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 연구는 조선시대의 고문서에 사용된 종이를 분석하여 그 특징을 고찰함에 그 목적을 두고 있다. 현존하는 종이 실물의 분석을 통하여 조선시대 고문서에 사용된 종이의 상태와 변화를 실질적으로 관찰해 보고자 한다. 분석대상은 문중에 소장하고 있는 고문서 1,504건으로, 그 종류는 17종 23항이다. 분석방법으로는 종이의 발형태(발초 발끈의 형태), 밀도, 섬유종류를 분석하는 방법을 시도하였다. 우선 발의 형태는 발초수와 발끈폭으로 나누어 관찰하였는데, 3cm내의 발초수는 크게 10개 내외의 경우와 17개 내외의 경우로 나누어진다. 17개 내외의 경우는 조선초기의 책지에서 보이는 발초수와 유사하나, 10개 내외의 경우는 그 사례가 드물다. 10개 내외의 발초수를 갖춘 것은 1933년 Dard Hunter의 조사에 보이는 억새발인 것으로 파악된다. 발초수를 시기적으로 살펴보면, 조선전기에 비해 중기부터 말기로 갈수록 발초가 더욱 촘촘해짐을 확인할 수 있다. 발끈폭은 상당히 불규칙적으로 나타나며, 이외에도 다양한 현상을 발견할 수 있다. 예를 들면, 발끈과 발끈 사이에 짧은 발끈이 있는 경우, 발끈이 이중으로 나타나는 경우, 발끈폭이 좁게 나타나는 경우 등이 그것이다. 발끈폭은 조선후기로 갈수록 좁아지는 현상을 보이는데, 특히 1800년대 이후에 확연히 좁아짐을 알 수 있다. 다음으로 밀도를 살펴보면, 문서종류마다 나타나는 평균밀도가 "탁지준절(度支準折)"에 기록된 종이 종류와 무관하지 않다. 종이 종류의 항목이 같은 문서는 서로 유사한 평균밀도를 보이며 초주지, 상품도련지, 하품도련지, 저주지의 순으로 밀도가 점점 낮아진다. 이외에도 같은 종류 문서의 밀도를 분석해 보면 당시에 문서를 둘러싼 다양한 이해관계를 알 수 있다. 마지막으로 문서지에 사용된 식물섬유의 종류를 살펴보았다. "탁지준절"에서 구분한 상품도련지, 하품도련지, 초주지, 저주지를 사용한 각 문서지의 섬유를 관찰한 결과, 모두 같은 형태의 닥섬유임을 알 수 있다. 이는 문서지 제조에 사용된 종이가 식물섬유의 차이에 의해서 구분되었던 것이 아니라, 제작 가공방법 등의 차이로 구분되었음을 알려주는 것이다. 문서의 작성목적에 따라 종이의 종류를 다르게 사용하고, 시기에 따라서도 종이의 특징이 다른 양상으로 나타난다. 본 연구를 통해서 책지(冊紙)와 문서지(文書紙)의 비교를 할 수 있고, 중국의 고대 종이와 조선시대 종이의 비교도 가능하게 되었다. 이와 같은 연구를 통해 당시의 종이 종류와 문서종류별 시대별 변화과정을 구체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계기가 되리라 믿는다.
본 연구는 조선시대의 고문서에 사용된 종이를 분석하여 그 특징을 고찰함에 그 목적을 두고 있다. 현존하는 종이 실물의 분석을 통하여 조선시대 고문서에 사용된 종이의 상태와 변화를 실질적으로 관찰해 보고자 한다. 분석대상은 문중에 소장하고 있는 고문서 1,504건으로, 그 종류는 17종 23항이다. 분석방법으로는 종이의 발형태(발초 발끈의 형태), 밀도, 섬유종류를 분석하는 방법을 시도하였다. 우선 발의 형태는 발초수와 발끈폭으로 나누어 관찰하였는데, 3cm내의 발초수는 크게 10개 내외의 경우와 17개 내외의 경우로 나누어진다. 17개 내외의 경우는 조선초기의 책지에서 보이는 발초수와 유사하나, 10개 내외의 경우는 그 사례가 드물다. 10개 내외의 발초수를 갖춘 것은 1933년 Dard Hunter의 조사에 보이는 억새발인 것으로 파악된다. 발초수를 시기적으로 살펴보면, 조선전기에 비해 중기부터 말기로 갈수록 발초가 더욱 촘촘해짐을 확인할 수 있다. 발끈폭은 상당히 불규칙적으로 나타나며, 이외에도 다양한 현상을 발견할 수 있다. 예를 들면, 발끈과 발끈 사이에 짧은 발끈이 있는 경우, 발끈이 이중으로 나타나는 경우, 발끈폭이 좁게 나타나는 경우 등이 그것이다. 발끈폭은 조선후기로 갈수록 좁아지는 현상을 보이는데, 특히 1800년대 이후에 확연히 좁아짐을 알 수 있다. 다음으로 밀도를 살펴보면, 문서종류마다 나타나는 평균밀도가 "탁지준절(度支準折)"에 기록된 종이 종류와 무관하지 않다. 종이 종류의 항목이 같은 문서는 서로 유사한 평균밀도를 보이며 초주지, 상품도련지, 하품도련지, 저주지의 순으로 밀도가 점점 낮아진다. 이외에도 같은 종류 문서의 밀도를 분석해 보면 당시에 문서를 둘러싼 다양한 이해관계를 알 수 있다. 마지막으로 문서지에 사용된 식물섬유의 종류를 살펴보았다. "탁지준절"에서 구분한 상품도련지, 하품도련지, 초주지, 저주지를 사용한 각 문서지의 섬유를 관찰한 결과, 모두 같은 형태의 닥섬유임을 알 수 있다. 이는 문서지 제조에 사용된 종이가 식물섬유의 차이에 의해서 구분되었던 것이 아니라, 제작 가공방법 등의 차이로 구분되었음을 알려주는 것이다. 문서의 작성목적에 따라 종이의 종류를 다르게 사용하고, 시기에 따라서도 종이의 특징이 다른 양상으로 나타난다. 본 연구를 통해서 책지(冊紙)와 문서지(文書紙)의 비교를 할 수 있고, 중국의 고대 종이와 조선시대 종이의 비교도 가능하게 되었다. 이와 같은 연구를 통해 당시의 종이 종류와 문서종류별 시대별 변화과정을 구체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계기가 되리라 믿는다.
This study is that the name from Tagjijunjeol is compared with the actual papers used in historical documents. I have selected the families having had influencing power in Gyungi-Do(京畿道), Gyungsang-Do(慶尙道), Jeonra-Do(全羅道), Chungcheung-Do(忠淸道), and analyzed 1504 articles of historical documents owned...
This study is that the name from Tagjijunjeol is compared with the actual papers used in historical documents. I have selected the families having had influencing power in Gyungi-Do(京畿道), Gyungsang-Do(慶尙道), Jeonra-Do(全羅道), Chungcheung-Do(忠淸道), and analyzed 1504 articles of historical documents owned by those families. I checked up each papers used in historical documents in it's shape of screens, density, raw material. I cannot find the feature of it's region, but prominent feature according to the types and period of historical documents. At first, I have surveyed the impressions of screen marks in papers. The number of strips can be divided into two cases, around 10 and around 17. The case around 17 is similar to the number seen in the book paper of the early Joseon Dynasty, but the case around 10 is rare. Dard Hunter said in his book, published in 1933, that screens were made of Korean grass(Miscanthus sp.) at that time in Korea. I guess the impressions of screen marks of the case around 10 was made of Korean grass, Miscanthus sp.. The case around 10 and the case around 17 were not different in period, but the contemporary appearance. However, if we look into the change of strips' number, we can learn that it becomes more dense as time goes by. The intervals of hair stitch, contrary to book paper, have appeared irregularly and a short hair stitch was frequently found between long hair stitches. This was the result of fastening extra stitch to increase the firmness of strips, as the part of screens which was frequently touched by hands would wear out easily. Then, have look into the density. Each kinds of historical documents had a wide range of density. But the average have had relationship with the kinds of paper written in Tagjijunjeol. The historical documents having the same item of paper have kept similar densities. From the density variation of Gosingyoji(告身敎旨), the letter of appointment the official rank over 5 by king, based on time periods, we can see a great disparity between before and after Imjin-waeran war. Before Imjin-waeran war paper's quality was high, right after Imjin-waeran war went abruptly down, and went gradually up just from 1650's, but since 1700's quality has not risen more, kept the value. On the contrary, the density of Gyocheop(敎牒), the letter of appointment the official rank under 5 by the Ministry of Personnel and the Ministry of Military, have not had a great disparity according to time periods, but had a lower density than Gosingyoji. Joseon Dynasty has strictly divided Gosingyoji appointing the official rank over 5 from Gyocheop appointing the official rank under 5, it seems to distinguish the appointment by king from the appointment by Ijo(吏曹), the Ministry of Personnel and Byeongjo(兵曹), the Ministry of Military.
This study is that the name from Tagjijunjeol is compared with the actual papers used in historical documents. I have selected the families having had influencing power in Gyungi-Do(京畿道), Gyungsang-Do(慶尙道), Jeonra-Do(全羅道), Chungcheung-Do(忠淸道), and analyzed 1504 articles of historical documents owned by those families. I checked up each papers used in historical documents in it's shape of screens, density, raw material. I cannot find the feature of it's region, but prominent feature according to the types and period of historical documents. At first, I have surveyed the impressions of screen marks in papers. The number of strips can be divided into two cases, around 10 and around 17. The case around 17 is similar to the number seen in the book paper of the early Joseon Dynasty, but the case around 10 is rare. Dard Hunter said in his book, published in 1933, that screens were made of Korean grass(Miscanthus sp.) at that time in Korea. I guess the impressions of screen marks of the case around 10 was made of Korean grass, Miscanthus sp.. The case around 10 and the case around 17 were not different in period, but the contemporary appearance. However, if we look into the change of strips' number, we can learn that it becomes more dense as time goes by. The intervals of hair stitch, contrary to book paper, have appeared irregularly and a short hair stitch was frequently found between long hair stitches. This was the result of fastening extra stitch to increase the firmness of strips, as the part of screens which was frequently touched by hands would wear out easily. Then, have look into the density. Each kinds of historical documents had a wide range of density. But the average have had relationship with the kinds of paper written in Tagjijunjeol. The historical documents having the same item of paper have kept similar densities. From the density variation of Gosingyoji(告身敎旨), the letter of appointment the official rank over 5 by king, based on time periods, we can see a great disparity between before and after Imjin-waeran war. Before Imjin-waeran war paper's quality was high, right after Imjin-waeran war went abruptly down, and went gradually up just from 1650's, but since 1700's quality has not risen more, kept the value. On the contrary, the density of Gyocheop(敎牒), the letter of appointment the official rank under 5 by the Ministry of Personnel and the Ministry of Military, have not had a great disparity according to time periods, but had a lower density than Gosingyoji. Joseon Dynasty has strictly divided Gosingyoji appointing the official rank over 5 from Gyocheop appointing the official rank under 5, it seems to distinguish the appointment by king from the appointment by Ijo(吏曹), the Ministry of Personnel and Byeongjo(兵曹), the Ministry of Milita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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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 정의
지금까지 문서지를 분석한 결과에 대해 살펴보았다. 끝으로 책지에 대한 연구 결과와 본 연구의 대상이었던 문서지에 대한 결과를 비교해 보고자 한다.
그러므로 이러한 변모과정을 구체적으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현존하는 문서지를 시기별 · 문서종류별로 나누어 살피는 포괄적인 연구와 함께, 각종 문헌에 등장하는 문서지와 현존하는 문서지를 비교 · 분석하는 세부적인 연구가 필요하다. 따라서 본고에서는 우선 현존하는 문서지를 문서종류별로 나누어 각 시기마다 어떠한 양상을 띠며 변모해 갔는지 살펴보고, 문헌상에 보이는 각종의 종이를 기준으로 현존하는 문서지를 비교해 봄으로써 그 문서지가 갖는 고유한 성격을 규명해 보고자 한다. 아울러 기존의 연구를 토대로 書冊에 사용된 冊紙가 문서지의 성격과 어떻게 다른지도 함께 살펴보고자 한다.
본고에서는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문서지의 분석방법을 발의 형태, 밀도, 섬유종류로 크게 나누고, 각각의 항목 속에서 특징이 두드러진 문서종류를 중심으로 분석해 나가고자 한다. 또한 분석대상으로 삼은 문서 가운데 가장 많은 분포를 보인 告身敎旨, 敎牒, 所志類, 明文의 경우는 각각의 시기적 경향성을 중심으로 논의를 전개하고자 한다.
본고에서는 발의 형태가 보이지 않는 종이는 제외하고 발무늬가 드러나는 文書紙만을 그 대상으로 하여 발의 형태를 관찰하였다. 발의 형태를 관찰하기 위해서 2가지 방법을 시도하였다.
본고에서는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문서지의 분석방법을 발의 형태, 밀도, 섬유종류로 크게 나누고, 각각의 항목 속에서 특징이 두드러진 문서종류를 중심으로 분석해 나가고자 한다. 또한 분석대상으로 삼은 문서 가운데 가장 많은 분포를 보인 告身敎旨, 敎牒, 所志類, 明文의 경우는 각각의 시기적 경향성을 중심으로 논의를 전개하고자 한다.
본고에서는 현존하는 종이 실물의 분석을 통하여 조선시대 고문서에 사용된 종이의 상태와 변화를 실질적으로 관찰해 보고자 한다. 시대적인 사건 또는 문서의 종류에 따라 조선시대의 종이는 다양한 형태를 띠며 변모하였던 것으로 파악된다.
따라서 본고에서는 우선 현존하는 문서지를 문서종류별로 나누어 각 시기마다 어떠한 양상을 띠며 변모해 갔는지 살펴보고, 문헌상에 보이는 각종의 종이를 기준으로 현존하는 문서지를 비교해 봄으로써 그 문서지가 갖는 고유한 성격을 규명해 보고자 한다. 아울러 기존의 연구를 토대로 書冊에 사용된 冊紙가 문서지의 성격과 어떻게 다른지도 함께 살펴보고자 한다.
지금까지 문서지를 분석한 결과에 대해 살펴보았다. 끝으로 책지에 대한 연구 결과와 본 연구의 대상이었던 문서지에 대한 결과를 비교해 보고자 한다.
가설 설정
그러나 발초가 오랫동안 물속에 담겨져 있으면 발초가 퉁퉁 불어나 서로 눌러 붙게 된다.16) 이러한 상태의 발로 종이를 뜨게 되면 발의 형태가 희미하게 나타나거나 보이지 않게 된다. 종이에 발의 형태가 보이지 않을 가능성은 위의 3가지로 추측할 수 있다.
21) 갈대발로 종이를 뜨게 되면 10개 내외의 발형태가 보이는 종이를 뜰 수 있는 것이다(그림 8, 9 참조). 1933년 Dard Hunter의 기록과 같이, 당시에 억새로 제작된 발이 있었다면, 조선시대부터 사용하였다고 볼 수 있고, 조선시대 종이에 비치는 10개 내외의 발초 형태는 곧 억새발일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는 것이다.
우선 分財記의 경우 여러 형제 · 자녀에게 분재하는 내용을 한 문서에 모두 기록하는 和會文記와 衿給文記가 있고, 分財의 내용을 개별적으로 기록하는 分給文記 및 別給文記가 있다.29) 두 경우를 분석한 결과 밀도에서 차이를 보였다.
종이에 비치는 발의 형태를 육안으로 관찰할 수 있다.8) 종이에 비치는 발무늬는 2가지로 측정할 수 있다. 즉 발초의 수와 발을 묶고 있는 실의 간격이다.
제안 방법
2) 여기에서는 왕실 및 각 관청에서 사용되는 물자를 항목별로 분류 · 정리한 『度支準折』의 紙地 항목을 중심으로 당시에 사용되었던 종이 76항 93종을 정리하고, 고문서에 주로 사용되었던 8종의 종이 특징을 살펴보았다.
이를테면 종이의 强度, 白色度, 不透明度, 平滑性, 通氣性, 吸防濕性 등의 요소는 현대적 기술을 이용한 종이분석의 주요기준이 된다. 그러나 본 연구에서는 문서지를 3가지 방법에 의해 분석하고자 한다. 즉 발의 형태와 섬유의 종류6), 그리고 도련한 정도를 기준으로 삼았으며,7) 각각의 측정 방법은 다음과 같다.
일정한 간격 내에 있는 발초의 수(A)와 발초를 묶고 있는 발끈의 간격(B)을 측정하는 방법이다(그림 5 참조). 그러므로 전자를 관찰하기 위해서는 3㎝ 내에 발초의 수가 몇 개인지를 측정하였고, 후자의 경우에는 발끈과 발끈 사이의 길이를 측정하여 관찰하였다.
발의 형태는 시대와 지역에 따라 다르게 나타나는데, 중국의 경우에는 3세기 이전까지 천으로 만든 발을 사용하였다. 나무로 큰 사각 틀을 만들고, 대나무 끈으로 천과 사각틀을 꿰매어 연결하였다(그림 1 참조).
다음은 중앙관부에서 발급하는 문서로 吏曹․兵曹에서 발급하는 敎牒에 대해 살펴보았다. 고신교지 다음으로 건수가 많은 문서인 敎牒은 총 118건이다.
마지막으로 문서지 제조에 사용된 식물섬유의 종류를 살펴보았다. 『탁지준절』에서 구분한上品搗鍊紙, 下品搗鍊紙, 草注紙, 楮注紙를 사용한 각 문서지의 섬유를 관찰하였는데, 모두 같은 형태의 닥섬유인 것으로 나타났다.
우선 종이에 비치는 발형태를 발초수와 발끈폭으로 나누어 관찰하였다. 3㎝내의 발초수는 크게 10개 내외의 경우와 17개 내외의 경우로 나누어지는데, 17개 내외의 경우는 조선초기의 책지에서 보이는 발초수와 유사하였으나, 10개 내외의 경우는 그 사례가 드물었다.
이를 위해 본 분석에서는 닥나무, 삼지닥, 안피, 대나무, 볏짚으로 만든 종이샘플의 섬유를 채취해 C염색액으로 염색하여 이를 현미경으로 관찰하였다.33)
이상과 같이 본고에서는 현존하는 문서지를 발의 형태, 밀도, 섬유종류로 나누어 분석해 보았다. 본 연구는 『탁지준절』을 준거로 삼아 문서지의 종류와 사용 사례를 밝히고, 현존하는 문서지를 분석하였으나, 『탁지준절』의 내용과 일치하는 문서지가 본 연구를 충족시켜줄 만큼 다량으로 남아있지 않아 연구가 다소 제한적일 수 밖에 없었다.
이제 이러한 점을 염두에 두고 홍패, 백패, 유서, 유지, 추증교지의 문서지를 통해 『度支準折』에서 이들 문서에 사용되었던 종이 종류인 상품도련지, 하품도련지, 초주지, 저주지의 섬유가 어떻게 다른지를 살펴보았다.
대상 데이터
『탁지준절』에 제시된 문서종류는 수십 종에 이르는데, 본 연구의 분석대상 1,504건 가운데 이에 해당하는 문서는 紅牌, 白牌, 諭書, 有旨, 敎書, 官敎, 追贈敎旨 등 7종류이다. 이를 『탁지준절』에 제시된 종이의 명칭에 따라 분류하면, 紅牌와 追贈敎旨는 上品搗鍊紙에 해당하고, 白牌는 下品搗鍊紙에 해당하고, 敎書와 諭書는 草注紙에 해당하고, 有旨와 官敎는 楮注紙에 해당한다.
경기도, 경상도, 전라도, 충청도에서 세거하였던 문중을 선정하여 이들이 소장하고 있는 고문서 1,504건을 분석대상으로 삼았고, 각각의 文書紙는 발의 형태, 밀도, 섬유종류를 조사하였다. 지역에 따른 특징은 나타나지 않았고, 문서종류와 시기에 따라 두드러진 특징을 볼 수 있었다.
3) 네 문중에서 소장하고 있는 고문서의 총 건수는 반남박씨 384건, 경주손씨 957건, 삭령최씨 1,184건, 함양박씨 1,886건이다. 그 중 고문서의 종류나 형태에 있어 분석대상의 조건에 부적합한 일부 문서는 제외하여,4) 최종적으로 본 연구의 분석대상에 포함된 문서는 모두 1,504건이다.5)
앞서 언급하였듯이 『탁지준절』에 제시된 문서지의 명칭은 크게 상품도련지, 하품도련지, 초주지, 저주지로 구분된다. 따라서 본 연구의 문서지 분석은 『탁지준절』에 제시된 문서지의 명칭을 기준으로 하여 각각의 문서종류에 따라 유서, 교서, 추증교지, 홍패, 백패, 유지, 고신교지, 교첩을 그 분석대상으로 하였다. 이들을 도련한 정도를 나타내는 밀도, 종이의 두께, 섬유의 종류 등으로 나누어 분석한 결과 섬유의 종류는 모두 닥으로 나타난 반면, 밀도는 문서지의 명칭에 따라 다르게 나타났다.
이처럼 섬유를 한겹으로 걸러내어 종이를 뜨는 도구를 ‘발’이라 한다. 발의 형태는 시대와 지역에 따라 다르게 나타나는데, 중국의 경우에는 3세기 이전까지 천으로 만든 발을 사용하였다. 나무로 큰 사각 틀을 만들고, 대나무 끈으로 천과 사각틀을 꿰매어 연결하였다(그림 1 참조).
본 연구는 각 문중에서 소장하고 있는 문서지를 분석대상으로 삼았다. 분석대상으로 삼은 문중은 서울 · 경기지역에서는 議政府 潘南朴氏 西溪宗宅, 경상지역에서는 慶州(良洞) 慶州孫氏 書百堂宗宅, 충청지역에서는 扶餘咸陽朴氏 九堂宗宅, 전라지역에서는 求禮朔寧崔氏 大宗家이다.
본 연구는 각 문중에서 소장하고 있는 문서지를 분석대상으로 삼았다. 분석대상으로 삼은 문중은 서울 · 경기지역에서는 議政府 潘南朴氏 西溪宗宅, 경상지역에서는 慶州(良洞) 慶州孫氏 書百堂宗宅, 충청지역에서는 扶餘咸陽朴氏 九堂宗宅, 전라지역에서는 求禮朔寧崔氏 大宗家이다.3) 네 문중에서 소장하고 있는 고문서의 총 건수는 반남박씨 384건, 경주손씨 957건, 삭령최씨 1,184건, 함양박씨 1,886건이다.
지방관부에서 발급하는 문서 중 傳令과 關에 쓰인 종이는 중앙에서 발급하는 文書紙와는 성격이 달랐다. 즉 두께가 얇고 찢어지기 쉬운 下品의 종이를 사용하였다. 분석결과 전령과 관에 쓰인 종이는 0.
성능/효과
1.5㎝이하의 발끈폭은 1800년 이전에는 드문 현상이고, 1800년 이후에 나타나는데, 특히 1820년대 이후의 고문서에서 쉽게 관찰할 수 있다. 좁은 발끈폭 현상도 발끈이 이중으로 나타나는 현상과 마찬가지로, 종이를 2번 겹침으로 인해 일어날 가능성이 있다.
분석대상으로 삼은 문중은 서울 · 경기지역에서는 議政府 潘南朴氏 西溪宗宅, 경상지역에서는 慶州(良洞) 慶州孫氏 書百堂宗宅, 충청지역에서는 扶餘咸陽朴氏 九堂宗宅, 전라지역에서는 求禮朔寧崔氏 大宗家이다.3) 네 문중에서 소장하고 있는 고문서의 총 건수는 반남박씨 384건, 경주손씨 957건, 삭령최씨 1,184건, 함양박씨 1,886건이다. 그 중 고문서의 종류나 형태에 있어 분석대상의 조건에 부적합한 일부 문서는 제외하여,4) 최종적으로 본 연구의 분석대상에 포함된 문서는 모두 1,504건이다.
『탁지준절』에 기록된 절가에 따라 문서지의 품등을 매기자면 상품도련지와 하품도련지가 초주지보다 상품이지만, 밀도에 있어서는 오히려 초주지가 다소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이는 紙種과 紙品이 도련과정을 포함한 여타의 가공방법에 의해 결정되어졌던 것임을 보여주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문서지 제조에 사용된 식물섬유의 종류를 살펴보았다. 『탁지준절』에서 구분한上品搗鍊紙, 下品搗鍊紙, 草注紙, 楮注紙를 사용한 각 문서지의 섬유를 관찰하였는데, 모두 같은 형태의 닥섬유인 것으로 나타났다. 이는 문서지 제조에 사용된 종이가 식물섬유의 차이에 의해서 구분되었던 것이 아니라, 제작․가공방법 등의 차이로 구분되었음을 알려주는 것이다.
草注紙와 楮注紙를 사용한 문서의 섬유형태도 닥의 일반적인 특징을 보이며, 색상 역시 옅은 보랏빛과 짙은 적갈색을 띠어 닥섬유의 색상이 동일하게 나타났다. 이처럼 각종의 문서에 사용된 종이가 동일한 섬유형태를 보였다는 것은 초주지, 저주지, 상품도련지, 하품도련지가 그 종이제조에 사용된 식물섬유의 차이에 의해 구분되었던 것이 아님을 의미한다.
관찰 결과, 5종류의 문서는 모두 동일한 섬유형태를 갖는 것으로 나타났다(표4 참조). 볏짚이나 대나무는 섬유의 길이가 짧거나 보푸라기가 뭉쳐진 듯한 섬유형태를 보이고, 삼지닥이나 안피의 경우에는 섬유의 조직이 닥에 비해 가느다란 특징이 있는데, 여기에서 관찰한 5종 문서의 섬유형태에서는 이러한 특징이 전혀 드러나지 않는다.
교서․유서 등에 사용된 초주지(0.666~0.696g/㎤)와 추증교지 · 홍패 등에 사용된 상품도련지(0.613~0.635g/㎤)는 모두 0.6g/㎤ 이상의 평균밀도를 보여 매우 높은 도련정도를 나타냈고, 백패에 사용된 하품도련지는 0.5g/㎤ 이상의 평균밀도를 보였다. 유지(0.
다음 차트에서 보는 바와 같이 16세기에 비해 18 · 19세기에 발초수가 증가하는 현상이 있는데, 특히 1800년대부터 3cm내의 발초수가 대부분 17개 내외로 나타나며 20개 이상의 발초수도 보이고 있다.
닥나무 섬유는 C염색액에 의해 밝은 적자색 또는 짙은 적갈색으로 나타나고, 섬유의 가장자리에 또는 섬유에서 분리된 곳에 독립적으로 푸른색의 얇은 막이 관찰되었다. 삼지닥과 안피의 섬유는 밝은 올리브색 또는 푸른 회색빛을 띠었으며, 볏짚과 대나무의 섬유는 탁한 적보라색 또는 청회색으로 나타났다.
반면 지방관부에서 발급하는 準戶口와 개인이 자신의 戶 구성을 기록하여 관에 제출하는 戶口單子는 밀도가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또한 사문서 중 所志類의 上書와 分財記에 쓰인 종이는 중앙에서 사용하는 종이에 뒤지지 않는 품질이었던 것에 반해 賣買明文의 경우는 대부분 낮은 밀도로 나타남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 연구에 의하면 뽕나무, 면, 모시, 벼, 대나무, 대마, 인초, 안피 등 다양한 식물섬유가 책지에 사용된 것으로 소개되었다. 또한 조선초기 책지에 쓰인 108종의 섬유를 분석한 결과 닥나무만을 사용한 종이는 거의 없고, 다른 원료와 혼합된 것으로 조사되었다. 다른 원료와 혼합된 경우에도 닥의 비율이 상당히 낮은 편으로 나타났는데, 책지는 비교적 낮은 품질의 종이로도 제작이 가능하였기 때문인 것으로 보았다.
즉 문서지의 발초수와 발끈폭이 책지에 비해 더 넓은 범위로 나타났다. 또한 책지와 달리 시기적으로 구분되는 경향은 없었고, 후기로 갈수록 발초는 촘촘해지고 발끈폭은 넓어지는 경향을 보였다. 섬유종류 역시 책지에는 다양한 혼합섬유가 사용된 반면 문서지에는 닥나무 이외의 섬유는 관찰되지 않았다.
즉 두께가 얇고 찢어지기 쉬운 下品의 종이를 사용하였다. 분석결과 전령과 관에 쓰인 종이는 0.2~0.3g/㎤의 낮은 밀도를 보였다. 지방관부에서 종이를 어떻게 공급받았는지 알 수 없으나, 成宗21年(1490) 당시에는 소송의 판결에 대한 수수료를 종이로 받았는데, 이때의 종이는 관아의 업무에 사용되었다고 한다.
닥나무 섬유는 C염색액에 의해 밝은 적자색 또는 짙은 적갈색으로 나타나고, 섬유의 가장자리에 또는 섬유에서 분리된 곳에 독립적으로 푸른색의 얇은 막이 관찰되었다. 삼지닥과 안피의 섬유는 밝은 올리브색 또는 푸른 회색빛을 띠었으며, 볏짚과 대나무의 섬유는 탁한 적보라색 또는 청회색으로 나타났다. 볏짚과 대나무의 경우에는 그 섬유의 염색된 색깔이 비슷하지만 형태가 판이하게 다르기 때문에 구분이 용이한 반면, 삼지닥과 안피의 경우는 색상뿐만 아니라 형태까지 유사하여 그 구분이 명확하지 않다.
따라서 본 연구의 문서지 분석은 『탁지준절』에 제시된 문서지의 명칭을 기준으로 하여 각각의 문서종류에 따라 유서, 교서, 추증교지, 홍패, 백패, 유지, 고신교지, 교첩을 그 분석대상으로 하였다. 이들을 도련한 정도를 나타내는 밀도, 종이의 두께, 섬유의 종류 등으로 나누어 분석한 결과 섬유의 종류는 모두 닥으로 나타난 반면, 밀도는 문서지의 명칭에 따라 다르게 나타났다.
천으로 만든 발로 종이를 뜰 경우에는 종이에 발의 형태가 드러나지 않고, 대나무로 만든 발로 종이를 뜨면 종이에 얇은 대나무발의 자국이 선명하게 보인다(그림 4 참조). 종이의 제작과정이 간편하고, 다량의 종이를 만들 수 있다는 장점으로, 3-4세기 사이에 천으로 만든 발에서 대나무로 만든 발로 변화하였고, 그 시기 이후에 제조된 종이에는 대나무발의 자국이 나타났다.
질의응답
핵심어
질문
논문에서 추출한 답변
종이 분석에 대한 선행연구로 무엇이 있는가?
종이 분석에 관한 선행연구로 국내의 경우에는 정선영과 박상진의 연구가 있으며, 국외의 경우에는 일본의 赤尾榮慶의 연구가 있다.1) 이들 선행연구는 중국의 5~10세기 사경과 고려 · 조선시대의 冊紙를 文書紙와 비교할 수있는 토대를 마련해 주었다는 점에서 그 의의를 찾을 수 있다.
본 고에서 분석 대상으로 삼은 문서지를 소장하고 있는 문중으로는 무엇이 있는가?
본 연구는 각 문중에서 소장하고 있는 문서지를 분석대상으로 삼았다. 분석대상으로 삼은 문중은 서울 · 경기지역에서는 議政府 潘南朴氏 西溪宗宅, 경상지역에서는 慶州(良洞) 慶州孫氏 書百堂宗宅, 충청지역에서는 扶餘咸陽朴氏 九堂宗宅, 전라지역에서는 求禮朔寧崔氏 大宗家이다.3) 네 문중에서 소장하고 있는 고문서의 총 건수는 반남박씨 384건, 경주손씨 957건, 삭령최씨 1,184건, 함양박씨 1,886건이다.
현존하는 유물을 통해 확인할 수 있는 과거 기록에 사용된 종이 특징은 무엇인가?
조선시대에 있어 종이는 문서의 형식을 갖추는 주요소 중 하나였다. 과거의 기록을 보면 문서작성의 목적에 따라 종이의 종류를 달리 하였고, 종이의 크기 역시 문서의 다양한 목적에 따라 구분하여 사용하였음을 현존하는 유물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이는 과거의 문서를 연구하는 우리에게 중요한 시사점을 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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