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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시기 중국공산당의 문서당안관리
Chinese Communist Party's Management of Records & Archives during the Chinese Revolution Period 원문보기

기록학연구 = The Korean Journal of Archival Studies, no.22, 2009년, pp.157 - 199  

이원규 (연세대학교 기록보존소 아키비스트)

초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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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공산당의 창당과 함께 문서와 당안 관리 조직이 출현한 것은 아니었다. 1926년 중앙 비서처가 설립된 이후 문서과와 그 소속 문건열람처, 문건보관처 등이 설립됨으로써 본격화되었던 것이다. 1930년대 초 비서조직의 업무개선이 집중적으로 논의되었는데, 비판의 핵심은 정치적 역할을 자각하지 못한 채 단순히 "기능적 조직"으로 전락하고 말았다는 것이었고, 이의 해결 방안은 곧 "비서처 업무의 정치화"였다. 나아가 1940년대에는 "정풍운동"의 영향으로 문서만이 아니라 각종 주요 정보자료를 수집하여 정리, 제공하는 재료과의 임무가 강조되었다. 한편, 문서의 작성에 있어서 인물이나 기관의 명칭을 다르게 표기한다든가 약물을 사용하여 문서를 작성하는 등 보안의 유지가 줄곧 강조되었으며, 또한 업무활동과 지역의 상황에 대한 정기보고를 통해 중앙과 지방간의 소통이 강조되었다. 비서장은 중요 공문의 초안을 작성하는 것은 물론, 모든 문건의 열람과 심사를 담당하여 문서처리의 중심적 역할을 수행하였다. 문서의 처리가 끝나면 당안이라고 불리우며 보관되었는데, 중앙 비서처 문서과의 "문건보관처"가 이러한 역할을 담당하였다. "중앙문고"라고 불리기도 한 문건보관처는 1930년대 초부터 더 이상 당안을 이관받을 수 없었지만, 1940년대에는 재료과가 문서와 간행재료를 보존하고 제공하는 역할을 강화해갔다. 특히 조사연구를 위한 재료의 수집이 실행되었고, 일본의 통치 아래에 있던 지역을 회복하면서 대량의 당안과 문헌 자료를 수집하기도 하였다. 1931년 당안의 분류방법과 목록작성방법이 규정된 이후 특히 1940년대에 본격적으로 제도화되었는데, 기본적으로는 주제분류법이 유지되었고 기초적인 목록표기법이 채택되었다. "중요성"과 "기밀성"을 관리의 기준으로 삼는 원칙은 비교적 초기부터 나타났지만, 문서의 보존과 폐기를 구분하는 평가의 개념이나 절차는 명확치 않았다. 비밀의 보안관리와 접근제한의 제도를 실행하는 한편, "보존과 이용의 통일"이라는 구호에서도 알 수 있듯이 당안재료의 이용제공에 대한 문제의식은 매우 강렬하였다. 혁명운동과 전쟁의 와중에서도 중국공산당은 문서당안의 관리와 보존을 강화해가는 노력을 지속했다. 그 성과가 항상 바람직한 것도 아니었고, 그 경험을 안정적으로 발전시켜갈 수 있었던 것도 아니었다. 그것은 필경 중국공산당이 처해 있던 역사적 여건에서는 불가피한 일이었을 것이다. 이 과정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난 특성은 단지 기능적인 수준에서 문서당안관리의 효율화를 추진했던 것이 아니라 것이 아니라, 오히려 중국공산당의 혁명운동에 미치는 정치적 의의에 대한 자각을 강화해가며, 혁명 정책 연구의 실증적 근거이자 또한 중국공산당 역사의 증거로서 당안재료가 갖는 가치에 주목하였던 것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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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organization for managing records and archives did not emerge together with the founding of the Chinese Communist Party. Such management became active with the establishment of the Department of Documents (文書科) and its affiliated offices overseeing reading and safekeeping of...

주제어

질의응답

핵심어 질문 논문에서 추출한 답변
1923년 제3차 전국대표대회가 중국 공산당 조직의 역사에 있어 의미가 큰 대회였던 이유는 무엇입니까? 1) 이 대회는 국공합작 방침이 본격적으로 토론되고 결정된 대회이기도 한 동시에, 중앙집행위원회와 중앙기구의 기본체제를 확정하였던 당 조직의 역사에 있어서 의의가 매우 큰 대회였다. 당의 최고지도기관인 중앙집행위원회가 위원장, 비서 및 회계 등 3인을 선출하는데, 그중 비서(秘書)는 당 내외의 문서 및 통신, 회의 기록 등의 책임을 지며 또한 당 문건의 관리를 책임지는 것으로 규정하였다. 특히 당의 모든 서신과 문건은 위원장과 비서의 서명(簽字)을 거쳐야 하며, 집행위원회의 모든 회의는 또한 위원장과 비서가 소집하는 것으로 규정함으로써, 위원장에 버금가는 막중한 권한과 책임을 전담하는 비서를 당 중앙에 설치하게 된 것이다.2)
2000년에 걸친 황제체제로부터 벗어나 공화제에 기반한 중화민국이 수립된 후에도 중국에서의 혁명운동이 끝나지 않은 이유는 무엇입니까? 주지하듯이 1911년 마침내 2000년에 걸친 황제체제로부터 벗어나 공화제에 기반한 중화민국이 수립된 후에도 중국에서의 혁명운동은 끝나지 않았다. 그 까닭은 아마도 이미 이룬 성취보다 한층 근본적인 변화와 더 많은 성과를 원하는 국민 대중의 각성에 비추어, 이러한 바람을 정치적으로나 제도적으로 수용할 수도 없었고 뿌리 뽑을 수도 없었던 당시 집권체제의 한계 때문이었다고 할 것이다. 이러한 혁명운동의 한 축을 담당한 것이 바로 1921년에 창당하여 1949년 마침내 중화인민공화국을 수립한 중국공산당이었다.
기술서기의 주요직책은 무엇입니까? 그러한 필요의 반영이 1924년 집행위원회에서 채택되어, 조직부와, 선전부, 공농부 등으로 구성하는 당 조직 모형을 중앙과 지방 모두에 적용하도록 요구하였던 것이다.1) 아울러 1925년 초 중앙과 각급 지방조직에 “기술서기(技術書記)”를 두도록 하였는데, 이들의 주요 직책은 비서의 업무를 도와 회의의 기록이나 문서의 처리, 당안의 보관 및 기타 일반적인 사무를 담당하는 것으로, 결국 문서관리의 실무적이고 기능적인 업무는 이들 기술서기가 담당하게 된 것이다.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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