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 논문의 시작은 16세기 종교개혁시대의 로마 카톨릭과 재세례파에 대한 비판으로부터 시작하였다. 로마 카톨릭의 경우, 종교 개혁자들과의 차이 그 모든 것의 시작은 계시관의 차이에서 출발하였다. 인간의 판단이 개입될 여지가 있었던 계시관에 있어서의 차이가 교리에 다름을 가져오고, 이는 현실의 교회 모습에 엄청난 차이를 가져왔다. 교회의 본질이 삼위일체적 하나님의 구속 사역에 바탕을 둔 것이기 보다는, 명칭과 형식의 교회, 정말 눈에 보이는 교회의 존속을 위하여 변질되어 있음을 볼 수 있었다. 교황을 정점으로 하는 권위 구조를 봉사하...
본 논문의 시작은 16세기 종교개혁시대의 로마 카톨릭과 재세례파에 대한 비판으로부터 시작하였다. 로마 카톨릭의 경우, 종교 개혁자들과의 차이 그 모든 것의 시작은 계시관의 차이에서 출발하였다. 인간의 판단이 개입될 여지가 있었던 계시관에 있어서의 차이가 교리에 다름을 가져오고, 이는 현실의 교회 모습에 엄청난 차이를 가져왔다. 교회의 본질이 삼위일체적 하나님의 구속 사역에 바탕을 둔 것이기 보다는, 명칭과 형식의 교회, 정말 눈에 보이는 교회의 존속을 위하여 변질되어 있음을 볼 수 있었다. 교황을 정점으로 하는 권위 구조를 봉사하기 위한 단일성, 거룩성, 보편성, 사도성의 논리와 그 귀결이라 할 수 있는 교황의 무오성, 그리고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가 충만하고 역사하는 연합이 아니라, 오직 그 형식으로 인간의 나약함과 악함을 채우는 예배와 성사들, 또한 명목상의 교회 조직을 보호하고 그 기득권을 유지하기 위해 성도의 삶을 부당하게 간섭하고 세상의 권세에 대해서도 거침없는 욕망을 가졌던 모습들, 이 모든 것이 잘못된 교회의 모습이었고, 그 잘못의 근원은 교리, 교회론의 왜곡이었다. 또한 재세례파의 경우, 종교 개혁자들과 같은 ‘오직 성경’에서부터 시작하였으나, 실제의 삶과 실제의 교회의 모습에서 온전하게 하나님의 사역과 하나님 나라의 모습을 온전히 이해하지도 못했고, 드러내지도 못하였다. 물론 잘못된 로마 카톨릭과 국가교회의 상황과 그들이 가진 권력 앞에서 그들이 무엇인가 선택할 수 있는 폭을 좁았을 것이다. 그러나 동시대의 칼빈과 같은 종교개혁자들과 비교하여 보았을 때, 그들이 선택한 판단과 행동, 즉 정교분리, 유아세례 반대 등과 같은 세속분리는 성경의 부분적 이해를 드러내었을 뿐이었고, 스스로의 고립을 자초할 따름이었고, 이는 어찌보면 로마 카톨릭이 빠졌던 자의적인 인간의 판단에 다름 아니라고 하겠다. 칼빈은 그 교회론을 오직 성경을 중심으로, 종교 개혁의 신학 전체 흐름 속에서, 교리의 은혜와 그 풍성함이 온전히 녹아져 내리도록 대담하면서도 치밀하게 또한 섬세하게 전개해 나아간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전적인 주권과 한량없는 사랑으로, 그리스도의 보혈로 선택하시고 구원하신 당신의 자녀들이 삶 속에서 그 선택의 은혜가 계속 역사하고 충만하도록, 또한 하나님 나라와 그 사역이 계속 선포되고 풍성해지도록 이 땅에 교회를 주셨다. 그러므로 교회의 본질은 그 머리되신 그리스도와 지체된 성도의 연합이다. 물론 가시적인 교회가 온전히 비가시적인 교회를 나타내지 못하더라도 오직 겸손한 마음과 선량한 믿음으로 교회를 떠나서는 안되며, 연합과 일치를 위하여 더욱 서로에 대한 용서와 관용, 사랑을 베풀어야 할 것이다. 참 교회는 하나님의 말씀이 순수하게 선포하고, 약속의 징표인 성례가 합법적으로 시행하여, 그리스도와의 연합이 성령의 역사를 통하여 계속적으로 이루어지도록 그 직무를 다해야 한다. 또한 이러한 맡겨진 하나님 나라의 사역이 지속되도록 합당한 직분자들을 세워 봉사하도록 해야 한다. 또한 성도 각자는 교회의 권위와 규칙을 존중하는 마음을 가지고 교회에 순종하고, 교회는 건전한 권징을 통해 그리스도의 사랑과 통치를 실천해 나가야 한다.
본 논문의 시작은 16세기 종교개혁시대의 로마 카톨릭과 재세례파에 대한 비판으로부터 시작하였다. 로마 카톨릭의 경우, 종교 개혁자들과의 차이 그 모든 것의 시작은 계시관의 차이에서 출발하였다. 인간의 판단이 개입될 여지가 있었던 계시관에 있어서의 차이가 교리에 다름을 가져오고, 이는 현실의 교회 모습에 엄청난 차이를 가져왔다. 교회의 본질이 삼위일체적 하나님의 구속 사역에 바탕을 둔 것이기 보다는, 명칭과 형식의 교회, 정말 눈에 보이는 교회의 존속을 위하여 변질되어 있음을 볼 수 있었다. 교황을 정점으로 하는 권위 구조를 봉사하기 위한 단일성, 거룩성, 보편성, 사도성의 논리와 그 귀결이라 할 수 있는 교황의 무오성, 그리고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가 충만하고 역사하는 연합이 아니라, 오직 그 형식으로 인간의 나약함과 악함을 채우는 예배와 성사들, 또한 명목상의 교회 조직을 보호하고 그 기득권을 유지하기 위해 성도의 삶을 부당하게 간섭하고 세상의 권세에 대해서도 거침없는 욕망을 가졌던 모습들, 이 모든 것이 잘못된 교회의 모습이었고, 그 잘못의 근원은 교리, 교회론의 왜곡이었다. 또한 재세례파의 경우, 종교 개혁자들과 같은 ‘오직 성경’에서부터 시작하였으나, 실제의 삶과 실제의 교회의 모습에서 온전하게 하나님의 사역과 하나님 나라의 모습을 온전히 이해하지도 못했고, 드러내지도 못하였다. 물론 잘못된 로마 카톨릭과 국가교회의 상황과 그들이 가진 권력 앞에서 그들이 무엇인가 선택할 수 있는 폭을 좁았을 것이다. 그러나 동시대의 칼빈과 같은 종교개혁자들과 비교하여 보았을 때, 그들이 선택한 판단과 행동, 즉 정교분리, 유아세례 반대 등과 같은 세속분리는 성경의 부분적 이해를 드러내었을 뿐이었고, 스스로의 고립을 자초할 따름이었고, 이는 어찌보면 로마 카톨릭이 빠졌던 자의적인 인간의 판단에 다름 아니라고 하겠다. 칼빈은 그 교회론을 오직 성경을 중심으로, 종교 개혁의 신학 전체 흐름 속에서, 교리의 은혜와 그 풍성함이 온전히 녹아져 내리도록 대담하면서도 치밀하게 또한 섬세하게 전개해 나아간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전적인 주권과 한량없는 사랑으로, 그리스도의 보혈로 선택하시고 구원하신 당신의 자녀들이 삶 속에서 그 선택의 은혜가 계속 역사하고 충만하도록, 또한 하나님 나라와 그 사역이 계속 선포되고 풍성해지도록 이 땅에 교회를 주셨다. 그러므로 교회의 본질은 그 머리되신 그리스도와 지체된 성도의 연합이다. 물론 가시적인 교회가 온전히 비가시적인 교회를 나타내지 못하더라도 오직 겸손한 마음과 선량한 믿음으로 교회를 떠나서는 안되며, 연합과 일치를 위하여 더욱 서로에 대한 용서와 관용, 사랑을 베풀어야 할 것이다. 참 교회는 하나님의 말씀이 순수하게 선포하고, 약속의 징표인 성례가 합법적으로 시행하여, 그리스도와의 연합이 성령의 역사를 통하여 계속적으로 이루어지도록 그 직무를 다해야 한다. 또한 이러한 맡겨진 하나님 나라의 사역이 지속되도록 합당한 직분자들을 세워 봉사하도록 해야 한다. 또한 성도 각자는 교회의 권위와 규칙을 존중하는 마음을 가지고 교회에 순종하고, 교회는 건전한 권징을 통해 그리스도의 사랑과 통치를 실천해 나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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