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고는 병자호란 때 척화의 선두에 섰던 청음 김상헌(1570∼1652)에 대한 연구로서 그의 역사의식과 경세사상을 중심으로 고찰한 것이다. 청음이 생존하였던 시기 동아시아의 국제 정세는 패권국이었던 명나라가 16세기 중반 이후 退潮을 보이고, 일본이 신흥 강국으로 부상하면서 급기야 임진왜란이 일어난다. 임진왜란은 중국 중심의 동아시아 정세에서 일본을 강대국으로 등장시키며, 일본과 중국 역사에 있어서는 새로운 정권(국가)이 교체되는 계기가 되었고, 조선은 전쟁의 참혹한 피해를 입고 정치․경제․사회 등 모든 방면에서 질서가 흔들이며 일대 전환기를 맞이한다. 당시 조선 사회의 情況은 壬亂을 시작으로 하여 丁卯 · 丙子胡亂 등의 국제적 戰亂을 차례로 겪고, 인조반정․이괄의 난 등 내적 變亂이 연이어 勃發함으로써 총체적 難局의 소용돌이 속에 휩쓸리게 된다. 청음은 당시 國亂을 정치 일선에서 目睹하며, 그때마다 적극적으로 현실에 뛰어들어 학자로서의 자신의 신념을 加減없이 드러낸다. 특히 明․淸의 패권 다툼에서 비롯된 병자호란에서는 主和派에 맞서 降書를 찢고 자결까지 시도하며 자신의 뜻을 관철시키고자 하였는데, 이러한 斥和行의 바탕이 되는 의식 動因은 대의명분에 입각한 道學的 歷史意識이었다. 전쟁이 끝나자 남한산성에서의 그의 행보에 대한 讚辭와 비난은 엇갈린다. 그리고 현실론적인 주화론을 펼쳤던 遲川 崔鳴吉과 함께 조정 안팎으로부터 끊이지 않는 綱․權의 논란에 휩싸이게 되며, 결국 자신은 청나라 심양으로 압송되는 지경에 처하게 된다. 그러나 청음은 청나라에서도 꿋꿋한 기개로 민족적 자존감을 지키며 節義을 보임으로써, 일부 조정 각료들의 비난을 어느 정도 가라앉히는 계기를 만들고, 나아가 역사에서는 忠節의 表象으로 기림을 받게 된다. 실천유학으로서 義理와 節義를 중시하는 ...
본고는 병자호란 때 척화의 선두에 섰던 청음 김상헌(1570∼1652)에 대한 연구로서 그의 역사의식과 경세사상을 중심으로 고찰한 것이다. 청음이 생존하였던 시기 동아시아의 국제 정세는 패권국이었던 명나라가 16세기 중반 이후 退潮을 보이고, 일본이 신흥 강국으로 부상하면서 급기야 임진왜란이 일어난다. 임진왜란은 중국 중심의 동아시아 정세에서 일본을 강대국으로 등장시키며, 일본과 중국 역사에 있어서는 새로운 정권(국가)이 교체되는 계기가 되었고, 조선은 전쟁의 참혹한 피해를 입고 정치․경제․사회 등 모든 방면에서 질서가 흔들이며 일대 전환기를 맞이한다. 당시 조선 사회의 情況은 壬亂을 시작으로 하여 丁卯 · 丙子胡亂 등의 국제적 戰亂을 차례로 겪고, 인조반정․이괄의 난 등 내적 變亂이 연이어 勃發함으로써 총체적 難局의 소용돌이 속에 휩쓸리게 된다. 청음은 당시 國亂을 정치 일선에서 目睹하며, 그때마다 적극적으로 현실에 뛰어들어 학자로서의 자신의 신념을 加減없이 드러낸다. 특히 明․淸의 패권 다툼에서 비롯된 병자호란에서는 主和派에 맞서 降書를 찢고 자결까지 시도하며 자신의 뜻을 관철시키고자 하였는데, 이러한 斥和行의 바탕이 되는 의식 動因은 대의명분에 입각한 道學的 歷史意識이었다. 전쟁이 끝나자 남한산성에서의 그의 행보에 대한 讚辭와 비난은 엇갈린다. 그리고 현실론적인 주화론을 펼쳤던 遲川 崔鳴吉과 함께 조정 안팎으로부터 끊이지 않는 綱․權의 논란에 휩싸이게 되며, 결국 자신은 청나라 심양으로 압송되는 지경에 처하게 된다. 그러나 청음은 청나라에서도 꿋꿋한 기개로 민족적 자존감을 지키며 節義을 보임으로써, 일부 조정 각료들의 비난을 어느 정도 가라앉히는 계기를 만들고, 나아가 역사에서는 忠節의 表象으로 기림을 받게 된다. 실천유학으로서 義理와 節義를 중시하는 도학은 修己治人을 목표로 하여 현실에서 이상세계를 구현하는 데에서 그 의미를 갖는 것이므로, 儒者들은 나름대로의 歷史意識과 經世思想을 갖게 된다. 또한 경세는 역사의식을 바탕으로 이루어지는 것이므로 두 부문은 별개의 것이 아니며, 體用의 관계로도 볼 수 있다. 그러므로 역사의식과 경세사상을 연관시켜 相補的인 관계를 규명하려는 本 연구는 儒者들의 의식세계를 총체적으로 파악하는데 있어 명확한 통로가 될 수 있을 것이라 思料된다. 사실 學政一致의 조선 정치체계에서는 儒者들에게 ‘學의 실천’이라는 점의 입장에서 볼 때, 시대정신의 發露는 당연한 것이기도 하다. 청음 역시 학자이자 관료로서 시대의식을 지닌 채 救世의 적극적 의지를 표출하고 있음이 곳곳에서 면면히 드러나고 있음을 파악할 수 있었다. 본고의 연구방법은 주로 시문학과 상소문을 論據로 제시하며 고찰한 것이다. 먼저 역사의식을 살펴보는 과정에서 시문학에 드러난 의식세계를 주제별로 다섯 가지로 大分하여 살펴보았다. 첫째 인물을 형상화한 시를 통하여 節義意識을 고찰하고, 둘째 華夷사상으로 言明되는 先進文明의 지향점을 고찰하였으며, 셋째 청음의 강상의식과 지천 최명길의 권도의식을 비교하여 두 사람의 역사의식이 갖는 정체성과 효능을 각각 조명하였다. 넷째 야만족이라 卑下했던 여진족에게 겪었던 굴욕을 잊지 않고 끝내 복수하여 雪辱하려는 민족적 자주의식에 대해서도 살펴본다. 끝으로 도학의 핵심 사상이자 청음의 사상 체계에 큰 영역을 차지하고 있는 公道意識에 대해 고찰하였다. 한편 경세사상은 그가 인조에게 陳啓하였던 ‘疏箚文’을 통하여 정치, 사회경제, 국방의 세 가지 주제로 나누어 살펴보았다. 첫째 정치사상은 內聖外王의 政治觀․公明正大한 人才選拔과 登用․災變論이라는 題下로 규명하였다. 청음은 정치에 있어서 군주의 자질을 善政의 선제 조건으로 여기고 聖學으로 언명되는 군주의 수신을 끊임없이 거론하고 있다. 군주는 부지런히 마음을 닦아 正心을 회복하여야 백성을 德化할 수 있다고 여기고 있다. 또한 청음은 정치 성패 요건 중의 하나인 인재선발에 관한 중요성을 역설하고 등용의 방법과 그를 禮遇하는 道에 대해 거론한다. 1절의 끝으로 天變을 활용하여 군주를 譴責하고자 했던 ‘災變論’에 대해서도 살펴보았다. 사회사상은 ‘國家紀綱論’이라 할 수 있을 만큼 국가의 기강확립에 대한 주장이 지속되고 있는데, 반정 직후 廢朝의 昏政으로 인한 혼란상을 조속히 시정하고 정의를 바로 세워 민심을 수습하기를 바라는 염원이 드러난 것이다. 경제사상은 인조에게 당시 收稅과정에서 자행되는 관리들의 부정부패와 비리 사실을 激한 어조로 顯示하며, 제도적인 개혁의 단행을 요구하는 施策에서 살펴보았다. 당시 국가의 재정 실태를 陳情하며 대안으로 貢案 정리, 屯田 개간 등 재정의 효율적 관리에 대한 소박하고도 구체적인 改革案을 제시한다. 국가의 경제 안정을 목표로 하는 그의 상소에는 백성들이 힘을 펴고 살 수 있게 되기를 바라는 愛民정신이 밑받침되어 있음을 알 수 있었다. 한편 일생동안 여러 번의 국난을 겪으며 자주국방에 대한 강한 의지를 堅持하는데, 자주국방론은 그의 경세관의 큰 축을 형성한다. 關西지방의 北方族 수비책과 兩南지방 倭軍 방비책을 진언한 소차를 통해 그의 關防 수비의 강한 의지를 살펴볼 수 있었으며, 養兵․選將을 아우르는 계책에 이르러서는 현안을 잘 파악하고 있는 정치가로서의 깊은 식견을 感知할 수 있었다. 도학정신은 한국사상사에 있어 국가를 扶支하는 원동력으로 작용하였다는 평가를 받기도 하지만, 일각에서는 조선후기 위정척사파에게 수용될 때 폐쇄적 사상으로 근대화에 걸림돌로 작용하였다는 지적도 있는 것이 현실이다. 그러나 ‘志士들의 현실대응 방식’을 구한말의 일제 침략기를 예로 들어 보면, 순절과 의거 또는 은거하여 日帝에 비협조 하는 등 여러 가지 형태로 나타났듯이 개인의 따라 자신의 신념을 표출하는 행동양식은 사람마다 다르게 나타나는 것을 인정해야 할 것이다. 커다란 흐름의 역사 속에서 다양한 방식으로 나타나는 개개인의 다양한 의식세계는 옳고 그름이라는 명제는 때론 무의미할 때가 있다. 도학의 修己治人이라는 명제에 있어서 현실인식과 적용의 문제는 一言으로 시비를 가리기는 어려운 점이 있는 것이다. 이 부분은 지혜로운 선택을 위한 깊은 성찰이 요구되는 개개인의 영역이라 여겨진다.
본고는 병자호란 때 척화의 선두에 섰던 청음 김상헌(1570∼1652)에 대한 연구로서 그의 역사의식과 경세사상을 중심으로 고찰한 것이다. 청음이 생존하였던 시기 동아시아의 국제 정세는 패권국이었던 명나라가 16세기 중반 이후 退潮을 보이고, 일본이 신흥 강국으로 부상하면서 급기야 임진왜란이 일어난다. 임진왜란은 중국 중심의 동아시아 정세에서 일본을 강대국으로 등장시키며, 일본과 중국 역사에 있어서는 새로운 정권(국가)이 교체되는 계기가 되었고, 조선은 전쟁의 참혹한 피해를 입고 정치․경제․사회 등 모든 방면에서 질서가 흔들이며 일대 전환기를 맞이한다. 당시 조선 사회의 情況은 壬亂을 시작으로 하여 丁卯 · 丙子胡亂 등의 국제적 戰亂을 차례로 겪고, 인조반정․이괄의 난 등 내적 變亂이 연이어 勃發함으로써 총체적 難局의 소용돌이 속에 휩쓸리게 된다. 청음은 당시 國亂을 정치 일선에서 目睹하며, 그때마다 적극적으로 현실에 뛰어들어 학자로서의 자신의 신념을 加減없이 드러낸다. 특히 明․淸의 패권 다툼에서 비롯된 병자호란에서는 主和派에 맞서 降書를 찢고 자결까지 시도하며 자신의 뜻을 관철시키고자 하였는데, 이러한 斥和行의 바탕이 되는 의식 動因은 대의명분에 입각한 道學的 歷史意識이었다. 전쟁이 끝나자 남한산성에서의 그의 행보에 대한 讚辭와 비난은 엇갈린다. 그리고 현실론적인 주화론을 펼쳤던 遲川 崔鳴吉과 함께 조정 안팎으로부터 끊이지 않는 綱․權의 논란에 휩싸이게 되며, 결국 자신은 청나라 심양으로 압송되는 지경에 처하게 된다. 그러나 청음은 청나라에서도 꿋꿋한 기개로 민족적 자존감을 지키며 節義을 보임으로써, 일부 조정 각료들의 비난을 어느 정도 가라앉히는 계기를 만들고, 나아가 역사에서는 忠節의 表象으로 기림을 받게 된다. 실천유학으로서 義理와 節義를 중시하는 도학은 修己治人을 목표로 하여 현실에서 이상세계를 구현하는 데에서 그 의미를 갖는 것이므로, 儒者들은 나름대로의 歷史意識과 經世思想을 갖게 된다. 또한 경세는 역사의식을 바탕으로 이루어지는 것이므로 두 부문은 별개의 것이 아니며, 體用의 관계로도 볼 수 있다. 그러므로 역사의식과 경세사상을 연관시켜 相補的인 관계를 규명하려는 本 연구는 儒者들의 의식세계를 총체적으로 파악하는데 있어 명확한 통로가 될 수 있을 것이라 思料된다. 사실 學政一致의 조선 정치체계에서는 儒者들에게 ‘學의 실천’이라는 점의 입장에서 볼 때, 시대정신의 發露는 당연한 것이기도 하다. 청음 역시 학자이자 관료로서 시대의식을 지닌 채 救世의 적극적 의지를 표출하고 있음이 곳곳에서 면면히 드러나고 있음을 파악할 수 있었다. 본고의 연구방법은 주로 시문학과 상소문을 論據로 제시하며 고찰한 것이다. 먼저 역사의식을 살펴보는 과정에서 시문학에 드러난 의식세계를 주제별로 다섯 가지로 大分하여 살펴보았다. 첫째 인물을 형상화한 시를 통하여 節義意識을 고찰하고, 둘째 華夷사상으로 言明되는 先進文明의 지향점을 고찰하였으며, 셋째 청음의 강상의식과 지천 최명길의 권도의식을 비교하여 두 사람의 역사의식이 갖는 정체성과 효능을 각각 조명하였다. 넷째 야만족이라 卑下했던 여진족에게 겪었던 굴욕을 잊지 않고 끝내 복수하여 雪辱하려는 민족적 자주의식에 대해서도 살펴본다. 끝으로 도학의 핵심 사상이자 청음의 사상 체계에 큰 영역을 차지하고 있는 公道意識에 대해 고찰하였다. 한편 경세사상은 그가 인조에게 陳啓하였던 ‘疏箚文’을 통하여 정치, 사회경제, 국방의 세 가지 주제로 나누어 살펴보았다. 첫째 정치사상은 內聖外王의 政治觀․公明正大한 人才選拔과 登用․災變論이라는 題下로 규명하였다. 청음은 정치에 있어서 군주의 자질을 善政의 선제 조건으로 여기고 聖學으로 언명되는 군주의 수신을 끊임없이 거론하고 있다. 군주는 부지런히 마음을 닦아 正心을 회복하여야 백성을 德化할 수 있다고 여기고 있다. 또한 청음은 정치 성패 요건 중의 하나인 인재선발에 관한 중요성을 역설하고 등용의 방법과 그를 禮遇하는 道에 대해 거론한다. 1절의 끝으로 天變을 활용하여 군주를 譴責하고자 했던 ‘災變論’에 대해서도 살펴보았다. 사회사상은 ‘國家紀綱論’이라 할 수 있을 만큼 국가의 기강확립에 대한 주장이 지속되고 있는데, 반정 직후 廢朝의 昏政으로 인한 혼란상을 조속히 시정하고 정의를 바로 세워 민심을 수습하기를 바라는 염원이 드러난 것이다. 경제사상은 인조에게 당시 收稅과정에서 자행되는 관리들의 부정부패와 비리 사실을 激한 어조로 顯示하며, 제도적인 개혁의 단행을 요구하는 施策에서 살펴보았다. 당시 국가의 재정 실태를 陳情하며 대안으로 貢案 정리, 屯田 개간 등 재정의 효율적 관리에 대한 소박하고도 구체적인 改革案을 제시한다. 국가의 경제 안정을 목표로 하는 그의 상소에는 백성들이 힘을 펴고 살 수 있게 되기를 바라는 愛民정신이 밑받침되어 있음을 알 수 있었다. 한편 일생동안 여러 번의 국난을 겪으며 자주국방에 대한 강한 의지를 堅持하는데, 자주국방론은 그의 경세관의 큰 축을 형성한다. 關西지방의 北方族 수비책과 兩南지방 倭軍 방비책을 진언한 소차를 통해 그의 關防 수비의 강한 의지를 살펴볼 수 있었으며, 養兵․選將을 아우르는 계책에 이르러서는 현안을 잘 파악하고 있는 정치가로서의 깊은 식견을 感知할 수 있었다. 도학정신은 한국사상사에 있어 국가를 扶支하는 원동력으로 작용하였다는 평가를 받기도 하지만, 일각에서는 조선후기 위정척사파에게 수용될 때 폐쇄적 사상으로 근대화에 걸림돌로 작용하였다는 지적도 있는 것이 현실이다. 그러나 ‘志士들의 현실대응 방식’을 구한말의 일제 침략기를 예로 들어 보면, 순절과 의거 또는 은거하여 日帝에 비협조 하는 등 여러 가지 형태로 나타났듯이 개인의 따라 자신의 신념을 표출하는 행동양식은 사람마다 다르게 나타나는 것을 인정해야 할 것이다. 커다란 흐름의 역사 속에서 다양한 방식으로 나타나는 개개인의 다양한 의식세계는 옳고 그름이라는 명제는 때론 무의미할 때가 있다. 도학의 修己治人이라는 명제에 있어서 현실인식과 적용의 문제는 一言으로 시비를 가리기는 어려운 점이 있는 것이다. 이 부분은 지혜로운 선택을 위한 깊은 성찰이 요구되는 개개인의 영역이라 여겨진다.
This study is about Cheongeum Kim Sang‐heon (1570∼1652) who led opposition to negotiation with Qing in Qing’s invasion in 1637, focusing on the review of his historical consciousness and thought of governing. During Cheongeum’s lifetime, the Ming Dynasty, which had been the hegemonic state in the Ea...
This study is about Cheongeum Kim Sang‐heon (1570∼1652) who led opposition to negotiation with Qing in Qing’s invasion in 1637, focusing on the review of his historical consciousness and thought of governing. During Cheongeum’s lifetime, the Ming Dynasty, which had been the hegemonic state in the East Asia, was declining since the mid 16th century, and Japan was rising as a new power and invaded the Korean Peninsula in 1592. The Japanese invasion to Korea became a turning point for shifting from Sino‐centric status of East Asia, the emergence of Japan as a power, and the transfer to a new regime (state) in the history of Japan and China. In this situation, Joseon suffered miserable damages through the wars, and was faced with radical changes resulting from shaken order in all the areas of the country including politics, economy, and society. The situation of the Joseon society in those days is characterized by international wars such as Japanese invasion in 1592 and Qing’s invasions in 1627 and 1637 and internal disturbances such as the Restoration of King Injo and Lee Gwal’s revolt, and the country fell into an overall grave situation. Witnessing such national woes on the front line of politics, Cheongeum was involved in the situations actively and expressed his beliefs as a scholar plainly. Particularly in the Qing’s invasion in 1637, which was a consequence of the hegemonic war between Ming and Qing, he, standing against the group urging appeasement with Qing, tried to carry out his intention by tearing down the capitulatory letter and attempting suicide, and what drove him to reject negotiation with Qing was his Taoist historical consciousness based on good cause. After the war, his action in the Namhan Mt. Fortress was faced with both praises and rebukes. In addition, he, along with Jicheon Choi Myeong‐gil who argued for more practical position to urge appeasement, was entangled with the unceasing dispute of whether to be tough or moderate to Qing, and finally, was taken to Shenyang in Qing. In Qing, however, Cheongeum kept national pride and showed integrity with a determined spirit and this provided a turning point for calming down some Joseon Cabinet members’ criticism to some degree, and going further, he became a symbol of loyalty and integrity. Taoism, which is practical Confucianism emphasizing fidelity and integrity, finds its meaning in pursuing self‐cultivation and ordering of society and realizing the ideal world in the reality, and therefore, Confucians cherish their own historical consciousness and thought of governing for these goals. Because governing is based on historical consciousness, what is more, the two are not separated but in the relationship of substance and function. Therefore, this study, aiming to explain the supplementary relationship between historical consciousness and thought of governing, is believed to be an opportunity to clarify Confucians’ world of consciousness comprehensively. In the political system of the Joseon Dynasty, which pursued agreement between learning and politics, it was a matter of course to the Confucian scholars that historical spirits should be implemented in actual politics. As a scholar and bureaucrat, Cheongeum also embraced such historical spirits and expressed his active will toward the salvation of the world in various ways. This study presented the ground of argument mainly based on his poetic literature and written appeals. In the process of examining his historical consciousness, first of all, the world of consciousness observed in his poetic literature was explored largely in five aspects obtained from the themes of his poems. First, his consciousness of integrity was examined through poems configuring people. Second, the aiming point of advanced civilization represented by Sino‐centrism was studied. Third, Cheongeum’s consciousness of ethics and Jicheon Choi Myeong‐gil’s consciousness of admonishment were compared in order to illuminate the identity and efficacy of the two people’s historical consciousness. Fourth, Cheongeum’s consciousness of independence was studied based on the fact that he never forgot the disgrace brought by Jurchen, which was depreciated as a barbarian, and tried to revenge himself and vindicate his honor. Lastly, his consciousness of justice, which was the core of Taoism and a major part of Cheongeum’s philosophical system, was discussed. On the other hands, his thought of governing was examined in terms of three themes politics, social economy, and national defense based on this ‘written appeals and recourses’ to the king. First, this political thoughts were explained mainly focusing on his political view of internal sagehood and external kingship, the fair and just selection and appointment of talented people, and theory of disasters. Cheongeum believed that the quality of the sovereign was the first requirement for good government in politics and kept raising the need of the discipline of the sovereign implemented through the studies of the sages. He thought that the sovereign was able to influence the people morally only when he cultivated his mind and recovered the right mind. What is more, he asserted the importance of the screening of competent people as one of key factors for the success of politics, and mentioned how to appoint and treat such people. Lastly, he developed the theory of disasters, which were, he believed, used to reprove the sovereign. With regard to his social thoughts, Cheongeum continued his argument for the establishment of national discipline, and this reveals his strong wish that the social confusion resulting from the abolishment of assembly and consequent chaotic political situation just after the Restoration of King Injo might be corrected, justice might be established, and ultimately, people and society might be stabilized. Cheongeum’s economic thoughts were approached through his appeals to King Injo enumerating and accusing government officials’ corruptions in tax collection and demanding institutional reforms. He disclosed the financial situation of the state, and suggested simple but specific reform plans for the efficient management of finance including the improvement of tribute ledgers and the cultivation of the government‐owned lands. Under these appeals for the economic stability of the state were laid his love for the people and his yearning for people’s affluent living. Experiencing a number of national disasters through his lifetime, on the other hand, Cheongeum maintained a strong will toward self‐reliant national defense, and his theory of self‐reliant defense formed a major axis of his view of governing. His recourses proposing plans to defeat the northern tribes in the Gwanseo region and strategies to fortify against Japanese invaders in the Yangnam region show his strong will toward border defense, and his tactics comprehending army building‐up and commander training suggest his deep knowledge as a politician familiar with pending issues. In the history of Korean philosophies, the Taoist thought has been considered to have functioned as a driving force sustaining the state, but some scholars point out that, held by the group defending Confucian doctrines and rejecting Western thoughts during the late Joseon Dynasty, it as a closed idea impeded the modernization of Korea. For example, however, patriots’ coping with the realities during the invasion of Japanese imperialism in the late Yi Dynasty appeared in various forms including suicide, uprising, and retirement for avoiding cooperation with Japanese imperialism. Thus, we need to admit that the behavioral pattern expressing one’s belief may diverse among individuals. With regard to individuals’ different worlds of consciousness manifested in various ways in the grand stream of history, it is often meaningless to distinguish between right and wrong. In the Taoist proposition of self‐cultivation and ordering of society, it is difficult to determine in one word the right and wrong of individuals’ perception of the realities and its application. This is believed to be a personal domain that requires each person’s deep reflection for wise choice.
This study is about Cheongeum Kim Sang‐heon (1570∼1652) who led opposition to negotiation with Qing in Qing’s invasion in 1637, focusing on the review of his historical consciousness and thought of governing. During Cheongeum’s lifetime, the Ming Dynasty, which had been the hegemonic state in the East Asia, was declining since the mid 16th century, and Japan was rising as a new power and invaded the Korean Peninsula in 1592. The Japanese invasion to Korea became a turning point for shifting from Sino‐centric status of East Asia, the emergence of Japan as a power, and the transfer to a new regime (state) in the history of Japan and China. In this situation, Joseon suffered miserable damages through the wars, and was faced with radical changes resulting from shaken order in all the areas of the country including politics, economy, and society. The situation of the Joseon society in those days is characterized by international wars such as Japanese invasion in 1592 and Qing’s invasions in 1627 and 1637 and internal disturbances such as the Restoration of King Injo and Lee Gwal’s revolt, and the country fell into an overall grave situation. Witnessing such national woes on the front line of politics, Cheongeum was involved in the situations actively and expressed his beliefs as a scholar plainly. Particularly in the Qing’s invasion in 1637, which was a consequence of the hegemonic war between Ming and Qing, he, standing against the group urging appeasement with Qing, tried to carry out his intention by tearing down the capitulatory letter and attempting suicide, and what drove him to reject negotiation with Qing was his Taoist historical consciousness based on good cause. After the war, his action in the Namhan Mt. Fortress was faced with both praises and rebukes. In addition, he, along with Jicheon Choi Myeong‐gil who argued for more practical position to urge appeasement, was entangled with the unceasing dispute of whether to be tough or moderate to Qing, and finally, was taken to Shenyang in Qing. In Qing, however, Cheongeum kept national pride and showed integrity with a determined spirit and this provided a turning point for calming down some Joseon Cabinet members’ criticism to some degree, and going further, he became a symbol of loyalty and integrity. Taoism, which is practical Confucianism emphasizing fidelity and integrity, finds its meaning in pursuing self‐cultivation and ordering of society and realizing the ideal world in the reality, and therefore, Confucians cherish their own historical consciousness and thought of governing for these goals. Because governing is based on historical consciousness, what is more, the two are not separated but in the relationship of substance and function. Therefore, this study, aiming to explain the supplementary relationship between historical consciousness and thought of governing, is believed to be an opportunity to clarify Confucians’ world of consciousness comprehensively. In the political system of the Joseon Dynasty, which pursued agreement between learning and politics, it was a matter of course to the Confucian scholars that historical spirits should be implemented in actual politics. As a scholar and bureaucrat, Cheongeum also embraced such historical spirits and expressed his active will toward the salvation of the world in various ways. This study presented the ground of argument mainly based on his poetic literature and written appeals. In the process of examining his historical consciousness, first of all, the world of consciousness observed in his poetic literature was explored largely in five aspects obtained from the themes of his poems. First, his consciousness of integrity was examined through poems configuring people. Second, the aiming point of advanced civilization represented by Sino‐centrism was studied. Third, Cheongeum’s consciousness of ethics and Jicheon Choi Myeong‐gil’s consciousness of admonishment were compared in order to illuminate the identity and efficacy of the two people’s historical consciousness. Fourth, Cheongeum’s consciousness of independence was studied based on the fact that he never forgot the disgrace brought by Jurchen, which was depreciated as a barbarian, and tried to revenge himself and vindicate his honor. Lastly, his consciousness of justice, which was the core of Taoism and a major part of Cheongeum’s philosophical system, was discussed. On the other hands, his thought of governing was examined in terms of three themes politics, social economy, and national defense based on this ‘written appeals and recourses’ to the king. First, this political thoughts were explained mainly focusing on his political view of internal sagehood and external kingship, the fair and just selection and appointment of talented people, and theory of disasters. Cheongeum believed that the quality of the sovereign was the first requirement for good government in politics and kept raising the need of the discipline of the sovereign implemented through the studies of the sages. He thought that the sovereign was able to influence the people morally only when he cultivated his mind and recovered the right mind. What is more, he asserted the importance of the screening of competent people as one of key factors for the success of politics, and mentioned how to appoint and treat such people. Lastly, he developed the theory of disasters, which were, he believed, used to reprove the sovereign. With regard to his social thoughts, Cheongeum continued his argument for the establishment of national discipline, and this reveals his strong wish that the social confusion resulting from the abolishment of assembly and consequent chaotic political situation just after the Restoration of King Injo might be corrected, justice might be established, and ultimately, people and society might be stabilized. Cheongeum’s economic thoughts were approached through his appeals to King Injo enumerating and accusing government officials’ corruptions in tax collection and demanding institutional reforms. He disclosed the financial situation of the state, and suggested simple but specific reform plans for the efficient management of finance including the improvement of tribute ledgers and the cultivation of the government‐owned lands. Under these appeals for the economic stability of the state were laid his love for the people and his yearning for people’s affluent living. Experiencing a number of national disasters through his lifetime, on the other hand, Cheongeum maintained a strong will toward self‐reliant national defense, and his theory of self‐reliant defense formed a major axis of his view of governing. His recourses proposing plans to defeat the northern tribes in the Gwanseo region and strategies to fortify against Japanese invaders in the Yangnam region show his strong will toward border defense, and his tactics comprehending army building‐up and commander training suggest his deep knowledge as a politician familiar with pending issues. In the history of Korean philosophies, the Taoist thought has been considered to have functioned as a driving force sustaining the state, but some scholars point out that, held by the group defending Confucian doctrines and rejecting Western thoughts during the late Joseon Dynasty, it as a closed idea impeded the modernization of Korea. For example, however, patriots’ coping with the realities during the invasion of Japanese imperialism in the late Yi Dynasty appeared in various forms including suicide, uprising, and retirement for avoiding cooperation with Japanese imperialism. Thus, we need to admit that the behavioral pattern expressing one’s belief may diverse among individuals. With regard to individuals’ different worlds of consciousness manifested in various ways in the grand stream of history, it is often meaningless to distinguish between right and wrong. In the Taoist proposition of self‐cultivation and ordering of society, it is difficult to determine in one word the right and wrong of individuals’ perception of the realities and its application. This is believed to be a personal domain that requires each person’s deep reflection for wise choice.
※ AI-Helper는 부적절한 답변을 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