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논문에서 다루고 있는 큰 주제는 성령론이다. 1907년, 평양대부흥운동이 있은 지 100년이 흐른 2007년을 전후해서 지금까지 한국교회 안에 유행처럼 번져온 신앙운동이 있다면 강력한 성령의 임재가 경험되어졌던 평양대부흥운동이 오늘날에도 그대로 재현되기를 사모하는 부흥운동이다.
그러나 평양대부흥운동이 말씀연구 중심의 사경회(査經會), 즉 성경을 읽고 듣고 배우는 가운데 말씀에 비춰진 자신의 죄악을 깨닫고, 그 죄를 철저히 회개하게 될 때에 성령의 강력한 임재를 경험했던 사경회였던 것에 비해, 오늘날 평양대부흥운동이 재...
이 논문에서 다루고 있는 큰 주제는 성령론이다. 1907년, 평양대부흥운동이 있은 지 100년이 흐른 2007년을 전후해서 지금까지 한국교회 안에 유행처럼 번져온 신앙운동이 있다면 강력한 성령의 임재가 경험되어졌던 평양대부흥운동이 오늘날에도 그대로 재현되기를 사모하는 부흥운동이다.
그러나 평양대부흥운동이 말씀연구 중심의 사경회(査經會), 즉 성경을 읽고 듣고 배우는 가운데 말씀에 비춰진 자신의 죄악을 깨닫고, 그 죄를 철저히 회개하게 될 때에 성령의 강력한 임재를 경험했던 사경회였던 것에 비해, 오늘날 평양대부흥운동이 재현되기를 사모하는 부흥운동은 다분히 성령체험, 성령은사에 지나치게 집중되어 있는 것을 보면서 필자는 개혁주의 입장에서 무엇이 가장 성경적이고 바람직한 성령운동인지 찾는 것을 연구의 주된 과제로 삼았다. 특별히 말씀중심의 신앙보다는 성령체험과 성령은사를 더 강조하는 감리교회, 성결교회, 순복음교회의 신학의 뿌리가 존 웨슬리(John Wesley)의 성령론에 근거하고 있기에 웨슬리의 신학 형성에 영향을 주었던 배경, 웨슬리의 성령론, 개혁주의 입장에서의 평가의 순서로 연구를 진행하였다.
웨슬리 신학 배경은 사회, 종교, 가정, 체험 등 다양한 측면에서 이해할 수 있다.
첫째, 웨슬리가 살았던 사회는 뇌물, 부패, 사기, 속임수가 정치, 경제, 종교에까지 가득했고, 피라미드의 상층부인 귀족과 하층부인 평민 사이의 양극화 현상은 극(極)에 달했으며, 대다수의 사람들은 극도의 가난과 질병 때문에 범죄적 행동을 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었다.
둘째, 그 당시 영국의 종교는 영국 국교회(성공회)로서 교회가 정치에 이용당하고 있었으며, 18세기 대표적 기독교 사상인 자연신론(Deism)의 영향으로 교회는 이성(理性)을 앞세워 초자연적인 구속 역사를 부인(否認)하고 있었다.
셋째, 웨슬리의 가정을 보면 웨슬리의 아버지는 영국 국교회 목사였고, 부모님 모두 청교도 가정에서 성장했다가 성인이 되어 자진해서 영국 국교도로 전향했던 분들이었다. 웨슬리는 아버지로부터는 내적 증거(The Inward Witness)에 대한 강조를, 어머니로부터는 엄격한 청교도적인 삶에 대한 훈련을 받았고, 영국 국교회의 교리적 입장이 아르미니안주의(Arminianism)였기에 영국 국교회 목사의 가정에서 성장한 웨슬리는 아르미니안주의의 영향도 받으며 자라났다.
넷째, 웨슬리는 목사 안수를 받는 시점에서부터 많은 체험적 경험들도 하게 되는데, 제레미 테일러(Jeremy Taylor), 토마스 아켐피스(Thomas a Kempis), 윌리엄 로우(William Law) 등의 신비주의자들의 서적을 접하면서 많은 영향을 받았고, 홀리 클럽(Holy Club)을 통해 경건주의의 영향을 받았으며, 모라비안(Moravian)과의 만남을 통해서는 ‘이신칭의’(以信稱儀)와 ‘오직 믿음’(Sola Fide)에 대한 도전을 받았고, 올더스게이트(Aldersgate) 체험을 통해서는 성령의 직접적 증거로서의 구원의 확신을 경험하게 된다. 또한 페터레인(Fetter-Lane) 신도회의 철야예배와 브리스톨(Bristol)에서의 목회를 통해서도 성령의 강력한 역사를 재차 경험하게 된다.
이상의 배경을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웨슬리가 살았던 부패했던 사회는 당연히 그로 하여금 성령의 열매를 강조하게 만들었고, 이성을 강조했던 자연신론의 사상 때문에 형식적인 종교로 전락해버린 교회는 그로 하여금 성령체험을 강조하게 만들었으며, 영국 국교회 목사 가정에서 성장했다는 사실은 그로 하여금 아르미니안주의의 가항력적(可抗力的)인 은총을 받아들여서 구원이 인간의 자유 의지에 의한 노력으로 얻어진다는 펠라기우스(Pelagius)적인 신인협력설(神人協力說, Synergism)을 주장하게 만들었고, 올더스게이트, 페터레인, 브리스톨의 체험은 그로 하여금 내적 확신으로서의 성령세례를 강조하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웨슬리 성령론의 특징은 다음과 같다.
첫째, 웨슬리는 서방교회가 전통적으로 간주해 온 아타나시우스 신조(The Athanasian Creeds)에 기반을 두고 삼위일체론(三位一體論)적인 성령 이해를 하고 있으며, 성령발출과 관련하여서도 필리오케(Filioque)의 전통을 받아들여 성령이 ‘아버지와 아들로부터 발출된다.’는 입장을 가지고 있다. 또한 구속 사역에 있어 성령의 역할 역시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구원 사역을 개개인에 구체적으로 적용하는 것으로 이해하고 있기에 개혁주의 입장과 크게 다르지 않다.
둘째, 웨슬리 성령론은 자신뿐 아니라 다른 사람들의 다양한 신앙체험의 바탕 위에 세워졌기에 웨슬리는 믿는 자의 영혼에 부여되는 내적 인상(Inward Impression), 즉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확신으로서의 성령의 직접적 증거와 우리 자신의 영혼의 증거, 선한 양심의 증거로서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있다는 데서 오는 환희와 기쁨, 성령의 열매로서의 성령의 간접적 증거를 강조하고 있다. 또한 성령의 간접적 증거라고 믿는 구체적인 체험들이 어떻게 마귀의 현혹(眩惑)과 구별될 수 있는가에 대한 대답으로 웨슬리는 성령의 직접적인 증거와 간접적인 증거 중 어느 한 편의 증거에만 만족하는 것을 경고하면서 두 증거의 공동 증거를 강조하고 있다. 즉 성령의 역사로 우
이 논문에서 다루고 있는 큰 주제는 성령론이다. 1907년, 평양대부흥운동이 있은 지 100년이 흐른 2007년을 전후해서 지금까지 한국교회 안에 유행처럼 번져온 신앙운동이 있다면 강력한 성령의 임재가 경험되어졌던 평양대부흥운동이 오늘날에도 그대로 재현되기를 사모하는 부흥운동이다.
그러나 평양대부흥운동이 말씀연구 중심의 사경회(査經會), 즉 성경을 읽고 듣고 배우는 가운데 말씀에 비춰진 자신의 죄악을 깨닫고, 그 죄를 철저히 회개하게 될 때에 성령의 강력한 임재를 경험했던 사경회였던 것에 비해, 오늘날 평양대부흥운동이 재현되기를 사모하는 부흥운동은 다분히 성령체험, 성령은사에 지나치게 집중되어 있는 것을 보면서 필자는 개혁주의 입장에서 무엇이 가장 성경적이고 바람직한 성령운동인지 찾는 것을 연구의 주된 과제로 삼았다. 특별히 말씀중심의 신앙보다는 성령체험과 성령은사를 더 강조하는 감리교회, 성결교회, 순복음교회의 신학의 뿌리가 존 웨슬리(John Wesley)의 성령론에 근거하고 있기에 웨슬리의 신학 형성에 영향을 주었던 배경, 웨슬리의 성령론, 개혁주의 입장에서의 평가의 순서로 연구를 진행하였다.
웨슬리 신학 배경은 사회, 종교, 가정, 체험 등 다양한 측면에서 이해할 수 있다.
첫째, 웨슬리가 살았던 사회는 뇌물, 부패, 사기, 속임수가 정치, 경제, 종교에까지 가득했고, 피라미드의 상층부인 귀족과 하층부인 평민 사이의 양극화 현상은 극(極)에 달했으며, 대다수의 사람들은 극도의 가난과 질병 때문에 범죄적 행동을 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었다.
둘째, 그 당시 영국의 종교는 영국 국교회(성공회)로서 교회가 정치에 이용당하고 있었으며, 18세기 대표적 기독교 사상인 자연신론(Deism)의 영향으로 교회는 이성(理性)을 앞세워 초자연적인 구속 역사를 부인(否認)하고 있었다.
셋째, 웨슬리의 가정을 보면 웨슬리의 아버지는 영국 국교회 목사였고, 부모님 모두 청교도 가정에서 성장했다가 성인이 되어 자진해서 영국 국교도로 전향했던 분들이었다. 웨슬리는 아버지로부터는 내적 증거(The Inward Witness)에 대한 강조를, 어머니로부터는 엄격한 청교도적인 삶에 대한 훈련을 받았고, 영국 국교회의 교리적 입장이 아르미니안주의(Arminianism)였기에 영국 국교회 목사의 가정에서 성장한 웨슬리는 아르미니안주의의 영향도 받으며 자라났다.
넷째, 웨슬리는 목사 안수를 받는 시점에서부터 많은 체험적 경험들도 하게 되는데, 제레미 테일러(Jeremy Taylor), 토마스 아켐피스(Thomas a Kempis), 윌리엄 로우(William Law) 등의 신비주의자들의 서적을 접하면서 많은 영향을 받았고, 홀리 클럽(Holy Club)을 통해 경건주의의 영향을 받았으며, 모라비안(Moravian)과의 만남을 통해서는 ‘이신칭의’(以信稱儀)와 ‘오직 믿음’(Sola Fide)에 대한 도전을 받았고, 올더스게이트(Aldersgate) 체험을 통해서는 성령의 직접적 증거로서의 구원의 확신을 경험하게 된다. 또한 페터레인(Fetter-Lane) 신도회의 철야예배와 브리스톨(Bristol)에서의 목회를 통해서도 성령의 강력한 역사를 재차 경험하게 된다.
이상의 배경을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웨슬리가 살았던 부패했던 사회는 당연히 그로 하여금 성령의 열매를 강조하게 만들었고, 이성을 강조했던 자연신론의 사상 때문에 형식적인 종교로 전락해버린 교회는 그로 하여금 성령체험을 강조하게 만들었으며, 영국 국교회 목사 가정에서 성장했다는 사실은 그로 하여금 아르미니안주의의 가항력적(可抗力的)인 은총을 받아들여서 구원이 인간의 자유 의지에 의한 노력으로 얻어진다는 펠라기우스(Pelagius)적인 신인협력설(神人協力說, Synergism)을 주장하게 만들었고, 올더스게이트, 페터레인, 브리스톨의 체험은 그로 하여금 내적 확신으로서의 성령세례를 강조하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웨슬리 성령론의 특징은 다음과 같다.
첫째, 웨슬리는 서방교회가 전통적으로 간주해 온 아타나시우스 신조(The Athanasian Creeds)에 기반을 두고 삼위일체론(三位一體論)적인 성령 이해를 하고 있으며, 성령발출과 관련하여서도 필리오케(Filioque)의 전통을 받아들여 성령이 ‘아버지와 아들로부터 발출된다.’는 입장을 가지고 있다. 또한 구속 사역에 있어 성령의 역할 역시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구원 사역을 개개인에 구체적으로 적용하는 것으로 이해하고 있기에 개혁주의 입장과 크게 다르지 않다.
둘째, 웨슬리 성령론은 자신뿐 아니라 다른 사람들의 다양한 신앙체험의 바탕 위에 세워졌기에 웨슬리는 믿는 자의 영혼에 부여되는 내적 인상(Inward Impression), 즉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확신으로서의 성령의 직접적 증거와 우리 자신의 영혼의 증거, 선한 양심의 증거로서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있다는 데서 오는 환희와 기쁨, 성령의 열매로서의 성령의 간접적 증거를 강조하고 있다. 또한 성령의 간접적 증거라고 믿는 구체적인 체험들이 어떻게 마귀의 현혹(眩惑)과 구별될 수 있는가에 대한 대답으로 웨슬리는 성령의 직접적인 증거와 간접적인 증거 중 어느 한 편의 증거에만 만족하는 것을 경고하면서 두 증거의 공동 증거를 강조하고 있다. 즉 성령의 역사로 우
주제어
#개혁주의 존 웨슬리 성령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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