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 논문은 대한민국 태권도에 관한 역사연구이다. 최근 태권도에 대하여 다양한 역사연구가 이루어지고 있으나 태권도시범 史에 관한 연구는 매우 미흡한 것이 사실이다. 실제 다양한 태권도史 연구는 우리나라의 국기 태권도에 대한 실증적 역사 자료로서 그 의미가 매우 높다. 우리 고유의 전통 맨손 무예인 태권도는 현재 경기스포츠로 발전하여 올림픽정식종목으로 채택되어졌으며 이와 더불어 한국을 대표하는 문화콘텐츠로 더욱 굳건히 자리매김 하고 있다. 이러한 태권도의 발전에는 태권도의 우수성을 신기에 가까운 기술로 전 세계인의 감탄과 감동을 불러일으킨 태권도시범이 그 기저의 중심에 위치하고 있었다. 따라서 본 연구는 태권도 시범의 중요한 역사적 사실을 체계적으로 기술하고 그 의미를 고찰하여 미래 태권도 시범의 새로운 방향을 제시하는데 연구의 목적이 있다.
이러한 연구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본 연구는 문헌연구, 심층면담, 초점집단 연구, 영상자료 및 사진자료 등을 통해 분석하였으며, 이 같은 연구방법을 통해 태권도시범이 세계화되는 전개 과정을 연구하였다. 또한 본 연구를 체계적으로 정리하기 위해 태권도시범의 역사를 세시기로 구분하여 연구하였다. 1959년 베트남과 대만의 해외파견 최초 태권도시범을 시작으로 세계태권도연맹이 창설되고 태권도의 홍보가 시작되던 최초의 시기, 제83차 IOC총회 이후 정식경기종목으로 승인, ‘88 서울올림픽대회’ 최초의 시범종목으로 채택된 역사적 시기, 2000년 시드니올림픽대회에서 태권도가 최초의 올림픽정식종목으로 채택되어졌으며 지금까지 태권도시범이 세계화의 전개 과정을 형성하는 시기를 구분하여 연구하였다. 이와 같은 요인들을 중심으로 태권도시범의 세계화 전개 과정을 분석, 해석한 결과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릴 수 있었다.
첫째, 최초의 해외 태권도시범은 다음과 같다. 1959년 3월 12일 21명으로 구성된 국군 태권도시범단이 베트남 고딘디엠 대통령의 초청으로 베트남과 대만을 기점으로 태권도시범은 최초 시작되어졌다. 그 후 1963년 대한태수도협회의 태권도친선사절단 선수 15명이 일본을 순방하여 시범을 보였고, 1965년 국무회의에서 18개국을 순회하며 태권도시범을 보일 대한태권도협회 태권도친선사절단 파견을 의결하면서, 본격적인 민간부분에 대한 정부차원의 최초 파견이 이루어졌다. 이는 대한민국 민간외교 분야의 새로운 장을 여는 계기가 되었다. 1965년 1월 15일 최홍희가 대한태수도협회 제3대 회장으로 취임을 한 후 1965년 8월 5일 대한태권도협회로 명칭을 재 개칭 하여 대한태권도협회 소속으로 활동해오던 태권도친선사절단이 국기원으로 이관되기 전인 1980년 까지, 이들은 태권도시범을 통해 한국 문화의 위상을 높이는데 크게 기여 하게 된다. 또한 1967년 창단하여 1979년 8월 폐교 된 남대문초등학교가 초창기 어린이 태권도 시범단으로 활약하며 국내의 각종 행사는 물론 외국을 순회하며 해외에서 국위선양을 해왔다. 그리고 1973년 3월에 창단된 미동초등학교 어린이 태권도 시범단은 1978년 제1회 전국어린이 태권도시범대회에서 최우수상을 수상하였으며, 수상이후 각국 스포츠관계자 및 IOC 위원들과 국빈 방문 시 태권도시범을 선보였으며, 특히 IOC 사마란치 위원장과 영국 엘리자베스 여왕의 내한 시 보여준 태권도시범을 비롯하여 국내·외 태권도시범을 통해 전 세계에 한국 태권도 문화를 세계에 과시하며 국위를 선양해왔다.
둘째, 태권도시범을 도약시킨 결정적 시기는 다음과 같다. 대한태권도협회에서 비 구조화된 태권도 시범단을 국기원에서 태권도 시범단을 공식적으로 창단하여 1981년 국기원 기술심의회 시범분과위원회를 신설하였다. 그리고 성인 시범단에 김영작 위원장을 국기원 성인 시범단 제1대 단장으로, 이규형을 어린이 태권도 시범단 단장으로 하는 두 체제를 운영하게 되었다. 이에 1982년 김영작 단장은 이규형 어린이 태권도 시범단 단장을 국기원 기술심의회 시범분과 위원회 부위원장으로 추천하면서 성인과 어린이 시범단을 공동으로 운영하게 되었다. 이로써 국기원 태권도 시범단은 명실상부한 국기원 상설 시범단으로 재탄생한 것이다. 특히 ‘86 서울아시아경기대회 ‘약동’ 과 ‘88 서울올림픽대회’ 의 ‘벽을 넘어서’ 에서의 성공적인 태권도 마스게임 시범은 양 대회의 개막식 행사에서 스포츠 강국인 대한민국 체육문화의 힘을 보여주었으며, 전 세계인들에게 가슴 벅찬 감동을 주기에 충분했다. 1989년부터는 제2대 이규형 단장을 위원장으로, 2006년 제3대 이춘우 단장을 위원장으로 운영해 오다가 2008년 제4대 남승현 위원장서 부터는 단장에서 감독체제로 바뀌면서 국가 행사나 대한태권도협회, 국기원, 세계태권도연맹, 정부 각 기관, 시·도 단체들의 태권도시범 요청 시 국기원에서 태권도 시범단을 지원해 왔다.
셋째, 태권도시범의 세계로의 발전 과정은 다음과 같다. 2000년 시드니올림픽 정식종목 채택으로 태권도는 스포츠의 발전과 동양적 무도사상이 결합되어 새로운 태권도정신이 싹트게 된다. 이는 결국 태권도의 다양화에 힘써야 한다는 공감대가 형성되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고 태권도시범이 세계로 도약하는 시기가 된 것이다. 2002년 태권도한마당을 시작으로 2005년 제1회 세계 태권도 품새 선수권대회가 개최되었으며, 2009년에는 하계유니버시아드 대회에서도 품새 종목이 경기화 되면서 정식종목으로 채택되었다. 또한 2009년 대한태권도협회 주관 제1회 격파왕 대회, 국기원 주관 제1회 세계태권도시범대회 등이 신설되었다. 이는 태권도 시범이 규격화되고 경기화 되었음을 증명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좀 더 구체화되어 국기원 시범단 독자체제에서 2008년에 와서는 대한태권도협회가 태권도시범 공연단을 창단하게 되었고, 세계태권도연맹도 독자적인 태권도 시범단 창단을 선언 하였다. 그래서 현재는 국기원, 대한태권도협회, 세계태권도연맹 등 각 단체의 태권도 시범단이 국기원 독자적인 시범단에서 각자 독립적으로 운영되고 있으며 이는 대한민국 태권도시범의 중심체로 세계화의 중심 역할을 다하고 있다.
결국 최초의 태권도시범은 태권도를 알리기 위하여 흥미위주의 ...
본 논문은 대한민국 태권도에 관한 역사연구이다. 최근 태권도에 대하여 다양한 역사연구가 이루어지고 있으나 태권도시범 史에 관한 연구는 매우 미흡한 것이 사실이다. 실제 다양한 태권도史 연구는 우리나라의 국기 태권도에 대한 실증적 역사 자료로서 그 의미가 매우 높다. 우리 고유의 전통 맨손 무예인 태권도는 현재 경기스포츠로 발전하여 올림픽정식종목으로 채택되어졌으며 이와 더불어 한국을 대표하는 문화콘텐츠로 더욱 굳건히 자리매김 하고 있다. 이러한 태권도의 발전에는 태권도의 우수성을 신기에 가까운 기술로 전 세계인의 감탄과 감동을 불러일으킨 태권도시범이 그 기저의 중심에 위치하고 있었다. 따라서 본 연구는 태권도 시범의 중요한 역사적 사실을 체계적으로 기술하고 그 의미를 고찰하여 미래 태권도 시범의 새로운 방향을 제시하는데 연구의 목적이 있다.
이러한 연구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본 연구는 문헌연구, 심층면담, 초점집단 연구, 영상자료 및 사진자료 등을 통해 분석하였으며, 이 같은 연구방법을 통해 태권도시범이 세계화되는 전개 과정을 연구하였다. 또한 본 연구를 체계적으로 정리하기 위해 태권도시범의 역사를 세시기로 구분하여 연구하였다. 1959년 베트남과 대만의 해외파견 최초 태권도시범을 시작으로 세계태권도연맹이 창설되고 태권도의 홍보가 시작되던 최초의 시기, 제83차 IOC총회 이후 정식경기종목으로 승인, ‘88 서울올림픽대회’ 최초의 시범종목으로 채택된 역사적 시기, 2000년 시드니올림픽대회에서 태권도가 최초의 올림픽정식종목으로 채택되어졌으며 지금까지 태권도시범이 세계화의 전개 과정을 형성하는 시기를 구분하여 연구하였다. 이와 같은 요인들을 중심으로 태권도시범의 세계화 전개 과정을 분석, 해석한 결과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릴 수 있었다.
첫째, 최초의 해외 태권도시범은 다음과 같다. 1959년 3월 12일 21명으로 구성된 국군 태권도시범단이 베트남 고딘디엠 대통령의 초청으로 베트남과 대만을 기점으로 태권도시범은 최초 시작되어졌다. 그 후 1963년 대한태수도협회의 태권도친선사절단 선수 15명이 일본을 순방하여 시범을 보였고, 1965년 국무회의에서 18개국을 순회하며 태권도시범을 보일 대한태권도협회 태권도친선사절단 파견을 의결하면서, 본격적인 민간부분에 대한 정부차원의 최초 파견이 이루어졌다. 이는 대한민국 민간외교 분야의 새로운 장을 여는 계기가 되었다. 1965년 1월 15일 최홍희가 대한태수도협회 제3대 회장으로 취임을 한 후 1965년 8월 5일 대한태권도협회로 명칭을 재 개칭 하여 대한태권도협회 소속으로 활동해오던 태권도친선사절단이 국기원으로 이관되기 전인 1980년 까지, 이들은 태권도시범을 통해 한국 문화의 위상을 높이는데 크게 기여 하게 된다. 또한 1967년 창단하여 1979년 8월 폐교 된 남대문초등학교가 초창기 어린이 태권도 시범단으로 활약하며 국내의 각종 행사는 물론 외국을 순회하며 해외에서 국위선양을 해왔다. 그리고 1973년 3월에 창단된 미동초등학교 어린이 태권도 시범단은 1978년 제1회 전국어린이 태권도시범대회에서 최우수상을 수상하였으며, 수상이후 각국 스포츠관계자 및 IOC 위원들과 국빈 방문 시 태권도시범을 선보였으며, 특히 IOC 사마란치 위원장과 영국 엘리자베스 여왕의 내한 시 보여준 태권도시범을 비롯하여 국내·외 태권도시범을 통해 전 세계에 한국 태권도 문화를 세계에 과시하며 국위를 선양해왔다.
둘째, 태권도시범을 도약시킨 결정적 시기는 다음과 같다. 대한태권도협회에서 비 구조화된 태권도 시범단을 국기원에서 태권도 시범단을 공식적으로 창단하여 1981년 국기원 기술심의회 시범분과위원회를 신설하였다. 그리고 성인 시범단에 김영작 위원장을 국기원 성인 시범단 제1대 단장으로, 이규형을 어린이 태권도 시범단 단장으로 하는 두 체제를 운영하게 되었다. 이에 1982년 김영작 단장은 이규형 어린이 태권도 시범단 단장을 국기원 기술심의회 시범분과 위원회 부위원장으로 추천하면서 성인과 어린이 시범단을 공동으로 운영하게 되었다. 이로써 국기원 태권도 시범단은 명실상부한 국기원 상설 시범단으로 재탄생한 것이다. 특히 ‘86 서울아시아경기대회 ‘약동’ 과 ‘88 서울올림픽대회’ 의 ‘벽을 넘어서’ 에서의 성공적인 태권도 마스게임 시범은 양 대회의 개막식 행사에서 스포츠 강국인 대한민국 체육문화의 힘을 보여주었으며, 전 세계인들에게 가슴 벅찬 감동을 주기에 충분했다. 1989년부터는 제2대 이규형 단장을 위원장으로, 2006년 제3대 이춘우 단장을 위원장으로 운영해 오다가 2008년 제4대 남승현 위원장서 부터는 단장에서 감독체제로 바뀌면서 국가 행사나 대한태권도협회, 국기원, 세계태권도연맹, 정부 각 기관, 시·도 단체들의 태권도시범 요청 시 국기원에서 태권도 시범단을 지원해 왔다.
셋째, 태권도시범의 세계로의 발전 과정은 다음과 같다. 2000년 시드니올림픽 정식종목 채택으로 태권도는 스포츠의 발전과 동양적 무도사상이 결합되어 새로운 태권도정신이 싹트게 된다. 이는 결국 태권도의 다양화에 힘써야 한다는 공감대가 형성되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고 태권도시범이 세계로 도약하는 시기가 된 것이다. 2002년 태권도한마당을 시작으로 2005년 제1회 세계 태권도 품새 선수권대회가 개최되었으며, 2009년에는 하계유니버시아드 대회에서도 품새 종목이 경기화 되면서 정식종목으로 채택되었다. 또한 2009년 대한태권도협회 주관 제1회 격파왕 대회, 국기원 주관 제1회 세계태권도시범대회 등이 신설되었다. 이는 태권도 시범이 규격화되고 경기화 되었음을 증명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좀 더 구체화되어 국기원 시범단 독자체제에서 2008년에 와서는 대한태권도협회가 태권도시범 공연단을 창단하게 되었고, 세계태권도연맹도 독자적인 태권도 시범단 창단을 선언 하였다. 그래서 현재는 국기원, 대한태권도협회, 세계태권도연맹 등 각 단체의 태권도 시범단이 국기원 독자적인 시범단에서 각자 독립적으로 운영되고 있으며 이는 대한민국 태권도시범의 중심체로 세계화의 중심 역할을 다하고 있다.
결국 최초의 태권도시범은 태권도를 알리기 위하여 흥미위주의 위력 격파, 멀리차기, 높이차기, 호신술과 같은 비교적 단순한 시범으로부터 시작되었다. 하지만 그 후 급속한 사회발전과 시대적 변화에 따라 새로운 동작, 변화된 품새, 기술격파, 겨루기, 호신술, 태권체조 등의 전통적 시범에 여러 요소가 가미되어 테마가 있는 시범 등과 같은 비약적인 발전을 가져왔다. 현재 태권도시범은 개인의 건강증진과 자아실현, 태권도 기술의 예술적 승화 단계까지 발전시켜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문화콘텐츠로 성장하였다.
뿐 만 아니라 태권도시범은 냉전시대에 있어 대한민국 외교의 첨병으로서의 역할도 충실이 하고 있다. 이제 태권도시범은 태권도 가운데 각광 받았던 하나의 장르가 아니라 태권도시범 자체가 하나의 문화로 인식될 만큼 성장하여 왔다. 이는 태권도시범이 국내만이 아닌 세계 속의 태권도시범으로 성장하였음을 의미한다. 지속적으로 성장하는 태권도시범, 그 첫 시작이 바로 올바른 눈으로 바르게 그 역사를 기록하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고 본다. 본 연구가 그 첫 시작이며, 태권도의 종주국 대한민국에 꼭 필요한 연구이다. 다시 한 번 강조하면 우리나라의 태권도시범 史는 현대를 살고 있는 세계의 태권도 인과 종주국 대한민국인 모두가 연구하고 기록하며 기억해야 할 시대적 사명임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본 논문은 대한민국 태권도에 관한 역사연구이다. 최근 태권도에 대하여 다양한 역사연구가 이루어지고 있으나 태권도시범 史에 관한 연구는 매우 미흡한 것이 사실이다. 실제 다양한 태권도史 연구는 우리나라의 국기 태권도에 대한 실증적 역사 자료로서 그 의미가 매우 높다. 우리 고유의 전통 맨손 무예인 태권도는 현재 경기스포츠로 발전하여 올림픽정식종목으로 채택되어졌으며 이와 더불어 한국을 대표하는 문화콘텐츠로 더욱 굳건히 자리매김 하고 있다. 이러한 태권도의 발전에는 태권도의 우수성을 신기에 가까운 기술로 전 세계인의 감탄과 감동을 불러일으킨 태권도시범이 그 기저의 중심에 위치하고 있었다. 따라서 본 연구는 태권도 시범의 중요한 역사적 사실을 체계적으로 기술하고 그 의미를 고찰하여 미래 태권도 시범의 새로운 방향을 제시하는데 연구의 목적이 있다.
이러한 연구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본 연구는 문헌연구, 심층면담, 초점집단 연구, 영상자료 및 사진자료 등을 통해 분석하였으며, 이 같은 연구방법을 통해 태권도시범이 세계화되는 전개 과정을 연구하였다. 또한 본 연구를 체계적으로 정리하기 위해 태권도시범의 역사를 세시기로 구분하여 연구하였다. 1959년 베트남과 대만의 해외파견 최초 태권도시범을 시작으로 세계태권도연맹이 창설되고 태권도의 홍보가 시작되던 최초의 시기, 제83차 IOC총회 이후 정식경기종목으로 승인, ‘88 서울올림픽대회’ 최초의 시범종목으로 채택된 역사적 시기, 2000년 시드니올림픽대회에서 태권도가 최초의 올림픽정식종목으로 채택되어졌으며 지금까지 태권도시범이 세계화의 전개 과정을 형성하는 시기를 구분하여 연구하였다. 이와 같은 요인들을 중심으로 태권도시범의 세계화 전개 과정을 분석, 해석한 결과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릴 수 있었다.
첫째, 최초의 해외 태권도시범은 다음과 같다. 1959년 3월 12일 21명으로 구성된 국군 태권도시범단이 베트남 고딘디엠 대통령의 초청으로 베트남과 대만을 기점으로 태권도시범은 최초 시작되어졌다. 그 후 1963년 대한태수도협회의 태권도친선사절단 선수 15명이 일본을 순방하여 시범을 보였고, 1965년 국무회의에서 18개국을 순회하며 태권도시범을 보일 대한태권도협회 태권도친선사절단 파견을 의결하면서, 본격적인 민간부분에 대한 정부차원의 최초 파견이 이루어졌다. 이는 대한민국 민간외교 분야의 새로운 장을 여는 계기가 되었다. 1965년 1월 15일 최홍희가 대한태수도협회 제3대 회장으로 취임을 한 후 1965년 8월 5일 대한태권도협회로 명칭을 재 개칭 하여 대한태권도협회 소속으로 활동해오던 태권도친선사절단이 국기원으로 이관되기 전인 1980년 까지, 이들은 태권도시범을 통해 한국 문화의 위상을 높이는데 크게 기여 하게 된다. 또한 1967년 창단하여 1979년 8월 폐교 된 남대문초등학교가 초창기 어린이 태권도 시범단으로 활약하며 국내의 각종 행사는 물론 외국을 순회하며 해외에서 국위선양을 해왔다. 그리고 1973년 3월에 창단된 미동초등학교 어린이 태권도 시범단은 1978년 제1회 전국어린이 태권도시범대회에서 최우수상을 수상하였으며, 수상이후 각국 스포츠관계자 및 IOC 위원들과 국빈 방문 시 태권도시범을 선보였으며, 특히 IOC 사마란치 위원장과 영국 엘리자베스 여왕의 내한 시 보여준 태권도시범을 비롯하여 국내·외 태권도시범을 통해 전 세계에 한국 태권도 문화를 세계에 과시하며 국위를 선양해왔다.
둘째, 태권도시범을 도약시킨 결정적 시기는 다음과 같다. 대한태권도협회에서 비 구조화된 태권도 시범단을 국기원에서 태권도 시범단을 공식적으로 창단하여 1981년 국기원 기술심의회 시범분과위원회를 신설하였다. 그리고 성인 시범단에 김영작 위원장을 국기원 성인 시범단 제1대 단장으로, 이규형을 어린이 태권도 시범단 단장으로 하는 두 체제를 운영하게 되었다. 이에 1982년 김영작 단장은 이규형 어린이 태권도 시범단 단장을 국기원 기술심의회 시범분과 위원회 부위원장으로 추천하면서 성인과 어린이 시범단을 공동으로 운영하게 되었다. 이로써 국기원 태권도 시범단은 명실상부한 국기원 상설 시범단으로 재탄생한 것이다. 특히 ‘86 서울아시아경기대회 ‘약동’ 과 ‘88 서울올림픽대회’ 의 ‘벽을 넘어서’ 에서의 성공적인 태권도 마스게임 시범은 양 대회의 개막식 행사에서 스포츠 강국인 대한민국 체육문화의 힘을 보여주었으며, 전 세계인들에게 가슴 벅찬 감동을 주기에 충분했다. 1989년부터는 제2대 이규형 단장을 위원장으로, 2006년 제3대 이춘우 단장을 위원장으로 운영해 오다가 2008년 제4대 남승현 위원장서 부터는 단장에서 감독체제로 바뀌면서 국가 행사나 대한태권도협회, 국기원, 세계태권도연맹, 정부 각 기관, 시·도 단체들의 태권도시범 요청 시 국기원에서 태권도 시범단을 지원해 왔다.
셋째, 태권도시범의 세계로의 발전 과정은 다음과 같다. 2000년 시드니올림픽 정식종목 채택으로 태권도는 스포츠의 발전과 동양적 무도사상이 결합되어 새로운 태권도정신이 싹트게 된다. 이는 결국 태권도의 다양화에 힘써야 한다는 공감대가 형성되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고 태권도시범이 세계로 도약하는 시기가 된 것이다. 2002년 태권도한마당을 시작으로 2005년 제1회 세계 태권도 품새 선수권대회가 개최되었으며, 2009년에는 하계유니버시아드 대회에서도 품새 종목이 경기화 되면서 정식종목으로 채택되었다. 또한 2009년 대한태권도협회 주관 제1회 격파왕 대회, 국기원 주관 제1회 세계태권도시범대회 등이 신설되었다. 이는 태권도 시범이 규격화되고 경기화 되었음을 증명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좀 더 구체화되어 국기원 시범단 독자체제에서 2008년에 와서는 대한태권도협회가 태권도시범 공연단을 창단하게 되었고, 세계태권도연맹도 독자적인 태권도 시범단 창단을 선언 하였다. 그래서 현재는 국기원, 대한태권도협회, 세계태권도연맹 등 각 단체의 태권도 시범단이 국기원 독자적인 시범단에서 각자 독립적으로 운영되고 있으며 이는 대한민국 태권도시범의 중심체로 세계화의 중심 역할을 다하고 있다.
결국 최초의 태권도시범은 태권도를 알리기 위하여 흥미위주의 위력 격파, 멀리차기, 높이차기, 호신술과 같은 비교적 단순한 시범으로부터 시작되었다. 하지만 그 후 급속한 사회발전과 시대적 변화에 따라 새로운 동작, 변화된 품새, 기술격파, 겨루기, 호신술, 태권체조 등의 전통적 시범에 여러 요소가 가미되어 테마가 있는 시범 등과 같은 비약적인 발전을 가져왔다. 현재 태권도시범은 개인의 건강증진과 자아실현, 태권도 기술의 예술적 승화 단계까지 발전시켜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문화콘텐츠로 성장하였다.
뿐 만 아니라 태권도시범은 냉전시대에 있어 대한민국 외교의 첨병으로서의 역할도 충실이 하고 있다. 이제 태권도시범은 태권도 가운데 각광 받았던 하나의 장르가 아니라 태권도시범 자체가 하나의 문화로 인식될 만큼 성장하여 왔다. 이는 태권도시범이 국내만이 아닌 세계 속의 태권도시범으로 성장하였음을 의미한다. 지속적으로 성장하는 태권도시범, 그 첫 시작이 바로 올바른 눈으로 바르게 그 역사를 기록하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고 본다. 본 연구가 그 첫 시작이며, 태권도의 종주국 대한민국에 꼭 필요한 연구이다. 다시 한 번 강조하면 우리나라의 태권도시범 史는 현대를 살고 있는 세계의 태권도 인과 종주국 대한민국인 모두가 연구하고 기록하며 기억해야 할 시대적 사명임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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