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지(三國志)』「위서(魏書)」와 『후한서(後漢書)』「동이열전」의 기록에 의하면 우리 선조들은 이미 오래전부터 양잠과 길쌈을 하였고 제사와 제직기술이 뛰어나 실은 가늘고 직물의 폭은 넓게 직물을 짰던 것으로 나타난다. 『한원(翰苑)』의「번이부」 내용에 의하면 우리나라 고대국가들 중의 하나인 고구려에서는 면직물을 자체 생산한 것으로 기술되어 있다. 『일본서기』 9권의 내용에 의하면 일본은 백제 근초고왕(近肖古王) 대에 백제의 뛰어난 양잠법과 직조법을 전수받았으며 29권의 내용에서는 신라가 일본으로 보낸 교역품목 가운데 견직물이 포함되어 있었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중국과 일본의 고문서에서 이러한 내용이 나타나는 것으로 보아 우리 조상들은 이미 고대부족국가시대에 직물을 생산하였으며 그 직조기술 또한 뛰어났던 것으로 짐작된다. 우리나라 옛 문헌에서도 선조들의 제사․제직기술에 관련된 기록을 찾아볼 수 있다.『삼국사기(三國史記)』「신라본기」에 의하면 박혁거세 대부터 양잠을 권장하였다고 서술되어 있다. 그리고 신라는 당나라에서 생산하였던 30승(升)의 삼베보다 더 섬세하게 제직한 40승(升)의 삼베를 조공물품으로 당나라에 보내기도 하였다. 그 뿐 아니라 당나라에 헌상하는 중요 물품 중에 곱게 짠 30승(升)의 모시나 40승(升)의 면직물 등이 포함되어 있었다는 기록들도 나타난다. 「고구려본기」에 의하면 직물에 관련된 내용이 다소 상징적 표현으로 기술되어 있다. 부여를 벗어나고 있던 주몽은 삼베 옷을 입은 자, 면 옷을 입은 자, 마름 옷(水藻衣)을 입은 자 세 명을 우연히 만났으며 그들의 협력으로 고구려를 세울 수 있었던 것으로 나타난다. 세 명이 착용하고 있는 의복의 소재가 각기 다른 신분계층을 상징한다고 한다면 주몽은 고구려 지역 사람들의 지지를 받아 왕이 되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그리고 주몽의 아들 유리왕이 백성들에게 직물을 짜는 경쟁을 시키면서까지 길쌈을 장려했던 것으로 보아 고구려에서는 백성들을 다스리는 데 직조가 중요한 역할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 「백제본기」에 의하면 고이왕 52년(285)에 직공을 일본으로 보내어 직조기술을 가르쳐 주었던 기록이 있으며 「잡지」편에 신라는 일찍부터 견직물을 전문적으로 제직하는 관영공장이 있었고 흥덕왕 9년(834)에 신분에 따라 의복 소재로 직물을 사용하는 규제가 있었던 것으로 나타난다. 견직물의 품질은 다르지만 평민이 입는 겉감으로 면주를 사용할 수 있다는 내용이 있는 것으로 보아 삼국시대부터 우리 조상들은 견직물을 제직하였으며 견직물을 피복소재로 사용하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또한 4두품에서 평민에 이르기까지는 모직 보료, 모포, 호피, 중국 담요를 사용하지 못한다고 규정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신라 지배층은 견직물과 더불어 모직물을 사용하고 있었던 것으로 짐작된다. 『고려사』에 나타나는 고려 초기 혜종 대의 기록을 보면 ‘마저여설(麻紵如雪)’ 즉 진나라로 보낸 세모시가 하얀 눈과 같다고 묘사되어 있다. 그리고 고려후기의 기록을 보면 고려 왕실은 모시로 문양을 넣어 제직하거나 익조직으로 제직하여 원나라 공물로 보내었으며 특히 원나라가 이와 같은 고려의 마직물을 선호하여 여러 번 조공을 요구했으며 고려 충렬왕의 기록에 의하면 어느 한 여승은 원나라 공주에게 꽃문양이 들어가 있는 모시를 선물로 바쳤다는 내용도 있다. 더불어 『고려사』의 내용에 직조를 담당하던 잡직서(雜織署) 중 모직물을 전문적으로 관장하는 ‘계장(罽匠)’이 따로 있었고 고려시대와 마찬가지로 『경국대전(經國大典)』의 기록에 모직물을 전문적으로 취급하던 국가 소속 모의장(毛衣匠)과 모관장(毛冠匠) 등이 있었던 것으로 나타난다.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에 의하면 왕이 특별한 신하들에게 하사하던 물품 중에서 모직물이 포함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견직물과 마찬가지로 지배계층에서 주로 사용하던 직물로 여겨진다. 이와 같이 주변국뿐 아니라 우리나라의 여러 문헌자료를 종합해보면 우리 선조들은 면․마․견․모 네 가지 ...
『삼국지(三國志)』「위서(魏書)」와 『후한서(後漢書)』「동이열전」의 기록에 의하면 우리 선조들은 이미 오래전부터 양잠과 길쌈을 하였고 제사와 제직기술이 뛰어나 실은 가늘고 직물의 폭은 넓게 직물을 짰던 것으로 나타난다. 『한원(翰苑)』의「번이부」 내용에 의하면 우리나라 고대국가들 중의 하나인 고구려에서는 면직물을 자체 생산한 것으로 기술되어 있다. 『일본서기』 9권의 내용에 의하면 일본은 백제 근초고왕(近肖古王) 대에 백제의 뛰어난 양잠법과 직조법을 전수받았으며 29권의 내용에서는 신라가 일본으로 보낸 교역품목 가운데 견직물이 포함되어 있었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중국과 일본의 고문서에서 이러한 내용이 나타나는 것으로 보아 우리 조상들은 이미 고대부족국가시대에 직물을 생산하였으며 그 직조기술 또한 뛰어났던 것으로 짐작된다. 우리나라 옛 문헌에서도 선조들의 제사․제직기술에 관련된 기록을 찾아볼 수 있다.『삼국사기(三國史記)』「신라본기」에 의하면 박혁거세 대부터 양잠을 권장하였다고 서술되어 있다. 그리고 신라는 당나라에서 생산하였던 30승(升)의 삼베보다 더 섬세하게 제직한 40승(升)의 삼베를 조공물품으로 당나라에 보내기도 하였다. 그 뿐 아니라 당나라에 헌상하는 중요 물품 중에 곱게 짠 30승(升)의 모시나 40승(升)의 면직물 등이 포함되어 있었다는 기록들도 나타난다. 「고구려본기」에 의하면 직물에 관련된 내용이 다소 상징적 표현으로 기술되어 있다. 부여를 벗어나고 있던 주몽은 삼베 옷을 입은 자, 면 옷을 입은 자, 마름 옷(水藻衣)을 입은 자 세 명을 우연히 만났으며 그들의 협력으로 고구려를 세울 수 있었던 것으로 나타난다. 세 명이 착용하고 있는 의복의 소재가 각기 다른 신분계층을 상징한다고 한다면 주몽은 고구려 지역 사람들의 지지를 받아 왕이 되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그리고 주몽의 아들 유리왕이 백성들에게 직물을 짜는 경쟁을 시키면서까지 길쌈을 장려했던 것으로 보아 고구려에서는 백성들을 다스리는 데 직조가 중요한 역할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 「백제본기」에 의하면 고이왕 52년(285)에 직공을 일본으로 보내어 직조기술을 가르쳐 주었던 기록이 있으며 「잡지」편에 신라는 일찍부터 견직물을 전문적으로 제직하는 관영공장이 있었고 흥덕왕 9년(834)에 신분에 따라 의복 소재로 직물을 사용하는 규제가 있었던 것으로 나타난다. 견직물의 품질은 다르지만 평민이 입는 겉감으로 면주를 사용할 수 있다는 내용이 있는 것으로 보아 삼국시대부터 우리 조상들은 견직물을 제직하였으며 견직물을 피복소재로 사용하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또한 4두품에서 평민에 이르기까지는 모직 보료, 모포, 호피, 중국 담요를 사용하지 못한다고 규정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신라 지배층은 견직물과 더불어 모직물을 사용하고 있었던 것으로 짐작된다. 『고려사』에 나타나는 고려 초기 혜종 대의 기록을 보면 ‘마저여설(麻紵如雪)’ 즉 진나라로 보낸 세모시가 하얀 눈과 같다고 묘사되어 있다. 그리고 고려후기의 기록을 보면 고려 왕실은 모시로 문양을 넣어 제직하거나 익조직으로 제직하여 원나라 공물로 보내었으며 특히 원나라가 이와 같은 고려의 마직물을 선호하여 여러 번 조공을 요구했으며 고려 충렬왕의 기록에 의하면 어느 한 여승은 원나라 공주에게 꽃문양이 들어가 있는 모시를 선물로 바쳤다는 내용도 있다. 더불어 『고려사』의 내용에 직조를 담당하던 잡직서(雜織署) 중 모직물을 전문적으로 관장하는 ‘계장(罽匠)’이 따로 있었고 고려시대와 마찬가지로 『경국대전(經國大典)』의 기록에 모직물을 전문적으로 취급하던 국가 소속 모의장(毛衣匠)과 모관장(毛冠匠) 등이 있었던 것으로 나타난다.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에 의하면 왕이 특별한 신하들에게 하사하던 물품 중에서 모직물이 포함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견직물과 마찬가지로 지배계층에서 주로 사용하던 직물로 여겨진다. 이와 같이 주변국뿐 아니라 우리나라의 여러 문헌자료를 종합해보면 우리 선조들은 면․마․견․모 네 가지 천연섬유를 의생활의 소재로 두루 사용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문헌을 통하여 중국이 우리의 직물을 선호하고 일본이 우리 기술을 배워갈 만큼 우리 선조들이 뛰어난 제사․제직기술을 보유하였던 것도 알 수 있다. 유적지에서도 우리나라 길쌈과 직조기술을 짐작할 수 있는 흔적이 있다. 고조선 말기 유적지인 평양시 낙랑구역 정백동 1호 묘에서 말총으로 제직한 평직의 모직물이 출토되었으며 고구려 고분벽화 대안리 1호분에는 직기를 이용해 베를 짜는 여인의 모습이 그려져 있고 광개토왕 비문에 영락왕 6년 백제를 정벌하러 갔더니 백제는 세포(細布) 1,000필을 고구려에게 보내어 항복하였다는 내용 등이 있다. 우리 선조들의 빼어난 제직기술을 입증할 만한 자료는 역사적인 문헌 자료와 유적지를 통하여 충분히 찾아 볼 수 있다. 하지만 이러한 문헌적 내용을 뒷받침할만한 실증적 자료는 거의 남아 있지 않다. 직물의 특성상 시대를 거슬러 올라갈수록 현존하고 있는 직물의 수량은 적고 남은 직물마저도 온전한 형태로 남아 있는 것이 드물다. 이는 유물로서의 직물이 다른 유물에 비하여 보존하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직물은 시간의 흐름에 따라 물리화학적 손상에 의한 열화현상이 일어나므로 직물 본래의 형태조차 알아보기 어려워진다고 할 수 있다. 최근까지 그 형태가 비교적 양호한 상태로 보존되어 출토된 직물 중에서는 조선시대의 직물 수량이 그나마 많은 편이다. 조선 시대의 직물은 그 이전 시기에 비하여 직물 본래의 형태를 비교적 온전하게 유지하고 있다. 이는 다른 시대보다 직물 보존시기가 상대적으로 짧고 매장기술이 발달하였기 때문이라고 추측된다. 특히 조선시대에는 석회로 묘곽을 제작하는 기술이 있었다. 이 회곽묘는 시신을 곤충이나 동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만들어졌으며 발굴된 조선시대 무덤의 약 20∼30%를 차지한다. 회곽의 주성분인 석회가 주변 토양을 염기성으로 만들어 시신과 직물이 부패하는 것을 막았기 때문에 학자들은 조선시대 출토유물이 비교적 온전하게 발견되는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또한 관의 틈을 막아 공기를 차단한 점도 직물 상태가 양호한 이유 중의 하나로 생각되고 있다. 조선 시대 출토 직물은 다른 시대에 비하여 비교적 양호한 상태로 남아 있기 때문에 문헌자료로 기술되어 있는 직물 사용의 정황과 제직기술을 검증하고 직물산업과 제직기술에 관한 역사적 고찰을 유추해볼 수 있다. 조선시대 문헌자료에 나타난 직물 명칭을 바탕으로 출토 직물을 유형별로 특성을 고찰할 수 있으며 실증적인 방법으로 조선 시대 직물 자료를 섬유의 종류와 실의 굵기․경위사의 밀도․두께 및 너비 등으로 분석하여 조선시대 직물의 제직 특성을 살펴 볼 수 있다. 지금까지 출토복식을 중심으로 조선 시대 출토유물에 대한 많은 연구가 진행되고 있다. 특히 출토복식에 관련된 선행연구들은 출토 복식의 유형과 구성을 주로 다루었다. 고 부자․박 성실 (1989). 박 성실 (1992), 이 은주(1998), 장 인우(2001), 송 미경(2003), 이 상은(2005), 박 필순․박 윤미․정 복남(2005) 등은 성남출토 동래정씨 출토유물, 조선 전기 출토복식, 이 인손․김 흠조의 출토복식, 임경백․임계백의 출토 복식, 여흥 민씨의 출토복식, 이 응해의 출토복식, 의녕 전의이씨의 출토복식 등에서 치수와 의복구성법을 품목별로 고찰하였다. 송 미경(2007)은 연안김씨의 출토복식에서 의복과 치관제구의 치수와 특징을 살펴보았다. 김 확의 출토복식, 인천 석남동 출토복식에서 조선후기 남자 포의 종류와 여성용 대금형 상의류를 각각 조사하였다. 장 인우(2007), 안 명숙(2007)는 한산이씨의 복식, 경주 이씨의 복식에서 의복 구성법을 고찰하였다. 홍 나영(2008)은 선행연구결과를 토대로 조선시대 남자 편복포의 종류와 특징을 살펴보았다. 근래에 와서 의복소재로 사용된 직물 연구가 일부 이루어지고 있다. 조 효숙(2001), 조 효숙과 안 지원(2002), 조 효숙(2006), 조 효숙․배 순화(2007), 조 효숙․이 은진(2007) 등은 장기 정씨의 출토직물, 의원군의 출토직물, 파평 윤씨와 김 여온의 출토직물, 인천시 석남동 출토 직물, 진주 류씨의 직물에서 각각의 직물 유형과 제직특성을 고찰하였다. 이상의 선행연구 결과에서 출토 복식의 유형과 구성에 초점을 맞춘 연구는 지속적으로 이루어지고 있으며 지난 몇 년 동안 출토직물의 물성에 초점을 맞춘 연구도 진행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지금까지의 직물 연구는 연구대상을 특정 분묘에서 출토된 복식과 직물에만 한정시켜 직물의 유형과 제직특성을 부분적으로 고찰하였으며 조선시대 문헌에 나타난 섬유산업 및 무역의 동향과 출토직물의 분석을 병행하여 조선시대 직물의 특성을 고찰한 연구는 드물다. 이에 본 연구는 기존의 발간된 출토복식 보고서와 논문 및 학회지 자료를 바탕으로 최근에 발표된 복식과 직물연구 자료까지 조사하여 조선시대 출토직물을 종합적으로 살펴볼 필요성이 있으며 조사한 출토직물을 바탕으로 문헌에 나타난 15-18세기의 섬유 산업 및 무역 동향을 파악하여 조선시대 직물사용의 경향과 특성을 유추해보고자 한다. 구체적인 연구 목적은 다음과 같다. 첫째, 생몰(生沒) 연대가 비슷한 시기별로 출토 직물을 유형과 제직별로 분류하고 출현빈도를 살펴본다. 둘째, 조선시대 직물산업 및 섬유무역에 관한 문헌적 고찰을 통하여 출토직물의 출현빈도와의 상관관계를 찾아본다. 셋째, 문헌 자료에 나타나는 직물명칭을 조사하여 조선시대의 직물 특성을 유추한다. 넷째, 조사한 출토직물의 유형과 제직방법에 따라 직물의 특성을 분석하고 이를 각 시대별로 비교․고찰한다.
『삼국지(三國志)』「위서(魏書)」와 『후한서(後漢書)』「동이열전」의 기록에 의하면 우리 선조들은 이미 오래전부터 양잠과 길쌈을 하였고 제사와 제직기술이 뛰어나 실은 가늘고 직물의 폭은 넓게 직물을 짰던 것으로 나타난다. 『한원(翰苑)』의「번이부」 내용에 의하면 우리나라 고대국가들 중의 하나인 고구려에서는 면직물을 자체 생산한 것으로 기술되어 있다. 『일본서기』 9권의 내용에 의하면 일본은 백제 근초고왕(近肖古王) 대에 백제의 뛰어난 양잠법과 직조법을 전수받았으며 29권의 내용에서는 신라가 일본으로 보낸 교역품목 가운데 견직물이 포함되어 있었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중국과 일본의 고문서에서 이러한 내용이 나타나는 것으로 보아 우리 조상들은 이미 고대부족국가시대에 직물을 생산하였으며 그 직조기술 또한 뛰어났던 것으로 짐작된다. 우리나라 옛 문헌에서도 선조들의 제사․제직기술에 관련된 기록을 찾아볼 수 있다.『삼국사기(三國史記)』「신라본기」에 의하면 박혁거세 대부터 양잠을 권장하였다고 서술되어 있다. 그리고 신라는 당나라에서 생산하였던 30승(升)의 삼베보다 더 섬세하게 제직한 40승(升)의 삼베를 조공물품으로 당나라에 보내기도 하였다. 그 뿐 아니라 당나라에 헌상하는 중요 물품 중에 곱게 짠 30승(升)의 모시나 40승(升)의 면직물 등이 포함되어 있었다는 기록들도 나타난다. 「고구려본기」에 의하면 직물에 관련된 내용이 다소 상징적 표현으로 기술되어 있다. 부여를 벗어나고 있던 주몽은 삼베 옷을 입은 자, 면 옷을 입은 자, 마름 옷(水藻衣)을 입은 자 세 명을 우연히 만났으며 그들의 협력으로 고구려를 세울 수 있었던 것으로 나타난다. 세 명이 착용하고 있는 의복의 소재가 각기 다른 신분계층을 상징한다고 한다면 주몽은 고구려 지역 사람들의 지지를 받아 왕이 되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그리고 주몽의 아들 유리왕이 백성들에게 직물을 짜는 경쟁을 시키면서까지 길쌈을 장려했던 것으로 보아 고구려에서는 백성들을 다스리는 데 직조가 중요한 역할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 「백제본기」에 의하면 고이왕 52년(285)에 직공을 일본으로 보내어 직조기술을 가르쳐 주었던 기록이 있으며 「잡지」편에 신라는 일찍부터 견직물을 전문적으로 제직하는 관영공장이 있었고 흥덕왕 9년(834)에 신분에 따라 의복 소재로 직물을 사용하는 규제가 있었던 것으로 나타난다. 견직물의 품질은 다르지만 평민이 입는 겉감으로 면주를 사용할 수 있다는 내용이 있는 것으로 보아 삼국시대부터 우리 조상들은 견직물을 제직하였으며 견직물을 피복소재로 사용하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또한 4두품에서 평민에 이르기까지는 모직 보료, 모포, 호피, 중국 담요를 사용하지 못한다고 규정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신라 지배층은 견직물과 더불어 모직물을 사용하고 있었던 것으로 짐작된다. 『고려사』에 나타나는 고려 초기 혜종 대의 기록을 보면 ‘마저여설(麻紵如雪)’ 즉 진나라로 보낸 세모시가 하얀 눈과 같다고 묘사되어 있다. 그리고 고려후기의 기록을 보면 고려 왕실은 모시로 문양을 넣어 제직하거나 익조직으로 제직하여 원나라 공물로 보내었으며 특히 원나라가 이와 같은 고려의 마직물을 선호하여 여러 번 조공을 요구했으며 고려 충렬왕의 기록에 의하면 어느 한 여승은 원나라 공주에게 꽃문양이 들어가 있는 모시를 선물로 바쳤다는 내용도 있다. 더불어 『고려사』의 내용에 직조를 담당하던 잡직서(雜織署) 중 모직물을 전문적으로 관장하는 ‘계장(罽匠)’이 따로 있었고 고려시대와 마찬가지로 『경국대전(經國大典)』의 기록에 모직물을 전문적으로 취급하던 국가 소속 모의장(毛衣匠)과 모관장(毛冠匠) 등이 있었던 것으로 나타난다.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에 의하면 왕이 특별한 신하들에게 하사하던 물품 중에서 모직물이 포함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견직물과 마찬가지로 지배계층에서 주로 사용하던 직물로 여겨진다. 이와 같이 주변국뿐 아니라 우리나라의 여러 문헌자료를 종합해보면 우리 선조들은 면․마․견․모 네 가지 천연섬유를 의생활의 소재로 두루 사용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문헌을 통하여 중국이 우리의 직물을 선호하고 일본이 우리 기술을 배워갈 만큼 우리 선조들이 뛰어난 제사․제직기술을 보유하였던 것도 알 수 있다. 유적지에서도 우리나라 길쌈과 직조기술을 짐작할 수 있는 흔적이 있다. 고조선 말기 유적지인 평양시 낙랑구역 정백동 1호 묘에서 말총으로 제직한 평직의 모직물이 출토되었으며 고구려 고분벽화 대안리 1호분에는 직기를 이용해 베를 짜는 여인의 모습이 그려져 있고 광개토왕 비문에 영락왕 6년 백제를 정벌하러 갔더니 백제는 세포(細布) 1,000필을 고구려에게 보내어 항복하였다는 내용 등이 있다. 우리 선조들의 빼어난 제직기술을 입증할 만한 자료는 역사적인 문헌 자료와 유적지를 통하여 충분히 찾아 볼 수 있다. 하지만 이러한 문헌적 내용을 뒷받침할만한 실증적 자료는 거의 남아 있지 않다. 직물의 특성상 시대를 거슬러 올라갈수록 현존하고 있는 직물의 수량은 적고 남은 직물마저도 온전한 형태로 남아 있는 것이 드물다. 이는 유물로서의 직물이 다른 유물에 비하여 보존하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직물은 시간의 흐름에 따라 물리화학적 손상에 의한 열화현상이 일어나므로 직물 본래의 형태조차 알아보기 어려워진다고 할 수 있다. 최근까지 그 형태가 비교적 양호한 상태로 보존되어 출토된 직물 중에서는 조선시대의 직물 수량이 그나마 많은 편이다. 조선 시대의 직물은 그 이전 시기에 비하여 직물 본래의 형태를 비교적 온전하게 유지하고 있다. 이는 다른 시대보다 직물 보존시기가 상대적으로 짧고 매장기술이 발달하였기 때문이라고 추측된다. 특히 조선시대에는 석회로 묘곽을 제작하는 기술이 있었다. 이 회곽묘는 시신을 곤충이나 동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만들어졌으며 발굴된 조선시대 무덤의 약 20∼30%를 차지한다. 회곽의 주성분인 석회가 주변 토양을 염기성으로 만들어 시신과 직물이 부패하는 것을 막았기 때문에 학자들은 조선시대 출토유물이 비교적 온전하게 발견되는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또한 관의 틈을 막아 공기를 차단한 점도 직물 상태가 양호한 이유 중의 하나로 생각되고 있다. 조선 시대 출토 직물은 다른 시대에 비하여 비교적 양호한 상태로 남아 있기 때문에 문헌자료로 기술되어 있는 직물 사용의 정황과 제직기술을 검증하고 직물산업과 제직기술에 관한 역사적 고찰을 유추해볼 수 있다. 조선시대 문헌자료에 나타난 직물 명칭을 바탕으로 출토 직물을 유형별로 특성을 고찰할 수 있으며 실증적인 방법으로 조선 시대 직물 자료를 섬유의 종류와 실의 굵기․경위사의 밀도․두께 및 너비 등으로 분석하여 조선시대 직물의 제직 특성을 살펴 볼 수 있다. 지금까지 출토복식을 중심으로 조선 시대 출토유물에 대한 많은 연구가 진행되고 있다. 특히 출토복식에 관련된 선행연구들은 출토 복식의 유형과 구성을 주로 다루었다. 고 부자․박 성실 (1989). 박 성실 (1992), 이 은주(1998), 장 인우(2001), 송 미경(2003), 이 상은(2005), 박 필순․박 윤미․정 복남(2005) 등은 성남출토 동래정씨 출토유물, 조선 전기 출토복식, 이 인손․김 흠조의 출토복식, 임경백․임계백의 출토 복식, 여흥 민씨의 출토복식, 이 응해의 출토복식, 의녕 전의이씨의 출토복식 등에서 치수와 의복구성법을 품목별로 고찰하였다. 송 미경(2007)은 연안김씨의 출토복식에서 의복과 치관제구의 치수와 특징을 살펴보았다. 김 확의 출토복식, 인천 석남동 출토복식에서 조선후기 남자 포의 종류와 여성용 대금형 상의류를 각각 조사하였다. 장 인우(2007), 안 명숙(2007)는 한산이씨의 복식, 경주 이씨의 복식에서 의복 구성법을 고찰하였다. 홍 나영(2008)은 선행연구결과를 토대로 조선시대 남자 편복포의 종류와 특징을 살펴보았다. 근래에 와서 의복소재로 사용된 직물 연구가 일부 이루어지고 있다. 조 효숙(2001), 조 효숙과 안 지원(2002), 조 효숙(2006), 조 효숙․배 순화(2007), 조 효숙․이 은진(2007) 등은 장기 정씨의 출토직물, 의원군의 출토직물, 파평 윤씨와 김 여온의 출토직물, 인천시 석남동 출토 직물, 진주 류씨의 직물에서 각각의 직물 유형과 제직특성을 고찰하였다. 이상의 선행연구 결과에서 출토 복식의 유형과 구성에 초점을 맞춘 연구는 지속적으로 이루어지고 있으며 지난 몇 년 동안 출토직물의 물성에 초점을 맞춘 연구도 진행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지금까지의 직물 연구는 연구대상을 특정 분묘에서 출토된 복식과 직물에만 한정시켜 직물의 유형과 제직특성을 부분적으로 고찰하였으며 조선시대 문헌에 나타난 섬유산업 및 무역의 동향과 출토직물의 분석을 병행하여 조선시대 직물의 특성을 고찰한 연구는 드물다. 이에 본 연구는 기존의 발간된 출토복식 보고서와 논문 및 학회지 자료를 바탕으로 최근에 발표된 복식과 직물연구 자료까지 조사하여 조선시대 출토직물을 종합적으로 살펴볼 필요성이 있으며 조사한 출토직물을 바탕으로 문헌에 나타난 15-18세기의 섬유 산업 및 무역 동향을 파악하여 조선시대 직물사용의 경향과 특성을 유추해보고자 한다. 구체적인 연구 목적은 다음과 같다. 첫째, 생몰(生沒) 연대가 비슷한 시기별로 출토 직물을 유형과 제직별로 분류하고 출현빈도를 살펴본다. 둘째, 조선시대 직물산업 및 섬유무역에 관한 문헌적 고찰을 통하여 출토직물의 출현빈도와의 상관관계를 찾아본다. 셋째, 문헌 자료에 나타나는 직물명칭을 조사하여 조선시대의 직물 특성을 유추한다. 넷째, 조사한 출토직물의 유형과 제직방법에 따라 직물의 특성을 분석하고 이를 각 시대별로 비교․고찰한다.
The purpose of this study was to investigate the textile industries shown up on the historical records and analyze the exhumed textiles by the types and the weaving. This research was done by picking out the total 2,598 textiles among the good exhumed textiles of Joseon periods from the 15th to the ...
The purpose of this study was to investigate the textile industries shown up on the historical records and analyze the exhumed textiles by the types and the weaving. This research was done by picking out the total 2,598 textiles among the good exhumed textiles of Joseon periods from the 15th to the 18th century. Result of the study can be summarized as follows. 1. The movements of the textiles industries like cotton, ramie and hemp, and silk fibers were examined on the Joseon historical records. In the 16th century the cotton textiles were evenly spread across the nation because of government aid. Since then they had slowly declined. But the ramie and the hemp textiles had slowly dwindled from the beginning of the 15th because of the cotton industry growth. Since the 17th century the silk textiles lagged because the government had destroyed the looms and tightened up the regulation of the silk. 2. The movements of the textiles trade with China and Japan were sorted by formal and informal trade. In the formal trade with China, Joseon government had exported the cotton textiles and the ramie and the hemp textiles and imported the silk textiles. In the formal trade with Japan, Joseon government had exported the cotton textiles and the silk made in China and imported the native products. None the less because the government had prohibited the informal trade by law, it had grown more and more. After the 18th century the traders of Joseon had taken heavy losses because the prices of the silk made in China appreciated every year. 3. The rate of the exhumed cotton and hemp textiles was the highest in the 16th and decreased rapidly after the 16th-17th century. the cotton thread was S-twist and the hemp thread was no twist The cotton fibers were used as the official uniforms and the ordinary cloths of the nobility. 4. The rate of the exhumed silk textiles was the highest in the 16th-17th. Among the total 2,022 silk textiles, the plain fabrics scored 1,801, the satin fabrics scored 169, the simple and the complex gauze scored 34, the twilled fabrics scored 18. 1) The plain silk fabrics weaving with the silk threads of bad quality showed the most score with 1,495 and were used most as the out and the inner garments. Their silk threads was Z-twist or no twist. The plain silk fabrics weaving with the silk threads of fine quality showed lower score than the former fabrics and were used as outer garments shown off the social authority. Their threads was no twist. 2) The basic unit of the satin silk fabrics was 5-end damask in the early days of Joseon. 8-end weft faced damask of the satin fabrics was made at the end of Joseon. The satin fabrics were woven out of weft threads with Z-twist and warp threads with no twist. They are called an unbalanced fabrics because the density of the weft is much thicker than one of the warp. 3) The frequency of the simple and the complex gauze was very low. Of the two people in those days used more the complex gauze with 4-warp structure than the simple gauze with the 2-warp structure. 4) The twilled fabrics had the lowest frequency of use among the exhumed silk textiles. The basic unit of the twilled fabrics was 3-end weft faced twill in Joseon periods. In the 16th-17th century the twilled fabrics of use increased temporarily because of the law forbidden the nobility to use the figured silk. 5. The rate of the blended tabby among the exhumed textiles was quite low. 23 in the total 29 pieces were woven out of weft threads like the kinds of silk and warp threads like the ones of cotton. Their frequency of use grew more and more as after the 16th century the production of the silk was decreased and one of the cotton was increased.
The purpose of this study was to investigate the textile industries shown up on the historical records and analyze the exhumed textiles by the types and the weaving. This research was done by picking out the total 2,598 textiles among the good exhumed textiles of Joseon periods from the 15th to the 18th century. Result of the study can be summarized as follows. 1. The movements of the textiles industries like cotton, ramie and hemp, and silk fibers were examined on the Joseon historical records. In the 16th century the cotton textiles were evenly spread across the nation because of government aid. Since then they had slowly declined. But the ramie and the hemp textiles had slowly dwindled from the beginning of the 15th because of the cotton industry growth. Since the 17th century the silk textiles lagged because the government had destroyed the looms and tightened up the regulation of the silk. 2. The movements of the textiles trade with China and Japan were sorted by formal and informal trade. In the formal trade with China, Joseon government had exported the cotton textiles and the ramie and the hemp textiles and imported the silk textiles. In the formal trade with Japan, Joseon government had exported the cotton textiles and the silk made in China and imported the native products. None the less because the government had prohibited the informal trade by law, it had grown more and more. After the 18th century the traders of Joseon had taken heavy losses because the prices of the silk made in China appreciated every year. 3. The rate of the exhumed cotton and hemp textiles was the highest in the 16th and decreased rapidly after the 16th-17th century. the cotton thread was S-twist and the hemp thread was no twist The cotton fibers were used as the official uniforms and the ordinary cloths of the nobility. 4. The rate of the exhumed silk textiles was the highest in the 16th-17th. Among the total 2,022 silk textiles, the plain fabrics scored 1,801, the satin fabrics scored 169, the simple and the complex gauze scored 34, the twilled fabrics scored 18. 1) The plain silk fabrics weaving with the silk threads of bad quality showed the most score with 1,495 and were used most as the out and the inner garments. Their silk threads was Z-twist or no twist. The plain silk fabrics weaving with the silk threads of fine quality showed lower score than the former fabrics and were used as outer garments shown off the social authority. Their threads was no twist. 2) The basic unit of the satin silk fabrics was 5-end damask in the early days of Joseon. 8-end weft faced damask of the satin fabrics was made at the end of Joseon. The satin fabrics were woven out of weft threads with Z-twist and warp threads with no twist. They are called an unbalanced fabrics because the density of the weft is much thicker than one of the warp. 3) The frequency of the simple and the complex gauze was very low. Of the two people in those days used more the complex gauze with 4-warp structure than the simple gauze with the 2-warp structure. 4) The twilled fabrics had the lowest frequency of use among the exhumed silk textiles. The basic unit of the twilled fabrics was 3-end weft faced twill in Joseon periods. In the 16th-17th century the twilled fabrics of use increased temporarily because of the law forbidden the nobility to use the figured silk. 5. The rate of the blended tabby among the exhumed textiles was quite low. 23 in the total 29 pieces were woven out of weft threads like the kinds of silk and warp threads like the ones of cotton. Their frequency of use grew more and more as after the 16th century the production of the silk was decreased and one of the cotton was increas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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