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문제제기 및 연구목적 복음서에 나타난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은 천국복음을 전파하는 설교로 시작되었고, 또 그 일로 보내심을 받았다고 기록되었다(마 4:23; 9:35; 눅 4:43). 또한 요한복음 21:15-17에서 부활하신 예수께서 베드로에게 세 차례에 걸쳐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내 (어린)양을 먹이라(치라)”고 부탁하셨다. 그리고 교회시대에 와서는 다메섹 사건 이후 회심한 바울을 비롯하여 많은 제자들은 로마의 무서운 핍박과 시련 속에서도 생명력을 가지고 순교를 감수하면서 천국복음을 전파하였다. 또한 사도행전 6:2 이하에서 초대교회 열두 사도들은 그의 모든 제자들을 불러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제쳐놓고 공궤를 일삼는 것이 마땅치 않다”는 것을 깨닫고, 일곱 집사를 세워 교회를 맡기고, 그들은 기도하는 일과 말씀을 전하는 일을 가장 중요한 사역으로 여겼다. 그러나 중세교회에 와서 말씀을 제쳐놓은 결과는 타락한 교회의 실상이 되어버렸고, 결국 종교개혁운동의 깃발이 세워지는 빌미를 주고 말았다. 따라서 목회자가 양을 먹이는 최대의 사명은 복음을 전파하는 일이다. 곧 교회의 첫 번째 표지는 말씀 선포이다. 말씀 선포가 교회의 표지로서 중요한 것은 교회가 하나님의 기록된 말씀인 성경을 바르게 선포하고 가르치며, 그 성경을 가지고 성령이 역사하고, 성도들의 믿음이 하나님의 말씀을 들음에서 나고(롬 10:17), 사도들이 말씀 전하는 일을 최우선 순위에 두었기 때문이다(행 6:4). 나용화, 『기독교 신앙의 진리』, (서울: 기독교문서선교회, 2004), 296. 그래서 바울은 이렇게 말했다. “그리스도께서 나를 보내심은 세례를 주게 하려 하심이 아니요 오직 복음을 전케하려 하심이니… 십자가의 도가…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 하나님의 능력이라”(고전 1:17-18). 지금 한국교회는 순교자의 피 위에서 싹이 나고 자라서, 세계 역사상 그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교회성장을 이루었다. 그러나 지금의 한국교회는 날이 갈수록 말씀의 생명력을 잃어가며 위기에 봉착한 모습을 볼 수 있다. 물론 교회의 역할이 구제사업, 선교사업, 교육 사업이 포함된다. 그러나 이러한 사업으로 인해 많은 목회자들과 교회들은 교회의 양적인 성장을 지상과제로 생각하고 있거나 또는 세상 사람들은 그러한 모습들로 인해 기독교를 물질을 우선으로 하는 오해를 낳고 있다. 따라서 그러한 오해와 또한 교회의 신실한 성장을 위해서는 먼저 선행되어야 할 것은 바로 복음전파이다.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말씀이요(요 5:39), 예수 그리스도는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신다(요 1:14). 그러므로 그리스도가 없는 복음은 말씀이 아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부활은 초대교회 사도들의 말씀내용이었고, 그들의 설교가 선포될 때, 많은 사람들이 중생의 체험을 하였고 사회변혁이 뒤따랐던 것이다. 칼빈(J. Calvin)을 위시하여 당시의 많은 개혁자들은 “오직 성경”(Sola Scriptura)을 외쳤는데, 이것은 교회 강단의 개혁을 염두에 두고 한 것이다. 일천 년 가까이 하나님의 말씀과 멀어진 가톨릭교회를 향해서 하나님의 말씀으로 돌아갈 것을 촉구한 것이다. 참된 개혁이란 하나님의 말씀을 올바르게 선포하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데에서 시작한다는 뜻이다. 이제 한국교회는 또 다른 시기를 맞이하고 있다. 바로 이때에 한국교회가 해야 할 최우선 과제는 성경적인 설교의 부흥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최첨단의 전파의 시대를 가고 있는 이때 우리는 많은 정보들을 통해 설교의 위기를 고발하는 사람들의 아픈 증언들을 듣는다. 그러나 문제는 그들의 진단은 각기 다르며, 그것에 따른 처방도 각기 다르다는 것이다. 더욱 중요한 것은 그 처방들이 오늘의 설교 위기의 본질적 핵심을 제대로 드러내 주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로이드 존스(L. Jones)는 그의 책 『목사와 설교』에서 설교의 위기에 대해 이렇게 진단한다. 그는 설교의 위치와 능력이 하향길을 걷게 된 것은 크게 세 가지 원인으로 본다. 하나는 일반적인 것으로 교회 밖의 세상에 유행하는 설교 경시풍조 같은 것이다. 성경의 권위에 대한 신뢰심 상실, 진리에 대한 신앙의 감소 등이다. 성경을 권위 있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고 그 권위에 입각해서 말하는 동안에는 위대한 설교를 들을 수 있다. 그러나 설교가 윤리적인 강연이나 훈계 그리고 도덕정신의 함양, 설교보다는 사회 정치적인 대화로 자리바꿈을 하였으므로 퇴보하였다는 것이다. D. M. Lloyd-Jones, 『목사와 설교』, 서문강 역 (서울: 기독교문서선교회, 1999), 13~16. 둘째는 교회 자체 내의 원인으로 성경의 권위에 대한 신뢰감 상실과 “설교자”(Preacher)가 아닌 “설교꾼”(Pulpiteer)들의 지나친 설교 쇼맨십이 많았고, 집회를 인도하는 사람들이 집회에 참석한 사람들의 감정을 움직이는데 중점을 두었기에 이 점들이 반감을 일으키게 한 것이다. 즉 미사여구로 꾸미려는 지나친 수사학 구사의 결과라 할 수 있다. 진리는 외면해 버리고 그저 슬쩍 넘겨버리고 중요한 것은 모양이 되어버린 것이다. 위의 책, 16~18. 셋째, 참된 설교내용과 설교행위에 대한 그릇된 개념이다. 문학적인 재질을 부여받은 사람들이 메시지의 진리성을 문학적 표현에 강조점을 둔 것이다. 이런 사람들의 설교란 영성이 결핍된 세속적인 것이며, 필요로 하는 것은 대화나 조용한 담화와 설화 등이다. 그러기에 새로운 강조점을 “예배의식”에 둠으로서 교독문과 더 많은 음악과 노래와 영창 등을 도입하여 말씀과 기도의 시간이 짧아져 “찬송 인도자”라는 말을 듣게 된다. 그 다음은 특별한 사람들의 간증으로 흥미롭게 만든다. 심지어 그 간증들이 복음강해보다 더 가치가 있다고까지 생각되게 한다고 말한다. 위의 책, 18~22. 존 스타트(J. Stott)도 그의 책 『현대교회와 설교』에서 “설교는 이제 사라지고 없다”고 단언하는 일부 과격한 사람들의 주장을 시인하면서, 이런 주장이 나오게 된 원인을 세 가지로 이야기 한다. 첫째는 반권위적인 분위기, John R. W. Stott, 『현대교회와 설교』, 정성구 역 (서울: 반석문화사, 1992), 59~74. 둘째는 ...
A. 문제제기 및 연구목적 복음서에 나타난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은 천국복음을 전파하는 설교로 시작되었고, 또 그 일로 보내심을 받았다고 기록되었다(마 4:23; 9:35; 눅 4:43). 또한 요한복음 21:15-17에서 부활하신 예수께서 베드로에게 세 차례에 걸쳐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내 (어린)양을 먹이라(치라)”고 부탁하셨다. 그리고 교회시대에 와서는 다메섹 사건 이후 회심한 바울을 비롯하여 많은 제자들은 로마의 무서운 핍박과 시련 속에서도 생명력을 가지고 순교를 감수하면서 천국복음을 전파하였다. 또한 사도행전 6:2 이하에서 초대교회 열두 사도들은 그의 모든 제자들을 불러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제쳐놓고 공궤를 일삼는 것이 마땅치 않다”는 것을 깨닫고, 일곱 집사를 세워 교회를 맡기고, 그들은 기도하는 일과 말씀을 전하는 일을 가장 중요한 사역으로 여겼다. 그러나 중세교회에 와서 말씀을 제쳐놓은 결과는 타락한 교회의 실상이 되어버렸고, 결국 종교개혁운동의 깃발이 세워지는 빌미를 주고 말았다. 따라서 목회자가 양을 먹이는 최대의 사명은 복음을 전파하는 일이다. 곧 교회의 첫 번째 표지는 말씀 선포이다. 말씀 선포가 교회의 표지로서 중요한 것은 교회가 하나님의 기록된 말씀인 성경을 바르게 선포하고 가르치며, 그 성경을 가지고 성령이 역사하고, 성도들의 믿음이 하나님의 말씀을 들음에서 나고(롬 10:17), 사도들이 말씀 전하는 일을 최우선 순위에 두었기 때문이다(행 6:4). 나용화, 『기독교 신앙의 진리』, (서울: 기독교문서선교회, 2004), 296. 그래서 바울은 이렇게 말했다. “그리스도께서 나를 보내심은 세례를 주게 하려 하심이 아니요 오직 복음을 전케하려 하심이니… 십자가의 도가…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 하나님의 능력이라”(고전 1:17-18). 지금 한국교회는 순교자의 피 위에서 싹이 나고 자라서, 세계 역사상 그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교회성장을 이루었다. 그러나 지금의 한국교회는 날이 갈수록 말씀의 생명력을 잃어가며 위기에 봉착한 모습을 볼 수 있다. 물론 교회의 역할이 구제사업, 선교사업, 교육 사업이 포함된다. 그러나 이러한 사업으로 인해 많은 목회자들과 교회들은 교회의 양적인 성장을 지상과제로 생각하고 있거나 또는 세상 사람들은 그러한 모습들로 인해 기독교를 물질을 우선으로 하는 오해를 낳고 있다. 따라서 그러한 오해와 또한 교회의 신실한 성장을 위해서는 먼저 선행되어야 할 것은 바로 복음전파이다.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말씀이요(요 5:39), 예수 그리스도는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신다(요 1:14). 그러므로 그리스도가 없는 복음은 말씀이 아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부활은 초대교회 사도들의 말씀내용이었고, 그들의 설교가 선포될 때, 많은 사람들이 중생의 체험을 하였고 사회변혁이 뒤따랐던 것이다. 칼빈(J. Calvin)을 위시하여 당시의 많은 개혁자들은 “오직 성경”(Sola Scriptura)을 외쳤는데, 이것은 교회 강단의 개혁을 염두에 두고 한 것이다. 일천 년 가까이 하나님의 말씀과 멀어진 가톨릭교회를 향해서 하나님의 말씀으로 돌아갈 것을 촉구한 것이다. 참된 개혁이란 하나님의 말씀을 올바르게 선포하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데에서 시작한다는 뜻이다. 이제 한국교회는 또 다른 시기를 맞이하고 있다. 바로 이때에 한국교회가 해야 할 최우선 과제는 성경적인 설교의 부흥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최첨단의 전파의 시대를 가고 있는 이때 우리는 많은 정보들을 통해 설교의 위기를 고발하는 사람들의 아픈 증언들을 듣는다. 그러나 문제는 그들의 진단은 각기 다르며, 그것에 따른 처방도 각기 다르다는 것이다. 더욱 중요한 것은 그 처방들이 오늘의 설교 위기의 본질적 핵심을 제대로 드러내 주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로이드 존스(L. Jones)는 그의 책 『목사와 설교』에서 설교의 위기에 대해 이렇게 진단한다. 그는 설교의 위치와 능력이 하향길을 걷게 된 것은 크게 세 가지 원인으로 본다. 하나는 일반적인 것으로 교회 밖의 세상에 유행하는 설교 경시풍조 같은 것이다. 성경의 권위에 대한 신뢰심 상실, 진리에 대한 신앙의 감소 등이다. 성경을 권위 있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고 그 권위에 입각해서 말하는 동안에는 위대한 설교를 들을 수 있다. 그러나 설교가 윤리적인 강연이나 훈계 그리고 도덕정신의 함양, 설교보다는 사회 정치적인 대화로 자리바꿈을 하였으므로 퇴보하였다는 것이다. D. M. Lloyd-Jones, 『목사와 설교』, 서문강 역 (서울: 기독교문서선교회, 1999), 13~16. 둘째는 교회 자체 내의 원인으로 성경의 권위에 대한 신뢰감 상실과 “설교자”(Preacher)가 아닌 “설교꾼”(Pulpiteer)들의 지나친 설교 쇼맨십이 많았고, 집회를 인도하는 사람들이 집회에 참석한 사람들의 감정을 움직이는데 중점을 두었기에 이 점들이 반감을 일으키게 한 것이다. 즉 미사여구로 꾸미려는 지나친 수사학 구사의 결과라 할 수 있다. 진리는 외면해 버리고 그저 슬쩍 넘겨버리고 중요한 것은 모양이 되어버린 것이다. 위의 책, 16~18. 셋째, 참된 설교내용과 설교행위에 대한 그릇된 개념이다. 문학적인 재질을 부여받은 사람들이 메시지의 진리성을 문학적 표현에 강조점을 둔 것이다. 이런 사람들의 설교란 영성이 결핍된 세속적인 것이며, 필요로 하는 것은 대화나 조용한 담화와 설화 등이다. 그러기에 새로운 강조점을 “예배의식”에 둠으로서 교독문과 더 많은 음악과 노래와 영창 등을 도입하여 말씀과 기도의 시간이 짧아져 “찬송 인도자”라는 말을 듣게 된다. 그 다음은 특별한 사람들의 간증으로 흥미롭게 만든다. 심지어 그 간증들이 복음강해보다 더 가치가 있다고까지 생각되게 한다고 말한다. 위의 책, 18~22. 존 스타트(J. Stott)도 그의 책 『현대교회와 설교』에서 “설교는 이제 사라지고 없다”고 단언하는 일부 과격한 사람들의 주장을 시인하면서, 이런 주장이 나오게 된 원인을 세 가지로 이야기 한다. 첫째는 반권위적인 분위기, John R. W. Stott, 『현대교회와 설교』, 정성구 역 (서울: 반석문화사, 1992), 59~74. 둘째는 인공두뇌학의 혁명, 위의 책, 74~94.. 그리고 셋째는 복음에 대한 신뢰를 상실함 위의 책, 94~101.을 이야기 한다. 이 중에서 스타트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복음에 대한 철저한 확신의 상실이다. 그래서 그는 “복음에 대한 확신을 먼저 회복하지 않고서는 설교를 회복할 기회가 없다” 위의 책, 96.고 결론을 내린다. 이처럼 설교는 기교나 전달, 그리고 설교자의 인격이 아니다. 문제의 초점은 설교가 그것의 근거인 성경, 즉 그리스도를 상실했다는데 있다. 따라서 본 논문은 바로 이와 같이 복음이 상실해져가는 설교에 대한 문제를 재고하고, 이 문제를 크게 세 단락으로 구분하여 칼빈의 신학과 설교관에 크게 영향을 준 종교개혁이 일어나기 이전, 예수님의 천국복음의 전파와 사도들과 고대교부들의 신학과 설교관을 연구한 다음, 이에 뿌리를 두고 “오직 성경”만을 외치며 말씀으로 돌아가자는 칼빈의 신학과 설교관에 대해 알아보고, 그리고 칼빈의 신학과 설교관의 영향을 받은 종교개혁 이후의 신학자들의 설교관을 중점으로 좀 더 깊이 연구함으로서 한국교회가 맞이한 설교의 위기를 재정립하고 한국교회의 진정한 의미의 성장과 발전을 기대함에 목적을 둔다. B. 연구범위 본 논문의 연구 범위는 천국복음의 성경적 배경을 통해 예수님의 복음 선포와 사도들에 의해 선포된 사도적 설교를 베드로와 바울을 중심으로 살펴보고, 복음 선포와 교회성장의 관계의 중요성을 통해 2천년 교회의 역사는 교회가 그 자체만으로 홀로 존재할 수 없으며, 말씀과 그 말씀의 선포로 인하여 존재한다는 것을 특히 칼빈의 복음 선포적 설교를 신학적 기초로 지금의 한국교회의 위기적 상황을 진단하고, 거기에 따른 설교자의 자기개발의 중요성과 그리스도 중심의 복음 선포를 통해 지금 한국교회가 처한 위기적 과제와 해결 방안을 다루고자 한다. C. 전개방법 본 논문은 서론과 결론을 포함하여, 모두 4장으로 구성하고자 한다. 제 Ⅰ장 서론에서는 본 연구에 있어서 문제제기와 연구목적, 그리고 연구범위와 전개과정을 제시하였다. 제 Ⅱ장은 복음 선포에 대한 성경적·역사적 배경을 다룰 것이다. 성경적 배경으로는 구약의 설교전통을 이어받은 예수님의 복음 선포와 사도들의 대표로 바울과 베드로의 복음 선포를 중심하여 살펴볼 것이며 역사적 배경으로 교회사 전체에 걸쳐 흐르는 설교의 역사를 고대 중세기, 종교개혁시대, 근대 부흥기 순으로 점검할 것이며 여기에 칼빈의 설교를 중점적으로 다룰 것이다. 또한 2세기에 걸쳐 최고의 성장을 가져온 한국교회의 설교의 배경을 통해 한국교회가 우선적으로 대처해야 할 과제들을 점검해 볼 것이다. 제 Ⅲ장은 Ⅱ장에서 제시한 배경들을 통해 교회성장의 이해를 도와 교회의 가장 첫 사명인 말씀선포와 그 선포의 중심이 그리스도가 되어야 함이 교회성장에 중요한 위치를 가지고 있음을 제시하고, 교회성장과 신학에 대해 고찰함으로 설교자들의 자기개발의 중요성이 얼마나 큰 임무인지를 깨닫고, 그런 자기개발을 통해 교회의 최종적인 본분이며 목표인 회심적인 교회성장이 이루어져야 됨이 얼마나 중요성한가를 제시할 것이다. 제 Ⅳ장인 논문의 결론에서는 지금까지의 연구를 정리 요약하고, 여기에 기초하여 복음 선포는 성경 중심이어야 함과 복음 선포의 목적은 구원이며, 이러한 복음 선포는 교회의 사명임을 다시 한 번 제시, 제언하고자 한다.
A. 문제제기 및 연구목적 복음서에 나타난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은 천국복음을 전파하는 설교로 시작되었고, 또 그 일로 보내심을 받았다고 기록되었다(마 4:23; 9:35; 눅 4:43). 또한 요한복음 21:15-17에서 부활하신 예수께서 베드로에게 세 차례에 걸쳐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내 (어린)양을 먹이라(치라)”고 부탁하셨다. 그리고 교회시대에 와서는 다메섹 사건 이후 회심한 바울을 비롯하여 많은 제자들은 로마의 무서운 핍박과 시련 속에서도 생명력을 가지고 순교를 감수하면서 천국복음을 전파하였다. 또한 사도행전 6:2 이하에서 초대교회 열두 사도들은 그의 모든 제자들을 불러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제쳐놓고 공궤를 일삼는 것이 마땅치 않다”는 것을 깨닫고, 일곱 집사를 세워 교회를 맡기고, 그들은 기도하는 일과 말씀을 전하는 일을 가장 중요한 사역으로 여겼다. 그러나 중세교회에 와서 말씀을 제쳐놓은 결과는 타락한 교회의 실상이 되어버렸고, 결국 종교개혁운동의 깃발이 세워지는 빌미를 주고 말았다. 따라서 목회자가 양을 먹이는 최대의 사명은 복음을 전파하는 일이다. 곧 교회의 첫 번째 표지는 말씀 선포이다. 말씀 선포가 교회의 표지로서 중요한 것은 교회가 하나님의 기록된 말씀인 성경을 바르게 선포하고 가르치며, 그 성경을 가지고 성령이 역사하고, 성도들의 믿음이 하나님의 말씀을 들음에서 나고(롬 10:17), 사도들이 말씀 전하는 일을 최우선 순위에 두었기 때문이다(행 6:4). 나용화, 『기독교 신앙의 진리』, (서울: 기독교문서선교회, 2004), 296. 그래서 바울은 이렇게 말했다. “그리스도께서 나를 보내심은 세례를 주게 하려 하심이 아니요 오직 복음을 전케하려 하심이니… 십자가의 도가…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 하나님의 능력이라”(고전 1:17-18). 지금 한국교회는 순교자의 피 위에서 싹이 나고 자라서, 세계 역사상 그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교회성장을 이루었다. 그러나 지금의 한국교회는 날이 갈수록 말씀의 생명력을 잃어가며 위기에 봉착한 모습을 볼 수 있다. 물론 교회의 역할이 구제사업, 선교사업, 교육 사업이 포함된다. 그러나 이러한 사업으로 인해 많은 목회자들과 교회들은 교회의 양적인 성장을 지상과제로 생각하고 있거나 또는 세상 사람들은 그러한 모습들로 인해 기독교를 물질을 우선으로 하는 오해를 낳고 있다. 따라서 그러한 오해와 또한 교회의 신실한 성장을 위해서는 먼저 선행되어야 할 것은 바로 복음전파이다.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말씀이요(요 5:39), 예수 그리스도는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신다(요 1:14). 그러므로 그리스도가 없는 복음은 말씀이 아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부활은 초대교회 사도들의 말씀내용이었고, 그들의 설교가 선포될 때, 많은 사람들이 중생의 체험을 하였고 사회변혁이 뒤따랐던 것이다. 칼빈(J. Calvin)을 위시하여 당시의 많은 개혁자들은 “오직 성경”(Sola Scriptura)을 외쳤는데, 이것은 교회 강단의 개혁을 염두에 두고 한 것이다. 일천 년 가까이 하나님의 말씀과 멀어진 가톨릭교회를 향해서 하나님의 말씀으로 돌아갈 것을 촉구한 것이다. 참된 개혁이란 하나님의 말씀을 올바르게 선포하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데에서 시작한다는 뜻이다. 이제 한국교회는 또 다른 시기를 맞이하고 있다. 바로 이때에 한국교회가 해야 할 최우선 과제는 성경적인 설교의 부흥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최첨단의 전파의 시대를 가고 있는 이때 우리는 많은 정보들을 통해 설교의 위기를 고발하는 사람들의 아픈 증언들을 듣는다. 그러나 문제는 그들의 진단은 각기 다르며, 그것에 따른 처방도 각기 다르다는 것이다. 더욱 중요한 것은 그 처방들이 오늘의 설교 위기의 본질적 핵심을 제대로 드러내 주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로이드 존스(L. Jones)는 그의 책 『목사와 설교』에서 설교의 위기에 대해 이렇게 진단한다. 그는 설교의 위치와 능력이 하향길을 걷게 된 것은 크게 세 가지 원인으로 본다. 하나는 일반적인 것으로 교회 밖의 세상에 유행하는 설교 경시풍조 같은 것이다. 성경의 권위에 대한 신뢰심 상실, 진리에 대한 신앙의 감소 등이다. 성경을 권위 있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고 그 권위에 입각해서 말하는 동안에는 위대한 설교를 들을 수 있다. 그러나 설교가 윤리적인 강연이나 훈계 그리고 도덕정신의 함양, 설교보다는 사회 정치적인 대화로 자리바꿈을 하였으므로 퇴보하였다는 것이다. D. M. Lloyd-Jones, 『목사와 설교』, 서문강 역 (서울: 기독교문서선교회, 1999), 13~16. 둘째는 교회 자체 내의 원인으로 성경의 권위에 대한 신뢰감 상실과 “설교자”(Preacher)가 아닌 “설교꾼”(Pulpiteer)들의 지나친 설교 쇼맨십이 많았고, 집회를 인도하는 사람들이 집회에 참석한 사람들의 감정을 움직이는데 중점을 두었기에 이 점들이 반감을 일으키게 한 것이다. 즉 미사여구로 꾸미려는 지나친 수사학 구사의 결과라 할 수 있다. 진리는 외면해 버리고 그저 슬쩍 넘겨버리고 중요한 것은 모양이 되어버린 것이다. 위의 책, 16~18. 셋째, 참된 설교내용과 설교행위에 대한 그릇된 개념이다. 문학적인 재질을 부여받은 사람들이 메시지의 진리성을 문학적 표현에 강조점을 둔 것이다. 이런 사람들의 설교란 영성이 결핍된 세속적인 것이며, 필요로 하는 것은 대화나 조용한 담화와 설화 등이다. 그러기에 새로운 강조점을 “예배의식”에 둠으로서 교독문과 더 많은 음악과 노래와 영창 등을 도입하여 말씀과 기도의 시간이 짧아져 “찬송 인도자”라는 말을 듣게 된다. 그 다음은 특별한 사람들의 간증으로 흥미롭게 만든다. 심지어 그 간증들이 복음강해보다 더 가치가 있다고까지 생각되게 한다고 말한다. 위의 책, 18~22. 존 스타트(J. Stott)도 그의 책 『현대교회와 설교』에서 “설교는 이제 사라지고 없다”고 단언하는 일부 과격한 사람들의 주장을 시인하면서, 이런 주장이 나오게 된 원인을 세 가지로 이야기 한다. 첫째는 반권위적인 분위기, John R. W. Stott, 『현대교회와 설교』, 정성구 역 (서울: 반석문화사, 1992), 59~74. 둘째는 인공두뇌학의 혁명, 위의 책, 74~94.. 그리고 셋째는 복음에 대한 신뢰를 상실함 위의 책, 94~101.을 이야기 한다. 이 중에서 스타트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복음에 대한 철저한 확신의 상실이다. 그래서 그는 “복음에 대한 확신을 먼저 회복하지 않고서는 설교를 회복할 기회가 없다” 위의 책, 96.고 결론을 내린다. 이처럼 설교는 기교나 전달, 그리고 설교자의 인격이 아니다. 문제의 초점은 설교가 그것의 근거인 성경, 즉 그리스도를 상실했다는데 있다. 따라서 본 논문은 바로 이와 같이 복음이 상실해져가는 설교에 대한 문제를 재고하고, 이 문제를 크게 세 단락으로 구분하여 칼빈의 신학과 설교관에 크게 영향을 준 종교개혁이 일어나기 이전, 예수님의 천국복음의 전파와 사도들과 고대교부들의 신학과 설교관을 연구한 다음, 이에 뿌리를 두고 “오직 성경”만을 외치며 말씀으로 돌아가자는 칼빈의 신학과 설교관에 대해 알아보고, 그리고 칼빈의 신학과 설교관의 영향을 받은 종교개혁 이후의 신학자들의 설교관을 중점으로 좀 더 깊이 연구함으로서 한국교회가 맞이한 설교의 위기를 재정립하고 한국교회의 진정한 의미의 성장과 발전을 기대함에 목적을 둔다. B. 연구범위 본 논문의 연구 범위는 천국복음의 성경적 배경을 통해 예수님의 복음 선포와 사도들에 의해 선포된 사도적 설교를 베드로와 바울을 중심으로 살펴보고, 복음 선포와 교회성장의 관계의 중요성을 통해 2천년 교회의 역사는 교회가 그 자체만으로 홀로 존재할 수 없으며, 말씀과 그 말씀의 선포로 인하여 존재한다는 것을 특히 칼빈의 복음 선포적 설교를 신학적 기초로 지금의 한국교회의 위기적 상황을 진단하고, 거기에 따른 설교자의 자기개발의 중요성과 그리스도 중심의 복음 선포를 통해 지금 한국교회가 처한 위기적 과제와 해결 방안을 다루고자 한다. C. 전개방법 본 논문은 서론과 결론을 포함하여, 모두 4장으로 구성하고자 한다. 제 Ⅰ장 서론에서는 본 연구에 있어서 문제제기와 연구목적, 그리고 연구범위와 전개과정을 제시하였다. 제 Ⅱ장은 복음 선포에 대한 성경적·역사적 배경을 다룰 것이다. 성경적 배경으로는 구약의 설교전통을 이어받은 예수님의 복음 선포와 사도들의 대표로 바울과 베드로의 복음 선포를 중심하여 살펴볼 것이며 역사적 배경으로 교회사 전체에 걸쳐 흐르는 설교의 역사를 고대 중세기, 종교개혁시대, 근대 부흥기 순으로 점검할 것이며 여기에 칼빈의 설교를 중점적으로 다룰 것이다. 또한 2세기에 걸쳐 최고의 성장을 가져온 한국교회의 설교의 배경을 통해 한국교회가 우선적으로 대처해야 할 과제들을 점검해 볼 것이다. 제 Ⅲ장은 Ⅱ장에서 제시한 배경들을 통해 교회성장의 이해를 도와 교회의 가장 첫 사명인 말씀선포와 그 선포의 중심이 그리스도가 되어야 함이 교회성장에 중요한 위치를 가지고 있음을 제시하고, 교회성장과 신학에 대해 고찰함으로 설교자들의 자기개발의 중요성이 얼마나 큰 임무인지를 깨닫고, 그런 자기개발을 통해 교회의 최종적인 본분이며 목표인 회심적인 교회성장이 이루어져야 됨이 얼마나 중요성한가를 제시할 것이다. 제 Ⅳ장인 논문의 결론에서는 지금까지의 연구를 정리 요약하고, 여기에 기초하여 복음 선포는 성경 중심이어야 함과 복음 선포의 목적은 구원이며, 이러한 복음 선포는 교회의 사명임을 다시 한 번 제시, 제언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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