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 논문은 오늘날 서구에서 포스트모더니즘의 문맥 속에 새롭게 조명되고 있는 숭고의 개념에 대해 고찰한다. 특히, ‘포스트모더니즘’이라는 용어와 함께 아름다움의 심미적 범주에 종속관계에 있었던 ‘숭고’를 새로이 유행시킨 리오타르의 숭고의 개념에 대해 집중 조명하고 있다. 이 숭고라고 하는 심미적 범주는 실로 그 용어가 고대 이래로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장구한 역사를 지니고 있지만, 정신사적으로 중요한 전환기였던 18세기 말 ...
본 논문은 오늘날 서구에서 포스트모더니즘의 문맥 속에 새롭게 조명되고 있는 숭고의 개념에 대해 고찰한다. 특히, ‘포스트모더니즘’이라는 용어와 함께 아름다움의 심미적 범주에 종속관계에 있었던 ‘숭고’를 새로이 유행시킨 리오타르의 숭고의 개념에 대해 집중 조명하고 있다. 이 숭고라고 하는 심미적 범주는 실로 그 용어가 고대 이래로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장구한 역사를 지니고 있지만, 정신사적으로 중요한 전환기였던 18세기 말 칸트에 의해 달리 조명되었다. 칸트로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된다고 간주되는 ‘모더니즘’에서 숭고는 그 자체 ‘미’와의 대립적 범주로 인식되었지만, ‘화해’라고 하는 변증법적 기획에 따라 그만 사장되고 만 것이다. 숭고에서 우선적으로 보여지는 본질적 특성은 불쾌와 쾌로 이루어진 혼합된 이중적 감정이라는 점이다. 칸트와 쉴러의 고전적 숭고에서 발견되는 불쾌의 감정은 거대한 자연대상에 대한 언어적 재현능력인 ‘상상력’의 무능력에서 연유한다. 이성은 상상력으로 하여금 표현불가능한 것을 표현하도록 요구하지만 상상력이 과잉으로 치닫는 노력에도 불구하고 실패하고 만다. 그러나 곧 이러한 감각적 재현체계의 무능력에 대한 자각은 선험적으로 구성지워진 - 칸트나 쉴러의 ‘역학적 숭고’나 ‘실천적 숭고’에서 잘 드러나는 ‘도덕적 자유의식’에 다름아닌 - ‘순수이성이념’에 의존함으로써 사유능력의 무한성에 대한 쾌감으로 대체된다. 그것은 인간학적 차원에서 인식주체로서의 우리들 자신과 객체로서의 자연대상 사이가 도덕적 정신력에 의해 하나로 결합되어 표상되어짐을 지시하고 있다. 한마디로 칸트와 쉴러는 ‘수학적 숭고(이론적 숭고)’ 보다 ‘역학적 숭고(실천적 숭고)’를 보다 강조하고 있다. 왜냐하면 칸트와 쉴러 모두 ‘역학적 숭고(실천적 숭고)’를 순수이성이념과 도덕적 원칙에 관련시킴으로써 주관의 규정가능성을 옹호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리오타르는 칸트나 쉴러에서 보여지는 이와같은 주체철학적 유산을 거부하면서 특히, 오늘날의 예술, 미학적 영역과 연계시킬 때 탈현대적 측면 들을 부각시키고 있다. 이를테면 이미 칸트의 ‘숭고의 분석’에서 보여진 바 있는 ‘무형식성’과 ‘표현불가능성’과 같은 특성들이 리오타르의 관심을 끄는 아방가르드 예술과 여기에 근본을 두는 포스트모던 예술의 모태를 이룬다는 사실이다. 여기에서의 귀결은 고전적 숭고에서 보여지는 보편적인 ‘공통감’ 내지는 이에 도달하는 최종적 준거를 이제는 기대할 수 없다는 것이다. 다만 오늘날의 포스트모더니즘 미학에서 유효할 수 있는 것은 그동안 은폐돼왔고 억압돼왔던 모순적이고 역설적이기까지 한 인식능력들의 와해를 암시적으로나마 표현시켜야 한다는 사실이다. 리오타르가 근 1세기 전의 아방가르드 예술을 옹호하고 있는 것도 숭고의 체험에서 보여지는 인식능력과 사유능력간의 불일치 혹은 부조화를 ‘아방가르드’ 예술이 ‘암시적’으로나마 표출하고 있기 때문이고 이것은 ‘예술적 작업’ 그 자체에 대한 지각 속에서 구체화되고 있다. 여기서 더불어 관찰될 수 있는 것은, 개별적 범주들을 연계짓고 종합하는 능력으로서의 의식활동인 이성능력의 폐기가 예고된다는 점이다. 이것은 환원불가능한 시간과 연계된 리오타르의 ‘사건성’의 개념과 밀접히 교차되면서 변증법적 의식활동의 무능력을 암시하고 있다. 그럼으로써 지금까지 아름다움의 미학에 의해 억압돼왔고 배척당한 영역들을 구출해내는 긍정성을 지닌다. 한편, 리오타르는 숭고의 미학에서 보여지는 무형식성과 표현불가능성 그리고 ‘비규정성’과 같은 특성들을 역사, 정치적 분야와 연계된 실천영역으로까지 확장시키면서 칸트적 의미의 모던한 사유에 가까이 다가 간다. 하지만 숭고의 한 감정인 ‘열정’을 거론하는 지점에서 칸트에서 보여지는 형이상학적 선험성을 경계하면서 ‘마치 그런듯이’의 ‘어구’를 통한 심미적 보편성을 이끌어내고 있다. 여기서 ‘공통감’, ‘공동체’, ‘진보’ 그리고 ‘도덕성’과 심지어 ‘자본주의 경제’ 등을 숭고의 대상으로 간주하면서도 그 자체 ‘사건성’으로 존재하는 ‘감정’ 속에서 사유의 비판적 활동성이라든가 혹은 진보에 대한 ‘지시적’ 기능을 남겨두고 있다. 결국, 숭고의 체험에서 드러나는 비표상적 사유는 그 자체로 우리의 개념적 시야에 포착되지 않기 때문에 시야에 놓인 표상적 인식이나 개념적 활동에 힘입은 이론이나 형이상학적 진리 모색 등이 절대적인 것이 아닌 어떤 임의적인 비결정상태로 드러나게 된다. 따라서 숭고는 주어진 것 자체에 있는 일종의 균열이요, 하나의 틈인 것이다.
본 논문은 오늘날 서구에서 포스트모더니즘의 문맥 속에 새롭게 조명되고 있는 숭고의 개념에 대해 고찰한다. 특히, ‘포스트모더니즘’이라는 용어와 함께 아름다움의 심미적 범주에 종속관계에 있었던 ‘숭고’를 새로이 유행시킨 리오타르의 숭고의 개념에 대해 집중 조명하고 있다. 이 숭고라고 하는 심미적 범주는 실로 그 용어가 고대 이래로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장구한 역사를 지니고 있지만, 정신사적으로 중요한 전환기였던 18세기 말 칸트에 의해 달리 조명되었다. 칸트로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된다고 간주되는 ‘모더니즘’에서 숭고는 그 자체 ‘미’와의 대립적 범주로 인식되었지만, ‘화해’라고 하는 변증법적 기획에 따라 그만 사장되고 만 것이다. 숭고에서 우선적으로 보여지는 본질적 특성은 불쾌와 쾌로 이루어진 혼합된 이중적 감정이라는 점이다. 칸트와 쉴러의 고전적 숭고에서 발견되는 불쾌의 감정은 거대한 자연대상에 대한 언어적 재현능력인 ‘상상력’의 무능력에서 연유한다. 이성은 상상력으로 하여금 표현불가능한 것을 표현하도록 요구하지만 상상력이 과잉으로 치닫는 노력에도 불구하고 실패하고 만다. 그러나 곧 이러한 감각적 재현체계의 무능력에 대한 자각은 선험적으로 구성지워진 - 칸트나 쉴러의 ‘역학적 숭고’나 ‘실천적 숭고’에서 잘 드러나는 ‘도덕적 자유의식’에 다름아닌 - ‘순수이성이념’에 의존함으로써 사유능력의 무한성에 대한 쾌감으로 대체된다. 그것은 인간학적 차원에서 인식주체로서의 우리들 자신과 객체로서의 자연대상 사이가 도덕적 정신력에 의해 하나로 결합되어 표상되어짐을 지시하고 있다. 한마디로 칸트와 쉴러는 ‘수학적 숭고(이론적 숭고)’ 보다 ‘역학적 숭고(실천적 숭고)’를 보다 강조하고 있다. 왜냐하면 칸트와 쉴러 모두 ‘역학적 숭고(실천적 숭고)’를 순수이성이념과 도덕적 원칙에 관련시킴으로써 주관의 규정가능성을 옹호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리오타르는 칸트나 쉴러에서 보여지는 이와같은 주체철학적 유산을 거부하면서 특히, 오늘날의 예술, 미학적 영역과 연계시킬 때 탈현대적 측면 들을 부각시키고 있다. 이를테면 이미 칸트의 ‘숭고의 분석’에서 보여진 바 있는 ‘무형식성’과 ‘표현불가능성’과 같은 특성들이 리오타르의 관심을 끄는 아방가르드 예술과 여기에 근본을 두는 포스트모던 예술의 모태를 이룬다는 사실이다. 여기에서의 귀결은 고전적 숭고에서 보여지는 보편적인 ‘공통감’ 내지는 이에 도달하는 최종적 준거를 이제는 기대할 수 없다는 것이다. 다만 오늘날의 포스트모더니즘 미학에서 유효할 수 있는 것은 그동안 은폐돼왔고 억압돼왔던 모순적이고 역설적이기까지 한 인식능력들의 와해를 암시적으로나마 표현시켜야 한다는 사실이다. 리오타르가 근 1세기 전의 아방가르드 예술을 옹호하고 있는 것도 숭고의 체험에서 보여지는 인식능력과 사유능력간의 불일치 혹은 부조화를 ‘아방가르드’ 예술이 ‘암시적’으로나마 표출하고 있기 때문이고 이것은 ‘예술적 작업’ 그 자체에 대한 지각 속에서 구체화되고 있다. 여기서 더불어 관찰될 수 있는 것은, 개별적 범주들을 연계짓고 종합하는 능력으로서의 의식활동인 이성능력의 폐기가 예고된다는 점이다. 이것은 환원불가능한 시간과 연계된 리오타르의 ‘사건성’의 개념과 밀접히 교차되면서 변증법적 의식활동의 무능력을 암시하고 있다. 그럼으로써 지금까지 아름다움의 미학에 의해 억압돼왔고 배척당한 영역들을 구출해내는 긍정성을 지닌다. 한편, 리오타르는 숭고의 미학에서 보여지는 무형식성과 표현불가능성 그리고 ‘비규정성’과 같은 특성들을 역사, 정치적 분야와 연계된 실천영역으로까지 확장시키면서 칸트적 의미의 모던한 사유에 가까이 다가 간다. 하지만 숭고의 한 감정인 ‘열정’을 거론하는 지점에서 칸트에서 보여지는 형이상학적 선험성을 경계하면서 ‘마치 그런듯이’의 ‘어구’를 통한 심미적 보편성을 이끌어내고 있다. 여기서 ‘공통감’, ‘공동체’, ‘진보’ 그리고 ‘도덕성’과 심지어 ‘자본주의 경제’ 등을 숭고의 대상으로 간주하면서도 그 자체 ‘사건성’으로 존재하는 ‘감정’ 속에서 사유의 비판적 활동성이라든가 혹은 진보에 대한 ‘지시적’ 기능을 남겨두고 있다. 결국, 숭고의 체험에서 드러나는 비표상적 사유는 그 자체로 우리의 개념적 시야에 포착되지 않기 때문에 시야에 놓인 표상적 인식이나 개념적 활동에 힘입은 이론이나 형이상학적 진리 모색 등이 절대적인 것이 아닌 어떤 임의적인 비결정상태로 드러나게 된다. 따라서 숭고는 주어진 것 자체에 있는 일종의 균열이요, 하나의 틈인 것이다.
In meiner Arbeit beschäftige ich mich mit dem Begriff des Erhabenen bei Kant, Schiller und Lyotard. Dabei lege ich den Schwerpunkt auf den Begriff bei Lyotard, der im Kontext der 'Postmodene'-Diskussion von heute neu gedeutet wird. Neben der 'Postmoderne' hat Lyotard auch das 'Erhabene', das bisher ...
In meiner Arbeit beschäftige ich mich mit dem Begriff des Erhabenen bei Kant, Schiller und Lyotard. Dabei lege ich den Schwerpunkt auf den Begriff bei Lyotard, der im Kontext der 'Postmodene'-Diskussion von heute neu gedeutet wird. Neben der 'Postmoderne' hat Lyotard auch das 'Erhabene', das bisher der ästhetischen Kategorie des Schönen untergeordnet war, erneut aktualisiert.
Schon in der Antike hat man sich mit dem Begriff des 'Erhabenen' auseinandergesetzt. Die Diskussion über dessen Begriff wurde im späten 18. Jahrhundert von Kant neu belebt. Im späten 18. Jahrhundert wird das Erhabene als die Kategorie erkannt, die im Gegensatz zum Schönen steht. Nach Kant stand der Begriff aber seit dem Auftritt der 'Versöhnung', des dialektischen Projekts, nicht mehr im Mittelpunkt.
Die wesentliche Eigenschaft des Erhabenen ist ein aus Unlust und Lust gemischtes, ambivalentes Gefühl. Die Unlust, im Sinne vom klassischen Erhabenen bei Kant und Schiller, rührt vom Unvermögen her, Gegenstände sprachlich adäquat darzustellen. Die Vernunft verlangt nach der Einbildungskraft, das Undarstellbare darzustellen. Dies geht aber nicht in Erfüllung, obwohl die Einbildungskraft übermäβig in Kraft tritt. Die Wahrnehmung des Unvermögens über dieses sinnliche Darstellungssystem verwandelt sich sogleich zur Lust über die Unendlichkeit des Vernunftvermögens, und zwar dadurch, daβ sich das Unvermögen von der apriorisch organisierten, reinen Vernunftidee abhängig macht. Das heiβt, daβ die moralische Geisteskraft die Menschen als das Erkenntnis-Subjekt und den Naturgegenstand als Erkenntnis-Objekt in Eins fällt. Bei Kant und Schiller spielt das 'Dynamisch-Erhabene' eine bedeutendere Rolle als 'das Mathematisch-Erhabene'(Schiller spricht hier vom 'Theoretisch-Erhabenen' und 'Praktisxch-Erhabenen'), da diese beiden auf die Bestimmungsmöglichkeit des Subjekts bestehen, indem sie das Dynamisch-Erhabene mit der reinen Vernunftsidee und dem moralischen Prinzip in Zusammenhang bringen.
Lyotard aber äußert sich gegen den Begriff des subjektphilosophischen Erhabenen bei Kant und Schiller. Gleichzeitig übernimmt er einzelne Begriffe von ihnen wie 'Formlosigkeit' und 'Nicht-Darstellbarkeit', weil sie den Ausgangspunkt für die Avantgarde, an der Lyotard interessierte ist, und die Postmoderne bildet. Daraus kann man erschlieβen, daβ wir jetzt keinen Gemeinsinn über das Erhabene im klassischen Sinn als letzte Instanz erwarten können. Die postmoderne Ästhetik kann nur darin gültig sein, daβ sie den Verfall des paradoxen, widersprüchlichen Erkenntnisvermögens des Menschen, auch wenn andeutungsweise, zur Darstellung bringt. Lyotard verteidigt also die avantgardistische Kunst der Jahrhundertwende, der frühen Moderne, weil der Zwiespalt oder die Disharmonie zwischen Erkenntnisvermögen und Denkvermögen darin eindeutig dargestellt ist, und dies sich in der künstlerischen Arbeit an sich vergegenwärtigt. Was dabei herausgestellt wird, daβ das Versagen des Vernunftvermögens, also die einzelnen Kategorien in Beziehung zu setzen und zusammenzufügen, schon impliziert ist. Lyotard spricht daher von der 'Begebenheit' und weist damit auf das Unvermögen der Bewuβtseinstätigkeit hin. Dadurch tritt die positive Seite in den Vordergrund, das die Bereiche, die bisher von der Ästhetik des Schönen unterdrückt und verworfen sind, gerettet werden.
Lyotard nähert sich dem kantschen Gedanken, indem er die Eigenschaften der Ästhetik, wie Formlosigkeit, Nicht-Darstellbarkeit und 'Unbestimmtheit', zu praktischen Bereichen erweitert, die z.B. mit der Geschichte und der Politik zusammenhängen. In dem Moment, in dem er von dem 'Enthusiasmus' spricht, warnt er vor dem 'a priori' von Kant und führt die ästhetische Universalität durch die 'Analogie' herbei, die von 'als ob' eingeleitet wird. Für ihn gehören zwar der Gemeinsinn, die Gesellschaft, der Fortschritt, die Sittlichkeit und sogar der Kapitalismus zum Erhabenen. Er erkennt aber auch die kritische Tätigkeit des Gedankens oder die Möglichkeit zum Fortschritt in dem Gefühl, welches in der Begebenheit besteht.
Der unvorstellbare Gedanke aus dem Erlebnis mit dem Erhabenen kann letztlich nicht begriffen werden. Daher stellt sich die Theorie oder die Suche nach der metaphysischen Wahrheit kraft der vorstellbaren Erkenntnis oder begrifflichen Tätigkeit als willkürlich und unbestimmt heraus, eben nicht als etwas Absolutes. Das Erhabene ist also eine 'Lücke' in dem Gegebenen.
In meiner Arbeit beschäftige ich mich mit dem Begriff des Erhabenen bei Kant, Schiller und Lyotard. Dabei lege ich den Schwerpunkt auf den Begriff bei Lyotard, der im Kontext der 'Postmodene'-Diskussion von heute neu gedeutet wird. Neben der 'Postmoderne' hat Lyotard auch das 'Erhabene', das bisher der ästhetischen Kategorie des Schönen untergeordnet war, erneut aktualisiert.
Schon in der Antike hat man sich mit dem Begriff des 'Erhabenen' auseinandergesetzt. Die Diskussion über dessen Begriff wurde im späten 18. Jahrhundert von Kant neu belebt. Im späten 18. Jahrhundert wird das Erhabene als die Kategorie erkannt, die im Gegensatz zum Schönen steht. Nach Kant stand der Begriff aber seit dem Auftritt der 'Versöhnung', des dialektischen Projekts, nicht mehr im Mittelpunkt.
Die wesentliche Eigenschaft des Erhabenen ist ein aus Unlust und Lust gemischtes, ambivalentes Gefühl. Die Unlust, im Sinne vom klassischen Erhabenen bei Kant und Schiller, rührt vom Unvermögen her, Gegenstände sprachlich adäquat darzustellen. Die Vernunft verlangt nach der Einbildungskraft, das Undarstellbare darzustellen. Dies geht aber nicht in Erfüllung, obwohl die Einbildungskraft übermäβig in Kraft tritt. Die Wahrnehmung des Unvermögens über dieses sinnliche Darstellungssystem verwandelt sich sogleich zur Lust über die Unendlichkeit des Vernunftvermögens, und zwar dadurch, daβ sich das Unvermögen von der apriorisch organisierten, reinen Vernunftidee abhängig macht. Das heiβt, daβ die moralische Geisteskraft die Menschen als das Erkenntnis-Subjekt und den Naturgegenstand als Erkenntnis-Objekt in Eins fällt. Bei Kant und Schiller spielt das 'Dynamisch-Erhabene' eine bedeutendere Rolle als 'das Mathematisch-Erhabene'(Schiller spricht hier vom 'Theoretisch-Erhabenen' und 'Praktisxch-Erhabenen'), da diese beiden auf die Bestimmungsmöglichkeit des Subjekts bestehen, indem sie das Dynamisch-Erhabene mit der reinen Vernunftsidee und dem moralischen Prinzip in Zusammenhang bringen.
Lyotard aber äußert sich gegen den Begriff des subjektphilosophischen Erhabenen bei Kant und Schiller. Gleichzeitig übernimmt er einzelne Begriffe von ihnen wie 'Formlosigkeit' und 'Nicht-Darstellbarkeit', weil sie den Ausgangspunkt für die Avantgarde, an der Lyotard interessierte ist, und die Postmoderne bildet. Daraus kann man erschlieβen, daβ wir jetzt keinen Gemeinsinn über das Erhabene im klassischen Sinn als letzte Instanz erwarten können. Die postmoderne Ästhetik kann nur darin gültig sein, daβ sie den Verfall des paradoxen, widersprüchlichen Erkenntnisvermögens des Menschen, auch wenn andeutungsweise, zur Darstellung bringt. Lyotard verteidigt also die avantgardistische Kunst der Jahrhundertwende, der frühen Moderne, weil der Zwiespalt oder die Disharmonie zwischen Erkenntnisvermögen und Denkvermögen darin eindeutig dargestellt ist, und dies sich in der künstlerischen Arbeit an sich vergegenwärtigt. Was dabei herausgestellt wird, daβ das Versagen des Vernunftvermögens, also die einzelnen Kategorien in Beziehung zu setzen und zusammenzufügen, schon impliziert ist. Lyotard spricht daher von der 'Begebenheit' und weist damit auf das Unvermögen der Bewuβtseinstätigkeit hin. Dadurch tritt die positive Seite in den Vordergrund, das die Bereiche, die bisher von der Ästhetik des Schönen unterdrückt und verworfen sind, gerettet werden.
Lyotard nähert sich dem kantschen Gedanken, indem er die Eigenschaften der Ästhetik, wie Formlosigkeit, Nicht-Darstellbarkeit und 'Unbestimmtheit', zu praktischen Bereichen erweitert, die z.B. mit der Geschichte und der Politik zusammenhängen. In dem Moment, in dem er von dem 'Enthusiasmus' spricht, warnt er vor dem 'a priori' von Kant und führt die ästhetische Universalität durch die 'Analogie' herbei, die von 'als ob' eingeleitet wird. Für ihn gehören zwar der Gemeinsinn, die Gesellschaft, der Fortschritt, die Sittlichkeit und sogar der Kapitalismus zum Erhabenen. Er erkennt aber auch die kritische Tätigkeit des Gedankens oder die Möglichkeit zum Fortschritt in dem Gefühl, welches in der Begebenheit besteht.
Der unvorstellbare Gedanke aus dem Erlebnis mit dem Erhabenen kann letztlich nicht begriffen werden. Daher stellt sich die Theorie oder die Suche nach der metaphysischen Wahrheit kraft der vorstellbaren Erkenntnis oder begrifflichen Tätigkeit als willkürlich und unbestimmt heraus, eben nicht als etwas Absolutes. Das Erhabene ist also eine 'Lücke' in dem Gegeben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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