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빈의 삼위일체적 언약신학 : 통일적 상호관련성(페리코레시스)에서 본 하나님의 숨겨진 뜻과 나타난 뜻 Calvin's Trinitarian Covenant Theology: The Co-Relational Unity Between The Revealed Will of God And The Hidden Will of God in Terms of "Perichoresis"원문보기
칼빈의 신학과 후대 칼빈주의자들의 신학 사이의 연속성과 불연속성의 문제의 중심에는 사실상 칼빈의 신학의 원리가 무엇인가 하는 문제가 놓여있다. 칼빈 신학의 원리의 문제는 ‘반대되는 것들의 복합체’라 불릴 만큼 칼빈의 신학에 내재되어 있는 복잡성 때문이다. 곧 칼빈의 신학에서 발견되는 외견상, 또는 논리적으로는 서로 반대되는 것처럼 보이는 것들에 대한 진술이 동시에 나타나고 있다고 하는 사실은 칼빈을 연구하는 학자들이 칼빈의 신학을 이해함에 어려움을 주고 있는 것이다. 더욱이 이러한 문제의 심각성은 이러한 칼빈의 진술들이 성경에 기...
칼빈의 신학과 후대 칼빈주의자들의 신학 사이의 연속성과 불연속성의 문제의 중심에는 사실상 칼빈의 신학의 원리가 무엇인가 하는 문제가 놓여있다. 칼빈 신학의 원리의 문제는 ‘반대되는 것들의 복합체’라 불릴 만큼 칼빈의 신학에 내재되어 있는 복잡성 때문이다. 곧 칼빈의 신학에서 발견되는 외견상, 또는 논리적으로는 서로 반대되는 것처럼 보이는 것들에 대한 진술이 동시에 나타나고 있다고 하는 사실은 칼빈을 연구하는 학자들이 칼빈의 신학을 이해함에 어려움을 주고 있는 것이다. 더욱이 이러한 문제의 심각성은 이러한 칼빈의 진술들이 성경에 기초한 것으로 성경에서 또한 이러한 진술들을 얼마든지 찾아 낼 수 있다는데 있다. 그러므로 이러한 성경과 칼빈의 신학에 나타나고 있는 논리적으로 상반된 진술들의 문제는 단순히 칼빈의 신학에서 뿐만이 아니라 기독교 신학의 역사 전반에 걸쳐 논의되어져 온, 풀기 어려운 신학적 과제와도 같은 것이라 할 수 있다. 일견 논리적으로 반대되는 것들의 복합체처럼 보이는 칼빈의 신학을 통전적으로 이해하기 위해 필수적인 것은 칼빈의 삼위일체교리 이해와 언약사상 그리고 거기에 칼빈의 “perichoresis” 개념과 활용을 이해하는 것이다. 칼빈에게 있어서 구원은 근본적으로 삼위하나님으로서 하나님께서 인간과 가지시는 언약관계 속에서 이해된다. 이러한 삼위하나님의 인간과의 언약관계는 세 영역으로 구별되는데, 곧 삼위하나님께서 온 세상 모든 사람들과 차별없이 가지시는 언약관계로서 “세상”의 영역과, 삼위하나님께서 믿는 자들과 가지시는 언약관계로서 “교회”의 영역, 그리고 삼위하나님 안에 삼위사이의 내적 관계로서 “하나님의 나라”의 영역이 그것이다. 하나님의 뜻은 각기 영역이 달라지면 그 영역 안에서 다르게 나타난다. 그리고 이러한 각기 구별되는 세 영역들과 그 영역들 안에 구별되게 나타나는 하나님의 뜻은 서로 상관적으로 통일되어 있다. 곧 통일적 상관성(perichoresis)를 가진다. 칼빈에게서 이러한 서로 구별되는 세 영역과 더불어 이러한 영역들 간의 페리코레시스적 상관관계와 통일성을 이해하는 것은 복음과 예정의 관계, 곧 나타난 하나님의 뜻과 숨겨진 하나님의 뜻 사이의 통일적 상관관계를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하다. 모든 사람 곧 세상과 관계하시는 관계 속에서 성부는 온 세상의 아버지로서 온 세상을 사랑으로 돌보시며 온 세상을 그에게로 부르시는 분이시며, 성자는 온 세상에 아버지와 아버지의 사랑을 보이시는 온 세상의 중보자이시며, 성령은 성자를 온 세상이 보이심으로 성부의 사랑을 온 세상에 알게 하시는 분이시다. 온 세상과 관계하시는 관계 속에서 성부는 성자를 통하여 성령으로 온 세상을 자기에게로 부르고 계신다. 믿는 자들 곧 교회와 관계하시는 관계 속에서 성부는 믿는 자들의 아버지가 되셔서 그들을 돌보시며 그들을 부르시며, 성자는 믿는 자들의 중보자가 되셔서 그들에게 아버지의 사랑을 보이심으로 그들을 위한 중보자가 되시고, 성령은 믿는 자들을 위한 보증이시다. 믿는 자들과 관계하시는 관계 속에서 성부는 성자를 통하여 성령으로 믿는 자들을 자신에게로 부르신다. 한편, 숨겨진 하나님의 나라의 영역에서 성부는 선택자들의 아버지가 되셔서 그들을 사랑하시며 그들을 자기에게로 부르시는 분이시며, 성자는 선택자들의 중보자가 되시며, 성령은 선택자들의 구원의 보증이 되신다. 결론적으로 삼위일체교리와 언약사상은 칼빈의 신학을 구성함에 있어서 불가분의 관계 속에서 엮여져 있으며, 이러한 칼빈의 신학은 그러므로 삼위일체적-언약적 신학(a trinitarian-covenantal theology)이라고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와 같은 칼빈의 성경의 진리에 대한 삼위일체적-언약적 이해 속에는 ‘위’로부터의 시각과 ‘밑’으로부터의 시각이 동시에 나타나며 또한 서로 구별되지만 그러나 연속성 속에 있는 세 영역, 곧 ‘세상’, ‘교회’, 그리고 ‘하나님의 나라’라고 하는 세 영역이 나타난다. 이 세 영역은 각기 하나님께서 온 세상과 맺으시는 관계와 신자(이 땅위에서 가시적으로 복음의 약속을 받아들임으로 교회의 회원이 된 자)와 맺으시는 관계 그리고 선택자와 맺으시는 관계를 의미한다. 이러한 하나님의 구원과 관련한 그의 피조물과의 3중적 관계는 서로 구별되지만 분리되거나 섞이지 아니한다. 즉, 하나님께서 온 세상과 맺으시는 관계가 교회와 맺으시는 관계와 같지 않지만 그러난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는 서로 연관성 속에 놓이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 교회와 맺으시는 관계는 선택자와 맺으시는 관계와 동일한 것이 아니지만 이는 또한 서로 뗄 수 없는 연관성 속에 있는 것이다. 이렇게 서로 구별되는 세 영역 속에서 하나님은 삼위하나님으로서 관계를 맺으시고 사역하신다. 칼빈에게 있어서 구원은 삼위하나님과 그의 피조물 사이에 맺어지는 삼중적 관계로서 이러한 서로 구별되는 세 영역 속에서, 한편 위로부터의 시각과 또 한편 ‘밑’으로부터의 시각에서 살펴지고 이해되어지고 있다. 이러한 칼빈의 삼위일체 신학적-언약적 구원 이해의 특징은 ex post facto explanation이라는 말로 표현할 수 있을 것이다.
칼빈의 신학과 후대 칼빈주의자들의 신학 사이의 연속성과 불연속성의 문제의 중심에는 사실상 칼빈의 신학의 원리가 무엇인가 하는 문제가 놓여있다. 칼빈 신학의 원리의 문제는 ‘반대되는 것들의 복합체’라 불릴 만큼 칼빈의 신학에 내재되어 있는 복잡성 때문이다. 곧 칼빈의 신학에서 발견되는 외견상, 또는 논리적으로는 서로 반대되는 것처럼 보이는 것들에 대한 진술이 동시에 나타나고 있다고 하는 사실은 칼빈을 연구하는 학자들이 칼빈의 신학을 이해함에 어려움을 주고 있는 것이다. 더욱이 이러한 문제의 심각성은 이러한 칼빈의 진술들이 성경에 기초한 것으로 성경에서 또한 이러한 진술들을 얼마든지 찾아 낼 수 있다는데 있다. 그러므로 이러한 성경과 칼빈의 신학에 나타나고 있는 논리적으로 상반된 진술들의 문제는 단순히 칼빈의 신학에서 뿐만이 아니라 기독교 신학의 역사 전반에 걸쳐 논의되어져 온, 풀기 어려운 신학적 과제와도 같은 것이라 할 수 있다. 일견 논리적으로 반대되는 것들의 복합체처럼 보이는 칼빈의 신학을 통전적으로 이해하기 위해 필수적인 것은 칼빈의 삼위일체교리 이해와 언약사상 그리고 거기에 칼빈의 “perichoresis” 개념과 활용을 이해하는 것이다. 칼빈에게 있어서 구원은 근본적으로 삼위하나님으로서 하나님께서 인간과 가지시는 언약관계 속에서 이해된다. 이러한 삼위하나님의 인간과의 언약관계는 세 영역으로 구별되는데, 곧 삼위하나님께서 온 세상 모든 사람들과 차별없이 가지시는 언약관계로서 “세상”의 영역과, 삼위하나님께서 믿는 자들과 가지시는 언약관계로서 “교회”의 영역, 그리고 삼위하나님 안에 삼위사이의 내적 관계로서 “하나님의 나라”의 영역이 그것이다. 하나님의 뜻은 각기 영역이 달라지면 그 영역 안에서 다르게 나타난다. 그리고 이러한 각기 구별되는 세 영역들과 그 영역들 안에 구별되게 나타나는 하나님의 뜻은 서로 상관적으로 통일되어 있다. 곧 통일적 상관성(perichoresis)를 가진다. 칼빈에게서 이러한 서로 구별되는 세 영역과 더불어 이러한 영역들 간의 페리코레시스적 상관관계와 통일성을 이해하는 것은 복음과 예정의 관계, 곧 나타난 하나님의 뜻과 숨겨진 하나님의 뜻 사이의 통일적 상관관계를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하다. 모든 사람 곧 세상과 관계하시는 관계 속에서 성부는 온 세상의 아버지로서 온 세상을 사랑으로 돌보시며 온 세상을 그에게로 부르시는 분이시며, 성자는 온 세상에 아버지와 아버지의 사랑을 보이시는 온 세상의 중보자이시며, 성령은 성자를 온 세상이 보이심으로 성부의 사랑을 온 세상에 알게 하시는 분이시다. 온 세상과 관계하시는 관계 속에서 성부는 성자를 통하여 성령으로 온 세상을 자기에게로 부르고 계신다. 믿는 자들 곧 교회와 관계하시는 관계 속에서 성부는 믿는 자들의 아버지가 되셔서 그들을 돌보시며 그들을 부르시며, 성자는 믿는 자들의 중보자가 되셔서 그들에게 아버지의 사랑을 보이심으로 그들을 위한 중보자가 되시고, 성령은 믿는 자들을 위한 보증이시다. 믿는 자들과 관계하시는 관계 속에서 성부는 성자를 통하여 성령으로 믿는 자들을 자신에게로 부르신다. 한편, 숨겨진 하나님의 나라의 영역에서 성부는 선택자들의 아버지가 되셔서 그들을 사랑하시며 그들을 자기에게로 부르시는 분이시며, 성자는 선택자들의 중보자가 되시며, 성령은 선택자들의 구원의 보증이 되신다. 결론적으로 삼위일체교리와 언약사상은 칼빈의 신학을 구성함에 있어서 불가분의 관계 속에서 엮여져 있으며, 이러한 칼빈의 신학은 그러므로 삼위일체적-언약적 신학(a trinitarian-covenantal theology)이라고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와 같은 칼빈의 성경의 진리에 대한 삼위일체적-언약적 이해 속에는 ‘위’로부터의 시각과 ‘밑’으로부터의 시각이 동시에 나타나며 또한 서로 구별되지만 그러나 연속성 속에 있는 세 영역, 곧 ‘세상’, ‘교회’, 그리고 ‘하나님의 나라’라고 하는 세 영역이 나타난다. 이 세 영역은 각기 하나님께서 온 세상과 맺으시는 관계와 신자(이 땅위에서 가시적으로 복음의 약속을 받아들임으로 교회의 회원이 된 자)와 맺으시는 관계 그리고 선택자와 맺으시는 관계를 의미한다. 이러한 하나님의 구원과 관련한 그의 피조물과의 3중적 관계는 서로 구별되지만 분리되거나 섞이지 아니한다. 즉, 하나님께서 온 세상과 맺으시는 관계가 교회와 맺으시는 관계와 같지 않지만 그러난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는 서로 연관성 속에 놓이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 교회와 맺으시는 관계는 선택자와 맺으시는 관계와 동일한 것이 아니지만 이는 또한 서로 뗄 수 없는 연관성 속에 있는 것이다. 이렇게 서로 구별되는 세 영역 속에서 하나님은 삼위하나님으로서 관계를 맺으시고 사역하신다. 칼빈에게 있어서 구원은 삼위하나님과 그의 피조물 사이에 맺어지는 삼중적 관계로서 이러한 서로 구별되는 세 영역 속에서, 한편 위로부터의 시각과 또 한편 ‘밑’으로부터의 시각에서 살펴지고 이해되어지고 있다. 이러한 칼빈의 삼위일체 신학적-언약적 구원 이해의 특징은 ex post facto explanation이라는 말로 표현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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