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 연구는 동래 읍성의 입지, 성곽 형태 및 도로망. 관아 및 가옥분포 토지이용 등을 중심으로 조선시대의 경관 복원을 시도한 후. 일제강점기에 나타난 변화를 파악하여 이를 사회ㆍ문화적인 측면에서 설명하고자 하였다. 가야시대부터 취락이 형성되었던 현재의 장소에 고려말 읍성이 이전 입지한 것은 해안방어 요충지와의 접근성을 최대로 하기 위하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후 읍성이 위치한 장소는 동래부의 중심 공간으로 등장하였다. 이와 같은 입지 특성은 4대문 위치 및 성안의 도로망 분포 등에 영향을 주었다. 관아시설의 배치는 중앙 권력의 상징. 읍성 군사 방어 기능과 관련되어 배치되었다. 객사 입지는 중심공간에 지형을 이용하여 권력 질서의 위계를 반영하였으며. 좌측에 동헌. 우측에 향청 및 군사 기능이 배치되었다. 읍성내 취락은 남문을 중심으로 분포하였고. 산록부는 농경지로 이용되었다. 일제 강점기 중 1920년대 시행된 시구개정사업으로 성벽이 철거되었고, 성안에 격자상의 도로망이 신설되었다. 평지에 있던 성벽 자리는 도로용지나 주택지로 이용되었다. 객사와 동헌을 중심으로 형성되었던 성안의 공간구조가 변화되었고. 관아건물은 공공기관으로 사용되거나, 민간인에게 불하되어 다른 용도로 이용되었다. 이 과정을 통하여 읍성이 위치하였던 장소의 상징적 의미는 쇠퇴되었다. 그러나 현대사회에서 읍성은 부산시민에게 역사적인 중심공간으로 자리잡고 있으며. 현재 남아 있는 일부 경관을 중심으로 복원작업이 시도되고 있다. 연구 결과는 읍성이 단순히 건축물이 아닌 당시대의 사회문화가 투영된 경관이며, 각지방에 소재한 읍성은 새로운 시각으로서 재조명되어야 할 것임을 보여준다.
본 연구는 동래 읍성의 입지, 성곽 형태 및 도로망. 관아 및 가옥분포 토지이용 등을 중심으로 조선시대의 경관 복원을 시도한 후. 일제강점기에 나타난 변화를 파악하여 이를 사회ㆍ문화적인 측면에서 설명하고자 하였다. 가야시대부터 취락이 형성되었던 현재의 장소에 고려말 읍성이 이전 입지한 것은 해안방어 요충지와의 접근성을 최대로 하기 위하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후 읍성이 위치한 장소는 동래부의 중심 공간으로 등장하였다. 이와 같은 입지 특성은 4대문 위치 및 성안의 도로망 분포 등에 영향을 주었다. 관아시설의 배치는 중앙 권력의 상징. 읍성 군사 방어 기능과 관련되어 배치되었다. 객사 입지는 중심공간에 지형을 이용하여 권력 질서의 위계를 반영하였으며. 좌측에 동헌. 우측에 향청 및 군사 기능이 배치되었다. 읍성내 취락은 남문을 중심으로 분포하였고. 산록부는 농경지로 이용되었다. 일제 강점기 중 1920년대 시행된 시구개정사업으로 성벽이 철거되었고, 성안에 격자상의 도로망이 신설되었다. 평지에 있던 성벽 자리는 도로용지나 주택지로 이용되었다. 객사와 동헌을 중심으로 형성되었던 성안의 공간구조가 변화되었고. 관아건물은 공공기관으로 사용되거나, 민간인에게 불하되어 다른 용도로 이용되었다. 이 과정을 통하여 읍성이 위치하였던 장소의 상징적 의미는 쇠퇴되었다. 그러나 현대사회에서 읍성은 부산시민에게 역사적인 중심공간으로 자리잡고 있으며. 현재 남아 있는 일부 경관을 중심으로 복원작업이 시도되고 있다. 연구 결과는 읍성이 단순히 건축물이 아닌 당시대의 사회문화가 투영된 경관이며, 각지방에 소재한 읍성은 새로운 시각으로서 재조명되어야 할 것임을 보여준다.
Dongrae-bu, the administrative central area in Busan in Chosun-dynasty(1392-1910), performed the large parts of diplomatic and trading functions with Japan because of its geographical conditions. Because of his location, landscape of Dongrae city-wall is the mirror of political and military meaning ...
Dongrae-bu, the administrative central area in Busan in Chosun-dynasty(1392-1910), performed the large parts of diplomatic and trading functions with Japan because of its geographical conditions. Because of his location, landscape of Dongrae city-wall is the mirror of political and military meaning in Chosun-dynasty period. Elements of landscape, such as site of city-wall, location and morphology of gates, government official buildings and the road systems can be interpreted by the functional and socio-cultural terms. The changes of landscape during Japanese colonial period(1910-1945) show that destruction of city-walt went on for the purpose of imperialism. Especially, the landscape which had political meaning in Chosun-dynasty had erased in terms of modem urban planning. Cates of city-wall, official guest house, fortress which symbolize the governing and political power of Chosun-dynasty were destructed almost perfectively. New road system was imported Urban planning was effective instrument through which city-wall could be destroyed for the Japanese colonialism. Under those processes, traditional structure was changed towards the dependency on Japan. Those relict landscape are remained in present urban landscape such as road system, cul-de sac, house and cornerstones. Those results of this study show that city-wall in Korea should be studied in terms of socio-cultural aspects in each periods.
Dongrae-bu, the administrative central area in Busan in Chosun-dynasty(1392-1910), performed the large parts of diplomatic and trading functions with Japan because of its geographical conditions. Because of his location, landscape of Dongrae city-wall is the mirror of political and military meaning in Chosun-dynasty period. Elements of landscape, such as site of city-wall, location and morphology of gates, government official buildings and the road systems can be interpreted by the functional and socio-cultural terms. The changes of landscape during Japanese colonial period(1910-1945) show that destruction of city-walt went on for the purpose of imperialism. Especially, the landscape which had political meaning in Chosun-dynasty had erased in terms of modem urban planning. Cates of city-wall, official guest house, fortress which symbolize the governing and political power of Chosun-dynasty were destructed almost perfectively. New road system was imported Urban planning was effective instrument through which city-wall could be destroyed for the Japanese colonialism. Under those processes, traditional structure was changed towards the dependency on Japan. Those relict landscape are remained in present urban landscape such as road system, cul-de sac, house and cornerstones. Those results of this study show that city-wall in Korea should be studied in terms of socio-cultural aspects in each period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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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 정의
토지 이용 등의 경관 변화 내용을 통해 장소의 성격이 어떻게 변화되었는가를 확인하고자 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변화가 현대 도시 경관에 어떠한 형태로 남아 있는지를 파악함으로서, 부산 문화의 역사 지리적인 정체성 확립에 기초를 제공하고자 하였다.
본 논문에서 조선시대 읍성 경관의 복원은 입지, 규모와 형태, 성문 및 도로망 배礼 주요 관아건물과 취락 분포. 토지이용 등을 통하여 시도하였다.
본 연구는 부산시에 소재한 동래 읍성의 성벽 및 문루, 관아 시설, 취락 및 토지이용을 중심으로 조선-일제 강점기 중 나타난 경관 변화를 파악하고자 하였다. 연구자료는 고지도 및 지리지, 일제시대 발행된 지적원도(1915) 및 지적도(1930) 등을 통해 수집되었으며, 현지답사를 통해 보완되었다.
참조). 본 연구에서는 읍성 입지, 성벽 형태 및 도로망, 관아 및 가옥분포, 토지이용 등을 중심으로 조선 시대 경관의 복원을 시도한 후, 읍성의 장소성이 경관에 반영된 내용과, 이의 사회·문화적 의미를 분석하고자 하였다. 또한 일제강점기에 식민지 도시로서의 공간 재편과정에서 성벽 철거 및 신작로의 개설.
또한 일제강점기에 식민지 도시로서의 공간 재편과정에서 성벽 철거 및 신작로의 개설. 토지 이용 등의 경관 변화 내용을 통해 장소의 성격이 어떻게 변화되었는가를 확인하고자 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변화가 현대 도시 경관에 어떠한 형태로 남아 있는지를 파악함으로서, 부산 문화의 역사 지리적인 정체성 확립에 기초를 제공하고자 하였다.
제안 방법
토지이용 등을 통하여 시도하였다. 연구자료로는 동래부를 대상으로 편찬된 地理志와 「東萊府築城瞻錄」(1731)3, 古地圖 등 문헌과「萊州 築城碑」" 등의 비문 등을 활용하였으며, 이를 통해 축성 배경, 입지 및 형태 특성, 관아 건물 등을 파악한 후 이의 구체적인 위치를 확인하였다. 위치 파악에 사용된 주 자료는 조선총독부에서 발행한 지적원도(1;2000.
사업 추진과정과 주민들의 대응 등에 대해 시구개정사업의 내용이 실린 당시 신문 기사 등을 통해 간접적으로 파악하였다. 철거 성벽, 신작로 개설 등의 구체적인 변화는 지적도(1930)" 를 지적원도(1915)와 비교하여 분석하였다. 일제강점기 중의 읍성에 대한 자료는 사진, 기록, 통계자료 등이 비교적 많이 남아 있어, 지도분석에서 파악되지 않은 내용들은 이들 자료 및 관련 인사들의 면담과 현지 답사를 통해 보완하였다.
1702년(숙종 28) 산성의 수축이 있었으나 완료되지 않았고, 1707년(숙종 33) 다시 中城을 쌓았다. 그러나 규모가 너무 커서 수비하는데 용이하지 않은 약점이 드러나, 수축을 추진하던 경상도 관찰사 조태동은 원래 府治를 포괄하는 대규모 산성을 축조하는 것까지 계획하였다. 이는 완성되지 못한 채 1714년(숙종 40) 혁파되었다.
하였다. 연구자료는 고지도 및 지리지, 일제시대 발행된 지적원도(1915) 및 지적도(1930) 등을 통해 수집되었으며, 현지답사를 통해 보완되었다. 본 연구에서는 읍성이 입지한 장소는 역사 시대마다 중앙 정치세력의 지배와 통제의 대상이 되면서, 정치.
1915戸와 현재 지형도이다. 지적원도를 통하여 성벽 및 문루의 위치를 파악한 후, 이를 현 지형도와 비교하였고, 현지 답사를 통해 성벽 흔적, 도로 형태 등을 확인하였다. 성안의 토지이용은 지적원도의 지목을 통하여 필지를 복원하여, 취락 및 전답 분포, 도로망과 소하천 분포.
취락 분포. 토지이용 등을 통하여 시도하였다. 연구자료로는 동래부를 대상으로 편찬된 地理志와 「東萊府築城瞻錄」(1731)3, 古地圖 등 문헌과「萊州 築城碑」" 등의 비문 등을 활용하였으며, 이를 통해 축성 배경, 입지 및 형태 특성, 관아 건물 등을 파악한 후 이의 구체적인 위치를 확인하였다.
토지이용 및 도로망의 변화, 취락분포의 변화를 중심으로 분석되었다. 사업 추진과정과 주민들의 대응 등에 대해 시구개정사업의 내용이 실린 당시 신문 기사 등을 통해 간접적으로 파악하였다.
대상 데이터
윤산에 배산, 금정산에 황령산이 표현되어 있다. 金井山에서 다대포로 이어지는 줄기와 上山(현 장산)으로 이어지는 줄기를 각각 외백호. 외청룡으로 그려져있다闩
특히 서문에서 남문에 이르는 성벽은(B, D 지점) 철거되면서 간선도로가 신설되어 시가지 교통수단인 전차 노선이 부설되었다27'. 남문과 동문의 성벽을 철거하여 신설된 도로는 동해남부선 철도와 나란히 달리도록 하여 이 지역의 중심 도로로 이용되었다. 이와 같이 성벽 철거 과정에 대한 내용은 시구개정사업의 주목적이 간선 도로망 개설이었고, 이를 통해 읍성은 식민지 도시로 편입되어갔음을 보여준다.
동헌은 동래군청 청사로 이용되었다. 이후 시구 개정사업에 의해 충신당만 원래의 위치에 유지되고 나머지 부속건물은 이전되거나 철거되었다.
일제강점기 중의 읍성에 대한 자료는 사진, 기록, 통계자료 등이 비교적 많이 남아 있어, 지도분석에서 파악되지 않은 내용들은 이들 자료 및 관련 인사들의 면담과 현지 답사를 통해 보완하였다. 본 연구의 시·공간적인 범위는 조선 후기부터 일제 강점기까지의 읍성내로 한정하였다. 이는 자료취득의 여러 가지 제약 조건과 해석의 어려움에도 기인하였지만, 이 시기가 읍성 경관이 가장 심하게 변하였던 시기였고.
이론/모형
「東萊府殉節圖」에 그려진 동래 읍성은 조선후기 수축되기 전의 읍성 모습으로 추정된다. 당시의 전투내용을 한 화폭에 담기 위해 높은 곳에서 내려다보는 식의 부감법을 사용하였다. 그림의 윗 부분에는 동래 읍성 북쪽의 윤산이 매우 뚜렷하게 그려져 있고, 중앙부에는 성곽과 동서남북의 성문 및 문루를 비교적 사실적으로 그리고 있다.
1) 조선시대 당시 동래 읍성의 경관은 일반적인 도시 계획의 형태를 바탕으로 읍치 지형과 읍성 기능. 중앙 권력의 상징성과 장소에 대한 가치 부여 등이 중시되면서 구성되어 있었다.
2) 일제강점기 중 나타난 경관변화를 볼 때 다른 읍성에 비해 보다 철저하게 목적 의식을 지니면서 진행된 것으로 사료된다. 강점기 초기 객사 자리에 교육기관이 입지하여 현재에도 동일한 용도로 사용되는 것이 대부분 읍성의 공통적인 현상이다.
이상의 연구 결과에서, 동래 읍성에는 고려말-조선 시대의 생성 및 발전단계, 일제 강점기 중 훼손 및 철거단계를 거쳐 현재 일부 복원단계 등 3단계로 경관 변화가 나타나고 있음이 확인되었다. 현재 읍성이 위치하였던 장소에 중첩되어 나타나는 역사 경관들은 각 시대적 단계에 형성된 장소적 성격이 투영된 결과물들이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으로 괴정동, 옥천동, 복상동, 부가동 등은 복천동으로, 성안의 안국동, 수민동, 장남동, 평남동, 안민동, 신락동, 성 밖의 남문동, 율북동 등이 수안동으로 개칭. 통합되었고, 성안의 신락동과 성밖의 회용동을 합쳐 낙민동으로 되었다. 만화동, 회인동 생민동은 칠산동으로되어 이전에 서부와 동부로 구분되었던 13개 동리는 4개 동으로 되었다.
후속연구
성벽 터에 이와 같이 일정한 규모의 가옥이 세워진 것은 철거로 생겨난 부지를 일정한 크기로 분할하여 불하한 결과로 생각된다. 불하 이유가 성벽철거 비용을 조달하기 위한 것인지 혹은 성벽과 인접한 가옥에 거주하는 빈민층 주민들에게 대지를 제공하기 위한 것인지는 좀 더 상세한 연구가 필요하다. 능선에서 평지에 이르는 완만한 경사지로 동장대~현대아파트 옆 일대와 서장대 아래~동래고등학교(C 지점)의 성벽은 자연적으로 허물어지거나 농경지로 이용되었고 성돌은 밭의 축대로 이용되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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