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논문은 우리나라 근현대기 고미술컬렉션에 관한 연구다. 우리의 고미술컬렉션이 어떻게 대중과 만나게 되고 그 과정을 통해 대중은 무엇을 경험하고 인식하는지에 초점을 맞추어 논의를 진행했다. 우선, 고미술컬렉션의 존재의미와 컬렉션을 보는 관점에 대해 고찰했다. 고미술컬렉션의 개념, 컬렉션과 박물관의 관계, 박물관에서 이뤄지는 고미술컬렉션 전시의 의미와 효과, 전시의 철학적· 문화적 의미, 고미술 컬렉션의 감상을 통한 미적 인식(美的 認識)과 사회적 기억(社會的 記憶) 등을 살펴보았다. 모두 고미술컬렉션을 바라보는 시각에 대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고미술컬렉션을 바라보는 시각에 있어 중요한 점은‘컬렉션과 대중의 만남’이다. 대중이 컬렉션을 만나는 과정에서 가장 대표적인 형식은 컬렉션의 전시다. 전시를 통해 대중이 컬렉션을 만나는 것은 컬렉션의 수용(受容)이라고 할 수 있다. 전시를 통해 컬렉션이 대중과 만날 때, 이는 고미술컬렉션이 개인 소유물이라는 사적(私的)인 영역을 넘어 공적(公的)인 영역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고미술컬렉션은 이같은 과정을 거쳐 진정한 존재 의미와 가치를 지니게 된다. 그것은 박물관이라는 공간에서 컬렉션의 전시를 통해 실현된다. 이러한 시각을 바탕으로 근현대기 국내 고미술컬렉션의 전개 과정과 수용 양상에 대해서도 살펴보았다. 우리 역사 속에서 고미술컬렉션이 본격적으로 활성화된 것은 조선 후기였다. 조선 전기의 컬렉션이 궁중이나 왕실 종친(宗親) 중심으로 이뤄졌다면 조선 후기에 이르면 경화세족(京華世族)과 중인 여항문인(閭巷文人)으로 수집가 계층이 확산되면서 하나의 문화로 자리잡았다. 조선 후기는 수집문화에 대한 관심이 확산되고 미술품의 유통과 매매(賣買)가 시작되면서 근대적인 고미술컬렉션 문화의 토대를 형성했다. 19세기말-20세기초 일제강점기에 이르면 국권상실과 식민지라는 특수한 상황 속에서 컬렉션 문화가 확산되어 갔다. 이 시대의 두드러진 양상은 이왕가박물관, 조선총독부박물관과 같은 공공박물관의 출현이다. 박물관에서 이뤄지는 전시를 통해 대중들이 고미술컬렉션을 만나게 된 것이다. 고미술 전시는 대중들에게 낯선 경험이었고 이로 인해 대중들은 고미술품을 새롭게 인식하게 되었다. 일제강점기 박물관과 전시 제도의 등장은 우리 고미술컬렉션의 흐름에서 중요한 전기가 되었다. 박물관의 등장은 기본적으로 일제 침략과 식민지 정책의 산물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박물관에서 이뤄진 고미술컬렉션의 전시를 통해 사람들은 한국적인 미감을 체험하고 한국미(韓國美)를 재인식할 수 있었다. 일제강점기엔 위창 오세창(葦滄 吳世昌), 간송 전형필(澗松 全鎣弼), 소전 손재형(素筌 孫在馨), 우경 오봉빈(友鏡 吳鳳彬), 수정 박병래(水晶 朴秉來)처럼 큰 족적을 남긴 개인 컬렉터들도 다수 등장했다. 광복 이후엔 식민지시대의 왜곡과 굴절에서 벗어나 컬렉션 문화가 도약하기 시작했다. 광복 이후 고미술컬렉션의 특징으로는 대형 컬렉션의 등장, 박물관 전시의 활성화, 컬렉션의 전문화와 전문박물관의 증가, 컬렉션 기증 문화의 확산을 꼽을 수 있다. 컬렉션의 기증은 컬렉션의 공적 가치를 실현하는 과정이라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사적(私的)인 소장(所藏)에 머무르지 않고 공공박물관이라는 공적(公的) 영역으로 진입함으로써 컬렉션의 공적 가치를 구현하는 가장 상징적인 과정이기 때문이다. 이어 컬렉션의 수용을 통해 사람들이 어떻게 한국미를 재인식하는지에 대해서도 살펴보았다. 19세기말-20세기초 고려청자가 어떻게 한국미의 대표 문화재로 인식되기 시작했는지, 1920-30년대 평범한 일상용품이었던 백자와 소반(小盤)을 어떻게 아름다운 대상으로 바라보게 되었는지, 주목하지 않았던 전통 민화(民畵)와 조각보가 어떤 과정을 거쳐 20세기 인기 있는 고미술품으로 자리 잡게 되었는지 등을 고찰했다. 일상용품이었던 고려청자는 19세기말-20세기초 청자 수집과 매매, 전시 등의 영향을 받아 새로운 존재로 받아들여지기 시작했다. 특히 청자컬렉션이 형성되고 박물관 등에서 청자전시가 이뤄진 것은 일상용품 청자를 미술품 청자로 재인식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컬렉션의 수용 과정을 거쳐 청자에 담겨 있는 한국미를 재인식했고 이를 통해 고려청자가 한국미를 대표하는 고미술품으로 자리 잡은 것이다. 일제강점기 ...
이 논문은 우리나라 근현대기 고미술컬렉션에 관한 연구다. 우리의 고미술컬렉션이 어떻게 대중과 만나게 되고 그 과정을 통해 대중은 무엇을 경험하고 인식하는지에 초점을 맞추어 논의를 진행했다. 우선, 고미술컬렉션의 존재의미와 컬렉션을 보는 관점에 대해 고찰했다. 고미술컬렉션의 개념, 컬렉션과 박물관의 관계, 박물관에서 이뤄지는 고미술컬렉션 전시의 의미와 효과, 전시의 철학적· 문화적 의미, 고미술 컬렉션의 감상을 통한 미적 인식(美的 認識)과 사회적 기억(社會的 記憶) 등을 살펴보았다. 모두 고미술컬렉션을 바라보는 시각에 대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고미술컬렉션을 바라보는 시각에 있어 중요한 점은‘컬렉션과 대중의 만남’이다. 대중이 컬렉션을 만나는 과정에서 가장 대표적인 형식은 컬렉션의 전시다. 전시를 통해 대중이 컬렉션을 만나는 것은 컬렉션의 수용(受容)이라고 할 수 있다. 전시를 통해 컬렉션이 대중과 만날 때, 이는 고미술컬렉션이 개인 소유물이라는 사적(私的)인 영역을 넘어 공적(公的)인 영역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고미술컬렉션은 이같은 과정을 거쳐 진정한 존재 의미와 가치를 지니게 된다. 그것은 박물관이라는 공간에서 컬렉션의 전시를 통해 실현된다. 이러한 시각을 바탕으로 근현대기 국내 고미술컬렉션의 전개 과정과 수용 양상에 대해서도 살펴보았다. 우리 역사 속에서 고미술컬렉션이 본격적으로 활성화된 것은 조선 후기였다. 조선 전기의 컬렉션이 궁중이나 왕실 종친(宗親) 중심으로 이뤄졌다면 조선 후기에 이르면 경화세족(京華世族)과 중인 여항문인(閭巷文人)으로 수집가 계층이 확산되면서 하나의 문화로 자리잡았다. 조선 후기는 수집문화에 대한 관심이 확산되고 미술품의 유통과 매매(賣買)가 시작되면서 근대적인 고미술컬렉션 문화의 토대를 형성했다. 19세기말-20세기초 일제강점기에 이르면 국권상실과 식민지라는 특수한 상황 속에서 컬렉션 문화가 확산되어 갔다. 이 시대의 두드러진 양상은 이왕가박물관, 조선총독부박물관과 같은 공공박물관의 출현이다. 박물관에서 이뤄지는 전시를 통해 대중들이 고미술컬렉션을 만나게 된 것이다. 고미술 전시는 대중들에게 낯선 경험이었고 이로 인해 대중들은 고미술품을 새롭게 인식하게 되었다. 일제강점기 박물관과 전시 제도의 등장은 우리 고미술컬렉션의 흐름에서 중요한 전기가 되었다. 박물관의 등장은 기본적으로 일제 침략과 식민지 정책의 산물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박물관에서 이뤄진 고미술컬렉션의 전시를 통해 사람들은 한국적인 미감을 체험하고 한국미(韓國美)를 재인식할 수 있었다. 일제강점기엔 위창 오세창(葦滄 吳世昌), 간송 전형필(澗松 全鎣弼), 소전 손재형(素筌 孫在馨), 우경 오봉빈(友鏡 吳鳳彬), 수정 박병래(水晶 朴秉來)처럼 큰 족적을 남긴 개인 컬렉터들도 다수 등장했다. 광복 이후엔 식민지시대의 왜곡과 굴절에서 벗어나 컬렉션 문화가 도약하기 시작했다. 광복 이후 고미술컬렉션의 특징으로는 대형 컬렉션의 등장, 박물관 전시의 활성화, 컬렉션의 전문화와 전문박물관의 증가, 컬렉션 기증 문화의 확산을 꼽을 수 있다. 컬렉션의 기증은 컬렉션의 공적 가치를 실현하는 과정이라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사적(私的)인 소장(所藏)에 머무르지 않고 공공박물관이라는 공적(公的) 영역으로 진입함으로써 컬렉션의 공적 가치를 구현하는 가장 상징적인 과정이기 때문이다. 이어 컬렉션의 수용을 통해 사람들이 어떻게 한국미를 재인식하는지에 대해서도 살펴보았다. 19세기말-20세기초 고려청자가 어떻게 한국미의 대표 문화재로 인식되기 시작했는지, 1920-30년대 평범한 일상용품이었던 백자와 소반(小盤)을 어떻게 아름다운 대상으로 바라보게 되었는지, 주목하지 않았던 전통 민화(民畵)와 조각보가 어떤 과정을 거쳐 20세기 인기 있는 고미술품으로 자리 잡게 되었는지 등을 고찰했다. 일상용품이었던 고려청자는 19세기말-20세기초 청자 수집과 매매, 전시 등의 영향을 받아 새로운 존재로 받아들여지기 시작했다. 특히 청자컬렉션이 형성되고 박물관 등에서 청자전시가 이뤄진 것은 일상용품 청자를 미술품 청자로 재인식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컬렉션의 수용 과정을 거쳐 청자에 담겨 있는 한국미를 재인식했고 이를 통해 고려청자가 한국미를 대표하는 고미술품으로 자리 잡은 것이다. 일제강점기 야나기 무네요시(柳宗悅)과 아사카와(淺川) 형제의 백자컬렉션, 소반컬렉션도 일상용품인 백자와 소반을 미술품으로 인식하는데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1960-80년대에 이르면 전문화된 고미술컬렉션이 축적되면서 민화와 조각보 등에 담겨 있는 한국미를 재발견하게 되었다. 19세기말-20세기초는 전반적으로 전통의 재발견, 전통의 재해석이 이뤄지는 시기였다. 식민지시대에 일제(日帝)와 서구(西歐)라는 타자(他者)의 시선을 통해 이뤄진 재인식이었지만 그 과정에서 박물관과 컬렉션이 중요한 역할을 했음을 부인할 수는 없다. 박물관의 전시, 컬렉션의 전시라는 새로운 제도와 형식을 통해 특정 대상의 미적 가치를 새롭게 인식하고 경험하는 과정이었다.
이 논문은 우리나라 근현대기 고미술컬렉션에 관한 연구다. 우리의 고미술컬렉션이 어떻게 대중과 만나게 되고 그 과정을 통해 대중은 무엇을 경험하고 인식하는지에 초점을 맞추어 논의를 진행했다. 우선, 고미술컬렉션의 존재의미와 컬렉션을 보는 관점에 대해 고찰했다. 고미술컬렉션의 개념, 컬렉션과 박물관의 관계, 박물관에서 이뤄지는 고미술컬렉션 전시의 의미와 효과, 전시의 철학적· 문화적 의미, 고미술 컬렉션의 감상을 통한 미적 인식(美的 認識)과 사회적 기억(社會的 記憶) 등을 살펴보았다. 모두 고미술컬렉션을 바라보는 시각에 대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고미술컬렉션을 바라보는 시각에 있어 중요한 점은‘컬렉션과 대중의 만남’이다. 대중이 컬렉션을 만나는 과정에서 가장 대표적인 형식은 컬렉션의 전시다. 전시를 통해 대중이 컬렉션을 만나는 것은 컬렉션의 수용(受容)이라고 할 수 있다. 전시를 통해 컬렉션이 대중과 만날 때, 이는 고미술컬렉션이 개인 소유물이라는 사적(私的)인 영역을 넘어 공적(公的)인 영역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고미술컬렉션은 이같은 과정을 거쳐 진정한 존재 의미와 가치를 지니게 된다. 그것은 박물관이라는 공간에서 컬렉션의 전시를 통해 실현된다. 이러한 시각을 바탕으로 근현대기 국내 고미술컬렉션의 전개 과정과 수용 양상에 대해서도 살펴보았다. 우리 역사 속에서 고미술컬렉션이 본격적으로 활성화된 것은 조선 후기였다. 조선 전기의 컬렉션이 궁중이나 왕실 종친(宗親) 중심으로 이뤄졌다면 조선 후기에 이르면 경화세족(京華世族)과 중인 여항문인(閭巷文人)으로 수집가 계층이 확산되면서 하나의 문화로 자리잡았다. 조선 후기는 수집문화에 대한 관심이 확산되고 미술품의 유통과 매매(賣買)가 시작되면서 근대적인 고미술컬렉션 문화의 토대를 형성했다. 19세기말-20세기초 일제강점기에 이르면 국권상실과 식민지라는 특수한 상황 속에서 컬렉션 문화가 확산되어 갔다. 이 시대의 두드러진 양상은 이왕가박물관, 조선총독부박물관과 같은 공공박물관의 출현이다. 박물관에서 이뤄지는 전시를 통해 대중들이 고미술컬렉션을 만나게 된 것이다. 고미술 전시는 대중들에게 낯선 경험이었고 이로 인해 대중들은 고미술품을 새롭게 인식하게 되었다. 일제강점기 박물관과 전시 제도의 등장은 우리 고미술컬렉션의 흐름에서 중요한 전기가 되었다. 박물관의 등장은 기본적으로 일제 침략과 식민지 정책의 산물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박물관에서 이뤄진 고미술컬렉션의 전시를 통해 사람들은 한국적인 미감을 체험하고 한국미(韓國美)를 재인식할 수 있었다. 일제강점기엔 위창 오세창(葦滄 吳世昌), 간송 전형필(澗松 全鎣弼), 소전 손재형(素筌 孫在馨), 우경 오봉빈(友鏡 吳鳳彬), 수정 박병래(水晶 朴秉來)처럼 큰 족적을 남긴 개인 컬렉터들도 다수 등장했다. 광복 이후엔 식민지시대의 왜곡과 굴절에서 벗어나 컬렉션 문화가 도약하기 시작했다. 광복 이후 고미술컬렉션의 특징으로는 대형 컬렉션의 등장, 박물관 전시의 활성화, 컬렉션의 전문화와 전문박물관의 증가, 컬렉션 기증 문화의 확산을 꼽을 수 있다. 컬렉션의 기증은 컬렉션의 공적 가치를 실현하는 과정이라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사적(私的)인 소장(所藏)에 머무르지 않고 공공박물관이라는 공적(公的) 영역으로 진입함으로써 컬렉션의 공적 가치를 구현하는 가장 상징적인 과정이기 때문이다. 이어 컬렉션의 수용을 통해 사람들이 어떻게 한국미를 재인식하는지에 대해서도 살펴보았다. 19세기말-20세기초 고려청자가 어떻게 한국미의 대표 문화재로 인식되기 시작했는지, 1920-30년대 평범한 일상용품이었던 백자와 소반(小盤)을 어떻게 아름다운 대상으로 바라보게 되었는지, 주목하지 않았던 전통 민화(民畵)와 조각보가 어떤 과정을 거쳐 20세기 인기 있는 고미술품으로 자리 잡게 되었는지 등을 고찰했다. 일상용품이었던 고려청자는 19세기말-20세기초 청자 수집과 매매, 전시 등의 영향을 받아 새로운 존재로 받아들여지기 시작했다. 특히 청자컬렉션이 형성되고 박물관 등에서 청자전시가 이뤄진 것은 일상용품 청자를 미술품 청자로 재인식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컬렉션의 수용 과정을 거쳐 청자에 담겨 있는 한국미를 재인식했고 이를 통해 고려청자가 한국미를 대표하는 고미술품으로 자리 잡은 것이다. 일제강점기 야나기 무네요시(柳宗悅)과 아사카와(淺川) 형제의 백자컬렉션, 소반컬렉션도 일상용품인 백자와 소반을 미술품으로 인식하는데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1960-80년대에 이르면 전문화된 고미술컬렉션이 축적되면서 민화와 조각보 등에 담겨 있는 한국미를 재발견하게 되었다. 19세기말-20세기초는 전반적으로 전통의 재발견, 전통의 재해석이 이뤄지는 시기였다. 식민지시대에 일제(日帝)와 서구(西歐)라는 타자(他者)의 시선을 통해 이뤄진 재인식이었지만 그 과정에서 박물관과 컬렉션이 중요한 역할을 했음을 부인할 수는 없다. 박물관의 전시, 컬렉션의 전시라는 새로운 제도와 형식을 통해 특정 대상의 미적 가치를 새롭게 인식하고 경험하는 과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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