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 연구는 플라톤의 좋음의 이데아가 현실 문제에 대한 해결책이란 관점에서, 플라톤의 교육론에 어떤 위상을 갖는지 고찰하고, 그 현대 교육적 의미를 확인한 것이다. 특히, 플라톤이 ‘좋음의 이데아’란 개념을 요청하게 된 이유와 그 의미, 그리고 교육적 맥락이 무엇인지 살펴보았다. Ⅱ장에서는 좋음의 개념이 당시 그리스의 현실 문제를 개혁하기 위해 도입된 것임을 검토하였다. 플라톤 생존 시기의 그리스는 페르시아 전쟁의 승리와 펠로폰네소스전쟁으로 인한...
본 연구는 플라톤의 좋음의 이데아가 현실 문제에 대한 해결책이란 관점에서, 플라톤의 교육론에 어떤 위상을 갖는지 고찰하고, 그 현대 교육적 의미를 확인한 것이다. 특히, 플라톤이 ‘좋음의 이데아’란 개념을 요청하게 된 이유와 그 의미, 그리고 교육적 맥락이 무엇인지 살펴보았다. Ⅱ장에서는 좋음의 개념이 당시 그리스의 현실 문제를 개혁하기 위해 도입된 것임을 검토하였다. 플라톤 생존 시기의 그리스는 페르시아 전쟁의 승리와 펠로폰네소스전쟁으로 인한 사회 몰락의 시기였다. 이런 혼란 상황에서 관습과 법률의 붕괴와 언어의 변화는 사람들 사이에 많은 분쟁을 야기하여 삶의 올바른 기준을 해체시켰다. 플라톤은 탐욕(pleonexia)에 대해 매우 경계한다. 그가 절제의 덕목을 강조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플라톤은 노모이의 붕괴를 가장 중요한 문제로 보았다. 왜냐하면 사람들이 삶을 살아가는 방식(tropos)의 근거가 사라졌기 때문이다. 그는 이러한 근본적 원인이 교육에 있다고 보았다. 페르시아전쟁 이후 경제적 부흥과 더불어 다양한 욕구가 발생한 아테네에 ‘인간은 만물의 척도다’라는 프로타고라스의 언사로 대표되는 소피스테스가 등장한다. 그들은 진리나 절대적 가치를 부정했다. 절대적․객관적 기준이 없는 그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자신이 그렇다고 여기는 것에 대한 주장을 관철하는 것이다. 플라톤은 이들의 이러한 말들을 무비판적으로 수용하고 이를 재생산하는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다툼이 발생한다고 생각했다. 객관적 기준이 없기에 자신의 의견과 타인의 의견 사이에 충돌은 필연적이기 때문이다. 객관적인 기준의 부재는 욕구의 기준 또한 개인에게 맡겨진 것이다. 이에 자연스럽게 탐욕으로 이어지고, 특히 권력에 대한 탐욕은 탐욕의 대상자만이 아니라 공동체에 속한 시민들의 삶마저 피폐하게 만들었다. 이러한 시대적 상황에서 ‘좋음’에 요구는 당연한 것이다. 이런 사회적 배경은 플라톤이 ‘좋음’의 이데아를 구상한 이유가 되었다. 이와 동시에 ‘좋음’ 이데아의 교육적 요청은 소피스테스들의 교육을 비판하면서 등장하였다. 당시 소피스테스들은 학생들의 고유한 성향과 관계없이 그들이 원하는 대로 인간을 만들 수 있다고 보았는데, 이는 교사에게 학생을 선택할 권리를 포기하게 만들었고, 학생에게는 자신의 자질을 발현할 수 없게 만들었다. 이러한 비교육적 상황은 플라톤에게 교육에서의 ‘좋음’ 이데아를 고려하게 만들었다. Ⅲ장에서는 <<국가>>의 세 가지 비유를 중심으로 좋음의 이데아의 의미를 구명하고 그 위상을 개인과 사회의 차원에서 검토하였다. 좋음의 이데아는 ‘지성’과 ‘지성의 대상’이 목적으로 하는 것이며, 또한 이 각각을 존재하게 하는 원인이다. 태양의 비유에서 제기된 좋음의 이데아의 이중성은 선분의 비유와 동굴의 비유를 통해 그 의미를 확인하였다. 선분의 비유에서 현실세계와 이데아 세계의 관계 구명을 통해 ‘원인’임을 확인하였으며, 동시에 인식의 가능성을 확인하였다. 동굴의 비유에서는 지성과 지성의 대상이 목적으로 삼는 이유가 바로 본(paradeigma)을 확보하기 위한 것임을 검토하였다. 세 비유에 대한 종합적 검토를 통해 좋음의 이데아가 ‘있음 그 자체’와 동일한 의미를 지닌다는 것을 구명하였다. 좋음의 이데아는 개인과 사회에 각각 특별한 위상을 갖는다. 우리는 좋음을 제외한 다른 많은 지식을 안다 할지라도 이는 유용하고 유익할 수 없다. 그 지식이 어떤 점에서 좋은지 규명할 수 없기 때문이다. 유익은 필요에 알맞은 충족으로 이해할 수 있다. 필요의 충족을 기준으로 이를 넘어서면 탐욕이고 모자라면 결핍인 것이다. 필요라는 척도는 좋음의 이데아에 대한 인식이후 확보할 수 있다. 사회에서 개인의 있음을 확인해주고 개인은 이를 통해 자신의 이익 상태를 유지할 수 있는 것이다. 플라톤은 이러한 문제의 시발점을 기준(paradeigma)이 사라진 언어에 있다고 보고, 각각의 언어에 대한 규정을 마련하고자 하였다. 이러한 방식은 플라톤의 고유한 방식은 아니다. 그의 스승인 소크라테스의 철학 방식이기도 하다. 소크라테스는 언어 규정 형식을 확보하고자 하는데 그쳤다면, 플라톤은 그러한 언어 규정 형식이 실재한다는 것에서 출발한다. 이는 절대적 객관성을 확보할 수 있다는 것에 의미를 지니며, 이러한 객관성 아래에서는 이것에 대한 앎만 잘 선행되면 나쁨은 종식될 수 있는 것이다. 이에 그가 궁극적으로 요청하는 것이 좋음의 이데아이다. Ⅳ장에서는 좋음의 이데아가 플라톤 교육론에서 지니는 의미에 대해 교육본질과 교육방법의 측면에서 고찰하였다. 개인에게 있어 교육의 본질은 자아실현이다. 플라톤은 각 개인 모두 고유한 성향이 있다고 생각했다. 개인의 고유한 성향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사회가 전제되었을 때 가능하다. 또한 이러한 사회의 유지·보존은 좋음의 이데아는 유용과 유익이라는 특별한 위상을 갖는다. 우리는 좋음을 제외한 어떠한 지식을 안다 할지라도 이는 유용하고 유익할 수 없다. 그 지식이 어떤 점에서 좋은지 규명할 수 없기 때문이다. ‘저것은 무엇인가’라는 물음은 플라톤에게 있어서 목적론적 이해로만 대답할 수 있는 것이다. 예컨대 책상이 무엇인가라는 물음에 나무판자와 네 개의 다리로 이뤄진 것이라는 답변은 책상의 본질을 규명한 것이 아니다. 책상은 사람이 의자에 앉아 그 위에서 밥을 먹거나 공부를 할 수 있는 것이라는 대답이 그가 원하는 답이다. 플라톤에게 인공물만이 아닌 모든 있는 것들에 대한 객관적 지식은 그의 목적론적 사고에서만 확보될 수 있는 것이다. 유익은 필요에 알맞은 충족으로 이해할 수 있다. 필요의 충족을 기준으로 이를 넘어서면 탐욕이고 모자라면 결핍인 것이다. 필요라는 척도는 좋음의 이데아에 대한 인식으로 확보할 수 있는 것이다. 필요는 곧 고유한 개개인의 있음에서 결핍된 만큼 느끼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를 사회에서 개인의 있음을 확인해주고 개인은 이를 통해 자신의 이익 상태를 유지할 수 있는 것이다. 유용은 각 대상의 고유한 기능(ergon)을 가능케 했을 때의 상태이다. 이러한 상태가 지속되는 상태가 바로 좋은 상태(aretē)인 것이다. 플라톤이 국가에서 제시하고 있는 교육내용과 방법은 생성의 세계에 고착하고 있는 영혼을 실재의 세계로 전환하기 위한 방책이며, 이는 결국 좋음의 이데아에 대한 앎을 위한 것이다. 좋음의 이데아에 대한 앎은 다시 현실의 세계에서의 개인의 고유한 있음에 참여할 수 있도록 하며, 이러한 자아실현의 가능성은 사회의 자족을 전제한다. 좋음의 이데아는 개인의 고유성과 사회라는 보편을 모두 실현하고 이를 보존할 수 있는 원리로 작용한다. 이러한 교육본질을 실현하기 위한 교육방법으로는 ‘양육과 선발’, ‘설득과 강제’가 있다. 양육의 목적은 고유한 개인의 본성(physis)을 지키고 함양하기 위한 것이며, 선발은 개인의 성향이 좋음의 이데아를 인식하는데 적합한지에 대한 끊임없는 확인이다. 설득과 강제는 동일한 것에 대해 상반되는 의견을 가졌을 때 동원되는 방법이며, 설득은 말(logos)을 통한 영혼의 인도이며, 강제는 일종의 제약이다. 특히 강제의 경우 전환의 순간에 필요시 요청되며, 배움의 순간에는 어떠한 강제도 허용되지 않는다.
본 연구는 플라톤의 좋음의 이데아가 현실 문제에 대한 해결책이란 관점에서, 플라톤의 교육론에 어떤 위상을 갖는지 고찰하고, 그 현대 교육적 의미를 확인한 것이다. 특히, 플라톤이 ‘좋음의 이데아’란 개념을 요청하게 된 이유와 그 의미, 그리고 교육적 맥락이 무엇인지 살펴보았다. Ⅱ장에서는 좋음의 개념이 당시 그리스의 현실 문제를 개혁하기 위해 도입된 것임을 검토하였다. 플라톤 생존 시기의 그리스는 페르시아 전쟁의 승리와 펠로폰네소스전쟁으로 인한 사회 몰락의 시기였다. 이런 혼란 상황에서 관습과 법률의 붕괴와 언어의 변화는 사람들 사이에 많은 분쟁을 야기하여 삶의 올바른 기준을 해체시켰다. 플라톤은 탐욕(pleonexia)에 대해 매우 경계한다. 그가 절제의 덕목을 강조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플라톤은 노모이의 붕괴를 가장 중요한 문제로 보았다. 왜냐하면 사람들이 삶을 살아가는 방식(tropos)의 근거가 사라졌기 때문이다. 그는 이러한 근본적 원인이 교육에 있다고 보았다. 페르시아전쟁 이후 경제적 부흥과 더불어 다양한 욕구가 발생한 아테네에 ‘인간은 만물의 척도다’라는 프로타고라스의 언사로 대표되는 소피스테스가 등장한다. 그들은 진리나 절대적 가치를 부정했다. 절대적․객관적 기준이 없는 그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자신이 그렇다고 여기는 것에 대한 주장을 관철하는 것이다. 플라톤은 이들의 이러한 말들을 무비판적으로 수용하고 이를 재생산하는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다툼이 발생한다고 생각했다. 객관적 기준이 없기에 자신의 의견과 타인의 의견 사이에 충돌은 필연적이기 때문이다. 객관적인 기준의 부재는 욕구의 기준 또한 개인에게 맡겨진 것이다. 이에 자연스럽게 탐욕으로 이어지고, 특히 권력에 대한 탐욕은 탐욕의 대상자만이 아니라 공동체에 속한 시민들의 삶마저 피폐하게 만들었다. 이러한 시대적 상황에서 ‘좋음’에 요구는 당연한 것이다. 이런 사회적 배경은 플라톤이 ‘좋음’의 이데아를 구상한 이유가 되었다. 이와 동시에 ‘좋음’ 이데아의 교육적 요청은 소피스테스들의 교육을 비판하면서 등장하였다. 당시 소피스테스들은 학생들의 고유한 성향과 관계없이 그들이 원하는 대로 인간을 만들 수 있다고 보았는데, 이는 교사에게 학생을 선택할 권리를 포기하게 만들었고, 학생에게는 자신의 자질을 발현할 수 없게 만들었다. 이러한 비교육적 상황은 플라톤에게 교육에서의 ‘좋음’ 이데아를 고려하게 만들었다. Ⅲ장에서는 <<국가>>의 세 가지 비유를 중심으로 좋음의 이데아의 의미를 구명하고 그 위상을 개인과 사회의 차원에서 검토하였다. 좋음의 이데아는 ‘지성’과 ‘지성의 대상’이 목적으로 하는 것이며, 또한 이 각각을 존재하게 하는 원인이다. 태양의 비유에서 제기된 좋음의 이데아의 이중성은 선분의 비유와 동굴의 비유를 통해 그 의미를 확인하였다. 선분의 비유에서 현실세계와 이데아 세계의 관계 구명을 통해 ‘원인’임을 확인하였으며, 동시에 인식의 가능성을 확인하였다. 동굴의 비유에서는 지성과 지성의 대상이 목적으로 삼는 이유가 바로 본(paradeigma)을 확보하기 위한 것임을 검토하였다. 세 비유에 대한 종합적 검토를 통해 좋음의 이데아가 ‘있음 그 자체’와 동일한 의미를 지닌다는 것을 구명하였다. 좋음의 이데아는 개인과 사회에 각각 특별한 위상을 갖는다. 우리는 좋음을 제외한 다른 많은 지식을 안다 할지라도 이는 유용하고 유익할 수 없다. 그 지식이 어떤 점에서 좋은지 규명할 수 없기 때문이다. 유익은 필요에 알맞은 충족으로 이해할 수 있다. 필요의 충족을 기준으로 이를 넘어서면 탐욕이고 모자라면 결핍인 것이다. 필요라는 척도는 좋음의 이데아에 대한 인식이후 확보할 수 있다. 사회에서 개인의 있음을 확인해주고 개인은 이를 통해 자신의 이익 상태를 유지할 수 있는 것이다. 플라톤은 이러한 문제의 시발점을 기준(paradeigma)이 사라진 언어에 있다고 보고, 각각의 언어에 대한 규정을 마련하고자 하였다. 이러한 방식은 플라톤의 고유한 방식은 아니다. 그의 스승인 소크라테스의 철학 방식이기도 하다. 소크라테스는 언어 규정 형식을 확보하고자 하는데 그쳤다면, 플라톤은 그러한 언어 규정 형식이 실재한다는 것에서 출발한다. 이는 절대적 객관성을 확보할 수 있다는 것에 의미를 지니며, 이러한 객관성 아래에서는 이것에 대한 앎만 잘 선행되면 나쁨은 종식될 수 있는 것이다. 이에 그가 궁극적으로 요청하는 것이 좋음의 이데아이다. Ⅳ장에서는 좋음의 이데아가 플라톤 교육론에서 지니는 의미에 대해 교육본질과 교육방법의 측면에서 고찰하였다. 개인에게 있어 교육의 본질은 자아실현이다. 플라톤은 각 개인 모두 고유한 성향이 있다고 생각했다. 개인의 고유한 성향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사회가 전제되었을 때 가능하다. 또한 이러한 사회의 유지·보존은 좋음의 이데아는 유용과 유익이라는 특별한 위상을 갖는다. 우리는 좋음을 제외한 어떠한 지식을 안다 할지라도 이는 유용하고 유익할 수 없다. 그 지식이 어떤 점에서 좋은지 규명할 수 없기 때문이다. ‘저것은 무엇인가’라는 물음은 플라톤에게 있어서 목적론적 이해로만 대답할 수 있는 것이다. 예컨대 책상이 무엇인가라는 물음에 나무판자와 네 개의 다리로 이뤄진 것이라는 답변은 책상의 본질을 규명한 것이 아니다. 책상은 사람이 의자에 앉아 그 위에서 밥을 먹거나 공부를 할 수 있는 것이라는 대답이 그가 원하는 답이다. 플라톤에게 인공물만이 아닌 모든 있는 것들에 대한 객관적 지식은 그의 목적론적 사고에서만 확보될 수 있는 것이다. 유익은 필요에 알맞은 충족으로 이해할 수 있다. 필요의 충족을 기준으로 이를 넘어서면 탐욕이고 모자라면 결핍인 것이다. 필요라는 척도는 좋음의 이데아에 대한 인식으로 확보할 수 있는 것이다. 필요는 곧 고유한 개개인의 있음에서 결핍된 만큼 느끼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를 사회에서 개인의 있음을 확인해주고 개인은 이를 통해 자신의 이익 상태를 유지할 수 있는 것이다. 유용은 각 대상의 고유한 기능(ergon)을 가능케 했을 때의 상태이다. 이러한 상태가 지속되는 상태가 바로 좋은 상태(aretē)인 것이다. 플라톤이 국가에서 제시하고 있는 교육내용과 방법은 생성의 세계에 고착하고 있는 영혼을 실재의 세계로 전환하기 위한 방책이며, 이는 결국 좋음의 이데아에 대한 앎을 위한 것이다. 좋음의 이데아에 대한 앎은 다시 현실의 세계에서의 개인의 고유한 있음에 참여할 수 있도록 하며, 이러한 자아실현의 가능성은 사회의 자족을 전제한다. 좋음의 이데아는 개인의 고유성과 사회라는 보편을 모두 실현하고 이를 보존할 수 있는 원리로 작용한다. 이러한 교육본질을 실현하기 위한 교육방법으로는 ‘양육과 선발’, ‘설득과 강제’가 있다. 양육의 목적은 고유한 개인의 본성(physis)을 지키고 함양하기 위한 것이며, 선발은 개인의 성향이 좋음의 이데아를 인식하는데 적합한지에 대한 끊임없는 확인이다. 설득과 강제는 동일한 것에 대해 상반되는 의견을 가졌을 때 동원되는 방법이며, 설득은 말(logos)을 통한 영혼의 인도이며, 강제는 일종의 제약이다. 특히 강제의 경우 전환의 순간에 필요시 요청되며, 배움의 순간에는 어떠한 강제도 허용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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