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고는 중일전쟁의 쟁점인 루커우차오(盧溝橋)사변과 난징대학살을 중일 양국 역사교과서에서는 어떻게 기술하고 있으며, 양국의 역사인식이 얼마나 다른지 알아보기 위한 것이다. 아울러 중일전쟁 과정에서 일본군이 중국을 침략한 사실과 중국인에게 저지른 전쟁범죄 사실을 얼마나 정확하게 기술하고 있는지, 같은 사건에 대하여 중국 역사교과서에서는 어떠한 역사적 관점으로 서술하고 있는지 살펴보기 위해서다. Ⅱ장 “중일 전쟁의 배경과 발단”의 대단원 기술에서『詳說日本史』는 중국교과서에 비해 시간범주가 너무 넓기 때문에 중일전쟁 이전 정세를 통찰하기...
본고는 중일전쟁의 쟁점인 루커우차오(盧溝橋)사변과 난징대학살을 중일 양국 역사교과서에서는 어떻게 기술하고 있으며, 양국의 역사인식이 얼마나 다른지 알아보기 위한 것이다. 아울러 중일전쟁 과정에서 일본군이 중국을 침략한 사실과 중국인에게 저지른 전쟁범죄 사실을 얼마나 정확하게 기술하고 있는지, 같은 사건에 대하여 중국 역사교과서에서는 어떠한 역사적 관점으로 서술하고 있는지 살펴보기 위해서다. Ⅱ장 “중일 전쟁의 배경과 발단”의 대단원 기술에서『詳說日本史』는 중국교과서에 비해 시간범주가 너무 넓기 때문에 중일전쟁 이전 정세를 통찰하기에는 지나치게 간략하다. 반면『中國近代現代史』는 경제공황의 위기 극복을 위해 일제는 안으로는 군국주의체제를 강화하고 밖으로는 ‘국책기준’을 마련하여 대외침략을 확대하였다고 자세하게 개관하고 있다. 중일전쟁 이전의 정세에 관하여『詳說日本史』는 국민정부의 정치, 경제적 통합이 견고해지자 관동군은 傀儡政權(冀東防共自治委員會)을 수립하여 화북분리공작을 강화하였다고 기술하고 있다.『詳說日本史』는 화북분리공작의 책임을 관동군에게 전가시키고, 일본정부는 부득이 이를 추인하였다는 식으로 기술하고 있다. 그리고 중국의 영토주권을 침탈했다는 점이 드러나지 않게 기술하여 화북분리 공작과 이후 발생한 루커우차오(盧溝橋)사변이 무관한 것처럼 ‘미시적 실증사관’에 입각하여 일본의 침략 사실이 가능한 드러나지 않도록 담담하게 서술하고 있다. 이러한 기술이 이루어진 것은『學習指導要領』을 충실히 따른 결과이다. 이에 대해,『中國近代現代史』에서 ‘華北事變’은 일제의 정치적, 군사적 음모와 계획에 의해 일어난 사건이고, 일제의 화북지배 목적이 ‘제2의 만주국 수립’에 있음을 분명하게 언급하고 있다. 일제의 식민지화가 심화되는 속에서 조국을 구하고 민족의 생존을 도모하는 방식을 둘러싸고, 와야오바오(瓦窯堡)회의부터 국공양당의 차별성, 정통성에 초점을 맞춰 기술하고 있다. 이러한 기술을 통해 『中國近代現代史』는 일본의 화북 분리공작에 대처하는 국민정부의 타협적 태도가 민족 위기를 심화시켰다는 점을 지적하면서 항일투쟁 주체가 중국공산당이었음을 강조하고 있다. 즉 항일전쟁사를 중국공산당의 혁명사라는 관점도 견지하면서 서술하고 있다. 중일 민족 모순을 주요 모순으로 여긴 중국공산당이 국민당과 蔣介石의 가혹한 ‘攘外必先安內’ 정책을 거부하고, 중화민족이 앞으로 나아가야 할 길로 ‘항일민족통일전선’을 형성하는 데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하였음을 일관되게 주장하는 반면, 국민당은 중국공산당 主演의 항일전쟁 역사에서 주연을 빛내기 위한 助演 정도로 묘사하고 있다. 이러한 기술이 이루어진 것은『歷史敎學大綱』에 충실히 따른 결과이다. 루커우차오(盧溝橋)사변에 대해 『詳說日本史』는 상호 책임적인 뉘앙스를 갖고 기술하고 있다. 즉 중국을 일방적으로 침략한 것이 아니라는 관점에서 서술하고 있다. 이에 반해 『中國近代現代史』는 일본군 사병 실종과 아무런 관련이 없는 중국군에게 의도적, 계획적으로 도발해 왔다는 뉘앙스 갖고 기술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사건의 도발책임이 일본군에 있음을 단정적으로 언급하고 있다. 따라서 루커우차오사변에 대해 양국 교과서는 상당히 다른 관점으로 기술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양국 교과서의 상반된 기술 내용을 양국 학계의 통설이라 할 수 있는 일본의『國史大辭典』과 중국의 『百度百科辭典』에서는 어떻게 기술하고 있는지 검토한 결과 그 실상을 파악하기 어려웠다. 결국 양국의 辭典으로도 루커우차오(盧溝橋)사변의 도발책임에 대한 의혹은 여전히 미스테리다. 이 의혹의 진상에 가장 접근한 연구자로는 에구찌 게이이치(江口圭一)가 있다. 도발책임에 관해서 에구찌는 일본군의 공포탄과 나팔 소리를 듣고 중국군이 응사하였거나 중국군 진지 100m이내로 접근해 온 시무라(志村)에 대해 중국군이 위협사격을 한 것이었을 것으로 보았다. 어느 경우든 발포는 용왕묘, 제방 혹은 철교에 있던 第3營 11連(일본의 중대에 해당)에 속한 중국군이 쏜 것이라고 결론 내리고 있다. 그렇지만 중국군의 사격 의도는 고의성이 없고 자위차원에서 우발적으로 이루어진 것이라 보고 있다. 이에 대해, 중국 교과서『中國近代現代史』에서는 ‘일본 제국주의가 전면적인 중국 침략전쟁을 일으킨 것은 절대 우연이 아니다’라고 단정적으로 기술하고 있으며, 중화인민 항일전쟁 기념관의 七七事變 기술에서도 일방적으로 ‘7.7사변’을 일으켰다’고 주장하고 있다. 발포 책임과 관련하여 여전히 양측의 주장은 상반되고 있다. 이러한 양국학계의 사정을 반영하여 양국 교과서에서도 다른 기술을 하고 있다고 본다. 그러나 루커우차오(盧溝橋)사변은 적대관계에 있던 상대방의 국내에서, 그것도 상대국 진지 바로 옆에서, 상황 파악이 어려운 야간에 군사연습을 행하였으므로 오히려 ‘도발’한 것은 일본군이었다고 말해도 좋을 것이다. 전쟁확대와 관련하여『詳說日本史』는 고노에(近衛)내각이 7월 11일 군부의 압력에 굴복하여 전쟁 불확대방침을 변경하고 군대를 증파하였다고 적고 있다. 이에 대해 『中國近代現代史』에서는 7월 11일 일본내각이 긴급회의를 소집하여 침략전쟁을 확대하기로 결정하고 육군 십 수 만인으로 중국을 침략하여 7월 말에 베이핑(北平)과 텐진(天津)을 함락하였다고 적고 있다. 전쟁확대에 대해 『詳說日本史』가 일본 군부가 주도한 것처럼 적고 있는 데 반해 『中國近代現代史』는 일본내각이 주도한 것으로 적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중일전쟁의 전선 확대에 대해 『詳說日本史』에서는 전투가 남쪽으로 확대되었다고만 간단히 언급하고 있다. 이에 대해 『中國近代現代史』에서는 ‘국민정부가 투항하도록 하기 위하여’ 일본군이 8.13사변을 일으켰다고 서술하고, 일제의 침략 확대에 대해 국민정부는 자위 차원에서 응전했다는 시각으로 묘사하고 있다. 이를 종합하여 판단하면, 중일전쟁 발발 책임은 일본측에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즉 7월 7일 밤의 중국군의 발포는 일본군이 중국군 진지 바로 옆에서 군사훈련을 행하였기 때문에 일어난 자위 차원의 우발적인 것이었다. 아무런 피해도 발생하지 않은 우발적 발포 사건을 빌미로 일본군이 宛平城을 공격한 후, 중국측의 양보로 7월 11일 정전협정을 맺었으나, 같은 날 일본 내각에서 ‘군부의 압력에 굴복하여’라는 것을 구실로 대군의 파병을 결정하여 전쟁을 확대하기로 한 것은 일본이 중국을 침략하려는 의도가 있었음을 말해준다. 그런데,『詳說日本史』에서 ‘일중양국군의 충돌사건’이라고 적고 있는 것은 일본의 전쟁책임을 회피하려는 서술이라 여겨진다. 이는 상호책임론에 바탕하여 중국에 일격을 가해 華北을 제압하고자 하는 일본의 목적을 정당화 하기 위한 기술이다. Ⅲ장 “난징대학살”에서 중일 간에 가장 논쟁이 되는 부분이 난징대학살이다. 2008년부터 사용되는 ‘일본사B’ 7종교과서에서는 모두 ‘난징대학살’을 다루고 있다. 이들 7종 역사교과서의 난징대학살 서술내용은 크게 3가지 유형으로 분류할 수 있다. 첫 번째 유형은 本文에서 구체적인 학살 인원 ‘20만’을 언급하고, 각주에서 여러 설을 언급한 경우로, 實敎出版『高校日本史』가 이에 해당한다. 두 번째 유형은 本文에서는 모호한 ‘다수’ 혹은 ‘수만’이라 묘사한 후 각주에서 ‘다른 설’도 있다는 것을 언급한 경우로, 三省堂『日本史B』, 山川出版社『新日本史』(大津透外 著), 實敎出版『日本史B』 등이 이에 해당한다. 세 번째 유형은 本文, 註에서 단순히 ‘다수’라고 묘사한 경우로 淸水出版『日本史B』, 山川出版社『高校日本史』, 山川出版社『詳說日本史』 등이 이에 해당한다. 본고에서 분석한『詳說日本史』에서는 ‘1937년 말에는 국민정부의 수도 난징을 점령하였다’고 本文에서 간단히 언급하고, 註에서 ‘다수의 중국인 일반 주민(부녀자 포함) 및 포로를 살해하였다(南京事件)’고 서술하고 있다. 여기에서는 난징대학살을 아무런 성격이 드러나지 않는 南京事件으로 적고 있으며, 구체적 학살 인원 수도 명시하지 않고 애매모호하게 ‘다수’라는 표현을 쓰고 있다. 이런 모호한 기술과 더불어 ‘살해하였다’ 등의 표현을 써서 가능한 한 가해 성격을 弱化, 稀釋하여 묘사하고 있다. 이 밖에도 『詳說日本史』는 학살기간도 구체적으로 명시하지 않고 있으며, 포로 학살이 국제적 비난을 샀다는 언급도 없다. 이는 가해자인 일본의 야만성과 잔인성이 담긴 끔찍한 장면을 드러내놓고 싶지 않은『詳說日本史』 집필진의 속마음을 보여준다. 청소년들에게 ‘自虐史觀’을 심어 주지 않기 위해서라고 하면서 역사의 진실을 축소, 왜곡, 기만하는 신자유주의사관의 단면을 엿볼 수 있다. 아울러 2005년 일본 외무성이 홈페이지를 통해 밝힌 입장에 가장 부합하는 교과서가『詳說日本史』임을 다시 한번 확인할 수 있다. 이에 대해『中國近代現代史』에서는 학살인원만 구체적으로 기술하고, 副文에서 간접적으로 일본 기자의 기사를 빌려 그 참상을 간접적으로 전하고 있는데, 이는 『中國近代現代史』과목을 배우기 이전에 공통필수로 이수하는 課程標準敎材인 초급중학용 『中國歷史』와 고급중학용 『歷史1』에서 ‘난징대학살’에 대하여 상세하게 기술하고 있기 때문이다. 중국의 교과서는 일본군의 야만성과 잔인성에 초점을 맞춰 기술하고 있는 것은 공통점이다. 학살인원과 관련하여 대체로 일본학계는 십수만에서 20만설의 학살긍정파, 4만인설에서 수천인설의 중간파 · 소수파, 학살 사실 자체를 부인하는 학살부정파 등 크게 세가지 설로 나뉘어 논쟁을 진행하고 있다. 학살긍정파는 극동국제군사법정의 난징대학살 사건에 대한 심판을 긍정하고, 일본군이 명확하게 난징에서 전대미문의 반인도적 범죄를 저질렀다고 여겨, 난징대학살에 대하여 가장 성찰적 자세를 지니고 있다. 학살부정파는 ‘便衣隊說’과 ‘학살 당시 난징인구 20만설’을 내세우면서 시체 매장 기록 등은 날조이고 부풀려진 것이라 주장한다. 학살부정파는 당시 중국군 중에 무기를 내려놓고 민간인 복장으로 갈아입은 ‘펜이뚜이(便衣隊)’가 있었다고 하면서 무기를 내려놓고 민간인으로 위장하였더라도 정규군이므로, 전투의 연장으로 그들을 죽여도 무방하다고 주장하였다. 학살긍정파와 학살부정파의 사이에 중간파와 소수파가 있는데, 이는 학살 인정여부와 학살 규모에 대한 이들의 주장과 관련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중간파와 소수파는 ‘대규모적인 시민살해는 없었다’는 전제 아래 ‘펜이뚜이(便衣隊)’를 ‘처치’하는 것은 국제법을 위반한 것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한편, 피해자 수를 줄여 일본군의 잔인한 폭행을 감추려고 한다는 점에서는 학살부정파와 비슷하다. 그러나 난징대학살 존재 자체를 부정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부정파와는 구별된다. Ⅳ장 “난징대학살 서술에서 추가 보완되어야 할 부분”에서 난징대학살의 원인에 대해서 ‘역사자료’의 형태로나마 제시한 교과서로는 實敎出版『高校日本史』가 유일하다. 實敎出版『高校日本史』에서는 나카시마 게사코(中島今朝吾) 第16師團長日記를 제시하고 있다. 이 자료를 통해 당시 일본군 전쟁지휘부에서는 중국인을 ‘포로로 삼지 않는다는 방침’을 정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학살 명령이 내려진 이유를 당시 전투에 참전했던 일본 병사는 “식량이 부족했기 때문이었다”고 회고하고 있는데 상당히 설득력 있는 견해이다. 이 외에도 일본군이 온갖 잔인한 방법을 동원하여 중국인을 죽인 이유로는 상해전투에 대한 ‘報復’과 일본군의 중국인에 대한 멸시 등이 거론된다. 일본군 수뇌는 공포수단을 채택하여 중국으로 하여금 투항케 하려는 방침을 정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일본군은 중국인으로 하여금 鬪志를 상실하게 하여 屈服하게 하려는 목적으로 대학살을 자행한 것이었다. 난징대학살 기간을 일본의『岩波 日本史辭典』에서는 난징대학살 기간을 ‘2개월’이라고 적고 있고,『中國現代史』에서는 ‘6주간’이라고 기술하여 차이를 보여 주고 있다.『岩波 日本史辭典』에서 난징대학살 기간을 ‘2개월 간’이라고 한 것은 일본군이 난징을 점령한 1937년 12월 13일부터 중지나방면군의 공식적 전투서열이 해체된 1938년 2월 14일까지를 가리킨다. 이 기간은 중국의 주장과 가장 흡사한 주장이고, 극동국제군사법정의 주장을 충실하게 반영한 기술이다. 중지나방면군의 공식적 전투서열이 해체된 1938년 2월 14일까지를 난징대학살 기간으로 본 이 견해가 가장 설득력 있는 것으로 판단된다. 난징대학살의 지리적 범주를 중국의 난징대학살 권위자 슌자웨이(孫宅巍)는 난징시 소속 12개 지구 및 그 인근 주위인 江寧, 句容, 율수, 江浦, 六合 등 5縣을 대상으로 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일본학자 가사하라 토쿠시(笠原十九司)도 南京城區는 南京城과 그 近郊의 6縣을 포함한 全域이라고 하였다. 그는 이 지역이 南京攻略戰 (중국에서는 南京防衛戰)의 전쟁구역이며, 난징 함락 후의 일본군 점령지역이라고 지적하였다. 이 주장에 쓘자웨이(孫宅巍)도 동조하고 있다 난징대학살 사건 당시의 인구 문제와 관련해서도 양국 학계는 대립하고 있다. 즉 일본학계의 학살부정파는 당시 난징 인구를 20만에서 25만으로 보고 있는 반면 중국 학계는 50만에서 60만 정도로 보고 있다. 이에 대한 논쟁은 계속될 것으로 보이지만, 외지난민이나 포로 등이 포함되지 않았다고 주장하는 중국학계의 주장이 더 설득력을 지닌 것으로 보인다. Ⅴ장 “중일전쟁의 호칭 문제”에서는 전쟁 호칭 문제에 대해서 검토하였다. 중국에서는 중일전쟁을 일본의 일방적 침략에 대해 항전했다는 의미에서 항일전쟁이라고 부른다. 중국교과서에서도 ‘抗日戰爭’이라고 적고 있다. 그리고 중일전쟁의 시작은 전쟁의 발단이 되었던 장소와 날짜를 따서 ‘루커우차오사변’ 혹은 ‘7.7사변’이라 하고 있다. 현재 일본교과서에서는 ‘일중전쟁’이라 칭하고 있다. 그러나 전쟁이 시작되었을 당시에 일본정부는 이 전투를 ‘북지사변’, ‘지나사변’이라 칭하였다. 여기서 ‘北支’와 ‘支那’의 차이점은 전쟁범위가 華北에 국한하여 벌인 전쟁은 ‘북지사변’으로, 중국 전체를 상대로 해서 벌인 전쟁은 ‘지나사변’이라 이름 붙인 것이다. 즉 중일전쟁 당시 일본은 중국을 대등한 국가로 인식하지도 않았으며, 태평양 전쟁 발발 이전까지는 ‘일중전쟁’이란 호칭을 사용한 적이 없다. 일본의 교과서는 1941년 간행된 『小學國史』(下)에서는 ‘지나사변’이라는 명칭을 사용하다가 1943년 간행된 『初等科國史』(下)부터는 ‘지나사변’이라는 명칭도 사용하지 않고 ‘대동아전쟁’이라는 범주 속에서 서술하고 있다. 패전 후 1946년에 다시 ‘支那事變’이라는 명칭이 등장하였으며, 1954년부터 1974년까지는 ‘日華事變’으로 호칭하였다가, 1978년부터 ‘日中戰爭’으로 쓰고 있다. 중국의 石子政은 ‘事變’이라는 말은 고도로 일본 침략자의 강도 논리를 포함한 것이고, 중국인에 대한 모욕으로 가득차 있고, 중화민족의 존엄에 훼손을 가하는 낱말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中國近代現代史』교과서에서도 ‘盧溝橋事變’ 또는 ‘7.7사변’이라는 말을 쓰고 있다. 중국에서는 ‘사변’을 일본의 중국에 대한 침략 행위라는 의미로 쓰고 있지만, 石子政은 중국이 ‘사변’이라는 말을 사용하여 일본의 침략 본질을 말살하고, 중국인을 모욕하는 용법을 계속 쓰는 것은 모순이라고 지적하고 있다. 우리나라 교과서에서도 ‘중일전쟁’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고 있다. 그런데 ‘중일전쟁’은 일본이 중국을 일방적으로 침략한 것이 아니라 양국이 대등하게 싸웠다는 의미로 받아들여져, 침략한 나라의 침략행위와 침략당한 나라의 항전 노력이 퇴색될 가능성이 크다. 일본제국주의 시대 일제의 침략에 대해 중국이 항전하였다는 점에서 중국 항일전쟁이라 부르는 것이 온당하다고 생각한다.
본고는 중일전쟁의 쟁점인 루커우차오(盧溝橋)사변과 난징대학살을 중일 양국 역사교과서에서는 어떻게 기술하고 있으며, 양국의 역사인식이 얼마나 다른지 알아보기 위한 것이다. 아울러 중일전쟁 과정에서 일본군이 중국을 침략한 사실과 중국인에게 저지른 전쟁범죄 사실을 얼마나 정확하게 기술하고 있는지, 같은 사건에 대하여 중국 역사교과서에서는 어떠한 역사적 관점으로 서술하고 있는지 살펴보기 위해서다. Ⅱ장 “중일 전쟁의 배경과 발단”의 대단원 기술에서『詳說日本史』는 중국교과서에 비해 시간범주가 너무 넓기 때문에 중일전쟁 이전 정세를 통찰하기에는 지나치게 간략하다. 반면『中國近代現代史』는 경제공황의 위기 극복을 위해 일제는 안으로는 군국주의체제를 강화하고 밖으로는 ‘국책기준’을 마련하여 대외침략을 확대하였다고 자세하게 개관하고 있다. 중일전쟁 이전의 정세에 관하여『詳說日本史』는 국민정부의 정치, 경제적 통합이 견고해지자 관동군은 傀儡政權(冀東防共自治委員會)을 수립하여 화북분리공작을 강화하였다고 기술하고 있다.『詳說日本史』는 화북분리공작의 책임을 관동군에게 전가시키고, 일본정부는 부득이 이를 추인하였다는 식으로 기술하고 있다. 그리고 중국의 영토주권을 침탈했다는 점이 드러나지 않게 기술하여 화북분리 공작과 이후 발생한 루커우차오(盧溝橋)사변이 무관한 것처럼 ‘미시적 실증사관’에 입각하여 일본의 침략 사실이 가능한 드러나지 않도록 담담하게 서술하고 있다. 이러한 기술이 이루어진 것은『學習指導要領』을 충실히 따른 결과이다. 이에 대해,『中國近代現代史』에서 ‘華北事變’은 일제의 정치적, 군사적 음모와 계획에 의해 일어난 사건이고, 일제의 화북지배 목적이 ‘제2의 만주국 수립’에 있음을 분명하게 언급하고 있다. 일제의 식민지화가 심화되는 속에서 조국을 구하고 민족의 생존을 도모하는 방식을 둘러싸고, 와야오바오(瓦窯堡)회의부터 국공양당의 차별성, 정통성에 초점을 맞춰 기술하고 있다. 이러한 기술을 통해 『中國近代現代史』는 일본의 화북 분리공작에 대처하는 국민정부의 타협적 태도가 민족 위기를 심화시켰다는 점을 지적하면서 항일투쟁 주체가 중국공산당이었음을 강조하고 있다. 즉 항일전쟁사를 중국공산당의 혁명사라는 관점도 견지하면서 서술하고 있다. 중일 민족 모순을 주요 모순으로 여긴 중국공산당이 국민당과 蔣介石의 가혹한 ‘攘外必先安內’ 정책을 거부하고, 중화민족이 앞으로 나아가야 할 길로 ‘항일민족통일전선’을 형성하는 데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하였음을 일관되게 주장하는 반면, 국민당은 중국공산당 主演의 항일전쟁 역사에서 주연을 빛내기 위한 助演 정도로 묘사하고 있다. 이러한 기술이 이루어진 것은『歷史敎學大綱』에 충실히 따른 결과이다. 루커우차오(盧溝橋)사변에 대해 『詳說日本史』는 상호 책임적인 뉘앙스를 갖고 기술하고 있다. 즉 중국을 일방적으로 침략한 것이 아니라는 관점에서 서술하고 있다. 이에 반해 『中國近代現代史』는 일본군 사병 실종과 아무런 관련이 없는 중국군에게 의도적, 계획적으로 도발해 왔다는 뉘앙스 갖고 기술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사건의 도발책임이 일본군에 있음을 단정적으로 언급하고 있다. 따라서 루커우차오사변에 대해 양국 교과서는 상당히 다른 관점으로 기술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양국 교과서의 상반된 기술 내용을 양국 학계의 통설이라 할 수 있는 일본의『國史大辭典』과 중국의 『百度百科辭典』에서는 어떻게 기술하고 있는지 검토한 결과 그 실상을 파악하기 어려웠다. 결국 양국의 辭典으로도 루커우차오(盧溝橋)사변의 도발책임에 대한 의혹은 여전히 미스테리다. 이 의혹의 진상에 가장 접근한 연구자로는 에구찌 게이이치(江口圭一)가 있다. 도발책임에 관해서 에구찌는 일본군의 공포탄과 나팔 소리를 듣고 중국군이 응사하였거나 중국군 진지 100m이내로 접근해 온 시무라(志村)에 대해 중국군이 위협사격을 한 것이었을 것으로 보았다. 어느 경우든 발포는 용왕묘, 제방 혹은 철교에 있던 第3營 11連(일본의 중대에 해당)에 속한 중국군이 쏜 것이라고 결론 내리고 있다. 그렇지만 중국군의 사격 의도는 고의성이 없고 자위차원에서 우발적으로 이루어진 것이라 보고 있다. 이에 대해, 중국 교과서『中國近代現代史』에서는 ‘일본 제국주의가 전면적인 중국 침략전쟁을 일으킨 것은 절대 우연이 아니다’라고 단정적으로 기술하고 있으며, 중화인민 항일전쟁 기념관의 七七事變 기술에서도 일방적으로 ‘7.7사변’을 일으켰다’고 주장하고 있다. 발포 책임과 관련하여 여전히 양측의 주장은 상반되고 있다. 이러한 양국학계의 사정을 반영하여 양국 교과서에서도 다른 기술을 하고 있다고 본다. 그러나 루커우차오(盧溝橋)사변은 적대관계에 있던 상대방의 국내에서, 그것도 상대국 진지 바로 옆에서, 상황 파악이 어려운 야간에 군사연습을 행하였으므로 오히려 ‘도발’한 것은 일본군이었다고 말해도 좋을 것이다. 전쟁확대와 관련하여『詳說日本史』는 고노에(近衛)내각이 7월 11일 군부의 압력에 굴복하여 전쟁 불확대방침을 변경하고 군대를 증파하였다고 적고 있다. 이에 대해 『中國近代現代史』에서는 7월 11일 일본내각이 긴급회의를 소집하여 침략전쟁을 확대하기로 결정하고 육군 십 수 만인으로 중국을 침략하여 7월 말에 베이핑(北平)과 텐진(天津)을 함락하였다고 적고 있다. 전쟁확대에 대해 『詳說日本史』가 일본 군부가 주도한 것처럼 적고 있는 데 반해 『中國近代現代史』는 일본내각이 주도한 것으로 적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중일전쟁의 전선 확대에 대해 『詳說日本史』에서는 전투가 남쪽으로 확대되었다고만 간단히 언급하고 있다. 이에 대해 『中國近代現代史』에서는 ‘국민정부가 투항하도록 하기 위하여’ 일본군이 8.13사변을 일으켰다고 서술하고, 일제의 침략 확대에 대해 국민정부는 자위 차원에서 응전했다는 시각으로 묘사하고 있다. 이를 종합하여 판단하면, 중일전쟁 발발 책임은 일본측에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즉 7월 7일 밤의 중국군의 발포는 일본군이 중국군 진지 바로 옆에서 군사훈련을 행하였기 때문에 일어난 자위 차원의 우발적인 것이었다. 아무런 피해도 발생하지 않은 우발적 발포 사건을 빌미로 일본군이 宛平城을 공격한 후, 중국측의 양보로 7월 11일 정전협정을 맺었으나, 같은 날 일본 내각에서 ‘군부의 압력에 굴복하여’라는 것을 구실로 대군의 파병을 결정하여 전쟁을 확대하기로 한 것은 일본이 중국을 침략하려는 의도가 있었음을 말해준다. 그런데,『詳說日本史』에서 ‘일중양국군의 충돌사건’이라고 적고 있는 것은 일본의 전쟁책임을 회피하려는 서술이라 여겨진다. 이는 상호책임론에 바탕하여 중국에 일격을 가해 華北을 제압하고자 하는 일본의 목적을 정당화 하기 위한 기술이다. Ⅲ장 “난징대학살”에서 중일 간에 가장 논쟁이 되는 부분이 난징대학살이다. 2008년부터 사용되는 ‘일본사B’ 7종교과서에서는 모두 ‘난징대학살’을 다루고 있다. 이들 7종 역사교과서의 난징대학살 서술내용은 크게 3가지 유형으로 분류할 수 있다. 첫 번째 유형은 本文에서 구체적인 학살 인원 ‘20만’을 언급하고, 각주에서 여러 설을 언급한 경우로, 實敎出版『高校日本史』가 이에 해당한다. 두 번째 유형은 本文에서는 모호한 ‘다수’ 혹은 ‘수만’이라 묘사한 후 각주에서 ‘다른 설’도 있다는 것을 언급한 경우로, 三省堂『日本史B』, 山川出版社『新日本史』(大津透外 著), 實敎出版『日本史B』 등이 이에 해당한다. 세 번째 유형은 本文, 註에서 단순히 ‘다수’라고 묘사한 경우로 淸水出版『日本史B』, 山川出版社『高校日本史』, 山川出版社『詳說日本史』 등이 이에 해당한다. 본고에서 분석한『詳說日本史』에서는 ‘1937년 말에는 국민정부의 수도 난징을 점령하였다’고 本文에서 간단히 언급하고, 註에서 ‘다수의 중국인 일반 주민(부녀자 포함) 및 포로를 살해하였다(南京事件)’고 서술하고 있다. 여기에서는 난징대학살을 아무런 성격이 드러나지 않는 南京事件으로 적고 있으며, 구체적 학살 인원 수도 명시하지 않고 애매모호하게 ‘다수’라는 표현을 쓰고 있다. 이런 모호한 기술과 더불어 ‘살해하였다’ 등의 표현을 써서 가능한 한 가해 성격을 弱化, 稀釋하여 묘사하고 있다. 이 밖에도 『詳說日本史』는 학살기간도 구체적으로 명시하지 않고 있으며, 포로 학살이 국제적 비난을 샀다는 언급도 없다. 이는 가해자인 일본의 야만성과 잔인성이 담긴 끔찍한 장면을 드러내놓고 싶지 않은『詳說日本史』 집필진의 속마음을 보여준다. 청소년들에게 ‘自虐史觀’을 심어 주지 않기 위해서라고 하면서 역사의 진실을 축소, 왜곡, 기만하는 신자유주의사관의 단면을 엿볼 수 있다. 아울러 2005년 일본 외무성이 홈페이지를 통해 밝힌 입장에 가장 부합하는 교과서가『詳說日本史』임을 다시 한번 확인할 수 있다. 이에 대해『中國近代現代史』에서는 학살인원만 구체적으로 기술하고, 副文에서 간접적으로 일본 기자의 기사를 빌려 그 참상을 간접적으로 전하고 있는데, 이는 『中國近代現代史』과목을 배우기 이전에 공통필수로 이수하는 課程標準敎材인 초급중학용 『中國歷史』와 고급중학용 『歷史1』에서 ‘난징대학살’에 대하여 상세하게 기술하고 있기 때문이다. 중국의 교과서는 일본군의 야만성과 잔인성에 초점을 맞춰 기술하고 있는 것은 공통점이다. 학살인원과 관련하여 대체로 일본학계는 십수만에서 20만설의 학살긍정파, 4만인설에서 수천인설의 중간파 · 소수파, 학살 사실 자체를 부인하는 학살부정파 등 크게 세가지 설로 나뉘어 논쟁을 진행하고 있다. 학살긍정파는 극동국제군사법정의 난징대학살 사건에 대한 심판을 긍정하고, 일본군이 명확하게 난징에서 전대미문의 반인도적 범죄를 저질렀다고 여겨, 난징대학살에 대하여 가장 성찰적 자세를 지니고 있다. 학살부정파는 ‘便衣隊說’과 ‘학살 당시 난징인구 20만설’을 내세우면서 시체 매장 기록 등은 날조이고 부풀려진 것이라 주장한다. 학살부정파는 당시 중국군 중에 무기를 내려놓고 민간인 복장으로 갈아입은 ‘펜이뚜이(便衣隊)’가 있었다고 하면서 무기를 내려놓고 민간인으로 위장하였더라도 정규군이므로, 전투의 연장으로 그들을 죽여도 무방하다고 주장하였다. 학살긍정파와 학살부정파의 사이에 중간파와 소수파가 있는데, 이는 학살 인정여부와 학살 규모에 대한 이들의 주장과 관련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중간파와 소수파는 ‘대규모적인 시민살해는 없었다’는 전제 아래 ‘펜이뚜이(便衣隊)’를 ‘처치’하는 것은 국제법을 위반한 것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한편, 피해자 수를 줄여 일본군의 잔인한 폭행을 감추려고 한다는 점에서는 학살부정파와 비슷하다. 그러나 난징대학살 존재 자체를 부정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부정파와는 구별된다. Ⅳ장 “난징대학살 서술에서 추가 보완되어야 할 부분”에서 난징대학살의 원인에 대해서 ‘역사자료’의 형태로나마 제시한 교과서로는 實敎出版『高校日本史』가 유일하다. 實敎出版『高校日本史』에서는 나카시마 게사코(中島今朝吾) 第16師團長日記를 제시하고 있다. 이 자료를 통해 당시 일본군 전쟁지휘부에서는 중국인을 ‘포로로 삼지 않는다는 방침’을 정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학살 명령이 내려진 이유를 당시 전투에 참전했던 일본 병사는 “식량이 부족했기 때문이었다”고 회고하고 있는데 상당히 설득력 있는 견해이다. 이 외에도 일본군이 온갖 잔인한 방법을 동원하여 중국인을 죽인 이유로는 상해전투에 대한 ‘報復’과 일본군의 중국인에 대한 멸시 등이 거론된다. 일본군 수뇌는 공포수단을 채택하여 중국으로 하여금 투항케 하려는 방침을 정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일본군은 중국인으로 하여금 鬪志를 상실하게 하여 屈服하게 하려는 목적으로 대학살을 자행한 것이었다. 난징대학살 기간을 일본의『岩波 日本史辭典』에서는 난징대학살 기간을 ‘2개월’이라고 적고 있고,『中國現代史』에서는 ‘6주간’이라고 기술하여 차이를 보여 주고 있다.『岩波 日本史辭典』에서 난징대학살 기간을 ‘2개월 간’이라고 한 것은 일본군이 난징을 점령한 1937년 12월 13일부터 중지나방면군의 공식적 전투서열이 해체된 1938년 2월 14일까지를 가리킨다. 이 기간은 중국의 주장과 가장 흡사한 주장이고, 극동국제군사법정의 주장을 충실하게 반영한 기술이다. 중지나방면군의 공식적 전투서열이 해체된 1938년 2월 14일까지를 난징대학살 기간으로 본 이 견해가 가장 설득력 있는 것으로 판단된다. 난징대학살의 지리적 범주를 중국의 난징대학살 권위자 슌자웨이(孫宅巍)는 난징시 소속 12개 지구 및 그 인근 주위인 江寧, 句容, 율수, 江浦, 六合 등 5縣을 대상으로 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일본학자 가사하라 토쿠시(笠原十九司)도 南京城區는 南京城과 그 近郊의 6縣을 포함한 全域이라고 하였다. 그는 이 지역이 南京攻略戰 (중국에서는 南京防衛戰)의 전쟁구역이며, 난징 함락 후의 일본군 점령지역이라고 지적하였다. 이 주장에 쓘자웨이(孫宅巍)도 동조하고 있다 난징대학살 사건 당시의 인구 문제와 관련해서도 양국 학계는 대립하고 있다. 즉 일본학계의 학살부정파는 당시 난징 인구를 20만에서 25만으로 보고 있는 반면 중국 학계는 50만에서 60만 정도로 보고 있다. 이에 대한 논쟁은 계속될 것으로 보이지만, 외지난민이나 포로 등이 포함되지 않았다고 주장하는 중국학계의 주장이 더 설득력을 지닌 것으로 보인다. Ⅴ장 “중일전쟁의 호칭 문제”에서는 전쟁 호칭 문제에 대해서 검토하였다. 중국에서는 중일전쟁을 일본의 일방적 침략에 대해 항전했다는 의미에서 항일전쟁이라고 부른다. 중국교과서에서도 ‘抗日戰爭’이라고 적고 있다. 그리고 중일전쟁의 시작은 전쟁의 발단이 되었던 장소와 날짜를 따서 ‘루커우차오사변’ 혹은 ‘7.7사변’이라 하고 있다. 현재 일본교과서에서는 ‘일중전쟁’이라 칭하고 있다. 그러나 전쟁이 시작되었을 당시에 일본정부는 이 전투를 ‘북지사변’, ‘지나사변’이라 칭하였다. 여기서 ‘北支’와 ‘支那’의 차이점은 전쟁범위가 華北에 국한하여 벌인 전쟁은 ‘북지사변’으로, 중국 전체를 상대로 해서 벌인 전쟁은 ‘지나사변’이라 이름 붙인 것이다. 즉 중일전쟁 당시 일본은 중국을 대등한 국가로 인식하지도 않았으며, 태평양 전쟁 발발 이전까지는 ‘일중전쟁’이란 호칭을 사용한 적이 없다. 일본의 교과서는 1941년 간행된 『小學國史』(下)에서는 ‘지나사변’이라는 명칭을 사용하다가 1943년 간행된 『初等科國史』(下)부터는 ‘지나사변’이라는 명칭도 사용하지 않고 ‘대동아전쟁’이라는 범주 속에서 서술하고 있다. 패전 후 1946년에 다시 ‘支那事變’이라는 명칭이 등장하였으며, 1954년부터 1974년까지는 ‘日華事變’으로 호칭하였다가, 1978년부터 ‘日中戰爭’으로 쓰고 있다. 중국의 石子政은 ‘事變’이라는 말은 고도로 일본 침략자의 강도 논리를 포함한 것이고, 중국인에 대한 모욕으로 가득차 있고, 중화민족의 존엄에 훼손을 가하는 낱말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中國近代現代史』교과서에서도 ‘盧溝橋事變’ 또는 ‘7.7사변’이라는 말을 쓰고 있다. 중국에서는 ‘사변’을 일본의 중국에 대한 침략 행위라는 의미로 쓰고 있지만, 石子政은 중국이 ‘사변’이라는 말을 사용하여 일본의 침략 본질을 말살하고, 중국인을 모욕하는 용법을 계속 쓰는 것은 모순이라고 지적하고 있다. 우리나라 교과서에서도 ‘중일전쟁’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고 있다. 그런데 ‘중일전쟁’은 일본이 중국을 일방적으로 침략한 것이 아니라 양국이 대등하게 싸웠다는 의미로 받아들여져, 침략한 나라의 침략행위와 침략당한 나라의 항전 노력이 퇴색될 가능성이 크다. 일본제국주의 시대 일제의 침략에 대해 중국이 항전하였다는 점에서 중국 항일전쟁이라 부르는 것이 온당하다고 생각한다.
This paper is to see how correctly both countries "China and Japan" describe a Lugouqiao Incident and a Nanjing Massacre, an issue of the China-Japan war in their historical textbook and how many different view they(China and Japan) have in their historical recognition of the incidents. Combined wit...
This paper is to see how correctly both countries "China and Japan" describe a Lugouqiao Incident and a Nanjing Massacre, an issue of the China-Japan war in their historical textbook and how many different view they(China and Japan) have in their historical recognition of the incidents. Combined with this, during the China-Japan War, the fact that Japanese army invades China and the war crime fact which japanese army spoils the China how accurately is describing. This paper is to see that Chinese historical textbook is describing what kind of historical viewpoint about same the event. So far, in connection with China-Japan(the second Sino-Japanese)War I scrutinized the issue descriptions of the textbook. About the situation before China and Japan War,『A detailed explanation history of japan(詳說日本史)』is writing the contents vaguely and briefly. On the other hand『A Modern and Contemporary History of China(中國近代現代史)』described in details.『A detailed explanation history of japan』 is describing that the responsibility of Huabei(華北) Separate Operation is ascribed to the Kwandong(關東)Army and the Japanese government is said to have ratified it inevitably. Being based on 'microscopic positive historical view', the fact that the sovereignty of China is plundered is written so stealthily that Huabei Separate Operation and Lugouqiao(盧溝橋)Incident happened successively seem to be irrelevant and the Japanese invasion is described so calmly not to be revealed outwardly. On the contrary, in the『A Modern and Contemporary History of China』, Huabei Incident is described as an incident that Japan has evoked as a conspiracy for realization of Huabei Separate Operation. In the process of Huabei Separate Operation, Chinese communist is depicted to have constructed an Anti-Japanese National Unified Front and led actively the Anti-Japanese Save-The-Nation Movement. On the other hand, National Government is depicted to be passive assisting the justification of Anti-Japanese National Salvation Fight of the Communist party that it is regarded as a revolutionary war history of Communist Party. This is the description which follows faithfully the guidance of 『A History Teaching Outline(歷史敎學大綱)』. 『A detailed explanation history of Japan』is writting with the nuance that both China and Japan have responsibility about Lugouqiao Incident. On the other hand, 『A Modern and Contemporary History of China』is depicting firmly that Japanese troops intentionally provoked Lugouqiao Incident and the real responsibility of the incident is in Japan. Consequently both countries are describing about 'Lugouqiao Incident' in a considerably different point of view. Related with a warfare magnification,『A detailed explanation history of japan』is depicting separately the army authorities from the Japanese cabinet. But at that time the Japanese government is subordinated in the army authorities that the separate description itself is contradictory. On the other hand, 『A Modern and Contemporary History of China』is writing that 'Japanese cabinet expanded'. 『A detailed explanation history of japan』is depicting not to reveal the cause and purpose of the 'the second Shanghai(上海) Incident' whose battle line is magnified from Huabei to Huazhong(華中). On the other hand, 『A Modern and Contemporary History of China』is depicting clearly that the second Shanghai Incident's goal is to force the National Government to surrender, the japanese army attacked Shanghai in force on Aug 13. With this, we can confirm both nations' descriptions show a striking contrast to each other. The object of the most sensitive argument and tension between China and Japan is Nanjing Massacre. 『A detailed explanation history of japan』, which was selected as the main textbook in this study, does not mention the period of the massacre and does not show "illustrations" or "historical materials" related to it. The book just mentions in one of its notes that 'multiple' ordinary people (including women and girls) as well as captives were murdered. The exact number of the murdered is not stated but a vague word, "majority" is used. There are several different theories about the number of the murdered. 『The Explanation of Tips for Guidance on Learning』(學習指導要領解說), which is the main guidance on writing textbooks, says that books should be written based on highly objective materials, which are not biased toward one of different viewpoints or opposing positions. Making this statement as an excuse, the degree of massacre is lowered by simply mentioning "majority". This is similar to the attitude of the Japanese government in 2005, which said that it was not able to reveal the accurate number of the murdered in Nanjing Massacre because there were several theories about the number. In this regard, it was confirmed once again that『A detailed explanation History of Japan』was the best textbook on 'Japanese History B' for Japanese high schools where the intentions of the Japanese government were best applied. In addition, 『The Explanation of Tips for Guidance on Learning』 says that other viewpoints are introduced by using diverse materials. As a result of researching the main viewpoint and opinions from the arguments about Nanjing Massacre, which was the best example of the statement above, 'the positive' faction was reflective towards the materials about the massacre based on quest for truths based on facts while 'the negative', 'minor', and 'middle' factions interpreted materials about Nanjing Massacre arbitrarily with an intention of denying and hiding the details of the massacre as much as possible. In this regard, The text's description quantity about the massacre decreased in 『A Modern and Contemporary History of China』 compared to "Chinese History" and "History 1" published by People's Education Press for middle schools and high schools respectively in accordance with the History Curriculum Standards(歷史課程標準). However, the basic viewpoint in writing was maintained. In China, a theory that "300,000" people were killed is recognized as a fact while the exact number has been argued in the Japanese academy. In China, the textbooks on Chinese History emphasize the cruelty of Nanjing Massacre from middle schools. On higher grades, the massacre accounts for textbooks on Chinese History less. In addition, the savageness and cruelty of the Japanese army are emphasized in all of the Chinese textbooks. As a result of reviewing the textbooks of China and Japan on China-Japan War, it turned out that those of both countries were written based on 『The Instructions on Learning Guidance』 and 『A History Teaching Outline』, which were the basic guidance of writing. The difference was that Japanese textbooks had used the vague statements of 『The Instructions on Learning Guidance』 as bases for justification based on the controversial issues of the materials or different opinions in the academic world. 『The Instructions on Learning Guidance』itself shall be revised so that Nanjing Massacre can be correctly described. If it is difficult to do so, the details of the judgment at the International Military Tribunal for the Far East, which is commonly called the Tokyo Trial, shall be fully applied to it. Besides, I hope that the causes and geographical range of the massacre, the population of Nanjing right before the massacre, and the issue of calling the second Sino-Japanese War will help you understand the war. Finally, I expect the results of comparing and analyzing the issues revealed while describing the second Sino-Japanese War to be applied fully to future textbooks about『Understanding of World History』or『History of East Asia』.
This paper is to see how correctly both countries "China and Japan" describe a Lugouqiao Incident and a Nanjing Massacre, an issue of the China-Japan war in their historical textbook and how many different view they(China and Japan) have in their historical recognition of the incidents. Combined with this, during the China-Japan War, the fact that Japanese army invades China and the war crime fact which japanese army spoils the China how accurately is describing. This paper is to see that Chinese historical textbook is describing what kind of historical viewpoint about same the event. So far, in connection with China-Japan(the second Sino-Japanese)War I scrutinized the issue descriptions of the textbook. About the situation before China and Japan War,『A detailed explanation history of japan(詳說日本史)』is writing the contents vaguely and briefly. On the other hand『A Modern and Contemporary History of China(中國近代現代史)』described in details.『A detailed explanation history of japan』 is describing that the responsibility of Huabei(華北) Separate Operation is ascribed to the Kwandong(關東)Army and the Japanese government is said to have ratified it inevitably. Being based on 'microscopic positive historical view', the fact that the sovereignty of China is plundered is written so stealthily that Huabei Separate Operation and Lugouqiao(盧溝橋)Incident happened successively seem to be irrelevant and the Japanese invasion is described so calmly not to be revealed outwardly. On the contrary, in the『A Modern and Contemporary History of China』, Huabei Incident is described as an incident that Japan has evoked as a conspiracy for realization of Huabei Separate Operation. In the process of Huabei Separate Operation, Chinese communist is depicted to have constructed an Anti-Japanese National Unified Front and led actively the Anti-Japanese Save-The-Nation Movement. On the other hand, National Government is depicted to be passive assisting the justification of Anti-Japanese National Salvation Fight of the Communist party that it is regarded as a revolutionary war history of Communist Party. This is the description which follows faithfully the guidance of 『A History Teaching Outline(歷史敎學大綱)』. 『A detailed explanation history of Japan』is writting with the nuance that both China and Japan have responsibility about Lugouqiao Incident. On the other hand, 『A Modern and Contemporary History of China』is depicting firmly that Japanese troops intentionally provoked Lugouqiao Incident and the real responsibility of the incident is in Japan. Consequently both countries are describing about 'Lugouqiao Incident' in a considerably different point of view. Related with a warfare magnification,『A detailed explanation history of japan』is depicting separately the army authorities from the Japanese cabinet. But at that time the Japanese government is subordinated in the army authorities that the separate description itself is contradictory. On the other hand, 『A Modern and Contemporary History of China』is writing that 'Japanese cabinet expanded'. 『A detailed explanation history of japan』is depicting not to reveal the cause and purpose of the 'the second Shanghai(上海) Incident' whose battle line is magnified from Huabei to Huazhong(華中). On the other hand, 『A Modern and Contemporary History of China』is depicting clearly that the second Shanghai Incident's goal is to force the National Government to surrender, the japanese army attacked Shanghai in force on Aug 13. With this, we can confirm both nations' descriptions show a striking contrast to each other. The object of the most sensitive argument and tension between China and Japan is Nanjing Massacre. 『A detailed explanation history of japan』, which was selected as the main textbook in this study, does not mention the period of the massacre and does not show "illustrations" or "historical materials" related to it. The book just mentions in one of its notes that 'multiple' ordinary people (including women and girls) as well as captives were murdered. The exact number of the murdered is not stated but a vague word, "majority" is used. There are several different theories about the number of the murdered. 『The Explanation of Tips for Guidance on Learning』(學習指導要領解說), which is the main guidance on writing textbooks, says that books should be written based on highly objective materials, which are not biased toward one of different viewpoints or opposing positions. Making this statement as an excuse, the degree of massacre is lowered by simply mentioning "majority". This is similar to the attitude of the Japanese government in 2005, which said that it was not able to reveal the accurate number of the murdered in Nanjing Massacre because there were several theories about the number. In this regard, it was confirmed once again that『A detailed explanation History of Japan』was the best textbook on 'Japanese History B' for Japanese high schools where the intentions of the Japanese government were best applied. In addition, 『The Explanation of Tips for Guidance on Learning』 says that other viewpoints are introduced by using diverse materials. As a result of researching the main viewpoint and opinions from the arguments about Nanjing Massacre, which was the best example of the statement above, 'the positive' faction was reflective towards the materials about the massacre based on quest for truths based on facts while 'the negative', 'minor', and 'middle' factions interpreted materials about Nanjing Massacre arbitrarily with an intention of denying and hiding the details of the massacre as much as possible. In this regard, The text's description quantity about the massacre decreased in 『A Modern and Contemporary History of China』 compared to "Chinese History" and "History 1" published by People's Education Press for middle schools and high schools respectively in accordance with the History Curriculum Standards(歷史課程標準). However, the basic viewpoint in writing was maintained. In China, a theory that "300,000" people were killed is recognized as a fact while the exact number has been argued in the Japanese academy. In China, the textbooks on Chinese History emphasize the cruelty of Nanjing Massacre from middle schools. On higher grades, the massacre accounts for textbooks on Chinese History less. In addition, the savageness and cruelty of the Japanese army are emphasized in all of the Chinese textbooks. As a result of reviewing the textbooks of China and Japan on China-Japan War, it turned out that those of both countries were written based on 『The Instructions on Learning Guidance』 and 『A History Teaching Outline』, which were the basic guidance of writing. The difference was that Japanese textbooks had used the vague statements of 『The Instructions on Learning Guidance』 as bases for justification based on the controversial issues of the materials or different opinions in the academic world. 『The Instructions on Learning Guidance』itself shall be revised so that Nanjing Massacre can be correctly described. If it is difficult to do so, the details of the judgment at the International Military Tribunal for the Far East, which is commonly called the Tokyo Trial, shall be fully applied to it. Besides, I hope that the causes and geographical range of the massacre, the population of Nanjing right before the massacre, and the issue of calling the second Sino-Japanese War will help you understand the war. Finally, I expect the results of comparing and analyzing the issues revealed while describing the second Sino-Japanese War to be applied fully to future textbooks about『Understanding of World History』or『History of East Asia』.
주제어
#중국 일본 중일전쟁 역사교과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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