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날 ‘영성’(spirituality)은 기독교뿐만 아니라 거의 모든 종교에서 심지어 문화 현상에서도 사용되는 용어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성의 개념은 모호하고 다의적으로 해석되는 경향이 있다. 첫째는 영성을 수련의 하나로 치부하는 경향이다. 실제로 17세기 이후 교회는 평신도들의 신앙을 지도하고 계발하기 위해 영성에 대한 자료를 체계화하였는데, 이는 실습이나 수련, 자기 계발을 위한 지침서 마련을 목적으로 하는 협소한 이해 가운데 진행되었다. 둘째는 영성을 개인의 깨달음이나 고양된 인식이라는 아주 작은 범위로 축소하는 경향이다. 이러한 영성의 이해는 하나님 백성의 구원과 성화에 강조점을 두고 있는 성경의 전통보다 자아에 대한 지식과 계발에 관심을 갖는 영지주의에 훨씬 더 가깝다. 또한 성육신의 근거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다는 점에서 영지주의적이다. 이러한 영성은 성육신의 말씀을 중심으로 우리 삶의 변화를 추구하기보다는 위안, 안심, 내적 평화의 제공에만 많은 관심을 기울인다. 셋째는 영성의 개념을 신비적 차원이나 인간의 정신적 삶이나 내면성 같은 영역을 가리키는 것으로 한정함으로써 사회적이나 역사성의 차원과 구별되고 상반된 것으로 여기는 것이다. 이와 같은 영성의 이해는 오늘날의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의 삶을 변화시키는 분이 아니라 단지 우리의 삶을 개선시키는 분으로 간주하게 한다. 이러한 영성에 대한 오해는 기독교 복음을 변질시킬 수 있는 위험성을 내포한다. 따라서 영성에 대한 바른 정의를 보다 더 명확하게 규명할 필요가 있으며, 필자는 이러한 규명을 산드라 슈나이더스(Sandra M. Schneiders)와 케네스 ...
오늘날 ‘영성’(spirituality)은 기독교뿐만 아니라 거의 모든 종교에서 심지어 문화 현상에서도 사용되는 용어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성의 개념은 모호하고 다의적으로 해석되는 경향이 있다. 첫째는 영성을 수련의 하나로 치부하는 경향이다. 실제로 17세기 이후 교회는 평신도들의 신앙을 지도하고 계발하기 위해 영성에 대한 자료를 체계화하였는데, 이는 실습이나 수련, 자기 계발을 위한 지침서 마련을 목적으로 하는 협소한 이해 가운데 진행되었다. 둘째는 영성을 개인의 깨달음이나 고양된 인식이라는 아주 작은 범위로 축소하는 경향이다. 이러한 영성의 이해는 하나님 백성의 구원과 성화에 강조점을 두고 있는 성경의 전통보다 자아에 대한 지식과 계발에 관심을 갖는 영지주의에 훨씬 더 가깝다. 또한 성육신의 근거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다는 점에서 영지주의적이다. 이러한 영성은 성육신의 말씀을 중심으로 우리 삶의 변화를 추구하기보다는 위안, 안심, 내적 평화의 제공에만 많은 관심을 기울인다. 셋째는 영성의 개념을 신비적 차원이나 인간의 정신적 삶이나 내면성 같은 영역을 가리키는 것으로 한정함으로써 사회적이나 역사성의 차원과 구별되고 상반된 것으로 여기는 것이다. 이와 같은 영성의 이해는 오늘날의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의 삶을 변화시키는 분이 아니라 단지 우리의 삶을 개선시키는 분으로 간주하게 한다. 이러한 영성에 대한 오해는 기독교 복음을 변질시킬 수 있는 위험성을 내포한다. 따라서 영성에 대한 바른 정의를 보다 더 명확하게 규명할 필요가 있으며, 필자는 이러한 규명을 산드라 슈나이더스(Sandra M. Schneiders)와 케네스 리치(Kenneth Leech)가 정립한 영성의 이해를 통하여 기독교 영성의 개념을 명확하게 밝힌 후에 이 지평에서 프란치스코의 영성을 고찰하겠다. 산드라 슈나이더스는 영성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영성은 “자신이 감지한 궁극적 가치에 합당하게끔 고립이나 자기 함몰의 방식이 아니라 자기 초월의 방식으로 자신의 삶을 통합하기 위해 의식적으로 노력함으로써 얻게 되는 체험”이다. 이와 같은 정의는 영성을 궁극적이고 최종적인 지평 안에서 인간이 체험하는 ‘내적 태도’라고 바라보는 시각과, 인간의 구체적인 삶 속에서 성령의 활동에 이끌린 ‘삶’이라고 보는 시각을 통합한다. 즉, 영성은 그리스도인의 실존 양식과 삶의 방식을 형성한다는 것이다. 더 나아가 케네스 리치는 기독교 영성을 “그리스도에 의해서, 그리스도 안에서 양성(養成, formation)되어 가는 과정”으로 본다. 여기서 그리스도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종의 형체를 취하신 분으로(빌 2:6), 기독교 영성은 성육신으로 시작되어 지금도 지속되고 있는 과정이다. 그리스도에 의해서,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지는 이 과정은 우리를 점점 더 그리스도를 닮아가도록 변화를 요청한다. 이 과정을 정교회 신학자인 폴 에크도키모브(Paul Evdokimov)는 “그리스도처럼 되어감(Christification)”이라고 칭한다. “그리스도처럼 되어감”의 영성이란 그리스도로 옷 입는 것으로(갈 3:27), 이 과정을 거치는 가운데 이루어지는 변화이며, 그리스도 안에서 성숙이다. 이러한 ‘그리스도처럼 되어감’의 영성은 인간의 전인적(全人的)인 변화로, 이 변화는 육체적, 정신적 특징이나 상태를 지니는 소유(avere)의 양식이 아닌 존재(essere)의 양식에 따라 자신을 항구하게 실현하려는 경향이다. 필자는 이러한 이해 가운데 프란치스코의 영성을 “그리스도처럼 되어감”이라는 주제 아래 전개하고자 한다. 프란치스코를 “그리스도처럼 되어감”의 영성의 존재적 변화의 모델로 적합하게 여기는 까닭은, 프란치스코의 생애가 성육신하신 그리스도를 궁극적인 가치로 두고 그리스도와 자신을 일치시키고자 부단히 노력하는 과정의 삶이였기 때문이다. 프란치스코의 최초 전기 작가인 토마스 첼라노(Thomas a Celano)는 프란치스코를 “완전하신 주님의 형상”(imaginem perfectionis illius)이며, “그리스도를 위한 진실한 사랑이 이 연인[프란치스코]을 그리스도의 모습으로 변형”시켰고, “그리스도와 복되신 프란치스코는 하나요 같은 사람”이라 말한다. 이와 같은 묘사는 프란치스코 영성의 중심이 “그리스도처럼 되어감”이라는 것을 알게 한다. 일리아 델리오(Ilia Delio)는 그녀의 저서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리스도를 따르면, 우리 각자는 은총의 힘으로 변화되어 그리스도처럼 됩니다.… 그리스도를 닮으면 하나님은 우리의 생활 안에 현존하시고, 이 세상에 현존하십니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닮으면, 우리가 갖고 태어난 그리스도의 이미지가 우리들의 삶 속에서 드러나게 됩니다. 즉 우리가 '그리스도화'되는 것입니다." 이처럼 프란치스코의 “그리스도처럼 되어감”의 영성은 단순히 그리스도를 모방한다는 것이 아닌, 존재의 변화를 통하여 그리스도의 이미지가 드러나는 것이다. 이러한 “그리스도처럼 되어감”은 이 세상에 현존하시는 하나님을 인식하며, 그 안에 거하는 관상을 포함한다.
오늘날 ‘영성’(spirituality)은 기독교뿐만 아니라 거의 모든 종교에서 심지어 문화 현상에서도 사용되는 용어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성의 개념은 모호하고 다의적으로 해석되는 경향이 있다. 첫째는 영성을 수련의 하나로 치부하는 경향이다. 실제로 17세기 이후 교회는 평신도들의 신앙을 지도하고 계발하기 위해 영성에 대한 자료를 체계화하였는데, 이는 실습이나 수련, 자기 계발을 위한 지침서 마련을 목적으로 하는 협소한 이해 가운데 진행되었다. 둘째는 영성을 개인의 깨달음이나 고양된 인식이라는 아주 작은 범위로 축소하는 경향이다. 이러한 영성의 이해는 하나님 백성의 구원과 성화에 강조점을 두고 있는 성경의 전통보다 자아에 대한 지식과 계발에 관심을 갖는 영지주의에 훨씬 더 가깝다. 또한 성육신의 근거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다는 점에서 영지주의적이다. 이러한 영성은 성육신의 말씀을 중심으로 우리 삶의 변화를 추구하기보다는 위안, 안심, 내적 평화의 제공에만 많은 관심을 기울인다. 셋째는 영성의 개념을 신비적 차원이나 인간의 정신적 삶이나 내면성 같은 영역을 가리키는 것으로 한정함으로써 사회적이나 역사성의 차원과 구별되고 상반된 것으로 여기는 것이다. 이와 같은 영성의 이해는 오늘날의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의 삶을 변화시키는 분이 아니라 단지 우리의 삶을 개선시키는 분으로 간주하게 한다. 이러한 영성에 대한 오해는 기독교 복음을 변질시킬 수 있는 위험성을 내포한다. 따라서 영성에 대한 바른 정의를 보다 더 명확하게 규명할 필요가 있으며, 필자는 이러한 규명을 산드라 슈나이더스(Sandra M. Schneiders)와 케네스 리치(Kenneth Leech)가 정립한 영성의 이해를 통하여 기독교 영성의 개념을 명확하게 밝힌 후에 이 지평에서 프란치스코의 영성을 고찰하겠다. 산드라 슈나이더스는 영성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영성은 “자신이 감지한 궁극적 가치에 합당하게끔 고립이나 자기 함몰의 방식이 아니라 자기 초월의 방식으로 자신의 삶을 통합하기 위해 의식적으로 노력함으로써 얻게 되는 체험”이다. 이와 같은 정의는 영성을 궁극적이고 최종적인 지평 안에서 인간이 체험하는 ‘내적 태도’라고 바라보는 시각과, 인간의 구체적인 삶 속에서 성령의 활동에 이끌린 ‘삶’이라고 보는 시각을 통합한다. 즉, 영성은 그리스도인의 실존 양식과 삶의 방식을 형성한다는 것이다. 더 나아가 케네스 리치는 기독교 영성을 “그리스도에 의해서, 그리스도 안에서 양성(養成, formation)되어 가는 과정”으로 본다. 여기서 그리스도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종의 형체를 취하신 분으로(빌 2:6), 기독교 영성은 성육신으로 시작되어 지금도 지속되고 있는 과정이다. 그리스도에 의해서,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지는 이 과정은 우리를 점점 더 그리스도를 닮아가도록 변화를 요청한다. 이 과정을 정교회 신학자인 폴 에크도키모브(Paul Evdokimov)는 “그리스도처럼 되어감(Christification)”이라고 칭한다. “그리스도처럼 되어감”의 영성이란 그리스도로 옷 입는 것으로(갈 3:27), 이 과정을 거치는 가운데 이루어지는 변화이며, 그리스도 안에서 성숙이다. 이러한 ‘그리스도처럼 되어감’의 영성은 인간의 전인적(全人的)인 변화로, 이 변화는 육체적, 정신적 특징이나 상태를 지니는 소유(avere)의 양식이 아닌 존재(essere)의 양식에 따라 자신을 항구하게 실현하려는 경향이다. 필자는 이러한 이해 가운데 프란치스코의 영성을 “그리스도처럼 되어감”이라는 주제 아래 전개하고자 한다. 프란치스코를 “그리스도처럼 되어감”의 영성의 존재적 변화의 모델로 적합하게 여기는 까닭은, 프란치스코의 생애가 성육신하신 그리스도를 궁극적인 가치로 두고 그리스도와 자신을 일치시키고자 부단히 노력하는 과정의 삶이였기 때문이다. 프란치스코의 최초 전기 작가인 토마스 첼라노(Thomas a Celano)는 프란치스코를 “완전하신 주님의 형상”(imaginem perfectionis illius)이며, “그리스도를 위한 진실한 사랑이 이 연인[프란치스코]을 그리스도의 모습으로 변형”시켰고, “그리스도와 복되신 프란치스코는 하나요 같은 사람”이라 말한다. 이와 같은 묘사는 프란치스코 영성의 중심이 “그리스도처럼 되어감”이라는 것을 알게 한다. 일리아 델리오(Ilia Delio)는 그녀의 저서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리스도를 따르면, 우리 각자는 은총의 힘으로 변화되어 그리스도처럼 됩니다.… 그리스도를 닮으면 하나님은 우리의 생활 안에 현존하시고, 이 세상에 현존하십니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닮으면, 우리가 갖고 태어난 그리스도의 이미지가 우리들의 삶 속에서 드러나게 됩니다. 즉 우리가 '그리스도화'되는 것입니다." 이처럼 프란치스코의 “그리스도처럼 되어감”의 영성은 단순히 그리스도를 모방한다는 것이 아닌, 존재의 변화를 통하여 그리스도의 이미지가 드러나는 것이다. 이러한 “그리스도처럼 되어감”은 이 세상에 현존하시는 하나님을 인식하며, 그 안에 거하는 관상을 포함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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