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0년대 울산 대공장 노동자 연구 : 현대자동차와 현대중공업을 중심으로 A Study on Workers of Large Factories at Ulsan in the 1980s - focused on Hyundai Moter Company and Hyundai Heavy Industries원문보기
1987년 노동자대투쟁은 울산의 현대엔진 노동조합 결성으로 시작되었고, 이웃한 현대그룹 계열사 사업장으로 빠르게 확산되었다. 1974년 ‘현대조선사건’을 제외하고는 대규모의 집단적 저항을 벌인 경험이 없었던 노동자들이 대투쟁을 선도한 것이다. 대투쟁이 발생하기 이전 6월민주화운동에 직간접적으로 참여한 일부 노동자들이 대투쟁을 촉발시키는 역할을 하였지만, 대투쟁의 폭발성과 전개과정에서 보여준 노동자들의 자발적 참여는 대투쟁의 원인이 노동세계와 생활세계를 포괄하는 노동자들의 세계 내부에 있음을 짐작케 한다. 작업장 안의 노동세계에서 누적되어 온 불만과 분노가 대투쟁 시기에 표출되어 요구사항으로 집약되었으며, 협상대표기구인 노동조합이 결성되고 난 뒤 노사협상의 주요한 안건으로 제시되었다. 노동자들은 자신들의 요구가 받아들여지지 않자, 집단 시위를 통해 노사협상을 끌어내기도 했다. 1980년대 울산 대공장의 노동자대투쟁의 원인을 규명하기 위해 당시를 경험한 노동자들의 구술자료를 바탕으로 그들의 직접적인 경험한 세계를 재구성하였다. 노동자들의 경험한 세계는 그들이 노동자가 되기까지의 과정과 대공장 노동자가 된 후 작업장에서의 경험을 총괄하는 노동세계, 작업장 밖의 생활세계, 그리고 노동세계와 생활세계가 유기적으로 연결되면서 나타나는 노동자 저항을 포괄하는 세계라고 할 수 있다. 1 울산에 대규모 공장이 건설되자, 20~30대 청년노동자들이 안정적인 일자리를 찾아 현대자동차와 현대중공업을 비롯한 대규모 중화학공장에 입사하였다. 이들은 농업적 환경 속에서 성장한 1세대 노동자들이었다. 구술 노동자들은 공업고등학교를 졸업했거나, 공공직업훈련원 또는 기업 내부의 직업훈련원에서 기능을 익힌 뒤에 공개 채용 되거나 다른 사업장에서 쌓은 경력을 가지고 대규모 공장에 입사했다. 또는 사내 하청업체에서 일정한 경력을 쌓은 뒤 정규직 사원으로 채용되기도 했다. 청년 노동자들은 결혼할 나이가 되었고,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는 위치에 있었으므로, 상대적 고임금과 안정적 고용을 기대하며 대기업 정규직 사원으로의 사회적 지위를 희망하였다. 대기업의 정규직 노동자가 된 그들이 기억하는 노동세계는 ‘저급한 근로 환경과 저임금 속에서 인간다운 삶을 누리는 것이 거부되어’ 온 ‘빼앗기고 짓밟히는 삶’이었다. 주당 60시간 이상의 장시간 노동을 했다. 주야맞교대 근무형태로 인한 야간 노동과 강제적인 잔업과 특근을 일상적으로 경험하였다. 시급제로 임금을 받는 노동자들은 추가노동을 통해 부족한 생계비를 충당하고 있었다. 월 500시간 노동을 하였다는 노동자들의 구술은 장시간 노동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노동조합이 결성되기 이전 작업장의 안전시설은 제대로 마련되어 있지 않았다. 1980년대만 하더라도 현대자동차는 ‘철공소’, ‘똥구루마’, 현대중공업은 ‘조지나 공장’으로 불렸다. 이러한 표현은 자동차 공장과 조선소에서의 노동이 위험하고 고된 노동이었음을 보여준다. 노동자들은 노동세계에서 관료적이면서도 병영적인 통제를 경험하였다. 작업 태도 뿐 아니라 두발과 복장, ...
1987년 노동자대투쟁은 울산의 현대엔진 노동조합 결성으로 시작되었고, 이웃한 현대그룹 계열사 사업장으로 빠르게 확산되었다. 1974년 ‘현대조선사건’을 제외하고는 대규모의 집단적 저항을 벌인 경험이 없었던 노동자들이 대투쟁을 선도한 것이다. 대투쟁이 발생하기 이전 6월민주화운동에 직간접적으로 참여한 일부 노동자들이 대투쟁을 촉발시키는 역할을 하였지만, 대투쟁의 폭발성과 전개과정에서 보여준 노동자들의 자발적 참여는 대투쟁의 원인이 노동세계와 생활세계를 포괄하는 노동자들의 세계 내부에 있음을 짐작케 한다. 작업장 안의 노동세계에서 누적되어 온 불만과 분노가 대투쟁 시기에 표출되어 요구사항으로 집약되었으며, 협상대표기구인 노동조합이 결성되고 난 뒤 노사협상의 주요한 안건으로 제시되었다. 노동자들은 자신들의 요구가 받아들여지지 않자, 집단 시위를 통해 노사협상을 끌어내기도 했다. 1980년대 울산 대공장의 노동자대투쟁의 원인을 규명하기 위해 당시를 경험한 노동자들의 구술자료를 바탕으로 그들의 직접적인 경험한 세계를 재구성하였다. 노동자들의 경험한 세계는 그들이 노동자가 되기까지의 과정과 대공장 노동자가 된 후 작업장에서의 경험을 총괄하는 노동세계, 작업장 밖의 생활세계, 그리고 노동세계와 생활세계가 유기적으로 연결되면서 나타나는 노동자 저항을 포괄하는 세계라고 할 수 있다. 1 울산에 대규모 공장이 건설되자, 20~30대 청년노동자들이 안정적인 일자리를 찾아 현대자동차와 현대중공업을 비롯한 대규모 중화학공장에 입사하였다. 이들은 농업적 환경 속에서 성장한 1세대 노동자들이었다. 구술 노동자들은 공업고등학교를 졸업했거나, 공공직업훈련원 또는 기업 내부의 직업훈련원에서 기능을 익힌 뒤에 공개 채용 되거나 다른 사업장에서 쌓은 경력을 가지고 대규모 공장에 입사했다. 또는 사내 하청업체에서 일정한 경력을 쌓은 뒤 정규직 사원으로 채용되기도 했다. 청년 노동자들은 결혼할 나이가 되었고,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는 위치에 있었으므로, 상대적 고임금과 안정적 고용을 기대하며 대기업 정규직 사원으로의 사회적 지위를 희망하였다. 대기업의 정규직 노동자가 된 그들이 기억하는 노동세계는 ‘저급한 근로 환경과 저임금 속에서 인간다운 삶을 누리는 것이 거부되어’ 온 ‘빼앗기고 짓밟히는 삶’이었다. 주당 60시간 이상의 장시간 노동을 했다. 주야맞교대 근무형태로 인한 야간 노동과 강제적인 잔업과 특근을 일상적으로 경험하였다. 시급제로 임금을 받는 노동자들은 추가노동을 통해 부족한 생계비를 충당하고 있었다. 월 500시간 노동을 하였다는 노동자들의 구술은 장시간 노동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노동조합이 결성되기 이전 작업장의 안전시설은 제대로 마련되어 있지 않았다. 1980년대만 하더라도 현대자동차는 ‘철공소’, ‘똥구루마’, 현대중공업은 ‘조지나 공장’으로 불렸다. 이러한 표현은 자동차 공장과 조선소에서의 노동이 위험하고 고된 노동이었음을 보여준다. 노동자들은 노동세계에서 관료적이면서도 병영적인 통제를 경험하였다. 작업 태도 뿐 아니라 두발과 복장, 작업 시간 이전의 순종적인 태도 등을 기준으로 인사고과를 평가 받고, 그에 따라 차별적으로 적용된 임금인상분과 상여금을 받았던 것이다. 취업규칙을 바탕으로 하는 관료적 통제의 핵심은 학력을 기준으로 한 차별적인 대우에 있었다. 권위주의적인 노동통제 아래 노동자들은 비인간적인 대우를 일상적으로 경험하고 있었고, ‘굴종’ 당한다는 치욕감을 느끼고 있었다. 노동자들의 노동세계의 경험은 노동세계 밖 생활세계로 확장되었다. 대규모 공장 인근에 노동자들의 집단주거지가 형성되어 있었다. 도시가 완성되지 않은 상태에서 이루어진 대규모 고용으로 회사는 사택과 독신자 숙소, 사원임대아파트 등을 건축하여 노동자들에게 제공하였다. 그러나 주택 부족 문제가 해결되지는 않았다. 원주민들은 자신들의 주택을 증·개축하여 노동자들에게 세를 놓았다. 이렇게 대규모 공장 주변에 노동자와 그 가족의 집단주거지가 형성되었던 것이다. 노동자들의 주거는 개인적 생활공간을 보장받기 어려울 정도로 좁았다. 좁은 주거 공간은 노동자들의 생활공간을 문 밖으로 확장시켰다. 독신자 숙소에서 미혼의 청년노동자들은 동료 기숙인들과 같은 방을 공유하였고, 사원임대아파트의 좁은 실내구조는 이웃과의 교류를 더욱 긴밀하게 만들었다. 마당과 화장실을 공유하는 일반 주택의 월세단칸방 생활 역시 반공개적이기는 마찬가지였다. 집단주거지를 중심으로 노동자와 그 가족의 동질적인 처지와 일상이 공유되고 있었다. 주당 60시간이 넘는 장시간 노동은 노동자들의 여가의 부족으로 이어졌다. 장시간의 고된 노동으로 인한 피로는 음주를 통해 일부 해소되었다. 노동자들에게 음주는 노동세계에서 쌓인 육체적·정신적 피로를 푸는 피로회복제였으며, 특별식과 동반된 음주는 영양을 보충하는 것이기도 했다. 음주는 노동세계에서의 억압적 경험을 표출하거나 동료와의 갈등을 해소하는 도구로서의 기능을 하는 동시에 장시간의 노동으로 사회적 교류와 정보로부터 차단된 노동자들이 동료 노동자들과 교류하는 매개체가 되기도 했다. 노동세계에서의 차별적이고 비인간적인 대우, 위험한 작업 환경 등으로 인해 억압과 울분은 쌓이고 있었고, 개별적이고 소극적인 방식으로 표출되고 있었다. 억압적인 노동통제 속에서도 지역의 활동가들과 교류하며 노동문제에 관심을 가지고 활동하던 일부 노동자들은 6월민주화운동을 경험하게 되었다. 이들은 대중적 운동에 자신감을 얻어 노동조합 결성을 시도하였고, 노동자들의 자발적인 참여에 힘입어 노동조합 결성에 성공하였다. 현대엔진에서 시작된 노동조합 결성운동은 이웃한 현대그룹 계열사로 확산되었다. 현대그룹 계열사에서 시작된 노동자 파업은 울산을 넘어 마산·창원지역을 거쳐 전국적으로 확산되었다. 울산 대공장 노동자들의 대투쟁은 노동조합 결성운동으로서의 성격을 가지고 있다. 대투쟁의 경험은 노동자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구술 노동자들은 노동조합 결성운동에 참여하면서 노동조합을 알게 되고, 대규모 집회와 가두시위를 통해 ‘해방감’과 ‘연대감’을 확인하였으며, 회사와의 협상을 통해 과거에 경험해 보지 못한 임금인상과 처우 개선을 경험하면서 노동자로서의 ‘자신감’을 회복할 수 있었다. 이러한 자신감은 대투쟁 이후 전개되는 격렬한 노동운동의 자양분이 되었다.
1987년 노동자대투쟁은 울산의 현대엔진 노동조합 결성으로 시작되었고, 이웃한 현대그룹 계열사 사업장으로 빠르게 확산되었다. 1974년 ‘현대조선사건’을 제외하고는 대규모의 집단적 저항을 벌인 경험이 없었던 노동자들이 대투쟁을 선도한 것이다. 대투쟁이 발생하기 이전 6월민주화운동에 직간접적으로 참여한 일부 노동자들이 대투쟁을 촉발시키는 역할을 하였지만, 대투쟁의 폭발성과 전개과정에서 보여준 노동자들의 자발적 참여는 대투쟁의 원인이 노동세계와 생활세계를 포괄하는 노동자들의 세계 내부에 있음을 짐작케 한다. 작업장 안의 노동세계에서 누적되어 온 불만과 분노가 대투쟁 시기에 표출되어 요구사항으로 집약되었으며, 협상대표기구인 노동조합이 결성되고 난 뒤 노사협상의 주요한 안건으로 제시되었다. 노동자들은 자신들의 요구가 받아들여지지 않자, 집단 시위를 통해 노사협상을 끌어내기도 했다. 1980년대 울산 대공장의 노동자대투쟁의 원인을 규명하기 위해 당시를 경험한 노동자들의 구술자료를 바탕으로 그들의 직접적인 경험한 세계를 재구성하였다. 노동자들의 경험한 세계는 그들이 노동자가 되기까지의 과정과 대공장 노동자가 된 후 작업장에서의 경험을 총괄하는 노동세계, 작업장 밖의 생활세계, 그리고 노동세계와 생활세계가 유기적으로 연결되면서 나타나는 노동자 저항을 포괄하는 세계라고 할 수 있다. 1 울산에 대규모 공장이 건설되자, 20~30대 청년노동자들이 안정적인 일자리를 찾아 현대자동차와 현대중공업을 비롯한 대규모 중화학공장에 입사하였다. 이들은 농업적 환경 속에서 성장한 1세대 노동자들이었다. 구술 노동자들은 공업고등학교를 졸업했거나, 공공직업훈련원 또는 기업 내부의 직업훈련원에서 기능을 익힌 뒤에 공개 채용 되거나 다른 사업장에서 쌓은 경력을 가지고 대규모 공장에 입사했다. 또는 사내 하청업체에서 일정한 경력을 쌓은 뒤 정규직 사원으로 채용되기도 했다. 청년 노동자들은 결혼할 나이가 되었고,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는 위치에 있었으므로, 상대적 고임금과 안정적 고용을 기대하며 대기업 정규직 사원으로의 사회적 지위를 희망하였다. 대기업의 정규직 노동자가 된 그들이 기억하는 노동세계는 ‘저급한 근로 환경과 저임금 속에서 인간다운 삶을 누리는 것이 거부되어’ 온 ‘빼앗기고 짓밟히는 삶’이었다. 주당 60시간 이상의 장시간 노동을 했다. 주야맞교대 근무형태로 인한 야간 노동과 강제적인 잔업과 특근을 일상적으로 경험하였다. 시급제로 임금을 받는 노동자들은 추가노동을 통해 부족한 생계비를 충당하고 있었다. 월 500시간 노동을 하였다는 노동자들의 구술은 장시간 노동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노동조합이 결성되기 이전 작업장의 안전시설은 제대로 마련되어 있지 않았다. 1980년대만 하더라도 현대자동차는 ‘철공소’, ‘똥구루마’, 현대중공업은 ‘조지나 공장’으로 불렸다. 이러한 표현은 자동차 공장과 조선소에서의 노동이 위험하고 고된 노동이었음을 보여준다. 노동자들은 노동세계에서 관료적이면서도 병영적인 통제를 경험하였다. 작업 태도 뿐 아니라 두발과 복장, 작업 시간 이전의 순종적인 태도 등을 기준으로 인사고과를 평가 받고, 그에 따라 차별적으로 적용된 임금인상분과 상여금을 받았던 것이다. 취업규칙을 바탕으로 하는 관료적 통제의 핵심은 학력을 기준으로 한 차별적인 대우에 있었다. 권위주의적인 노동통제 아래 노동자들은 비인간적인 대우를 일상적으로 경험하고 있었고, ‘굴종’ 당한다는 치욕감을 느끼고 있었다. 노동자들의 노동세계의 경험은 노동세계 밖 생활세계로 확장되었다. 대규모 공장 인근에 노동자들의 집단주거지가 형성되어 있었다. 도시가 완성되지 않은 상태에서 이루어진 대규모 고용으로 회사는 사택과 독신자 숙소, 사원임대아파트 등을 건축하여 노동자들에게 제공하였다. 그러나 주택 부족 문제가 해결되지는 않았다. 원주민들은 자신들의 주택을 증·개축하여 노동자들에게 세를 놓았다. 이렇게 대규모 공장 주변에 노동자와 그 가족의 집단주거지가 형성되었던 것이다. 노동자들의 주거는 개인적 생활공간을 보장받기 어려울 정도로 좁았다. 좁은 주거 공간은 노동자들의 생활공간을 문 밖으로 확장시켰다. 독신자 숙소에서 미혼의 청년노동자들은 동료 기숙인들과 같은 방을 공유하였고, 사원임대아파트의 좁은 실내구조는 이웃과의 교류를 더욱 긴밀하게 만들었다. 마당과 화장실을 공유하는 일반 주택의 월세단칸방 생활 역시 반공개적이기는 마찬가지였다. 집단주거지를 중심으로 노동자와 그 가족의 동질적인 처지와 일상이 공유되고 있었다. 주당 60시간이 넘는 장시간 노동은 노동자들의 여가의 부족으로 이어졌다. 장시간의 고된 노동으로 인한 피로는 음주를 통해 일부 해소되었다. 노동자들에게 음주는 노동세계에서 쌓인 육체적·정신적 피로를 푸는 피로회복제였으며, 특별식과 동반된 음주는 영양을 보충하는 것이기도 했다. 음주는 노동세계에서의 억압적 경험을 표출하거나 동료와의 갈등을 해소하는 도구로서의 기능을 하는 동시에 장시간의 노동으로 사회적 교류와 정보로부터 차단된 노동자들이 동료 노동자들과 교류하는 매개체가 되기도 했다. 노동세계에서의 차별적이고 비인간적인 대우, 위험한 작업 환경 등으로 인해 억압과 울분은 쌓이고 있었고, 개별적이고 소극적인 방식으로 표출되고 있었다. 억압적인 노동통제 속에서도 지역의 활동가들과 교류하며 노동문제에 관심을 가지고 활동하던 일부 노동자들은 6월민주화운동을 경험하게 되었다. 이들은 대중적 운동에 자신감을 얻어 노동조합 결성을 시도하였고, 노동자들의 자발적인 참여에 힘입어 노동조합 결성에 성공하였다. 현대엔진에서 시작된 노동조합 결성운동은 이웃한 현대그룹 계열사로 확산되었다. 현대그룹 계열사에서 시작된 노동자 파업은 울산을 넘어 마산·창원지역을 거쳐 전국적으로 확산되었다. 울산 대공장 노동자들의 대투쟁은 노동조합 결성운동으로서의 성격을 가지고 있다. 대투쟁의 경험은 노동자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구술 노동자들은 노동조합 결성운동에 참여하면서 노동조합을 알게 되고, 대규모 집회와 가두시위를 통해 ‘해방감’과 ‘연대감’을 확인하였으며, 회사와의 협상을 통해 과거에 경험해 보지 못한 임금인상과 처우 개선을 경험하면서 노동자로서의 ‘자신감’을 회복할 수 있었다. 이러한 자신감은 대투쟁 이후 전개되는 격렬한 노동운동의 자양분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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