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문학에서 ‘순수’라는 어휘는 독특한 자리를 점유해왔다. 그것은 순수와 관련된 어휘들이 일상어의 용법과 혼용되어 사용되면서 관습적이고 암묵적으로 동의할 수 있는 범주에서 사용된 데서 비롯되었다. 발화자의 문맥과 당파적 입장에 따라서 다양하게 해석되어 온 것은 여기에서 연유한 것으로 판단되다. 더욱이 해방, 분단, 월북 등의 일련의 과정을 거치고, 김동리를 중심으로 한 순수문학논쟁을 통과하면서 새로운 체제의 내적 동일성에 복무하지 못했던 다양한 차이들은 강제로 배제되었다. 이 과정은 매우 격렬했다. 이후 ‘순수’에 대한 관점에서는 가치의 전도가 이루어지면서 근대 계몽기에서 해방이전까지 존재했던 ‘순수’의 다양한 양태들은 은폐될 수밖에 없었다. 근대로 진입한 대한제국은 새로운 체제에 안착하기 위해 고군분투한다. ‘純國文’을 통해 국민국가의 내적 동일성을 유지하기 위한 노력이 제기된 것도 이 무렵이다. 고종의 칙령을 통해 국문을 채용한데 알 수 있듯이 청으로 대변되는 중화의 세계관으로부터의 거리두기, 독립국가에 대한 자의식을 갖는 것은 무엇보다 시급했다. 이것은 조선조의 신분제의 바탕을 둔 한자의 총체적 세계에서 벗어나 다양하게 분화되어 있던 계층을 근대의 균일한 구성원으로 포함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같은 말을 사용하는 사람들의 공통감각을 통해 민족 국가를 상상했던 것이다. 純文學이나 純文藝라는 기표는 다소 다른 양상을 보인다. 근대계몽기 조선에는 오늘 날과 같이 문학의 하위 장르로 존재하는 시, 소설, 희곡 등의 순문학 또는 순문예가 존재하지 않았다. 개별 작품을 통한 구체적 장르를 통한 인식은 유학생들을 통해 서구 및 일본에서 접한 작품들을 통해 가능했다. 근대는 이전 시대와 질적으로 다른 시·공간적 특징을 지닌다. 때문에 근대세계로 진입하면서 이전 세계의 배타적 속성은 배제될 수밖에 없다. 근대의 내부는 자기동일성의 원리에 의해 재배치 또는 재구획될 수밖에 없다. 이들에게는 조선에 존재하는 귀납적인 작품을 통했다기 보다는 외부에서 경험한 것, 선험적인 지식들을 조선에 구현하는 것이 급선무였다. 이때 純文學 또는 순문예라는 기표는 존재했지만 이에 상응하는 기의가 조선에는 존재하지 않았다. 순문학 또는 순문예라는 기표는 조선에 황급하게 요청되는 것이면서 근대가 지니고 있는 분류 욕망의 구현이라 할 수 있다. 결국 초기 순국문, 순문학, 순문예 등의 기표를 통해 당대 지식인들이 구현하고자 하는 것은 실체가 있는 어떤 것이라기 보다는 아직 도래하지는 않았지만 미래에 요구되는 것에 대한 당위적인 요청 또는 당대 지식인들의 당면과제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신채호와 최남은 이러한 근대적 요청을 직접적으로 문학이라는 장르에 반영, 시를 통해 구현하려고 노력한 인물들이다. 이들의 자국시 모색은 자국어를 기반으로 하는 공통된 속성이 있는데, 아직 조선어가 명확하게 자리를 잡지 않은 상황에서 반드시 선결되어야 할 문제들이었다. 신채호는 「天喜堂詩話」에서 ‘동국어’, ‘동국문’, ‘동국음’을 통해 한시가 아니라 저자에서 노래로 불리던 것을 국시로 승격시켜 동국시를 정립하려 했다. 동국어와 동국문을 통해 언문일치를 시사하고 있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국시는 단순히 말과 문자의 일치만으로 이루어 질 수 있는 성격의 것이 아니다. 조선 고유의 ‘음’을 동국어와 동국문으로 구현할 수 있을 때 비로소 완성되는 것이다. 사실 이것은 사후적으로 구성되는 것이기 때문에 허상에 불과한 것일 수 있다. 이것은 현재라는 시점의 순간에서 정립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역사가 진행되는 과정 속에서 완료를 전제하고 정리가 가능한 것이다. 그러나 하나의 명제로 정리되는 순간, 다시 허상이 되어 버린다. 그럼에도 한시를 통한 구현이 아니라, 민중들이 즐겨 부르던 잡가를 통해 국시를 모색했다는 사실과 말과 글과 노래가 완벽하게 일치된 상태를 근대시의 이상적인 상태로 인지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최남선은 근대 인쇄매체를 통해 보다 구체적인 방식으로 근대시를 모색하고 있었다. 최남선은 문학이 인간의 내부, 즉 ‘情’에 기반하고 있음을 자각하고 있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情’을 근거로 하며 순국문을 사용하며 ‘순정한 소년배’로 명명할 수 있는 균질한 근대적 개인을 신시의 주체로 상정하고 있었다. 그러나 당시 「소년」지의 독자들 중에는 신시에 대해 할 수 없었다. 그것이 구체적인 작품을 통해 경험되고 학습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또한 신시에 대해 순국문으로 되어 있으면 그 내용이 ‘純潔’한 것이어야 한다고 모집공고를 낸 최남선 역시 당위적으로 새로운 형태의 근대시가 있어야 함을 직감하고 있었지만 그 구체적인 내용을 특칭하지는 못했다. 이러한 논리는 신채호의 ‘國粹’ 개념에서 보다 명확하게 드러난다. 제국의 침약 앞에서 민족을 기반으로 한 국민국가를 형성하기 위해서는 중화세계에 기반한 문약(文弱)한 대한제국보다 보다 강력한 구심점이 필요했다. 물질적 세계에서는 서구 및 일본과의 시간적 낙차를 존재하기 때문에 내적 동일성 유지를 통해 자국에 대한 감정을 공고하게 하려했다. 역사를 통해 민족의 정체(...
한국 문학에서 ‘순수’라는 어휘는 독특한 자리를 점유해왔다. 그것은 순수와 관련된 어휘들이 일상어의 용법과 혼용되어 사용되면서 관습적이고 암묵적으로 동의할 수 있는 범주에서 사용된 데서 비롯되었다. 발화자의 문맥과 당파적 입장에 따라서 다양하게 해석되어 온 것은 여기에서 연유한 것으로 판단되다. 더욱이 해방, 분단, 월북 등의 일련의 과정을 거치고, 김동리를 중심으로 한 순수문학논쟁을 통과하면서 새로운 체제의 내적 동일성에 복무하지 못했던 다양한 차이들은 강제로 배제되었다. 이 과정은 매우 격렬했다. 이후 ‘순수’에 대한 관점에서는 가치의 전도가 이루어지면서 근대 계몽기에서 해방이전까지 존재했던 ‘순수’의 다양한 양태들은 은폐될 수밖에 없었다. 근대로 진입한 대한제국은 새로운 체제에 안착하기 위해 고군분투한다. ‘純國文’을 통해 국민국가의 내적 동일성을 유지하기 위한 노력이 제기된 것도 이 무렵이다. 고종의 칙령을 통해 국문을 채용한데 알 수 있듯이 청으로 대변되는 중화의 세계관으로부터의 거리두기, 독립국가에 대한 자의식을 갖는 것은 무엇보다 시급했다. 이것은 조선조의 신분제의 바탕을 둔 한자의 총체적 세계에서 벗어나 다양하게 분화되어 있던 계층을 근대의 균일한 구성원으로 포함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같은 말을 사용하는 사람들의 공통감각을 통해 민족 국가를 상상했던 것이다. 純文學이나 純文藝라는 기표는 다소 다른 양상을 보인다. 근대계몽기 조선에는 오늘 날과 같이 문학의 하위 장르로 존재하는 시, 소설, 희곡 등의 순문학 또는 순문예가 존재하지 않았다. 개별 작품을 통한 구체적 장르를 통한 인식은 유학생들을 통해 서구 및 일본에서 접한 작품들을 통해 가능했다. 근대는 이전 시대와 질적으로 다른 시·공간적 특징을 지닌다. 때문에 근대세계로 진입하면서 이전 세계의 배타적 속성은 배제될 수밖에 없다. 근대의 내부는 자기동일성의 원리에 의해 재배치 또는 재구획될 수밖에 없다. 이들에게는 조선에 존재하는 귀납적인 작품을 통했다기 보다는 외부에서 경험한 것, 선험적인 지식들을 조선에 구현하는 것이 급선무였다. 이때 純文學 또는 순문예라는 기표는 존재했지만 이에 상응하는 기의가 조선에는 존재하지 않았다. 순문학 또는 순문예라는 기표는 조선에 황급하게 요청되는 것이면서 근대가 지니고 있는 분류 욕망의 구현이라 할 수 있다. 결국 초기 순국문, 순문학, 순문예 등의 기표를 통해 당대 지식인들이 구현하고자 하는 것은 실체가 있는 어떤 것이라기 보다는 아직 도래하지는 않았지만 미래에 요구되는 것에 대한 당위적인 요청 또는 당대 지식인들의 당면과제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신채호와 최남은 이러한 근대적 요청을 직접적으로 문학이라는 장르에 반영, 시를 통해 구현하려고 노력한 인물들이다. 이들의 자국시 모색은 자국어를 기반으로 하는 공통된 속성이 있는데, 아직 조선어가 명확하게 자리를 잡지 않은 상황에서 반드시 선결되어야 할 문제들이었다. 신채호는 「天喜堂詩話」에서 ‘동국어’, ‘동국문’, ‘동국음’을 통해 한시가 아니라 저자에서 노래로 불리던 것을 국시로 승격시켜 동국시를 정립하려 했다. 동국어와 동국문을 통해 언문일치를 시사하고 있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국시는 단순히 말과 문자의 일치만으로 이루어 질 수 있는 성격의 것이 아니다. 조선 고유의 ‘음’을 동국어와 동국문으로 구현할 수 있을 때 비로소 완성되는 것이다. 사실 이것은 사후적으로 구성되는 것이기 때문에 허상에 불과한 것일 수 있다. 이것은 현재라는 시점의 순간에서 정립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역사가 진행되는 과정 속에서 완료를 전제하고 정리가 가능한 것이다. 그러나 하나의 명제로 정리되는 순간, 다시 허상이 되어 버린다. 그럼에도 한시를 통한 구현이 아니라, 민중들이 즐겨 부르던 잡가를 통해 국시를 모색했다는 사실과 말과 글과 노래가 완벽하게 일치된 상태를 근대시의 이상적인 상태로 인지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최남선은 근대 인쇄매체를 통해 보다 구체적인 방식으로 근대시를 모색하고 있었다. 최남선은 문학이 인간의 내부, 즉 ‘情’에 기반하고 있음을 자각하고 있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情’을 근거로 하며 순국문을 사용하며 ‘순정한 소년배’로 명명할 수 있는 균질한 근대적 개인을 신시의 주체로 상정하고 있었다. 그러나 당시 「소년」지의 독자들 중에는 신시에 대해 할 수 없었다. 그것이 구체적인 작품을 통해 경험되고 학습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또한 신시에 대해 순국문으로 되어 있으면 그 내용이 ‘純潔’한 것이어야 한다고 모집공고를 낸 최남선 역시 당위적으로 새로운 형태의 근대시가 있어야 함을 직감하고 있었지만 그 구체적인 내용을 특칭하지는 못했다. 이러한 논리는 신채호의 ‘國粹’ 개념에서 보다 명확하게 드러난다. 제국의 침약 앞에서 민족을 기반으로 한 국민국가를 형성하기 위해서는 중화세계에 기반한 문약(文弱)한 대한제국보다 보다 강력한 구심점이 필요했다. 물질적 세계에서는 서구 및 일본과의 시간적 낙차를 존재하기 때문에 내적 동일성 유지를 통해 자국에 대한 감정을 공고하게 하려했다. 역사를 통해 민족의 정체(identity)가 가장 순수하고 충만하게 보존되어 있는 지점을 상정하여 하나의 구심점으로 삼고자 했다. 「天喜堂詩話」에 의하면 이러한 작업을 가장 충실하게 수행해 낼 수 있는 것은 언어의 정화에 해당하는 詩歌가 적격이다. 시가의 내용이 강인하고 영웅들의 호전적인 기상을 담고 있어야 하는 것은 당대의 시대를 반영해 민족국가라는 최고 심급에 복무하기 위해 요청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역사 속 영웅들이 등장하는 고전을 순국문판으로 재정리하여 배포하는 작업 역시 國粹를 지켜내기 위한 사업이었다. 최남선의 광문회나 「時文讀本」의 출간 역시 같은 맥락에서 이해가능한 부분이다. 그러나 1910년 일제에게 주권을 상실한 이후에 양상은 달라진다. 문명의 선취를 통해 서구와의 시간적 낙차를 줄이기 위한 노력이 실패하고 말았다. 문명의 선취를 통한 민족국가 수립의 목표는 실력양성을 통해 자본주의 제도의 확립을 근간으로 하는 문화운동으로 무게중심이 옮겨간다. 서구의 미적 담론과 궤를 같이하며 예술을 매개로 하여 사회를 개량하고 개조할 수 있다는 논리에 힘이 실리게 되었다. 근대문학과 이전 시대의 문학과의 변별적 자실을 개인의 주관성에 근거한 ‘情적 분자’에 두면서 정감적인 요소가 문학이라는 학적 체계로 자리를 잡아가기 시작했다. 상징주의 시론의 도입으로 개인의 내면이 감정의 유로가 시작되는 작품의 기원으로 인정받기 시작했다. 초월적이며 절대적 관념세계, 본질적인 세계에 대한 탐구가 근대시의 원리로 작동하기 시작했다. 물론 이때 언어의 역할은 중요했으며 특히 언어가 지니고 있는 음악성에 대한 문제가 대두되기 시작했다. 근대시를 모색하는 과정에서 최초의 접하게 된 서구의 시론이 상징주의 이론이라는 사실은 매우 의미심장한 것이다. 개인성을 통한 ‘情’의 문학의 출현과도 친연성이 있는 이론으로 봉건질서로부터 이탈을 통해 개인의 주관성, 내면의 존재 근거에 보다 확고한 근거가 되어주었기 때문이다. 물론 역설적으로 문단은 전문화되어 또 다른 유형의 폐쇄성을 지닐 수밖에 없게 되었다.
한국 문학에서 ‘순수’라는 어휘는 독특한 자리를 점유해왔다. 그것은 순수와 관련된 어휘들이 일상어의 용법과 혼용되어 사용되면서 관습적이고 암묵적으로 동의할 수 있는 범주에서 사용된 데서 비롯되었다. 발화자의 문맥과 당파적 입장에 따라서 다양하게 해석되어 온 것은 여기에서 연유한 것으로 판단되다. 더욱이 해방, 분단, 월북 등의 일련의 과정을 거치고, 김동리를 중심으로 한 순수문학논쟁을 통과하면서 새로운 체제의 내적 동일성에 복무하지 못했던 다양한 차이들은 강제로 배제되었다. 이 과정은 매우 격렬했다. 이후 ‘순수’에 대한 관점에서는 가치의 전도가 이루어지면서 근대 계몽기에서 해방이전까지 존재했던 ‘순수’의 다양한 양태들은 은폐될 수밖에 없었다. 근대로 진입한 대한제국은 새로운 체제에 안착하기 위해 고군분투한다. ‘純國文’을 통해 국민국가의 내적 동일성을 유지하기 위한 노력이 제기된 것도 이 무렵이다. 고종의 칙령을 통해 국문을 채용한데 알 수 있듯이 청으로 대변되는 중화의 세계관으로부터의 거리두기, 독립국가에 대한 자의식을 갖는 것은 무엇보다 시급했다. 이것은 조선조의 신분제의 바탕을 둔 한자의 총체적 세계에서 벗어나 다양하게 분화되어 있던 계층을 근대의 균일한 구성원으로 포함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같은 말을 사용하는 사람들의 공통감각을 통해 민족 국가를 상상했던 것이다. 純文學이나 純文藝라는 기표는 다소 다른 양상을 보인다. 근대계몽기 조선에는 오늘 날과 같이 문학의 하위 장르로 존재하는 시, 소설, 희곡 등의 순문학 또는 순문예가 존재하지 않았다. 개별 작품을 통한 구체적 장르를 통한 인식은 유학생들을 통해 서구 및 일본에서 접한 작품들을 통해 가능했다. 근대는 이전 시대와 질적으로 다른 시·공간적 특징을 지닌다. 때문에 근대세계로 진입하면서 이전 세계의 배타적 속성은 배제될 수밖에 없다. 근대의 내부는 자기동일성의 원리에 의해 재배치 또는 재구획될 수밖에 없다. 이들에게는 조선에 존재하는 귀납적인 작품을 통했다기 보다는 외부에서 경험한 것, 선험적인 지식들을 조선에 구현하는 것이 급선무였다. 이때 純文學 또는 순문예라는 기표는 존재했지만 이에 상응하는 기의가 조선에는 존재하지 않았다. 순문학 또는 순문예라는 기표는 조선에 황급하게 요청되는 것이면서 근대가 지니고 있는 분류 욕망의 구현이라 할 수 있다. 결국 초기 순국문, 순문학, 순문예 등의 기표를 통해 당대 지식인들이 구현하고자 하는 것은 실체가 있는 어떤 것이라기 보다는 아직 도래하지는 않았지만 미래에 요구되는 것에 대한 당위적인 요청 또는 당대 지식인들의 당면과제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신채호와 최남은 이러한 근대적 요청을 직접적으로 문학이라는 장르에 반영, 시를 통해 구현하려고 노력한 인물들이다. 이들의 자국시 모색은 자국어를 기반으로 하는 공통된 속성이 있는데, 아직 조선어가 명확하게 자리를 잡지 않은 상황에서 반드시 선결되어야 할 문제들이었다. 신채호는 「天喜堂詩話」에서 ‘동국어’, ‘동국문’, ‘동국음’을 통해 한시가 아니라 저자에서 노래로 불리던 것을 국시로 승격시켜 동국시를 정립하려 했다. 동국어와 동국문을 통해 언문일치를 시사하고 있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국시는 단순히 말과 문자의 일치만으로 이루어 질 수 있는 성격의 것이 아니다. 조선 고유의 ‘음’을 동국어와 동국문으로 구현할 수 있을 때 비로소 완성되는 것이다. 사실 이것은 사후적으로 구성되는 것이기 때문에 허상에 불과한 것일 수 있다. 이것은 현재라는 시점의 순간에서 정립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역사가 진행되는 과정 속에서 완료를 전제하고 정리가 가능한 것이다. 그러나 하나의 명제로 정리되는 순간, 다시 허상이 되어 버린다. 그럼에도 한시를 통한 구현이 아니라, 민중들이 즐겨 부르던 잡가를 통해 국시를 모색했다는 사실과 말과 글과 노래가 완벽하게 일치된 상태를 근대시의 이상적인 상태로 인지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최남선은 근대 인쇄매체를 통해 보다 구체적인 방식으로 근대시를 모색하고 있었다. 최남선은 문학이 인간의 내부, 즉 ‘情’에 기반하고 있음을 자각하고 있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情’을 근거로 하며 순국문을 사용하며 ‘순정한 소년배’로 명명할 수 있는 균질한 근대적 개인을 신시의 주체로 상정하고 있었다. 그러나 당시 「소년」지의 독자들 중에는 신시에 대해 할 수 없었다. 그것이 구체적인 작품을 통해 경험되고 학습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또한 신시에 대해 순국문으로 되어 있으면 그 내용이 ‘純潔’한 것이어야 한다고 모집공고를 낸 최남선 역시 당위적으로 새로운 형태의 근대시가 있어야 함을 직감하고 있었지만 그 구체적인 내용을 특칭하지는 못했다. 이러한 논리는 신채호의 ‘國粹’ 개념에서 보다 명확하게 드러난다. 제국의 침약 앞에서 민족을 기반으로 한 국민국가를 형성하기 위해서는 중화세계에 기반한 문약(文弱)한 대한제국보다 보다 강력한 구심점이 필요했다. 물질적 세계에서는 서구 및 일본과의 시간적 낙차를 존재하기 때문에 내적 동일성 유지를 통해 자국에 대한 감정을 공고하게 하려했다. 역사를 통해 민족의 정체(identity)가 가장 순수하고 충만하게 보존되어 있는 지점을 상정하여 하나의 구심점으로 삼고자 했다. 「天喜堂詩話」에 의하면 이러한 작업을 가장 충실하게 수행해 낼 수 있는 것은 언어의 정화에 해당하는 詩歌가 적격이다. 시가의 내용이 강인하고 영웅들의 호전적인 기상을 담고 있어야 하는 것은 당대의 시대를 반영해 민족국가라는 최고 심급에 복무하기 위해 요청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역사 속 영웅들이 등장하는 고전을 순국문판으로 재정리하여 배포하는 작업 역시 國粹를 지켜내기 위한 사업이었다. 최남선의 광문회나 「時文讀本」의 출간 역시 같은 맥락에서 이해가능한 부분이다. 그러나 1910년 일제에게 주권을 상실한 이후에 양상은 달라진다. 문명의 선취를 통해 서구와의 시간적 낙차를 줄이기 위한 노력이 실패하고 말았다. 문명의 선취를 통한 민족국가 수립의 목표는 실력양성을 통해 자본주의 제도의 확립을 근간으로 하는 문화운동으로 무게중심이 옮겨간다. 서구의 미적 담론과 궤를 같이하며 예술을 매개로 하여 사회를 개량하고 개조할 수 있다는 논리에 힘이 실리게 되었다. 근대문학과 이전 시대의 문학과의 변별적 자실을 개인의 주관성에 근거한 ‘情적 분자’에 두면서 정감적인 요소가 문학이라는 학적 체계로 자리를 잡아가기 시작했다. 상징주의 시론의 도입으로 개인의 내면이 감정의 유로가 시작되는 작품의 기원으로 인정받기 시작했다. 초월적이며 절대적 관념세계, 본질적인 세계에 대한 탐구가 근대시의 원리로 작동하기 시작했다. 물론 이때 언어의 역할은 중요했으며 특히 언어가 지니고 있는 음악성에 대한 문제가 대두되기 시작했다. 근대시를 모색하는 과정에서 최초의 접하게 된 서구의 시론이 상징주의 이론이라는 사실은 매우 의미심장한 것이다. 개인성을 통한 ‘情’의 문학의 출현과도 친연성이 있는 이론으로 봉건질서로부터 이탈을 통해 개인의 주관성, 내면의 존재 근거에 보다 확고한 근거가 되어주었기 때문이다. 물론 역설적으로 문단은 전문화되어 또 다른 유형의 폐쇄성을 지닐 수밖에 없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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