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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고는 박정희 정부 시기 기술인력정책이 노동문제이자 노동정책으로 추진되는 과정과 이에 대한 숙련노동자들의 인식 및 대응을 분석한 연구이다.
이 연구에서는 먼저, 1950년대 직업교육 및 훈련의 양상과 시대적 한계를 분석했다. 1950년대 직업교육과 직업훈련 사업은 한국전쟁 후 경제 복구와 재건이라는 목적을 위해 추진되었다. UNKRA와 문교부는 직업교육을 강화해 일반교육과 균형을 맞추고자 했다. 1950년대 직업교육과 직업훈련에 대한 구상은 단일하지 않았다. 당시 한국 경제에 대한 진단에 맞추어 장기 기술인력양성이 필요한가, 아니면 당장의 생산 현장에서 기계를 도입하고 운전할 단기 기술인력양성이 우선인가를 둘러싸고 쟁점이 형성되어 있었다. FOA는 미국 켄터키 주에서 실시한 거점직업학교 사업 경험을 한국에 도입해 지역산업에 필요한 지역 실업학교 교사 재훈련, 노동자 재훈련을 실시하는 거점시범직업학교를 한국의 유망한 공업고교에 설치하려 했다.
UNKRA와 FOA의 이 같은 판단은 당시 시대적 상황을 고려한 결정이었지만 학교를 통한 기술인력양성 시도는 한계가 분명했다. 우선 ‘엘리트 공고’에 거점시범직업학교를 설치했다는 점에서 입소생들의 학력상승 열망을 부추겼다. 또한 산업발전과 고용의 확대 없이는 직업교육과 훈련이 이루어져도 기술인력이 활용될 수 없었다. 1950년대 학교를 통한 기술인력양성 시도의 한계를 경험한 박정희 정부는 직업교육이 아닌 직업훈련을 확산시킬 계획을 수립했다. 정규학교를 통한 기술인력양성의 비효율성과 실패 경험이 박정희 정부의 기술인력정책에 영향을 주었다.
다음으로 박정희 정부 시기, 기술인력정책의 일환으로 추진된 인력개발 노동정책과 노동청의 역할을 파악했다. 기술력이 기술발전의 중요한 요소이자 노동자의 성취와 계층 상승의 매개로 자리 잡기 시작한 것은 박정희 정부시기에 들어서부터였다. 인력개발의 중요성을 적극적으로 확산시킨 중요한 행정부처 중 한 곳이 노동청이었다. 1960년대에는 문교부가 아니라 노동청이 비정규교육기관인 훈련소를 통해 숙련 노동자를 양성시킨다는 방식이 채택되었다. 이 과정에서 기술인력정책은 교육정책에서 노동정책으로 성격이 바뀌었다.
인력개발 노동정책을 바탕으로 노동청은 기능을 우대하는 사회적 분위기를 조성하려 했다. 노동자들의 ...
본고는 박정희 정부 시기 기술인력정책이 노동문제이자 노동정책으로 추진되는 과정과 이에 대한 숙련노동자들의 인식 및 대응을 분석한 연구이다.
이 연구에서는 먼저, 1950년대 직업교육 및 훈련의 양상과 시대적 한계를 분석했다. 1950년대 직업교육과 직업훈련 사업은 한국전쟁 후 경제 복구와 재건이라는 목적을 위해 추진되었다. UNKRA와 문교부는 직업교육을 강화해 일반교육과 균형을 맞추고자 했다. 1950년대 직업교육과 직업훈련에 대한 구상은 단일하지 않았다. 당시 한국 경제에 대한 진단에 맞추어 장기 기술인력양성이 필요한가, 아니면 당장의 생산 현장에서 기계를 도입하고 운전할 단기 기술인력양성이 우선인가를 둘러싸고 쟁점이 형성되어 있었다. FOA는 미국 켄터키 주에서 실시한 거점직업학교 사업 경험을 한국에 도입해 지역산업에 필요한 지역 실업학교 교사 재훈련, 노동자 재훈련을 실시하는 거점시범직업학교를 한국의 유망한 공업고교에 설치하려 했다.
UNKRA와 FOA의 이 같은 판단은 당시 시대적 상황을 고려한 결정이었지만 학교를 통한 기술인력양성 시도는 한계가 분명했다. 우선 ‘엘리트 공고’에 거점시범직업학교를 설치했다는 점에서 입소생들의 학력상승 열망을 부추겼다. 또한 산업발전과 고용의 확대 없이는 직업교육과 훈련이 이루어져도 기술인력이 활용될 수 없었다. 1950년대 학교를 통한 기술인력양성 시도의 한계를 경험한 박정희 정부는 직업교육이 아닌 직업훈련을 확산시킬 계획을 수립했다. 정규학교를 통한 기술인력양성의 비효율성과 실패 경험이 박정희 정부의 기술인력정책에 영향을 주었다.
다음으로 박정희 정부 시기, 기술인력정책의 일환으로 추진된 인력개발 노동정책과 노동청의 역할을 파악했다. 기술력이 기술발전의 중요한 요소이자 노동자의 성취와 계층 상승의 매개로 자리 잡기 시작한 것은 박정희 정부시기에 들어서부터였다. 인력개발의 중요성을 적극적으로 확산시킨 중요한 행정부처 중 한 곳이 노동청이었다. 1960년대에는 문교부가 아니라 노동청이 비정규교육기관인 훈련소를 통해 숙련 노동자를 양성시킨다는 방식이 채택되었다. 이 과정에서 기술인력정책은 교육정책에서 노동정책으로 성격이 바뀌었다.
인력개발 노동정책을 바탕으로 노동청은 기능을 우대하는 사회적 분위기를 조성하려 했다. 노동자들의 집단행동은 억압했지만 노동정책의 목표를 노동자 개개인이 기술력을 높여 계층상승을 실현하도록 유도했다. 노동청의 이 같은 목표는 박정희 대통령이 ‘근로자’들에게 제시한 목표이기도 했다.
노동청은 ‘기업 설득’을 통해 기능우대사회를 만들려 했지만 구체적·현실적 방안을 마련하지는 못했다. 기업을 강제할 방안을 갖지 못한 노동청은 계속 기업의 훈련 ‘참여’ 그 자체에만 골몰했다. 결과적으로 노동청은 ‘기업 설득’에만 관심을 가졌고, 기업의 훈련 ‘악용’을 감독한다거나 훈련 이후 숙련노동자들을 우대할 방안을 추진해야 한다는 노동청 본연의 역할은 방기했다. 성장을 위한 인력개발 노동정책이 가진 한계를 그대로 드러낸 셈이었다.
노동자들의 집단적 협조가 없는 노동청의 ‘기업 설득’이 효과를 내기는 어려웠다. 사내 직업훈련 확대가 쉽사리 이루어지지 않자 직업훈련소 위주의 ‘양성’사업은 공고 위주 사업으로 전환되었다. 학교 위주의 훈련 방식이 확산되자 기술자․기능공 사이뿐만 아니라 기능공 내부의 학력별 위계도 강화되었다. 박정희 정부는 기업이 기능공 활용에 무임승차 하고 있다고 비판했지만 이러한 구조를 만든 것은 학교를 통한 기능공 양성 방식을 강화한 정부였고 숙련노동자 우대정책을 강력하게 추진하지 못한 노동청이었다.
노동청이 추진한 기능우대사업은 기술인력 내부의 학력차별 금지정책이 아닌 학력 보완의 기회를 제공하는 것이었다. 높은 기능 수준을 보여준 기능공들은 기능경기대회에 출전했고 입상 시 정부로부터 진학 기회와 상금을 수여 받고 대기업과 학교에 취직할 수 있었다. 국가기술자격제도를 통해 기능계의 최고 수준인 기능장이 박사, 기술사와 동등한 사회적 지위를 누리도록 기술계와 기능계의 자격제도를 연결시켰다. 그러나 기술자격제도의 응시를 위해서도 학력이 필요했다. 대졸자들 대상으로 응시하도록 구성된 기술사와 고졸 기능공이 최고 수준의 기능장이 된다 해도 학력에 따른 응시 제한이 부여한 차별구조 아래 동등한 사회적 지위를 누리는 것은 불가능했다. 기능경기제도도 마찬가지였다. 기능경기대회에서 입상한 기능공들에게 주어진 가장 큰 혜택은 대학에 진학할 장학금을 수여 받고 대학 진학의 특혜를 받는 것이었다. 그 결과 우수한 우수 기능공부터 ‘탈 기능공’을 시도했다. 우수 기능공들이 이런 인식을 가지고 있는 이상 기능우대사회와 기능장이 기술사와 동등한 사회적 지위를 갖는 기능우대사회 정착은 불가능했다.
더구나 1980년대 기능공양성정책의 변화와 기능우대정책을 전두환 정권이 축소하자 노동시장의 학력중심주의는 보다 강화되었다. 사실 기능우대사회는 일부 우수 기능공들에게 혜택을 제공하는 방식과 같은 국가의 강제적 정착 시도를 통해 형성되는 것이 아니다. 노동자의 숙련과 기술을 인정하는 사회적 합의와 노동자 집단의 사회적 지위가 향상해야 가능했지만 박정희 정부는 조급한 국가 주도 정책 추진을 통해서만 이를 실현하려 했다.
이러한 가운데 저임금, 불리한 작업조건, 자기발전기회의 제약과 같은 어려운 여건을 바꾸어 내며 노동자 집단 전체의 사회적 지위를 높인 것은 숙련노동자들이었다. 개별 주체들의 처지와 조건에 따라 각각의 대응도 상이했다. 이들은 자신의 성취동기와 인정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해 숙련 형성과 기능 개발에 매진했다. 그 결과 개별 숙련노동자들 중 일부는 계층상승을 실현할 수 있었다. 1980년 이후 기능우대정책의 축소와 기능공양성정책의 변화를 겪은 후 노동자 집단의 사회적 지위 향상을 실현하기 위한 노동운동에 나선 것도 이들, 숙련노동자들이었다.
한편 박정희 정부의 기술인력정책에서 여성은 배제된 주체였다. 여성은 기능우대사회의 구성원으로 인정받지 못했지만 여성 노동자들은 스스로 숙련을 형성하면서 노동자로서 정체성을 형성해 나갔다. 여성 숙련노동자들도 남성 숙련노동자들과 마찬가지로 자신이 체화한 숙련과 기술력을 통해 인정받기를 원했고 자기 기술력에 대한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숙련을 통해 기술력을 갖춘 여성 숙련노동자들의 자부심이 지속될 수 없었다. 숙련을 통한 계층상승과 사회적 인정을 받을 수 없었던 여성 숙련노동자들은 남성 숙련노동자들에 앞서 노동운동에 참여했다. 이들은 노조 활동을 통해 노동 현장에서는 취할 수 없었던 노동에 대한 긍지와 타인의 인정, 사회적 영향력을 되찾았다.
이상의 내용을 통해 본 논문에서 도출한 결론과 의의는 다음과 같다.
첫째, 1970년대에 이르러 한국 사회 내부에 숙련과 기술에 대한 사회적 인정이 자리 잡게 되었다. 또한 자본가로의 계층 성장도 가능하다는 사회적 합의가 형성되었다는 점을 밝혔다. 한국현대사 중 1970년대는 자본주의적 근대화에 대한 사회 구성원들의 전면적 합의가 이루어진 시기였다. 노동정책의 일환으로 추진된 기술인력정책은 정책의 성격 상 강제성과 자발성을 모두 가지고 있었다. 국가는 노동자의 역할을 개인적 기능 연마에 제한하면서도 기능을 기술로 개발하면 노동자가 자본가로 성장할 수 있다고 선전했다. 단순히 선전에 그치지 않고 우수 기능공들에게는 각종 혜택을 제공했다. 이러한 과정이 있었기에 박정희 정부는 자본주의적 발전과 성장이라는 국가목표에 청소년, 노동자를 비롯해, 국민을 동원할 수 있었다.
둘째, 인력개발을 표방한 노동정책의 성격과 직업훈련이 노동문제화 되는 과정을 밝혔다. 지금까지 노동정책 연구는 단결권과 단체행동권의 변화에 주목해 노동청이라는 주체에는 주목하지 못했다. 본 연구를 통해 제한적이나마 노동정책 수립에 독자성을 갖기 시작한 노동행정부처 초기의 실상과 그것의 구조적·시대적 한계를 파악할 수 있었다. 초기 노동행정부처가 고용정책과 기능우대사회 형성이라는 목표 아래 여러 제도를 추진했다는 점을 밝혔다. 아울러 ‘기업 설득’이라는 방법을 통해 노동정책의 목표를 실현하려 한 박정희 정부 노동정책의 구조적 한계를 규명하였다.
셋째, 박정희 정부와 노동청이 추구한 기능우대정책은 학력중심사회를 강화시키는 것이었고 경쟁과 선별, 포섭과 배제를 통해 정책이 추진됐다는 점을 밝혔다. 박정희 정부의 기능우대정책은 기능 자체에 자부심을 가지도록 만드는 정책이 아니라 학력을 상승시킬 기회를 부여해 오히려 ‘탈기능공’ 화 시키는 정책에 불과했다. 한국의 노동자들이 기술 향상보다 학력 상승을 선택하고 자녀의 교육에 매진하는 것은 이러한 과정을 거쳐서이다.
넷째, 박정희 정부의 기능우대정책은 당대 비진학 청소년들로 하여금 기능 습득에 나서도록 만들었고 일부 비진학 청소년들에게 이러한 정책은 기회를 제공했다. 이를 통해 박정희 정부의 통치가 단지 억압과 배제의 차원만이 아니라 포섭과 회유, 경쟁, 능력중시와 같은 근대적 통치 기법과 문화를 활용하여 이루어졌다는 점을 확인할 수 있었다.
다섯째, 억압적 노동정책뿐만 아니라 ‘포섭·회유적’ 노동정책도 성별로 분리된 채 추진되었고, 여기에 여성은 소외되었다는 점을 밝혔다. 그 결과 개인적 계층 상승의 경로를 차단당한 여성 숙련노동자들은 남성 숙련노동자들보다 앞서 1970년대 노동운동에 참여했다. 여성 숙련노동자들의 계층 성장은 남성에 비해 더디게 진행되었지만 노동자 집단의 사회적 지위 향상을 위해 집단행동에 나선 것은 이들, 여성 숙련노동자들이 더 빨랐다. 이 과정은 박정희 정부의 통치가 단일하지 않은 만큼 이 시대를 살았던 역사적 주체들의 대응도 구조적 조건과 상황에 따라 다양했다는 점을 알려준다.
기능·기술이 우수한 노동자 개개인의 계층상승을 보장하는 정책은 제한적 노동정책에 지나지 않는다. 노동현장의 변화에는 ‘기업관리’가 필요한데 이것은 노동부처의 행정력과 노동자들의 집단적 대응에 의해서만 가능하다. 이 중 노동자들 집단의 대응과 권리가 우선 보장되어야만 노동부의 위상 강화와 행정부처 내의 입지도 확대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한국의 기술인력정책과 노동정책은 박정희 정부 시기 이후로 진전하지 못하고 있다.
本論文的研究目的在於分析朴正熙政府時期作為勞動問題即勞動政策的技術人力政策之推動過程,以及熟練工人們對此政策的認知與因應。
本研究首先分析了1950年代職業教育和訓練的樣貌與時代的限制。1950年代職業教育和職業訓練工作的推動主要是為了韓國戰爭以後經濟的復甦和重建。UNKRA和文教部強化職業教育,想要與一般教育取得平衡。1950年代對於職業教育和職業訓練的構想並非是單線性的。當時需要的是配合韓國經濟狀況...
本論文的研究目的在於分析朴正熙政府時期作為勞動問題即勞動政策的技術人力政策之推動過程,以及熟練工人們對此政策的認知與因應。
本研究首先分析了1950年代職業教育和訓練的樣貌與時代的限制。1950年代職業教育和職業訓練工作的推動主要是為了韓國戰爭以後經濟的復甦和重建。UNKRA和文教部強化職業教育,想要與一般教育取得平衡。1950年代對於職業教育和職業訓練的構想並非是單線性的。當時需要的是配合韓國經濟狀況的長期技術人力養成?還是要優先培育在生產現場引進及操作機械的短期技術人力?針對這個問題,引起了爭議。FOA將美國肯塔基州實施的據點職業學校事業經驗引進韓國,想要在韓國的工業高等教育設立據點示範職業學校,對區域產業需要的地區實業學校實施教師再訓練、勞工再訓練。UNKRA與FOA這種判斷雖然是考慮當時時代狀況的決定,但通過學校來培育技術人力的嘗試,很明顯是有限制的。
首先,在「菁英工業高等學校」上設立據點示範學校,挑起了入學者提高學歷的渴望。另外,沒有擴大產業發展和僱用,即使完成職業教育和訓練,技術人力也無法被活用。朴正熙政府經驗過1950年代試圖通過學校來培育技術人力的限制,於是建立了擴大職業訓練的計畫,而不是擴大職業教育。通過正規學校教育來培育技術人力的低效率和失敗經驗,對朴正熙政府的技術人力政策產生了影響。
其次,朴正熙政府時期,掌握了作為技術人力政策之一環所推動的人力開發勞動政策和勞動廳的角色。技術力開始成為技術發展的重要因素,同時也成為勞工的成就和階層上升的媒介,就是從朴正熙政府時期開始的。政府部門中積極擴大人力開發重要性的是勞動廳。1960年代選擇了不是由文教部,而是由勞動廳通過非正規教育機關即訓練所來培育熟練工人的方式。在此過程中,技術人力政策的性質由教育政策改為勞動政策。
以人力開發勞動政策為基礎,勞動廳想要造成優待技能的社會氛圍。雖然壓抑了勞工們的集團行動,仍以勸導勞工提高個人技術能力實現階層上升,作為勞動政策的目標。勞動廳的這個目標同時也是朴正熙大統領向「勞工」們提示的目標。
然而勞動廳雖然通過「說服企業」想要創造優待技能的社會,但並未準備具體的、現實的方案。勞動廳沒有強制企業的方案,只是繼續沈浸在企業的訓練「參與」裡。結果勞動廳只將注意力放在「說服企業」,卻未盡到本來應該要監督企業的訓練「惡用」,或推動訓練完成後熟練工人優待方案的本份。這也顯露出為了成長而設計的人力開發勞動政策的限制。
沒有勞工集體協助,勞動廳的「說服企業」很難達到效果。公司內部職業訓練難以擴大,以職業訓練所為主的「養成」事業也轉換成為以工業高等學校為主的事業。而以學校為主的訓練方式一擴大,不僅是技術者、技能工之間,連技能工內部的學歷位階也被強化。朴正熙政府雖然批判企業規避技能工的活用,但就是因為政府強化通過學校培育技術工的方式,另外勞動廳也未強力推動熟練工人的優待政策,才會形成這種結構。
勞動廳推動的技能優待事業並非禁止技術人力內部的學歷差別待遇,而是提供補強學歷的機會。展現高度技能水平的技能工們參加技能競技比賽得獎時,可以得到政府提供的進修機會和獎金,進入大企業和學校工作。通過國家技術資格制度,技能界最高水準的技能長,可以享有和博士、技術士同等的社會地位,將技術界和技能界的資格制度做了聯結。但是要考技術資格制度考試需要學歷,大學畢業者才能報考技術士,因此即使成為高中畢業技能工最高水準的技能長,在具有學歷應考限制的歧視結構之下,要享有同等的社會地位是不可能的。技能競技制度也是一樣。在技能競技比賽中得獎的技能工所能得到最大的好處是拿到進大學的獎學金,獲得進大學就讀的優惠,結果造成了優秀的技能工試圖「脫離技能工」。優秀的技能工既然有了這種認知,技能優待社會和技能長享有和技術士同樣社會地位的技能優待社會就不可能會穩定。
尤其1980年代技能工養成政策的變化和全斗煥政權縮減了技術優待政策,更強化了勞動市場的學歷中心主義。事實上技能優待社會不是通過像提供部分優秀技能工優惠這種國家強制性的嘗試就能形成的,而是必須要先形成認同勞工的熟練和技術的社會協議,並且認同勞工集團的社會地位才有可能,但朴正熙政府卻想要通過推動急躁的國家主導政策加以實現。
改變這種低工資、不利的職業條件、自我發展機會的制約等困難的條件,同時提高勞工集團整體社會地位的,正是熟練工人們。隨著個別主體的立場和條件,反應也各不相同。他們為了滿足自己的成就動機和人情慾望,致力於熟練程度的達成和技能的開發,結果一部分的熟練工人得以實現階層的上升。經歷過1980年以後技能優待政策的縮減和技能工養成政策的變化,為實現勞工集團社會地位的提升而投身勞工運動的也是他們-熟練工人們。
另一方面,在朴正熙政府的技術人力政策上,女性是被排除在外的。女性雖然無法被視為技能優待社會的成員,但女性勞工不僅自行達成熟練程度,同時還逐漸形成了作為勞工的身分認同。女性熟練工人們也和男性熟練工人們一樣,希望通過自成的熟練和本身的技術能力得到肯定,為自己的技術能力感到驕傲。然而通過熟練而擁有技術能力的女性熟練工人的驕傲卻無法持續。於是無法通過熟練取得階層上升和社會認同的女性熟練工人搶先男性熟練工人參與了勞工運動。她們通過勞動組合活動,重新找回了無法在勞動現場得到的對勞動的自豪感、他人的肯定和社會的影響力。
通過以上的內容,本論文得到的結論和意義如下:
第一,本論文闡明,到了1970年代,韓國社會內部對於熟練和技術的社會認同得以站穩腳步,另外社會上對於成為資本家的階層成長可能性也達成了合議。韓國現代史中,1970年代是社會成員們對資本主義近代化達成全面合議的時期。作為勞動政策之一環所推動的技術人力政策,政策的性格上同時帶有強制性和自發性。對於勞工的角色,國家一面限制個人技能的磨練,同時又宣傳若將技能開發為技術,勞工也有可能成為資本家。而且不只單純地宣傳,還提供了優秀技能工各種實惠。由於有這樣的過程,朴正熙政府才能在所謂資本主義發展和成長的國家目標上,動員青少年、勞工和國民。
第二,釐清標榜人力開發的勞動政策的性格和職業訓練成為勞動問題的過程。迄今有關勞動政策的研究大多關注團結權和團體行動權的變化,並未關注勞動廳這個主題。通過本研究,儘管只是部分,得以掌握了在勞動政策的樹立上剛開始擁有獨立性的勞動行政部門初期的實際樣貌,以及其結構上和時代的限制。另外也闡明初期勞動行政部門在僱用政策和形成技能優待社會的目標之下推動了許多制度,同時也清楚知道朴正熙政府想要通過「說服企業」的方法實現勞動政策在結構上的限制。
第三,朴正熙政府和勞動廳追求的技能優待政策想要強化學歷中心社會,並通過競爭、選拔、吸收和排除來推動政策。朴正熙政府的技能優待政策並不是讓勞工對技能本身感到驕傲,而是給予晉升學歷的機會,不過是一種反而造成「脫離技能工」的政策。與提高技術相比,韓國的勞工們之所以選擇學歷的上升,並且致力於子女的教育,正是因為經歷這種過程所導致的。
第四,朴正熙政府的技能優待政策讓當時未升學的青少年們得以學到技術,並且為部分未升學的青少年提供了機會。因此,我們可以知道,朴正熙政府的統治不單只是壓抑和排除的層次而已,同時還利用了吸收、懷柔、競爭和重視能力等近代統治手法和文化。
第五,不只有壓抑的勞動政策,「吸收、懷柔的」勞動政策的推動有性別之分,在這裡女性是被排除在外的。結果個人階層上升通路被阻斷的女性熟練工人們搶先男性熟練工人,在1970年代參與了勞工運動。女性熟練工人的階層成長雖然比男性緩慢,但為了提高勞工集團的社會地位,她們更快出面參與集團行動。此過程也顯示出朴正熙政府的統治是不一致的,而生活在當時的歷史主體們也隨著結構條件和情況,做出不同的因應。
保障技能、技術優秀的勞工個人階層上升的政策不過是一種有限制性的勞工政策罷了。勞動現場的變化需要「企業管理」,這需要靠勞動部門的行政能力和勞工的集團因應才有可能。其中唯有勞工集團的因應和權利優先得到保障,才能提升勞動部的位階和擴大行政部門內的基礎。也因此,韓國的技術人力政策和勞動政策在朴正熙政府時期以後,一直都沒有進展。本稿は、朴正熙政府期における技術人力政策が労働問題に対応し、労働政策として推進される過程、そしてこれに対する熟練労働者たちの認識および対応を分析した研究である。
本研究においては、まず1950年代の職業教育および職業訓練の様相と時代的限界を分析した。1950年代職業教育・職業訓練事業は、朝鮮戦争後の経済の復旧と再建という目的のために推進された。UNKRA・文教部は職業教育を強化して一般教育とのバランスをとろうとしたが、1950年代の職業教育・職業訓練構想は単一のものではなかった。当時の韓国経済に対する診断に基づいて長期的に技術人力を養成していくことが必要なのか、それとも当面生産現場に機械を導入して運転することができるような人材を養成する、短期的な技術人力養成が必要なのかという問題をめぐって、争点が形成されたのである。FOAは、米国ケンタッキー州で実施された拠点職業学校事業の経験を韓国に導入し、地域産業に必要な地域実業学校教師の再訓練、労働者の再訓練を実施する拠点モデル職業学校を韓国の有望工業高校に設置することを試みた。
UNKRAとFOAのこのような判断は当時の時代的状況を考慮した決定であったが、学校を通じた技術人力養成の試みに限界があることは明らかであった。まず、拠点モデル職業学校が「エリート工業高校」に設置されたことによって、入所生たちの学歴上昇の熱望があおられた。また、職業教育・職業訓練が実施されたところで、産業発展と雇用の拡大なくしては技術人力の活用はありえなかった。1950年代の学校を通じた技術人力養成の試みの限界を認識した朴正熙政府は、職業教育ではなく職業訓練を拡散する計画を立てた。正規の学校を通じた技術人力養成に失敗してその非効率性を認識したことが、朴正熙政府の技術人力政策に影響を与えたのであった。
次に、朴正熙政府期において、技術人力政策の一環として推進された人力開発労働政策と労働庁の役割について把握した。技術力は技術発展の重要な要素であり、労働者の成果と階層上昇の媒介であると位置づけられ始めたのは、朴正熙政府期に入ってからであった。人力開発の重要性を積極的に拡散させた重要な行政部処のひとつは労働庁であった。1960年代には文教部ではなく労働庁が、非正規教育機関である訓練所を通じて熟練労働者を養成するという方式が採用された。この過程において、技術人力政策は教育政策から労働政策へとその性格を変えることとなった。
労働庁は人力開発労働政策に基づき、技能を優待する社会的雰囲気を造成しようとした。そして、労働者たちの集団行動は抑圧したが、労働政策の目標を労働者個々人が技術力を高めることに置き、階層上昇を実現するように誘導した。労働庁のこのような目標は、朴正熙大統領が「勤労者」たちに提示した目標でもあった。
しかし、労働庁は「企業の説得」を通じて技能優待社会を作り上げようとはしたが、具体的・現実的方案を準備することはできなかった。企業に強制する方案を持っていなかった労働庁が没頭したのは、企業の訓練「参加」それ自体であった。結果として、労働庁は「企業の説得」にのみ関心を寄せ、企業の訓練「悪用」の監督や、訓練後の熟練労働者優待策の推進という労働庁本来の役割は放棄した。成長のための人力開発労働政策が持つ限界がそのまま明らかになったと評価することができよう。
労働者たちの集団的協調なくして、労働庁の「企業の説得」が効果を発揮することは困難であった。社内職業訓練の拡大が容易に行われなかったため、職業訓練所を基盤とした「養成」事業は工業高校を基盤とした事業に転換された。しかし、学校を基盤とした訓練方式が拡散すると、技術者・技能工間だけでなく、技能工内部の学歴別位階も強化された。朴正熙政府は企業が技能工活用においてただ乗りしていると批判したが、このような構造を作り上げたのは学校を通じた技能工養成方式を強化した政府であり、熟練労働者優待政策を強力に推進することができなかった労働庁であった。
労働庁が推進した技能優待事業は、技術人力内部の学歴差別を禁止する政策ではなく、学歴を補完する機会を提供するものであった。高い技能水準を示す技能工たちは、技能競技大会に出場して入賞した場合には政府から進学機会と賞金を与えられ、大企業や学校に就職することができた。また、国家技術資格制度を通じ、技能系の最高水準である技能長が博士や技術士と同等の社会的地位を享有することができるよう、技術系と技能系の資格制度が結びつけられた。しかし、技術資格制度に受験するためにも学歴が必要であった。高卒技能工が最高水準の技能長になったとしても、学歴による受験制限がある差別構造の下では、大卒者を対象に構想された技術士と同等の社会的地位を享有することは不可能であった。技能競技制度も同様であった。技能競技大会で入賞した技能工たちに与えられた最大の特典は、大学に進学できる奨学金を受けて大学に進学することであった。その結果、優秀な技能工から「脱技能工」を試みた。優秀技能工がこのような認識を持っている以上、技能長が技術士と同等の社会的地位を享受する技能優待社会の実現は不可能であった。
さらに、1980年代に全斗煥政府が技能工養成政策を変更して技能優待政策を縮小すると、労働市場の学歴中心主義はより一層強化された。実際のところ技能優待社会とは、一部の優秀技能工たちに特典を提供するといった、国家の強引な政策を通じて形成されるものではなかった。労働者の熟練と技術を認める社会的合意がなされなければ、そして労働者集団の社会的地位が向上しなければ実現不可能なものだったのである。しかし、朴正熙政府は早急な国家主導政策を推進することによってのみこれを実現しようとした。
このような状況において、低賃金、不利な作業条件、自己発展機会の制約といった困難な環境を作り変え、労働者集団全体の社会的地位を高めたのは、熟練労働者たちであった。個別主体の置かれた立場や条件によって、その対応もさまざまであった。彼らは自らの達成感や承認欲求を満たすため、技能の熟練と開発にまい進した。その結果、個別熟練労働者の一部は階層上昇を実現することができた。1980年以後、技能優待政策の縮小と技能工養成政策の変化を経た後、労働者集団の社会的地位向上を実現するための労働運動に立ち上がったのも彼ら熟練労働者であった。
一方、朴正熙政府の技術人力政策において、女性は排除された主体であった。女性は技能優待社会の構成員として認められていなかったが、女性労働者たちは自ら熟練を果たし、労働者としてのアイデンティティを形成していった。女性熟練労働者たちも、男性熟練労働者たちと同様に自ら熟練して身につけた技術力を誇りとし、これによって承認を受けることを望んでいた。しかし、熟練によって技術力を備えた女性熟練労働者たちの誇りが長く続くことはなかった。熟練による階層上昇と社会的承認を果たすことができなかった女性熟練労働者たちは、男性熟練労働者たちに先立って労働運動に参加した。彼女たちは、労働組合活動を通じて労働現場では得られなかった労働に対する誇りと他者からの承認、社会的影響力を手に入れた。
以上の内容を通じて本論文で考察した結論と意義は次のとおりである。
第一に、1970年代に至り、熟練と技術に対する社会的承認が韓国社会内部に定着し始めた。また、資本家への階層上昇も可能であるという社会的合意が形成されたという点を明らかにした。韓国現代史において1970年代とは、資本主義的近代化に対する社会構成員の全面的な合意が形成された時期である。労働政策の一環として推進された技術人力政策は、政策の性格上強制性と自発性の両方を備えていた。国家は労働者の役割を個人的技能の練磨に制限しつつも、技能を技術に開発すれば労働者が資本家に成長することができると宣伝した。また、単に宣伝しただけでなく、優秀技能工たちには各種の特典を与えた。このような過程があったことから、朴正熙政府は資本主義的な発展と成長という国家目標に、青少年や労働者を始めとする国民を動員することができたのであった。
第二に、人力開発を標榜した労働政策の性格と職業訓練が労働問題化する過程を明らかにした。従来の労働政策研究は、団結権と団体行動権の変化に注目し、労働庁という主体には注目してこなかった。本研究を通じて、労働政策の樹立に独自性を備え始めた労働行政部処初期の実相とその構造的・時代的限界を、限定的にではあるが把握することができた。また、初期労働行政部処が雇用政策を展開し、技能優待社会の形成という目標の下にさまざまな制度を推進したという点を明らかにした。さらに、「企業の説得」という方法を通じて労働政策の目標を実現しようとした朴正熙政府の労働政策の構造的限界を究明した。
第三に、朴正熙政府と労働庁が追及した技能優待政策は学歴中心社会を強化し、競争と選別、包摂と排除を通じて政策が推進されたという点を明らかにした。朴正熙政府の技能優待政策は、技能自体に誇りを持てるようにする政策ではなく、学歴を上昇させる機会を与えて「脱技能工」化させる政策にすぎなかった。韓国の労働者たちが技術の向上よりも学歴の上昇を選択し、子女の教育にまい進するのはこのような過程を経たからである。
第四に、朴正熙政府の技能優待政策は当時の非進学青少年たちを技能習得に向かわせ、一部の非進学青少年に機会を提供した。これによって、朴正熙政府の統治は抑圧や排除だけでなく、包摂と懐柔、競争、能力重視といった近代的統治技法と文化を活用して行われたという点を確認することができた。
第五に、抑圧的労働政策だけでなく「包摂・懐柔的」労働政策も性別によって異なって推進され、女性はここから疎外されたという点を明らかにした。その結果、個人的階層上昇の経路を遮断された女性熟練労働者たちは、男性熟練労働者たちに先んじて1970年代労働運動に参加した。女性熟練労働者たちの階層的成長は男性に比べてゆっくりと進行したが、労働者集団の社会的地位向上のために集団行動に出たのは女性熟練労働者のほうが早かった。この過程は、朴正熙政府の統治が単一でなかったために、この時代を生きた歴史的主体たちの対応も構造的条件と状況に応じて多様なものとなったという点を示してくれる。
技能・技術に優れた労働者個々人の階層上昇を保障する政策は、制限的労働政策にすぎない。労働現場の変化には「企業管理」が必要であるが、これは労働部処の行政力と労働者たちの集団的対応によってのみ可能である。このうち、まず労働者集団が対応し、また労働者の権利が保障されなければ、労働部の位相の強化と行政部処内での立場の拡大も不可能である。そのような点から、韓国の技術人力政策と労働政策は、朴正熙政府期以後進展していないと言わざるをえない。This study analyzes the process in which the Park Chung-hee administration’s Technical Manpower Policy unfolded as both a labor problem and labor policy, and how the skilled workers perceived and responded to the changing labor environment created in the process.
To this end, this research first investigates vocational education and training in the 1950s and their contextual limitations. The government project on vocational education and training in the 1950s had as its primary goal the rebuilding of the Korean economy after the Korean war. The United Nations Korean Reconstruction Agency (UNKRA) and the Korean Ministry of Culture aimed to strengthen the level of vocational education to match that of existing general education. However, at the time, there was no single consensus on how this was to be achieved. The main area of contention was whether the Korean economy at the time will benefit more from progressively cultivating skilled workers with the long-term in mind or from producing manpower that can be speedily trained and supplied to the sites of production. Amid this contention, the decision by the UNKRA and OEC (Office of Economic Coordinator for Korea) was to establish pilot institutions for vocational education at Korea’s elite technical high schools for the retraining of local vocational school teachers and local workers, based on the experience of a similar project run at the state of Kentucky in the United States.
Although the UNKRA’s decision took into consideration the situation at the time, clear limitations were found in cultivating skilled workers through pilot schools. First, the pilot institutions were located at ‘elite technical high schools,’which perpetuated the desire for further education among the vocational students. Second, the still lacking progress in industrial development at the time and the resulting lack of employment opportunities meant that the skilled workers had nowhere to go after receiving the vocational education and training. Having experienced these limitations in the 1950s, the Park Chung-hee administration devised a plan to focus on and disseminate vocational training rather than vocational education. The unsuccessful attempt and the perceived inefficiency in training workers through pilot schools influenced the Park Chung-hee administration to implement Technical Manpower Policy.
This study continues its investigation by reviewing the Park Chung-hee administration’s labor policies for human resource development implemented as a part of Technical Manpower Policy and the Office of Labor Affairs’ role in instating these policies. Under the Park Chung-hee administration, technical skill was highlighted as a critical element for technological development and a path for workers to obtain personal success and move up the ladder in the social hierarchy. The Office of Labor Affairs played an active and central role in proliferating the importance of human resources development. In the 1960s, it was the Office of Labor Affairs, not the Ministry of Culture, that was put in charge of training skilled workers, and through operating specialized training centers that were informal educational institutions set apart from the regular school system. This change transformed the Technical Manpower Policy from an education policy to a labor policy.
Through labor policies for human resource development, the Office of Labor Affairs attempted to create a social climate that valued skill. The Office was intolerant toward workers’ collective action but at the same time, its labor policies aimed to make upward social mobility possible for workers through developing individual skills. In this way, the Office of Labor Affairs’ goal was identical to that presented by President Park Chung-hee to employees in Korea.
It was the Office of Labor Affairs’ plan to realize a society that gives preferential treatment to skilled workers by‘persuading companies.’ However, the Office failed to produce a detailed blueprint for how this can be done. Because it had no way to actually force cooperation from companies, the Office focused on ‘inducing companies’ participation’ in vocational training. The Office’s sole concentration on ‘persuading companies’ led to its neglect of its original role, which was to oversee and control companies to prevent exploitation of the vocational training program and to find ways to give preferential treatment to skilled workers after their training. In short, the Office of Labor Affairs’ decisions exposed the limitations of a labor policy focusing on economic development.
Without collective cooperation from the workers, the Office of Labor Affairs had difficulties in effectively persuading companies. As it realized its limits in expanding vocational training at companies, the Office returned to running the vocational training project at ‘technical high schools’ rather than at vocational training centers. This return expanded school-based vocational training, and consequently strengthened the hierarchy based on academic background between engineers and skilled workers as well as that among the skilled workers. Thus, although the Park Chung-hee administration criticized companies for taking advantage of skilled workers, the real culprit who allowed this to happen was in fact the Korean government, by reinforcing school-based skill training, and the Office of Labor Affairs, by failing to pursue the policy to give preferential treatment to skilled workers.
The projects led by the Office of Labor Affairs towards the preferential treatment for skilled workers focused on providing opportunities to improve one’s academic background, rather than prohibiting discrimination based on academic backgrounds. Highly-skilled workers entered national skill competitions which gave prizes and the chance to receive further formal education to the winners, through which they were able to find employment at large corporations and schools. A national certification system for technical skills was implemented to liaise the certification system for the engineers and that for the skilled workers, which aimed to bestow the same social status to the most highly-skilled workers as the professional engineers and those with doctorate degrees. However, a certain level of academic background was set as a requirement for receiving technical skill certification: university-level education for certification as engineers and high school-level for certification as skilled worker. Therefore, even if a skilled worker with a high school diploma obtains the highest certification for his/her skill, this discriminative structure in the certification system made it impossible for skilled workers to enjoy the same social status as engineers. The same logic applied to the skill competitions as well. The greatest benefit given to the competition winners was the chance to get a university education on a full scholarship. As a result, the most highly-skilled workers were the first ones to seek escape from their existing status. Since the most highly-skilled were in this mindset, it was impossible to create a society that gave preferential treatment to skilled workers and saw the workers as having the same social status as engineers.
The Chun Doo-hwan administration that followed in the 1980s made changes to reduce the Technical Manpower Policy, and the academic hierarchy in the labor market strengthened as a result. Objectively speaking, a society that values skilled workers cannot be built by forced state-led policies that benefits a small number of skilled workers. What is required is a societal consensus to recognizes the workers’ skills and to improve the social status of the working class, but the Park Chung-hee administration was too impatient to pursue methods other than state-led policies.
Amid worsening situations such as low pay, unfavorable working conditions, and few chances for self-improvement, it was the skilled workers themselves who moved to action for change and raised the overall social status of the workers. Different measures were taken by the skilled workers depending on their individual situations and conditions. These skilled workers concentrated on developing and upgrading their technical skills to satisfy their personal motivations for success and recognition. As a result, a few of the skilled workers were able to move up in the social ladder. It was also the skilled workers that led the labor movement in the late 1980s to achieve better social status for workers after the changes and cuts in policies for cultivating skilled workers.
Meanwhile, women were consistently excluded from the Park Chung-hee administration’s Technical Manpower Policy. Although their value was not recognized by the state or society, the female workers worked hard on developing their skills as well as their identity as workers. Highly-skilled female workers took pride on their skills and desired proper recognition as that enjoyed by their male counterparts, but their pride in their skills and social recognition were not retained. The society’s neglect in enabling the skilled female workers to move up the social ladder and recognizing their mastery in skill prompted these women to participate in labor movements prior to the male workers. By participating in union activities, these women were able to reclaim their pride in their work as well as the recognition and social influence that was taken away from them at their workplace.
The close investigation conducted in this research and its implications can be summarized as below.
First, this study illustrated how the social recognition for skill mastery and technical skill and the social consensus on opening possible ways for skilled workers to expand their social class as capitalists was formed in Korean society in the 1970s. This illustration identified the 1970s in modern Korean history as the time when a sweeping consensus on capitalistic modernization was made among the members of society. The Technical Manpower Policy implemented as a labor policy possessed both coercive and voluntary characteristics. The state limited the role of workers to personal skill mastery while propagating skill mastery as a sure way to realize the capitalist dream. Furthermore, this propaganda was supported with actual preferential treatment for highly-skilled workers. Because of this process, the Park Chung-hee administration was able to mobilize not only the youth and workers but also the general public under the national goal of capitalistic development.
Second, it was illustrated how labor policies for human resources development and vocational training transformed into labor problems. Up to now, research on labor policy focused on studying the changes in the rights to organization and collective activity and neglected investigation into the role of the Office of Labor Affairs. This study mends the gap in research to a certain extent by looking into the early movements of the Office of Labor Affairs when it began to gain control in instating labor policiesand by delineating the limitations posed by the structural conditions of the era. Specifically, it was shown how, in its early days, the Office of Labor Affairs pursued various policies with the goal to expand employment and to form a society gave preferential treatment to skilled workers. At the same time, the structural limitations of the Park Chung-hee administration’s labor policy which was born from the focus on ‘persuading companies’ was portrayed.
Third, this study presented how the Park Chung-hee administration and the Office of Labor Affairs’ policy to prioritize technical skills strengthened the social hierarchy based on academic background and how it was implemented through the use of competition, selection, inclusion and exclusion. The Park Chung-hee administration’s Technical Manpower Policy was not a policy that cultivated pride in skill mastery but a policy that promoted skilled workers to seek escape from their existing status through receiving higher level education. As a result, the workers in Korea chose upgrading their academic background over skill mastery and focused on providing better education to their children.
Fourth, this research explained the Park Chung-hee administration’s policy to give preferential treatment to skilled workers prompted the youth without plans for university to learn technical skills. For a few of these youths, this policy provided rare opportunities. Thus, it is possible to say that the Park Chung-hee administration not only used suppression and exclusion as the means to rule but also modern administrative techniques and culture such as inclusion, conciliation, competition, and emphasis on practical abilities.
Last, it was shown that women were discriminated and excluded in the implementation of not only the suppressive labor policies but also those that were supposed to be inclusive and conciliatory. Blocked from upward social mobility, the skilled female workers joined the labor movement in the 1970s which is earlier than their male counterparts. Although the growth of the skilled female working class was slower than that of the male workers, the skilled female workers were the ones that responded quicker to organize collective action for the improvement of the working class’ social status. This process showed how differently the agents and stakeholders in this era responded to the structural conditions and situations, which reflects the inconsistency in the Park Chung-hee administration’s rule.
By nature, a labor policy that guarantees upward social mobility only to highly skilled workers can only be a limited labor policy. To change the working conditions at the sites of production, it is critical that companies are properly regulated, and this, in turn, requires the Ministry of Labor’s effective administration and the collective action of the working class. Of these two factors, the latter, through respecting the workers’ rights and power must be guaranteed first to lend strength to the Ministry’s administrative authority. In this respect, it can be said that there is a lack of progress in Korea’s policy for skilled workers and labor policy since the Park Chung-hee administration.本论文的研究目的在于分析朴正熙政府时期作为劳动问题即劳动政策的技术人力政策之推动过程,以及熟练工人们对此政策的认知与因应。
本研究首先分析了1950年代职业教育和训练的样貌与时代的限制。1950年代职业教育和职业训练工作的推动主要是为了韩国战争以后经济的复苏和重建。UNKRA和文教部强化职业教育,想要与一般教育取得平衡。1950年代对于职业教育和职业训练的构想并非是单线性的。当时需要的是配合韩国经济状况的长期技术人力养成?还是要优先培育在生产现场引进及操作机械的短期技术人力?针对这个问题,引起了争议。FOA将美国肯塔基州实施的据点职业学校事业经验引进韩国,想要在韩国的工业高等教育设立据点示范职业学校,对区域产业需要的地区实业学校实施教师再训练、劳工再训练。UNKRA与FOA这种判断虽然是考虑当时时代状况的决定,但通过学校来培育技术人力的尝试,很明显是有限制的。
首先,在「菁英工业高等学校」上设立据点示范学校,挑起了入学者提高学历的渴望。另外,没有扩大产业发展和雇用,即使完成职业教育和训练,技术人力也无法被活用。朴正熙政府经验过1950年代试图通过学校来培育技术人力的限制,于是建立了扩大职业训练的计划,而不是扩大职业教育。通过正规学校教育来培育技术人力的低效率和失败经验,对朴正熙政府的技术人力政策产生了影响。
其次,朴正熙政府时期,掌握了作为技术人力政策之一环所推动的人力开发劳动政策和劳动厅的角色。技术力开始成为技术发展的重要因素,同时也成为劳工的成就和阶层上升的媒介,就是从朴正熙政府时期开始的。政府部门中积极扩大人力开发重要性的是劳动厅。1960年代选择了不是由文教部,而是由劳动厅通过非正规教育机关即训练所来培育熟练工人的方式。在此过程中,技术人力政策的性质由教育政策改为劳动政策。
以人力开发劳动政策为基础,劳动厅想要造成优待技能的社会氛围。虽然压抑了劳工们的集团行动,仍以劝导劳工提高个人技术能力实现阶层上升,作为劳动政策的目标。劳动厅的这个目标同时也是朴正熙大统领向「劳工」们提示的目标。
然而劳动厅虽然通过「说服企业」想要创造优待技能的社会,但并未准备具体的、现实的方案。劳动厅没有强制企业的方案,只是继续沈浸在企业的训练「参与」里。结果劳动厅只将注意力放在「说服企业」,却未尽到本来应该要监督企业的训练「恶用」,或推动训练完成后熟练工人优待方案的本份。这也显露出为了成长而设计的人力开发劳动政策的限制。
没有劳工集体协助,劳动厅的「说服企业」很难达到效果。公司内部职业训练难以扩大,以职业训练所为主的「养成」事业也转换成为以工业高等学校为主的事业。而以学校为主的训练方式一扩大,不仅是技术者、技能工之间,连技能工内部的学历位阶也被强化。朴正熙政府虽然批判企业规避技能工的活用,但就是因为政府强化通过学校培育技术工的方式,另外劳动厅也未强力推动熟练工人的优待政策,才会形成这种结构。
劳动厅推动的技能优待事业并非禁止技术人力内部的学历差别待遇,而是提供补强学历的机会。展现高度技能水平的技能工们参加技能竞技比赛得奖时,可以得到政府提供的进修机会和奖金,进入大企业和学校工作。通过国家技术资格制度,技能界最高水平的技能长,可以享有和博士、技术士同等的社会地位,将技术界和技能界的资格制度做了联结。但是要考技术资格制度考试需要学历,大学毕业者才能报考技术士,因此即使成为高中毕业技能工最高水平的技能长,在具有学历应考限制的歧视结构之下,要享有同等的社会地位是不可能的。技能竞技制度也是一样。在技能竞技比赛中得奖的技能工所能得到最大的好处是拿到进大学的奖学金,获得进大学就读的优惠,结果造成了优秀的技能工试图「脱离技能工」。优秀的技能工既然有了这种认知,技能优待社会和技能长享有和技术士同样社会地位的技能优待社会就不可能会稳定。
尤其1980年代技能工养成政策的变化和全斗焕政权缩减了技术优待政策,更强化了劳动市场的学历中心主义。事实上技能优待社会不是通过像提供部分优秀技能工优惠这种国家强制性的尝试就能形成的,而是必须要先形成认同劳工的熟练和技术的社会协议,并且认同劳工集团的社会地位才有可能,但朴正熙政府却想要通过推动急躁的国家主导政策加以实现。
改变这种低工资、不利的职业条件、自我发展机会的制约等困难的条件,同时提高劳工集团整体社会地位的,正是熟练工人们。随着个别主体的立场和条件,反应也各不相同。他们为了满足自己的成就动机和人情欲望,致力于熟练程度的达成和技能的开发,结果一部分的熟练工人得以实现阶层的上升。经历过1980年以后技能优待政策的缩减和技能工养成政策的变化,为实现劳工集团社会地位的提升而投身劳工运动的也是他们-熟练工人们。
另一方面,在朴正熙政府的技术人力政策上,女性是被排除在外的。女性虽然无法被视为技能优待社会的成员,但女性劳工不仅自行达成熟练程度,同时还逐渐形成了作为劳工的身分认同。女性熟练工人们也和男性熟练工人们一样,希望通过自成的熟练和本身的技术能力得到肯定,为自己的技术能力感到骄傲。然而通过熟练而拥有技术能力的女性熟练工人的骄傲却无法持续。于是无法通过熟练取得阶层上升和社会认同的女性熟练工人抢先男性熟练工人参与了劳工运动。她们通过劳动组合活动,重新找回了无法在劳动现场得到的对劳动的自豪感、他人的肯定和社会的影响力。
通过以上的内容,本论文得到的结论和意义如下:
第一,本论文阐明,到了1970年代,韩国社会内部对于熟练和技术的社会认同得以站稳脚步,另外社会上对于成为资本家的阶层成长可能性也达成了合议。韩国现代史中,1970年代是社会成员们对资本主义近代化达成全面合议的时期。作为劳动政策之一环所推动的技术人力政策,政策的性格上同时带有强制性和自发性。对于劳工的角色,国家一面限制个人技能的磨练,同时又宣传若将技能开发为技术,劳工也有可能成为资本家。而且不只单纯地宣传,还提供了优秀技能工各种实惠。由于有这样的过程,朴正熙政府才能在所谓资本主义发展和成长的国家目标上,动员青少年、劳工和国民。
第二,厘清标榜人力开发的劳动政策的性格和职业训练成为劳动问题的过程。迄今有关劳动政策的研究大多关注团结权和团体行动权的变化,并未关注劳动厅这个主题。通过本研究,尽管只是部分,得以掌握了在劳动政策的树立上刚开始拥有独立性的劳动行政部门初期的实际样貌,以及其结构上和时代的限制。另外也阐明初期劳动行政部门在雇用政策和形成技能优待社会的目标之下推动了许多制度,同时也清楚知道朴正熙政府想要通过「说服企业」的方法实现劳动政策在结构上的限制。
第三,朴正熙政府和劳动厅追求的技能优待政策想要强化学历中心社会,并通过竞争、选拔、吸收和排除来推动政策。朴正熙政府的技能优待政策并不是让劳工对技能本身感到骄傲,而是给予晋升学历的机会,不过是一种反而造成「脱离技能工」的政策。与提高技术相比,韩国的劳工们之所以选择学历的上升,并且致力于子女的教育,正是因为经历这种过程所导致的。
第四,朴正熙政府的技能优待政策让当时未升学的青少年们得以学到技术,并且为部分未升学的青少年提供了机会。因此,我们可以知道,朴正熙政府的统治不单只是压抑和排除的层次而已,同时还利用了吸收、怀柔、竞争和重视能力等近代统治手法和文化。
第五,不只有压抑的劳动政策,「吸收、怀柔的」劳动政策的推动有性别之分,在这里女性是被排除在外的。结果个人阶层上升通路被阻断的女性熟练工人们抢先男性熟练工人,在1970年代参与了劳工运动。女性熟练工人的阶层成长虽然比男性缓慢,但为了提高劳工集团的社会地位,她们更快出面参与集团行动。此过程也显示出朴正熙政府的统治是不一致的,而生活在当时的历史主体们也随着结构条件和情况,做出不同的因应。
保障技能、技术优秀的劳工个人阶层上升的政策不过是一种有限制性的劳工政策罢了。劳动现场的变化需要「企业管理」,这需要靠劳动部门的行政能力和劳工的集团因应才有可能。其中唯有劳工集团的因应和权利优先得到保障,才能提升劳动部的位阶和扩大行政部门内的基础。也因此,韩国的技术人力政策和劳动政策在朴正熙政府时期以后,一直都没有进展。
저자 | 장미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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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위수여기관 | 연세대학교 대학원 |
학위구분 | 국내박사 |
학과 | 사학과 |
지도교수 | 김성보 |
발행연도 | 2016 |
총페이지 | x, 296 p. |
키워드 | 노동청 여성 숙련노동자 policy for cultivating skilled labor technical manpower policy skilled workers technical high school academic hierarchy national skill competition office of labor affairs government project for vocational training skilled female workers national certification system for technical skills 技术人力政策 技能工 女性熟練工人 技術人力政策 工業高等学校(工高) 学歷主義 技能競技大会 人力開発 労働庁 職業訓練事業 女性熟練労働者 国家技術資格制度 |
언어 | kor |
원문 URL | http://www.riss.kr/link?id=T14186106&outLink=K |
정보원 | 한국교육학술정보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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