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동안 일제 강점기 한국 창작동요는 장르 명칭의 혼란 속에서 실증적인 자료의 전반적인 검토가 부족한 가운데 진행되었다. 그리고 일부 작가에 한정된 연구에 그치고 말았다. 또한 창작동요 보급 과정 및 분화된 창작동요에 대한 연구물도 드물다. 필자는 이런 형편들을 고려해 일제 강점기에 발간되었던 실증자료인 잡지나 신문 등의 내용을 검토해 보고, 창작동요의 발생 배경 및 현황, 그리고 창작동요 전개 양상 및 그 특징을 살핌으로써 창작동요의 문학사적 의의 및 한계를 규명해 보고자 했다. 일제 강점기 아동문학의 주요 장르는 동요, 동화,...
그 동안 일제 강점기 한국 창작동요는 장르 명칭의 혼란 속에서 실증적인 자료의 전반적인 검토가 부족한 가운데 진행되었다. 그리고 일부 작가에 한정된 연구에 그치고 말았다. 또한 창작동요 보급 과정 및 분화된 창작동요에 대한 연구물도 드물다. 필자는 이런 형편들을 고려해 일제 강점기에 발간되었던 실증자료인 잡지나 신문 등의 내용을 검토해 보고, 창작동요의 발생 배경 및 현황, 그리고 창작동요 전개 양상 및 그 특징을 살핌으로써 창작동요의 문학사적 의의 및 한계를 규명해 보고자 했다. 일제 강점기 아동문학의 주요 장르는 동요, 동화, 동극, 소년소설이었다. 동요는 다시 전래동요, 창작동요, 그림동요로 나눌 수 있다. 그리고 창작동요는 요적동요(부르는 노래)와 시적동요(읊는 노래)로 나눌 수 있다. 한편 1930년대에 들어서면서 아동문학 작가들에 의해 아동에 대한 반성과 재인식이 이루어진다. 이후 아동의 연령을 고려해 동요를 창작하게 된다. 보통학교 어린이를 위한 동요를 전·후로 유년동요와 소년시로 구분하여 잡지 및 신문에 실리게 된다. 이처럼 창작동요가 발생하고 성장하는 데에는 아동에 대한 인식변화가 한 몫을 한다. 그 중심에 천도교를 중심으로 활동했던 김기전과 방정환이 있다. 전국적으로 일어났던 소년운동 또한 지역별 ‘소년운동협회’를 만들어 아동의 인권을 성장시키는데 큰 역할을 한다. 이 단체에 속한 소년·소녀 문예가들도 동요의 창작 주체로 활발하게 활동하게 된다. 1920년대 일제가 표방한 문화정치 이후 발간된 아동잡지 및 신문은 폐간 될 때까지 매회 창작동요가 실려 30년대까지 동요의 황금기를 맞게 된다. 그리고 ‘색동회’나 ‘조선동요연구협회’ 그리고 ‘따리아회’ 및 보육교사들의 동요 보급 활동은 창작동요를 더욱 대중화시키고 작품의 예술성을 한 단계 끌어올리는 견인차 역할을 한다. 일제 강점기 창작동요의 전모를 살피기 위해 네 시기로 구분해 보았다. 먼저 창작동요 발아·성장기에는 소년·소녀들의 활발한 동요창작 활동으로 동요가 국내에 아동문학 서정 장르로 자리매김할 수 있었다. 이 시기 창작동요에 나타난 특징은 감상성과 명랑성이다. 둘째 현실·계급주의 창작동요 융성기이다. 이 시기 창작된 동요는 주로 소년층을 향하고 있으며, 계급간의 갈등과 가난, 공장노동자나 농민들의 피폐한 삶을 그리고 있다. 셋째 창작동요의 분화 및 동심의 재인식기이다. 이 시기에는 1920년대 동요가 가진 문제점들 즉, 동요의 정형성 탈피, 성인들의 관념적 사고 지양, 순수한 어린이들의 동요참여 유도, 아동의 연령대를 고려한 동요 창작 등의 논의가 진행되었다. 이후 아동 잡지나 신문에 ‘동시’, ‘소년시’, ‘동화시’, ‘유년동요’, ‘그림동요’라는 명칭이 자연스럽게 스며든다. 마지막으로 창작동요의 쇠퇴 및 친일기이다. 중일전쟁이 도발하는 그해부터 일제는 일본어 상용을 강요, 모국어에 대한 본격적인 탄압을 시작하였다. 1940년 《조선일보》, 《동아일보》가 강제 폐간되고, 『소년』 또한 폐간된다. 『아이생활』만이 1944년 1월까지 그 명맥을 이어간다. 전쟁 이후 아동문학 또한 국민 총동원의 유익한 도구로 활용될 것을 요구받았다. 일본은 1937년 이후 전시체제하에서 ‘동요’라고 불리던 일반적인 명칭을 1942년에는 ‘小國民文壇’으로 바꾸어 부르도록 했다. 아동문학을 이데올로기의 도구로 이용한 것이 조선의 아동에 대해서는 그 강도가 더욱 심했다. 1940년부터 아동잡지 서두에 ‘황국신민서사’를 실어 황국신민화 정책을 강화했다. 그런 와중에서도 동요창작은 계속되었다. 일제 강점기 창작동요는 역사의 질곡 속에서 아동문학 서정 장르의 한 분야로 굳건히 자리 잡고 그 위치를 견고히 다져나갔다. 창가나 신체시의 부자유한 운율을 타파했으며, 창가가 가지고 있는 계몽성과 교훈성을 탈피해 어린이들의 생활과 밝은 심성을 작품화했다. 또한 1930년대 이후 동요의 분화 과정을 통해 동시문학 발전의 기반이 되면서 그 시적 성과를 한 단계 높일 수 있었다. 그리고 한국아동문학사 전체를 놓고 보아도 문학성과 예술성이 높은 작품들이 많이 생산되는 쾌거를 보였다는 데 문학사적 의의가 있다.
그 동안 일제 강점기 한국 창작동요는 장르 명칭의 혼란 속에서 실증적인 자료의 전반적인 검토가 부족한 가운데 진행되었다. 그리고 일부 작가에 한정된 연구에 그치고 말았다. 또한 창작동요 보급 과정 및 분화된 창작동요에 대한 연구물도 드물다. 필자는 이런 형편들을 고려해 일제 강점기에 발간되었던 실증자료인 잡지나 신문 등의 내용을 검토해 보고, 창작동요의 발생 배경 및 현황, 그리고 창작동요 전개 양상 및 그 특징을 살핌으로써 창작동요의 문학사적 의의 및 한계를 규명해 보고자 했다. 일제 강점기 아동문학의 주요 장르는 동요, 동화, 동극, 소년소설이었다. 동요는 다시 전래동요, 창작동요, 그림동요로 나눌 수 있다. 그리고 창작동요는 요적동요(부르는 노래)와 시적동요(읊는 노래)로 나눌 수 있다. 한편 1930년대에 들어서면서 아동문학 작가들에 의해 아동에 대한 반성과 재인식이 이루어진다. 이후 아동의 연령을 고려해 동요를 창작하게 된다. 보통학교 어린이를 위한 동요를 전·후로 유년동요와 소년시로 구분하여 잡지 및 신문에 실리게 된다. 이처럼 창작동요가 발생하고 성장하는 데에는 아동에 대한 인식변화가 한 몫을 한다. 그 중심에 천도교를 중심으로 활동했던 김기전과 방정환이 있다. 전국적으로 일어났던 소년운동 또한 지역별 ‘소년운동협회’를 만들어 아동의 인권을 성장시키는데 큰 역할을 한다. 이 단체에 속한 소년·소녀 문예가들도 동요의 창작 주체로 활발하게 활동하게 된다. 1920년대 일제가 표방한 문화정치 이후 발간된 아동잡지 및 신문은 폐간 될 때까지 매회 창작동요가 실려 30년대까지 동요의 황금기를 맞게 된다. 그리고 ‘색동회’나 ‘조선동요연구협회’ 그리고 ‘따리아회’ 및 보육교사들의 동요 보급 활동은 창작동요를 더욱 대중화시키고 작품의 예술성을 한 단계 끌어올리는 견인차 역할을 한다. 일제 강점기 창작동요의 전모를 살피기 위해 네 시기로 구분해 보았다. 먼저 창작동요 발아·성장기에는 소년·소녀들의 활발한 동요창작 활동으로 동요가 국내에 아동문학 서정 장르로 자리매김할 수 있었다. 이 시기 창작동요에 나타난 특징은 감상성과 명랑성이다. 둘째 현실·계급주의 창작동요 융성기이다. 이 시기 창작된 동요는 주로 소년층을 향하고 있으며, 계급간의 갈등과 가난, 공장노동자나 농민들의 피폐한 삶을 그리고 있다. 셋째 창작동요의 분화 및 동심의 재인식기이다. 이 시기에는 1920년대 동요가 가진 문제점들 즉, 동요의 정형성 탈피, 성인들의 관념적 사고 지양, 순수한 어린이들의 동요참여 유도, 아동의 연령대를 고려한 동요 창작 등의 논의가 진행되었다. 이후 아동 잡지나 신문에 ‘동시’, ‘소년시’, ‘동화시’, ‘유년동요’, ‘그림동요’라는 명칭이 자연스럽게 스며든다. 마지막으로 창작동요의 쇠퇴 및 친일기이다. 중일전쟁이 도발하는 그해부터 일제는 일본어 상용을 강요, 모국어에 대한 본격적인 탄압을 시작하였다. 1940년 《조선일보》, 《동아일보》가 강제 폐간되고, 『소년』 또한 폐간된다. 『아이생활』만이 1944년 1월까지 그 명맥을 이어간다. 전쟁 이후 아동문학 또한 국민 총동원의 유익한 도구로 활용될 것을 요구받았다. 일본은 1937년 이후 전시체제하에서 ‘동요’라고 불리던 일반적인 명칭을 1942년에는 ‘小國民文壇’으로 바꾸어 부르도록 했다. 아동문학을 이데올로기의 도구로 이용한 것이 조선의 아동에 대해서는 그 강도가 더욱 심했다. 1940년부터 아동잡지 서두에 ‘황국신민서사’를 실어 황국신민화 정책을 강화했다. 그런 와중에서도 동요창작은 계속되었다. 일제 강점기 창작동요는 역사의 질곡 속에서 아동문학 서정 장르의 한 분야로 굳건히 자리 잡고 그 위치를 견고히 다져나갔다. 창가나 신체시의 부자유한 운율을 타파했으며, 창가가 가지고 있는 계몽성과 교훈성을 탈피해 어린이들의 생활과 밝은 심성을 작품화했다. 또한 1930년대 이후 동요의 분화 과정을 통해 동시문학 발전의 기반이 되면서 그 시적 성과를 한 단계 높일 수 있었다. 그리고 한국아동문학사 전체를 놓고 보아도 문학성과 예술성이 높은 작품들이 많이 생산되는 쾌거를 보였다는 데 문학사적 의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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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한국 창작동요 그림동요 유년동요 소년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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