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린쿼터제는 한국영화계의 가장 중요한 쟁점 중의 하나다. 이 제도가 한국의 영화산업의 보호와 성장에 크게 유용하다는 주장과 오히려 과도한 제도적 보호가 자생력을 약화시키는 요인이 된다는 주장이 대립하고 있기 때문이다. 2006년 7월 1일부터 연간 73일 수준으로 축소되었는데, 이전에 비해 절반으로 줄어든 것이다. 역사적으로 한국에서 스크린쿼터제는 두 번의 시행과정을 겪었다. 첫 번째는 일본이 한국을 식민통치하고 있던 1935년부터 1945년의 해방까지의 기간 동안에 시행된 것이며 또 한 번은 1967년부터 시작해 현재까지 이르는 기간이다. 전자는 식민지 기간 동안 영화를 정치선전 수단으로 활용하려던 일본인들이 외국영화 특히 미국영화의 수입을 제한하기 위한 조치로 시행되었다. 1935년에는 외국영화의 상영비율이 전체 영화의 4분의 3 수준을 넘지 못하도록 제한했으며 1936년에는 3분의 2, 1937년에는 절반을 넘지 못하도록 점진적으로 제한 비율을 확대했다. 일본이 미국 진주만을 공격한 이후 태평양전쟁이 일어난 이후에는 미국영화의 수입을 전면적으로 금지했다. 외국영화의 상영을 제한했던 이유는 일본영화와 한국영화를 모두 포함하는 국산영화의 상영을 강제적으로 늘리기 위해서였다. 전쟁수행을 위한 정치적 선전 수단으로 활용하려고 한 것이다. 후자는 한국영화의 산업적 성장을 유도하기 위한 목적으로 시도되었다. 그러나 제도의 시행에도 불구하고 한국영화의 경쟁력은 개선되지 않았으며 극심한 불황에 시달렸다. 정책의 보호로 시장을 독과점한 한국의 영화사들은 관객이 원하는 영화를 개발하는 대신 외국영화의 수입을 통해 이익을 극대화하는데 만족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영화사 설립은 엄격하게 제한되었으며 외국영화 수입도 마찬가지였다. 영화사는 경쟁자가 없는 상태에서 특별한 보호를 받는 것에 만족하고 있었다. 관객들은 그런 한국영화를 외면했으며 외국영화를 딘 좋아했다. 게다가 스크린 쿼터제는 극장측에 일방적인 의무를 부과함으로서 제작과 유통을 적대적인 관계로 대립하게 만들었다. 경쟁력이 미약한 한국영화를 의무적으로 상영해야 하는 극장측은 정부의 정책에 지속적으로 반발했다. 스크린 쿼터제는 영화제작자, 극장 운영자, 관객 어느 누구도 만족시켜주지 못했다. 과도한 보호가 오히려 한국영화의 경쟁력을 약화시킨 것이다.
스크린쿼터제는 한국영화계의 가장 중요한 쟁점 중의 하나다. 이 제도가 한국의 영화산업의 보호와 성장에 크게 유용하다는 주장과 오히려 과도한 제도적 보호가 자생력을 약화시키는 요인이 된다는 주장이 대립하고 있기 때문이다. 2006년 7월 1일부터 연간 73일 수준으로 축소되었는데, 이전에 비해 절반으로 줄어든 것이다. 역사적으로 한국에서 스크린쿼터제는 두 번의 시행과정을 겪었다. 첫 번째는 일본이 한국을 식민통치하고 있던 1935년부터 1945년의 해방까지의 기간 동안에 시행된 것이며 또 한 번은 1967년부터 시작해 현재까지 이르는 기간이다. 전자는 식민지 기간 동안 영화를 정치선전 수단으로 활용하려던 일본인들이 외국영화 특히 미국영화의 수입을 제한하기 위한 조치로 시행되었다. 1935년에는 외국영화의 상영비율이 전체 영화의 4분의 3 수준을 넘지 못하도록 제한했으며 1936년에는 3분의 2, 1937년에는 절반을 넘지 못하도록 점진적으로 제한 비율을 확대했다. 일본이 미국 진주만을 공격한 이후 태평양전쟁이 일어난 이후에는 미국영화의 수입을 전면적으로 금지했다. 외국영화의 상영을 제한했던 이유는 일본영화와 한국영화를 모두 포함하는 국산영화의 상영을 강제적으로 늘리기 위해서였다. 전쟁수행을 위한 정치적 선전 수단으로 활용하려고 한 것이다. 후자는 한국영화의 산업적 성장을 유도하기 위한 목적으로 시도되었다. 그러나 제도의 시행에도 불구하고 한국영화의 경쟁력은 개선되지 않았으며 극심한 불황에 시달렸다. 정책의 보호로 시장을 독과점한 한국의 영화사들은 관객이 원하는 영화를 개발하는 대신 외국영화의 수입을 통해 이익을 극대화하는데 만족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영화사 설립은 엄격하게 제한되었으며 외국영화 수입도 마찬가지였다. 영화사는 경쟁자가 없는 상태에서 특별한 보호를 받는 것에 만족하고 있었다. 관객들은 그런 한국영화를 외면했으며 외국영화를 딘 좋아했다. 게다가 스크린 쿼터제는 극장측에 일방적인 의무를 부과함으로서 제작과 유통을 적대적인 관계로 대립하게 만들었다. 경쟁력이 미약한 한국영화를 의무적으로 상영해야 하는 극장측은 정부의 정책에 지속적으로 반발했다. 스크린 쿼터제는 영화제작자, 극장 운영자, 관객 어느 누구도 만족시켜주지 못했다. 과도한 보호가 오히려 한국영화의 경쟁력을 약화시킨 것이다.
The screen quota system is one of the most controversial issues in the Korean film industry. There are two different points of view regarding the system. Some say it is highly effective to protect and nurture Korean movies. However, others argue that it hurts the duality of the Korean movies. The nu...
The screen quota system is one of the most controversial issues in the Korean film industry. There are two different points of view regarding the system. Some say it is highly effective to protect and nurture Korean movies. However, others argue that it hurts the duality of the Korean movies. The number of days, for which Korean movies have to play on local screens, has been reduced to 73, starting on July 1st, 2006. Actually, it is 50 percent fewer than the previous year. In facL Korea has implemented the screen quota. system two times. First, it was practiced from 1935 to 1945, during the Japanese colonial period. This was to regulate imported movies, especially American ones, as the Japanese government was to use movies for the political propaganda. In 1935, the number of foreign movies screened had to be less than three fourths of the total. And they gradually reduced the size by two thirds in 1936, and again by half in 1937. After the attack on Pearl Harbor when the Pacific War happened, Japan completely banned importing American movies in Korea. The reason why it regulated the imported foreign films is to increase the number of domestic movies, both Japanese and Korean. It was for making propaganda films fur carrying the war. The second practice of the screen quota is from 1967 to the present year. It was designed to boom the Korean film industry. However, the competitive power of Korean films has not been improved in spite of the practice of the system. Moreover, the film industry has gone through the depression. Korean film agencies have occupied the Korean film market thanks to the protection by government. The founding of the film agencies has been strongly regulated. So has importing foreign movies. Under the special protection like this, Korean film agencies have been enjoying the monopoly In the mean time, they have pursued income not by making quality movies but by importing foreign movies. As a result, cinema audiences turn away form Korean films and prefer foreign movies. Furthermore, the screen quota system hurts the relationship between film producers and distributors, imposing the duties only on theaters. In short, the screen quota system has satisfied neither film producers, theater runners, nor film goers. In other words. the excessive protection has weakened the competitive power of Korean film industry.
The screen quota system is one of the most controversial issues in the Korean film industry. There are two different points of view regarding the system. Some say it is highly effective to protect and nurture Korean movies. However, others argue that it hurts the duality of the Korean movies. The number of days, for which Korean movies have to play on local screens, has been reduced to 73, starting on July 1st, 2006. Actually, it is 50 percent fewer than the previous year. In facL Korea has implemented the screen quota. system two times. First, it was practiced from 1935 to 1945, during the Japanese colonial period. This was to regulate imported movies, especially American ones, as the Japanese government was to use movies for the political propaganda. In 1935, the number of foreign movies screened had to be less than three fourths of the total. And they gradually reduced the size by two thirds in 1936, and again by half in 1937. After the attack on Pearl Harbor when the Pacific War happened, Japan completely banned importing American movies in Korea. The reason why it regulated the imported foreign films is to increase the number of domestic movies, both Japanese and Korean. It was for making propaganda films fur carrying the war. The second practice of the screen quota is from 1967 to the present year. It was designed to boom the Korean film industry. However, the competitive power of Korean films has not been improved in spite of the practice of the system. Moreover, the film industry has gone through the depression. Korean film agencies have occupied the Korean film market thanks to the protection by government. The founding of the film agencies has been strongly regulated. So has importing foreign movies. Under the special protection like this, Korean film agencies have been enjoying the monopoly In the mean time, they have pursued income not by making quality movies but by importing foreign movies. As a result, cinema audiences turn away form Korean films and prefer foreign movies. Furthermore, the screen quota system hurts the relationship between film producers and distributors, imposing the duties only on theaters. In short, the screen quota system has satisfied neither film producers, theater runners, nor film goers. In other words. the excessive protection has weakened the competitive power of Korean film indust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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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 정의
2006년 8월 중에 <괴물>은 한국영화 사상 네 번째로 천만 명 관객 기록을 수립했을 뿐 아니라 지금까지 영화 흥행기록을 갈아 치우며 신기록을 세웠다. 본 논문에서는 스크린 쿼터제의 등장과 변천, 제도로서의 효율 등에 관해서 살펴보고자 한다.
일본은 한국을 식민지배하면서 적극적인 선전정책을 펴나갔다. 영화를 국민계몽과 선전, 선동의 수단으로 활용하고자 한 것이다.[12] 조선총독부는 영화를 통제하기 위한 수단으로 '흥행 및 흥행장취체규칙'(1922), '활동사진필름검열규칙 '(1926),'활동사진 영화취체규칙 '(1934), '조선영화령'(1941) 등을 차례로 공포하며 강도를 높여 나갔다.
정부가 영화에 대해서 정책적 지원을 시작한 것은 1954년 3월 31일자로, 입장세법'을 개정하여 국산영화에 한하여 입장세 90%를 면세하는 조치를 취하면서부터다. 영화를 상영하는 모든 극장의 입장료에 대하여 일괄적으로 적용하던 입장세를 한국영화에 대하여 면세하도록 하는 특혜조치를 시행한 것이다. 뒤이어 1958년 에는 문교부 고시제 53호로 '국산영화제작 장려 및 영화오락 순화를 위한 보상 특혜조치'를 발표했다.
시대인 1935년부터였다. 한국영화에 대한 통제와 규제 그리고 선전을 위한 수단으로 활용하기 위한 목적이었다. 일본은 한국을 식민지배하면서 적극적인 선전정책을 펴나갔다.
제안 방법
1945년 8월, 연합군에게 무조건 항복하기까지 계속된 전쟁 상황은 일본 국내는 물론 식민지 한국에도 심각한 영향을 미쳤다. 전쟁 물자와 인력을 조달하기 위해 필사적인 노력을 기울이는 한편, 신문, 방송, 잡지 등 여론 매체들을 총동원하여 여론 조작을 시도했다. 그 중에서도 영화는 중요한 매체였다.
대상 데이터
이때 상영한 영화들은 5분 내외의 짧은 실사 작품들로, 외국의 도시 풍경을 담은 여러 편을 차례로 상영했다. 관람료는 10전을 받았는데, 영화 상영은 선풍적인 인기를 모았다. 이를 계기로 한국 내에서 영화는 새로운 사업으로 주목받았고, 극장의 설립도 이어졌다.
[9] 국내 제작 현실에 비추어 과도하게 난립한 영화사를 정비함으로써 부실한 업체는 도태시키고 기업규모를 갖춘 소수 회사를 중심으로 영화제작을 이끌어가고자 하는 의도였다. 이에 따라 당시 65개사에 이르던 영화사는 16개사로 통합되었다. [10] 그러나 외형적 통합에도 불구하고 영화사의 부실은 개선되지 않았고 건전한 기업화나 체계적 유통구조확보도 미약했다.
성능/효과
(2) 정부는 영화제작자 또는 국산영화의 수출자에 대하여 대통령령이 정하는 바에 의하여 보조할 수 있다. (3) 영화를 상영하는 공연장의 경영자는 대통령령이 정하는 외국영화와의 상영비율에 따라 국산영화를 상영하여야 한다. (4) 외국영화의 수입편수는 당해 연도의 국산영화의 상영 편수의 3분의 1을 초과할 수 없다는 등의 4개항을 조치하도록 했는데 이때 한국영화의 의무상영제를 제도적으로 명시하게 되었으며 외국영화의 수입도 적극적으로 제한할 수 있는 근거를 마련했다.
(3) 영화를 상영하는 공연장의 경영자는 대통령령이 정하는 외국영화와의 상영비율에 따라 국산영화를 상영하여야 한다. (4) 외국영화의 수입편수는 당해 연도의 국산영화의 상영 편수의 3분의 1을 초과할 수 없다는 등의 4개항을 조치하도록 했는데 이때 한국영화의 의무상영제를 제도적으로 명시하게 되었으며 외국영화의 수입도 적극적으로 제한할 수 있는 근거를 마련했다.
한국에 영화가 전래된 것은 1899년 미국인 여행가 엘리어스 버튼 홈스(Elias Burton Holmes, 1870-1958)가 고종황제를 비롯한 대한제국 황실 인사들을 상대로 상영한 것이 계기가 되었다.[3] 당시 상영은 극히 제한된 인물을 대상으로 한 특별상영의 성격을 띠었으며, 지정된 상영시간이나 입장료도 없었다. 영화라는 근대문물이 처음 국내에 소개되는 행사였다.
영화가 대중에게 미치는 영향이 크다고 본 일제 당국은 1907년부터 '보안법'을 적용해서 극장 안에서의 소란행위, 풍기를 해치는 행위 등을 단속했다.[5] 영화의 내용에 대한 규제보다는 주로 치안, 풍속과 관련된 사항에 대해서 단속하는 수준이었다. 이어 1926년에 이르러서는 '활동사진 필름 검열규칙'을 공포했는데, 영화에 대한 검열의 근거를 마련한 첫번 째 법령이었다.
제도 운영의 주체라고 할 수 있는 정부는 제작에 필요한 재원을 조성하거나 제작과 배급, 유통구조를 연계하는 제도적 개선은 뒤따르지 못했고 스크린 쿼터제를 지켜야 하는 극장 측에 대해서는 아무런 보상이나 지원을 하지 않았다. 결과적으로 한국영화는 외국영화 수입을 위한 들러리 역할을 하는 셈이었고, 스크린 쿼터제는 한국 영화의 제작기반을 개선하기보다는 정책적 불균형을 심화시키는 측면을 더 크게 드러냈다. 최근 한국 영화시장이 성장한 배경에는 제작 능력의 향상 뿐 아니라 고급시설을 갖춘 복합상영관의 등장이 중요한 요소로 작용했다는 것을 빼놓을 수 없다 최근에는 디지털 방식의 제작과 배급이 등장하면서 극장 상영은 물론 TV 동시 상영이나 모바일을 이용한 개봉이 이루어지는 등 기존의 상영방식과는 다른 형태가 등장하고 있다.
없다. 결과적으로 한국영화의 내부적 다양성을 보호할 수 없으며, 대규모 자본과 배급력, 유통력을 갖춘 영화가 혜택을 독점하는 현상을 막을 수 없다. 흥행성이 높은 영화가 스크린을 주도적으로 점유하는 현상은 갈수록 심화되고 있다.
컸다. 영화계가 등록 제작사 중심으로 재편된 데다 국산영화 제작과 외국영화 수입의 일원화, 의무제작으로 인한 제작 편수의 급속한 증가, 외국영화 수입쿼터 배정에 따른 영화수입의 이권화와 국산영화 제작의 졸속화, 대명제작으로 인한 명의대여와 지방배급업자의 자금유입 등 긍정적 현상과 부정적 현상이 동시에 나타났다.
이 같은 상황에서 맞게 된 시장개방은 일시적으로는 한국 영화의 존립을 위협할 정도로 충격을 주었지만, 관객의 관심과 취향을 고려한 기획, 제작기술의 향상 등을 통해 새로운 경쟁력을 확산해 나감으로써 이전의 한국 영화와 구분되는 새로운 모습을 보일 수 있었다. 한국 영화의 시장 경쟁력이 확산될수록 영화제작에 대한 투자 확대, 고급인력의 유입, 유통구조의 변화 등이 복합적으로 나타나기 시작했고 이것이 한국영화의 자생력과 산업적 기반을 다지는 단계로 연결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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