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0년대 초반, 춤과 무대 이외에는 별다른 관심이 없던 나의 일상에 색다른 파경 하나 밀고 들어왔다. ‘오늘의 작가상’을 수상했다는 소설집 『살아남은 자의 슬픔』이라는 소설이었다. 지금의 기억으로도 당시 그 책은 종전의 히트를 기록할 만큼 세인들의 관심을 집중시켰다. 물론 ‘오늘의 작가상’이란 게 어떠한 의미를 담고 있으며 어떠한 결과물에 주어지는 것인지 지금도 내게는 명확한 기준이 없다. 하지만 돌이켜보건대, 뜬금없는 소문의 호기심처럼 박 일문 이라는 낯선 저자의 이름이 나의 뇌리에 박힐 만큼 그 책은 나의 일상을 적잖이 자...
1990년대 초반, 춤과 무대 이외에는 별다른 관심이 없던 나의 일상에 색다른 파경 하나 밀고 들어왔다. ‘오늘의 작가상’을 수상했다는 소설집 『살아남은 자의 슬픔』이라는 소설이었다. 지금의 기억으로도 당시 그 책은 종전의 히트를 기록할 만큼 세인들의 관심을 집중시켰다. 물론 ‘오늘의 작가상’이란 게 어떠한 의미를 담고 있으며 어떠한 결과물에 주어지는 것인지 지금도 내게는 명확한 기준이 없다. 하지만 돌이켜보건대, 뜬금없는 소문의 호기심처럼 박 일문 이라는 낯선 저자의 이름이 나의 뇌리에 박힐 만큼 그 책은 나의 일상을 적잖이 자극시켰다. 물론, 예나 지금이나 그 소설이 우리 역사의 깊은 상흔으로 자리하고 있는 1980년대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는 당시의 소개 글 때문만은 아니었다. 단지, 그 시대를 풍미했던 이데올로기적 방황과 사랑과 혼돈 에 해매이던 주인공의 나이가 20대라는 점에 있어 나와의 묘한 동질성을 불러 일으켰다. 분명히 나의 20대도 그 시기를 관통해 왔으며 그 사실 하나만으로도 무언가 모를 묵직한 부채를 짊어져야만 했던 것이 바로 당시의 20대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매케 한 최루탄 속에서 ‘군부독재 타도’나 ‘민주주의 쟁취’ 한 번 외쳐보지 못한 남루한 청춘에 대한 죄책감과 민망함이 나의 시선을 참으로 오래도록 괴롭혔던 기억으로 남아있다. 그런데 아니었다. 나의 진정한 죄스러움과 민망함은 그 책에 대한 기억이 아스라이 묻혀져 갈 무렵 다시금 새로운 모습으로 고개를 들었다. ‘살아남은 자의 슬픔’이라는 제목에서 묻어나던 처연함과 비극적 낭만이 나의 무지(無知)에 대한 부끄러움으로 다가온 것이다. 나는 미처 몰랐었다. ‘살아남은 자의 슬픔’이라는 글귀가 단순히 대한민국 땅의 어느 젊은 작가가 쏟아낸 시대적 절규가 아니라 이미 오래 전에 서구의 한 지식인이 스스로를 읊조렸던 고백성사였다는 사실을 말이다. 물론 나는 알고 있다. 오직 운이 좋았던 덕택에 나는 그 많은 친구들보다 더 오래 살아남았다. 그러나 지난 밤 꿈 속 에서 이 친구들이 나에 대하여 이야기 하는 소리가 들렸다. “‘강한 자는 살아남는다.” 그러자 나는 자신이 미워졌다. 바로 이것이 독일의 유명한 극작가이자 연출가였던 브레히트의 시 「살아남은 자의 슬픔」이었다. 나는 서둘러 그의 일생을 더듬어 보고나서야 반세기도 더 지난 이 시기에, 그리고 이 좁디 좁은 이 땅에서 왜 그의 시가 다시금 인용되어야 했는지 깨달을 수 있었다. 브레히트의 일생은 화려한 당대나 후대의 찬사에도 불구하고 단적으로 표현하자면 부평초같이 떠다니며 살아온 한평생이었다. 그는 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자 조국의 부름을 받고 의무병으로 전쟁에 참가했다. 하지만 전쟁 직후, 문학계로 관심을 돌리고 독일에서 나치스의 활동이 시작되면서 그는 독일의 현실과 반대편에 서게 되고, 그로 인하여 1933년부터 오스트리아, 스위스, 덴마크, 러시아 등지로 떠돌게 되었다. 그리고 1941년, 마침내 미국으로 망명을 하게 된다. 하지만 그는 자유의 땅 미국에서도 정착할 수가 없었다. 1947년 비미활동위원회(非美活動委員會)의 탄압으로 다시 유럽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는 1948년 동독에 정착하였다가 1956년 베를린에서 파란만장한 삶을 마쳤다. 어찌 보면 브레히트의 일생은 뛰어난 예술적 명성만큼이나 깊은 굴곡과 상처로 얼룩진 삶이었으며 그는 이러한 자신의 상황을 ‘살아남은 자의 슬픔’으로 표현하였던 것이다. 그런데, 참으로 묘하게도 브레히트와 아주 비슷한 시기에, 비슷한 고뇌로 점철된 생을 살다간 문인 한 명이 이 땅에도 있음을 발견하였다. 그리고 놀랍게도 그 인물은 그동안 우리의 주변에 아주 가까이 존재해 오고 있었음을 알 수 있었다. “넓은 벌 동쪽 끝으로/ 옛이야기 지줄 대는 실개천이 휘돌아 나가고/ 얼룩 백이 황소가/ 해설 피 금빛 게으른 울음을 우는 곳 -.”이라는 익숙한 구절로 노래하고 있는 시, 향수(鄕愁)의 주인공 정지용이 바로 그였다. 1898년생인 브레히트는 그의 나이 20대 중반인 1922년 「한밤의 북소리」라는 작품을 통하여 연극계에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하였다. 그런데 정지용 또한 브레히트보다 4년 늦은 1902년 충북 옥천에서 태어나 그의 나이 스물다섯 되던 해인 1927년에 ‘향수’를 발표하였다. 그리고 브레히트가 조국 독일을 등지고 망명생활을 시작할 무렵에 정지용은 망명 아닌 망명의 길, 일본 유학길을 떠나 있었다. 하지만 이러한 우연은 말년에 이르러 약간의 차별성을 나타내게 된다. 즉, 미국으로부터 떠밀려 나온 브레히트는 동독에 정착하여 그 어떤 예술가도 일찍이 가져보지 못한 호사를 누리게 된다. 그는 연기자 60명, 의상담당자와 무대 디자이너, 음악가, 그리고 수십 명의 제작 보조를 포함한 총 250명의 인력을 거느리며 부러울 것 없는 극작가로서의 활동을 영위하였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정지용의 말년은 그러지를 못했다. 일본 도오시샤(同志社) 영문과를 졸업하고 돌아온 이후 그는 ‘시문학’ 동인, 이화여대 교수, 경향신문 주간 등을 역임하며 활발한 활동을 벌이기는 하였으나
1990년대 초반, 춤과 무대 이외에는 별다른 관심이 없던 나의 일상에 색다른 파경 하나 밀고 들어왔다. ‘오늘의 작가상’을 수상했다는 소설집 『살아남은 자의 슬픔』이라는 소설이었다. 지금의 기억으로도 당시 그 책은 종전의 히트를 기록할 만큼 세인들의 관심을 집중시켰다. 물론 ‘오늘의 작가상’이란 게 어떠한 의미를 담고 있으며 어떠한 결과물에 주어지는 것인지 지금도 내게는 명확한 기준이 없다. 하지만 돌이켜보건대, 뜬금없는 소문의 호기심처럼 박 일문 이라는 낯선 저자의 이름이 나의 뇌리에 박힐 만큼 그 책은 나의 일상을 적잖이 자극시켰다. 물론, 예나 지금이나 그 소설이 우리 역사의 깊은 상흔으로 자리하고 있는 1980년대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는 당시의 소개 글 때문만은 아니었다. 단지, 그 시대를 풍미했던 이데올로기적 방황과 사랑과 혼돈 에 해매이던 주인공의 나이가 20대라는 점에 있어 나와의 묘한 동질성을 불러 일으켰다. 분명히 나의 20대도 그 시기를 관통해 왔으며 그 사실 하나만으로도 무언가 모를 묵직한 부채를 짊어져야만 했던 것이 바로 당시의 20대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매케 한 최루탄 속에서 ‘군부독재 타도’나 ‘민주주의 쟁취’ 한 번 외쳐보지 못한 남루한 청춘에 대한 죄책감과 민망함이 나의 시선을 참으로 오래도록 괴롭혔던 기억으로 남아있다. 그런데 아니었다. 나의 진정한 죄스러움과 민망함은 그 책에 대한 기억이 아스라이 묻혀져 갈 무렵 다시금 새로운 모습으로 고개를 들었다. ‘살아남은 자의 슬픔’이라는 제목에서 묻어나던 처연함과 비극적 낭만이 나의 무지(無知)에 대한 부끄러움으로 다가온 것이다. 나는 미처 몰랐었다. ‘살아남은 자의 슬픔’이라는 글귀가 단순히 대한민국 땅의 어느 젊은 작가가 쏟아낸 시대적 절규가 아니라 이미 오래 전에 서구의 한 지식인이 스스로를 읊조렸던 고백성사였다는 사실을 말이다. 물론 나는 알고 있다. 오직 운이 좋았던 덕택에 나는 그 많은 친구들보다 더 오래 살아남았다. 그러나 지난 밤 꿈 속 에서 이 친구들이 나에 대하여 이야기 하는 소리가 들렸다. “‘강한 자는 살아남는다.” 그러자 나는 자신이 미워졌다. 바로 이것이 독일의 유명한 극작가이자 연출가였던 브레히트의 시 「살아남은 자의 슬픔」이었다. 나는 서둘러 그의 일생을 더듬어 보고나서야 반세기도 더 지난 이 시기에, 그리고 이 좁디 좁은 이 땅에서 왜 그의 시가 다시금 인용되어야 했는지 깨달을 수 있었다. 브레히트의 일생은 화려한 당대나 후대의 찬사에도 불구하고 단적으로 표현하자면 부평초같이 떠다니며 살아온 한평생이었다. 그는 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자 조국의 부름을 받고 의무병으로 전쟁에 참가했다. 하지만 전쟁 직후, 문학계로 관심을 돌리고 독일에서 나치스의 활동이 시작되면서 그는 독일의 현실과 반대편에 서게 되고, 그로 인하여 1933년부터 오스트리아, 스위스, 덴마크, 러시아 등지로 떠돌게 되었다. 그리고 1941년, 마침내 미국으로 망명을 하게 된다. 하지만 그는 자유의 땅 미국에서도 정착할 수가 없었다. 1947년 비미활동위원회(非美活動委員會)의 탄압으로 다시 유럽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는 1948년 동독에 정착하였다가 1956년 베를린에서 파란만장한 삶을 마쳤다. 어찌 보면 브레히트의 일생은 뛰어난 예술적 명성만큼이나 깊은 굴곡과 상처로 얼룩진 삶이었으며 그는 이러한 자신의 상황을 ‘살아남은 자의 슬픔’으로 표현하였던 것이다. 그런데, 참으로 묘하게도 브레히트와 아주 비슷한 시기에, 비슷한 고뇌로 점철된 생을 살다간 문인 한 명이 이 땅에도 있음을 발견하였다. 그리고 놀랍게도 그 인물은 그동안 우리의 주변에 아주 가까이 존재해 오고 있었음을 알 수 있었다. “넓은 벌 동쪽 끝으로/ 옛이야기 지줄 대는 실개천이 휘돌아 나가고/ 얼룩 백이 황소가/ 해설 피 금빛 게으른 울음을 우는 곳 -.”이라는 익숙한 구절로 노래하고 있는 시, 향수(鄕愁)의 주인공 정지용이 바로 그였다. 1898년생인 브레히트는 그의 나이 20대 중반인 1922년 「한밤의 북소리」라는 작품을 통하여 연극계에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하였다. 그런데 정지용 또한 브레히트보다 4년 늦은 1902년 충북 옥천에서 태어나 그의 나이 스물다섯 되던 해인 1927년에 ‘향수’를 발표하였다. 그리고 브레히트가 조국 독일을 등지고 망명생활을 시작할 무렵에 정지용은 망명 아닌 망명의 길, 일본 유학길을 떠나 있었다. 하지만 이러한 우연은 말년에 이르러 약간의 차별성을 나타내게 된다. 즉, 미국으로부터 떠밀려 나온 브레히트는 동독에 정착하여 그 어떤 예술가도 일찍이 가져보지 못한 호사를 누리게 된다. 그는 연기자 60명, 의상담당자와 무대 디자이너, 음악가, 그리고 수십 명의 제작 보조를 포함한 총 250명의 인력을 거느리며 부러울 것 없는 극작가로서의 활동을 영위하였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정지용의 말년은 그러지를 못했다. 일본 도오시샤(同志社) 영문과를 졸업하고 돌아온 이후 그는 ‘시문학’ 동인, 이화여대 교수, 경향신문 주간 등을 역임하며 활발한 활동을 벌이기는 하였으나
Jeong Ji-Yong is a poet who had lived in the Japanese Invasion period and the political chaos after the liberation, and vanished away during the Korean War. His poetry was filled with the grief and nostalgia for our mother land. His attachment to the native place was the most dramatic symbol of the ...
Jeong Ji-Yong is a poet who had lived in the Japanese Invasion period and the political chaos after the liberation, and vanished away during the Korean War. His poetry was filled with the grief and nostalgia for our mother land. His attachment to the native place was the most dramatic symbol of the nature itself and Taoistic Utopia. While he was alive, our land was full of gloominess caused by the worldwide imperialistic expansion and invasion. We could not speak our own language but also were forced to change our name to Japanese name. During such suppressing days, a poet's duty might have been very limited. His poetic words, concealing deep meaning from very polishing and meaningful language, express the love for the country and the resistance against the oppression. The Identity of a nation or a group is connected directly with its living culture. Especially the language is a key factor which delivers people's ideology and contains cultural and artistic values. His poem, 'Spring Snow' is the very example. This poem expresses human being's contemplation about the nature, where human being live an idle life, and the love for the nature. He regarded unusual spring Snow fall as not the target for elimination, but the acceptance and tolerance. Strictly speaking, however, he existed in nature itself. He required the spring and even snow fall so as to be unified with the Taoistic saint-like mother nature. At this moment, we have to look at the value and principal of dancing. In the beginning, dancing functioned as a rule and a code. The body movement in a formal way was the spiritual language that arouses sympathy. These ritual ceremonies were frequently finalized by the experience of lunatic "Ecstasy", that were the moment of one's unity with oneself, other's spirit and the God; the state of self-effacement and emancipation. On the other hand, similar ritual was deep self-withdrawal like Zen meditation. One can experience the state of being possessed of a spirit and self-effacement during the self-unification process with the universe. Korean Dancing contains these two methods consequently. Especially, it is in korean dancing language that the image of the contemplation and unification with nature, and the desire and hope for the life, as we read in "Spring Snow" can be expressed adequately. This poem's Oriental and Taoistic spirit have a thread of connection with Korean Dancing. So the Recreation of these literary works might be another creation of artistic idealism, which must be pursued constantly even in 21st century.
Jeong Ji-Yong is a poet who had lived in the Japanese Invasion period and the political chaos after the liberation, and vanished away during the Korean War. His poetry was filled with the grief and nostalgia for our mother land. His attachment to the native place was the most dramatic symbol of the nature itself and Taoistic Utopia. While he was alive, our land was full of gloominess caused by the worldwide imperialistic expansion and invasion. We could not speak our own language but also were forced to change our name to Japanese name. During such suppressing days, a poet's duty might have been very limited. His poetic words, concealing deep meaning from very polishing and meaningful language, express the love for the country and the resistance against the oppression. The Identity of a nation or a group is connected directly with its living culture. Especially the language is a key factor which delivers people's ideology and contains cultural and artistic values. His poem, 'Spring Snow' is the very example. This poem expresses human being's contemplation about the nature, where human being live an idle life, and the love for the nature. He regarded unusual spring Snow fall as not the target for elimination, but the acceptance and tolerance. Strictly speaking, however, he existed in nature itself. He required the spring and even snow fall so as to be unified with the Taoistic saint-like mother nature. At this moment, we have to look at the value and principal of dancing. In the beginning, dancing functioned as a rule and a code. The body movement in a formal way was the spiritual language that arouses sympathy. These ritual ceremonies were frequently finalized by the experience of lunatic "Ecstasy", that were the moment of one's unity with oneself, other's spirit and the God; the state of self-effacement and emancipation. On the other hand, similar ritual was deep self-withdrawal like Zen meditation. One can experience the state of being possessed of a spirit and self-effacement during the self-unification process with the universe. Korean Dancing contains these two methods consequently. Especially, it is in korean dancing language that the image of the contemplation and unification with nature, and the desire and hope for the life, as we read in "Spring Snow" can be expressed adequately. This poem's Oriental and Taoistic spirit have a thread of connection with Korean Dancing. So the Recreation of these literary works might be another creation of artistic idealism, which must be pursued constantly even in 21st centu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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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지용 춘설 자연주의 도가적 이미지 재해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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