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고에서는 邵雍의 ≪皇極經世聲音唱和圖≫를 이용해 北宋人 孫穆이 ≪계림유사≫에서 고려어를 寫音하기 위해 쓴 한자의 음가를 추정하고, 이를 바탕으로 ≪계림유사≫에 실린 350여 항목의 고려어 어휘를 해독하였다. 그리고 해독된 어형을 대상으로 하여 중세국어와 北宋代音의 초성, 중성, 종성, 성조 대응을 살펴보았다. 書狀官의 신분으로 고려에 왔던 北宋人 孫穆이 1103년에 편찬한 ≪계림유사≫는 당시의 고려 어휘가 北宋代 한자음으로 기록되어 있어 12세기 무렵 국어의 모습을 알려 주는 귀중한 자료이다. 孫穆은 북송의 수도인 汴京(지금의 開封)을 중심으로 한 中原人이었을 것으로 추정되므로 계림유사의 해독을 위해서는 먼저 북송 시기 개봉 지역어의 音系(음운 체계)를 재구할 필요가 있고, 이를 위해 본고에서는 邵雍(1011~1077)이 쓴 ≪皇極經世聲音唱和圖≫를 이용하였다. ≪皇極經世聲音唱和圖≫를 통해 ≪계림유사≫ 寫音字의 音價를 추정한 후, 현전하는 여러 異本 중 順治板 說郛本(淸 順治 4년, 1647)과 香港大學 소장 明鈔說郛本(嘉靖年間, 1522~1566)을 底本으로 하는 한편, 民國板 說郛本과 古今圖書集成本, 五朝小說大觀本 등을 對校하며 계림유사의 語釋을 행하였다. ≪계림유사≫는 원본이 전하지 않아서 다만 여러 전집 속의 일부로만 그 모습을 확인할 수 있고, 또한 오랜 시간에 걸쳐 내려오면서 원래의 모습이 왜곡, 변형되기도 하였는데, 본고에서는 최대한 각 이본의 표기를 존중하고 誤字나 脫字를 되도록 최소한으로 제한하는 입장에서 해독에 임하였다. 해독이 가능한 語項을 중심으로 하여 중세국어와, 중세국어를 寫音하기 위해 쓰인 북송대의 한자음을 초성, 중성, 종성, 성조 면에서 각각 대응시킨 결과는 다음과 같다. 먼저 초성의 경우에는 p:p․pʻ․f, m:m, s:s․ʃ, t:t․tʻ, c:ts․tʃ, cʻ:tsʻ, z:ʒ, r:l, n:n, k:k․kʻ, h:x, ʼ:ʼ (중세국어:北宋代音) 등의 비교적 정연한 대응을 보였다. 그리고 국어의 ‘ㅅ’과 ‘ㅈ’이 반모음 /i-/나 모음 /i/ 앞에서 口蓋化하는 경향이 있었으며, 국어의 유기음으로서는 ‘ㅊ’의 존재만 인정할 수 있었다. 중성에서는 초성과 달리 일관된 체계를 찾기가 어려웠다. 이는 중세국어와 北宋代音의 모음 체계가 서로 달랐기 때문으로, 兩國의 모음 체계에 같이 존재하여 ...
본고에서는 邵雍의 ≪皇極經世聲音唱和圖≫를 이용해 北宋人 孫穆이 ≪계림유사≫에서 고려어를 寫音하기 위해 쓴 한자의 음가를 추정하고, 이를 바탕으로 ≪계림유사≫에 실린 350여 항목의 고려어 어휘를 해독하였다. 그리고 해독된 어형을 대상으로 하여 중세국어와 北宋代音의 초성, 중성, 종성, 성조 대응을 살펴보았다. 書狀官의 신분으로 고려에 왔던 北宋人 孫穆이 1103년에 편찬한 ≪계림유사≫는 당시의 고려 어휘가 北宋代 한자음으로 기록되어 있어 12세기 무렵 국어의 모습을 알려 주는 귀중한 자료이다. 孫穆은 북송의 수도인 汴京(지금의 開封)을 중심으로 한 中原人이었을 것으로 추정되므로 계림유사의 해독을 위해서는 먼저 북송 시기 개봉 지역어의 音系(음운 체계)를 재구할 필요가 있고, 이를 위해 본고에서는 邵雍(1011~1077)이 쓴 ≪皇極經世聲音唱和圖≫를 이용하였다. ≪皇極經世聲音唱和圖≫를 통해 ≪계림유사≫ 寫音字의 音價를 추정한 후, 현전하는 여러 異本 중 順治板 說郛本(淸 順治 4년, 1647)과 香港大學 소장 明鈔說郛本(嘉靖年間, 1522~1566)을 底本으로 하는 한편, 民國板 說郛本과 古今圖書集成本, 五朝小說大觀本 등을 對校하며 계림유사의 語釋을 행하였다. ≪계림유사≫는 원본이 전하지 않아서 다만 여러 전집 속의 일부로만 그 모습을 확인할 수 있고, 또한 오랜 시간에 걸쳐 내려오면서 원래의 모습이 왜곡, 변형되기도 하였는데, 본고에서는 최대한 각 이본의 표기를 존중하고 誤字나 脫字를 되도록 최소한으로 제한하는 입장에서 해독에 임하였다. 해독이 가능한 語項을 중심으로 하여 중세국어와, 중세국어를 寫音하기 위해 쓰인 북송대의 한자음을 초성, 중성, 종성, 성조 면에서 각각 대응시킨 결과는 다음과 같다. 먼저 초성의 경우에는 p:p․pʻ․f, m:m, s:s․ʃ, t:t․tʻ, c:ts․tʃ, cʻ:tsʻ, z:ʒ, r:l, n:n, k:k․kʻ, h:x, ʼ:ʼ (중세국어:北宋代音) 등의 비교적 정연한 대응을 보였다. 그리고 국어의 ‘ㅅ’과 ‘ㅈ’이 반모음 /i-/나 모음 /i/ 앞에서 口蓋化하는 경향이 있었으며, 국어의 유기음으로서는 ‘ㅊ’의 존재만 인정할 수 있었다. 중성에서는 초성과 달리 일관된 체계를 찾기가 어려웠다. 이는 중세국어와 北宋代音의 모음 체계가 서로 달랐기 때문으로, 兩國의 모음 체계에 같이 존재하여 조음 위치 또한 비슷했던 /a/와 /i/만이 명확한 대응을 이루고 나머지 모음들의 寫音은 매우 복잡한 양상을 보였다. 북송대의 모음 체계에는 후설 원순 모음이 /o/ 하나뿐이었므로 국어의 ‘ㅗ’와 ‘ㅜ’가 서로 비슷한 음가를 지닌 寫音字들로 표기되었으며, 국어의 ‘ㅣ’와 ‘ㅡ’, ‘ㅏ’와 ‘ㆍ’를 寫音할 때에도 각각 비슷한 음가의 寫音字들이 이용되었다. 종성의 경우에는 특히 국어의 종성 ‘ㄴ, ㅁ, ㅂ, ㆁ’이 北宋代音과 각각 ‘n:n, m:m, p:p, ŋ:ŋ’으로 충실하게 대응되었다. 이 외에 국어의 종성 ‘ㄱ’을 寫音하는 데에는 喉內 입성자가, ‘ㄷ’과 ‘ㄹ’을 寫音하는 데에는 舌內 입성자가 쓰여서 이들 입성자들의 음가가 아직 남아 있었던 듯이 보이나, 또한 이들은 마치 음성운인 듯이 쓰이기도 하였다. 喉內 입성자는 모음으로 끝나는 말을 寫音하는 데에도 쓰였고, 舌內 입성자는 종성 ‘ㅅ’이나 ‘ㅈ’을 寫音하는 데에도 쓰였으나 이 경우에는 舌內 입성자가 이러한 발음을 寫音했다고 보기보다는 음절말 종성이 아예 표기되지 않았다고 보는 것이 더 맞을 것이다. 이는 漢語에서 입성이 소멸되어 가는 과정에서 보이는 과도기적 양상으로 이해될 수 있다. 한편, ≪계림유사≫에서는 외파되는 음절말 자음을 다음 자의 頭音으로 표기하기도 했는데, ‘子’자로 외파되는 음절말의 ‘ㅅ, ㅿ, ㅈ’을, ‘戍’자로 음절말의 ‘ㅅ’을, ‘則’자로 음절말의 ‘ㅈ’을, ‘翅’자로 음절말의 ‘ㅊ’을 寫音하였다. 이로써 당시 국어의 음절말에서 ‘ㅅ, ㅿ, ㅈ, ㅊ’의 불파화가 아직 일어나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성조 대응을 통해서는, 국어의 평성은 北宋代音의 평성자로, 상성이나 거성은 北宋代音의 상성자나 거성자로 표기된 대체적인 경향성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러나 ≪계림유사≫를 통한 韓․漢 성조 대응에는 두 가지 근원적인 한계가 있어 그 대응 결과를 단정하기가 어렵다. 첫 번째는 사음자가 2개 이상의 성조를 지닌 경우가 많아서 국어를 轉寫할 때 어떤 성조를 지닌 자가 쓰였는지 확정하기 어렵다는 것이고, 두 번째는 韓․漢 성조 대응을 확인할 수 있는 대응례의 個數가 절대적으로 부족하다는 점이다. 漢語 음운사의 관점에서는 국어 음절 ‘밤, 범, 몸’의 寫音 양상을 통해 순음 성모자 운미의 /-m/>/-n/화가 12세기에 이미 존재했음을 알 수 있으며, ≪廣韻≫의 ‘歌’ 운목에 속하는 일부 자(‘駞, 箇, 那 또는 郍’)의 음가 변화(/a/>/o/) 역시 이 시기에 이루어졌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리고 12세기에 脣內 입성 운미는 본래의 음가를 유지하였으나, 喉內 입성과 舌內 입성은 소멸해 가는 과도기에 있어 성문 폐쇄음 /-ʔ/로 약화된 모습을 보였다. 본고에서는 邵雍의 ≪皇極經世聲音唱和圖≫에 의해 재구한 寫音字의 음가를 바탕으로 ≪계림유사≫의 전체 語項을 조망하는 관점에서 각 어휘 항목을 해독하고, 北宋代音과 중세국어 음운과의 대응 양상을 살펴보았으나, 해독이 아직 되지 않거나 불충분한 어항들도 상존하여 ≪계림유사≫에 대한 考究는 앞으로도 계속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본고에서는 邵雍의 ≪皇極經世聲音唱和圖≫를 이용해 北宋人 孫穆이 ≪계림유사≫에서 고려어를 寫音하기 위해 쓴 한자의 음가를 추정하고, 이를 바탕으로 ≪계림유사≫에 실린 350여 항목의 고려어 어휘를 해독하였다. 그리고 해독된 어형을 대상으로 하여 중세국어와 北宋代音의 초성, 중성, 종성, 성조 대응을 살펴보았다. 書狀官의 신분으로 고려에 왔던 北宋人 孫穆이 1103년에 편찬한 ≪계림유사≫는 당시의 고려 어휘가 北宋代 한자음으로 기록되어 있어 12세기 무렵 국어의 모습을 알려 주는 귀중한 자료이다. 孫穆은 북송의 수도인 汴京(지금의 開封)을 중심으로 한 中原人이었을 것으로 추정되므로 계림유사의 해독을 위해서는 먼저 북송 시기 개봉 지역어의 音系(음운 체계)를 재구할 필요가 있고, 이를 위해 본고에서는 邵雍(1011~1077)이 쓴 ≪皇極經世聲音唱和圖≫를 이용하였다. ≪皇極經世聲音唱和圖≫를 통해 ≪계림유사≫ 寫音字의 音價를 추정한 후, 현전하는 여러 異本 중 順治板 說郛本(淸 順治 4년, 1647)과 香港大學 소장 明鈔說郛本(嘉靖年間, 1522~1566)을 底本으로 하는 한편, 民國板 說郛本과 古今圖書集成本, 五朝小說大觀本 등을 對校하며 계림유사의 語釋을 행하였다. ≪계림유사≫는 원본이 전하지 않아서 다만 여러 전집 속의 일부로만 그 모습을 확인할 수 있고, 또한 오랜 시간에 걸쳐 내려오면서 원래의 모습이 왜곡, 변형되기도 하였는데, 본고에서는 최대한 각 이본의 표기를 존중하고 誤字나 脫字를 되도록 최소한으로 제한하는 입장에서 해독에 임하였다. 해독이 가능한 語項을 중심으로 하여 중세국어와, 중세국어를 寫音하기 위해 쓰인 북송대의 한자음을 초성, 중성, 종성, 성조 면에서 각각 대응시킨 결과는 다음과 같다. 먼저 초성의 경우에는 p:p․pʻ․f, m:m, s:s․ʃ, t:t․tʻ, c:ts․tʃ, cʻ:tsʻ, z:ʒ, r:l, n:n, k:k․kʻ, h:x, ʼ:ʼ (중세국어:北宋代音) 등의 비교적 정연한 대응을 보였다. 그리고 국어의 ‘ㅅ’과 ‘ㅈ’이 반모음 /i-/나 모음 /i/ 앞에서 口蓋化하는 경향이 있었으며, 국어의 유기음으로서는 ‘ㅊ’의 존재만 인정할 수 있었다. 중성에서는 초성과 달리 일관된 체계를 찾기가 어려웠다. 이는 중세국어와 北宋代音의 모음 체계가 서로 달랐기 때문으로, 兩國의 모음 체계에 같이 존재하여 조음 위치 또한 비슷했던 /a/와 /i/만이 명확한 대응을 이루고 나머지 모음들의 寫音은 매우 복잡한 양상을 보였다. 북송대의 모음 체계에는 후설 원순 모음이 /o/ 하나뿐이었므로 국어의 ‘ㅗ’와 ‘ㅜ’가 서로 비슷한 음가를 지닌 寫音字들로 표기되었으며, 국어의 ‘ㅣ’와 ‘ㅡ’, ‘ㅏ’와 ‘ㆍ’를 寫音할 때에도 각각 비슷한 음가의 寫音字들이 이용되었다. 종성의 경우에는 특히 국어의 종성 ‘ㄴ, ㅁ, ㅂ, ㆁ’이 北宋代音과 각각 ‘n:n, m:m, p:p, ŋ:ŋ’으로 충실하게 대응되었다. 이 외에 국어의 종성 ‘ㄱ’을 寫音하는 데에는 喉內 입성자가, ‘ㄷ’과 ‘ㄹ’을 寫音하는 데에는 舌內 입성자가 쓰여서 이들 입성자들의 음가가 아직 남아 있었던 듯이 보이나, 또한 이들은 마치 음성운인 듯이 쓰이기도 하였다. 喉內 입성자는 모음으로 끝나는 말을 寫音하는 데에도 쓰였고, 舌內 입성자는 종성 ‘ㅅ’이나 ‘ㅈ’을 寫音하는 데에도 쓰였으나 이 경우에는 舌內 입성자가 이러한 발음을 寫音했다고 보기보다는 음절말 종성이 아예 표기되지 않았다고 보는 것이 더 맞을 것이다. 이는 漢語에서 입성이 소멸되어 가는 과정에서 보이는 과도기적 양상으로 이해될 수 있다. 한편, ≪계림유사≫에서는 외파되는 음절말 자음을 다음 자의 頭音으로 표기하기도 했는데, ‘子’자로 외파되는 음절말의 ‘ㅅ, ㅿ, ㅈ’을, ‘戍’자로 음절말의 ‘ㅅ’을, ‘則’자로 음절말의 ‘ㅈ’을, ‘翅’자로 음절말의 ‘ㅊ’을 寫音하였다. 이로써 당시 국어의 음절말에서 ‘ㅅ, ㅿ, ㅈ, ㅊ’의 불파화가 아직 일어나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성조 대응을 통해서는, 국어의 평성은 北宋代音의 평성자로, 상성이나 거성은 北宋代音의 상성자나 거성자로 표기된 대체적인 경향성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러나 ≪계림유사≫를 통한 韓․漢 성조 대응에는 두 가지 근원적인 한계가 있어 그 대응 결과를 단정하기가 어렵다. 첫 번째는 사음자가 2개 이상의 성조를 지닌 경우가 많아서 국어를 轉寫할 때 어떤 성조를 지닌 자가 쓰였는지 확정하기 어렵다는 것이고, 두 번째는 韓․漢 성조 대응을 확인할 수 있는 대응례의 個數가 절대적으로 부족하다는 점이다. 漢語 음운사의 관점에서는 국어 음절 ‘밤, 범, 몸’의 寫音 양상을 통해 순음 성모자 운미의 /-m/>/-n/화가 12세기에 이미 존재했음을 알 수 있으며, ≪廣韻≫의 ‘歌’ 운목에 속하는 일부 자(‘駞, 箇, 那 또는 郍’)의 음가 변화(/a/>/o/) 역시 이 시기에 이루어졌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리고 12세기에 脣內 입성 운미는 본래의 음가를 유지하였으나, 喉內 입성과 舌內 입성은 소멸해 가는 과도기에 있어 성문 폐쇄음 /-ʔ/로 약화된 모습을 보였다. 본고에서는 邵雍의 ≪皇極經世聲音唱和圖≫에 의해 재구한 寫音字의 음가를 바탕으로 ≪계림유사≫의 전체 語項을 조망하는 관점에서 각 어휘 항목을 해독하고, 北宋代音과 중세국어 음운과의 대응 양상을 살펴보았으나, 해독이 아직 되지 않거나 불충분한 어항들도 상존하여 ≪계림유사≫에 대한 考究는 앞으로도 계속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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