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논문은 한국전쟁과 산업화를 거치면서 일어난 한국의 사회변동과 더불어 옹기 생산이 어떻게 변화되었는지에 대하여 청송에 있는 진안마을을 대상으로 연구한 것이다. 옹기 생산의 변화를 이해하기 위해 이 연구에서는 생산과 소비의 상관관계를 중요하게 다루었다. 따라서 이 연구에서는 옹기의 생산과 소비의 변화, 소비자의 요구와 옹기장인의 의도가 만나는 절충점이 무엇인지 파악하고자 했다.
전통적인 한국사회에서 옹기는 폭 넓게 쓰이던 생활용기였지만 1970년대 대체용기의 보급 이후 그 쓰임새가 크게 축소되었고 옹기장인의 수도 줄어들었다. 국가에서 옹기장인을 무형문화재 기능 보유자로 인정함으로써 옹기 제작기술의 전승은 이루어졌지만 전통적인 옹기 생산문화는 점차 사라지고 있다. 따라서 옹기 생산문화에 대한 연구를 통해 기록으로 남기는 작업이 필요하다. 민속학은 현지조사 및 장인과의 면담조사를 통해 공예품만이 아니라 생산문화를 이해하는 것을 중요하게 여긴다. 그러나 지금까지 민속학은 장인문화와 연관되는 전통공예에 대한 관심이 적었다. 연구자는 민속학이 옹기 생산문화를 이해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해서 연구를 진행하였다.
우선 사회변동에 따른 옹기의 소비 변화를 살펴봄으로써 옹기의 가치가 어떤 식으로 바뀌어왔는지 살펴보았다. 그리고 장인조직과 제작기술이 어떻게 바뀌어왔는지 살펴봄으로써 옹기 생산의 변화에 대해 알아보았다. 마지막으로 옹기는 소비자의 요구를 옹기장인이 선별적으로 수용해서 만든 것이라는 전제하에 기술, 경제, 사회·문화적 요인들이 옹기 생산에 어떠한 영향을 미쳐왔는지 옹기의 종류와 형태 변화를 고찰해 밝혀보고자 했다.
사회변동과 더불어 한국사회의 옹기 생산은 전국적으로 비슷한 길을 걸어갔다. 그런 만큼 이 연구는 진안마을을 통해 한국사회의 전체적인 옹기 생산 변화의 맥락을 살피며 그 가운데 진안마을이 가지는 특수성을 함께 드러내는 방식을 취했다. 그리고 옹기의 수요가 크게 늘어나는 한국전쟁 이후, 대체용기 보급으로 옹기의 수요가 크게 감소하는 1970년대, 옹기장인이 무형문화재로 지정되는 세 시기로 나누어 연구를 진행했다.
전통사회에서 옹기는 다양하게 쓰여 실용성이 컸지만 좋은 용기로 인식되지는 않았다. 이 당시 옹기, 사기, 목기, 유기 가운데 유기가 가장 선호되었다. 일제강점기에 유기공출로 유기가 부족해지게 되어 이 공백을 옹기, 사기, 목기가 메우게 되었다. 덕분에 옹기의 소비가 조금 늘어났다. 그러나 옹기 소비 증가의 결정적인 원인은 한국전쟁이다. 한국전쟁의 피해로 인해서 많은 옹기가 동시에 파손되었기 때문에 옹기의 경제적인 가치가 오르고 소비 역시 갑자기 늘어나게 되었다.
그러나 1970년대 중반 대체용기가 보급되면서 옹기의 수요는 크게 감소되었다. 옹기보다 가볍고, 값싸며 잘 깨지지 않는 플라스틱 용기와 스테인리스와 같은 금속으로 된 용기가 보급 되면서 상대적으로 옹기의 실용적인 가치는 떨어졌다. 대체용기의 보급 이외에도 한국 전반의 사회·문화적인 변화 역시 옹기 사용을 위축시켰다. 옹기의 실용적 가치가 감소한 대신 현대에 와서는 새로운 문화적 가치가 발견되었다. 현재 옹기는 한국의 전통 식기와 건강 식기라는 두 가지 의미를 함께 가지고 있다. 덕분에 과거에 옹기를 실용적인 목적으로 샀던 것과 달리 현대의 소비자는 옹기의 여러 의미를 선택적으로 소비할 수 있게 되었다. 이렇듯 옹기의 새로운 문화적 가치 발견은 옹기 소비 변화의 한 요인이 되고 있다.
옹기 생산조직은 시설 및 물적 자원을 지원하는 전주와 전문기술자인 옹기대정, 보조기술자인 근애꾼으로 나누어진다. 그리고 기술적인 일이 필요 없는 잡다한 일을 하는 잡부도 있다. 그러나 기본적인 옹기 생산조직은 옹기동막의 주인인 전주와 장인인 옹기대정과 근애꾼이다. 한국전쟁 이후 청송 지역 전체의 옹기동막 수가 증가했는데 진안마을이 이 가운데 가장 많은 옹기동막이 위치한 마을이었다. 진안마을에 옹기동막이 밀집된 가장 큰 이유는 근처에 있는 이촌에서 좋은 옹기흙이 났기 때문이다. 차가 없던 시절에 옹기를 만들 수 있는 재료와의 접근성은 지금보다 더 중요했다.
한국전쟁 이전에는 마을공동체를 중심으로 옹기 생산조직이 운영되었다. 전주와 장인은 대짝제라고 해서 마지막에 옹기를 다 구워서 나온 결과물로 품삯을 분배했다. 그러다 보니 전주와 장인 모두 협력해서 좋은 옹기가 생산되도록 노력했다. 그러나 한국전쟁 이후 옹기장인의 이동이 활발해지면서 대짝제는 제 기능을 하기 어려워졌고, 도급제인 양거리로 품삯체제를 변경했다. 이것은 옹기 생산조직의 협력 체계를 무너뜨렸고 결국 전주와 장인의 이원화를 초래했다.
한국전쟁 이후 옹기의 수요 증가는 옹기 생산조직에 활력을 불러일으킨 동시에 문제점도 야기했다. 옹기동막이 늘어나면서 장인은 어디에 가든지 기술만 있으면 먹고 ...
이 논문은 한국전쟁과 산업화를 거치면서 일어난 한국의 사회변동과 더불어 옹기 생산이 어떻게 변화되었는지에 대하여 청송에 있는 진안마을을 대상으로 연구한 것이다. 옹기 생산의 변화를 이해하기 위해 이 연구에서는 생산과 소비의 상관관계를 중요하게 다루었다. 따라서 이 연구에서는 옹기의 생산과 소비의 변화, 소비자의 요구와 옹기장인의 의도가 만나는 절충점이 무엇인지 파악하고자 했다.
전통적인 한국사회에서 옹기는 폭 넓게 쓰이던 생활용기였지만 1970년대 대체용기의 보급 이후 그 쓰임새가 크게 축소되었고 옹기장인의 수도 줄어들었다. 국가에서 옹기장인을 무형문화재 기능 보유자로 인정함으로써 옹기 제작기술의 전승은 이루어졌지만 전통적인 옹기 생산문화는 점차 사라지고 있다. 따라서 옹기 생산문화에 대한 연구를 통해 기록으로 남기는 작업이 필요하다. 민속학은 현지조사 및 장인과의 면담조사를 통해 공예품만이 아니라 생산문화를 이해하는 것을 중요하게 여긴다. 그러나 지금까지 민속학은 장인문화와 연관되는 전통공예에 대한 관심이 적었다. 연구자는 민속학이 옹기 생산문화를 이해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해서 연구를 진행하였다.
우선 사회변동에 따른 옹기의 소비 변화를 살펴봄으로써 옹기의 가치가 어떤 식으로 바뀌어왔는지 살펴보았다. 그리고 장인조직과 제작기술이 어떻게 바뀌어왔는지 살펴봄으로써 옹기 생산의 변화에 대해 알아보았다. 마지막으로 옹기는 소비자의 요구를 옹기장인이 선별적으로 수용해서 만든 것이라는 전제하에 기술, 경제, 사회·문화적 요인들이 옹기 생산에 어떠한 영향을 미쳐왔는지 옹기의 종류와 형태 변화를 고찰해 밝혀보고자 했다.
사회변동과 더불어 한국사회의 옹기 생산은 전국적으로 비슷한 길을 걸어갔다. 그런 만큼 이 연구는 진안마을을 통해 한국사회의 전체적인 옹기 생산 변화의 맥락을 살피며 그 가운데 진안마을이 가지는 특수성을 함께 드러내는 방식을 취했다. 그리고 옹기의 수요가 크게 늘어나는 한국전쟁 이후, 대체용기 보급으로 옹기의 수요가 크게 감소하는 1970년대, 옹기장인이 무형문화재로 지정되는 세 시기로 나누어 연구를 진행했다.
전통사회에서 옹기는 다양하게 쓰여 실용성이 컸지만 좋은 용기로 인식되지는 않았다. 이 당시 옹기, 사기, 목기, 유기 가운데 유기가 가장 선호되었다. 일제강점기에 유기공출로 유기가 부족해지게 되어 이 공백을 옹기, 사기, 목기가 메우게 되었다. 덕분에 옹기의 소비가 조금 늘어났다. 그러나 옹기 소비 증가의 결정적인 원인은 한국전쟁이다. 한국전쟁의 피해로 인해서 많은 옹기가 동시에 파손되었기 때문에 옹기의 경제적인 가치가 오르고 소비 역시 갑자기 늘어나게 되었다.
그러나 1970년대 중반 대체용기가 보급되면서 옹기의 수요는 크게 감소되었다. 옹기보다 가볍고, 값싸며 잘 깨지지 않는 플라스틱 용기와 스테인리스와 같은 금속으로 된 용기가 보급 되면서 상대적으로 옹기의 실용적인 가치는 떨어졌다. 대체용기의 보급 이외에도 한국 전반의 사회·문화적인 변화 역시 옹기 사용을 위축시켰다. 옹기의 실용적 가치가 감소한 대신 현대에 와서는 새로운 문화적 가치가 발견되었다. 현재 옹기는 한국의 전통 식기와 건강 식기라는 두 가지 의미를 함께 가지고 있다. 덕분에 과거에 옹기를 실용적인 목적으로 샀던 것과 달리 현대의 소비자는 옹기의 여러 의미를 선택적으로 소비할 수 있게 되었다. 이렇듯 옹기의 새로운 문화적 가치 발견은 옹기 소비 변화의 한 요인이 되고 있다.
옹기 생산조직은 시설 및 물적 자원을 지원하는 전주와 전문기술자인 옹기대정, 보조기술자인 근애꾼으로 나누어진다. 그리고 기술적인 일이 필요 없는 잡다한 일을 하는 잡부도 있다. 그러나 기본적인 옹기 생산조직은 옹기동막의 주인인 전주와 장인인 옹기대정과 근애꾼이다. 한국전쟁 이후 청송 지역 전체의 옹기동막 수가 증가했는데 진안마을이 이 가운데 가장 많은 옹기동막이 위치한 마을이었다. 진안마을에 옹기동막이 밀집된 가장 큰 이유는 근처에 있는 이촌에서 좋은 옹기흙이 났기 때문이다. 차가 없던 시절에 옹기를 만들 수 있는 재료와의 접근성은 지금보다 더 중요했다.
한국전쟁 이전에는 마을공동체를 중심으로 옹기 생산조직이 운영되었다. 전주와 장인은 대짝제라고 해서 마지막에 옹기를 다 구워서 나온 결과물로 품삯을 분배했다. 그러다 보니 전주와 장인 모두 협력해서 좋은 옹기가 생산되도록 노력했다. 그러나 한국전쟁 이후 옹기장인의 이동이 활발해지면서 대짝제는 제 기능을 하기 어려워졌고, 도급제인 양거리로 품삯체제를 변경했다. 이것은 옹기 생산조직의 협력 체계를 무너뜨렸고 결국 전주와 장인의 이원화를 초래했다.
한국전쟁 이후 옹기의 수요 증가는 옹기 생산조직에 활력을 불러일으킨 동시에 문제점도 야기했다. 옹기동막이 늘어나면서 장인은 어디에 가든지 기술만 있으면 먹고 살 수 있게 되었고, 일반인보다 품삯도 높았다. 그래서 장인들 중에는 열심히 일하기보다는 전주에게 돈을 선불로 받고 뒤늦게 일하거나 돈을 갚지 않고 도망가는 사람들이 많았다. 이렇듯 전주에게는 장인의 신용이 문제가 되었다. 전주와 전주 사이에는 한정된 인적·물적 자원과 판매처를 두고 갈등이 일어났다. 이러한 문제점은 대체용기의 보급과 함께 일어난 옹기의 수요 감소에 대처하기 어렵도록 한 하나의 요인이 되었다.
대체용기의 보급과 함께 옹기 생산조직은 와해되고 더 이상 장인이 되려는 사람이 없어져 장인의 희소화 현상이 일어났다. 국가에서는 옹기장인을 무형문화재 기능 보유자로 인정해 전통 옹기제작 기술을 보전하고자 했다. 민속공예는 다른 분야와 달리 물건을 생산하기 위한 기술뿐 아니라 생산시설까지 갖추고 있어야 하기에 전주이며 옹기대정인 사람이 무형문화재 기능 보유자가 되고 있다. 무형문화재 기능 보유자가 된 장인은 기술을 전수해야 하는데 외부인보다는 가족 중심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그 이유는 외부인의 경우 기술을 배우는 동안 스스로 생계유지를 해결해야 하고, 만약 기술을 전수받더라도 독립하기 위해서는 옹기 생산시설을 스스로 마련해야 하는 문제가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무형문화재 기능 보유자가 가지는 이권 역시 가족 중심으로 기술 전승이 이루어지도록 만들고 있다.
한국전쟁 이후 옹기의 수요가 크게 증가하자 이에 맞추어 옹기 제작기술은 양산체제로 바뀌었다. 그리고 이 시기에는 경제성을 추구하는 제작기술이 발전되었다. 진안마을에는 정경도씨가 울산 외고산 옹기마을에 가서 연료소비를 줄이는 개량가마의 사용, 석유로 창불때기, 망간과 광명단을 넣은 잿물 이용 등의 기술을 배워서 전파했다. 이 당시에는 이러한 기술이 전통적인 제작기술에 위배되는 것이 아니라 경제성이 있는 유용한 기술로 인식되었다. 장인의 무형문화재 지정은 이러한 경제성을 추구한 기술과 분리되기를 강요했다. 그러나 장인은 기본적으로 장인정신뿐만 아니라 경제성을 함께 추구한다. 무형문화재 제도는 이러한 장인의 정체성을 고려해 과거와 완전히 같은 방식으로 옹기를 제작하도록 강요하지는 않는다. 장인정신과 전통성에 위배되지 않는 범위 내에서 장인의 경제성 추구가 가능하도록 기술적인 변화를 허용하고 있다.
옹기의 종류와 형태의 변화는 위에서 언급한 사실들을 집약적으로 반영하고 있다. 전통사회에서 운반, 조리, 저장 기능을 두루 담당하고 있던 옹기는 대체용기의 보급 이후 발효 기능을 가진 단지 위주로 그 명맥을 이어나갔다. 이러한 변화는 사람들의 발효음식에 대한 의존도에 상응하여 옹기 생산의 전승 여부가 결정되도록 생산 체제의 변화를 가져왔다. 그러나 2000년도에 들어서 웰빙과 슬로푸드로서 발효음식에 대한 관심이 높아져 덩달아 옹기의 위상도 상승되었다. 옹기장인은 이를 겨냥해 옹기 물단지와 같은 새로운 옹기를 만들고 있다. 현재도 발효 기능을 가진 단지 중심으로 만들고 있는데 과거와 달리 세 말, 다섯 말, 일곱 말, 열 말 크기의 단지를 중심으로 만들고 있다. 이것은 된장공장이나 고추장공장에서 원하는 크기로 자가생산·자가소비하던 발효음식이 시장경제에 편입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옹기의 형태와 유약, 크기의 변화는 장인의 의도와 소비자와 요구 중 어느 하나가 일방적인 영향을 미친 결과가 아니라 두 가지가 절충되어 옹기가 만들어짐을 보여주고 있다.
이상으로 청송 진안마을을 중심으로 사회변동에 따른 옹기 생산의 변화를 살펴보았다. 지금까지 민속학에서 관심을 많이 가지지 않았던 장인문화에 대해서 연구했다는 점에서 이 연구의 의의를 찾고자 한다. 그러나 지금까지 옹기장인에 대한 연구가 많이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앞으로도 꾸준한 연구가 계속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이 논문은 한국전쟁과 산업화를 거치면서 일어난 한국의 사회변동과 더불어 옹기 생산이 어떻게 변화되었는지에 대하여 청송에 있는 진안마을을 대상으로 연구한 것이다. 옹기 생산의 변화를 이해하기 위해 이 연구에서는 생산과 소비의 상관관계를 중요하게 다루었다. 따라서 이 연구에서는 옹기의 생산과 소비의 변화, 소비자의 요구와 옹기장인의 의도가 만나는 절충점이 무엇인지 파악하고자 했다.
전통적인 한국사회에서 옹기는 폭 넓게 쓰이던 생활용기였지만 1970년대 대체용기의 보급 이후 그 쓰임새가 크게 축소되었고 옹기장인의 수도 줄어들었다. 국가에서 옹기장인을 무형문화재 기능 보유자로 인정함으로써 옹기 제작기술의 전승은 이루어졌지만 전통적인 옹기 생산문화는 점차 사라지고 있다. 따라서 옹기 생산문화에 대한 연구를 통해 기록으로 남기는 작업이 필요하다. 민속학은 현지조사 및 장인과의 면담조사를 통해 공예품만이 아니라 생산문화를 이해하는 것을 중요하게 여긴다. 그러나 지금까지 민속학은 장인문화와 연관되는 전통공예에 대한 관심이 적었다. 연구자는 민속학이 옹기 생산문화를 이해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해서 연구를 진행하였다.
우선 사회변동에 따른 옹기의 소비 변화를 살펴봄으로써 옹기의 가치가 어떤 식으로 바뀌어왔는지 살펴보았다. 그리고 장인조직과 제작기술이 어떻게 바뀌어왔는지 살펴봄으로써 옹기 생산의 변화에 대해 알아보았다. 마지막으로 옹기는 소비자의 요구를 옹기장인이 선별적으로 수용해서 만든 것이라는 전제하에 기술, 경제, 사회·문화적 요인들이 옹기 생산에 어떠한 영향을 미쳐왔는지 옹기의 종류와 형태 변화를 고찰해 밝혀보고자 했다.
사회변동과 더불어 한국사회의 옹기 생산은 전국적으로 비슷한 길을 걸어갔다. 그런 만큼 이 연구는 진안마을을 통해 한국사회의 전체적인 옹기 생산 변화의 맥락을 살피며 그 가운데 진안마을이 가지는 특수성을 함께 드러내는 방식을 취했다. 그리고 옹기의 수요가 크게 늘어나는 한국전쟁 이후, 대체용기 보급으로 옹기의 수요가 크게 감소하는 1970년대, 옹기장인이 무형문화재로 지정되는 세 시기로 나누어 연구를 진행했다.
전통사회에서 옹기는 다양하게 쓰여 실용성이 컸지만 좋은 용기로 인식되지는 않았다. 이 당시 옹기, 사기, 목기, 유기 가운데 유기가 가장 선호되었다. 일제강점기에 유기공출로 유기가 부족해지게 되어 이 공백을 옹기, 사기, 목기가 메우게 되었다. 덕분에 옹기의 소비가 조금 늘어났다. 그러나 옹기 소비 증가의 결정적인 원인은 한국전쟁이다. 한국전쟁의 피해로 인해서 많은 옹기가 동시에 파손되었기 때문에 옹기의 경제적인 가치가 오르고 소비 역시 갑자기 늘어나게 되었다.
그러나 1970년대 중반 대체용기가 보급되면서 옹기의 수요는 크게 감소되었다. 옹기보다 가볍고, 값싸며 잘 깨지지 않는 플라스틱 용기와 스테인리스와 같은 금속으로 된 용기가 보급 되면서 상대적으로 옹기의 실용적인 가치는 떨어졌다. 대체용기의 보급 이외에도 한국 전반의 사회·문화적인 변화 역시 옹기 사용을 위축시켰다. 옹기의 실용적 가치가 감소한 대신 현대에 와서는 새로운 문화적 가치가 발견되었다. 현재 옹기는 한국의 전통 식기와 건강 식기라는 두 가지 의미를 함께 가지고 있다. 덕분에 과거에 옹기를 실용적인 목적으로 샀던 것과 달리 현대의 소비자는 옹기의 여러 의미를 선택적으로 소비할 수 있게 되었다. 이렇듯 옹기의 새로운 문화적 가치 발견은 옹기 소비 변화의 한 요인이 되고 있다.
옹기 생산조직은 시설 및 물적 자원을 지원하는 전주와 전문기술자인 옹기대정, 보조기술자인 근애꾼으로 나누어진다. 그리고 기술적인 일이 필요 없는 잡다한 일을 하는 잡부도 있다. 그러나 기본적인 옹기 생산조직은 옹기동막의 주인인 전주와 장인인 옹기대정과 근애꾼이다. 한국전쟁 이후 청송 지역 전체의 옹기동막 수가 증가했는데 진안마을이 이 가운데 가장 많은 옹기동막이 위치한 마을이었다. 진안마을에 옹기동막이 밀집된 가장 큰 이유는 근처에 있는 이촌에서 좋은 옹기흙이 났기 때문이다. 차가 없던 시절에 옹기를 만들 수 있는 재료와의 접근성은 지금보다 더 중요했다.
한국전쟁 이전에는 마을공동체를 중심으로 옹기 생산조직이 운영되었다. 전주와 장인은 대짝제라고 해서 마지막에 옹기를 다 구워서 나온 결과물로 품삯을 분배했다. 그러다 보니 전주와 장인 모두 협력해서 좋은 옹기가 생산되도록 노력했다. 그러나 한국전쟁 이후 옹기장인의 이동이 활발해지면서 대짝제는 제 기능을 하기 어려워졌고, 도급제인 양거리로 품삯체제를 변경했다. 이것은 옹기 생산조직의 협력 체계를 무너뜨렸고 결국 전주와 장인의 이원화를 초래했다.
한국전쟁 이후 옹기의 수요 증가는 옹기 생산조직에 활력을 불러일으킨 동시에 문제점도 야기했다. 옹기동막이 늘어나면서 장인은 어디에 가든지 기술만 있으면 먹고 살 수 있게 되었고, 일반인보다 품삯도 높았다. 그래서 장인들 중에는 열심히 일하기보다는 전주에게 돈을 선불로 받고 뒤늦게 일하거나 돈을 갚지 않고 도망가는 사람들이 많았다. 이렇듯 전주에게는 장인의 신용이 문제가 되었다. 전주와 전주 사이에는 한정된 인적·물적 자원과 판매처를 두고 갈등이 일어났다. 이러한 문제점은 대체용기의 보급과 함께 일어난 옹기의 수요 감소에 대처하기 어렵도록 한 하나의 요인이 되었다.
대체용기의 보급과 함께 옹기 생산조직은 와해되고 더 이상 장인이 되려는 사람이 없어져 장인의 희소화 현상이 일어났다. 국가에서는 옹기장인을 무형문화재 기능 보유자로 인정해 전통 옹기제작 기술을 보전하고자 했다. 민속공예는 다른 분야와 달리 물건을 생산하기 위한 기술뿐 아니라 생산시설까지 갖추고 있어야 하기에 전주이며 옹기대정인 사람이 무형문화재 기능 보유자가 되고 있다. 무형문화재 기능 보유자가 된 장인은 기술을 전수해야 하는데 외부인보다는 가족 중심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그 이유는 외부인의 경우 기술을 배우는 동안 스스로 생계유지를 해결해야 하고, 만약 기술을 전수받더라도 독립하기 위해서는 옹기 생산시설을 스스로 마련해야 하는 문제가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무형문화재 기능 보유자가 가지는 이권 역시 가족 중심으로 기술 전승이 이루어지도록 만들고 있다.
한국전쟁 이후 옹기의 수요가 크게 증가하자 이에 맞추어 옹기 제작기술은 양산체제로 바뀌었다. 그리고 이 시기에는 경제성을 추구하는 제작기술이 발전되었다. 진안마을에는 정경도씨가 울산 외고산 옹기마을에 가서 연료소비를 줄이는 개량가마의 사용, 석유로 창불때기, 망간과 광명단을 넣은 잿물 이용 등의 기술을 배워서 전파했다. 이 당시에는 이러한 기술이 전통적인 제작기술에 위배되는 것이 아니라 경제성이 있는 유용한 기술로 인식되었다. 장인의 무형문화재 지정은 이러한 경제성을 추구한 기술과 분리되기를 강요했다. 그러나 장인은 기본적으로 장인정신뿐만 아니라 경제성을 함께 추구한다. 무형문화재 제도는 이러한 장인의 정체성을 고려해 과거와 완전히 같은 방식으로 옹기를 제작하도록 강요하지는 않는다. 장인정신과 전통성에 위배되지 않는 범위 내에서 장인의 경제성 추구가 가능하도록 기술적인 변화를 허용하고 있다.
옹기의 종류와 형태의 변화는 위에서 언급한 사실들을 집약적으로 반영하고 있다. 전통사회에서 운반, 조리, 저장 기능을 두루 담당하고 있던 옹기는 대체용기의 보급 이후 발효 기능을 가진 단지 위주로 그 명맥을 이어나갔다. 이러한 변화는 사람들의 발효음식에 대한 의존도에 상응하여 옹기 생산의 전승 여부가 결정되도록 생산 체제의 변화를 가져왔다. 그러나 2000년도에 들어서 웰빙과 슬로푸드로서 발효음식에 대한 관심이 높아져 덩달아 옹기의 위상도 상승되었다. 옹기장인은 이를 겨냥해 옹기 물단지와 같은 새로운 옹기를 만들고 있다. 현재도 발효 기능을 가진 단지 중심으로 만들고 있는데 과거와 달리 세 말, 다섯 말, 일곱 말, 열 말 크기의 단지를 중심으로 만들고 있다. 이것은 된장공장이나 고추장공장에서 원하는 크기로 자가생산·자가소비하던 발효음식이 시장경제에 편입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옹기의 형태와 유약, 크기의 변화는 장인의 의도와 소비자와 요구 중 어느 하나가 일방적인 영향을 미친 결과가 아니라 두 가지가 절충되어 옹기가 만들어짐을 보여주고 있다.
이상으로 청송 진안마을을 중심으로 사회변동에 따른 옹기 생산의 변화를 살펴보았다. 지금까지 민속학에서 관심을 많이 가지지 않았던 장인문화에 대해서 연구했다는 점에서 이 연구의 의의를 찾고자 한다. 그러나 지금까지 옹기장인에 대한 연구가 많이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앞으로도 꾸준한 연구가 계속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This study concerns how pottery production has been changed, going through Korean society. Changing from the Korean War to industrialization, especially centering on Jinan village, in Cheongsong. This study also deals with the correlation between its production and consumption. To understand the cha...
This study concerns how pottery production has been changed, going through Korean society. Changing from the Korean War to industrialization, especially centering on Jinan village, in Cheongsong. This study also deals with the correlation between its production and consumption. To understand the change of pottery production. This study tries to grasp what is the compromise between pottery production, the change of its consumption and the aims of a potter and a consumer's desire.
The conclusions are as follows: First, even though the practical value of pottery has declined in modern society, the addition of its cultural value became an important factor in changing pottery consumption.
Second, the traditional pottery production has been transmitted, centering on the faculty processor of intangible cultural assets, the change of pottery production skills have progressed according to the artisan spirit of potters and economical efficiency. Finally, we find that the pottery has been produced with the compromise between the aims of a potter and the desire of its consumer, considering the type and size of the pottery and the change of enamel.
This study concerns how pottery production has been changed, going through Korean society. Changing from the Korean War to industrialization, especially centering on Jinan village, in Cheongsong. This study also deals with the correlation between its production and consumption. To understand the change of pottery production. This study tries to grasp what is the compromise between pottery production, the change of its consumption and the aims of a potter and a consumer's desire.
The conclusions are as follows: First, even though the practical value of pottery has declined in modern society, the addition of its cultural value became an important factor in changing pottery consumption.
Second, the traditional pottery production has been transmitted, centering on the faculty processor of intangible cultural assets, the change of pottery production skills have progressed according to the artisan spirit of potters and economical efficiency. Finally, we find that the pottery has been produced with the compromise between the aims of a potter and the desire of its consumer, considering the type and size of the pottery and the change of ename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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