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교회에 도덕적 불감증과 윤리적인 실패의 증후들이 여기저기서 그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과연 무엇이 잘못된 것인가? 여러 가지 원인을 찾아볼 수 있겠지만, 이것은 무엇보다도 인식의 문제다. 아는 바가 잘못되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떤 인식에서 잘못된 것인가? 한 마디로, 구원론에 대한 인식이 잘못되었다. 그동안 한국교회는 성화론보다는 오직 믿음으로 구원받는다는 칭의론을 더 강조해 왔다. 그러다 보니 성도는 거룩함의 열매가 없어도 믿기만 하면 구원받는다는 그릇된 인식을 갖게 되었을 뿐 아니라 선행마저도 상급을 받기 위한...
한국교회에 도덕적 불감증과 윤리적인 실패의 증후들이 여기저기서 그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과연 무엇이 잘못된 것인가? 여러 가지 원인을 찾아볼 수 있겠지만, 이것은 무엇보다도 인식의 문제다. 아는 바가 잘못되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떤 인식에서 잘못된 것인가? 한 마디로, 구원론에 대한 인식이 잘못되었다. 그동안 한국교회는 성화론보다는 오직 믿음으로 구원받는다는 칭의론을 더 강조해 왔다. 그러다 보니 성도는 거룩함의 열매가 없어도 믿기만 하면 구원받는다는 그릇된 인식을 갖게 되었을 뿐 아니라 선행마저도 상급을 받기 위한 수단으로 오해하는 상황에까지 이르게 되었다. 이렇게 된 데에는 종교 개혁자들의 탓이 크다는 지적이 많다. 과연 그러한가? 결코 그렇지 않다. 종교 개혁자들의 구원론은, 한 마디로, 성경의 원리에 근거하여 칭의와 성화를 균형 있게 강조한 성경적인 구원론이었다.
그러므로 본 연구는 종교 개혁자들의 구원론을 살펴봄으로써 종교 개혁자들에 대한 그릇된 지적을 효과적으로 반박하고, 한국교회가 어떤 구원론을 견지해야 하는지에 대해서 고찰해 보고자 한다. 지면의 제약상 대표적인 종교 개혁자인 존 칼빈의 구원론으로, 또한 그 중에서도 칼빈이 제시한 칭의와 성화의 관계로, 연구의 초점을 한정하여 연구를 진행할 것이다.
우선 칼빈이 이해한 칭의는 하나님이 죄인인 우리에게 그리스도의 의를 전가해 주심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시고 우리를 의인으로 간주해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라고 정의할 수 있다. 여기서 그리스도의 의는 순종의 의다. 이 순종은 그리스도가 하나님이 명하신 모든 율법의 말씀에 순종하신 것과 십자가에서 죽기까지 보여주신 순종을 다 포함하는 것이다. 이러한 순종의 의를 우리의 것이 되게 하신다는 것이다.
어떤 방법을 통해서 그렇게 하시는가? 그것은 전가를 통해서이다. 이 전가는 오시안더나 로마 가톨릭이 주장한 의의 주입, 즉 의롭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의롭다고 간주되는 것이다. 어디에서? 하나님의 법정에서. 그런 의미에서 전가는 법정적인 의미를 갖는다. 그렇다면 전가는 어떻게 가능한가?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통해서 가능하다. 그리스도와 우리가 서로 공유하는 연합의 관계를 맺음으로써 외부적인 의인 그리스도의 의가 우리의 것이 될 수 있다.
그렇다면 이러한 연합은 어떻게 이루어지는가? 그리스도와의 연합은 오직 믿음을 통해서 이루어진다. 믿음이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도구가 되어서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거하게 되고, 또한 우리가 거하는 그리스도로부터 의를 전가 받아 죄 용서함을 받고 의롭다고 칭함을 받게 되는 것이다. 이 믿음은 우리에게 대한 하나님의 선하심을 아는 지식을 기초로 삼아 그 지식을 마음으로 확신하고 신뢰하며 받아들여서 우리의 것으로 만드는 것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
다음으로 칼빈이 이해한 성화를 살펴보면, 칼빈은 성화라는 용어보다는 중생이라는 용어를 선호한다. 이 중생도 보다 넓은 의미, 즉 성령이 신자의 삶의 전 과정을 통해 영향을 미치는 새롭게 하심을 지칭하는 것으로 이해한다.
나아가 이 중생은 칼빈에게 회개로 해석된다. 회개란 우리 자신으로부터 떠나서 하나님께로 돌이킴이라고 정의된다. 이러한 돌이킴은 육신의 죽임과 영의 살림을 통해서 이루어진다. 이 두 가지 일을 통해서 아담의 범죄로 말미암아 일그러지고 거의 지워진 버린 하나님의 형상을 우리 안에서 회복시키는 것이 바로 회개의 목적이다. 이 두 가지 일은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참여할 때, 즉 그리스도와 연합할 때 성취된다.
그러나 육신의 죽임과 영의 살림은 우리의 힘으로 이룰 수 없는 일이다. 하나님이 친히 주도하시는 일이다. 회개를 일으키시는 것은 물론 우리로 그리스도와 연합하게 하시고, 우리에게 성령을 파견하셔서 우리의 회개(성화)를 이루신다.
그러나 이러한 회개는 한 순간에 완성되는 것이 아니다. 신자 속에 거하는 죄 때문이다. 죄는 중생으로 말미암아 신자에 대한 지배력을 상실했지만, 죄의 흔적(악의 재)으로 여전히 신자 속에 거하고 있다. 그러므로 신자는 목숨을 다할 때까지 죄와 싸워야 한다. 이것이 바로 신자의 책임이다. 회개, 즉 성화는 하나님이 친히 주도하시는 일이지만, 그 일에 참여하는 것은 신자의 몫이다. 그러나 이 일은 신자가 죽는 그 순간이 아니라 그리스도가 재림하시는 그 날에 비로소 완성될 것이다.
지금껏 살펴본 칼빈의 칭의와 성화에 대한 이해를 기초로 삼아 칭의와 성화의 관계를 고찰해 보자. 칼빈이 제시한 칭의와 성화의 관계는 다음의 세 가지로 요약해 볼 수 있다. 첫째로 ‘동등한 관계’이다. 그것은 칼빈이 『기독교 강요』에서 칭의론보다 성화론을 먼저 다룬 것과 칭의와 성화를 ‘이중적인 은혜’로 명명한 것에서도 잘 드러난다. 둘째로, 칭의와 성화의 관계는 ‘구별되지만, 분리되지 않는 관계’이다. 칼빈은 칭의와 성화를 혼합하여 하나로 만들어 버린 오시안더와는 달리, 칭의와 성화는 그 역할 면에서 서로 구별되어야 하지만, 분리될 수는 없다고 주장했다. 셋째로, 칭의와 성화의 관계는
한국교회에 도덕적 불감증과 윤리적인 실패의 증후들이 여기저기서 그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과연 무엇이 잘못된 것인가? 여러 가지 원인을 찾아볼 수 있겠지만, 이것은 무엇보다도 인식의 문제다. 아는 바가 잘못되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떤 인식에서 잘못된 것인가? 한 마디로, 구원론에 대한 인식이 잘못되었다. 그동안 한국교회는 성화론보다는 오직 믿음으로 구원받는다는 칭의론을 더 강조해 왔다. 그러다 보니 성도는 거룩함의 열매가 없어도 믿기만 하면 구원받는다는 그릇된 인식을 갖게 되었을 뿐 아니라 선행마저도 상급을 받기 위한 수단으로 오해하는 상황에까지 이르게 되었다. 이렇게 된 데에는 종교 개혁자들의 탓이 크다는 지적이 많다. 과연 그러한가? 결코 그렇지 않다. 종교 개혁자들의 구원론은, 한 마디로, 성경의 원리에 근거하여 칭의와 성화를 균형 있게 강조한 성경적인 구원론이었다.
그러므로 본 연구는 종교 개혁자들의 구원론을 살펴봄으로써 종교 개혁자들에 대한 그릇된 지적을 효과적으로 반박하고, 한국교회가 어떤 구원론을 견지해야 하는지에 대해서 고찰해 보고자 한다. 지면의 제약상 대표적인 종교 개혁자인 존 칼빈의 구원론으로, 또한 그 중에서도 칼빈이 제시한 칭의와 성화의 관계로, 연구의 초점을 한정하여 연구를 진행할 것이다.
우선 칼빈이 이해한 칭의는 하나님이 죄인인 우리에게 그리스도의 의를 전가해 주심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시고 우리를 의인으로 간주해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라고 정의할 수 있다. 여기서 그리스도의 의는 순종의 의다. 이 순종은 그리스도가 하나님이 명하신 모든 율법의 말씀에 순종하신 것과 십자가에서 죽기까지 보여주신 순종을 다 포함하는 것이다. 이러한 순종의 의를 우리의 것이 되게 하신다는 것이다.
어떤 방법을 통해서 그렇게 하시는가? 그것은 전가를 통해서이다. 이 전가는 오시안더나 로마 가톨릭이 주장한 의의 주입, 즉 의롭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의롭다고 간주되는 것이다. 어디에서? 하나님의 법정에서. 그런 의미에서 전가는 법정적인 의미를 갖는다. 그렇다면 전가는 어떻게 가능한가?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통해서 가능하다. 그리스도와 우리가 서로 공유하는 연합의 관계를 맺음으로써 외부적인 의인 그리스도의 의가 우리의 것이 될 수 있다.
그렇다면 이러한 연합은 어떻게 이루어지는가? 그리스도와의 연합은 오직 믿음을 통해서 이루어진다. 믿음이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도구가 되어서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거하게 되고, 또한 우리가 거하는 그리스도로부터 의를 전가 받아 죄 용서함을 받고 의롭다고 칭함을 받게 되는 것이다. 이 믿음은 우리에게 대한 하나님의 선하심을 아는 지식을 기초로 삼아 그 지식을 마음으로 확신하고 신뢰하며 받아들여서 우리의 것으로 만드는 것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
다음으로 칼빈이 이해한 성화를 살펴보면, 칼빈은 성화라는 용어보다는 중생이라는 용어를 선호한다. 이 중생도 보다 넓은 의미, 즉 성령이 신자의 삶의 전 과정을 통해 영향을 미치는 새롭게 하심을 지칭하는 것으로 이해한다.
나아가 이 중생은 칼빈에게 회개로 해석된다. 회개란 우리 자신으로부터 떠나서 하나님께로 돌이킴이라고 정의된다. 이러한 돌이킴은 육신의 죽임과 영의 살림을 통해서 이루어진다. 이 두 가지 일을 통해서 아담의 범죄로 말미암아 일그러지고 거의 지워진 버린 하나님의 형상을 우리 안에서 회복시키는 것이 바로 회개의 목적이다. 이 두 가지 일은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참여할 때, 즉 그리스도와 연합할 때 성취된다.
그러나 육신의 죽임과 영의 살림은 우리의 힘으로 이룰 수 없는 일이다. 하나님이 친히 주도하시는 일이다. 회개를 일으키시는 것은 물론 우리로 그리스도와 연합하게 하시고, 우리에게 성령을 파견하셔서 우리의 회개(성화)를 이루신다.
그러나 이러한 회개는 한 순간에 완성되는 것이 아니다. 신자 속에 거하는 죄 때문이다. 죄는 중생으로 말미암아 신자에 대한 지배력을 상실했지만, 죄의 흔적(악의 재)으로 여전히 신자 속에 거하고 있다. 그러므로 신자는 목숨을 다할 때까지 죄와 싸워야 한다. 이것이 바로 신자의 책임이다. 회개, 즉 성화는 하나님이 친히 주도하시는 일이지만, 그 일에 참여하는 것은 신자의 몫이다. 그러나 이 일은 신자가 죽는 그 순간이 아니라 그리스도가 재림하시는 그 날에 비로소 완성될 것이다.
지금껏 살펴본 칼빈의 칭의와 성화에 대한 이해를 기초로 삼아 칭의와 성화의 관계를 고찰해 보자. 칼빈이 제시한 칭의와 성화의 관계는 다음의 세 가지로 요약해 볼 수 있다. 첫째로 ‘동등한 관계’이다. 그것은 칼빈이 『기독교 강요』에서 칭의론보다 성화론을 먼저 다룬 것과 칭의와 성화를 ‘이중적인 은혜’로 명명한 것에서도 잘 드러난다. 둘째로, 칭의와 성화의 관계는 ‘구별되지만, 분리되지 않는 관계’이다. 칼빈은 칭의와 성화를 혼합하여 하나로 만들어 버린 오시안더와는 달리, 칭의와 성화는 그 역할 면에서 서로 구별되어야 하지만, 분리될 수는 없다고 주장했다. 셋째로, 칭의와 성화의 관계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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