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 통일의 특징은 흡수통일, 평화통일, 자본주의와 사회주의의 통일로 규정할 수 있다. 베를린 장벽이 붕괴되자 독일인들은 민족적 통합과 통일조국의 미래에 대해 낙관하고 열광했다. 모든 국민이 한 국가의 틀에서 동일한 정체성을 갖고 살 수 있다는 것은 행복한 일이다. 그러나 환호와 환희의 물결은 통일 후유증으로 인해 오래 지속되지 못하고, 통일에 대한 기대와 환상은 실망과 환멸로 바뀌었다. 통합이 상호 배려와 존중을 바탕으로 동반성장을 추구하기보다는 일방적 병합의 방식으로 이루어진 결과였다. 내적 갈등이 치유되지 않는다면 완전한 통일이라고 볼 수 없으며, 지역 갈등은 국가 발전에도 바람직하지 않다. 정치와 경제 분야의 외적 ...
독일 통일의 특징은 흡수통일, 평화통일, 자본주의와 사회주의의 통일로 규정할 수 있다. 베를린 장벽이 붕괴되자 독일인들은 민족적 통합과 통일조국의 미래에 대해 낙관하고 열광했다. 모든 국민이 한 국가의 틀에서 동일한 정체성을 갖고 살 수 있다는 것은 행복한 일이다. 그러나 환호와 환희의 물결은 통일 후유증으로 인해 오래 지속되지 못하고, 통일에 대한 기대와 환상은 실망과 환멸로 바뀌었다. 통합이 상호 배려와 존중을 바탕으로 동반성장을 추구하기보다는 일방적 병합의 방식으로 이루어진 결과였다. 내적 갈등이 치유되지 않는다면 완전한 통일이라고 볼 수 없으며, 지역 갈등은 국가 발전에도 바람직하지 않다. 정치와 경제 분야의 외적 통합도 중요하지만, 진정한 통합은 상호간의 존중과 이해를 바탕으로 한 내적 통합이다. 정치적 통합은 단기간에 성공적으로 이루어졌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하지만 급속한 경제적 통합은 그 대가를 톡톡히 치러야 했다. 신속한 민영화를 통한 산업구조를 재편하는 과정에서 동구권 시장이 붕괴되었다. 시장경제와 화폐통합의 급속한 도입은 동독지역의 경제를 더욱 악화시켰다. 통일은 동독주민들을 실업자로 전락시키고 동독지역을 서독 자본의 식민지로 만들었다. 통일에 대한 실망과 미래에 대한 불안은 구동독에 대한 향수를 촉발시켰다. 이처럼 동서독은 우리보다 훨씬 더 많은 교류와 협력을 해왔음에도 불구하고 동서독 간에는 이질적인 요소들이 여전히 많이 잔존해서 내적 통합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 이것은 40년 이상의 분단 격차가 치유되기에는 20년이라는 시간도 부족하다는 것을 의미하며, 분단이 길어질수록 치유기간도 더욱 늘어날 수 있다는 점에서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동서냉전이 종식된 이후 세계는 무한경쟁시대를 맞이하여 국력신장에 전념하고 있는데 아쉽게도 한반도는 분단이 지속되고 있고 체제 경쟁으로 엄청난 국력을 낭비하고 있다. 분단이 지속될 경우 남북한은 국가 경쟁력을 상실하고 세계무대에서 낙오할 수도 있을 것이다. 통일은 한민족의 웅비에 커다란 장애물이기에 반드시 극복해야 할 민족의 과업이다. 우리는 독일의 통일정책에서 다음과 같은 교훈을 도출할 수 있다. 첫째, 남북 간의 점진적이고 지속적인 교류와 협력을 통한 상호 신뢰와 동질성 회복이 필요하다. 양독 지도부는 분단으로 인한 주민들의 고통을 완화하고 동족 간의 이질성을 막아야 한다는 강한 철학과 의지를 갖고 교류와 협력을 중시했다. 교류는 동질성을 회복하고 체제와 이념의 이질성을 극복하는 데 필수적인 역할을 한다. 동독주민들은 서독의 방송을 청취하며 독일 고유의 문화와 언어 그리고 역사적 공통성을 보존할 수 있었다. 한반도의 경우 60년이 넘은 분단으로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체제 등이 완전히 다르게 발전되어 북한 주민들의 의식구조, 가치관 및 일반생활 영역이 남한과 크게 달라졌다. 따라서 한반도의 통일 과정에서는 독일보다 훨씬 더 많은 교류와 훨씬 더 많은 협력 그리고 훨씬 더 많은 접촉을 통해 분단의 이질성을 극복하고 민족의 동질성을 회복하는 데 주력해야 할 것이다. 동서독 간에는 전쟁도 적대감도 없었지만 우리의 경우는 참혹한 전쟁이 있었고 적대감과 불신이 높기 때문에 통일 후 통합 과정에서 독일보다 훨씬 더 큰 고통과 갈등을 겪게 될 것으로 예상된다. 둘째, 강건한 국력을 신장하고 통일기금을 마련해야 한다. 서독의 정치?경제?사회체제의 절대적 우위는 독일통일의 내재적 요인이 되었다. 서독정부는 막강한 국력을 바탕으로 양독 교류와 협력을 주도함으로써 분단으로 인한 민족 간의 이질감 해소를 위해 노력했고, 결과적으로 동독주민들에게 서독 사회를 동경하게 만들었다. 남한이 먼저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체제를 굳건하게 정착시키고 사회 안정을 다지며 북한을 수용할 수 있을 정도로 막강한 경제력을 키워야 할 것이다. 1989년 동독의 GDP는 서독의 15%에 달한 반면 2011년 북한의 국민총소득(GNI)은 남한의 2.7%에 불과했다. 남한의 경제력이 서독에 비해 훨씬 열세인 점을 고려할 때 장차 통일비용을 조달하기 위해 얼마나 국력을 신장시켜야 하는지는 자명해진다. 셋째, 주변 4대강국을 중심으로 통일외교를 강화해야 한다. 서독은 전승 4개국을 포함하여 동구 주변국과의 관계 개선을 위해 적극적인 외교 노력과 경제지원을 병행했고, 유럽 내 평화와 안정을 정착시키기 위해 군비통제에도 적극적으로 동참했다. 서독정부의 외교적 노력은 동서냉전 해체에 크게 기여했다. 김동명, 앞의 책, p. 486. 미국을 제외한 소련, 영국, 프랑스는 2차 대전 당시 입었던 엄청난 인명피해의 악몽을 상기하고 독일 통일을 바라지 않았다. 한국 정부는 통일이 남북 당사 간의 문제이기는 하지만 국제사회를 대상으로 국제 사회에 반하는 요소들을 제거하려는 의지와 노력을 과시하여 ‘통일 한국’의 위상에 대해 주변국들로부터 신뢰를 쌓아가야 할 것이다. 통일 한국이 주변국에 우호적이며, 위협 요인이 되지 않을 것임을 천명할 필요가 있다. 통일 한국은 또한 ‘핵무기 보유국, 테러 지원국, 핵?미사일기술 수출국, 인권탄압국’이라는 북한이 가진 ‘오명의 딱지’를 떼어내야 할 것이다. 그리하여 국제사회의 보편적인 가치를 존중하고 이를 지키기 위해 적극 기여할 수 있는 품위 있는 나라로 거듭나야 할 것이다. 넷째, 적극적이고 유연하며 지속적인 대북정책이다. 남북한은 똑같이 한반도 통일을 희망하고 지향하고 있지만 통일방식과 통일의식이 확연히 다르기 때문에 통일 시기를 예측하는 것은 쉽지 않다. 우리는 1971년 9월 남북적십자회담, 1972년 ‘7.4 남북공동성명’, 1992년 ‘남북 간의 화해와 불가침 및 교류 협력에 관한 합의서’, 2000년 ‘6.15 남북공동선언’ 등 간헐적으로 남북회담을 실시했지만 1968년 청와대습격사건, 1976년 판문점 도끼만행사건, 1983년 아웅산 테러사건, 1987년 KAL기 폭파사건 등 북한의 만행과 핵무기 개발로 남북협력 및 대화에 위기를 맞이하곤 했다. 먼저 상호간의 실체적인 존재를 인정하고 대화 자세를 취하는 것이 중요하다. 다섯째, 상호주의에 입각한 지원정책이 필요하다. 1983년?1984년 서독은 우호적인 양독 관계 조성을 위해 동독에 20억 마르크의 차관을 제공했다. 1984년 동독은 차관의 대가로 내독 경계선에 설치된 자동소총을 제거했다. 서독정부는 1963?1989년 약 34억 마르크를 지불하고 총 3만4,000명의 반체제 동독주민들을 석방시켰다. 서독은 동독에 대한 재정지원에 대해 친척 방문 및 여행 조건 완화를 요구했다. 한반도의 경우는 동서독의 관계보다 훨씬 험난하다. 남한은 민족의 염원인 통일을 위해 다각도로 노력해왔다. 남북은 국민의 정부와 참여정부 시절 경제 교류를 위해 남북정상회담을 비롯하여 개성공단, 금강산 관광 등을 추진해왔지만 북한의 도발과 억지로 난관에 봉착해 있다. 남북이산가족 상봉은 제도화되어 있지 않고 간헐적으로 일회적인 행사로 그치고 있다. 서신 왕래 등 다른 교류는 극히 미미한 실정이다. 1988년 11월 이후 금강산 관광사업에 따라 많은 남한 주민들이 북측을 방문했으나 2008년 7월 11일 금강산 관광객 피격 사망사건으로 중단되었다. 최근 북한의 대포동 2호 미사일 시험발사(2009. 4. 5)와 2차 핵실험(2009. 5. 25) 그리고 46명의 해군이 희생된 천안함 사건(2010. 3. 26) 등으로 남북관계는 최악의 사태를 맞고 있다. 남한이 공산주의의 종주국으로 자처하며 혈맹관계를 유지했던 소련 및 중국과 수교를 맺은 후 북한은 개방이 곧 몰락의 지름길이라고 여길 만큼 체제위협을 느끼고 더욱 쇄국적인 정책을 고수하고 있다. 북한은 체제생존을 위해 ‘우리식 사회주의’를 고수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확신하고 있으며, 사회 개방은 필연적으로 체제붕괴와 직결된다고 인식하고 있다. 그래서 북한 당국자들은 폐쇄적, 고립적, 자급자족적인 독재체제를 강화하고 있다. 하지만 폐쇄적 독재국가는 역사가 말해주고 있듯이 결코 오래 지속될 수 없을 것이다. 그들은 외교적 고립과 심각한 경제난을 타개하기 위해 미국과 핵협상을 통해 위기를 돌파하려고 하지만 진실성이 결여되어 있다. 교류의 점진적 확대는 남북 간의 신뢰와 상호이해를 쌓아갈 수 있고 문화적 이질감을 줄이는 데 큰 역할을 할 것이다. 본 논문은 주로 통일으 후유증에 대해 살펴보았다. 그렇기 때문에 통일에 대해 부정적 측면이 강조된 면이 있다. 하지만 간과하지 말아야 할 것은 통일이 우리에게 주는 통일편익도 막대하며 무엇보다도 민족적 패배감을 떨쳐버리고 자긍심을 회복시켜주며 민족의 웅비라는 엄청난 희망을 안겨줄 수 있다는 점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만 잘살면 된다’는 식의 ‘통일유보론’에 빠져, 통일의 기회가 왔을 때 놓치는 우를 범해서는 결코 안 될 것이다.
독일 통일의 특징은 흡수통일, 평화통일, 자본주의와 사회주의의 통일로 규정할 수 있다. 베를린 장벽이 붕괴되자 독일인들은 민족적 통합과 통일조국의 미래에 대해 낙관하고 열광했다. 모든 국민이 한 국가의 틀에서 동일한 정체성을 갖고 살 수 있다는 것은 행복한 일이다. 그러나 환호와 환희의 물결은 통일 후유증으로 인해 오래 지속되지 못하고, 통일에 대한 기대와 환상은 실망과 환멸로 바뀌었다. 통합이 상호 배려와 존중을 바탕으로 동반성장을 추구하기보다는 일방적 병합의 방식으로 이루어진 결과였다. 내적 갈등이 치유되지 않는다면 완전한 통일이라고 볼 수 없으며, 지역 갈등은 국가 발전에도 바람직하지 않다. 정치와 경제 분야의 외적 통합도 중요하지만, 진정한 통합은 상호간의 존중과 이해를 바탕으로 한 내적 통합이다. 정치적 통합은 단기간에 성공적으로 이루어졌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하지만 급속한 경제적 통합은 그 대가를 톡톡히 치러야 했다. 신속한 민영화를 통한 산업구조를 재편하는 과정에서 동구권 시장이 붕괴되었다. 시장경제와 화폐통합의 급속한 도입은 동독지역의 경제를 더욱 악화시켰다. 통일은 동독주민들을 실업자로 전락시키고 동독지역을 서독 자본의 식민지로 만들었다. 통일에 대한 실망과 미래에 대한 불안은 구동독에 대한 향수를 촉발시켰다. 이처럼 동서독은 우리보다 훨씬 더 많은 교류와 협력을 해왔음에도 불구하고 동서독 간에는 이질적인 요소들이 여전히 많이 잔존해서 내적 통합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 이것은 40년 이상의 분단 격차가 치유되기에는 20년이라는 시간도 부족하다는 것을 의미하며, 분단이 길어질수록 치유기간도 더욱 늘어날 수 있다는 점에서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동서냉전이 종식된 이후 세계는 무한경쟁시대를 맞이하여 국력신장에 전념하고 있는데 아쉽게도 한반도는 분단이 지속되고 있고 체제 경쟁으로 엄청난 국력을 낭비하고 있다. 분단이 지속될 경우 남북한은 국가 경쟁력을 상실하고 세계무대에서 낙오할 수도 있을 것이다. 통일은 한민족의 웅비에 커다란 장애물이기에 반드시 극복해야 할 민족의 과업이다. 우리는 독일의 통일정책에서 다음과 같은 교훈을 도출할 수 있다. 첫째, 남북 간의 점진적이고 지속적인 교류와 협력을 통한 상호 신뢰와 동질성 회복이 필요하다. 양독 지도부는 분단으로 인한 주민들의 고통을 완화하고 동족 간의 이질성을 막아야 한다는 강한 철학과 의지를 갖고 교류와 협력을 중시했다. 교류는 동질성을 회복하고 체제와 이념의 이질성을 극복하는 데 필수적인 역할을 한다. 동독주민들은 서독의 방송을 청취하며 독일 고유의 문화와 언어 그리고 역사적 공통성을 보존할 수 있었다. 한반도의 경우 60년이 넘은 분단으로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체제 등이 완전히 다르게 발전되어 북한 주민들의 의식구조, 가치관 및 일반생활 영역이 남한과 크게 달라졌다. 따라서 한반도의 통일 과정에서는 독일보다 훨씬 더 많은 교류와 훨씬 더 많은 협력 그리고 훨씬 더 많은 접촉을 통해 분단의 이질성을 극복하고 민족의 동질성을 회복하는 데 주력해야 할 것이다. 동서독 간에는 전쟁도 적대감도 없었지만 우리의 경우는 참혹한 전쟁이 있었고 적대감과 불신이 높기 때문에 통일 후 통합 과정에서 독일보다 훨씬 더 큰 고통과 갈등을 겪게 될 것으로 예상된다. 둘째, 강건한 국력을 신장하고 통일기금을 마련해야 한다. 서독의 정치?경제?사회체제의 절대적 우위는 독일통일의 내재적 요인이 되었다. 서독정부는 막강한 국력을 바탕으로 양독 교류와 협력을 주도함으로써 분단으로 인한 민족 간의 이질감 해소를 위해 노력했고, 결과적으로 동독주민들에게 서독 사회를 동경하게 만들었다. 남한이 먼저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체제를 굳건하게 정착시키고 사회 안정을 다지며 북한을 수용할 수 있을 정도로 막강한 경제력을 키워야 할 것이다. 1989년 동독의 GDP는 서독의 15%에 달한 반면 2011년 북한의 국민총소득(GNI)은 남한의 2.7%에 불과했다. 남한의 경제력이 서독에 비해 훨씬 열세인 점을 고려할 때 장차 통일비용을 조달하기 위해 얼마나 국력을 신장시켜야 하는지는 자명해진다. 셋째, 주변 4대강국을 중심으로 통일외교를 강화해야 한다. 서독은 전승 4개국을 포함하여 동구 주변국과의 관계 개선을 위해 적극적인 외교 노력과 경제지원을 병행했고, 유럽 내 평화와 안정을 정착시키기 위해 군비통제에도 적극적으로 동참했다. 서독정부의 외교적 노력은 동서냉전 해체에 크게 기여했다. 김동명, 앞의 책, p. 486. 미국을 제외한 소련, 영국, 프랑스는 2차 대전 당시 입었던 엄청난 인명피해의 악몽을 상기하고 독일 통일을 바라지 않았다. 한국 정부는 통일이 남북 당사 간의 문제이기는 하지만 국제사회를 대상으로 국제 사회에 반하는 요소들을 제거하려는 의지와 노력을 과시하여 ‘통일 한국’의 위상에 대해 주변국들로부터 신뢰를 쌓아가야 할 것이다. 통일 한국이 주변국에 우호적이며, 위협 요인이 되지 않을 것임을 천명할 필요가 있다. 통일 한국은 또한 ‘핵무기 보유국, 테러 지원국, 핵?미사일기술 수출국, 인권탄압국’이라는 북한이 가진 ‘오명의 딱지’를 떼어내야 할 것이다. 그리하여 국제사회의 보편적인 가치를 존중하고 이를 지키기 위해 적극 기여할 수 있는 품위 있는 나라로 거듭나야 할 것이다. 넷째, 적극적이고 유연하며 지속적인 대북정책이다. 남북한은 똑같이 한반도 통일을 희망하고 지향하고 있지만 통일방식과 통일의식이 확연히 다르기 때문에 통일 시기를 예측하는 것은 쉽지 않다. 우리는 1971년 9월 남북적십자회담, 1972년 ‘7.4 남북공동성명’, 1992년 ‘남북 간의 화해와 불가침 및 교류 협력에 관한 합의서’, 2000년 ‘6.15 남북공동선언’ 등 간헐적으로 남북회담을 실시했지만 1968년 청와대습격사건, 1976년 판문점 도끼만행사건, 1983년 아웅산 테러사건, 1987년 KAL기 폭파사건 등 북한의 만행과 핵무기 개발로 남북협력 및 대화에 위기를 맞이하곤 했다. 먼저 상호간의 실체적인 존재를 인정하고 대화 자세를 취하는 것이 중요하다. 다섯째, 상호주의에 입각한 지원정책이 필요하다. 1983년?1984년 서독은 우호적인 양독 관계 조성을 위해 동독에 20억 마르크의 차관을 제공했다. 1984년 동독은 차관의 대가로 내독 경계선에 설치된 자동소총을 제거했다. 서독정부는 1963?1989년 약 34억 마르크를 지불하고 총 3만4,000명의 반체제 동독주민들을 석방시켰다. 서독은 동독에 대한 재정지원에 대해 친척 방문 및 여행 조건 완화를 요구했다. 한반도의 경우는 동서독의 관계보다 훨씬 험난하다. 남한은 민족의 염원인 통일을 위해 다각도로 노력해왔다. 남북은 국민의 정부와 참여정부 시절 경제 교류를 위해 남북정상회담을 비롯하여 개성공단, 금강산 관광 등을 추진해왔지만 북한의 도발과 억지로 난관에 봉착해 있다. 남북이산가족 상봉은 제도화되어 있지 않고 간헐적으로 일회적인 행사로 그치고 있다. 서신 왕래 등 다른 교류는 극히 미미한 실정이다. 1988년 11월 이후 금강산 관광사업에 따라 많은 남한 주민들이 북측을 방문했으나 2008년 7월 11일 금강산 관광객 피격 사망사건으로 중단되었다. 최근 북한의 대포동 2호 미사일 시험발사(2009. 4. 5)와 2차 핵실험(2009. 5. 25) 그리고 46명의 해군이 희생된 천안함 사건(2010. 3. 26) 등으로 남북관계는 최악의 사태를 맞고 있다. 남한이 공산주의의 종주국으로 자처하며 혈맹관계를 유지했던 소련 및 중국과 수교를 맺은 후 북한은 개방이 곧 몰락의 지름길이라고 여길 만큼 체제위협을 느끼고 더욱 쇄국적인 정책을 고수하고 있다. 북한은 체제생존을 위해 ‘우리식 사회주의’를 고수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확신하고 있으며, 사회 개방은 필연적으로 체제붕괴와 직결된다고 인식하고 있다. 그래서 북한 당국자들은 폐쇄적, 고립적, 자급자족적인 독재체제를 강화하고 있다. 하지만 폐쇄적 독재국가는 역사가 말해주고 있듯이 결코 오래 지속될 수 없을 것이다. 그들은 외교적 고립과 심각한 경제난을 타개하기 위해 미국과 핵협상을 통해 위기를 돌파하려고 하지만 진실성이 결여되어 있다. 교류의 점진적 확대는 남북 간의 신뢰와 상호이해를 쌓아갈 수 있고 문화적 이질감을 줄이는 데 큰 역할을 할 것이다. 본 논문은 주로 통일으 후유증에 대해 살펴보았다. 그렇기 때문에 통일에 대해 부정적 측면이 강조된 면이 있다. 하지만 간과하지 말아야 할 것은 통일이 우리에게 주는 통일편익도 막대하며 무엇보다도 민족적 패배감을 떨쳐버리고 자긍심을 회복시켜주며 민족의 웅비라는 엄청난 희망을 안겨줄 수 있다는 점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만 잘살면 된다’는 식의 ‘통일유보론’에 빠져, 통일의 기회가 왔을 때 놓치는 우를 범해서는 결코 안 될 것이다.
Die Deutsche Wiedervereinigung am 03. Oktober 1990 lasst sich als friedlich vollzogene Einigung der beiden deutschen Staaten durch die Absorption Ostdeutschlands von Westdeutschland charakterisieren, in der Kapitalismus und Sozialismus miteinander vereint wurde. Der Mauerfall in Berlin stellte fur d...
Die Deutsche Wiedervereinigung am 03. Oktober 1990 lasst sich als friedlich vollzogene Einigung der beiden deutschen Staaten durch die Absorption Ostdeutschlands von Westdeutschland charakterisieren, in der Kapitalismus und Sozialismus miteinander vereint wurde. Der Mauerfall in Berlin stellte fur das deutsche Volk eine optimistische Zukunft des vereinten Deutschlands dar und bekraftigte die homogene nationale Identitat der Deutschen. Die Begeisterung uber die nationale Einheit wandelte sich jedoch rasch in große Enttauschung. Aufgrund der mangelnden Berucksichtigung der politisch-wirtschaftlichen sowie soziokulturellen Lage der fruheren DDR wahrend des Absorptionsprozesses verscharfte sich der Konflikt zwischen den Burgern aus den alten und neuen Bundeslandern erheblich. Die innerdeutschen OstWest-Spannungen und die einseitige Integrationspolitik durch die BRD entsprachen nicht dem wahren Geist der Deutschen Einheit, die auf Grundlage des gegenseitigen Respekts und Verstandnisses gemeinsames Wachstum zum Ziel hatte. Die politische Integration wurde innerhalb kurzer Zeit erfolgreich vollzogen, wahrend die wirtschaftliche Integration durch zu schnell erfolgte Privatisierung und Umorganisierung der Wirtschaftssektoren Probleme nach sich zog. Die Einfuhrung der Marktwirtschaft in der DDR und die Wahrungsvereinheitlichung fuhrten zur Verschlechterung der Wirtschaftslage in den neuen Bundeslandern. Dort stieg die Arbeitslosigkeit stark an, was die Burger der neuen Bundeslander im hohen Maße beunruhigte. Sie hatten Angst, als zweitrangige Burger des vereinten Deutschlands angesehen zu werden. Die Euphorie am Anfang und die anschließende Enttauschung uber die Wiedervereinigung verstellten den Blick und die Burger in den neuen Bundeslandern sehnten sich sogar nach der alten DDR. Im Vergleich zur koreanischen Halbinsel fanden zwischen den beiden deutschen Staaten vor der Wiedervereinigung ein relativ umfangreicherer Austausch und eine engere Kooperation statt. Dennoch bestehen zwischen Ost- und Westdeutschland immer noch schwer beizulegende Konflikte und innerdeutsche kulturelle Unterschiede. Dies impliziert, dass die Barriere, die uber 40 Jahre fortbestand, nicht einfach innerhalb von 20 Jahren durchzubrechen ist und je langer die Trennung andauert, desto langer nimmt die Erholung Zeit in Anspruch. Nach Beendigung des Kalten Krieges streben die Staaten weltweit nach Starkung ihrer nationalen Wettbewerbsfahigkeit auf globalen Markten. Das Fortbestehen der Teilung auf der koreanischen Halbinsel fuhrt okonomisch zu ineffizienten Konfrontationen zwischen Nord- und Sudkorea, welche sich negativ auf ihr Image sowie ihren internationalen Stellenwert auswirken konnen. Der Weg zur Wiedervereinigung Koreas scheint noch lang zu sein. Es bestehen zahlreiche Hindernisse, die die Vereinigung der beiden koreanischen Staaten hemmen. Doch diese Hurden zu uberwinden und den Weg zur nationalen Einheit des Volks zu ebnen stellt fur Koreaner eine unbedingt zu erfullende Aufgabe dar. Die deutsche Wiedervereinigungspolitik liefert in dieser Hinsicht wichtige Leitfaden zur Auseinandersetzung mit den Moglichkeiten, um die Wiedervereinigung Koreas zu vollziehen: 1. Die sukzessive Intensivierung des bilateralen Austausches und der Zusammenarbeit dient zur Wiederherstellung des gegenseitigen Vertrauens und der nationalen Homogenitat. Der konstante Austausch zwischen beiden koreanischen Staaten spielt fur die Herausbildung ihrer nationalen Identitat und die Uberwindung ideologisch-politischer Differenzen eine wichtige Rolle. Uber 40 Jahre setzte sich die BRD in vielen Bereichen fur die Forderung sowie Aufrechterhaltung des konstanten Austausches und der Kooperation mit der DDR ein. Die fortdauernde Initiative seitens der BRD war der Grundstein zu allmahlichen Veranderungen in der Gesellschaft der DDR. Die DDR-Burger konnten beispielsweise Radio-und Fernsehsendungen aus der BDR verfolgen, wodurch die kulturelle sowie sprachliche Homogenitat der Deutschen aufrechterhalten wurde. Korea ist seit uber 60 Jahren geteilt. Der aktuelle Stand des innerkoreanischen Austausches liegt auf einem niedrigeren Niveau als zum Zeitpunkt der Deutschen Teilung im Jahre 1945. Zudem sind die Beziehungen zwischen Nord- und Sudkorea durch den Koreakrieg sowie provokative Angriffe Nordkoreas von tiefen Misstrauen, Feindlichkeit und denunzierender Propaganda gepragt. Im Prozess der Wiedervereinigung der koreanischen Halbinsel soll daher das Hauptaugenmerk auf die Uberwindung der Differenzen beider koreanischen Staaten durch einen intensiveren Austausch, eine engere Kooperation sowie die Wiederherstellung der nationalen Homogenitat gelegt werden. Die Intensivierung des innerkoreanischen Austausches und der Zusammenarbeit verfolgt in diesem Zusammenhang primar das Ziel, Nordkorea die Ideen der Demokratie und Freiheit zu vermitteln und den Nordkoreanern die Marktwirtschaft in einer kapitalistischen Gesellschaft nachvollziehbar zu machen. Insbesondere muss die Zusammenarbeit im wirtschaftlichen Sektor gestarkt werden, um die Differenzen des Wirtschaftsstandards zwischen Nord- und Sudkorea zu verringern. Die innerkoreanischen Beziehungen erreichten unter der Regierung Kim Dae-Jungs (1998-2002) den Hohepunkt, als 2000 das erste historische Gipfeltreffen in der nordkoreanischen Hauptstadt Pjongjang abgehalten wurde. Es finden sich hierbei auch Parallelen zu der anfanglichen Amtszeit Willy Brandts in den 70er Jahren in Deutschland. Die beiden Staatschefs der beiden Koreas unterzeichneten zum Abschluss ein Abkommen, das im Großen und Ganzen 'Frieden und Kooperation" beinhaltete. Aufgrund der Weiterentwicklung von Massenvernichtungswaffen Nordkoreas konnten die Vereinbarungen jedoch nicht umgesetzt werden und die Hoffnung auf intensiveren Austausch blieb unerfullt. Fur Nordkorea sind die Atomwaffen namlich das einzige Mittel, um den Sturz des Regimes zu verhindern. 2. Die sudkoreanische Regierung soll sich bemuhen, die Kraft des Landes auszudehnen und an den Planen zur Schaffung eines Wiedervereinigungsfonds zu arbeiten. Die Uberlegenheit der BRD in Wirtschaft, Politik sowie Soziales galt wahrend des Absorptionsprozesses als ein interner Faktor, welcher letztendlich die Deutsche Einheit ermoglichte. Auf Basis ihrer soliden Wirtschaftskraft ubernahm die BRD eine fuhrende Rolle fur die Durchfuhrung von Austausch und Zusammenarbeit zwischen den beiden deutschen Staaten. Dies weckte bei den DDR-Burgern die Sehnsucht nach dem Leben in der BRD. Um die Wirtschaftskraft des Landes zu vergroßern soll sich Sudkorea dafur einsetzen, die freie Demokratie und die Marktwirtschaft auf hohem Niveau zu etablieren und eine soziale Sicherheit zu gewahrleisten. Auf diese Art und Weise werden Grundlagen fur eine harmonische Zukunft beider koreanischer Staaten geschaffen. Am 1989 entsprach das Bruttoinlandsprodukt der DDR 1989 15% des Bruttoinlandsprodukts der BRD, wahrend das Bruttonationaleinkommen von Nordkorea 2011 jedoch nur 2,7 % des von Sudkorea betrug. Betrachtet man die Tatschache, dass die Wirtschaftkraft Sudkoreas schwacher ist als die der damaligen BRD, wird deutlich, wie wichtig diese Aufgabe der Starkung der Wirtschaftkraft des Landes fur die Beschaffung von Mitteln fur die Wiedervereinigung ist. Daruber hinaus verfugten die DDR-Burger unter dem Sozialismus im Vergleich zu den Burgern Nordkoreas nicht nur uber ein starkes Burgerbewusstsein, sondern auch uber Erfahrungen mit der Demokratie. Durch die ideologische Gehirnwasche und repressive Volkskontrolle konnte in Nordkorea die Hoffnung auf Demokratie nicht Fuß fassen. 3. Die Wiedervereinigungspolitik der sudkoreanischen Regierung soll auf Basis enger dipolomatischer Beziehungen mit den vier wichtigen Machten, den USA, der V.R. China, Japan und Russland, gefuhrt werden. Um den Frieden und die Sicherheit innerhalb Europas zu gewahrleisten, fuhrte die BRD eine umfassende Versohnungspolitik mit den vier Siegermachten sowie ihren Nachbarlandern und setzte sich fur die Abrustung sowie fur eine aktive Teilnahme an der europaischen Sicherheitskonferenz (KSZE) ein. Die dipolomatischen Bemuhungen der BRD-Regierung trugen einen großen Beitrag zur Beendigung des Ost-West-Konflikts. In dieser Hinsicht ist es fur die sudkoreanische Regierung von großer Relevanz, der internationalen Gemeinschaft globales Engagement fur Weltfrieden, ihren starken Willen zur Wiedervereinigung auf der koreanischen Halbinsel zu zeigen, um dadurch ein positives Bild und Visionen des vereinigten Koreas zu prasentieren. Sie soll in der internationalen Gemeinschaft die klare Haltung einnehmen, dass das vereinigte Korea in Zukunft die mit Nordkorea assoziierbaren negativen Vorstellungen als Land der Massenvernichtungswaffen, Sponsor fur internationalen Terrorismus, Exportland der Atomwaffentechnik und Land der Menschenrechtsunterdruckung strikt ablehnt. 4. Die Wirtschaftshilfe fur Nordkorea muss nach dem Prinzip der Reziprozitat erfolgen. In den Jahren 1983 und 1984 gewahrte die Bundesrepublik Deutschland Milliardenkredite an die DDR, die sich auf zwei Mrd. DM beliefen. Dies fuhrte zu einem endgultigen Abbau der Selbstschussanlage in der innerdeutschen Grenze. Daruber hinaus bat die BRD-Regierung der DDR von 1963 bis 1989 eine weitere Finanzhilfe in Hohe von 3,4 Mrd. DM an und entließ insgesamt 34,000 DDR-Dissidenten. Hierfur forderte die BDR die Gestattung von Familienbesuchen und eine flexiblere Ausreise der DDR-Burger in den westen Deutschlands. Als ersten Schritt mussen die Zielsetzungender innerkoreanischen Gesprache und der Zusammenarbeit klar formuliert werden. Sie liegen darin, das gegenseitige Vertrauen beider Staaten aufzubauen und einen friedlichen Weg zur gemeineinsamen Existenz beider Staaten auf der koreanischen Halbinsel zu finden. Durch die Gesprache konnen die von den beiden Parteien vorgeschlagenen Verhandlungspunkte die Umsetzbaren herausfiltert und verwirklicht werden. Seitdem die sudkoreanische Regierung mit der Sowjetunion und der V.R. China diplomatische Beziehungen aufnahm, beharrt Nordkorea auf seine Abschottungspolitik, da die Offnung zur Welt seinerseits eine Gefahr fur das Regime darstellen konnte. Zur Sicherstellung des diktatorischen Systems sorgte Kim Jong-Il durch die Machtubergabe an seinen Sohn Kim Jung-Un. Sogar wirtschaftliche Hilfen werden nur eingeschrankt aufgenommen. Nordkorea besteht immer noch auf die Weiterentwicklung von Atomwaffen und lehnt jegliche Art der Reform und Offnung ab. Die Uberzeugung Nordkoreas, dass der 'eigene Sozialismus" die einzige Moglichkeit zum Schutz des Regimes darstellt, erschwert die Offnung zur Außenwelt. Um sich aus der diplomatischen Isolierung zu befreien und die schwerwiegenden Wirtschaftsprobleme des Landes zu bekampfen, versucht Nordkorea zwar Verhandlungen uber das Atomprogramm mit den USA zu fuhren, aber hier fehlt Aufrichtigkeit und Ehrlichkeit seinerseits. Diese Dissertation befasst sich hauptsachlich mit dem Thema 'Wiedervereinigung Koreas und ihre Nachwirkung". Dadurch kann der Eindruck entstehen, dass das Thema tendenziell auf den negativen Aspekten fokussiert ist. Es bestehen auch skeptische Ansichten, in denen die Meinung vertreten wird, dass die Wiedervereinigung Koreas zum aktuellen Zeitpunkt eine noch schwer realisierbare Aufgabe darstelle. Aber Deutschland erlangte durch die Wiedervereinigung seine vollkommene Souveranitat und Identitat zuruck und gilt heutzutage als großte Wirtschaftsmacht innerhalb der EU und als zweitgroßte Exportnation weltweit. In der Außenpolitik vollzog Deutschland vor allem einen Wandel vom Sicherheitsimporteur zum Sicherheitsexporteur. Wie es sich zum Beispiel der Deutschen Wiedervereinigung zeigt, sind die positiven Folgen der Wiedervereinigung auf der koreanischen Halbinsel auch nicht zu ubersehen. Mit der Uberwindung der Schattenseiten der Geschichte gepragt von nationaler Trennung kann insbesondere das Selbstwertgefuhl der Koreaner zuruckgewonnen werden. Außerdem ist die zu vollziehende Wiedervereinigung Koreas als die Verwirklichung des wahren Nationalstaates und der Wiedererlangung der koreanischen Identitat zu interpretieren.
Die Deutsche Wiedervereinigung am 03. Oktober 1990 lasst sich als friedlich vollzogene Einigung der beiden deutschen Staaten durch die Absorption Ostdeutschlands von Westdeutschland charakterisieren, in der Kapitalismus und Sozialismus miteinander vereint wurde. Der Mauerfall in Berlin stellte fur das deutsche Volk eine optimistische Zukunft des vereinten Deutschlands dar und bekraftigte die homogene nationale Identitat der Deutschen. Die Begeisterung uber die nationale Einheit wandelte sich jedoch rasch in große Enttauschung. Aufgrund der mangelnden Berucksichtigung der politisch-wirtschaftlichen sowie soziokulturellen Lage der fruheren DDR wahrend des Absorptionsprozesses verscharfte sich der Konflikt zwischen den Burgern aus den alten und neuen Bundeslandern erheblich. Die innerdeutschen OstWest-Spannungen und die einseitige Integrationspolitik durch die BRD entsprachen nicht dem wahren Geist der Deutschen Einheit, die auf Grundlage des gegenseitigen Respekts und Verstandnisses gemeinsames Wachstum zum Ziel hatte. Die politische Integration wurde innerhalb kurzer Zeit erfolgreich vollzogen, wahrend die wirtschaftliche Integration durch zu schnell erfolgte Privatisierung und Umorganisierung der Wirtschaftssektoren Probleme nach sich zog. Die Einfuhrung der Marktwirtschaft in der DDR und die Wahrungsvereinheitlichung fuhrten zur Verschlechterung der Wirtschaftslage in den neuen Bundeslandern. Dort stieg die Arbeitslosigkeit stark an, was die Burger der neuen Bundeslander im hohen Maße beunruhigte. Sie hatten Angst, als zweitrangige Burger des vereinten Deutschlands angesehen zu werden. Die Euphorie am Anfang und die anschließende Enttauschung uber die Wiedervereinigung verstellten den Blick und die Burger in den neuen Bundeslandern sehnten sich sogar nach der alten DDR. Im Vergleich zur koreanischen Halbinsel fanden zwischen den beiden deutschen Staaten vor der Wiedervereinigung ein relativ umfangreicherer Austausch und eine engere Kooperation statt. Dennoch bestehen zwischen Ost- und Westdeutschland immer noch schwer beizulegende Konflikte und innerdeutsche kulturelle Unterschiede. Dies impliziert, dass die Barriere, die uber 40 Jahre fortbestand, nicht einfach innerhalb von 20 Jahren durchzubrechen ist und je langer die Trennung andauert, desto langer nimmt die Erholung Zeit in Anspruch. Nach Beendigung des Kalten Krieges streben die Staaten weltweit nach Starkung ihrer nationalen Wettbewerbsfahigkeit auf globalen Markten. Das Fortbestehen der Teilung auf der koreanischen Halbinsel fuhrt okonomisch zu ineffizienten Konfrontationen zwischen Nord- und Sudkorea, welche sich negativ auf ihr Image sowie ihren internationalen Stellenwert auswirken konnen. Der Weg zur Wiedervereinigung Koreas scheint noch lang zu sein. Es bestehen zahlreiche Hindernisse, die die Vereinigung der beiden koreanischen Staaten hemmen. Doch diese Hurden zu uberwinden und den Weg zur nationalen Einheit des Volks zu ebnen stellt fur Koreaner eine unbedingt zu erfullende Aufgabe dar. Die deutsche Wiedervereinigungspolitik liefert in dieser Hinsicht wichtige Leitfaden zur Auseinandersetzung mit den Moglichkeiten, um die Wiedervereinigung Koreas zu vollziehen: 1. Die sukzessive Intensivierung des bilateralen Austausches und der Zusammenarbeit dient zur Wiederherstellung des gegenseitigen Vertrauens und der nationalen Homogenitat. Der konstante Austausch zwischen beiden koreanischen Staaten spielt fur die Herausbildung ihrer nationalen Identitat und die Uberwindung ideologisch-politischer Differenzen eine wichtige Rolle. Uber 40 Jahre setzte sich die BRD in vielen Bereichen fur die Forderung sowie Aufrechterhaltung des konstanten Austausches und der Kooperation mit der DDR ein. Die fortdauernde Initiative seitens der BRD war der Grundstein zu allmahlichen Veranderungen in der Gesellschaft der DDR. Die DDR-Burger konnten beispielsweise Radio-und Fernsehsendungen aus der BDR verfolgen, wodurch die kulturelle sowie sprachliche Homogenitat der Deutschen aufrechterhalten wurde. Korea ist seit uber 60 Jahren geteilt. Der aktuelle Stand des innerkoreanischen Austausches liegt auf einem niedrigeren Niveau als zum Zeitpunkt der Deutschen Teilung im Jahre 1945. Zudem sind die Beziehungen zwischen Nord- und Sudkorea durch den Koreakrieg sowie provokative Angriffe Nordkoreas von tiefen Misstrauen, Feindlichkeit und denunzierender Propaganda gepragt. Im Prozess der Wiedervereinigung der koreanischen Halbinsel soll daher das Hauptaugenmerk auf die Uberwindung der Differenzen beider koreanischen Staaten durch einen intensiveren Austausch, eine engere Kooperation sowie die Wiederherstellung der nationalen Homogenitat gelegt werden. Die Intensivierung des innerkoreanischen Austausches und der Zusammenarbeit verfolgt in diesem Zusammenhang primar das Ziel, Nordkorea die Ideen der Demokratie und Freiheit zu vermitteln und den Nordkoreanern die Marktwirtschaft in einer kapitalistischen Gesellschaft nachvollziehbar zu machen. Insbesondere muss die Zusammenarbeit im wirtschaftlichen Sektor gestarkt werden, um die Differenzen des Wirtschaftsstandards zwischen Nord- und Sudkorea zu verringern. Die innerkoreanischen Beziehungen erreichten unter der Regierung Kim Dae-Jungs (1998-2002) den Hohepunkt, als 2000 das erste historische Gipfeltreffen in der nordkoreanischen Hauptstadt Pjongjang abgehalten wurde. Es finden sich hierbei auch Parallelen zu der anfanglichen Amtszeit Willy Brandts in den 70er Jahren in Deutschland. Die beiden Staatschefs der beiden Koreas unterzeichneten zum Abschluss ein Abkommen, das im Großen und Ganzen 'Frieden und Kooperation" beinhaltete. Aufgrund der Weiterentwicklung von Massenvernichtungswaffen Nordkoreas konnten die Vereinbarungen jedoch nicht umgesetzt werden und die Hoffnung auf intensiveren Austausch blieb unerfullt. Fur Nordkorea sind die Atomwaffen namlich das einzige Mittel, um den Sturz des Regimes zu verhindern. 2. Die sudkoreanische Regierung soll sich bemuhen, die Kraft des Landes auszudehnen und an den Planen zur Schaffung eines Wiedervereinigungsfonds zu arbeiten. Die Uberlegenheit der BRD in Wirtschaft, Politik sowie Soziales galt wahrend des Absorptionsprozesses als ein interner Faktor, welcher letztendlich die Deutsche Einheit ermoglichte. Auf Basis ihrer soliden Wirtschaftskraft ubernahm die BRD eine fuhrende Rolle fur die Durchfuhrung von Austausch und Zusammenarbeit zwischen den beiden deutschen Staaten. Dies weckte bei den DDR-Burgern die Sehnsucht nach dem Leben in der BRD. Um die Wirtschaftskraft des Landes zu vergroßern soll sich Sudkorea dafur einsetzen, die freie Demokratie und die Marktwirtschaft auf hohem Niveau zu etablieren und eine soziale Sicherheit zu gewahrleisten. Auf diese Art und Weise werden Grundlagen fur eine harmonische Zukunft beider koreanischer Staaten geschaffen. Am 1989 entsprach das Bruttoinlandsprodukt der DDR 1989 15% des Bruttoinlandsprodukts der BRD, wahrend das Bruttonationaleinkommen von Nordkorea 2011 jedoch nur 2,7 % des von Sudkorea betrug. Betrachtet man die Tatschache, dass die Wirtschaftkraft Sudkoreas schwacher ist als die der damaligen BRD, wird deutlich, wie wichtig diese Aufgabe der Starkung der Wirtschaftkraft des Landes fur die Beschaffung von Mitteln fur die Wiedervereinigung ist. Daruber hinaus verfugten die DDR-Burger unter dem Sozialismus im Vergleich zu den Burgern Nordkoreas nicht nur uber ein starkes Burgerbewusstsein, sondern auch uber Erfahrungen mit der Demokratie. Durch die ideologische Gehirnwasche und repressive Volkskontrolle konnte in Nordkorea die Hoffnung auf Demokratie nicht Fuß fassen. 3. Die Wiedervereinigungspolitik der sudkoreanischen Regierung soll auf Basis enger dipolomatischer Beziehungen mit den vier wichtigen Machten, den USA, der V.R. China, Japan und Russland, gefuhrt werden. Um den Frieden und die Sicherheit innerhalb Europas zu gewahrleisten, fuhrte die BRD eine umfassende Versohnungspolitik mit den vier Siegermachten sowie ihren Nachbarlandern und setzte sich fur die Abrustung sowie fur eine aktive Teilnahme an der europaischen Sicherheitskonferenz (KSZE) ein. Die dipolomatischen Bemuhungen der BRD-Regierung trugen einen großen Beitrag zur Beendigung des Ost-West-Konflikts. In dieser Hinsicht ist es fur die sudkoreanische Regierung von großer Relevanz, der internationalen Gemeinschaft globales Engagement fur Weltfrieden, ihren starken Willen zur Wiedervereinigung auf der koreanischen Halbinsel zu zeigen, um dadurch ein positives Bild und Visionen des vereinigten Koreas zu prasentieren. Sie soll in der internationalen Gemeinschaft die klare Haltung einnehmen, dass das vereinigte Korea in Zukunft die mit Nordkorea assoziierbaren negativen Vorstellungen als Land der Massenvernichtungswaffen, Sponsor fur internationalen Terrorismus, Exportland der Atomwaffentechnik und Land der Menschenrechtsunterdruckung strikt ablehnt. 4. Die Wirtschaftshilfe fur Nordkorea muss nach dem Prinzip der Reziprozitat erfolgen. In den Jahren 1983 und 1984 gewahrte die Bundesrepublik Deutschland Milliardenkredite an die DDR, die sich auf zwei Mrd. DM beliefen. Dies fuhrte zu einem endgultigen Abbau der Selbstschussanlage in der innerdeutschen Grenze. Daruber hinaus bat die BRD-Regierung der DDR von 1963 bis 1989 eine weitere Finanzhilfe in Hohe von 3,4 Mrd. DM an und entließ insgesamt 34,000 DDR-Dissidenten. Hierfur forderte die BDR die Gestattung von Familienbesuchen und eine flexiblere Ausreise der DDR-Burger in den westen Deutschlands. Als ersten Schritt mussen die Zielsetzungender innerkoreanischen Gesprache und der Zusammenarbeit klar formuliert werden. Sie liegen darin, das gegenseitige Vertrauen beider Staaten aufzubauen und einen friedlichen Weg zur gemeineinsamen Existenz beider Staaten auf der koreanischen Halbinsel zu finden. Durch die Gesprache konnen die von den beiden Parteien vorgeschlagenen Verhandlungspunkte die Umsetzbaren herausfiltert und verwirklicht werden. Seitdem die sudkoreanische Regierung mit der Sowjetunion und der V.R. China diplomatische Beziehungen aufnahm, beharrt Nordkorea auf seine Abschottungspolitik, da die Offnung zur Welt seinerseits eine Gefahr fur das Regime darstellen konnte. Zur Sicherstellung des diktatorischen Systems sorgte Kim Jong-Il durch die Machtubergabe an seinen Sohn Kim Jung-Un. Sogar wirtschaftliche Hilfen werden nur eingeschrankt aufgenommen. Nordkorea besteht immer noch auf die Weiterentwicklung von Atomwaffen und lehnt jegliche Art der Reform und Offnung ab. Die Uberzeugung Nordkoreas, dass der 'eigene Sozialismus" die einzige Moglichkeit zum Schutz des Regimes darstellt, erschwert die Offnung zur Außenwelt. Um sich aus der diplomatischen Isolierung zu befreien und die schwerwiegenden Wirtschaftsprobleme des Landes zu bekampfen, versucht Nordkorea zwar Verhandlungen uber das Atomprogramm mit den USA zu fuhren, aber hier fehlt Aufrichtigkeit und Ehrlichkeit seinerseits. Diese Dissertation befasst sich hauptsachlich mit dem Thema 'Wiedervereinigung Koreas und ihre Nachwirkung". Dadurch kann der Eindruck entstehen, dass das Thema tendenziell auf den negativen Aspekten fokussiert ist. Es bestehen auch skeptische Ansichten, in denen die Meinung vertreten wird, dass die Wiedervereinigung Koreas zum aktuellen Zeitpunkt eine noch schwer realisierbare Aufgabe darstelle. Aber Deutschland erlangte durch die Wiedervereinigung seine vollkommene Souveranitat und Identitat zuruck und gilt heutzutage als großte Wirtschaftsmacht innerhalb der EU und als zweitgroßte Exportnation weltweit. In der Außenpolitik vollzog Deutschland vor allem einen Wandel vom Sicherheitsimporteur zum Sicherheitsexporteur. Wie es sich zum Beispiel der Deutschen Wiedervereinigung zeigt, sind die positiven Folgen der Wiedervereinigung auf der koreanischen Halbinsel auch nicht zu ubersehen. Mit der Uberwindung der Schattenseiten der Geschichte gepragt von nationaler Trennung kann insbesondere das Selbstwertgefuhl der Koreaner zuruckgewonnen werden. Außerdem ist die zu vollziehende Wiedervereinigung Koreas als die Verwirklichung des wahren Nationalstaates und der Wiedererlangung der koreanischen Identitat zu interpretier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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