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 연구는 을사늑약으로 인해 자결을 한 충정공 민영환의 생애중에서 그가 자결을 단행하기 전의 삶과 부패한 관리의 대명사로 알려져 있던 민씨 척족이었던 그가 변화하게 된 원인에 주목하였다.
일찍이 알려진 바와 같이 민영환은 구한말 부패한 세도정치의 한 축이었던 여흥민씨의 한 사람이었다. 당시 대부분의 척신이 그랬던 것처럼 민영환의 정치적 삶도 다른 이들과 비교하여 역사적 관점에 비추어 긍정적인 관점으로 평가하기에 달리 두드러진 점은 없었다.
그러한 그가 을미사변과 아관파천으로 인한 국가적 위기에서 고종의 특명을 받아 ...
본 연구는 을사늑약으로 인해 자결을 한 충정공 민영환의 생애중에서 그가 자결을 단행하기 전의 삶과 부패한 관리의 대명사로 알려져 있던 민씨 척족이었던 그가 변화하게 된 원인에 주목하였다.
일찍이 알려진 바와 같이 민영환은 구한말 부패한 세도정치의 한 축이었던 여흥민씨의 한 사람이었다. 당시 대부분의 척신이 그랬던 것처럼 민영환의 정치적 삶도 다른 이들과 비교하여 역사적 관점에 비추어 긍정적인 관점으로 평가하기에 달리 두드러진 점은 없었다.
그러한 그가 을미사변과 아관파천으로 인한 국가적 위기에서 고종의 특명을 받아 특명전권공사가 되어 러시아사행의 길에 올랐다. 무려 7개월에 걸친 사행의 여정은 그의 회고처럼 ‘꿈도 꾸어보지 못 한 일’ 이었다.
그러나 캐나다부와 미국을 통과 할 때, 그리고 영국을 지나면서 민영환 일행은 신문물을 접할 때 보이는 격정적인 환희보다는 깊고 고요한 슬픔을 보였다.
그들은 두고 온 고국 조선을 생각했던 것이다. 그 고국은 국왕이 그의 처지마저도 곤궁하여 러시아공사관에 도피하였던 중이었다. 민영환 일행은 그러한 군주의 안위를 위하여 교섭을 벌이고자 니콜라이 2세의 대관식을 빌미로 러시아로 향하게 된 특명전권공사였다.
하지만 주한러시아공사 베베르의 약속과는 달리 러시아 현지에서 민영환특사 일행이 벌였던 교섭은 외교전쟁이었다. 러시아 자국의 이익을 위하여 청의 리훙장과 일본의 야마가타 아리토모와 또 다른 비밀협정을 체결했던 조선에게 민영환이 취할 교섭의 여지는 없었다. 결과적으로 교섭은 실패하였으나 13명의 군관이라는 미말의 여지라도 확보한 민영환에 의해 구한말 군제개혁이 시작되고 고종은 환궁을 하기에 이른다.
이후 국내외 정세변화 이어 민영환의 입지는 더욱 어려워졌으나 그는 러시아 사행을 토대로 군제를 개혁하는 동시에 학교를 설립하는 등 사립 흥화학교를 설립하는 등 러시아 사을 통해 경험했던 ‘국가’적 현실인식에 변화를 보인다.
그러나 국내외 상황은 이미 그가 돌이키기에는 너무 늦은 제국주의적 침략의 시기였었고 그의 개혁은 시대적 좌절에 부딪히고 만다. 민영환 개인으로서는 러시아 사행의 기회로 말미암아 비로소 구체적으로 인식하게 되었던 근대적 현실인식이었지만 그에게는 개혁을 할 수 있는, 상황을 돌이킬 수 있는 여지가 충분하지 못했다. 민영환이 할 수 있었던 것은 단지 개혁의 방향을 본 것이었다.
본 연구의 출발은 ‘이전의 민대감과는 다른 사람’ 즉, 민영환의 변화와 그 이전의 삶이었다. 역사는 민영환이라는 인물을 1896년 4월에서 1905년까지 한정해서 보기를 원한다. 그러나 민영환은 1861년생이었으며 1896년 3월까지 삶이 있었다는 것도 균형 있게 바라봐야 할 것으로 생각한다.
이에 상황적 필요에 의해서 우리가 보고자 하는 부분이 아닌, 드러내기 불편한 부분의 한 쪽을 연구하면서 러시아 사행이전의 민영환과 사행이후 개혁가로서의 변화와 한계를 살펴보는데 의의를 두었다.
본 연구는 을사늑약으로 인해 자결을 한 충정공 민영환의 생애중에서 그가 자결을 단행하기 전의 삶과 부패한 관리의 대명사로 알려져 있던 민씨 척족이었던 그가 변화하게 된 원인에 주목하였다.
일찍이 알려진 바와 같이 민영환은 구한말 부패한 세도정치의 한 축이었던 여흥민씨의 한 사람이었다. 당시 대부분의 척신이 그랬던 것처럼 민영환의 정치적 삶도 다른 이들과 비교하여 역사적 관점에 비추어 긍정적인 관점으로 평가하기에 달리 두드러진 점은 없었다.
그러한 그가 을미사변과 아관파천으로 인한 국가적 위기에서 고종의 특명을 받아 특명전권공사가 되어 러시아사행의 길에 올랐다. 무려 7개월에 걸친 사행의 여정은 그의 회고처럼 ‘꿈도 꾸어보지 못 한 일’ 이었다.
그러나 캐나다부와 미국을 통과 할 때, 그리고 영국을 지나면서 민영환 일행은 신문물을 접할 때 보이는 격정적인 환희보다는 깊고 고요한 슬픔을 보였다.
그들은 두고 온 고국 조선을 생각했던 것이다. 그 고국은 국왕이 그의 처지마저도 곤궁하여 러시아공사관에 도피하였던 중이었다. 민영환 일행은 그러한 군주의 안위를 위하여 교섭을 벌이고자 니콜라이 2세의 대관식을 빌미로 러시아로 향하게 된 특명전권공사였다.
하지만 주한러시아공사 베베르의 약속과는 달리 러시아 현지에서 민영환특사 일행이 벌였던 교섭은 외교전쟁이었다. 러시아 자국의 이익을 위하여 청의 리훙장과 일본의 야마가타 아리토모와 또 다른 비밀협정을 체결했던 조선에게 민영환이 취할 교섭의 여지는 없었다. 결과적으로 교섭은 실패하였으나 13명의 군관이라는 미말의 여지라도 확보한 민영환에 의해 구한말 군제개혁이 시작되고 고종은 환궁을 하기에 이른다.
이후 국내외 정세변화 이어 민영환의 입지는 더욱 어려워졌으나 그는 러시아 사행을 토대로 군제를 개혁하는 동시에 학교를 설립하는 등 사립 흥화학교를 설립하는 등 러시아 사을 통해 경험했던 ‘국가’적 현실인식에 변화를 보인다.
그러나 국내외 상황은 이미 그가 돌이키기에는 너무 늦은 제국주의적 침략의 시기였었고 그의 개혁은 시대적 좌절에 부딪히고 만다. 민영환 개인으로서는 러시아 사행의 기회로 말미암아 비로소 구체적으로 인식하게 되었던 근대적 현실인식이었지만 그에게는 개혁을 할 수 있는, 상황을 돌이킬 수 있는 여지가 충분하지 못했다. 민영환이 할 수 있었던 것은 단지 개혁의 방향을 본 것이었다.
본 연구의 출발은 ‘이전의 민대감과는 다른 사람’ 즉, 민영환의 변화와 그 이전의 삶이었다. 역사는 민영환이라는 인물을 1896년 4월에서 1905년까지 한정해서 보기를 원한다. 그러나 민영환은 1861년생이었으며 1896년 3월까지 삶이 있었다는 것도 균형 있게 바라봐야 할 것으로 생각한다.
이에 상황적 필요에 의해서 우리가 보고자 하는 부분이 아닌, 드러내기 불편한 부분의 한 쪽을 연구하면서 러시아 사행이전의 민영환과 사행이후 개혁가로서의 변화와 한계를 살펴보는데 의의를 두었다.
This study has ranged over a lifetime of Min Yeong-hwan, known as ‘ChungJeongGong’, the posthumous name, who committed suicide due to the Protectorate Treaty between Korea and Japan concluded in 1905, so called ‘Japan–Korea Treaty of 1905’, and also reviewed about the reason why he became changed ev...
This study has ranged over a lifetime of Min Yeong-hwan, known as ‘ChungJeongGong’, the posthumous name, who committed suicide due to the Protectorate Treaty between Korea and Japan concluded in 1905, so called ‘Japan–Korea Treaty of 1905’, and also reviewed about the reason why he became changed even as a member of the Min family, a byword for corruptionist.
As already known, Min Yeong-hwan was a member of the Mins of Yeo Heung, the very corrupt politicians of Politics by In-powers in the late Chosun dynasty. As almost all vassals from maternal relatives did, Min Yeong-hwan’s political life was not positively remarkable enough to be praised, even when compared to the others’ in terms of history.
He, in the midst of national crisis owing to Eulmi Incident and assassination and the incident of Gojong’s moving to Russian Legation in 1895, under King Gojong’s special command, started his visiting to Russia as an Envoy Extraordinary and Minister Plenipotentiary. Seven months of journey was literally ‘undreamed-of experience’, he reminisced.
But, while passing through Canada, the U.S and England, Min Yeong-hwan and his party showed deep sadness rather than wonderment and joy that they felt from the new civilization at first.
They thought about their homeland, Chosun they just had left. The homeland at that time was under difficult position and even the King Gojong escaped to Russian Legation and kept staying there. Min Yeong-hwan and the party were nothing but an Envoy Extraordinary and Minister Plenipotentiary for a pretext of a coronation of Nicholas II of Russia to actually conduct a negotiation for their King’s safety in Russian Legation.
However, it was different from the promise with Karl Ivanovichi Weber, the Russian Minister to Korea, and what Min Yeong-hwan and the party negotiated in Russia was a diplomatic war.
Russia already made confidential agreements with Li Hung-chang of Qing and Yamagata Aritomo of Japan, and accordingly, there was no action that Min Yeong-hwan could take to negotiate with Russia. Eventually the negotiation got failed, but Military reforms of the late Chosun got started by Min Yeong-hwan with at least setting aside 13 military officers from Russia, and King Gojong came back to his palace.
Afterward, though the internal and external change of situation made Min Yeong-hwan’s position far weaker, he showed several changes on awareness of national reality with not only reforming military systems but also building a private school, named Heung Hwa Academy.
However, the internal and external situation was too late to set back and it already was a period of imperialistic invasion, and his effort to reform encountered frustration of the time. It was awareness of modern reality derived from the opportunity for visiting Russia, but he was not enough to restore the situation. What he only could do was see the direction of the reformation.
This study starts from the Min Yeong-hwan, who has changed and is different from himself in his old days as a Lord Min. In history, Min Yeong-hwan tends to be reviewed with his life limitedly from April of 1896 to 1905. But Min Yeong-hwan was born in 1861 and it is necessary to understand he also has lived up to March of 1896, as well.
Therefore, the study concentrates on Min Yeong-hwan’s life before his visiting to Russia, and his changes and limitation as a reformer, by studying not on what we want to see just because of situational necessity but on what is awkward to be revealed.
This study has ranged over a lifetime of Min Yeong-hwan, known as ‘ChungJeongGong’, the posthumous name, who committed suicide due to the Protectorate Treaty between Korea and Japan concluded in 1905, so called ‘Japan–Korea Treaty of 1905’, and also reviewed about the reason why he became changed even as a member of the Min family, a byword for corruptionist.
As already known, Min Yeong-hwan was a member of the Mins of Yeo Heung, the very corrupt politicians of Politics by In-powers in the late Chosun dynasty. As almost all vassals from maternal relatives did, Min Yeong-hwan’s political life was not positively remarkable enough to be praised, even when compared to the others’ in terms of history.
He, in the midst of national crisis owing to Eulmi Incident and assassination and the incident of Gojong’s moving to Russian Legation in 1895, under King Gojong’s special command, started his visiting to Russia as an Envoy Extraordinary and Minister Plenipotentiary. Seven months of journey was literally ‘undreamed-of experience’, he reminisced.
But, while passing through Canada, the U.S and England, Min Yeong-hwan and his party showed deep sadness rather than wonderment and joy that they felt from the new civilization at first.
They thought about their homeland, Chosun they just had left. The homeland at that time was under difficult position and even the King Gojong escaped to Russian Legation and kept staying there. Min Yeong-hwan and the party were nothing but an Envoy Extraordinary and Minister Plenipotentiary for a pretext of a coronation of Nicholas II of Russia to actually conduct a negotiation for their King’s safety in Russian Legation.
However, it was different from the promise with Karl Ivanovichi Weber, the Russian Minister to Korea, and what Min Yeong-hwan and the party negotiated in Russia was a diplomatic war.
Russia already made confidential agreements with Li Hung-chang of Qing and Yamagata Aritomo of Japan, and accordingly, there was no action that Min Yeong-hwan could take to negotiate with Russia. Eventually the negotiation got failed, but Military reforms of the late Chosun got started by Min Yeong-hwan with at least setting aside 13 military officers from Russia, and King Gojong came back to his palace.
Afterward, though the internal and external change of situation made Min Yeong-hwan’s position far weaker, he showed several changes on awareness of national reality with not only reforming military systems but also building a private school, named Heung Hwa Academy.
However, the internal and external situation was too late to set back and it already was a period of imperialistic invasion, and his effort to reform encountered frustration of the time. It was awareness of modern reality derived from the opportunity for visiting Russia, but he was not enough to restore the situation. What he only could do was see the direction of the reformation.
This study starts from the Min Yeong-hwan, who has changed and is different from himself in his old days as a Lord Min. In history, Min Yeong-hwan tends to be reviewed with his life limitedly from April of 1896 to 1905. But Min Yeong-hwan was born in 1861 and it is necessary to understand he also has lived up to March of 1896, as well.
Therefore, the study concentrates on Min Yeong-hwan’s life before his visiting to Russia, and his changes and limitation as a reformer, by studying not on what we want to see just because of situational necessity but on what is awkward to be reveal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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