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위논문]일본군‘위안부’ 여성의 주체화 과정과 사회적 성원권 연구 : 이용수의 삶과 투쟁을 중심으로 A Study on the Subjectivation and Community Membership of Japanese military ‘Comfort Women’ : Focusing on Lee Yong-Soo’s Life and Struggle원문보기
본 연구는 일본군‘위안부’(이하 군‘위안부’) 여성 이용수의 삶과 투쟁을 통해 군‘위안부’ 여성의 주체화와 사회적 성원권 획득 과정을 연구한다. 2020년 5월 이용수는 기자회견을 통해 군‘위안부’ 운동에 대해 비판했다. 그러나 이용수의 말은 진영 갈등 속에서 사회적 논의로 발전되지 못했다. 본 연구는 바로 이 지점에서 군‘위안부’ 운동이 가졌던 한계를 분석하고 사회적 성찰을 모색한다. 나아가 이용수의 삶과 투쟁을 통해 오늘날 이용수가 군‘위안부’ 운동에 대해 한국 사회에 전하고자 했던 생각을 복원하고자 한다. 이용수를 비롯하여 군‘위안부’ 여성들은 가난한 농촌과 가부장적인 가정에서 벗어나 근대적 주체로 성장하고자 했다. 그러나 식민지 조선에는 일제의 성산업 체제가 구축되고, 전시동원체제가 시작되고 있었다. 여성들은 자기결정권의 균열과 박탈을 겪으며 군‘위안부’로 동원되었다. 일본군‘위안소’에서 여성들은 사회적 보호를 상실한 존재였다. 제국은 일본군을 위해 여성들을 대상으로 성병 검사와 삿쿠(콘돔) 사용을 시행하였다. 여성들은 불결함에 위치되면서 위안소 내 젠더정치의 위계가 발생하였다. 제국은 여성들의 안전과 고용 등을 보장하지 않았다. 여성들은 물건처럼 취급받았고, 제국의 신민이라는 성원권마저 부여되지 않았다. 해방 이후 군‘위안부’ 여성들은 사회적으로 죽은 존재였다. 한국은 국가 건설 과정에서 식민지 시기 구축된 가부장적 가족주의와 국민국가 건설의 통치 시스템을 지속했다. 국가는 일본적인 것을 퇴출하는 동시에 순결을 강조하며 여성을 국민으로 편입했다. 군‘위안부’ 여성들은 가족·사회·국가 어디에도 자신의 피해 경험을 말할 수 없었다. 또한, 국가는 ‘한국군 위안대’와 ‘미군 위안부’ 등을 통해 성산업을 운영·관리하였다. 군‘위안부’ 여성들은 포스트 식민이 연속되는 장소로 쉽게 미끄러졌다. 1991년 군‘위안부’ 여성들은 수요시위를 통해 자신이 겪은 피해를 말할 수 있었다. 여성들은 제국 일본에 순결의 책임을 물으며 피해자로서 한국 사회의 성원권을 획득했다. 이용수는 운동에 적극적으로 결합하면서 피해자를 대표하는 존재이자 세계여성인권운동가로 성장하였다. 2000년대 이후 운동의 대중화와 함께 이용수는 대중운동가로 변모한다. 이용수는 동원 과정에서 강제성을 강조한 증언을 통해 대중을 결집하고 문제를 해결하고자 했다. 한국 사회는 사회적 담론에서 벗어난 군‘위안부’의 경험을 이해하지 못했다. 이용수는 전쟁을 겪으면서 일본 병사(가미가제)와 죽음에 대한 공포 등을 공유했다. 한국 사회는 군‘위안부’ 여성의 연정을 심판대에 세우며, 전형적인 피해 서사 외에는 수용하지 않았다. 이는 여성들이 획득한 군‘위안부’ 피해자의 성원권마저 위태롭게 했다. 2012년 운동단체는 ‘나비기금’ 조성을 통해 전시 성폭력 반대 운동에 나섰다. 이용수는 비례대표 출마를 통해 국가적 차원에서 문제를 해결하고자 했다. 운동의 미래 전략을 두고 이용수와 운동단체가 분화하고 있었다. 하지만 2015한일합의는 이용수와 운동단체의 분화를 지연시키며 한일합의 무효 투쟁의 자리에 함께하게 했다. 한일합의 폐기 투쟁이 일단락되면서 운동단체는 전시 성폭력 반대 운동에 매진했고, 2020년 3월에는 국회 진출을 결정했다. 이용수는 기자회견을 통해 자신과 논의하지 않은 운동의 방식에 대해 비판했다. 이용수는 ‘나는 이용수입니다’로 압축되었던 기자회견을 통해 스스로 투쟁을 조직하겠다고 선언했다. 한국 사회는 이용수의 고민을 사회적인 논의로 발전시키지 못했고, ‘사태’로 규정하며 갈등을 확대했다. 학계를 중심으로 이용수의 기자회견과 군‘위안부’ 운동에 대한 성찰이 제안되었다. 결과적으로 학계에서도 운동단체에 대한 비판 그룹과 역사부인세력에 대한 비판 그룹이 대립하면서 ‘외부적 상황’에 주목하는 그룹이 담론 형성을 주도하였다. ‘이용수의 주체화’에 주목한 그룹들은 이용수가 제기한 운동방식에 대한 비판에 주목하며 사회적 성찰을 촉구하였다. 그러나 이들이 담론 형성을 주도하지 못하면서 이용수가 제기한 운동에 대한 고민을 사회적 의제로 발전시키지 못했다. 운동단체는 국회 진출을 결정하는 과정에서 피해자와 함께 전략을 수립하지 않았다. 2020년 이용수의 기자회견은 전략을 함께 세우지 못하면서 발생한 의사의 불(不)일치였다. 한국 사회는 이용수의 말을 곡해하거나, ‘협의의 당사자성’에 가둔 채 사회적 논의를 시도하지 않았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피해자를 이해하겠다는 일방성과 위계를 해체하고, 이해(불)가능성을 인정하는 자세를 통해 군‘위안부’ 여성의 삶과 투쟁에 접근해야 한다. 또한, 피해자의 피해에 주목하는 것만큼 피해자와 우리가 함께 살고 있는 사회적·문화적 폭력이 만연한 ‘사회’에 주목해야 한다. 이용수를 도와줬던 남장을 즐겨한 언니, 미군‘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해 연대한 여성들, 군‘위안부’ 운동을 통한 미투운동의 규범과 문화로 정립한 사람들은 서로 다른 차별과 폭력을 겪었지만, 서로를 사회적 성원으로 인정하며 여성운동의 겹을 두텁게 만들었다. 바로 이것이 이해(불)가능성이 구성하는 ...
본 연구는 일본군‘위안부’(이하 군‘위안부’) 여성 이용수의 삶과 투쟁을 통해 군‘위안부’ 여성의 주체화와 사회적 성원권 획득 과정을 연구한다. 2020년 5월 이용수는 기자회견을 통해 군‘위안부’ 운동에 대해 비판했다. 그러나 이용수의 말은 진영 갈등 속에서 사회적 논의로 발전되지 못했다. 본 연구는 바로 이 지점에서 군‘위안부’ 운동이 가졌던 한계를 분석하고 사회적 성찰을 모색한다. 나아가 이용수의 삶과 투쟁을 통해 오늘날 이용수가 군‘위안부’ 운동에 대해 한국 사회에 전하고자 했던 생각을 복원하고자 한다. 이용수를 비롯하여 군‘위안부’ 여성들은 가난한 농촌과 가부장적인 가정에서 벗어나 근대적 주체로 성장하고자 했다. 그러나 식민지 조선에는 일제의 성산업 체제가 구축되고, 전시동원체제가 시작되고 있었다. 여성들은 자기결정권의 균열과 박탈을 겪으며 군‘위안부’로 동원되었다. 일본군‘위안소’에서 여성들은 사회적 보호를 상실한 존재였다. 제국은 일본군을 위해 여성들을 대상으로 성병 검사와 삿쿠(콘돔) 사용을 시행하였다. 여성들은 불결함에 위치되면서 위안소 내 젠더정치의 위계가 발생하였다. 제국은 여성들의 안전과 고용 등을 보장하지 않았다. 여성들은 물건처럼 취급받았고, 제국의 신민이라는 성원권마저 부여되지 않았다. 해방 이후 군‘위안부’ 여성들은 사회적으로 죽은 존재였다. 한국은 국가 건설 과정에서 식민지 시기 구축된 가부장적 가족주의와 국민국가 건설의 통치 시스템을 지속했다. 국가는 일본적인 것을 퇴출하는 동시에 순결을 강조하며 여성을 국민으로 편입했다. 군‘위안부’ 여성들은 가족·사회·국가 어디에도 자신의 피해 경험을 말할 수 없었다. 또한, 국가는 ‘한국군 위안대’와 ‘미군 위안부’ 등을 통해 성산업을 운영·관리하였다. 군‘위안부’ 여성들은 포스트 식민이 연속되는 장소로 쉽게 미끄러졌다. 1991년 군‘위안부’ 여성들은 수요시위를 통해 자신이 겪은 피해를 말할 수 있었다. 여성들은 제국 일본에 순결의 책임을 물으며 피해자로서 한국 사회의 성원권을 획득했다. 이용수는 운동에 적극적으로 결합하면서 피해자를 대표하는 존재이자 세계여성인권운동가로 성장하였다. 2000년대 이후 운동의 대중화와 함께 이용수는 대중운동가로 변모한다. 이용수는 동원 과정에서 강제성을 강조한 증언을 통해 대중을 결집하고 문제를 해결하고자 했다. 한국 사회는 사회적 담론에서 벗어난 군‘위안부’의 경험을 이해하지 못했다. 이용수는 전쟁을 겪으면서 일본 병사(가미가제)와 죽음에 대한 공포 등을 공유했다. 한국 사회는 군‘위안부’ 여성의 연정을 심판대에 세우며, 전형적인 피해 서사 외에는 수용하지 않았다. 이는 여성들이 획득한 군‘위안부’ 피해자의 성원권마저 위태롭게 했다. 2012년 운동단체는 ‘나비기금’ 조성을 통해 전시 성폭력 반대 운동에 나섰다. 이용수는 비례대표 출마를 통해 국가적 차원에서 문제를 해결하고자 했다. 운동의 미래 전략을 두고 이용수와 운동단체가 분화하고 있었다. 하지만 2015한일합의는 이용수와 운동단체의 분화를 지연시키며 한일합의 무효 투쟁의 자리에 함께하게 했다. 한일합의 폐기 투쟁이 일단락되면서 운동단체는 전시 성폭력 반대 운동에 매진했고, 2020년 3월에는 국회 진출을 결정했다. 이용수는 기자회견을 통해 자신과 논의하지 않은 운동의 방식에 대해 비판했다. 이용수는 ‘나는 이용수입니다’로 압축되었던 기자회견을 통해 스스로 투쟁을 조직하겠다고 선언했다. 한국 사회는 이용수의 고민을 사회적인 논의로 발전시키지 못했고, ‘사태’로 규정하며 갈등을 확대했다. 학계를 중심으로 이용수의 기자회견과 군‘위안부’ 운동에 대한 성찰이 제안되었다. 결과적으로 학계에서도 운동단체에 대한 비판 그룹과 역사부인세력에 대한 비판 그룹이 대립하면서 ‘외부적 상황’에 주목하는 그룹이 담론 형성을 주도하였다. ‘이용수의 주체화’에 주목한 그룹들은 이용수가 제기한 운동방식에 대한 비판에 주목하며 사회적 성찰을 촉구하였다. 그러나 이들이 담론 형성을 주도하지 못하면서 이용수가 제기한 운동에 대한 고민을 사회적 의제로 발전시키지 못했다. 운동단체는 국회 진출을 결정하는 과정에서 피해자와 함께 전략을 수립하지 않았다. 2020년 이용수의 기자회견은 전략을 함께 세우지 못하면서 발생한 의사의 불(不)일치였다. 한국 사회는 이용수의 말을 곡해하거나, ‘협의의 당사자성’에 가둔 채 사회적 논의를 시도하지 않았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피해자를 이해하겠다는 일방성과 위계를 해체하고, 이해(불)가능성을 인정하는 자세를 통해 군‘위안부’ 여성의 삶과 투쟁에 접근해야 한다. 또한, 피해자의 피해에 주목하는 것만큼 피해자와 우리가 함께 살고 있는 사회적·문화적 폭력이 만연한 ‘사회’에 주목해야 한다. 이용수를 도와줬던 남장을 즐겨한 언니, 미군‘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해 연대한 여성들, 군‘위안부’ 운동을 통한 미투운동의 규범과 문화로 정립한 사람들은 서로 다른 차별과 폭력을 겪었지만, 서로를 사회적 성원으로 인정하며 여성운동의 겹을 두텁게 만들었다. 바로 이것이 이해(불)가능성이 구성하는 겹침의 성원권이다. 한국 사회는 ‘이용수는 왜 그랬을까’라는 질문 대신 한국 사회가 가진 인식의 한계를 성찰하며, 군‘위안부’ 운동에서 사회적 역할을 찾고 성원권을 확장해야 한다. 현재 이용수는 군‘위안부’ 문제를 국제사법재판소(ICJ)·유엔고문방지협약(CAT)을 통해 해결하고자 한다. 그러나 운동단체가 이용수와 함께하지 못하면서 여전히 이용수의 투쟁은 사회적 논의로 확장되지 못하고 있다. 운동단체는 ‘전시 성폭력 반대’ 운동을 활동적으로 전개하지 못하는 실정이고, 수요시위 또한 이전과 같은 활력을 찾기 어렵다. 군‘위안부’ 운동이 성장했던 이유는 피해/생존자와 함께했기 때문이다. 이용수가 제시한 운동에 연대하는 것은 운동단체의 성원권을 복원하는 것이자, 끊임없이 여성의 결을 더하며 사회적 인식을 변화시키는 페미니즘의 전략을 실천하는 것이다. 이용수는 한·일 학생들의 역사 교류가 소원이라 밝히고 있다. 군‘위안부’의 역사적 상처를 해결하지 못하면서 한·일 시민들은 갈등을 반복해왔다. 이용수는 자신의 생애를 바탕으로 한·일 시민들이 역사부인세력에 대항하며 화해하길 요청한다. 한·일 학생들이 동등한 세계 시민의 자격으로 군‘위안부’ 역사를 공부하고, 문제를 해결할 것을 바란다. 한·일 화해를 도모했던 일본군‘위안부’ 여성 이용수를 기억하기 위해 한·일 시민사회 구성원들 공동의 노력과 환대가 필요하다.
본 연구는 일본군‘위안부’(이하 군‘위안부’) 여성 이용수의 삶과 투쟁을 통해 군‘위안부’ 여성의 주체화와 사회적 성원권 획득 과정을 연구한다. 2020년 5월 이용수는 기자회견을 통해 군‘위안부’ 운동에 대해 비판했다. 그러나 이용수의 말은 진영 갈등 속에서 사회적 논의로 발전되지 못했다. 본 연구는 바로 이 지점에서 군‘위안부’ 운동이 가졌던 한계를 분석하고 사회적 성찰을 모색한다. 나아가 이용수의 삶과 투쟁을 통해 오늘날 이용수가 군‘위안부’ 운동에 대해 한국 사회에 전하고자 했던 생각을 복원하고자 한다. 이용수를 비롯하여 군‘위안부’ 여성들은 가난한 농촌과 가부장적인 가정에서 벗어나 근대적 주체로 성장하고자 했다. 그러나 식민지 조선에는 일제의 성산업 체제가 구축되고, 전시동원체제가 시작되고 있었다. 여성들은 자기결정권의 균열과 박탈을 겪으며 군‘위안부’로 동원되었다. 일본군‘위안소’에서 여성들은 사회적 보호를 상실한 존재였다. 제국은 일본군을 위해 여성들을 대상으로 성병 검사와 삿쿠(콘돔) 사용을 시행하였다. 여성들은 불결함에 위치되면서 위안소 내 젠더정치의 위계가 발생하였다. 제국은 여성들의 안전과 고용 등을 보장하지 않았다. 여성들은 물건처럼 취급받았고, 제국의 신민이라는 성원권마저 부여되지 않았다. 해방 이후 군‘위안부’ 여성들은 사회적으로 죽은 존재였다. 한국은 국가 건설 과정에서 식민지 시기 구축된 가부장적 가족주의와 국민국가 건설의 통치 시스템을 지속했다. 국가는 일본적인 것을 퇴출하는 동시에 순결을 강조하며 여성을 국민으로 편입했다. 군‘위안부’ 여성들은 가족·사회·국가 어디에도 자신의 피해 경험을 말할 수 없었다. 또한, 국가는 ‘한국군 위안대’와 ‘미군 위안부’ 등을 통해 성산업을 운영·관리하였다. 군‘위안부’ 여성들은 포스트 식민이 연속되는 장소로 쉽게 미끄러졌다. 1991년 군‘위안부’ 여성들은 수요시위를 통해 자신이 겪은 피해를 말할 수 있었다. 여성들은 제국 일본에 순결의 책임을 물으며 피해자로서 한국 사회의 성원권을 획득했다. 이용수는 운동에 적극적으로 결합하면서 피해자를 대표하는 존재이자 세계여성인권운동가로 성장하였다. 2000년대 이후 운동의 대중화와 함께 이용수는 대중운동가로 변모한다. 이용수는 동원 과정에서 강제성을 강조한 증언을 통해 대중을 결집하고 문제를 해결하고자 했다. 한국 사회는 사회적 담론에서 벗어난 군‘위안부’의 경험을 이해하지 못했다. 이용수는 전쟁을 겪으면서 일본 병사(가미가제)와 죽음에 대한 공포 등을 공유했다. 한국 사회는 군‘위안부’ 여성의 연정을 심판대에 세우며, 전형적인 피해 서사 외에는 수용하지 않았다. 이는 여성들이 획득한 군‘위안부’ 피해자의 성원권마저 위태롭게 했다. 2012년 운동단체는 ‘나비기금’ 조성을 통해 전시 성폭력 반대 운동에 나섰다. 이용수는 비례대표 출마를 통해 국가적 차원에서 문제를 해결하고자 했다. 운동의 미래 전략을 두고 이용수와 운동단체가 분화하고 있었다. 하지만 2015한일합의는 이용수와 운동단체의 분화를 지연시키며 한일합의 무효 투쟁의 자리에 함께하게 했다. 한일합의 폐기 투쟁이 일단락되면서 운동단체는 전시 성폭력 반대 운동에 매진했고, 2020년 3월에는 국회 진출을 결정했다. 이용수는 기자회견을 통해 자신과 논의하지 않은 운동의 방식에 대해 비판했다. 이용수는 ‘나는 이용수입니다’로 압축되었던 기자회견을 통해 스스로 투쟁을 조직하겠다고 선언했다. 한국 사회는 이용수의 고민을 사회적인 논의로 발전시키지 못했고, ‘사태’로 규정하며 갈등을 확대했다. 학계를 중심으로 이용수의 기자회견과 군‘위안부’ 운동에 대한 성찰이 제안되었다. 결과적으로 학계에서도 운동단체에 대한 비판 그룹과 역사부인세력에 대한 비판 그룹이 대립하면서 ‘외부적 상황’에 주목하는 그룹이 담론 형성을 주도하였다. ‘이용수의 주체화’에 주목한 그룹들은 이용수가 제기한 운동방식에 대한 비판에 주목하며 사회적 성찰을 촉구하였다. 그러나 이들이 담론 형성을 주도하지 못하면서 이용수가 제기한 운동에 대한 고민을 사회적 의제로 발전시키지 못했다. 운동단체는 국회 진출을 결정하는 과정에서 피해자와 함께 전략을 수립하지 않았다. 2020년 이용수의 기자회견은 전략을 함께 세우지 못하면서 발생한 의사의 불(不)일치였다. 한국 사회는 이용수의 말을 곡해하거나, ‘협의의 당사자성’에 가둔 채 사회적 논의를 시도하지 않았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피해자를 이해하겠다는 일방성과 위계를 해체하고, 이해(불)가능성을 인정하는 자세를 통해 군‘위안부’ 여성의 삶과 투쟁에 접근해야 한다. 또한, 피해자의 피해에 주목하는 것만큼 피해자와 우리가 함께 살고 있는 사회적·문화적 폭력이 만연한 ‘사회’에 주목해야 한다. 이용수를 도와줬던 남장을 즐겨한 언니, 미군‘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해 연대한 여성들, 군‘위안부’ 운동을 통한 미투운동의 규범과 문화로 정립한 사람들은 서로 다른 차별과 폭력을 겪었지만, 서로를 사회적 성원으로 인정하며 여성운동의 겹을 두텁게 만들었다. 바로 이것이 이해(불)가능성이 구성하는 겹침의 성원권이다. 한국 사회는 ‘이용수는 왜 그랬을까’라는 질문 대신 한국 사회가 가진 인식의 한계를 성찰하며, 군‘위안부’ 운동에서 사회적 역할을 찾고 성원권을 확장해야 한다. 현재 이용수는 군‘위안부’ 문제를 국제사법재판소(ICJ)·유엔고문방지협약(CAT)을 통해 해결하고자 한다. 그러나 운동단체가 이용수와 함께하지 못하면서 여전히 이용수의 투쟁은 사회적 논의로 확장되지 못하고 있다. 운동단체는 ‘전시 성폭력 반대’ 운동을 활동적으로 전개하지 못하는 실정이고, 수요시위 또한 이전과 같은 활력을 찾기 어렵다. 군‘위안부’ 운동이 성장했던 이유는 피해/생존자와 함께했기 때문이다. 이용수가 제시한 운동에 연대하는 것은 운동단체의 성원권을 복원하는 것이자, 끊임없이 여성의 결을 더하며 사회적 인식을 변화시키는 페미니즘의 전략을 실천하는 것이다. 이용수는 한·일 학생들의 역사 교류가 소원이라 밝히고 있다. 군‘위안부’의 역사적 상처를 해결하지 못하면서 한·일 시민들은 갈등을 반복해왔다. 이용수는 자신의 생애를 바탕으로 한·일 시민들이 역사부인세력에 대항하며 화해하길 요청한다. 한·일 학생들이 동등한 세계 시민의 자격으로 군‘위안부’ 역사를 공부하고, 문제를 해결할 것을 바란다. 한·일 화해를 도모했던 일본군‘위안부’ 여성 이용수를 기억하기 위해 한·일 시민사회 구성원들 공동의 노력과 환대가 필요하다.
This study studies the process of acquiring the subjectivation and community membership of Japanese military comfort women (hereinafter referred to as 'comfort women') through the life and struggle of Lee Yong-soo, a woman who was a ‘comfort woman’. In May 2020, Lee Yong-soo criticized the 'comfort ...
This study studies the process of acquiring the subjectivation and community membership of Japanese military comfort women (hereinafter referred to as 'comfort women') through the life and struggle of Lee Yong-soo, a woman who was a ‘comfort woman’. In May 2020, Lee Yong-soo criticized the 'comfort women' movement through a press conference. However, Lee Yong-soo's remarks did not develop into a social discussion because of camp conflict. This study analyzes the limitations of the 'comfort women' movement at this point and seeks social reflection. Furthermore, through Lee Yong-soo's life and struggle, we intend to restore the idea that Lee Yong-soo wanted to convey to Korean society about the 'comfort women' movement today. Lee Yong-soo and other ‘comfort women’ tried to grow into modern subjects, breaking away from poor rural and patriarchal families in Joseon. However, Japanese sex industry system was established in colonial Joseon. And the wartime mobilization system was also beginning. Those women were mobilized as 'comfort women' through cracks and deprivation of self-determination. In the Japanese military 'comfort center', women lost social protection. The Japanese empire conducted venereal disease tests on ‘comfort women’ and forced to wear on satku(condom) for Japanese military. Accordingly, ‘comfort women’ were recognized as filthy beings and the hierarchy of gender politics occurred comfort centers. The empire did not guarantee the safety and employment of ‘comfort women’. Women were treated like a ‘thing’, and were not even granted the community membership as Japanese loyal subjects. After liberating, ‘comfort women’ were socially dead. In the process of national construction, Korea continued to maintain patriarchal familism -which established during the colonial period- and the governance system of national state construction. The state expelled the Japanese thing and incorporated women into the people, emphasizing purity. ‘Comfort women’ could not tell anyone about their damage experiences to their family, society, and country. In addition, the state operated and managed the sex industry through ‘comfort women for the Korean military’ and ‘comfort women for the US military’. Therefore, ‘Comfort women’ were easily led to a place where post-colonization continued. In 1991, ‘comfort women’ were able to talk about the damage they suffered through the ‘Wednesday demonstration’. Women held Japan responsible for broken purity and acquired the community membership of Korean society as victims. While actively combining with the movement, Lee Yong-soo grew into a representative of the victims and a global women's rights activist. With the popularization of the movement since the 2000s, Lee Yong-soo grew up into a popular activist. Lee Yong-soo tried to rally the public and solve the problem through testimony emphasizing coercion in the mobilization process. Korean society did not understand the experience of ‘comfort women' being outside of social discourse. Lee Yong-soo shared her fear of death while going through a war with KamiKaze soldiers. Korean society charged her with the affection for the Japanese soldiers and did not accept anything other than typical victim narratives, which even threatened the community membership of the “comfort women” they had acquired. In 2012, the movement group launched a campaign against wartime sexual violence by raising a ‘Butterfly Fund’. Lee Yong-soo tried to solve the problem at the national level by running for proportional representation. Lee Yong-soo and movement group were disassembled due to the future strategy of social movement. However, the 2015 Korea-Japan agreement delayed the differentiation of Lee Yong-soo and movement groups and made them assemble in the place of ‘nullification for the Korea-Japan agreement’. As the struggle for the nullification of the Korea-Japan agreement ended, the movement group focused on campaigning against wartime sexual violence, and decided to run for the National Assembly in March 2020. In a press conference, Lee Yong-soo criticized the way did not discuss with her. Lee Yong-soo declared that she would organize her own struggle through a press conference represented by “I am Lee Yong-soo”. Korean society failed to develop Lee Yong-soo's remarks into social discussions, and escalated the conflict by defining it as a ‘situation’. Reflection on Lee Yong-soo's press conference and “comfort women” movement was proposed centering on academia. As a result, a group that criticized the movement group and a group that criticized the forces who denied history clashed and a group paying attention to the ‘external situation’ led the discourse in academia. Groups supporting ‘subjectivation of Lee Yong-soo’ focused on the criticism of the way of movement and urged social reflection. However, they failed to lead the formation of discourse and develop her remarks into a social agenda. The movement group did not establish a strategy with the victims in the process of deciding to enter the National Assembly. Lee Yong-soo's press conference in 2020 was a disagreement rising from non-cooperation in strategy formulation. Some of Korean society distorted Lee Yong-soo’s words by forcibly identifying themselves with her, while others did not attempt social discussions, locking the issue in a framework of “consultation is a matter only for the parties‘’. In order to overcome this, one-sidedness and hierarchy of ‘understanding the victims’ must be dismantled. Also, it is necessary to approach the lives and struggles of the 'comfort women' through an attitude of acknowledging (non-)understanding. In addition, as much as paying attention to the victim's damage, we should pay attention to the "society" where social and cultural violence is prevalent where the victim and we live together. The case of a woman who enjoyed dressing up as a man who helped Lee Yong-soo, the case of women's solidarity to resolve the US Military 'Comfort Women' Issue and the case of establishing the “comfort women" movement as a norm and culture of the MeToo movement show that although they have experienced different discrimination and violence, they recognize each other as members of community and made the women's movement strengthened. This is the membership of the overlap that acknowledging (non-)understanding constitutes. Instead of asking '"Why did Lee Yong-soo do that?", Korean society should reflect on the limitations of society's perception, find a social role in the 'comfort women' movement, and expand the community membership. Currently, Lee Yong-soo wants to bring the issue of ‘comfort women’ problem to the International Court of Justice (ICJ) and resolve it through the Committee against Torture (CAT). However, the movement group is not acting with Lee Yong-soo, so her struggle is still not developing into social discussions. Movement group is not actively carrying out the campaign against sexual violence in wartime, and Wednesday demonstration is also difficult to find the same vitality as before. The reason why the ‘comfort women’ movement was able to grow is because the movement group was within the victims and survivors. Solidarity with the movement proposed by Lee Yong-soo is to restore the community membership of movement groups and to practice a feminist strategy which consistently strengthen the women’s movement and change social perception. Lee Yong-soo says that the history exchange between Korean and Japanese students is her wish. While unable to resolve the historical wounds of the 'comfort women', the Korean and Japanese citizens have repeatedly clashed. Based on her life, Lee Yong-soo asks the citizens of Korea and Japan to reconcile and stand up to the historical denial forces. And she hope that Korean and Japanese students will study the history of the ‘comfort women’ and solve the problem as equal global citizens. In order to remember Lee Yong-soo, a “comfort woman” who promoted reconciliation between Korea and Japan, joint efforts and hospitality from Korean and Japanese civil society members are needed.
This study studies the process of acquiring the subjectivation and community membership of Japanese military comfort women (hereinafter referred to as 'comfort women') through the life and struggle of Lee Yong-soo, a woman who was a ‘comfort woman’. In May 2020, Lee Yong-soo criticized the 'comfort women' movement through a press conference. However, Lee Yong-soo's remarks did not develop into a social discussion because of camp conflict. This study analyzes the limitations of the 'comfort women' movement at this point and seeks social reflection. Furthermore, through Lee Yong-soo's life and struggle, we intend to restore the idea that Lee Yong-soo wanted to convey to Korean society about the 'comfort women' movement today. Lee Yong-soo and other ‘comfort women’ tried to grow into modern subjects, breaking away from poor rural and patriarchal families in Joseon. However, Japanese sex industry system was established in colonial Joseon. And the wartime mobilization system was also beginning. Those women were mobilized as 'comfort women' through cracks and deprivation of self-determination. In the Japanese military 'comfort center', women lost social protection. The Japanese empire conducted venereal disease tests on ‘comfort women’ and forced to wear on satku(condom) for Japanese military. Accordingly, ‘comfort women’ were recognized as filthy beings and the hierarchy of gender politics occurred comfort centers. The empire did not guarantee the safety and employment of ‘comfort women’. Women were treated like a ‘thing’, and were not even granted the community membership as Japanese loyal subjects. After liberating, ‘comfort women’ were socially dead. In the process of national construction, Korea continued to maintain patriarchal familism -which established during the colonial period- and the governance system of national state construction. The state expelled the Japanese thing and incorporated women into the people, emphasizing purity. ‘Comfort women’ could not tell anyone about their damage experiences to their family, society, and country. In addition, the state operated and managed the sex industry through ‘comfort women for the Korean military’ and ‘comfort women for the US military’. Therefore, ‘Comfort women’ were easily led to a place where post-colonization continued. In 1991, ‘comfort women’ were able to talk about the damage they suffered through the ‘Wednesday demonstration’. Women held Japan responsible for broken purity and acquired the community membership of Korean society as victims. While actively combining with the movement, Lee Yong-soo grew into a representative of the victims and a global women's rights activist. With the popularization of the movement since the 2000s, Lee Yong-soo grew up into a popular activist. Lee Yong-soo tried to rally the public and solve the problem through testimony emphasizing coercion in the mobilization process. Korean society did not understand the experience of ‘comfort women' being outside of social discourse. Lee Yong-soo shared her fear of death while going through a war with KamiKaze soldiers. Korean society charged her with the affection for the Japanese soldiers and did not accept anything other than typical victim narratives, which even threatened the community membership of the “comfort women” they had acquired. In 2012, the movement group launched a campaign against wartime sexual violence by raising a ‘Butterfly Fund’. Lee Yong-soo tried to solve the problem at the national level by running for proportional representation. Lee Yong-soo and movement group were disassembled due to the future strategy of social movement. However, the 2015 Korea-Japan agreement delayed the differentiation of Lee Yong-soo and movement groups and made them assemble in the place of ‘nullification for the Korea-Japan agreement’. As the struggle for the nullification of the Korea-Japan agreement ended, the movement group focused on campaigning against wartime sexual violence, and decided to run for the National Assembly in March 2020. In a press conference, Lee Yong-soo criticized the way did not discuss with her. Lee Yong-soo declared that she would organize her own struggle through a press conference represented by “I am Lee Yong-soo”. Korean society failed to develop Lee Yong-soo's remarks into social discussions, and escalated the conflict by defining it as a ‘situation’. Reflection on Lee Yong-soo's press conference and “comfort women” movement was proposed centering on academia. As a result, a group that criticized the movement group and a group that criticized the forces who denied history clashed and a group paying attention to the ‘external situation’ led the discourse in academia. Groups supporting ‘subjectivation of Lee Yong-soo’ focused on the criticism of the way of movement and urged social reflection. However, they failed to lead the formation of discourse and develop her remarks into a social agenda. The movement group did not establish a strategy with the victims in the process of deciding to enter the National Assembly. Lee Yong-soo's press conference in 2020 was a disagreement rising from non-cooperation in strategy formulation. Some of Korean society distorted Lee Yong-soo’s words by forcibly identifying themselves with her, while others did not attempt social discussions, locking the issue in a framework of “consultation is a matter only for the parties‘’. In order to overcome this, one-sidedness and hierarchy of ‘understanding the victims’ must be dismantled. Also, it is necessary to approach the lives and struggles of the 'comfort women' through an attitude of acknowledging (non-)understanding. In addition, as much as paying attention to the victim's damage, we should pay attention to the "society" where social and cultural violence is prevalent where the victim and we live together. The case of a woman who enjoyed dressing up as a man who helped Lee Yong-soo, the case of women's solidarity to resolve the US Military 'Comfort Women' Issue and the case of establishing the “comfort women" movement as a norm and culture of the MeToo movement show that although they have experienced different discrimination and violence, they recognize each other as members of community and made the women's movement strengthened. This is the membership of the overlap that acknowledging (non-)understanding constitutes. Instead of asking '"Why did Lee Yong-soo do that?", Korean society should reflect on the limitations of society's perception, find a social role in the 'comfort women' movement, and expand the community membership. Currently, Lee Yong-soo wants to bring the issue of ‘comfort women’ problem to the International Court of Justice (ICJ) and resolve it through the Committee against Torture (CAT). However, the movement group is not acting with Lee Yong-soo, so her struggle is still not developing into social discussions. Movement group is not actively carrying out the campaign against sexual violence in wartime, and Wednesday demonstration is also difficult to find the same vitality as before. The reason why the ‘comfort women’ movement was able to grow is because the movement group was within the victims and survivors. Solidarity with the movement proposed by Lee Yong-soo is to restore the community membership of movement groups and to practice a feminist strategy which consistently strengthen the women’s movement and change social perception. Lee Yong-soo says that the history exchange between Korean and Japanese students is her wish. While unable to resolve the historical wounds of the 'comfort women', the Korean and Japanese citizens have repeatedly clashed. Based on her life, Lee Yong-soo asks the citizens of Korea and Japan to reconcile and stand up to the historical denial forces. And she hope that Korean and Japanese students will study the history of the ‘comfort women’ and solve the problem as equal global citizens. In order to remember Lee Yong-soo, a “comfort woman” who promoted reconciliation between Korea and Japan, joint efforts and hospitality from Korean and Japanese civil society members are need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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