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 연구는 화투(花鬪)의 외래 놀이문화로서의 성립과정을 밝히고, 성립 초기의 외래적 문화기호를 확인한 뒤, 이미 국민적 놀이문화로 자리매김한 화투의 문화기호가 한국화한 양상을 밝힘으로써 이미 한국 문화가 된 화투의 위상을 규명하는 데 목적이 있다. 이를 위하여 화투의 도안물 뿐만 아니라 한국에 유입된 일본 하나후다(花札)의 도안물 형성 과정과 유입 과정, 그리고 전파 과정 전반에 관하여도 면밀히 비교분석하고자 하였다. 서론에서 제기한 각 문제점들에 대하여 고찰한 논의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화투가 현재 한국의 놀이에서 어떠한 위치를 차지하는지와 화투를 둘러싼 문제는 어떠한 것이 있는지를 살펴본 결과, 민속학계에서는 화투를 민속놀이로 분류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국민의 정서에는 ‘화투’라고 하면 아직 저급한 놀이라는 인식이 남아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지금껏 화투만의 문제라고 여겨왔던 것이 실제로는 격변하는 시대상의 반영과 많아진 여가에 비해 적절한 놀이의 부재 등의 문제가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나타난 것이 아닌가 한다. 둘째, 화투와 도안물이 유사한 하나후다는 일본에서 처음 만들어진 것인지, 또 다른 놀이의 영향을 받은 것은 없는가를 고찰하고자 하나후다와 화투의 도안물에 대한 계보를 추적하여 비교분석해 본 결과, 하나후다의 원류(源流)는 남유럽산 Carta이다. 15C경 일본에 유입된 남유럽산 Carta는 실내에서 이루어지는 일본의 고유놀이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뒤, 덴쇼가루타(天正carta)와 운슨가루타(umsumcarta)라는 일본에서 처음 만들어진 유럽 스타일의 도박계통 가루타로 계승된다. ‘내기’ 성향이 강한 속성 때문에 일본 내에서 수차례 단속의 대상이 되었던 유럽 스타일의 가루타는 에도막부(江戸幕府)가 도박금지령을 내릴 때마다 이를 피하는 수단으로써 도안의 형태를 여러 차례 변형시키게 된다. 그런데 당시의 단속은 지역에 국한되었기 때문에 그 과정에서 다양한 문양의 수많은 지방 후다(札)가 양산된다. 그러나 이때까지만 ...
본 연구는 화투(花鬪)의 외래 놀이문화로서의 성립과정을 밝히고, 성립 초기의 외래적 문화기호를 확인한 뒤, 이미 국민적 놀이문화로 자리매김한 화투의 문화기호가 한국화한 양상을 밝힘으로써 이미 한국 문화가 된 화투의 위상을 규명하는 데 목적이 있다. 이를 위하여 화투의 도안물 뿐만 아니라 한국에 유입된 일본 하나후다(花札)의 도안물 형성 과정과 유입 과정, 그리고 전파 과정 전반에 관하여도 면밀히 비교분석하고자 하였다. 서론에서 제기한 각 문제점들에 대하여 고찰한 논의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화투가 현재 한국의 놀이에서 어떠한 위치를 차지하는지와 화투를 둘러싼 문제는 어떠한 것이 있는지를 살펴본 결과, 민속학계에서는 화투를 민속놀이로 분류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국민의 정서에는 ‘화투’라고 하면 아직 저급한 놀이라는 인식이 남아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지금껏 화투만의 문제라고 여겨왔던 것이 실제로는 격변하는 시대상의 반영과 많아진 여가에 비해 적절한 놀이의 부재 등의 문제가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나타난 것이 아닌가 한다. 둘째, 화투와 도안물이 유사한 하나후다는 일본에서 처음 만들어진 것인지, 또 다른 놀이의 영향을 받은 것은 없는가를 고찰하고자 하나후다와 화투의 도안물에 대한 계보를 추적하여 비교분석해 본 결과, 하나후다의 원류(源流)는 남유럽산 Carta이다. 15C경 일본에 유입된 남유럽산 Carta는 실내에서 이루어지는 일본의 고유놀이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뒤, 덴쇼가루타(天正carta)와 운슨가루타(umsumcarta)라는 일본에서 처음 만들어진 유럽 스타일의 도박계통 가루타로 계승된다. ‘내기’ 성향이 강한 속성 때문에 일본 내에서 수차례 단속의 대상이 되었던 유럽 스타일의 가루타는 에도막부(江戸幕府)가 도박금지령을 내릴 때마다 이를 피하는 수단으로써 도안의 형태를 여러 차례 변형시키게 된다. 그런데 당시의 단속은 지역에 국한되었기 때문에 그 과정에서 다양한 문양의 수많은 지방 후다(札)가 양산된다. 그러나 이때까지만 해도 다양한 문양이 시도되었어도 유럽 스타일의 도안 형태에서 그다지 벗어나지 않았다. 하지만 단속이 전국에 걸쳐 수차례 시행되고 처벌도 점점 강화되자 도안물은 완전 변형을 모색하기에 이른다. 원류인 유럽산 가루타와 분별하기 힘들 정도로 형태의 변형을 이루어 일본화된 것이다. 다양한 문양을 만들어내며 양산되던 도박계통의 지방 후다 중 일부는 당시 단속에서 제외되었던 교육계통의 가루타 형태를 모방하기 시작한다. 그 중의 하나가 1818년에서 1843년 사이에 교토(京都)에서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는 하나후다이다. 당시 ‘화조류(花鳥類)’의 자연물을 도안하여 짝 맞추기를 하던 교육계통의 가루타인 '가쵸에아와세가루타(花鳥絵会わせかるた)’의 형태를 도입한 하나후다는 12세트 48장의 월별구성에 이 소재(素材)를 사용하여 유럽산 가루타에서의 숫자 기능을 대신한다. 하나후다의 도안 형성에 영향을 미친 '가쵸에아와세가루타는 조선통신사(朝鮮通信士, 1607-1811) 등과 같은 문화사절단의 교류 시, 조선에서 유행하던 수투의 ‘화조도(花鳥圖)’가 일본에 전래되어 영향을 주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이처럼 일본화를 이룬 하나후다 도안물의 문화 성향을 살피고자 일본의 고전시가집인 만요슈(万葉集)에 실린 시가 4,516수와 팔대집(八代集)에 실린 시가 9,502수, 총 14,018수의 시가를 대상으로 분석한 결과, 하나후다 도안물의 문화 성향은 일본의 전통정서가 담긴 것임을 알 수 있다. 위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유럽산 가루타가 일본에서 놀이되는 400여 년 동안 끊임없이 이루어졌던 도박금지령은 유럽산 가루타의 도안을 변형시키는 데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덴쇼가루타에서 계승된 지방 후다의 일종인 하나후다가 전통문화기호 형태를 띠게 된 것도 바로 일본 정부의 단속 때문이다. 여기에서 단속이라는 사회적 요인이 유럽산 가루타의 도안물을 일본화하는데 크게 작용하였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셋째, 일본 것이라는 평가를 받기도 하는 화투는 현재까지도 한국에서 많은 사람들이 관심을 가지고 놀이를 즐기는 반면, 하나후다는 일본에서 대중성을 거의 상실하였다. 이렇게 된 주요인을 살피면 일본 정부 차원의 정책을 꼽을 수 있다. 유입 당시에는 고급품이었는데 서민들에게까지 확산되며 도박으로 사용하는 일이 늘어났다. 그러자 메이지(明治) 신정부가 미풍양속(美風良俗)을 유지한다는 구실 아래 단속령과 함께 막중한 세금 및 부과금을 부과하며, 도박계통 가루타는 저급하다는 이미지를 지속적으로 홍보하였기 때문이다. 이로 인하여 하나후다는 저급한 놀이 도구의 상징물이 되어 결국 쇠퇴하게 된다. 또한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정책적으로 파친코, 트럼프, 타로(tarrots) 등과 같은 서양 오락도구의 수입을 장려하였기 때문에 당시 유입된 서양의 오락도구는 고급스러운 이미지로 놀이가 확산되면서 기존의 실내 놀이를 대체하기에 이른다. 비록 대중성은 잃었지만 현재까지도 다른 지방 후다와 함께 명맥은 유지되고 있다. 반면 교토에서 만들어지긴 했지만 전국적으로 많은 인기를 끌고 있던 하나후다는 조선통신사(朝鮮通信士)나 보부상(褓負商) 등과 같은 자연스러운 문화 교류의 형태로 19C 말 한국에 유입되어 화투가 되었다. 유입된 초기에는 놀이를 즐기던 사람은 일부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던 것이 20C 초 근대적 생산 시스템과 전국적인 유통망을 갖춘 일본의 한 회사에 의하여 한국에 대량으로 수출되기 시작하였다. 여러 형태의 지방 후다 중에서 하나후다가 유입될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는 생산 시스템과 유통망을 갖추고 대량 수출한 회사가 바로 그 기반을 교토에 두고 있던 하나후다 가루타 업자이었기 때문이다. 이 회사는 현재도 놀이도구 전문업체로 유지하고 있다. 도박계통으로 분류되는 일본의 하나후다와 달리 화투는 유입당시부터 일반 서민들이 즐기던 오락이었다. 한국도 일본과 마찬가지로 국가차원의 도박단속령이 있었지만 화투의 존폐에는 별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 화투가 국민오락이 되기까지의 과정을 거치는 동안 하나후다에서와 같이 도안물의 형태에는 그다지 큰 변화가 없었다. 그래서 현재 화투는 하나후다의 복제판(複製版)이라는 평가를 받기도 한다. 그러나 화투에서는 도안의 형태에 많은 변화를 추구하며 자생력(自生力)을 갖춘 하나후다와 달리 도안물의 형태에는 그다지 큰 변화가 없었으나 120여 년 동안 놀이되면서 도안물 해석에 차이를 갖게 된다. 이외에도 화투는 놀이 방식에 변화를 추구하며 자생력을 길러 왔다. 놀이방식에 다양한 변형을 준 요소는 사회를 대변하는 ‘풍자’이다. 넷째, 한국에서 화투가 110~120여년 놀이되는 동안 사회·문화적으로 아무런 변화가 없었는가 하는 것이다. 이에 하나후다와 화투 도안물에 표현된 문화 성향을 검토한 결과 두 놀이도구의 도안물은 각기 등장물과 상징물로 대변되며 해석에 차이를 보였다. 이에 두 놀이도구의 도안물에 대하여 문화기호를 중심으로 구조적인 분석을 시도하였다. 옐름슬레브((L. Hjelmslev)의 언어텍스트 단계와 그레마스((A. J. Greimas)의 의미생성 경로과정을 거쳐 하나후다와 화투 두 도안물의 의미 작용(signification)을 구조적으로 분석한 결과 표면적인 특징은 유사하지만 고스톱과 같이 놀이 방식에 변형을 이루며 발전해 온 화투의 도안물은 하나후다의 도안물에서 표현하는 전통문화의 기호가 아닌 놀이문화로서의 의미를 지닌 생성물(生成物)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이와 같이 하나후다 도안물의 문화(文化) 성향(性向)과 다르게 발전한 화투의 도안물은 하나후다와 다른 해석(interpretation)을 하며 ‘풍자’가 놀이 기능을 극대화할 때 그 모티브가 되었다. 이리하여 등장물과 상징물로 대변되며 문화 성향에 상이성(相異性)을 보이는 두 도안물의 기호물군(configurartion of code)은 문화기호의 특성에 따라 일본의 하나후다는 ‘전통문화(傳統文化) 기호(code)’에서, 한국의 화투는 ‘놀이문화(遊戱文化) 기호(code)’에서 표출된 의미표상체(意味表象体)임을 확인할 수 있다. 전통적 형식의 자유로운 수용과 문화적 유사성은 민속놀이의 특징적 현상이며, 현대 사회의 놀이문화 특징 중 하나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화투는 한국의 민속놀이로서 그 나름의 가치가 있는 것이고 그 가치는 인정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본 연구는 화투 기호물의 자생적(自生的) 위치를 찾아내어 화투의 독자성을 확립하는데 노력하였다. 그러므로 본 연구의 결과가 화투의 건전한 놀이 문화 형성과 화투놀이의 진작(振作) 그리고 화투의 예술적인 가치의 동반 발전을 도모하는 학제적 연구에 도움이 되었으면 한다.
본 연구는 화투(花鬪)의 외래 놀이문화로서의 성립과정을 밝히고, 성립 초기의 외래적 문화기호를 확인한 뒤, 이미 국민적 놀이문화로 자리매김한 화투의 문화기호가 한국화한 양상을 밝힘으로써 이미 한국 문화가 된 화투의 위상을 규명하는 데 목적이 있다. 이를 위하여 화투의 도안물 뿐만 아니라 한국에 유입된 일본 하나후다(花札)의 도안물 형성 과정과 유입 과정, 그리고 전파 과정 전반에 관하여도 면밀히 비교분석하고자 하였다. 서론에서 제기한 각 문제점들에 대하여 고찰한 논의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화투가 현재 한국의 놀이에서 어떠한 위치를 차지하는지와 화투를 둘러싼 문제는 어떠한 것이 있는지를 살펴본 결과, 민속학계에서는 화투를 민속놀이로 분류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국민의 정서에는 ‘화투’라고 하면 아직 저급한 놀이라는 인식이 남아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지금껏 화투만의 문제라고 여겨왔던 것이 실제로는 격변하는 시대상의 반영과 많아진 여가에 비해 적절한 놀이의 부재 등의 문제가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나타난 것이 아닌가 한다. 둘째, 화투와 도안물이 유사한 하나후다는 일본에서 처음 만들어진 것인지, 또 다른 놀이의 영향을 받은 것은 없는가를 고찰하고자 하나후다와 화투의 도안물에 대한 계보를 추적하여 비교분석해 본 결과, 하나후다의 원류(源流)는 남유럽산 Carta이다. 15C경 일본에 유입된 남유럽산 Carta는 실내에서 이루어지는 일본의 고유놀이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뒤, 덴쇼가루타(天正carta)와 운슨가루타(umsumcarta)라는 일본에서 처음 만들어진 유럽 스타일의 도박계통 가루타로 계승된다. ‘내기’ 성향이 강한 속성 때문에 일본 내에서 수차례 단속의 대상이 되었던 유럽 스타일의 가루타는 에도막부(江戸幕府)가 도박금지령을 내릴 때마다 이를 피하는 수단으로써 도안의 형태를 여러 차례 변형시키게 된다. 그런데 당시의 단속은 지역에 국한되었기 때문에 그 과정에서 다양한 문양의 수많은 지방 후다(札)가 양산된다. 그러나 이때까지만 해도 다양한 문양이 시도되었어도 유럽 스타일의 도안 형태에서 그다지 벗어나지 않았다. 하지만 단속이 전국에 걸쳐 수차례 시행되고 처벌도 점점 강화되자 도안물은 완전 변형을 모색하기에 이른다. 원류인 유럽산 가루타와 분별하기 힘들 정도로 형태의 변형을 이루어 일본화된 것이다. 다양한 문양을 만들어내며 양산되던 도박계통의 지방 후다 중 일부는 당시 단속에서 제외되었던 교육계통의 가루타 형태를 모방하기 시작한다. 그 중의 하나가 1818년에서 1843년 사이에 교토(京都)에서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는 하나후다이다. 당시 ‘화조류(花鳥類)’의 자연물을 도안하여 짝 맞추기를 하던 교육계통의 가루타인 '가쵸에아와세가루타(花鳥絵会わせかるた)’의 형태를 도입한 하나후다는 12세트 48장의 월별구성에 이 소재(素材)를 사용하여 유럽산 가루타에서의 숫자 기능을 대신한다. 하나후다의 도안 형성에 영향을 미친 '가쵸에아와세가루타는 조선통신사(朝鮮通信士, 1607-1811) 등과 같은 문화사절단의 교류 시, 조선에서 유행하던 수투의 ‘화조도(花鳥圖)’가 일본에 전래되어 영향을 주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이처럼 일본화를 이룬 하나후다 도안물의 문화 성향을 살피고자 일본의 고전시가집인 만요슈(万葉集)에 실린 시가 4,516수와 팔대집(八代集)에 실린 시가 9,502수, 총 14,018수의 시가를 대상으로 분석한 결과, 하나후다 도안물의 문화 성향은 일본의 전통정서가 담긴 것임을 알 수 있다. 위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유럽산 가루타가 일본에서 놀이되는 400여 년 동안 끊임없이 이루어졌던 도박금지령은 유럽산 가루타의 도안을 변형시키는 데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덴쇼가루타에서 계승된 지방 후다의 일종인 하나후다가 전통문화기호 형태를 띠게 된 것도 바로 일본 정부의 단속 때문이다. 여기에서 단속이라는 사회적 요인이 유럽산 가루타의 도안물을 일본화하는데 크게 작용하였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셋째, 일본 것이라는 평가를 받기도 하는 화투는 현재까지도 한국에서 많은 사람들이 관심을 가지고 놀이를 즐기는 반면, 하나후다는 일본에서 대중성을 거의 상실하였다. 이렇게 된 주요인을 살피면 일본 정부 차원의 정책을 꼽을 수 있다. 유입 당시에는 고급품이었는데 서민들에게까지 확산되며 도박으로 사용하는 일이 늘어났다. 그러자 메이지(明治) 신정부가 미풍양속(美風良俗)을 유지한다는 구실 아래 단속령과 함께 막중한 세금 및 부과금을 부과하며, 도박계통 가루타는 저급하다는 이미지를 지속적으로 홍보하였기 때문이다. 이로 인하여 하나후다는 저급한 놀이 도구의 상징물이 되어 결국 쇠퇴하게 된다. 또한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정책적으로 파친코, 트럼프, 타로(tarrots) 등과 같은 서양 오락도구의 수입을 장려하였기 때문에 당시 유입된 서양의 오락도구는 고급스러운 이미지로 놀이가 확산되면서 기존의 실내 놀이를 대체하기에 이른다. 비록 대중성은 잃었지만 현재까지도 다른 지방 후다와 함께 명맥은 유지되고 있다. 반면 교토에서 만들어지긴 했지만 전국적으로 많은 인기를 끌고 있던 하나후다는 조선통신사(朝鮮通信士)나 보부상(褓負商) 등과 같은 자연스러운 문화 교류의 형태로 19C 말 한국에 유입되어 화투가 되었다. 유입된 초기에는 놀이를 즐기던 사람은 일부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던 것이 20C 초 근대적 생산 시스템과 전국적인 유통망을 갖춘 일본의 한 회사에 의하여 한국에 대량으로 수출되기 시작하였다. 여러 형태의 지방 후다 중에서 하나후다가 유입될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는 생산 시스템과 유통망을 갖추고 대량 수출한 회사가 바로 그 기반을 교토에 두고 있던 하나후다 가루타 업자이었기 때문이다. 이 회사는 현재도 놀이도구 전문업체로 유지하고 있다. 도박계통으로 분류되는 일본의 하나후다와 달리 화투는 유입당시부터 일반 서민들이 즐기던 오락이었다. 한국도 일본과 마찬가지로 국가차원의 도박단속령이 있었지만 화투의 존폐에는 별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 화투가 국민오락이 되기까지의 과정을 거치는 동안 하나후다에서와 같이 도안물의 형태에는 그다지 큰 변화가 없었다. 그래서 현재 화투는 하나후다의 복제판(複製版)이라는 평가를 받기도 한다. 그러나 화투에서는 도안의 형태에 많은 변화를 추구하며 자생력(自生力)을 갖춘 하나후다와 달리 도안물의 형태에는 그다지 큰 변화가 없었으나 120여 년 동안 놀이되면서 도안물 해석에 차이를 갖게 된다. 이외에도 화투는 놀이 방식에 변화를 추구하며 자생력을 길러 왔다. 놀이방식에 다양한 변형을 준 요소는 사회를 대변하는 ‘풍자’이다. 넷째, 한국에서 화투가 110~120여년 놀이되는 동안 사회·문화적으로 아무런 변화가 없었는가 하는 것이다. 이에 하나후다와 화투 도안물에 표현된 문화 성향을 검토한 결과 두 놀이도구의 도안물은 각기 등장물과 상징물로 대변되며 해석에 차이를 보였다. 이에 두 놀이도구의 도안물에 대하여 문화기호를 중심으로 구조적인 분석을 시도하였다. 옐름슬레브((L. Hjelmslev)의 언어텍스트 단계와 그레마스((A. J. Greimas)의 의미생성 경로과정을 거쳐 하나후다와 화투 두 도안물의 의미 작용(signification)을 구조적으로 분석한 결과 표면적인 특징은 유사하지만 고스톱과 같이 놀이 방식에 변형을 이루며 발전해 온 화투의 도안물은 하나후다의 도안물에서 표현하는 전통문화의 기호가 아닌 놀이문화로서의 의미를 지닌 생성물(生成物)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이와 같이 하나후다 도안물의 문화(文化) 성향(性向)과 다르게 발전한 화투의 도안물은 하나후다와 다른 해석(interpretation)을 하며 ‘풍자’가 놀이 기능을 극대화할 때 그 모티브가 되었다. 이리하여 등장물과 상징물로 대변되며 문화 성향에 상이성(相異性)을 보이는 두 도안물의 기호물군(configurartion of code)은 문화기호의 특성에 따라 일본의 하나후다는 ‘전통문화(傳統文化) 기호(code)’에서, 한국의 화투는 ‘놀이문화(遊戱文化) 기호(code)’에서 표출된 의미표상체(意味表象体)임을 확인할 수 있다. 전통적 형식의 자유로운 수용과 문화적 유사성은 민속놀이의 특징적 현상이며, 현대 사회의 놀이문화 특징 중 하나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화투는 한국의 민속놀이로서 그 나름의 가치가 있는 것이고 그 가치는 인정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본 연구는 화투 기호물의 자생적(自生的) 위치를 찾아내어 화투의 독자성을 확립하는데 노력하였다. 그러므로 본 연구의 결과가 화투의 건전한 놀이 문화 형성과 화투놀이의 진작(振作) 그리고 화투의 예술적인 가치의 동반 발전을 도모하는 학제적 연구에 도움이 되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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