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신경은 하나님에 대해 “전능하사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 아버지를 내가 믿사오며”라고 고백한다. 우리가 고백하고 있는 하나님은 전능하신 분이시고 천지를 만드신 분이시다. 이것은 천지 창조와 연관된 중요한 고백이다. 천지 창조와 관련해서 나라마다 종교마다 수많은 이야기들이 전해져오고 있고, 철학에서도 나름대로 우주의 기원에 대한 답변을 내놓으려고 노력했었다. 이 논문에서는 깔뱅 이전에 있었던 창조론의 종교적 철학적 큰 흐름을 살펴보고, 초기 기독교 교부들은 하나님의 천지창조에 대하여 어떻게 이해했는지 살펴본 이후에 깔뱅은 이런 사상과 생각들에 대하여 어떤 평가를 하였고, 하나님의 창조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했는지를 살펴보았다. Ⅱ장에서는 “이원론”과 “유출설” 그리고 교부들의 창조론을 살펴보았다. 간략히 말하자면, 모든 종교와 철학 사상의 창조론은 몇 가지 사상으로 귀결된다. 첫째는 “이원론”이다. 이것은 크게 두 축으로 볼 수 있는데 ...
사도신경은 하나님에 대해 “전능하사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 아버지를 내가 믿사오며”라고 고백한다. 우리가 고백하고 있는 하나님은 전능하신 분이시고 천지를 만드신 분이시다. 이것은 천지 창조와 연관된 중요한 고백이다. 천지 창조와 관련해서 나라마다 종교마다 수많은 이야기들이 전해져오고 있고, 철학에서도 나름대로 우주의 기원에 대한 답변을 내놓으려고 노력했었다. 이 논문에서는 깔뱅 이전에 있었던 창조론의 종교적 철학적 큰 흐름을 살펴보고, 초기 기독교 교부들은 하나님의 천지창조에 대하여 어떻게 이해했는지 살펴본 이후에 깔뱅은 이런 사상과 생각들에 대하여 어떤 평가를 하였고, 하나님의 창조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했는지를 살펴보았다. Ⅱ장에서는 “이원론”과 “유출설” 그리고 교부들의 창조론을 살펴보았다. 간략히 말하자면, 모든 종교와 철학 사상의 창조론은 몇 가지 사상으로 귀결된다. 첫째는 “이원론”이다. 이것은 크게 두 축으로 볼 수 있는데 플라톤의 철학과 같이 영적인 세계와 물질세계를 나누어 영적인 것을 영원하며 선하고 물질적인 것은 유한하며 악하다고 생각하는 사상과 고대 종교에서 찾아볼 수 있는 것처럼 이 세계를 선과 악의 대립 개념으로 나누어 생각하는 사상이다. 둘째는 “유출설”로 “이원론”을 극복하기 위한 “일원론”이다. 이것은 모든 존재의 근원이 되는 일자로부터 모든 것이 나왔다고 주장하는 사상으로 “범신론”의 모체가 된다. 초대 교부들은 앞서 말한 철학 사상들과 이단들에 대하여 하나님의 창조에 대하여 증거하려고 노력했는데, 그들의 철학 사조에 따라 그 형태가 다르게 나타났다. 먼저, 법을 중시하였던 서방 신학의 아버지 터툴리안은 하나님의 창조가 6일로 완결된 것으로 이해하였으며, 무로부터 창조를 주장하였다. 그는 법적인 관점에서 처음 창조는 아무런 문제가 없는 완결무결한 상태였으나 아담이 문제를 일으켜 죄라는 채무를 지게 되면서 문제가 생겼다고 보았고,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 사역으로 인해 인간과 하나님의 관계가 창조 이전 상태로 회복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반면 알렉산드리아 신학의 아버지라 불리운 오리겐은 기독교 신앙과 헬라 철학을 일치시키기 위해서 노력했다. 그는 플라톤 철학의 영향을 받아 하나님을 헬라 철학이 말하는 지고의 신, 일자로 이해하였으며, 말씀이신 그리스도를 일자와 세계 사이의 중간 매개자인 말씀으로 설명하려고 했다. 그는 창세기 1장과 2장 사이에 나타난 창조 기사를 근거로 영적인 세계와 물질세계로 나누어 이원적으로 생각하였다. 창세기 1장에 나타난 창조는 순수한 영들만 존재하는 시기였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교만해진 영들은 타락의 정도에 따라 천사, 인간, 마귀가 되었다. 하나님께서는 타락한 영들을 견책해서 구원하기 위해 창세기 2장에서 2차로 물질세계를 창조하셨다고 주장한다. 이 창조론은 종말론과 연결되어 만인구원설로 귀결된다. 오리겐의 주장은 제 2차 콘스탄티노플 공의회에서 이단으로 정죄 받는다. 한편 동방신학의 아버지라 불리운 이레니우스는 “통시적 창조론”을 주장했다. 그는 그리스도가 창세전부터 인간의 원형으로 이미 존재하고 계셨으며, 아담은 그리스도의 형상을 이루기 위해 창조되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터툴리안의 견해와 달리 아담의 형상은 완전한 하나님의 형상이 아니라 계속적인 성장을 통하여 그리스도의 형상에 이르는 존재로 창조되었다고 본다. 인간의 타락으로 인간의 원형이신 그리스도께서 인간의 죄 문제를 해결하고 창조의 목적을 완성하기 위해 이 땅에 오셨다. 그의 ‘선한 창조’와 ‘무로부터의 창조’에 대한 사상은 터툴리안에게 영향을 미쳤고, 그는 처음으로 삼위일체 하나님의 창조를 이야기하였다. Ⅲ장에서는 교부들과 어거스틴의 영향을 받았던 깔뱅의 창조론에 대하여 살펴보았다. 그는 별도로 창조론을 논하지는 않았지만 기독교의 정통교리에 따라 ‘삼위일체 하나님의 창조,’ 하나님의 ‘선한 창조,’ ‘무로부터의 창조,’ ‘영적인 존재들의 창조,’ 하나님의 형상으로서의 ‘인간 창조’에 대하여 이야기한다. 깔뱅은 삼위일체론을 논하면서 삼위 하나님의 창조에 대하여 이야기한다. 하나님의 창조는 일회적으로 그친 사역이 아니다. 하나님은 이신론에서 이야기하는 것과 달리 이 세계를 창조하신 이후에도 계속적으로 그 피조물들과 관계를 갖는 하나님이시다. 그는 섭리론과 연관하여 창조를 만물을 새롭게 하시는 계속적인 과정으로 보고 창조주 하나님의 주권을 강조한다. 그에게 있어 하나님은 섭리의 관점에서 자신이 창조하신 세계를 버려두시지 않으시고 지금까지도 이 세계를 돌보시고 역사를 주관하고 통치하시는 성부하나님이시다. 성부하나님은 창조의 직접적인 행위자로 일의 시초가 되시고 만물의 기초와 원천이 되신다. 그리고 지혜이시고 하나님의 말씀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창조 사역이후로 우리에게 구원을 주시는 구속 사역을 계속하시는 성자하나님이시다. 구약성경에서는 의인화된 지혜가 성자라고 명확하게 이야기하고 있지 않다. 하지만 깔뱅은 구약성경이 말하고 있는 지혜(잠언 8장)와 요한(요 1:1-3; 5:17)과 사도 바울(고전 1:21)의 말을 인용하여 성자가 명확하게 창조의 원리로서 지혜요, 계획이며, 만물을 질서 있게 배열하시는 분이라고 주장한다. 그리고 하나님의 본질적인 능력에 해당하시는 성령에 대하여는 “하나님의 영”이라는 표현이 “바람”이냐 “영”이냐 하는 논쟁이 있다. 하지만 깔뱅의 견해대로 “하나님의 영”은 처음 창조된 혼돈된 물질을 유지하시고, 질서를 부여하실 뿐만 아니라 지금도 계속적으로 피조물을 새롭게 재창조하시는 성령 하나님이시라고 본다. 깔뱅은 이 삼위 하나님께서 세계를 창조하실 때에 ‘무로부터 창조’하셨다고 주장한다. ‘무로부터의 창조’에 대하여 성경은 명확하게 이야기하고 있지 않다. 성경에 나타난 창조 기사는 ‘무로부터의 창조’에 관심이 있는 것이 아니라 고대 근동지역의 신화적 요소들을 배격하려는 의도를 담고 있다고 보여진다. 그러나 “바라”라는 말의 용례를 볼 때 ‘무로부터의 창조’는 타당한 주장이 된다. 깔뱅 역시 『창세기주석』에서 ‘바라’와 ‘야차르’에 대해 언급하며 ‘무로부터의 창조’를 주장한다. 고대 근동 창조 이야기는 이원론에 근거하여 대립관계에 있지만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에 전적으로 순종하여 창조되는 모습을 보여준다. 깔뱅은 철학자들이나 다른 종교에서 말하는 것처럼 인간의 사색을 통하여는 하나님의 창조행위를 살필 수 없기 때문에 호기심에 의해서가 아니라 성경에 의해서 창조를 생각해야 한다고 이야기한다. 워필드는 깔뱅의 “온 세상의 씨앗(the seed of the whole world)”이라는 말에서 진화론을 이야기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깔뱅은 섭리의 차원에서 계속적인 창조를 이야기하는 것으로 과학에서 이야기하는 진화를 이야기한다고 보기는 힘들다. 깔뱅은 6일 사역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선하심을 이야기한다. 그는 오리겐과 달리 창세기 1장과 2장이 다른 관점에서 기록된 것이 아님을 2장 1절 주석에서 강조한다. 그는 하나님께서 모든 점에서 완전해질 때까지 세계를 계속 창조하셨기 때문에, 부족함이 없는 완전한 상태에서 “천지와 만물이 다 이루니라”(창 2:1)고 기록했다고 강조한다. 하나님께서 6일 창조를 통해 세계를 완전하게 만드신 이유는 인간에게 완전한 것을 주시기 위한 하나님의 부성적인 사랑 때문이었다. 깔뱅은 하나님께서 한 순간에 모든 것을 창조하시지 않고 6일에 걸쳐서 창조하신 이유는 우리가 하나님의 창조 사역을 보다 쉽게 묵상하도록 하기 위해서였고, 또한 완전한 세계를 선물로 주신 하나님은 사람을 만물의 영장으로 만드시고 그들의 후손에 이르기까지 피조물을 다스리는 권세까지도 주셨다고 주장한다. 깔뱅은 6일 창조의 기록에서 두 가지를 강조한다. 첫째는 우리가 하나님의 아버지로서의 자비와 사랑을 배우고 경건한 마음으로 감사하는 것이고, 둘째는 창조자 하나님 외에 어떤 다른 우상 신이나 잡신들을 생각하지 말라는 것이다. 깔뱅은 6일 간의 창조를 통하여 6일 동안 창조된 피조물이 아니라, 그 피조물들을 창조하신 하나님에 대하여 집중하고, 창조주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신 목적에 대하여 집중하고 있다. 깔뱅은 하나님의 창조에 대하여 영적인 존재들, 즉 천사와 마귀에 대하여도 이야기한다. 깔뱅이 말하는 천사론과 마귀론은 신앙적인 면에서 많은 유익을 준다. 깔뱅의 말에 의하면 먼저 천사는 하나님과 같은 영광을 받을 수 없는 하나님의 봉사자로 창조된 피조물이지 신성을 소유한 존재는 아니다. 그리고 천사는 하늘의 영으로서 하나님이 작정하신 바를 수행하는 존재요,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자신을 계시하기 위한 중재의 사자로 사용하는 존재이다. 천사는 많은 명칭을 가지고 있지만, 천사의 궁극적인 역할은 신자를 보호하며 돕는 역할로 그들은 우리를 보호하기 위해서 마귀와 우리의 모든 원수들을 대항하여 싸우며 하나님의 보복을 수행하는 존재이다. 하나님께서는 천사들을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를 위해서 사용하신다고 깔뱅은 주장한다. 그리고 깔뱅은 성경이 마귀에 대해 가르치는 의도가 우리들을 깨우쳐 그들의 술책과 계략을 경계하며, 이들 강력한 원수들을 정복하기에 충분한 힘이 있고 강한 무기로 우리를 무장시키기 위해서라고 주장한다. 그에 의하면 마귀의 사역은 하나님의 영광을 박탈하고, 우리가 구원에 이르지 못하도록 방해하는 것이다. 그러나 마귀 역시 천사와 마찬가지로 실재적인 존재이지만 피조물일 뿐이고 하나님의 권능 아래 있다는 것을 강조한다. 그에 의하면 사탄은 타락하여 하나님과 반목하는 차원에서 자신의 사악한 의지로 하나님께 순종하지 않고 반항하며 자발적인 행동을 하기 때문에 죄의 책임을 하나님께 전가해서는 안 된다. 그러나 성경은 그때조차도 하나님의 의지와 허락 없이 사탄이 마음대로 행동할 수 없는 존재로 결국 하나님께 순종하게 되는 타락한 피조물일 뿐이라고 주장한다. 깔뱅은 비록 신자들이 마귀의 존재로 말미암아 마음의 불안을 갖게 되고, 피곤하게 되고, 상처를 입기도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저들을 사용하여 하나님의 자녀들을 훈련시키신다고 주장한다. 그에 의하면 신자들은 사탄에게 정복되거나 압도당할 수 없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는 죽으심으로써 “사망의 세력”을 잡은 사탄을 정복하셨으며(히 2:14), 교회를 해하지 못하도록 사탄의 모든 세력을 이미 타파하셨기 때문이다. 깔뱅은 인간창조에 대하여 인간은 고귀한 존재이며, 하나님의 피조물이고, 하나님을 의존할 수밖에 없는 존재라고 강조한다. 그에 의하면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만물을 창조하셨지만 사람을 창조하실 때에는 명령하신 것이 아니라 상의하셨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인간을 가장 존귀하게 여기셨다는 증거이다. 인간 창조가 단순히 창조의 일부분이 아니라 창조의 완성으로 인간은 하나님의 모든 창조물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의, 지혜, 선을 보여주는 가장 고귀하고 두드러진 표본으로 하나님과 소통하고, 교제하는 존재로, 이 세상을 다스리는 존재로 지음 받았다. 그러나 인간이 다른 피조물과 달리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았지만, 어느 누구도 자신의 육신을 지나치게 자랑하지 못하도록 그 코에 생기를 불어넣어주시기까지 인간은 완전한 존재가 아니었다고 그는 강조한다. 인간은 오직 하나님의 관대하심 안에서만 영광스러운 존재가 되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육체와 영혼으로 창조하셨다. 마니교와 세르베투스의 주장은 영혼이 하나님으로부터 유출되었다는 것이지만 깔뱅은 이를 강력하게 비판하며 육체뿐만 아니라 영혼도 하나님의 창조물임을 강조했다. 깔뱅은 인간 창조를 세 단계로 설명하는데, 첫째는 인간의 죽은 몸은 땅의 먼지로 지음을 받았고, 둘째로 생기를 부여받아 생명력 있는 동작을 하게 되었고, 셋째로 하나님께서 인간의 영혼에 자신의 형상을 새겨 놓으시고 거기에 불멸성을 부여하셨다는 것이다. 그에 의하면 인간이 영혼과 육체로 되어있는 것은 분명하지만 하나님의 형상이 새겨져 있는 것은 육체가 아니라 영혼이다. 양심은 불멸의 영이 있다는 의심할 수 없는 증거로 육체가 영혼에게만 내려지는 영적인 형벌을 두려워하게 만든다. 깔뱅은 인간이 미래에 대한 예감을 암시하는 것으로 보아 영이 틀림없이 ‘지성의 좌소’라고 주장한다. 깔뱅은 ‘영’은 육체의 모든 부분에 생기를 넣어주는 기능을 하고, 더 나아가 하나님을 예배하도록 자극하는 기능을 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하나님은 인간을 ‘종교의 씨앗’이 내포된 존재로 만드셨기 때문에 인간은 의를 함양하도록 태어나 천상의 생활을 명상하는데, 이 모든 지식이 바로 영혼에 새겨져 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형상은 영혼의 내적 선이라고 주장한다. 깔뱅에 의하면 하나님의 형상은 영적인 것으로 타락하기 이전에 완전한 영혼을 소유했던 아담에게서만 볼 수 있다. 그는 그리스도를 통하여 타락으로 말미암아 무섭도록 추하게 변질된 하나님의 형상을 완전한 본래의 모습으로 회복시키신다는 관점에서 그리스도는 제2의 아담으로 불린다고 주장한다. 그는 우리가 하나님의 가장 완전한 형상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것을 통해, 우리도 참된 경건, 의, 순결, 지성에 이르기까지 하나님의 형상을 다시 온전히 회복할 수 있다고 보았다. 스토페르는 깔뱅의 창조론을 궁극목적론으로 보고 모든 것이 인간을 위한 것이라 평가했다. 그러나 이오갑은 스토페르와는 정반대로 깔뱅의 궁극목적론이 첫째는 인간을 사랑하신 하나님을 더 의지하고 따라야 한다는 것이고, 둘째는 자연에 대한 인간의 책임, 즉 인간의 우월성과 특권과 함께 항상 자연에 대한 올바른 사용과 보존이라는 책임을 강조한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이수영은 스토페르와 깔뱅의 인간에 대한 견해 차이를 정확하게 지적한다. 스토페르와 인문주의자들은 타락한 인간에 대해 긍정적으로 보지만, 깔뱅은 타락한 인간의 비참한 현실은 직시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요약하면 스토페르는 깔뱅이 말하는 인간은 처음 창조된 타락하기 이전의 완전한 인간의 모습과 타락한 이후의 비참한 인간에 대한 이중 지식을 깨닫지 못하고 인간 중심적으로 말하고 있지만, 깔뱅은 그의 창조론을 통하여 하나님은 인간을 사랑하셔서 세계를 완전하게 창조하시고 모든 것을 인간에게 맡겨주셨지만, 그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이며 인간은 청지기일 뿐이라는 것이다. 모든 것은 하나님의 것으로 인간에게는 모든 것을 누릴 권한과 함께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사용해야할 윤리적, 실천적 책임이 있다고 강조한다. 오늘날 기독교 비판적 환경론자들은 창세기 1장 26~28절이 자연의 파괴를 합리화해주는 구절이라고 보았다. 기독교가 이 구절을, 자연을 정복하고 파괴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이라고 이해했다고 생각한다. 하나님의 형상으로서의 인간상은 “땅을 정복하라”(창 1:28)는 명령과 맞물려 자연에 대한 인간의 착취를 정당화시켜 주는 구절로 오해되어 왔다. 이 오해에 대해 깔뱅의 인간중심적 창조론이 함께 하고 있다는 것을 부정할 수는 없다. 하지만 김도훈과 이오갑은 오히려 깔뱅의 창조론이 오늘날 생태신학에게 영향을 줄 수 있다고 평가한다. 깔뱅인 말한 “정복”의 개념은 공격적이고 전투적인 개념이 아니라 “양육”의 개념이라고 평가한다. 그들은 깔뱅의 창조론을 신중심적이고 예수 그리스도의 회복을 중심으로 모든 자연과 우주의 회복을 이야기하고 있다고 보았다.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어진 우월한 존재이기는 하지만, 인간 역시 자연과 마찬가지로 피조물일 뿐이고 자연과 공생하도록 지어진 존재이다. 그리고 인간은 자연의 지배자가 아닌 하나님의 청지기로서 책임과 사명을 감당해야하는 존재이다. 자연의 회복을 감당하기 위해서 더 중요한 점은, 인간은 타락한 존재로 본질적으로 변화되어야 하는 존재인데 이것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만 가능하다는 것이다.
사도신경은 하나님에 대해 “전능하사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 아버지를 내가 믿사오며”라고 고백한다. 우리가 고백하고 있는 하나님은 전능하신 분이시고 천지를 만드신 분이시다. 이것은 천지 창조와 연관된 중요한 고백이다. 천지 창조와 관련해서 나라마다 종교마다 수많은 이야기들이 전해져오고 있고, 철학에서도 나름대로 우주의 기원에 대한 답변을 내놓으려고 노력했었다. 이 논문에서는 깔뱅 이전에 있었던 창조론의 종교적 철학적 큰 흐름을 살펴보고, 초기 기독교 교부들은 하나님의 천지창조에 대하여 어떻게 이해했는지 살펴본 이후에 깔뱅은 이런 사상과 생각들에 대하여 어떤 평가를 하였고, 하나님의 창조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했는지를 살펴보았다. Ⅱ장에서는 “이원론”과 “유출설” 그리고 교부들의 창조론을 살펴보았다. 간략히 말하자면, 모든 종교와 철학 사상의 창조론은 몇 가지 사상으로 귀결된다. 첫째는 “이원론”이다. 이것은 크게 두 축으로 볼 수 있는데 플라톤의 철학과 같이 영적인 세계와 물질세계를 나누어 영적인 것을 영원하며 선하고 물질적인 것은 유한하며 악하다고 생각하는 사상과 고대 종교에서 찾아볼 수 있는 것처럼 이 세계를 선과 악의 대립 개념으로 나누어 생각하는 사상이다. 둘째는 “유출설”로 “이원론”을 극복하기 위한 “일원론”이다. 이것은 모든 존재의 근원이 되는 일자로부터 모든 것이 나왔다고 주장하는 사상으로 “범신론”의 모체가 된다. 초대 교부들은 앞서 말한 철학 사상들과 이단들에 대하여 하나님의 창조에 대하여 증거하려고 노력했는데, 그들의 철학 사조에 따라 그 형태가 다르게 나타났다. 먼저, 법을 중시하였던 서방 신학의 아버지 터툴리안은 하나님의 창조가 6일로 완결된 것으로 이해하였으며, 무로부터 창조를 주장하였다. 그는 법적인 관점에서 처음 창조는 아무런 문제가 없는 완결무결한 상태였으나 아담이 문제를 일으켜 죄라는 채무를 지게 되면서 문제가 생겼다고 보았고,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 사역으로 인해 인간과 하나님의 관계가 창조 이전 상태로 회복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반면 알렉산드리아 신학의 아버지라 불리운 오리겐은 기독교 신앙과 헬라 철학을 일치시키기 위해서 노력했다. 그는 플라톤 철학의 영향을 받아 하나님을 헬라 철학이 말하는 지고의 신, 일자로 이해하였으며, 말씀이신 그리스도를 일자와 세계 사이의 중간 매개자인 말씀으로 설명하려고 했다. 그는 창세기 1장과 2장 사이에 나타난 창조 기사를 근거로 영적인 세계와 물질세계로 나누어 이원적으로 생각하였다. 창세기 1장에 나타난 창조는 순수한 영들만 존재하는 시기였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교만해진 영들은 타락의 정도에 따라 천사, 인간, 마귀가 되었다. 하나님께서는 타락한 영들을 견책해서 구원하기 위해 창세기 2장에서 2차로 물질세계를 창조하셨다고 주장한다. 이 창조론은 종말론과 연결되어 만인구원설로 귀결된다. 오리겐의 주장은 제 2차 콘스탄티노플 공의회에서 이단으로 정죄 받는다. 한편 동방신학의 아버지라 불리운 이레니우스는 “통시적 창조론”을 주장했다. 그는 그리스도가 창세전부터 인간의 원형으로 이미 존재하고 계셨으며, 아담은 그리스도의 형상을 이루기 위해 창조되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터툴리안의 견해와 달리 아담의 형상은 완전한 하나님의 형상이 아니라 계속적인 성장을 통하여 그리스도의 형상에 이르는 존재로 창조되었다고 본다. 인간의 타락으로 인간의 원형이신 그리스도께서 인간의 죄 문제를 해결하고 창조의 목적을 완성하기 위해 이 땅에 오셨다. 그의 ‘선한 창조’와 ‘무로부터의 창조’에 대한 사상은 터툴리안에게 영향을 미쳤고, 그는 처음으로 삼위일체 하나님의 창조를 이야기하였다. Ⅲ장에서는 교부들과 어거스틴의 영향을 받았던 깔뱅의 창조론에 대하여 살펴보았다. 그는 별도로 창조론을 논하지는 않았지만 기독교의 정통교리에 따라 ‘삼위일체 하나님의 창조,’ 하나님의 ‘선한 창조,’ ‘무로부터의 창조,’ ‘영적인 존재들의 창조,’ 하나님의 형상으로서의 ‘인간 창조’에 대하여 이야기한다. 깔뱅은 삼위일체론을 논하면서 삼위 하나님의 창조에 대하여 이야기한다. 하나님의 창조는 일회적으로 그친 사역이 아니다. 하나님은 이신론에서 이야기하는 것과 달리 이 세계를 창조하신 이후에도 계속적으로 그 피조물들과 관계를 갖는 하나님이시다. 그는 섭리론과 연관하여 창조를 만물을 새롭게 하시는 계속적인 과정으로 보고 창조주 하나님의 주권을 강조한다. 그에게 있어 하나님은 섭리의 관점에서 자신이 창조하신 세계를 버려두시지 않으시고 지금까지도 이 세계를 돌보시고 역사를 주관하고 통치하시는 성부하나님이시다. 성부하나님은 창조의 직접적인 행위자로 일의 시초가 되시고 만물의 기초와 원천이 되신다. 그리고 지혜이시고 하나님의 말씀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창조 사역이후로 우리에게 구원을 주시는 구속 사역을 계속하시는 성자하나님이시다. 구약성경에서는 의인화된 지혜가 성자라고 명확하게 이야기하고 있지 않다. 하지만 깔뱅은 구약성경이 말하고 있는 지혜(잠언 8장)와 요한(요 1:1-3; 5:17)과 사도 바울(고전 1:21)의 말을 인용하여 성자가 명확하게 창조의 원리로서 지혜요, 계획이며, 만물을 질서 있게 배열하시는 분이라고 주장한다. 그리고 하나님의 본질적인 능력에 해당하시는 성령에 대하여는 “하나님의 영”이라는 표현이 “바람”이냐 “영”이냐 하는 논쟁이 있다. 하지만 깔뱅의 견해대로 “하나님의 영”은 처음 창조된 혼돈된 물질을 유지하시고, 질서를 부여하실 뿐만 아니라 지금도 계속적으로 피조물을 새롭게 재창조하시는 성령 하나님이시라고 본다. 깔뱅은 이 삼위 하나님께서 세계를 창조하실 때에 ‘무로부터 창조’하셨다고 주장한다. ‘무로부터의 창조’에 대하여 성경은 명확하게 이야기하고 있지 않다. 성경에 나타난 창조 기사는 ‘무로부터의 창조’에 관심이 있는 것이 아니라 고대 근동지역의 신화적 요소들을 배격하려는 의도를 담고 있다고 보여진다. 그러나 “바라”라는 말의 용례를 볼 때 ‘무로부터의 창조’는 타당한 주장이 된다. 깔뱅 역시 『창세기주석』에서 ‘바라’와 ‘야차르’에 대해 언급하며 ‘무로부터의 창조’를 주장한다. 고대 근동 창조 이야기는 이원론에 근거하여 대립관계에 있지만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에 전적으로 순종하여 창조되는 모습을 보여준다. 깔뱅은 철학자들이나 다른 종교에서 말하는 것처럼 인간의 사색을 통하여는 하나님의 창조행위를 살필 수 없기 때문에 호기심에 의해서가 아니라 성경에 의해서 창조를 생각해야 한다고 이야기한다. 워필드는 깔뱅의 “온 세상의 씨앗(the seed of the whole world)”이라는 말에서 진화론을 이야기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깔뱅은 섭리의 차원에서 계속적인 창조를 이야기하는 것으로 과학에서 이야기하는 진화를 이야기한다고 보기는 힘들다. 깔뱅은 6일 사역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선하심을 이야기한다. 그는 오리겐과 달리 창세기 1장과 2장이 다른 관점에서 기록된 것이 아님을 2장 1절 주석에서 강조한다. 그는 하나님께서 모든 점에서 완전해질 때까지 세계를 계속 창조하셨기 때문에, 부족함이 없는 완전한 상태에서 “천지와 만물이 다 이루니라”(창 2:1)고 기록했다고 강조한다. 하나님께서 6일 창조를 통해 세계를 완전하게 만드신 이유는 인간에게 완전한 것을 주시기 위한 하나님의 부성적인 사랑 때문이었다. 깔뱅은 하나님께서 한 순간에 모든 것을 창조하시지 않고 6일에 걸쳐서 창조하신 이유는 우리가 하나님의 창조 사역을 보다 쉽게 묵상하도록 하기 위해서였고, 또한 완전한 세계를 선물로 주신 하나님은 사람을 만물의 영장으로 만드시고 그들의 후손에 이르기까지 피조물을 다스리는 권세까지도 주셨다고 주장한다. 깔뱅은 6일 창조의 기록에서 두 가지를 강조한다. 첫째는 우리가 하나님의 아버지로서의 자비와 사랑을 배우고 경건한 마음으로 감사하는 것이고, 둘째는 창조자 하나님 외에 어떤 다른 우상 신이나 잡신들을 생각하지 말라는 것이다. 깔뱅은 6일 간의 창조를 통하여 6일 동안 창조된 피조물이 아니라, 그 피조물들을 창조하신 하나님에 대하여 집중하고, 창조주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신 목적에 대하여 집중하고 있다. 깔뱅은 하나님의 창조에 대하여 영적인 존재들, 즉 천사와 마귀에 대하여도 이야기한다. 깔뱅이 말하는 천사론과 마귀론은 신앙적인 면에서 많은 유익을 준다. 깔뱅의 말에 의하면 먼저 천사는 하나님과 같은 영광을 받을 수 없는 하나님의 봉사자로 창조된 피조물이지 신성을 소유한 존재는 아니다. 그리고 천사는 하늘의 영으로서 하나님이 작정하신 바를 수행하는 존재요,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자신을 계시하기 위한 중재의 사자로 사용하는 존재이다. 천사는 많은 명칭을 가지고 있지만, 천사의 궁극적인 역할은 신자를 보호하며 돕는 역할로 그들은 우리를 보호하기 위해서 마귀와 우리의 모든 원수들을 대항하여 싸우며 하나님의 보복을 수행하는 존재이다. 하나님께서는 천사들을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를 위해서 사용하신다고 깔뱅은 주장한다. 그리고 깔뱅은 성경이 마귀에 대해 가르치는 의도가 우리들을 깨우쳐 그들의 술책과 계략을 경계하며, 이들 강력한 원수들을 정복하기에 충분한 힘이 있고 강한 무기로 우리를 무장시키기 위해서라고 주장한다. 그에 의하면 마귀의 사역은 하나님의 영광을 박탈하고, 우리가 구원에 이르지 못하도록 방해하는 것이다. 그러나 마귀 역시 천사와 마찬가지로 실재적인 존재이지만 피조물일 뿐이고 하나님의 권능 아래 있다는 것을 강조한다. 그에 의하면 사탄은 타락하여 하나님과 반목하는 차원에서 자신의 사악한 의지로 하나님께 순종하지 않고 반항하며 자발적인 행동을 하기 때문에 죄의 책임을 하나님께 전가해서는 안 된다. 그러나 성경은 그때조차도 하나님의 의지와 허락 없이 사탄이 마음대로 행동할 수 없는 존재로 결국 하나님께 순종하게 되는 타락한 피조물일 뿐이라고 주장한다. 깔뱅은 비록 신자들이 마귀의 존재로 말미암아 마음의 불안을 갖게 되고, 피곤하게 되고, 상처를 입기도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저들을 사용하여 하나님의 자녀들을 훈련시키신다고 주장한다. 그에 의하면 신자들은 사탄에게 정복되거나 압도당할 수 없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는 죽으심으로써 “사망의 세력”을 잡은 사탄을 정복하셨으며(히 2:14), 교회를 해하지 못하도록 사탄의 모든 세력을 이미 타파하셨기 때문이다. 깔뱅은 인간창조에 대하여 인간은 고귀한 존재이며, 하나님의 피조물이고, 하나님을 의존할 수밖에 없는 존재라고 강조한다. 그에 의하면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만물을 창조하셨지만 사람을 창조하실 때에는 명령하신 것이 아니라 상의하셨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인간을 가장 존귀하게 여기셨다는 증거이다. 인간 창조가 단순히 창조의 일부분이 아니라 창조의 완성으로 인간은 하나님의 모든 창조물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의, 지혜, 선을 보여주는 가장 고귀하고 두드러진 표본으로 하나님과 소통하고, 교제하는 존재로, 이 세상을 다스리는 존재로 지음 받았다. 그러나 인간이 다른 피조물과 달리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았지만, 어느 누구도 자신의 육신을 지나치게 자랑하지 못하도록 그 코에 생기를 불어넣어주시기까지 인간은 완전한 존재가 아니었다고 그는 강조한다. 인간은 오직 하나님의 관대하심 안에서만 영광스러운 존재가 되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육체와 영혼으로 창조하셨다. 마니교와 세르베투스의 주장은 영혼이 하나님으로부터 유출되었다는 것이지만 깔뱅은 이를 강력하게 비판하며 육체뿐만 아니라 영혼도 하나님의 창조물임을 강조했다. 깔뱅은 인간 창조를 세 단계로 설명하는데, 첫째는 인간의 죽은 몸은 땅의 먼지로 지음을 받았고, 둘째로 생기를 부여받아 생명력 있는 동작을 하게 되었고, 셋째로 하나님께서 인간의 영혼에 자신의 형상을 새겨 놓으시고 거기에 불멸성을 부여하셨다는 것이다. 그에 의하면 인간이 영혼과 육체로 되어있는 것은 분명하지만 하나님의 형상이 새겨져 있는 것은 육체가 아니라 영혼이다. 양심은 불멸의 영이 있다는 의심할 수 없는 증거로 육체가 영혼에게만 내려지는 영적인 형벌을 두려워하게 만든다. 깔뱅은 인간이 미래에 대한 예감을 암시하는 것으로 보아 영이 틀림없이 ‘지성의 좌소’라고 주장한다. 깔뱅은 ‘영’은 육체의 모든 부분에 생기를 넣어주는 기능을 하고, 더 나아가 하나님을 예배하도록 자극하는 기능을 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하나님은 인간을 ‘종교의 씨앗’이 내포된 존재로 만드셨기 때문에 인간은 의를 함양하도록 태어나 천상의 생활을 명상하는데, 이 모든 지식이 바로 영혼에 새겨져 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형상은 영혼의 내적 선이라고 주장한다. 깔뱅에 의하면 하나님의 형상은 영적인 것으로 타락하기 이전에 완전한 영혼을 소유했던 아담에게서만 볼 수 있다. 그는 그리스도를 통하여 타락으로 말미암아 무섭도록 추하게 변질된 하나님의 형상을 완전한 본래의 모습으로 회복시키신다는 관점에서 그리스도는 제2의 아담으로 불린다고 주장한다. 그는 우리가 하나님의 가장 완전한 형상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것을 통해, 우리도 참된 경건, 의, 순결, 지성에 이르기까지 하나님의 형상을 다시 온전히 회복할 수 있다고 보았다. 스토페르는 깔뱅의 창조론을 궁극목적론으로 보고 모든 것이 인간을 위한 것이라 평가했다. 그러나 이오갑은 스토페르와는 정반대로 깔뱅의 궁극목적론이 첫째는 인간을 사랑하신 하나님을 더 의지하고 따라야 한다는 것이고, 둘째는 자연에 대한 인간의 책임, 즉 인간의 우월성과 특권과 함께 항상 자연에 대한 올바른 사용과 보존이라는 책임을 강조한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이수영은 스토페르와 깔뱅의 인간에 대한 견해 차이를 정확하게 지적한다. 스토페르와 인문주의자들은 타락한 인간에 대해 긍정적으로 보지만, 깔뱅은 타락한 인간의 비참한 현실은 직시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요약하면 스토페르는 깔뱅이 말하는 인간은 처음 창조된 타락하기 이전의 완전한 인간의 모습과 타락한 이후의 비참한 인간에 대한 이중 지식을 깨닫지 못하고 인간 중심적으로 말하고 있지만, 깔뱅은 그의 창조론을 통하여 하나님은 인간을 사랑하셔서 세계를 완전하게 창조하시고 모든 것을 인간에게 맡겨주셨지만, 그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이며 인간은 청지기일 뿐이라는 것이다. 모든 것은 하나님의 것으로 인간에게는 모든 것을 누릴 권한과 함께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사용해야할 윤리적, 실천적 책임이 있다고 강조한다. 오늘날 기독교 비판적 환경론자들은 창세기 1장 26~28절이 자연의 파괴를 합리화해주는 구절이라고 보았다. 기독교가 이 구절을, 자연을 정복하고 파괴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이라고 이해했다고 생각한다. 하나님의 형상으로서의 인간상은 “땅을 정복하라”(창 1:28)는 명령과 맞물려 자연에 대한 인간의 착취를 정당화시켜 주는 구절로 오해되어 왔다. 이 오해에 대해 깔뱅의 인간중심적 창조론이 함께 하고 있다는 것을 부정할 수는 없다. 하지만 김도훈과 이오갑은 오히려 깔뱅의 창조론이 오늘날 생태신학에게 영향을 줄 수 있다고 평가한다. 깔뱅인 말한 “정복”의 개념은 공격적이고 전투적인 개념이 아니라 “양육”의 개념이라고 평가한다. 그들은 깔뱅의 창조론을 신중심적이고 예수 그리스도의 회복을 중심으로 모든 자연과 우주의 회복을 이야기하고 있다고 보았다.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어진 우월한 존재이기는 하지만, 인간 역시 자연과 마찬가지로 피조물일 뿐이고 자연과 공생하도록 지어진 존재이다. 그리고 인간은 자연의 지배자가 아닌 하나님의 청지기로서 책임과 사명을 감당해야하는 존재이다. 자연의 회복을 감당하기 위해서 더 중요한 점은, 인간은 타락한 존재로 본질적으로 변화되어야 하는 존재인데 이것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만 가능하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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