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 논문은 1968년부터 1971년까지 진행된 경부고속도로 건설이 이뤄지기까지 대한민국의 고속도로 개발 상황과 정권의 고속도로 건설 준비 과정, 그리고 한국 정부가 경부고속도로 건설을 결정하기까지의 과정을 정리하고자 한다. 이를 통해 한국 정부가 경부고속도로 건설을 결정한 이유를 검토하고 경부고속도로가 한국의 경제 발전에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를 확인하고자 한다.
한국의 도로건설은 1961년부터 본격적으로 추진되기 시작했다. 「도로법」이 새로 제정되었고, 관련 행정조직도 개편하였다. 1962년에는 국토건설청이 폐지되고 건설 부가 신설되었으며, 1963년 7월에는 국토종합건설계획을 수립하여 주요 ...
본 논문은 1968년부터 1971년까지 진행된 경부고속도로 건설이 이뤄지기까지 대한민국의 고속도로 개발 상황과 정권의 고속도로 건설 준비 과정, 그리고 한국 정부가 경부고속도로 건설을 결정하기까지의 과정을 정리하고자 한다. 이를 통해 한국 정부가 경부고속도로 건설을 결정한 이유를 검토하고 경부고속도로가 한국의 경제 발전에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를 확인하고자 한다.
한국의 도로건설은 1961년부터 본격적으로 추진되기 시작했다. 「도로법」이 새로 제정되었고, 관련 행정조직도 개편하였다. 1962년에는 국토건설청이 폐지되고 건설 부가 신설되었으며, 1963년 7월에는 국토종합건설계획을 수립하여 주요 간선도로의 정비와 도로의 고속화가 강조되었다. 서울 주변에서는 건설부와 서울시 등에서 인구 분산을 목적으로 도로 건설이 추진되었으며, 부산 주변에서는 부산시 주도로 인구 분산과 관광 도로 건설이 추진되었다. 추진된 도로 건설 계획 중에는 고속도 도로와 유료 도로, 고속화 도로 등의 유사고속도로 건설이 포함되어 있었다.
1962년부터 시작된 제1차 경제개발5개년계획에는 교통인프라 구축이 목표로 설정 되었지만, 철도 위주의 투자가 이뤄졌고 도로 확충은 상대적으로 부족한 편이었다. 도로의 중요성 및 정부 투자정책의 합리성이 보강된 것은 경제성장에 따른 육로 수송의 문제가 구체적으로 가시화 되면서부터였다. 건설부는 1964년 4월 첫 국토건설 종합심의회에 제출한 서울-인천 특정지역지정안 국토건설 심의서에 고속도로를 언급하면서 고속도로 건설의욕을 보였다. 그러나 건설에 필요한 기술 및 재원을 충분히 확보하지 못하여 건설을 추진하지 못했으며, 정치적으로 고속도로를 건설할 정당성 또한 확보하지 못한 상황이었다.
정부가 본격적으로 고속도로 건설을 시작할 수 있던 건 1965년에 국제부흥개발은 행(International Bank for Reconstruction and Development, IBRD)에 한국 정부가 국내 경제 및 산업 인프라 전반에 대한 조사를 의뢰한 덕분이었다. 의뢰를 받은 IBRD는 협력기관인 국제개발협회(International Development Association, IDA)에 조사단 파견을 의뢰하여 한국의 경제 개발 상황에 대한 전반적인 조사를 진행하였다. 조사 결과보고서는 1966년에 한국 정부에 제출되었는데, 보고서에서 한국의 교통인프라가 철도에만 편중된 것이 지적되었으며 도시 인근 지역에 고속화 도로의 건설을 추천되었다. 그 중 교통이 많은 서울-인천과 서울-수원 구간에는 고속 도로 건설이 제안되었다. 또한 보고서는 한국의 교통망이 동-서 구간이 미흡하다는 점을 지적하고 개선을 촉구했다. 조사단은 한국의 경제 및 교통망을 당시의 대만과 비교하면서 한국의 1차 산업 및 자원수출 산업의 발전을 목표로 잡았고, 이에 따라 한국의 도시 주변 고속화 도로의 확대 및 서울 - 강원도 지역의 탄광과 이어지는 구간의 도로 건설을 권고하였다.
박정희 정부는 보고서에서 제안된 서울-인천 구간의 고속도로 건설은 기존 계획과 동일하기에 그대로 수용하여 1967년부터 경인고속도로를 건설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서울-수원 구간의 고속도로 건설은 해당 구간을 포함한 서울부터 부산까지 이어지는 고속도로를 건설하여 수출산업의 시너지 효과의 증대를 꾀했다.
한국 정부는 서울-수원 고속도로 건설이 경부고속도로 건설에 포함되어 있으므로 IBRD로부터 차관을 받을 수 있을 거라 판단하였다. 그러나 정부의 예측과는 다르게 IBRD는 경부고속도로를 서울-수원간 고속도로 건설과는 다른 건설로 판단하였고, 차관 지급을 거부하였다. 1968년 한국 정부는 재차 경부고속도로 전체 구간 건설의 기술 및 자금 지원을 신청하였으나 이 또한 기각되면서, IBRD는 경부고속도로 건설을 당 기관 및 IDA의 제안과 무관하게 보고 있음을 보여주었다.
차관을 통한 건설재원 확보가 어려워지자 정부는 IDA 조사보고서에서 제시된 제안중 하나였던 국내 유류세 등의 증세를 통한 재원 확보를 시도했다. 그러나 이는 경부고속도로에 관한 국내 여론의 논란을 야기하였다. 건설자금의 확보 외에도 박정희 정부는 경부고속도로 건설의 정당성을 신민당 등에 의해 비판받았다.
경부고속도로 건설 관련 기사들은 1967년 박정희가 대선 후보 연설에서 발표한 이후 꾸준히 기재되었다. 기사들은 경부고속도로 건설에 대하여 객관적으로 전달하는 것에 더 집중되어 있었다. 고속도로의 기대효과와 파급 효과, 그리고 건설의 당위성에 대한 기대를 적은 기사들이 비판적인 기사들보다 더 많이 기재되었다. 이는 정부를 비롯하여 당시 언론에 종사하던 지식인들이 ‘고속도로에 대하여 무지한’ 일반 국민들에게 고속도로에 대한 이해도를 높이는 것에 집중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당시 기사들은 대게 고속도로로 인한 산업인프라 발전의 용이성, 생활의 편의성 등을 객관적인 수치로 비교하는 기사를 내면서 국민들에게 경부고속도로에 대해 설명하였다.
경부고속도로 건설에 대한 비판도 재기되었다. 계획 구상시기에는 신문기사와 건설부 회의에서 모두 정부 및 건설부의 경부고속도로 건설 계획을 선거를 노린 선전에 불과하다고 비판하였고, 건설 과정 동안에는 IDA조사단의 제안이나 IBRD의 제안을 따르지 않고 박정희 정부가 독자적으로 진행함으로 인해 발생한 자금확보 문제를 지속적으로 비난하였다. 비판들의 논지는 경제의 지역적 균형발전에 초점을 둔 비판 이었다. 일례로 정부가 유류세 증세로 얻은 자금을 고속도로라는 일부 지역에만 특혜가 집중되는 건설에 투자하는 것에 반대하였다.
경부고속도로 건설의 반대 및 비판들은 박정희 정부의 수출산업의 집중적인 개발을 통한 경제발전 구상을 부정하였다. 그러나 IBRD는 한국의 고속도로 개발을 높게 평가하였다. 1969년에는 한국의 토목기술을 높이 평가하였고 2), 1971년에는 한국이 이후의 도로 및 공장 건설에 해외 차관을 얻는 것이 용이할 것으로 평가하였다.
박정희는 차관이 거절되어도 건설을 추진하면서 새로운 목표를 구상하였다. 박정희가 꾸준히 자신의 저서들에서 언급하였던 민족적 자신감을 가지는 것이었다. 경부고 속도로 건설을 설계 단계에서의 자문을 제외하면 오롯이 한국인들의 자본과 기술력 으로 완성된 경부고속도로는, 이후 다른 외국들 및 해외기관들의 대한민국을 높게 평가하는 지표로서 활용되면서 박정희의 새로운 목표까지 충실히 이행되었다.
본 논문은 1968년부터 1971년까지 진행된 경부고속도로 건설이 이뤄지기까지 대한민국의 고속도로 개발 상황과 정권의 고속도로 건설 준비 과정, 그리고 한국 정부가 경부고속도로 건설을 결정하기까지의 과정을 정리하고자 한다. 이를 통해 한국 정부가 경부고속도로 건설을 결정한 이유를 검토하고 경부고속도로가 한국의 경제 발전에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를 확인하고자 한다.
한국의 도로건설은 1961년부터 본격적으로 추진되기 시작했다. 「도로법」이 새로 제정되었고, 관련 행정조직도 개편하였다. 1962년에는 국토건설청이 폐지되고 건설 부가 신설되었으며, 1963년 7월에는 국토종합건설계획을 수립하여 주요 간선도로의 정비와 도로의 고속화가 강조되었다. 서울 주변에서는 건설부와 서울시 등에서 인구 분산을 목적으로 도로 건설이 추진되었으며, 부산 주변에서는 부산시 주도로 인구 분산과 관광 도로 건설이 추진되었다. 추진된 도로 건설 계획 중에는 고속도 도로와 유료 도로, 고속화 도로 등의 유사고속도로 건설이 포함되어 있었다.
1962년부터 시작된 제1차 경제개발5개년계획에는 교통인프라 구축이 목표로 설정 되었지만, 철도 위주의 투자가 이뤄졌고 도로 확충은 상대적으로 부족한 편이었다. 도로의 중요성 및 정부 투자정책의 합리성이 보강된 것은 경제성장에 따른 육로 수송의 문제가 구체적으로 가시화 되면서부터였다. 건설부는 1964년 4월 첫 국토건설 종합심의회에 제출한 서울-인천 특정지역지정안 국토건설 심의서에 고속도로를 언급하면서 고속도로 건설의욕을 보였다. 그러나 건설에 필요한 기술 및 재원을 충분히 확보하지 못하여 건설을 추진하지 못했으며, 정치적으로 고속도로를 건설할 정당성 또한 확보하지 못한 상황이었다.
정부가 본격적으로 고속도로 건설을 시작할 수 있던 건 1965년에 국제부흥개발은 행(International Bank for Reconstruction and Development, IBRD)에 한국 정부가 국내 경제 및 산업 인프라 전반에 대한 조사를 의뢰한 덕분이었다. 의뢰를 받은 IBRD는 협력기관인 국제개발협회(International Development Association, IDA)에 조사단 파견을 의뢰하여 한국의 경제 개발 상황에 대한 전반적인 조사를 진행하였다. 조사 결과보고서는 1966년에 한국 정부에 제출되었는데, 보고서에서 한국의 교통인프라가 철도에만 편중된 것이 지적되었으며 도시 인근 지역에 고속화 도로의 건설을 추천되었다. 그 중 교통이 많은 서울-인천과 서울-수원 구간에는 고속 도로 건설이 제안되었다. 또한 보고서는 한국의 교통망이 동-서 구간이 미흡하다는 점을 지적하고 개선을 촉구했다. 조사단은 한국의 경제 및 교통망을 당시의 대만과 비교하면서 한국의 1차 산업 및 자원수출 산업의 발전을 목표로 잡았고, 이에 따라 한국의 도시 주변 고속화 도로의 확대 및 서울 - 강원도 지역의 탄광과 이어지는 구간의 도로 건설을 권고하였다.
박정희 정부는 보고서에서 제안된 서울-인천 구간의 고속도로 건설은 기존 계획과 동일하기에 그대로 수용하여 1967년부터 경인고속도로를 건설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서울-수원 구간의 고속도로 건설은 해당 구간을 포함한 서울부터 부산까지 이어지는 고속도로를 건설하여 수출산업의 시너지 효과의 증대를 꾀했다.
한국 정부는 서울-수원 고속도로 건설이 경부고속도로 건설에 포함되어 있으므로 IBRD로부터 차관을 받을 수 있을 거라 판단하였다. 그러나 정부의 예측과는 다르게 IBRD는 경부고속도로를 서울-수원간 고속도로 건설과는 다른 건설로 판단하였고, 차관 지급을 거부하였다. 1968년 한국 정부는 재차 경부고속도로 전체 구간 건설의 기술 및 자금 지원을 신청하였으나 이 또한 기각되면서, IBRD는 경부고속도로 건설을 당 기관 및 IDA의 제안과 무관하게 보고 있음을 보여주었다.
차관을 통한 건설재원 확보가 어려워지자 정부는 IDA 조사보고서에서 제시된 제안중 하나였던 국내 유류세 등의 증세를 통한 재원 확보를 시도했다. 그러나 이는 경부고속도로에 관한 국내 여론의 논란을 야기하였다. 건설자금의 확보 외에도 박정희 정부는 경부고속도로 건설의 정당성을 신민당 등에 의해 비판받았다.
경부고속도로 건설 관련 기사들은 1967년 박정희가 대선 후보 연설에서 발표한 이후 꾸준히 기재되었다. 기사들은 경부고속도로 건설에 대하여 객관적으로 전달하는 것에 더 집중되어 있었다. 고속도로의 기대효과와 파급 효과, 그리고 건설의 당위성에 대한 기대를 적은 기사들이 비판적인 기사들보다 더 많이 기재되었다. 이는 정부를 비롯하여 당시 언론에 종사하던 지식인들이 ‘고속도로에 대하여 무지한’ 일반 국민들에게 고속도로에 대한 이해도를 높이는 것에 집중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당시 기사들은 대게 고속도로로 인한 산업인프라 발전의 용이성, 생활의 편의성 등을 객관적인 수치로 비교하는 기사를 내면서 국민들에게 경부고속도로에 대해 설명하였다.
경부고속도로 건설에 대한 비판도 재기되었다. 계획 구상시기에는 신문기사와 건설부 회의에서 모두 정부 및 건설부의 경부고속도로 건설 계획을 선거를 노린 선전에 불과하다고 비판하였고, 건설 과정 동안에는 IDA조사단의 제안이나 IBRD의 제안을 따르지 않고 박정희 정부가 독자적으로 진행함으로 인해 발생한 자금확보 문제를 지속적으로 비난하였다. 비판들의 논지는 경제의 지역적 균형발전에 초점을 둔 비판 이었다. 일례로 정부가 유류세 증세로 얻은 자금을 고속도로라는 일부 지역에만 특혜가 집중되는 건설에 투자하는 것에 반대하였다.
경부고속도로 건설의 반대 및 비판들은 박정희 정부의 수출산업의 집중적인 개발을 통한 경제발전 구상을 부정하였다. 그러나 IBRD는 한국의 고속도로 개발을 높게 평가하였다. 1969년에는 한국의 토목기술을 높이 평가하였고 2), 1971년에는 한국이 이후의 도로 및 공장 건설에 해외 차관을 얻는 것이 용이할 것으로 평가하였다.
박정희는 차관이 거절되어도 건설을 추진하면서 새로운 목표를 구상하였다. 박정희가 꾸준히 자신의 저서들에서 언급하였던 민족적 자신감을 가지는 것이었다. 경부고 속도로 건설을 설계 단계에서의 자문을 제외하면 오롯이 한국인들의 자본과 기술력 으로 완성된 경부고속도로는, 이후 다른 외국들 및 해외기관들의 대한민국을 높게 평가하는 지표로서 활용되면서 박정희의 새로운 목표까지 충실히 이행되었다.
This paper aims to review the status of expressway development, preparation of the Korean government for building expressways, and the decision-making process for the Gyeongbu Expressway, which was constructed from 1968 to 1971. This research attempted to look at the reasons the government decided t...
This paper aims to review the status of expressway development, preparation of the Korean government for building expressways, and the decision-making process for the Gyeongbu Expressway, which was constructed from 1968 to 1971. This research attempted to look at the reasons the government decided to construct the Gyeongbu Expressway and to assess the significance of the Gyeongbu Expressway to Korea’s economic development.
Roads began to be constructed in Korea from 1961. The Roads Act was enacted, and related administrative organizations were reformed. In 1962, the National Land Construction Authority was abolished and the Ministry of Construction was inaugurated. In July 1963, a national land construction plan was established, which focused on repairing major arterial roads and building faster roads. The Ministry of Construction and Seoul City implemented road construction projects in the suburbs of Seoul to promote population decentralization. And Busan City did the same in its surrounding areas for decentralization and tourism promotion. Some of the implemented road construction plans included quasi-expressways such as high-speed roads, toll roads, and motorways.
The First Five-Year Economic Development Plan, which began to be implemented in 1962, contained the establishment of transportation infrastructure as one of its goals, and investment was mostly focused on railroads, less on roads. It was the emergence of land transport issues prompted by economic growth that stressed the importance of roads and rationalized government investment policy. The Ministry of Construction showed its intention to build expressways by mentioning for the first time the term ‘expressway’ in the deliberation paper on national land construction regarding the Seoul-Incheon Specific Area designation, which it submitted to the first National Land Deliberation Committee in April 1964. However, due to a lack of technology and financial resources for construction, construction failed to take off, and justification for expressway construction was not established politically.
when the Korean government requested the International Bank for Reconstruction and Development (IBRD) to investigate the overall Korean economy and industrial infrastructure. The IBRD asked its collaborator International Development Association (IDA) to send a survey team to Korea to conduct a comprehensive examination of the status of Korea’s economic development. The survey report, which was submitted to the Korean government in 1966, found that Korea’s transportation infrastructure was heavily concentrated in railways, and recommended building motorways in the suburbs of cities and constructing expressways in the Seoul-Incheon section and Seoul-Suwon section with heavy traffic volume. The report also indicated that the east-west section of Korea’s transportation network was deficient and urged for an improvement. By comparing Korea and Taiwan in terms of the economy and transportation network, the survey team focused on developing the primary industry sector and resources-exporting industry, and thus recommended expanding motorways surrounding cities in the nation and constructing roads connecting Seoul with coal mines in Gangwon-do.
The Park Chung-hee administration accommodated the construction of the Gyeongin Expressway between Seoul and Incheon as proposed because the proposal was the same as its own plan, and launched construction in 1967. However, the proposed Seoul-Suwon section was extended to the Seoul-Busan section including the proposed section in order to generate synergy for the export industry.
The Korean government thought that as the construction of the Seoul-Suwon Expressway was included in the Gyeongbu Expressway, there would be no problem obtaining loans from the IBRD. Unlike the government’s prediction, the IBRD unfortunately declined loans because it considered the Gyeongbu Expressway different from the Seoul-Suwon Expressway. In 1968, the Korean government applied again for technology and loans for the whole course of the Gyeongbu Expressway, which was rejected, indicating that the IBRD assessed the construction of Gyeongbu Expressway as nothing related to the proposal of itself and IDA.
As it became difficult to secure loans from international development agencies, the government attempted to raise funds through the increase of domestic oil tax which, was one of the options listed in the IDA survey report. However, this stirred controversy over the Gyeongbu Expressway. Already pressured by difficulty of financing, President Park Chung-hee was criticized by the New Democratic Party and others over the rationale to build the Gyeongbu Expressway.
Articles regarding the construction of the Gyeongbu Expressway were steadily carried out since Park Chung-hee announced it in his presidential election candidate speech in 1967. These articles were more focused on objectively informing citizens of the need for the Gyeongbu Expressway construction, i.e. its expected effects, dissemination of expressways, and appropriateness of its construction, Articles in favour of the Gyeongbu Expressway outnumbered those critical of it. This suggests that the media and the government concentrated on increasing the understanding of expressways by the general public who was ignorant about expressways. These articles explained to the public about the Gyeongbu Expressway by presenting objective comparative evidence regarding the industrial infrastructure development and convenience of living to be facilitated by expressways.
Criticism of the Gyeongbu Expressway construction emerged as well. During the planning stage, congressman criticized the Gyeongbu Expressway construction plan of the central government and the Ministry of Construction as a propaganda eyeing for election. During the construction phase, criticism continued over a financing problem caused by the arbitrary decision of the Park Chung-hee administration without following suggestions of the IDA survey team or IBRD’s proposal. The argument of critics was focused on a balanced economic development across regions. For example, they were opposed to using funds from a hike in oil tax for expressways that would give special favour only to some regions.
Opponents of the Gyeongbu Expressway project rejected the vision of export-led economic growth by the Park Chung-hee administration. Nevertheless, the IBRD highly appreciated Korea’s expressway development efforts and rated its civil engineering technology highlyin1969. In 1971, the IBRD assessed that now Korea would easily secure foreign loans for the construction of roads and plants.
While pushing for the construction of the Gyeongbu Expressway despite the decline of loans, Park Chung-hee devised a new goal “Koreans should regain national pride” as President Park consistently wrote in his books. Although Korea received advice for designing the Gyeongbu Expressway, it completed the Gyeongbu Expressway purely with its own capital and technology. Afterwards, the Gyeongbu Expressway was referred to as the evidence with which foreign countries and institutions rated Korea highly, helping to faithfully realize the new goal of Park Chung-hee.
This paper aims to review the status of expressway development, preparation of the Korean government for building expressways, and the decision-making process for the Gyeongbu Expressway, which was constructed from 1968 to 1971. This research attempted to look at the reasons the government decided to construct the Gyeongbu Expressway and to assess the significance of the Gyeongbu Expressway to Korea’s economic development.
Roads began to be constructed in Korea from 1961. The Roads Act was enacted, and related administrative organizations were reformed. In 1962, the National Land Construction Authority was abolished and the Ministry of Construction was inaugurated. In July 1963, a national land construction plan was established, which focused on repairing major arterial roads and building faster roads. The Ministry of Construction and Seoul City implemented road construction projects in the suburbs of Seoul to promote population decentralization. And Busan City did the same in its surrounding areas for decentralization and tourism promotion. Some of the implemented road construction plans included quasi-expressways such as high-speed roads, toll roads, and motorways.
The First Five-Year Economic Development Plan, which began to be implemented in 1962, contained the establishment of transportation infrastructure as one of its goals, and investment was mostly focused on railroads, less on roads. It was the emergence of land transport issues prompted by economic growth that stressed the importance of roads and rationalized government investment policy. The Ministry of Construction showed its intention to build expressways by mentioning for the first time the term ‘expressway’ in the deliberation paper on national land construction regarding the Seoul-Incheon Specific Area designation, which it submitted to the first National Land Deliberation Committee in April 1964. However, due to a lack of technology and financial resources for construction, construction failed to take off, and justification for expressway construction was not established politically.
when the Korean government requested the International Bank for Reconstruction and Development (IBRD) to investigate the overall Korean economy and industrial infrastructure. The IBRD asked its collaborator International Development Association (IDA) to send a survey team to Korea to conduct a comprehensive examination of the status of Korea’s economic development. The survey report, which was submitted to the Korean government in 1966, found that Korea’s transportation infrastructure was heavily concentrated in railways, and recommended building motorways in the suburbs of cities and constructing expressways in the Seoul-Incheon section and Seoul-Suwon section with heavy traffic volume. The report also indicated that the east-west section of Korea’s transportation network was deficient and urged for an improvement. By comparing Korea and Taiwan in terms of the economy and transportation network, the survey team focused on developing the primary industry sector and resources-exporting industry, and thus recommended expanding motorways surrounding cities in the nation and constructing roads connecting Seoul with coal mines in Gangwon-do.
The Park Chung-hee administration accommodated the construction of the Gyeongin Expressway between Seoul and Incheon as proposed because the proposal was the same as its own plan, and launched construction in 1967. However, the proposed Seoul-Suwon section was extended to the Seoul-Busan section including the proposed section in order to generate synergy for the export industry.
The Korean government thought that as the construction of the Seoul-Suwon Expressway was included in the Gyeongbu Expressway, there would be no problem obtaining loans from the IBRD. Unlike the government’s prediction, the IBRD unfortunately declined loans because it considered the Gyeongbu Expressway different from the Seoul-Suwon Expressway. In 1968, the Korean government applied again for technology and loans for the whole course of the Gyeongbu Expressway, which was rejected, indicating that the IBRD assessed the construction of Gyeongbu Expressway as nothing related to the proposal of itself and IDA.
As it became difficult to secure loans from international development agencies, the government attempted to raise funds through the increase of domestic oil tax which, was one of the options listed in the IDA survey report. However, this stirred controversy over the Gyeongbu Expressway. Already pressured by difficulty of financing, President Park Chung-hee was criticized by the New Democratic Party and others over the rationale to build the Gyeongbu Expressway.
Articles regarding the construction of the Gyeongbu Expressway were steadily carried out since Park Chung-hee announced it in his presidential election candidate speech in 1967. These articles were more focused on objectively informing citizens of the need for the Gyeongbu Expressway construction, i.e. its expected effects, dissemination of expressways, and appropriateness of its construction, Articles in favour of the Gyeongbu Expressway outnumbered those critical of it. This suggests that the media and the government concentrated on increasing the understanding of expressways by the general public who was ignorant about expressways. These articles explained to the public about the Gyeongbu Expressway by presenting objective comparative evidence regarding the industrial infrastructure development and convenience of living to be facilitated by expressways.
Criticism of the Gyeongbu Expressway construction emerged as well. During the planning stage, congressman criticized the Gyeongbu Expressway construction plan of the central government and the Ministry of Construction as a propaganda eyeing for election. During the construction phase, criticism continued over a financing problem caused by the arbitrary decision of the Park Chung-hee administration without following suggestions of the IDA survey team or IBRD’s proposal. The argument of critics was focused on a balanced economic development across regions. For example, they were opposed to using funds from a hike in oil tax for expressways that would give special favour only to some regions.
Opponents of the Gyeongbu Expressway project rejected the vision of export-led economic growth by the Park Chung-hee administration. Nevertheless, the IBRD highly appreciated Korea’s expressway development efforts and rated its civil engineering technology highlyin1969. In 1971, the IBRD assessed that now Korea would easily secure foreign loans for the construction of roads and plants.
While pushing for the construction of the Gyeongbu Expressway despite the decline of loans, Park Chung-hee devised a new goal “Koreans should regain national pride” as President Park consistently wrote in his books. Although Korea received advice for designing the Gyeongbu Expressway, it completed the Gyeongbu Expressway purely with its own capital and technology. Afterwards, the Gyeongbu Expressway was referred to as the evidence with which foreign countries and institutions rated Korea highly, helping to faithfully realize the new goal of Park Chung-he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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