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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약 조선시대를 성리학의 시대라고 규정한다. 그러나 조선의 사상가들이 모두 성리학을 했던 것은 아니다. 성리학은 리와 기로써 인간의 마음과 사회를 설명하는 이론이다. 서경덕은 기로써 자연을 설명하는 자연학자이다. 따라서 그를 단순히 성리학자로 규정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 이 논문은 서경덕의 사상을 분석하여 그가 자연학자라는 것을 밝힌다. 그리고 그의 자연 설명 수준을 현대 자연 과학과 비교한다. 서경덕의 자연학(자연 설명)이 가진 한계를 밝히는 것과 동시에 조선 자연학이 가진 한계를 밝힌다. 서경덕은 기라는 개념으로 자연을 설명한다. 여기서 말하는 기는 공기(기체)이다. 이 세상은 기로 가득 차 있다. 이 기가 모여서 사물을 만든다. 이 기가 흩어지면 사물은 사라진다. 본연의 기로 돌아간다. 기 자체는 사라지지 않는다. 다만 모이고 흩어지는 과정을 반복할 뿐이다. 기가 균일하게 퍼져 있는 상태를 태허라고 한다. 기가 모여 형태를 이룬 것을 객형이라 한다. 이 자연 설명 모델은 북송시대 철학자 ...

요약 조선시대를 성리학의 시대라고 규정한다. 그러나 조선의 사상가들이 모두 성리학을 했던 것은 아니다. 성리학은 리와 기로써 인간의 마음과 사회를 설명하는 이론이다. 서경덕은 기로써 자연을 설명하는 자연학자이다. 따라서 그를 단순히 성리학자로 규정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 이 논문은 서경덕의 사상을 분석하여 그가 자연학자라는 것을 밝힌다. 그리고 그의 자연 설명 수준을 현대 자연 과학과 비교한다. 서경덕의 자연학(자연 설명)이 가진 한계를 밝히는 것과 동시에 조선 자연학이 가진 한계를 밝힌다. 서경덕은 기라는 개념으로 자연을 설명한다. 여기서 말하는 기는 공기(기체)이다. 이 세상은 기로 가득 차 있다. 이 기가 모여서 사물을 만든다. 이 기가 흩어지면 사물은 사라진다. 본연의 기로 돌아간다. 기 자체는 사라지지 않는다. 다만 모이고 흩어지는 과정을 반복할 뿐이다. 기가 균일하게 퍼져 있는 상태를 태허라고 한다. 기가 모여 형태를 이룬 것을 객형이라 한다. 이 자연 설명 모델은 북송시대 철학자 장재가 이미 제시했다. 서경덕은 그의 사상을 거의 그대로 받아들인다. 그러나 장재의 우주 설명 모델이 가지고 있었던 문제를 지적한다. 그리고 나름대로 독창적인 해결법을 제시한다. 바로 장재와 소옹의 학설: 선천-후천 학설을 종합하는 것이다. 장재의 자연 설명 모델이 가진 문제는 다음과 같다. 태허는 크게 텅 비어 있다는 뜻이다. 오로지 순수한 기로만 가득 차 있다. 태허의 기는 완전한 평형상태(equilibrium) 이루고 있다. 즉 태허 상태의 기는 재료이며, 무규정자(apeiron)이다. 기의 태허 상태가 지속된다면 현상과 사물은 나오지 못한다. 이것은 반드시 움직여야 한다. 무엇이 이 평형을 깨는가? 장재는 기 안에 이미 운동이 내장되어 있기 때문에 그것이 깨진다고 말한다. 그러나 (기 안에 운동이 내장되어 있다면) 그것은 태허와 모순된다. 태허 상태가 존재할 수 없는 것이다. 또한 기는 무규정자이다. 기에 운동이라는 규정이 들어가는 것은 모순이다. 서경덕은 이 모델에 시간 개념을 넣는다. 즉 기는 완전한 태허 상태가 있다가 어느 순간 평형이 깨지고 태허-객형(모였다 흩어지는 과정)을 순환한다. 평형이 깨어지기 전 상태를 선천이라고 한다. 평행이 깨지고 난 뒤의 현상 세계를 후천이라고 한다. 그러나 여전히 문제는 남아 있다. 이 평행을 깨는 것은 무엇인가? 서경덕은 그 힘을 ‘리’라고 한다. 여기서의 리는 성리학에서 말하는 리의 개념과 다르다. 성리학의 리는 (인간의 본성, 혹은 인간의 마음에 적용되는) 원리, 법칙을 말한다. 서경덕의 리는 힘의 개념이다. 정지 상태를 격발시켜 움직이게 만드는 원동력이다. 일단 기가 한번 움직이면 그 스스로가 가진 성질에 의해 태허와 객형 사이를 순환한다. 현상과 사물이 나타난다. 서경덕은 리를 거의 말하지 않는다. (그의 이론에서) 리는 선천에서 후천으로 넘어가는 단계에서 격발시키는 역할이 끝나면 사라진다. 서경덕은 오로지 기를 말한다. 그래서 기철학자라고 말한다. 서경덕은 장재의 자연 설명 모델이 가진 문제를 풀었을까? 아니다. 태허의 기를 격발 시키는 힘은 도대체 어디에서 왔는가? 태허는 오로지 기만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처음부터 리가 태허에 속해 있었다면 태허의 규정과 모순된다. 리가 태허 바깥에 있었는가? 그렇다면 어디에 있었을까? 어디서, 왜 나타나 태허의 기를 격발시키고 다시 어디론가 사라지는 것일까? 이것은 대단히 중요한 문제다. 서경덕은 해답을 제시해야 했다. 그러나 ‘기자이(機自爾; 틀이 본래 그러한 것)’이라 말한다. 기를 현대의 원자, 혹은 분자로 바꾸면 그럴듯한 이론으로 보인다. 모든 사물들은 원자, 혹은 분자로 이루어져 있다. 단지 결합 방식이 다를 뿐이다. 이 결합이 풀리면 사물은 그 형태를 잃는다. 그러나 원자나 분자 그 자체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동양의 기철학도 비슷한 발상이다. 기 철학자들이 기가 태허와 객형을 순환하는 과정이나 운동을 연구했다면 물리학이 나왔을 것이다. 기를 재료라는 측면에서 연구했다면 화학이 나왔을 것이다. 장재 그리고 서경덕, 그 이후의 기철학자들은 운동과 변화를 구분하지 못했다. 그들은 재료인 기에 운동과 힘, 자연법칙 개념을 모두 포함시킨다. 즉 기는 모든 사물을 이루는 재료이면서 그 안에 운동과 운동을 일으키는 힘이 들어 있다. 따라서 기는 스스로 움직여 사물을 이룬다. 법칙도 내장되어 있기 때문에 사물이 잘못 만들어지는 경우도 없다. 이것은 신화적인 발상이다. 현실에서 스스로 움직여서 사물을 만드는 재료는 없다. 현대의 자연과학은 재료와 운동과 힘과 법칙을 엄밀히 구분한다. 서경덕은 그러지 못했다. 장재의 기 개념이 가지고 있던 문제점을 발견했지만 그 또한 장재와 같은 절차를 밟는다. 기는 신비한 ‘무엇’이 된다. 이후 기철학자들은 서경덕의 수준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그들은 단순히 자연과 인간의 마음을 태허-객형의 도식으로 설명할 뿐이다. 서경덕이 접근했던 운동의 문제는 더 이상 제기되지 않는다. 조선의 자연학은 서경덕 때 최고였고, 그 이후 서경덕 수준에 머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