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시대 문헌에는 遷都, 전쟁, 외교관계, 國亂, 권력자의 질병, 국가적 행사 擇日, 왕위계승자 결정 등 국가적 巨事를 앞두고 정책 결정 방향에 대한 조언을 얻거나 국론 분열로 인한 갈등을 수습할 필요가 클 때, 왕이나 집권 세력의 명령에 의하여 점복이 행해졌다. 점복 계기별 담당자를 살펴보면 모든 점복 의식에는 국왕, 관료, 점복관이 함께 참여하였던 것 같다. 이 시기에는 국가적 점복을 담당하는 태복감이라는 전문 관청이 있었고, 과거 제도를 통해 직업적 점복관을 뽑아 관청 직제를 구성하였다. 고려시대 점복의 방법은 시초점, 거북점, 육임점, 둔갑삼기법, 척자점, 제비뽑기점, 태현경으로 치는 점 등 다양한 양상을 보였다. 점복은 주로 태묘나 태조 진전, 신사와 같은 정치적 상징성을 지닌 장소에서 행해졌다. 그리고 국가 안정과 점괘가 잘 맞기를 바라는 기도를 올린 후, 의례를 갖추어 행해진 것으로 보인다. 고려인들은 국가 차원 점복의 결과를 수용하여 국가 정책에 반영하기도 하고, 때로는 점복 결과와 상관없이 정책을 시행하기도 하였다. 대부분의 경우 점복 결과를 수용하였던 것 같다. 그러나 공민왕대와 우왕대 천도를 두고 행한 점복은 예외이다. 그리고 당시인들은 점복 결과를 무조건 수용하지는 않고, 정치 세력의 역학 관계나 상황 조건 때문에 수용하지 못하는 수도 없지 않았다. 점복은 당대 사회에서 인간이 미래를 알고 싶어하는 호기심을 충족시켜 주었을 것이다. 그리고 점복관은 왕의 측근으로서 조언자나 자문관으로서의 의미도 가졌던 것 같다. 또 전쟁이나 국난 위기에 행해진 점복은 사기 진작을 위한 목적이 컸던 것으로 보인다. 천도나 왕위계승자를 결정하기 위해 점복은 대중들에게 당위성과 설득력을 얻어 집권자의 정치 기반 확대나 사회분위기 조성에 도움을 주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즉, 사회 전체의 의견을 한 방향으로 이끄는 정치 ․ 사회적 의미를 가졌던 것이다. 당대 집권세력은 국가 차원의 점복을 통해 집단 심리를 형성하게 하고, 이를 국정 운영에 정책적으로 활용하고자 하였음을 추측할 수 있다. 당시 국가 차원의 점복을 단순히 미신이나 비과학적인 맹신으로 치부해 버려서는 안된다. 고려시대라는 시대적 맥락 속에서 점복의 결과를 당시 정황을 고려하여 수용하고, 점복의 정치 ․ 사회적 의미를 정책에 이용하였던 양상을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 앞으로 이와 같이 역사를 보는 다양한 시각과 해석 방식이 누적된다면, 당시인들이 공유했던 心性의 실체에 근접해 ...
고려시대 문헌에는 遷都, 전쟁, 외교관계, 國亂, 권력자의 질병, 국가적 행사 擇日, 왕위계승자 결정 등 국가적 巨事를 앞두고 정책 결정 방향에 대한 조언을 얻거나 국론 분열로 인한 갈등을 수습할 필요가 클 때, 왕이나 집권 세력의 명령에 의하여 점복이 행해졌다. 점복 계기별 담당자를 살펴보면 모든 점복 의식에는 국왕, 관료, 점복관이 함께 참여하였던 것 같다. 이 시기에는 국가적 점복을 담당하는 태복감이라는 전문 관청이 있었고, 과거 제도를 통해 직업적 점복관을 뽑아 관청 직제를 구성하였다. 고려시대 점복의 방법은 시초점, 거북점, 육임점, 둔갑삼기법, 척자점, 제비뽑기점, 태현경으로 치는 점 등 다양한 양상을 보였다. 점복은 주로 태묘나 태조 진전, 신사와 같은 정치적 상징성을 지닌 장소에서 행해졌다. 그리고 국가 안정과 점괘가 잘 맞기를 바라는 기도를 올린 후, 의례를 갖추어 행해진 것으로 보인다. 고려인들은 국가 차원 점복의 결과를 수용하여 국가 정책에 반영하기도 하고, 때로는 점복 결과와 상관없이 정책을 시행하기도 하였다. 대부분의 경우 점복 결과를 수용하였던 것 같다. 그러나 공민왕대와 우왕대 천도를 두고 행한 점복은 예외이다. 그리고 당시인들은 점복 결과를 무조건 수용하지는 않고, 정치 세력의 역학 관계나 상황 조건 때문에 수용하지 못하는 수도 없지 않았다. 점복은 당대 사회에서 인간이 미래를 알고 싶어하는 호기심을 충족시켜 주었을 것이다. 그리고 점복관은 왕의 측근으로서 조언자나 자문관으로서의 의미도 가졌던 것 같다. 또 전쟁이나 국난 위기에 행해진 점복은 사기 진작을 위한 목적이 컸던 것으로 보인다. 천도나 왕위계승자를 결정하기 위해 점복은 대중들에게 당위성과 설득력을 얻어 집권자의 정치 기반 확대나 사회분위기 조성에 도움을 주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즉, 사회 전체의 의견을 한 방향으로 이끄는 정치 ․ 사회적 의미를 가졌던 것이다. 당대 집권세력은 국가 차원의 점복을 통해 집단 심리를 형성하게 하고, 이를 국정 운영에 정책적으로 활용하고자 하였음을 추측할 수 있다. 당시 국가 차원의 점복을 단순히 미신이나 비과학적인 맹신으로 치부해 버려서는 안된다. 고려시대라는 시대적 맥락 속에서 점복의 결과를 당시 정황을 고려하여 수용하고, 점복의 정치 ․ 사회적 의미를 정책에 이용하였던 양상을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 앞으로 이와 같이 역사를 보는 다양한 시각과 해석 방식이 누적된다면, 당시인들이 공유했던 心性의 실체에 근접해 갈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고려시대 문헌에는 遷都, 전쟁, 외교관계, 國亂, 권력자의 질병, 국가적 행사 擇日, 왕위계승자 결정 등 국가적 巨事를 앞두고 정책 결정 방향에 대한 조언을 얻거나 국론 분열로 인한 갈등을 수습할 필요가 클 때, 왕이나 집권 세력의 명령에 의하여 점복이 행해졌다. 점복 계기별 담당자를 살펴보면 모든 점복 의식에는 국왕, 관료, 점복관이 함께 참여하였던 것 같다. 이 시기에는 국가적 점복을 담당하는 태복감이라는 전문 관청이 있었고, 과거 제도를 통해 직업적 점복관을 뽑아 관청 직제를 구성하였다. 고려시대 점복의 방법은 시초점, 거북점, 육임점, 둔갑삼기법, 척자점, 제비뽑기점, 태현경으로 치는 점 등 다양한 양상을 보였다. 점복은 주로 태묘나 태조 진전, 신사와 같은 정치적 상징성을 지닌 장소에서 행해졌다. 그리고 국가 안정과 점괘가 잘 맞기를 바라는 기도를 올린 후, 의례를 갖추어 행해진 것으로 보인다. 고려인들은 국가 차원 점복의 결과를 수용하여 국가 정책에 반영하기도 하고, 때로는 점복 결과와 상관없이 정책을 시행하기도 하였다. 대부분의 경우 점복 결과를 수용하였던 것 같다. 그러나 공민왕대와 우왕대 천도를 두고 행한 점복은 예외이다. 그리고 당시인들은 점복 결과를 무조건 수용하지는 않고, 정치 세력의 역학 관계나 상황 조건 때문에 수용하지 못하는 수도 없지 않았다. 점복은 당대 사회에서 인간이 미래를 알고 싶어하는 호기심을 충족시켜 주었을 것이다. 그리고 점복관은 왕의 측근으로서 조언자나 자문관으로서의 의미도 가졌던 것 같다. 또 전쟁이나 국난 위기에 행해진 점복은 사기 진작을 위한 목적이 컸던 것으로 보인다. 천도나 왕위계승자를 결정하기 위해 점복은 대중들에게 당위성과 설득력을 얻어 집권자의 정치 기반 확대나 사회분위기 조성에 도움을 주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즉, 사회 전체의 의견을 한 방향으로 이끄는 정치 ․ 사회적 의미를 가졌던 것이다. 당대 집권세력은 국가 차원의 점복을 통해 집단 심리를 형성하게 하고, 이를 국정 운영에 정책적으로 활용하고자 하였음을 추측할 수 있다. 당시 국가 차원의 점복을 단순히 미신이나 비과학적인 맹신으로 치부해 버려서는 안된다. 고려시대라는 시대적 맥락 속에서 점복의 결과를 당시 정황을 고려하여 수용하고, 점복의 정치 ․ 사회적 의미를 정책에 이용하였던 양상을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 앞으로 이와 같이 역사를 보는 다양한 시각과 해석 방식이 누적된다면, 당시인들이 공유했던 心性의 실체에 근접해 갈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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