는지를 알게 한다. 또 칼빈은 성화는 구원의 당연한 열매라 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의 생활 전체는 성화와 관계가 있다. 성화는 인간 전체에 영향을 미친다. 인간전체에 진행되는 하나님의 윤리적 형상의 회복을 의미한다. 이 성화는 “하나님이 거저 주시는 은혜의 역사인데, 우리는 이 은혜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형상에 따라 인간 전체가 새로워지며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의 삶은 단지 예수님을 믿음으로 구원 받은 것으로 끝난 것이 아니라 이 땅 위에서 예수님의 뜻을 좇아 사는 사람들인 것이다. 그러므로 행위의 변화가 없는 구원은 용어상 모순이며 그것은 구원이 아니다. 즉 성화 없는 구원이란 있을 수 없다. “그러나 이제는 너희가 죄에게서 해방되고 하나님께 종이 되어 거룩함에 이르는 열매를 얻었으니, 이 마지막은 영생이라.”(로마서 6:22). 사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고 구원은 받았지만 자기 뜻대로 살아가며 성화의 삶을 살아가기 위해 분투하며 싸우려 하지 않고 그저 하나님의 은혜로운 성품만을 취사선택해서 믿으려 한다. 이것이 오늘날의 교회에게 성화의 진리를 바로 알게 할 필요성의 이유이다. 칼빈의 성화론의 특징은 하나님의 은혜 중심, 실천적이고 전투적이며, 일평생 지속적인 성화라는데 있다. 칼빈의 성화론은 행동주의적 성화론이다. 그는 하나님의 절대적 주권과 통치를 말하면서도, 자신의 구원을 확신하기 위해, 선행을 실천하여야 한다고 말한다. 또 인간은 죄로 인하여 영원히 저주받고 멸망할 존재이지만,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예수 그리스도를 화목제로 주시고, 십자가의 대속으로 구속하셨다. 이를 믿는 자에게 성령을 부어주심으로 그리스도와 연합하게 하시어 중생케 하시었다. 중생은 죄를 깨닫고 하나님에게로 회심함과 옛것에서 돌아서고 새 것을 향하여 돌아서는, 즉 옛 사람을 죽이고 새 사람으로 사는 것이다. 이는 자신을 부인하는 것과 자기 십자가를 지는 것과 내세를 명상하는 것을 말하는 ‘죽임’과 ‘새로운 생명’을 받아 새로운 삶을 사는 ‘살림’을 말한다. 중생은 지속적으로 진행되고 진보됨을 말한다. 중생한 자에게는 율법이 순종해야할 규범으로 다가온다. 하나님에 대한 사랑과 이웃에 대한 사랑을 성경은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율법은 구원을 얻기 위해 행할 것은 아니지만, 구원 얻은 자가 하나님의 의와 거룩함에 일치하기 위해서 순종해야할 말씀인 것이다. 또 칼빈은 성도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칭의를 받지만, 하나님의 거룩하심에 이르기 위해 성화가 요구된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선택하시고, 부르시고, 의롭다 칭하시고, 성화를 이루어 가시며 영화로운 모습으로 이끄신다. 하나님의 택하심을 입고 부르심을 받은 자는 칭의를 받고 교회를 통하여 성화되어간다. 교회는 세례와 성찬을 통하여 성도를 그리스도와 연합되게 한다. 성도는 믿음을 통하여 칭의를 얻고, 믿음의 행위를 통하여 날마다 성화되어간다. 그러므로 칭의가 없는 성화가 불가능한 것 같이, 성화가 없는 칭의 또한 생각할 수 없는 것이다. 칼빈은 또 그리스도의 사람을 논할 때 “우리는 우리 자신의 주인이 아니고 하나님께 속해있다”는 명제로 시작한다. 하나님의 소유가 된 인간은 하나님의 말씀에 오직 “예!” 하고 순종하며 하나님의 소유된 자가 된 것을 기뻐하는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께 속한다는 것, 또는 하나님의 소유물이 되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요구에 대한 인간의 해답은 순종이다. 그리고 우리의 이성이나 의지로 하여금 우리의 계획과 행동을 지배하지 못하게 하고, 육을 따라 우리의 유익을 구하는 것을 목표로 삼지 말며, 우리 자신과 우리의 전 소유를 잊으라.”는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를 위해 살고 그를 위해 죽자(롬 14:8, 고전 6:19). 사람들이 이처럼 자기를 부정하고 세상과 지상 생활을 경멸함으로써 하나님의 의를 구하기를 약속하며, 하늘나라의 생명을 얻으려고 노력할 때, 거기에 하나님의 통치가 있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을 뿐만 아니라 성도와 세속 사람이 구별되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자신과 함께 할 자로 인정하시고 선택하신 사람은 고난과 노고와 불안이 많은 생애, 즉 각양각색의 재앙이 가득한 생애를 보낼 각오를 해야 한다. 이런 방법으로 자기 자녀들을 훈련시키시며 일정한 시련을 받게 하는 것이 아버지의 뜻이다. 하나님께서는 이 계획을 맏아들이신 그리스도로부터 모든 자녀에게 이르기 까지 적용하신다. 역경의 고통이 많을수록 그리스도와의 사귐이 더욱 확실하게 보장된다는 것은 십자가의 가혹한 성격을 완화하는데 얼마나 큰 도움이 될 것인가! 주와 사귐을 가짐으로써 고난 자체가 우리에게 큰 복이 될 뿐 아니라, 우리의 구원을 촉진하는 데 큰 도움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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